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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축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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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통일신라 말기인 4세기 초부터 각지방의 실력자가 스스로를 성주,장군이라 칭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중앙집권적 통치질 서에 혼란을 야기시키면서,고려왕조의 실질적 성립 기반이 된 호족 세력으로 성장하므로 세력판도는 견훤의 후백제,궁예의 후고 구려,기존의 신라로 집약되고 마침내 918년 궁예의 뒤를 이은 왕조의 931년 신라를 흡수하고,936년 후백제를 제압하므로서 신 왕 조가 탄생되었다.
고려왕조의 성립은 천여년간의 번영을 자랑하던 경주 대신 개성을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로 바꾸었다. 또한 契丹,女眞(金),元 (蒙古),宋 등과의 대립,국내의 잦은 소요등의 혼탁한 풍수사상의 생활화가 건축의 조형에도 절대적으로 작용하였으며 외국의 영 향으로 새로운 건축 조형방식이 시도되었다.
이후 외세에 의한 고려의 국력 쇠퇴와 내정의 혼란,지나친 불교의존에서 오는 각종 부조리의 노정,토지제도의 실패 등은 새로운 왕조 탄생의 배경이 되었다.1392년 이성계가 고려의 고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인수받음으로써 탄생한 조선왕조는 유학을 정치,문 화,경제,사회의 기본 이념으로 표방하게 되므로 써 마침내 조선 왕조 건축의 배경은 불교문화 대신 明,聽의 강력한 영향력,유학 및 실학사상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렇듯 건축은 그 시대를 풍미하는 기본 이념,생활 방식의 변화,인접한 다른 나라의 영향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의 생활 모습을 재현하고자 할때는 고찰해 봐야 하는 중요한 유물인것이다.

2.본론

고려시대는 정치와 문화의 발전 과정에 따라 다음과 같이 3단계로 고찰해 볼 수 있다. 고려시대 때부터 시작하여 金과 대외적 평화 관계를 갖게 된 인종 4년까지의 190년 간을 초기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신라의 예술 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였고,불 교의 존숭과 아울러 주로 북송의 문화 영향과 일부 요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모든 제도및 문물에 많은 발전을 보았다. 이 시 기의 목조건축형식은 신라시대부터 사용되어 오던 것을 바탕으로 북송과 요의 건축 형식의 영향을 이입하여 형성된 주심포 제1형 식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며,대표적인 건축물 유례로는 安東 鳳停寺 極樂殿과 醴泉 開心寺五層石塔등이 있다. 실례로 안동 봉정 사 극락전의 주두와 소로의 형상은 굽바침이 없고,그 아래 부분이 곡면으로 되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수법을 계승하였고,첨차의 단 부하면은 韓國柱心包式에 공통되는 특징으로 되어있는 특이한 草核(S자형 곡선을 2개 결합하여 중괄호의 표식을 경사시킨것과 같 은 모양)을 하였으며,특히 첨차의 상부 단면이 수직면으로 되어 있어서 중국및 일본의 당시 유례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의 중기는 1126년에서부터 시작하여 원과 강화 관계를 맺은 고종45년까지의 130여년간으로 생각되며,이 시기에는 중국의 예 술 문화 활동의 중심이 남방으로 옮겨지게 됨에 따라 남방의 복건지방 건축 형식의 영향이 한국에 이입되어 주심포 제2형식이 사용되었으며,대표적인 유례로는 榮洲 浮石寺 無量壽殿,禮山修德寺 大雄殿과 南溪院址七層石塔 등을 들 수가 있다. 한국의 주심 포 제2형식은 보통2출목에서 끝나고 1출목에서는 도리 방향으로 첨차를 놓지 않는 것이 보통이며,첨처상의 소로 배치가 상하도일 선상에 오지 않는 것이 특색이고 특히 첨차 하단면은 S형을 2개 연결하며 중괄호표식을 기울여 놓은 모양으로 조각한 것이 주심 포형식의 공통된 특색이다.
고려후기는 1258년부터 이조의 역성혁명이 일어난 1393년까지의 130여년 간으로 원의 세력권 내에 포함되어,문화의 순수성이 저 하되고 국력이 날로 기울어져 문화도 점점 쇠퇴하고,예술 문화 활동의 원동력이었던 불교 자체가 타락 부패하여갔다.이 시기에는 원의 영향으로 대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다포식이 이입,융합되어 사용되었다.이 시기의 대표적인 건축 유물로는 簧洲心 源寺 普光殿과 敬天寺址10層石塔을 들수 있다. 이 다포식은 창방과 주상단에 평방을 얹어 놓고 그 위에 주상포작과 주간포작을 배치하는 것이며,특히 주두와 소로의 굽단면이 직선이 되고 굽받침이 없는 것이 큰 특징이라고 할수있다. 특히 이 형식에는 하앙 과 첨차가 동일재로 만들어지게 되며,이전에 가지고 있던 하앙의 구조적인 기능이 없어지게 발전시켜서 차차로 제공첨차의 수가 많아지며,매우 웅려한 외관을 형성하게 되었고,내부 천장은 보통 우물 천장을 만들어 주요 가구를 은폐하게 만들어져 있다.
고려의 불교는 당대를 통하여 가장 융성하였으며 가장 융성하였으며,고려 태조는 궁궐 조영과 때를 같이하여 도성내에 法王,慈 雲,汪輪,內帝釋舍那,天禪,新興,文殊,圓通,地藏의 10寺刹을 창건하였고,이와 같은 太祖의 숭불정신은 高麗王들에게 계승되어 외적 조복과 국가안태하고,개인의 명복과 전화위복을 위해 원찰의 건축이 성행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의 불교가 선종사사의 영향을 받 으므로 말미암아 문화와 예술이 객관적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주관적 심성을 고조하는 동기를 이루게 되었으며,이에 아울러 왕우 무상,병란의 빈기,귀족의 쟁패및 횡폭등의 사회적 불안은 국민 생활에 소극적이며 허무적인 경향을 초래하여 식재연명과 적멸위 락을 소원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의 예술은 명랑한 이상적인 순수성이 적어지고 정서에 치중하며 살고,형이상에 젖은 애조와 적조의기분을 다분히 나타내게 되었다. 불교와 더불어 고려시대 전기간의 문화와 사상을 지배하던 것은 풍수지리설로,수도인 개 성 역시 이에 따른 것이다. 도선선사가 만들었다는 풍수도참설은 당말기에 일행선사로 말미암아,도교의 음양오행사상이 결합된 것으로 지형과 지세가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으로 이 풍수도참설은 미신적인 추복기원의 요소를 제거한 다면 자연에 적응하고 그것에 귀화하려는 정신의 발로라고 생각할수있을것이다.
高麗의 王宮址인 滿月臺 역시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건축되었다고 볼수있다. 지금도 門址와 殿址들의 형적을 남기고 있으며,문헌 기록을 참고하여 당시 건축의 면모를 살펴볼수 있다. 이 왕궁은 상례적으로 평지에 건축된 궁궐과는 달리 산록 지형에 따라 高臺 에 위치하며 수개의 단지를 형성하여 건축되었으므로 매우 특이하며,高麗圖俓의 기록을 살펴보면 숭산에 의지하고 고림이 우거져 서 궁궐건축의 원경이 악사및 산사에 가까운 감이 있으며,담담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宮城 주위에는 13개의 門이 있으며,그 중 正東門인 光化門은 주요가로와 연결되어 있었고,건축의 규모제도는 외성정문인 宣義門 과 같았으나 옹성은 없고 장식은 더 화려하였다고 한다. 宮闕의 정문은 승평문이며,이어 두채의 문을 지나 정전인 회경전이 있다 . 희경전은 정전 정문인 희경문과 이 문에서 시작하는 희랑에 둘러싸인 중앙에 있고,5장이나 되는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다. 정 면 9칸,측면 5칸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희경전 북쪽에는 평전이나 침전 등이 여러 건물이 서로 높이를 달리하여 한줄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궁궐의 모습은 중국이나 우리 삼국에도 보지 못한 형태였으나, 이것은 궁궐이 위친한 터의 지형적 조건에서 나타난 형성인 것으로 보인다.
高麗初期에는 開城의 本闕인 滿月臺 외에 太祖 이래 長樂宮(萬壽臺下)이 있었으며,文宗35年에는 장락궁에는 동서 10여리 되는 곳 明堂之地에 좌궁과 우궁을 세우고 순어하였고 1115에는 서경에 龍(侮)宮을 만들었으며,高麗中期에 들어서서 仁宗 6년에는 大 花宮을 만들었다. 高麗後期初에는 江都에서 開京으로 환도하게되고,忠列王 3년 元에 공장을 조치하여 元의 궁궐건축형식을 본받 아서 壽寧宮을 짓고 本闕로 삼았다. 恭愍王 19年에는 수창궁구기에 다시 宮闕을 건축하였고,禑王7年 이 宮을 다시 조영하기 시작 하여 동10년 낙성을 보았으며 이곳은 후에 李太祖가 등극한 곳으로 高麗初期 잠시 궁궐과 사용되었다.
高麗時代의 공공건축은 神祠와 道觀,順天館,國子監 등이 있었다. 高麗初期부터 道敎는 군사에 관련된 信仰으로 국가적 보호를 받데 되었으며,忠宣王때에는 大淸觀을 문무관제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高麗時代에는 民間信仰에 의한 신사들도 많이 조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숭산묘,동신사,합굴용사,오룡묘 등이 기록에 남아 있다. 成宗 2년 때 宋으로부터 文宣王廟圖와 祭器圖 및 七十 二賢 贊記가 내헌하게 되어서 成宗11年에 國子監이 창시되고,그 안에 文武王廟를 만들었다. 順天館은 文宗이 별궁으로 지었던 대 명관을 동왕 32年에 순천관으로 개명한것으로 외국사신의 관사로 사용되었으며,규모가 장대하고 공제가 왕궁과 같았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주거건축은 남아 있지 않으나 문헌자료에 의하여 당시의 상황을 알수있다고 생각된다. 高麗圖經 卷三 民居條에는 왕 성은 비록 크나 산과 언덕으로 되어 있어서 평지가 적으므로 민가는 지형에 딸라 높고 낮은 모양이 봉방의 혈과 같고 모초로 집 을 이은 것이 많고,그 중의 열의 한둘 정도는 기와를 이은 부유한 집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론
당시 귀족과 부유층은 호사스러운 주거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며,高麗圖經 卷二十八에는 주택의 실내 상황에 대하여,침대 앞에는 의자를 놓고 삼면에는 루간이 있으며,비단요 위에다 자리를 깔아서 가구들의 묘양이 전혀 이풍을 느끼지 않고,서민들은 주로 흙 침대를 만들어 불구돌을 놓고 그 위에서 잠을잤다. 겨울철에는 매우 추우나 명주나 명주솜들은 매우 귀하다고 기록되어 있어,당시 귀족계급 속에서는 宋의 귀족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며,일반서민들은 온돌에서 기거하였음을 알수있 다. 고려시대에는 온돌의 난방 방식이 널리 일반적으로 보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근래 開城家室의 제도가 다른 지방과 다른점 이 엿보이며,內室(안방)은 삼간장실을 이루어서 정남을 향하여 배치하고,그 북벽에는 삼간통의 받침을 만들었던 것을 볼수있는데 , 이와같은 특징은 고려시대부터 유래된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고려시대에 많이 애호된 모정원지는 불교의 선사상과 도교의 무위자연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며,은일과 청적의 심취로 말미암은 소산이었다고 하겠다. 모정은 분향전닿며,참선하기 위한 선암방장에서 출발하여 물외에 한적하려는 황노의 청 의와 합일되었다. 당시의 모정원지의 조형 목적은 주로 신비성과 숭고성에 동취되어 합덕하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老子 및 莊子의 자연에 귀일 되려는 사상과 상통되는 점이 많았으며, 道.佛을 합일시킨 무위공관에 그 원리를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 각된다. 따라서 고려의 모정원지의 경영은 인간적 공기를 대자연 속에 녹여 버림으로써 자연에 회귀하여 자연과 동취되기 위한 환경을 만들려는 것에 주안목이 있었던 것으로 무위자연의 美,방일의 美,겸아의 美를 통하여 얻어진 아름다움이다.
 

3.【참고문헌】
▶ 윤장섭 「한국건축사 연구」 동명사 1983년
▶ 강해작 「건축개론」 기문당 1991년
▶ 윤장섭 「한국건축사론」 기문당 1990년
▶ 박언곤 「한국건축사 강론」 문연당 1988년
▶ 윤장섭 「건축사 연구」 태림문화사 1985년

  역사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