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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歷史硏究會 고려백자,청자
 

1.역사적 배경(歷史的 背景)

우리 나라의 요업이 어느 시대에 창조되었던가 하는 그 기원은 아직까지 기록이 확실하지 못하여 알길이 없지만 통일신라시대 경덕왕조의 기록을 보면 종래의 瓦器典(와기전)을 陶燈局(도등국)으로 기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우리 나라의 요업은 그 이전의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産品은 원시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며 其後 新羅朝廷에서는 陶燈局을 擴允(확윤)하여 한 官署(관서)로 승격시켜 도요사업을 統督(통독)한 것은 基間 요업이 상당히 발전하였으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때의 도기에는 布紋(포문) 등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이는 그릇을 굴때에 토기를 布物로 쌓거나 새끼로 묶어서 요에 넣었던 흔적이 남은 것이요. 紋儀(문의)로서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신라의 요업은 長足的으로 발전하여 여러 가지 紋儀를 조각하고 또 釉藥(유약)을 사용하여 당대 당나라의 산품 三彩油(삼채유)와 비교 할 수 있는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적에서 출토된 것들이 당제품과 신라산품이 相隣(상린)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증거로 보아 우리 나라의 자기는 新唐交易이 殷盛(은성)하던 8세기 말엽을 도자공예의 發祥期(발상기)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도기의 예술적 발전은 역시 고려왕조에 으르러 일반적인 문화가 향상됨과 倂進(병진)하여 발달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신라시대의 토기로부터 점차 발달하여 釉藥을 사용하게 되고 色彩(색채)와 光澤(광택)을 발하는 제품을 산출한 것이 통일신라의 불교문화와 倂進하였고 고려문화의 황금시대에 이르러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10세기에 이르러 갑작스러히 중보적(重寶的)인 존귀성(尊貴性)을 인정받고 燦然(찬연)히 세계도예계에 등장한 고려자기는 당대 상류계급에 있어 최상의 愛玩品(애완품)으로 羨慕(선모)의 대상이 되었지만 실은 그 至寶(지보)의 磁器가 어느 왕조시대에 어느지방에서 출토하였던가를 명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이로부터 이조 500년동안 이를 알려는 사람도 없고 찾는 인사도 없어 忘置(망치)되어 있었던 것이 한일합병후 개성 만월대 구지부근에서 습득한 한 조각의 파편이 되어 학자의 卓上(탁상)에 연구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2.고려청자와 백자(高麗靑磁와 白磁)

우선 고려 도자기라고 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陶器(도기)와 磁器(자기)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선사시대부터 발전되어왔던 도기질(陶器質) 요업(窯業)과 9세기경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청자 제작기술은 바탕으로 한 磁器質(자기질) 窯業이 확대되면서 요업은 陶器質磁器質로 양분되었다.

먼저 陶器質연질도기경질도기로 구분된다. 연질도기는 약 800℃에서 불완전 燔造(번조)하여 器皿(기명)에 탄소를 침투시킨 侵炭陶器(침탄도기)로서 회색이나 회혹색을 띠며, 탄소의 작용으로 흡수성이 거의 없게 된 것이다. 연질의 침탄도기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黑陶를 시작으로 널리 제작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는 시루를 포함한 조리용기·자배기 등의 허드레그릇, 흡수성이 없는 성질을 이용해 기와 등이 제작되었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경질도기는 약 1000℃에서 還元(환원) 燔造한 것으로 흡수성이 없으며 회청색이나 회흑색을 띠며 종래에는 회청색경질토기로 불렀다. 삼국시대에 완성된 경질도기는 항아리·병·발·접시 등 다양한 생활용기들이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일반백성의 생활용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삼국시대 후기에는 경질도기에 灰釉(회유)를 씌운 회유도기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고려시대에 회유도기의 기술이 발전되었다. 이러한 고화도 회유경질도기 제작기술로의 발전은 자기질 요업의 첫 단계인 청자제작의 기술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의 磁器質 요업은 청자·백자·흑자 등 다양하지만 고려의 도자공예를 대표하는 것은 청자이다. 청자는 제작기술, 장식의장과 조형성에 있어서 다른 종류의 도자기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도자기 조형의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조선 전기까지 제작되었다.

3.發生과 發展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기부터 중국 越州窯(월주요) 청자를 받아들이면서 청자의 가치와 실용성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남북국시대 신라지역의 안압지, 황룡사지, 미륵사지, 부여 부소산 등에서 월주요 청자와 邢州窯(형주요)·定窯(정요) 백자가 발견되고 있어서 청자·백자에 대한 인식의 폭이 확대되어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에 전래된 중국자기의 기종들은 삼국시대의 것이 호·병이었던 것과 달리 해무리굽(그릇의 굽을 깍아낸 모양이 마치 해무리 같은 굽. 중국에서는 玉璧底(옥벽저). 일본에서는 蛇目高臺<사목고대>라고 부름)을 한 ?(완)과 대접이 주종을 이루었다. 중국에서 해무리굽이 성행한 시기는 8∼9세기이며 10세기에 오면 일반적인 輪形(윤형)굽으로 바뀌며, 일본 회유도기에서도 10세기 이후 것에서는 해무리굽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 초기청자 窯址(요지)에서 출토되는 기종들 중 해무리굽 ?의 존재는 한국 청자의 발생시기를 9세기로 추정하는 근거 자료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기술적 여건은 중국의 선진 자기질기술의 도입 결과로 보는 것이다. 특히 청자를 제작하는 기술 중 가마와 耐火匣(내화갑) 등의 기술은 기존의 통일신라시대 경질도기제작기술과 관련지을 수 없는 새로운 것으로서 중국 越州窯의 기술도입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청자 발생은 중국 도자문화의 적극적인 영향에 의한 것이었지만 통일신라 사회가 이룩했던 청자 자체 생산의 욕구, 회유도기의 기술적 기반, 원료가 풍부한 자연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이나 유럽의 경우 고급기술을 받아들일 여건, 즉 기술·원료 등이 마련되지 않아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8세기 늦은 17세기에 유럽은 18세기에 비로소 자기질 요업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청자의 조형적 요소들이 모두 중국적인 것만은 아니다. 해무리굽 완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종(전접시·발·광구병·매병·항아리 등)을 통일신라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금속그릇, 칠기, 경질도기나 회유도기의 형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우리 청자가 중국도자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한국적 조형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시대의 공예전통을 계승하면서 뒤떨어진 기술적 요소들을 국복하며 발전적인 방향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발생기의 청자는 문양이 없는 素紋靑磁(소문청자)였으나 점차 장식의장 기법이 다양해졌다. 청자는 장식기법에 의해 분류되는데 몸체를 깍아낸 문양을 나타내는 陰刻靑磁(음각청자)·반양각청자(半陽刻靑磁)·陶范靑磁(도범청자)에서 찍어내는 型押陽刻靑磁(형압양각청자)·象形靑磁(상형청자)·투각청자(透刻靑磁), 酸化鐵(산화철)과 酸化銅(산화동) 안료로 문양을 그리거나 채색한 鐵畵靑磁(철화청자)·鐵彩靑磁(철재청자)와 동화·동채청자가 있다. 또 白土泥(백토니)와 ?土泥(자토니)로 문양을 그린 堆花紋靑磁(퇴화문청자)와 철채를 한 후 문양 부분을 긁어내고 백토니로 채워넣는 일종의 상감과 유사한 철채백퇴화문청자도 소량 제작되었다. 그러나 청자의 장식기법으로 대표적인 것은 상감법으로서 음각기법과 퇴화문기법이 함께 사용된 응용기법이다. 청자의 장식기법은 음·양각의 刻法(각법)과 철화·퇴화의 畵法(화법)이 각각 발전하다가 12세기에 2가지 기법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상감기법으로 전환되어 조선 전기까지 계승되었다. 금속과 나전칠기에서 이미 보편화된 상감기법이 청자에 응용된 것은 고려가 이룩한 독창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청자 발생 이후 9세기 후반경에는 백자의 생산도 시작되었다. 당시 백자는 기술과 장식의장, 조형적인 요소까지 청자와 유사했고 제작도 청자와 같은 窯場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胎土(태토)만 백색이지 유약은 같은 회청색을 띠는 청자 유약을 사용했다. 흑자는 다갈색이나 흑색으로 나타나는 鐵釉(철유)를 씌운 것으로 청자의 발생과 함께 적은 양이 생산되었다. 발생기의 흑자는 회유도기의 기술과 조형을 충실히 계승했지만 청자의 회유도기의 기술과 조형을 충실히 계승했지만 청자의 기술이 고급화되면서 청자의 태토 위에 흑유를 씌우는 방법으로 발전되어 조선시대까지 제작되었다. 그외에 현존하는 수는 적지만 백토·청자토·자토를 적당히 배합해 태토의 색에 따라 무늬가 생기는 練理文磁器(연리문자기)와 통일신라의 綠釉(녹유)도기를 계승한 예도 남아 있다.

4.高麗時代 陶磁器의 機能的인 觀點

이상과 같이 고려시대에 제작된 도자기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기능적인 공예의 관점에서는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경질도기로 대표되는 저장용 기명으로 대옹(大甕)·항아리·조리용기 등이다. 실제 사용자는 하층계급이었으며, 기능면에서 효과적이었지만 자기질로의 질적 상승요인이 없는 종류이다. 둘째는 보편화되고 대량생산된 조질청자(粗質靑磁)로서 완·대접·접시·병 등 음식기명(飮食器皿)인데 대부분 장식이 없거나 철화·퇴화문 등으로 단순한 문양이 시문된 종류를 말한다. 셋째는 고급청자로 주로 의례용구(儀禮用具)나 문방구, 다기 등 고려의 불교문화와 귀족생활문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조형이 뛰어남은 물론 정교한 장식의장과 고급기술에 의한 것을 말한다. 특히 이러한 고급청자에 대해 1123년(인종 1) 송의 사신 서긍(徐兢)은 《宣和奉使高麗圖經(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고려인은 청자의 색을 비색(翡色)이라고 하며 상형청자의 조형은 중국과 달리 독창적이며 이러한 청자를 고려인들은 귀하게 여긴다"고 기술했다. 또 《수중금(袖中錦)》에는 북송말 중국의 상류사회에서는 고려청자의 뛰어남을 동경하여 '천하제일' 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최근 중국의 유적에서 고려청자가 출토되고 있는 경위를 추측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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