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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역사
제3장 고려
제3절 통치조직의 정비와 청주목

1.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

1) 중앙의 통치구조

고려의 정치기구는 성종대에 정비되기 시작하여 문종대에 완비되었다. 중앙관제는 중서성·문하성·상서성의 3성이 중심이었다. 3성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중서성과 문하성이었다. 이를 합쳐서 중서문하성, 혹은 재부(宰府)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고려는 엄밀히 말하면 삼성제가 아니라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의 2성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중서문하성이 처음 설치된 것은 성종 원년의 일로써 중서문하성은 상·하 이중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즉 종 2품 이상의 관원으로 구성된 성재(또는 재부)와, 정 3품 이하의 관원으로 구성된 성랑(또는 낭사)이 그것이다. 재부에서는 군왕과 더불어 정사를 의논 처리하는 의정기능뿐 아니라, 집행기관인 상서 6부의 판사까지 겸임하는 최고의 지위에 있었다. 이에 대해서 낭사는 왕의 잘잘못에 대한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한편 상서성은 정책의 시행을 담당하는 집행기구였다. 이 역시 2품 이상으로 구성되는 상서도성과, 3품 이하관으로 조직된 상서 6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이 중 일반 행정을 맡아 집행한 것은 상서 6부였다. 6부는 이(吏)·병(兵)·호(戶)·형(刑)·예(禮)·공(工)의 여섯 부를 말한다.

3성 이외에 중요한 지위를 지니는 것으로 중추원과 삼사가 있었다. 이 중 중추원은 왕명의 출납과 군기를 장악하는 것이 그 중요한 임무였다. 삼사는 세공과 녹봉 등을 관장하여 그에 대한 회계를 총괄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밖에 어사대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풍속의 교정, 관리의 잘못을 탄핵·규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 외에도 한림원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왕명과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한림원에는 문장에 능하고 학식이 뛰어난 인재들이 모이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왕명 이외에 과거의 고시관이나 경연관으로서 역활을 맡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시대의 군사조직으로는 서울에 보통 경군(京軍)으로 불리는 중앙군을, 그리고 지방에는 주현군(州縣軍)을 두고 있었다. 중앙군은 2군, 6위가 중심이었다. 6위는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의 여섯 부대를 말하는 것으로, 이 중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의 3위는 수도의 수비와 변방의 방어를 주 임무로 하는 가장 핵심부대였고, 금오위는 경찰, 천우위는 의장, 감문위는 궁성의 안팎의 수위를 맡고 있었다. 2군은 응양군과 용호군으로 왕의 친위군으로서 6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2군 6위에는 각기 정·부지휘관으로 상장군(정 3품)·대장군(종 3품)이 있었다. 2군 6위의 밑에는 1천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45개의 영(領)이 있었다. 영의 지휘관은 장군(정 4품)이었다.

서울에 경군(중앙군)이 있었던데 비해 지방에는 주현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방에는 처음 호족들의 군대를 연합하여 중앙에서 통제해 나가던 광군(光軍)이 조직되었으나 뒤에 주현군으로 개편되었다. 같은 지방군이면서도 5도 및 경기의 주현군과 북방 양계의 그들과는 성격이 좀 달랐다. 따라서 양계의 주현군을 따로 주진군(州鎭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과거라는 시험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고려 광종 9년(985)으로서 이는 호족연합정권적인 형태를 띠고 있던 당시에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대신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과거시험은 그 과목에 따라 제술업(製述業), 명경업(明經業), 잡업(雜業)의 셋으로 나뉘었다. 제술업은 시, 부, 송, 책 등 문학으로써 시험보는 것이며, 명경업은 서, 역, 시, 춘추 등의 유교 경전을 시험보는 것이었다. 이 둘은 문신을 등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특히 제술업이 중요시되었다. 이에 대해 잡업은 기술관 등용을 위한 시험이었다. 위의 여러 업 가운데 전문직을 선발하는 잡업에 비해 주로 문예와 경전에 능한 교양인을 뽑는 제술업과 명경업을 중시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제술업이 절대적 우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과거라 하면 통상 제술업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과거의 고시관을 지공거라 하였는데 그 해당년에 급제한 사람들은 지공거를 좌주라 부르고 자기들은 문생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맺어진 양자의 관계는 부자와 같아 일생을 통해 지속되었으며, 이것이 소위 학벌을 형성하는 폐단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에서는 양인이면 누구나 수험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천민이나 승려의 자식은 응시할 수 없었다. 비록 양인이라 하더라도 일반 농민은 거의 응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중요한 교육기관으로 중앙에는 국자감과 12도,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다. 이 가운데 국자감과 향교는 관립이었고, 12도는 사립이었다. 일종의 종합대학인 국자감은 성종 11년(992)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국자감은 충렬왕 원년(1275)에 국학으로 개칭되었는데, 다시 충선왕이 즉위하여(1298) 성균감으로 바꾸고 충렬왕 34년(1308)에 충선왕이 복위해서 성균관으로 다시 개칭하였다. 국자감에는 여러 단과대학이 속해 있었는데, 인종 때에 경사 6학이라고 하여 국자학(國子學), 태학(太學), 사문학(四門學), 율학(律學), 서학(書學), 산학(算學)이 정비되었다. 이것은 각각 입학자격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국자학에는 문무관 3품이상, 태학에는 5품 이상, 사문학에는 7품 이상의 자제가 입학하게 되어 있었고, 율(律), 서(書), 산학(算學)의 각 기술교육기관에는 8품 이하의 자 및 서인이 입학하였다.

문종대(1047∼1082)는 국학이 크게 부진하기 시작하여 숙종 7년(1106)에는 국학폐지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국학이 재정상의 어려움이 있는데다 사학이 크게 발달함으로써 관학이 위축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사학을 일으킨 사람은 최충이었다. 문종대에 해동공자로 불리던 그는 9개의 전문강좌로 나누어 강의하는 구재학당을 만들었는데, 이를 최공도(후에 문헌공도)라고 하였다. 당시에는 최공도를 비롯하여 12의 사학이 있었으므로 이를 12도라고 불렀다. 이 12도의 창설자는 대부분 전직 고관이었고, 또 당대의 대학자로서 과거의 시험관인 지공거였던 경우가 많았다.

지방의 교육기관은 언제 정비되었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그러나 성종은 지방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지방의 자제들을 상경시켜 학업을 닦게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경학박사, 의학박사 등을 지방에 파견하여 교육을 실시케 하였다. 이 때부터 향교가 설치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고려가 건국되고 태조 13년(930) 서경에 학원을 창설한 것이 지방 학교 설립의 최초 기록이지만, 그러나 청주에도 이미 신라말 고려초에 '학원'(學院)이라는 명칭의 학교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고려 광종 13년(962)에 설립된 [용두사철당기]의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철당기에는 다른 금석문에는 보이지 않는 중요한 관직명이 보이고 있는데, '학원경(學院卿)', '학원낭중(學院郞中)'이 바로 그것이다. 학원경과 학원낭중이라는 직함은 당시 청주에 ?학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가 존재했음을 입증해 주는 동시에 이들 관직은 당시 청주에 있었던 학교의 책임자와 부책임자의 명칭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학교는 청주의 호족세력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이며, 아울러 이들은 지방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학원?은 이미 청주가 서원경이던 통일신라시대에 설치된 것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통일 신라시대의 5소경은 군사, 행정적인 면보다는 문화적인 면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만큼 지방학교의 설치도 5소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고 하겠다.

고려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전시과(田柴科)였다. 전시과는 경종 원년(976)에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이를 시정전시과라 하는데, 그 내용은 국가의 관직에 복무하거나 또는 직역을 부담하는 자에 대하여 그 대가로 토지를 분급하는 것이었다. 이 전시과는 그후 성종대를 거쳐 목종 원년(998)에 이르러 개정되었다. 이를 흔히 개정전시과라 부르는데, 이 개정전시과에 와서야 비로서 관직의 고하에 따라 18과로 구분하여 토지를 나누어 주는 단일제가 성립되었다. 이것은 지배질서의 성장과 그에 따른 관인체제의 발전에 호응하여 이룩된 토지제도의 재정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뒤 문종 30년(1076)에 이르러 또다시 전면적인 재편성을 보게 되었다. 이를 흔히 경정전시과라고 하는데, 목종 원년의 개정전시과의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아 18과등제를 그대로 채택하고는 있으나 개정전시과와는 몇가지 다른 점이 있다. 즉 전시의 지급 액수가 전체적으로 감소되었다든가, 무반에 대한 대우가 현저히 상승되고 있다는 점 등이 그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이로써 일단락되었다.

전시과의 규정에 따라 주어지는 과전은 관리에 대한 보수였던 셈이다. 따라서 그가 죽으면 국가에 반납하게 되어 있었다. 전시과 이외에 중요한 것이 공음전이었다. 공음전은 대체로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일정한 토지를 주어, 이를 자손에게 세습시키는 것을 허락한 영업전이었다. 과전과 공음전 이외에 중요한 것은 향리와 군인에게 주는 전정(田丁)이었다. 향리들이 받는 향리전(鄕吏田 또는 外役田)은 그들이 짊어지는 향역의 대가였다. 군인전 역시 군역의 대가로 주는 토지였다. 이밖에 궁성에 소속되어 있는 내장전, 관아의 비용에 충당되는 공해전, 사원이 소유하는 사원전 등이 있었다.

2) 지방의 통치조직

고려의 중앙정부가 외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해 본격적인 통제를 가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2년(983) 12목(牧)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 양주(楊州),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淸州), 공주(公州), 진주(晋州), 상주(尙州), 전주(全州), 나주(羅州), 승주(昇州), 해주(海州), 황주(黃州)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牧使)를 파견함으로써 본격적인 지방 통제를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몇차례의 개폐 과정을 거쳐서 현종 9년(1018)에 지방제도는 일단락을 지었다.

고려의 지방행정구획으로는, 전국을 5도와 양계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3경, 5도호부, 8목을 위시하여 군, 현, 진 등을 설치하였다. 도는 일반 행정구획으로서 경우에 따라 증감이 있었으나 뒤에 5도로 낙착되었다. 도의 장관은 안찰사였다. 그 후 이 명칭은 충렬왕 2년에 안렴사로 개칭되고, 잠시 뒤에는 제찰사로 바뀌었다가 다시 안렴사로 환원되었다.

한편 북방의 국경지대에는 동계, 북계(서계)의 양계를 설치하였는데, 군사적인 특수지역이었다. 따라서 외관제가 발달하여 일찍부터 계의 장관인 병마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 행정구역인 방어주 및 진에도 방어사와 진사 등이 파견되었다.

3경은 풍수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처음은 개경(開京 : 개성), 서경(西京 : 평양), 동경(東京 : 경주)을 지칭하였으나, 뒤에는 동경 대신에 남경(南京 : 서울)이 들어갔다. 그런데 3경 중에서도 가장 중시한 곳은 서경이었다. 여기에는 분사제도(分司制度)라 하여 개경의 중앙정부와 유사한 기구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5도호부는 안동, 안남, 안서, 안북, 안변의 다섯 도호부를 말하는 것으로, 도호부는 원칙적으로 사방 요지를 차지하여 군사적인 방비의 중심지적인 역할을 맡은 곳이었다. 이곳 이외에도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淸州), 진주(晉州), 상주(尙州), 전주(全州), 나주(羅州), 황주(黃州)의 8목은 앞의 3경(三京)과 도호부와 더불어 군현의 상급 행정기구로서 지방통치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방행정 단위에는 중앙관이 장으로 파견되었다. 물론 모든 주, 부, 군, 현에 외관(外官)이 파견된 것은 아니었다. 외관이 파견된 군현과 그들이 파견되지 아니한 속군, 속현이 있었다. 따라서 외관이 없는 속군, 속현은 주군, 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과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고려 군현제도의 한 특징을 이루는 것이라 하겠다. 즉 군, 현의 크기가 문제된 것이 아니라 외관이 파견되는 주군, 주현이냐, 그렇지 않으면 외관이 없는 속군, 속현이냐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이처럼 고려의 중앙정부에서는 여러 군현 중 외관이 파견된 주군현에만 직접 행정체계가 미치고 주군현으로 하여금 속현을 관할케 하였다. 그러나 주군현의 수가 많아 이를 일률적으로 통제하기가 곤란하였으므로 몇개의 큰 군현을 계수관(界首官)으로 삼아 중간기구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즉 14개 정도의 경, 도호부, 목이 계수관으로서 관내의 일반 군현을 통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군현이라 하더라도 고려의 군현제는 계수관과 일반 주현, 그리고 속군현 등 누층적인 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외관 밑에는 호장(戶長) 이하의 향리가 있어서, 외관을 보좌하고 일반 국민과 접촉하는 실제적인 행정사무를 담당하였다. 즉 조세와 역역의 징수를 비롯하여 간단한 소송을 처리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맡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관인은 아니었지만 국가권력의 말단을 장악하여 일반 백성들과 직접 접촉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역할은 매우 컸다.

더구나 고려시대에는 속군, 속현이 많아 그 곳에서는 향리가 사실상 수령의 역할을 담당하였고, 또 신분적으로도 신라말, 고려초의 호족과 연결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권한과 지위는 조선시대의 향리들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이들에게는 향역에 대한 대가로 향리전이 지급되고 있었던 점도 조선시대와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호장 등 향리들은 그 지방 본래의 호족 출신인 토착 세력가들이므로 짧은 기간을 두고 교체하는 주, 부, 군, 현의 장관들보다 지방 사정에 능통하여 그 끼치는 바 영향이 매우 컸다. 그리고 군, 현, 진 밑에는 촌으로 구분되었는데 이 촌에는 토착인의 촌장(村長) 등이 있어서 그들이 촌민을 지배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약 500여 개의 군현이 존재하였지만 모든 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된 것이 아니었다. 즉 군현은 주현과 속현이 있었는데 주현에만 수령이 파견되고 속현들은 수령이 파견된 주현에 예속되어 중앙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는 행정체계를 이루고 있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고려전기에는 수령이 파견된 주현이 130개였는데 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은 374개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충청북도는 대체로 양광도에 해당된다. 양광도라는 명칭은 고려전기에는 충청도라는 명칭과 병용되었으나 충렬왕 대를 전후하여서는 오히려 충청도라는 명칭이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공민왕대 이후에 가서야 양광도가 많이 쓰이게 되었다.

2. 청주의 연혁과 행정구역의 정비

고려 성종 2년(983)에 처음으로 지방에 외관을 파견한 것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이 12목 가운데 우리 충청북도에는 충주와 청주가 포함되어 있었다. 충주와 청주는 이미 통일 신라기부터 문화의 중심지이자 교통, 행정의 요지였다. 따라서 이곳은 소경(小京)이 설치되어 각각 중원소경, 서원소경으로 불리웠었다.

한편 성종 14년(995)에 10도가 신설되는데, 관내도, 중원도, 하남도, 강남도, 영남도, 영동도, 산남도, 해양도, 삭방도, 패서도가 그것인데 지금의 충청북도는 대체로 중원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 후 현종대에 이르러 전국을 개성부와 경기 및 5도 양계로 나누고 그 밑에 500여의 도호부, 목, 주, 부, 군, 현, 진을 소속시켰다. 5도는 일반 행정구역으로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 교주도, 서해도를 말하며, 양계는 북방 변경지대로서 군사적인 특수 지역으로 동계(동북면)와 북계(서북면)가 그것이다.

지금의 충청북도의 경우, 중·북부 지방은 양광도에 속해있으나, 남부 지방은 경상도 상주목과 경산부에 소속되에 있었다. 충청도에는 두개의 목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충주목이고 다른 하나는 청주목이었다. 충주목에 지금의 충주, 제천군, 음성군, 단양군이 속해 있었고, 청주목에 지금의 청주, 청원군, 진천군, 괴산군, 보은군의 회인면이 속해 있었다. 그러나 보은군, 영동군, 옥천군은 경상도 관할이었다. 즉 보은군, 영동군과 옥천군 청산면은 상주목에 소속되었고, 옥천군, 영동군 황간면은 경산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제 청주목의 연혁과 그 행정구역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지리지 및 {고려사} 지리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를 기본 사료로 하고, 여기에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조를 참조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주목(淸州牧)

본래 백제의 상당현(上黨縣 또는 娘臂城이라고도 하고 혹은 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으로 신라 신문왕 5년 처음으로 서원소경을 두었고 경덕왕 때에 서원경으로 승격되었다. 태조 23년 청주로 이름을 고쳤고 성종 2년에 12목을 두었는데 청주목은 그 중 하나이다. 성종 14년 12주 절도사를 두고 호를 전절군(全節軍)이라 하여 중원도에 소속하였다가 현종 3년에 폐하여 안무사로 하였고, 현종 9년 8목을 설치하여 청주는 그 중의 하나가 되었다. 결국 청주라는 지명은 고려 건국초에 붙여진 이래, 그 행정구역만 약간의 변동이 있을 뿐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는 셈이다.

고려시대 청주목에 소속되어 있던 군현은 2군(郡; 燕山. 木州) 7현(縣; 鎭州. 全義. 淸州. 道安. 靑塘. 燕岐. 懷仁)이고, 또 1령지사부(領知事府; 公州)와 2지사군(知事郡; 洪州. 天安), 2현령관(縣領官)을 관령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의 기록을 통하여 이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2군(郡)

연산군 : 본래 백제의 일모산군으로 신라 경덕왕이 연산군으로 고쳤다. 고려에 이르러 청주에 내속되었으며 명종 2년 감무를 두었다. 고종 46년 위사공신 박희실(朴希實)의 고향이므로 문의현(文義縣)으로 승격하여 현령을 두었다. 충렬왕대에 하림(嘉林;충남 林川)에 합병되었다가 이어 복구되었다. 지금의 청원군 문의면에 해당된다.

목주(木州) :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으로 신라 경덕왕 때 대록군으로 고쳤다. 고려에 이르러 목주로 고쳐 청주목에 내속시켰으며 명종 2년 감무를 두었다. 지금의 충남 천안시 목천군이다.

2) 7현(縣)

진주(鎭州) : 본래 고구려의 금물노군(今勿奴郡 : 萬弩郡 혹은 首知 혹은 新知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대에 흑양군(黑壤郡 : 黑은 黃으로도 쓴다)으로 고쳤다. 고려초에 강주(降州)라 칭하였다가 뒤에 진주라 고쳤다. 성종 14년 자사를 두었다가 목종 8년에 파하였으며 현종 9년 청주에 내속되었다. 고종 46년 임연(林衍)의 내향이라 하여 창의현(彰義縣)으로 삼아 영을 두었고 원종 10년 임연의 일로 말미암아 지의령군사(知義寧郡事)로 승격되었다. 다시 임연이 주륙됨에 진주로 강등되었다. 별호를 상산(常山)이라 한다. 지금의 진천군이다.

전의현(全義縣) : 본래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으로, 신라 경덕왕대에 금지(金地)로 고쳐 대록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에 이르러 전의현으로 고쳐 청주목에 내속시켰다. 지금이 충남 연기군 전의읍이다.

청천현(淸川縣) : 옛날의 살매현(薩買縣)으로 고려에 이르러 청천으로 고쳐 청주에 내속되었다. 지금의 괴산군 청천면에 해당된다.

도안현(道安縣) : 본래 고구려의 도서현(道西縣)으로 신라 경덕왕 대에 도서로 고쳐 흑양군(黑壤郡 : 지금의 진천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초에 도안(道安)으로 이름을 고치고 현종 9년에 청주에 내속되었다. 지금의 괴산군 도안면에 해당된다.

청당현(靑塘縣) : 본래 청연현(靑淵縣)인데 고려 초에 청당현(靑塘縣)으로 고치고 청주에 내속되었다. 뒤에 감무를 두어 도안현을 겸임하였다. 지금의 괴산군 청안면에 해당된다.

연기현(燕岐縣) : 본래 백제의 두내지현(豆乃只縣)으로, 신라 경덕왕대에 연기현으로 고쳐 연산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현종 9년에 청주에 내속시켰으며, 명종 2년에 감무를 두었다가 후에 목천감무가 겸하게 하였다. 지금의 충남 연기군이다.

회인현(懷仁縣) : 본래 백제의 미곡현(未谷縣)으로 신라 경덕왕대에 이름을 매곡(昧谷)이라 고치고 연산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초에 다시 회인현으로 고치고 현종 9년에 청주에 내속되었다. 뒤에 회덕감무로 겸하게 하였고 우왕 9년에 별도로 감무를 두었다. 지금의 보은군 회북면에 해당된다.

3. 청주의 속현(屬縣), 향(鄕)·소(所)·부곡(部曲)

고려시대에는 군현 밑에 촌과는 별도로 향(鄕)·부곡(部曲)·소(所) 등의 특수 행정조직을 두고 있었다. 촌에는 외관이 파견되지 않고 토착인인 촌장이 자치를 하였으며, 양인신분의 촌민이 거주하였는데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었다. 촌과는 별도로 천민의 집단 거주지로서 부곡을 비롯하여 향과 소라는 특별 행정구역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주목 등신장조에 의하면, 부곡과 향이 일반 행정구역인 군현에 비해 전정이나 호구가 적어 현으로 만들 수 없는 곳에 설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주민의 신분만이 달랐을 뿐 호구의 많고 적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어떤 곳은 일반 군현보다 호구가 많은 부곡이 있기도 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군현에서 부곡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향과 부곡이 발생하게된 연유를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전쟁포로의 집단적인 수용이나 또는 본래 군현이었다 하더라도 반역 및 적에의 투항 등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강등되어 생겨난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곳의 주민은 일반 군현에 비하여 여러가지 차별대우를 받은 예가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종래는 향이나 부곡을 신분적인 면에서 천민집단으로 규정하고 거기에서 그 특성을 찾아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종래의 견해를 비판하고 '부곡인양인설(部曲人良人說)'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어 아직 이렇다할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향이나 부곡이 특수한 행정조직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하겠다.

향이나 부곡은 신라시대에 발생하여 고려 일대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존재했던 것에 비해서 소는 고려에 들어와서 처음 발생하였다. 부곡과 향에는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 거주하였는데 반해 소에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금이나 은, 철, 종이, 먹, 도자기 등을 만들기 위하여 공장(工匠)들을 집단적으로 거주시킨 특수 구역이었다. 이들 특정 상품의 생산은 그 자체가 매우 무거운 부담이었으므로 소의 거주민에게는 조세나 역 등은 부과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신분에 대해서도 종래에는 천민으로 이해하여 왔으나 최근 들어 향이나 부곡인들과 마찬가지로 양인(良人)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어떻든 소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여 공납품을 생산하도록 한 특수 행정조직의 하나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동안 부곡을 비롯한 향·소의 주민을 천민으로 간주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이들의 발생 자체가 전쟁포로나 국가에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강등되어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즉 향과 부곡민은 죄인이거나 혹은 그같은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신분상 천민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곳의 주민들은 일반 군현민들과는 달리 여러가지 제약이 따랐다는 사실이다. 즉 국학에의 입학이 금지되었고, 형벌상 노비와 동등하게 취급되었으며, 자손의 귀속문제에 있어서 천인의 대우를 받았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승려가 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민의 처지도 이와 비슷하였다고 보고 있다.

반면에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향이나 부곡민이 천민이라고 하는 적극적인 자료가 없으며 설혹 천민설의 중요한 논거로 제시되고 있는 사료에 대해서도 그 해석상에 있어서 다른 견해를 내세워 그같은 논거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하지만 향과 부곡민의 양인설이 제기된 이후에도 귀향형(歸鄕刑)에 의한 유배지로서 향과 부곡이 이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그곳의 주민들은 종래의 주장대로 천민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나와 주목된다.

부곡은 고려 후기에 들면서 점차 해방되어 일반 군현과 마찬가지 존재로 변질되고 있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부곡은 물론 향이나 소의 존재는 모두 소멸되었다. 따라서 문제는 이들 부곡을 비롯한 향과 소의 성격이 변질된 시기가 언제부터였는가 하는 점에 있다고 하겠다. 이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려 고려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사회변동이 크게 일어나고 군현제가 개편되는 무신정권기나 몽고침입 이후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듯 싶다.

이상과 같이 향, 부곡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론이 있긴 하지만, 일단 그 주민은 천민으로 보되 고려후기부터 점차 양인으로 변해갔다고 보고자 한다.

고려시대 청주에 예속되어 있던 속현, 향·소·부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 지리지 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속현이 1(靑川縣), 향이 2(周岸鄕. 德坪鄕), 소가 2(椒子所. 背音所), 부곡이 4(吳根部曲. 錫谷部曲. 調豊部曲. 閒身部曲)곳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하나하나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1) 속현(1개소)

청천현(靑川縣) : 전에는 청주라고도 했고, 일명 살매현(薩買縣)이라고도 하였다. 동쪽으로 60리에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괴산군 청천면 일대라고 생각된다.

2) 향(2개소)

주안향(周岸鄕) : 옛날에는 주애(朱崖)라고도 불리웠다 한다({동국여지승람}에는 周牟鄕이라고도 하였다). 청주에서 동남쪽 60리에 있다고 하였고, 또 문의와 회인의 두 현을 지나 그 땅에 이른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대전광역시 동면 일대라고 생각된다.

덕평향(德坪鄕) : 전의현 서쪽을 넘어 들어간다고 하였고, 천안 남쪽 경계 너머에 있다고도 하였다.

3) 소(2개소)

초자소(椒子所) : 추자소(楸子所)라고도 한다.

배음소(背陰所) : 전에는 배음(拜音)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이 두 곳 모두 은소(銀所)라 한 것으로 보아, 은 혹은 은제품을 생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4) 부곡(4개소)

오근부곡(吳根部曲) : 북쪽 30리에 있다. 지금의 청주시 오근장 일대라고 생각된다.

석곡부곡(錫谷部曲) : 서남쪽 25리에 있다고 하였다.

조풍부곡(調豊部曲) : 청안현을 넘어서 들어간다고 하였다.

한신부곡(閒身部曲) : 청천현에 있다고 하였다.


청주시 / '97 / 체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