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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2.후고구려의성립

당시의 신라왕실은 극도로 쇠약해져,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대두하였다. 거
듭되는 흉년으로 인하여 국고가 탕진되어 889년(진성여왕 3)에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이 유망하여 초적(草賊)으로 변하였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는데,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여 뜻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기훤이 잘 
대우해주지 않자,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뒤 궁예는 양길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
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지금의 醴泉)·내성(奈城:지금의 寧越)
·울오(鬱烏: 지금의 平昌)·어진(御珍:지금의 蔚珍)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江陵)에 이르렀는데, 그 무리가 3, 
500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여 자기 세력기반으로 삼았고, 이들에 의하여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저족(猪足:지금의 麟蹄)·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