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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전기의 역사인식

고려전기의 역사인식을 서술함에 있어서 고려전기라 함은 고려 건국의 해인 918년에서 무신란이 일어나는 1170년까지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고려전기의 역사인식을 이해할 때 신라하대의 상황이 언급되어야한다, 이것은 고려의 건국이 신라하대의 정치사회적인 모순으로 발생했으며 또한 그 모순을 해결하는것은 고려왕조가 민중으로부터 새로운 왕조라는 정당성을 인정받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선결과제였다.

 

여기서는 신라가 멸망하게되는 원인 특히, 수치제도와 골품제에 대해서 새로운 왕조인 고려가 그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과 고려의 계승의식(신라계승의식, 고구려계승의식)과의 연관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신라하대의 모순과 그 해결방향

 

780년 신라하대가 시작되면서 신라는 안으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수치제도의 불합리성은 일단 백성들을 초적이나 해적 등으로 무리로 몰고 갔다. 이들의 동요는 고ㅎㄷ 신라사회의 기본구조틀을 흔들게 되었는데, 첫째는 재정의 곤란을 가졌왔고, 두번째는 이들을 포섭함으로써 지방호적의 대두를 이끌었다. 이러한 사태에 조정은 근본적 해결을 간고하지 못하고 무궤도한 수취로 일관했다. 이것은 몰락ㅎ란 농민을 더욱 몰락하게 만들었고 지방호족의 기반조차 위협하게 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원한을 갚는다는 궁예와 견훤의 말을 그대로 따랐던것이다. 그들이 이와 같이 경주 중앙귀족들의 고대적인 수취에 대해서는 싸웠던 것이나 자기들의 지방에서 갖고 있는, 아직도 전통적인 고대적 서역의 지배권과 수취권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신생 고려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도 바로 이것이어서 지방호족들의 기반과 국가와의 상관관계를 어떤 성격의 것으로 결정하느냐에 고심하게 되어 태조는 취민유도를 내세워 호족들의수취를 제한하는 면에서 국가기반의 확대에 힘썼고 그대신 새로 성립한 국가의 고나작을 호족들에게 약속한 것이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일어난 기본적인 정치 사회관계 변동의 하나로서 기본 족벌 골품제사회에서 보다 작은 대가족사회로의 전환이 일어난것이다.

 

기존 신라 사회는 골품제 사회였다. 아무리 능력이 있었도 골품안에서 존재했으며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경제 심지어 의복 식기를 구입하는데까지 엄격한 제한이 있었다. 이것은 하위 골품의 이탈을 초래하고 또한 최상위 골품인 진골마저 서로 지배권을 놓고 싸우게 되었다. 이는 신라가 진골의 사회 그 중에서 최소 집권층을 향한 사회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라 사회는 자기 자신을 점점 폐쇄적인 테두리로 가두게 되었고, 이에 지방에 대한 지배권은 점차 이완되어 갔다. 신생 고려국가는 이런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따라서 고려는 신라 골품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면에서 족벌적인 골품에서 보다 세분한 대가족 단위로 중앙귀족에서 지방호족 중심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태조의 호족과의 통혼정책, 기인제도, 사심관제도는 변환된 고려의 다른 대처라 하였다.

 

이러한 사회관의 기반은 지금까지 말한 고대 족벌의식의 지양이라는 것과 함께 취민유도를 표방하면서 고대 수취제도를 지양하려는 두개의 주축적인 사회운동에서 형성된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당시 주체세력들이 그러한 새로운 성격의 사회기반과 사회의식의 배경으로 함에서 비로서 나올수 있었던 역사적 활동능력을 갖춤에서 고구려의 구토를 회복하기 위한 북진정책을 표방하는 적극적인 자세까지 취하게 된것이 아닌가 한다.

 

고려의 계승의식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 성립한 국가는 그 모순을 보완하려는 방향으로서 전환뿐만아니라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로 하게된다. 이는 백성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 받을수 있게 하며 국가의 통일의식을 도모함으로써 새로운 지배자가 된 그들에게 안정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고려태조 왕건을 후삼국을 멸망시켜 936년 민족의 재통일과업을 성취하였다. 그런데 10세기초엽은 동북아시아의 전환기였으며 대내적인 조건뿐만아니라 대외적인 여건이 매우 착잡한 시기였다.태조의 통일 이념은 신라와 백제의 통합뿐만아니라 고구려국가의 회복에 있었다. 따라서 고려는 신라 경내에서 그 전통과 문화를 토대로 건국하였으나 신라사회의 계승으로 그치지 않고 고구려의 조술자로서 자처하였다.

 

태조는 민심에 잠재해 있던 삼국에 대한 역사인식을 건국과제에 크게 반영하면서 이를 건국이념으로 정립하였는데 이것이 곧 북진정책이었다. 고려는 역대 어는 왕조보다는 적그적으로 강력하게 북진정책을 실현하였다. 이와같은 사실은 태조가 즉위하여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구지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가 하였다.”라 한것으로 알수 있다.

 

고려초기에 북진정책이 강력히 추진될 수 있었던것은 건국주체세력의 출신성분을 음미하면 분명하여진다. 고려건국의 주체세력은 주로 고구려 영역내의 지방호족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호족세력은 고구려의 후계자 또는 계승자로서의 자부심으로 고구려의 부흥을 위한 북진정책을 표방하였던것이다. 그 후 호족은 초기 권력구조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왕권을 압도하는 세력으로 군림하였다. 다시 말해 고려는 삼국중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왕조로 자각하는 역사인식이 성립되었으며 이것은 기저에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손심이강하게 작용하여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광종시에 왕을 황제로 칭하고 개경을 황도로 칭한 것과 북방민족과의 투쟁에서 고구려 계승의식과 자주성과의 연결을 통해 잘 알수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신라계승의 역사인식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살필수있다. 그것은 고려가 통일신라의 장구한 반도지배를 계승한 왕조로 교체되었지만 신라에의 강한 집착은 신라적인 것으로부터 탈피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우선 고려를 신라왕실과 직결시킨점이(호경라 부른 사람이 있었는데 스스로 성곡장군이라하였다.)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태조는 신라의 제도를 많이 수용 참작하였는데 “고려태조는 개국초에 신라와 태봉의 제도를 참용하여 관을 설하고 직을 나누어 서무를 맡게 하였다.”는 점에서 잘 알수 있다. 더욱이 성종대에는 최승노를 비롯한 신라6두품계열의 유학자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고려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여 정국을 석권하게 되자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왕조라는 역사인식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태조이래 대외적인 정치이념이 되었던 북진정책이 게속 구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의 역사인식이 고구려계승으로 단일화되지 못했던 것은 대내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신라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인식이 강대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려전기의 역사인식의 주류가 고구려와 신라 양왕조의 계승을 표방하는 양면성을 지니게 되었던 것은 불가피하였을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정치상황에 따라 고구려에서 정통을 찾게 되기도 하고 신라 전통의 계승을 표방하기도 하였는데 막 고려가 성립하고 후삼국을 통일할때까지 고구려, 신라계승의식이 새로운 왕조로서 고려가 체제를 정비하고 사회 기틀을 완성될때까지는 고구려, 신라계승의식의 병존, 금국위 성립과 이자겸 난의 전후로 신라계승의식이 이에 반발로 고구려 계승의식이 이에 반발고 고구려 계승의 묘청이 한때 나타나다가 난의 실패로 신라 게승의식이 다시 대두하여 김부식에 의해 『삼국사기』가 편차되었고 무신난 이후에는 다시 고구려 계승의식이 나타났다(이규보의“동명왕편”)

 

고려전기의 역사인식은 삼국중 어느 특정왕조와의 연결만을 의식한 소박한 형태의 것이었음으로 같은 민족의 같은 후손이라는 민족의식 곧 단일민족이란 자각은 태동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한계성이 있다 하겠다. 이것은 후에 몽고라는 막강한 외세의 침략 앞에 민족의 생존권이 위협을 받는 상황하에서 단일 민족이라는 의식이 싹트게 되어 단군에서 그 해답을 찾게 된다.(이승휴의제왕운기, 일연의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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