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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遺民의 再建運動 ; 後渤海와 大渤海
김위현(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

Ⅰ. 서문

발해는 건국 이후 계속 국세가 강성해지기 시작하여 이미 第二代 武王(대무예大武藝)때에는 만주 일대를 통일하고 同王 13年(731)에는 대장 張文休(장문휴)를 시켜 당의 登州(등주)까지 공략하게 하여 登州刺使(등주자사) 韋俊(위준)을 죽이고 馬都山(마도산)까지 공격하여 당을 놀라게 한 일이 있으며 第10代 선왕(宣王, 大仁秀:高王 大祚榮의 弟 大野勃 4世孫) 이후 몇 대를 내려가면서 文物이 盛(성)하여 唐人들로부터 "海東盛國(해동성국)"이라 는 칭호를 받을 정도였다. 그때의 彊域(강역)은 南은 新羅, 北은 黑水靺鞨(흑수말갈), 東은 大海, 西는 거란에 접하게 되었으며 그 地方이 2,000里(新唐書에는 5,000里), 編戶(편호)10여만, 勝兵(승병) 수만인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 땅에 3省 6部 1臺 1寺 1院 1監 1局의 중앙행정 조직과 5京 15府, 62州의 지방행정 조직, 또 10衛의 군사제도 등이 완비된 大國家였으나 第15代 哀王(애왕) 大??(대인선)에 와서 급격히 쇠미를 면치 못하고 高王 大祚榮이 建國한지 229년에 終焉(종언)을 告하고 말았다.

Ⅱ. 발해의 멸망과 유민

渤海의 멸망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정세를 보아 추측할 뿐이지 이렇다 할 단정은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면 발해의 멸망에 대한 추정들은 어떠한가?

이용범 교수는 渤海의 人的 구성요소가 우명공동체의식같은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취약점을 안고 있어서 계층간의 불협화음이 있었고 또 군사수의 열세등이 원인이었음을 지적하였고 송기호 교수는 거란 침공이라는 외적 상황과 정치적 내분이라는 내적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음에 기인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국내 학자들의 주장이 있는가 하면 북한이나 중국내의 조선족 학자들의 견해는 그들의 정치 체재에 걸맞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북한의 박시형은 종족과 신분의 모순 등 봉건 관료들 사이에서 문무의 알력(文尊武卑=문존무비)과 봉건 지배 계급의 향락, 가혹한 억압과 착취, 부단한 권력투쟁, 극도의 무능력, 사대주의 등을 들고 있으며 중국 연변대학의 방학봉은 내적으로는 발해 사회의 계급 모순과 통치 계급 내부 모순 투쟁이며 외적으로는 거란의 침입으로 보았다.

위의 모든 국가의 학설에서 거의 모두 지적된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정의를 한다면 그 멸망의 原因(원인)은 遠因(원인)과 近因(근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近因은 또다시 外的 요인과 內的 요인으로 구분지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遠因(원인)으로 외적 상황을 보면 필연적으로 닥쳐 올 구제정세를 바로 읽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즉 동북아 국제질서의 崩壞(붕괴)다. 天寶亂(천보란)이후 唐朝(당조)의 쇠퇴는 節度使(절도사)의 專橫(전횡)과 羈?遊牧部(기미유목부)들의 독자 발전으로 이어지면서 자국의 존립마저 감당키 어려운 지경으로 기울어 갔다. 그리하여 唐廷(당정)에 朝貢(조공)이라는 事大禮(사대례)로 安存(안존)하려던 발해와 같은 나라들은 시대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채 침체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또 안으로는 건국 초기부터 안고 있었던 국가구성원의 문제와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이익 상충이라는 문제를 갖고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近因(근인)으로는 外的으로 탁월한 지도력과 전투능력과 경험을 갖춘 신흥 유목 국가의 추장이 된 耶律阿保機(아율아보기)의 적극적인 공격을 저어하지 못한 것이며 內的으로 國內의 이질 세력인 女眞(여진) 모든 민족의 이탈과 지배계층 내의 권력투쟁과 가혹한 착취로 인한 지배 계층과 피지배계층의 반목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高王 이후 200餘年이나 白山·黑水(백산·흑수) 사이에서 大國으로 자리잡고 있던 渤海는 싸움다운 싸움도 못해 보고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최후의 광경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발해 애왕 大??(대인선)은 그들의 용감성을 믿고 별다른 조치없이 五代 국가들에게 조공이나 바치면서 설마하고 있는 동안 인접국인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907年 可汗(가한)이 되면서 정벌을 시작하여 室韋(실위), 奚(해), 査刺底(사자저), 鋤勃德(서발덕)등을 정복하면서 그 偉名(위명)이 높아지자 重任, 三任까지 하면서 그 地位를 提高(제고)시켰다. 여기서 거란의 阿保機(아보기)가 자기 세력을 확대하여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그는 임기 말년 가한위를 노리는 그의 동생 4人의 집단 반란으로 외적 발전은 저지되었으나 이 반란을 평정한 후에는 새로운 야망을 갖게 되었다. 즉 西元 916年 漢制(한제)를 본따서 國號(국호)를 거란이라 하고 또 神冊(신책)이라 建元(건원)하고, 자칭 황제라 하고 도읍을 臨潢(임황,熱河省 西林縣,열하성 서림현)에 정하고, 百官(백관)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이때 영역은 확대되어 발해와 상접하게 되자 발해와는 정치상, 역사상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때 중원정국은 唐廷(당정)의 절도사들이 紛紛獨立(분분독립)하는 등 급속도로 혼란해져 갔다. 阿保機(아보기)는 中原(중원) 정국에 干預(간예)하고 싶었다. 그러나 東쪽에는 渤海가 있고 西쪽에는 突厥(돌궐), ?項(당항)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때 거란이 비록 强悍(강한)한 군대를 가졌다 하더라도 腹背(복배)에 적을 맞이할까 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突厥(돌궐), ?項(당항), 渤海(발해), 高麗(고려)가 모두 북방계의 강한한 민족이므로 거란이 만약에 중원을 경영하고자 한다면 반듯이 먼저 배후 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만약 梁이나 唐 어느 한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발해나 돌궐 그 어느 한 나라와 ?角之勢(기각지세)를 이루어 거란을 협공해 온다면 거란으로서는 실로 낭패를 당하기 십중팔구였으므로 阿保機(아보기)는 1단계로 중원침입 전에 두 가지 책략을 정하였던 것이다. 즉 서쪽으로 ?項(당항), 突厥(돌궐), 吐谷渾(토곡혼) 등을 평정하는 것이고 또 동쪽으로 발해를 정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의 실행은 곧바로 이어져서 神冊元年(916) 정월 황제 즉위 이후 바로 서방 諸國(제국) 공격을 준비하여 오다가 그해 7月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돌궐, 토혼, 당항, 소蕃(소번), 沙陀諸部(사타제부)를 쳐서 곧바로 平定 하고 그 추장과 15,600戶를 ?虜(부로)로 잡고 鎧甲(개갑), 兵伏(병복), 器服(기복) 900,000餘點과 寶貨(보화), 馳馬牛羊(치마우양)등은 셀 수 없이 많이 노획하여 凱旋(개선)하였다. 그후 발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장기 관찰을 한 결과 발해국내분소식을 접하고 바로 전면공격전을 선언하고 개전 의식을 거행하였다.

天贊(천찬) 4年(925) 12月 木葉山(목엽산)에 제사를 올리고, 이어 烏山(오산)에서 靑牛白馬(청우백마)를 잡아 天地에 제사지내고 撤葛山(철갈산)에서 射鬼箭(사귀전)을 쏘는 의식을 거행하고 그로부터 8日이 되던 날 商嶺(상령)에 진주하였다가 그날 밤 발해서방의 요충지인 扶餘府(부여부)를 포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로부터 3日후에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그 守將을 誅戮(주륙)하는 등 隊伍整頓(대오정돈)하였다가 6日후에 ?隱(석은, 典族屬官 宗正職 전 족촉관 종정직) 安端(안단)과 前北府宰相(전북부재상) ?阿古只(부아고지)등 10,000騎(기)를 선봉으로 삼아 발해忽汗城(홀간성)으로 향하다가 渤海老相兵(발해노상병)과 遭遇(조우)하였으나 쉽게 격파하고 황태자 倍(배), 皇次子 大元帥 堯骨(효골)(後日 太宗), 南府宰相 蘇,(남부재상 소) 北院夷離菫(북원이리근, 統軍馬大官後改大王) ?湟赤(두황적), 南院夷離菫 迭里(남원이리근 질리)가 夜陰(야음)을 타고 忽汗城(홀강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4日만에 哀王 大??(대인선)이 소복 차림에 새끼로 양을 묶어 끌면서 僚屬 300餘人(요촉 300여인)을 거느리고 나와 降禮(항례)를 행하였다. 阿保機(아보기)는 優禮(우례)로 석방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 사실을 渤海 郡縣(군현)에 알리는 詔諭(조유)를 내리었다. 그러나 阿保機가 近侍 康末?(근시 강말달) 등 13人을 보내어 성내의 병기를 수색하자 화가 난 나졸들이 이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겁이 난 大??(대인선)이 다시 반항하자 거란군은 다시 성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성중으로 들어가니 ??(인선)은 또다시 阿保機馬 앞에서 청죄하는 치욕을 당하였다. 그 뒤 위병들의 감시하에 족속들과 함께 성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로써 발해는 완전히 종언을 告하게 되었다.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멸망시킨 뒤 청우백마로 천지에 제사를 올리고 대사령을 내리고 천현이라 개元하고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回?(회골), 吐蕃(토번), ?項(당항), 室韋(실위), 沙陀(사타), 烏古(오고)등 외인부대장졸들에게 상을 내리고 발해국을 東丹國(동란국)이라 하고 忽汗城(홀간성)을 天福城(천복성)으로 고치고, 황태자 倍(배)를 국왕으로 삼아 통치케 하였다.

그러나 발해유민들은 쉽게 거란의 통치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발해유민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들은 대개 세 갈래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그 곳에 잔류한 유민이 있고, 둘째는 거란 영내로 강제 이주해 배치된 사람들이 있으며, 셋째는 고려로 歸附(귀부)한 사람들이 있으며, 넷째 五代나 뒷날 송으로 도피한 자들이 있다.

當地(당지)에 잔류한 유민들 중 邊地(변지)의 여러 府州(부주)들은 계속 거란에 항거하면서 녹록히 굽어 들지 않고 무너진 발해왕국의 재건을 위해 피나는 투쟁을 계속 하였다. 먼저 長嶺府(장령부), 安邊府(안변부), 定理府(정리부) 등이 반항하였고 뒤이어 南海(남해)와 鐵州(철주)등이 일어났다. 거란은 수도를 점령하고 국왕의 降服(강복)은 받았으나 全土(전토)를 控制(공제)하지 못하면 화근을 남겨 두는 것이므로 일단 전토를 순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926年 3月 거란군이 巡略(순략)을 시작하자 長嶺府(장령부)가 완강히 반항하였다. 물론 거란으로서도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당황하였던 것 같다. 長嶺府 討平(토평)을 위한 군사영관으로 귀화 문신인 韓延徽(한연휘)를 파견하였다. 파견군사령관의 능력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좀처럼 평정되지 않았고 게다가 지난 2月에 契丹軍前(거란군전)에 來朝(내조)한 바있는 安邊(안변), ?詰(막힐), 定理(정리) 三府가 연이어 반거란세력에 합세하고 나섰다. 거란은 이 三府를 평정하기 위하여 황제인 安端(안단)을 보냈다. 安端은 작전을 잘 세웠는지 아니면 군사를 많이 동원하였는지 모르지만 불과 9日 만에 三府를 平定하고 주동인물인 안변부장군 2인을 처형하고 많은 ?虜(부로)를 잡아서 돌아갔다. 그러나 장령부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그 해 5月 남해부와 정리부가 또 일어났다. 이번에는 大元帥(대원사)이며 皇子인 堯骨(요골, 후일 太宗=태종)을 보내어 平定 하였다. 그러나 그해 7月 에는 鐵州 刺史 衛鈞(철주 자사 위균)이 또 일어났다. 이에 또 堯骨(요골)이 직접 지휘하여 토벌하였으나 10여일이 걸려서야 겨우 平定할 수 있었다. 이처럼 끊길 줄 모르고 계속하여 일어나는 叛遼抗戰(반요항전)을 哀王 大??(애왕 대인선)때문으로 생각했던지 발해가 망한지 반년이나 지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거처를 급기야 上京臨潢府(상경임황부=皇都)로 移置(이치)시켰다. 그리고 발해귀족들도 함께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哀王의 이름을 烏魯古(오로고)로, 왕후의 이름을 阿里只(아리지)로 賜名(사명)하였는데 이는 太祖 아보기와 皇后 述律(술률)이 타던 말 이름이다. 오랫동안 내버려두었다가 이렇게 獸辱(수욕)으로 대한 것을 미루어 보면 필시 渤海殘部(발해잔부)의 줄기찬 항쟁과 유관한 것으로 간주된다.

일찍이 耶律阿保機(아율아보기)가 자기의 운명을 점쳐서 "丙戌秋初必有歸之("병술추초필유귀지")"라 하였던 예언이 적중하여 皇帳隊列(황장대열)이 扶餘府(부여부)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갑자기 발병하였다. 이 불의의 訃音(고음)이 거란전군에 알려지자 皇次子 堯骨(황차자 요골)은 즉시 渤海殘部(발해잔부)의 討平作戰(토평작전)을 중지하고 扶餘府(부여부)로 급귀하였다. 곧이어 皇太子인 人皇王 倍(배, 東丹國王)도 급속히 扶餘府로 돌아왔다. 곧 阿保機(아보기)의 장례는 끝났으나 皇位繼承(황위계승)은 보류된 채 황후인 述律(술률)이 국권을 잡고 앉아 遲遲遷延(지지천연)시키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자연 발해잔부의 공격도 줄어들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발해인의 저항세력은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한편 長嶺府(장령부)는 점점 더 난공불락 상태가 되었다.

이 때 鴨?府(압록부)가 인근 諸府(제부)들이 거란병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渤騎(발기) 7,000을 내어 助戰(조전)하러 나섰다가 거란장군 蕭阿古只(소아고지)의 정예부대와 遭遇(조우)하여 一戰(일전)에 3,000餘騎(여기)를 잃고 흩어졌다. 거란군은 이 승세를 타고 그해 8月에 回跋府(회발부)와 長嶺府(장령부)를 평정할 수 있었다. 이 長嶺府를 平定하기 위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해 오던 거란(契丹)이 長長 5個月이란 세월을 소모하였다면 그 전황을 가히 추측할 수 있다. 이 長嶺府의 함락으로 抗遼渤海人(항요발해인)들은 그들의 중요 근거지를 잃고 얼마간 집단저항의 근거지를 얻지 못했던 것 같다. 이 長嶺府(장령부)가 함락되기 1개월전에 阿保機(아보기)가 殞命(운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발해왕이 그 동생을 시켜 忽汗城(홀한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部衆(부중)을 거두어 돌아갔다고 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며 발해왕이라는 사람은 哀王 大??(애왕 대인선)은 될 수 없고 아마도 왕족중 유력자가 국왕으로 추대되어 국왕 노릇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때 哀王 大??은 그해 7月初 阿保機가 운명하기 전에 이미 皇都(황도=臨潢임황)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끝까지 항전하며 발해유민에게 희망을 담고 있던 장령부가 鴨?江府(압록강부), 回跋府(회발부)와 함께 무너지면서 발해유민들은 여러 갈래로 이산되고 말았다. 발해유민들이 이산을 형태별로 보면 곧 잔류, 强制遷徙(강제천사), 投歸(투귀), 抗戰(항전)등으로 나타난다. 이를 유별로 정리하면 대개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926年 (天顯元年천현원년) 7月 哀王 大??(대인선)등 귀족들을 상경 臨潢府 西方(임환부 서방)에 새로 쌓은 성으로 移置(이치)하였다. 그 숫자는 명백하지 않으나 松漠紀聞(송막기문)에 名帳 1,000餘戶(명장 1,000여호)를 燕(연)에 옮기고 토지를 주고 賦稅(부세)를 감면하였으며 자유롭게 왕래하며 무역도 하게 하고 또 세금도 받지 않는 등 대우를 해 주었다는 기사가 바로 이 때 옮긴 귀족들이 아닐까 한다.

둘째는 東丹國政(동란국정)에 참여한 일부의 渤海遺臣(발해유신)들과 그 치하의 발해유민들이다. 유신들 중에는 926年 2月 황태자 倍(배)가 東丹王(동란왕)으로 봉책되면서 僚屬(요촉)을 임명하였는데 이때 渤海老相(발해노상)이 右大相(우대상)이 되고 渤海司徒 大素賢(발해사도 대사현)이 左次相(좌차상)으로 참여하였다. 상위의 대관직에 발해유신이 이렇게 참여하였다면 하위직에는 유신들이 거의 渤海時(발해시)의 그 지위를 沿襲(연습)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도 契丹 領內(거란 영내)로 遷徙(천사), 고려로 歸附(귀부), 동남부의 抗遼州縣(항요주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옛 터전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그 숫자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遼史 地理志(요사 지리지)에 의하면 戶數(호수)가 명기된 州縣(주현)만도 18州 7縣 21,000戶이다.(人口는 대충 계산하면 105,000名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遼史 兵衛志(요사 위병지)의 丁數(정수)는 37,800名이다.(丁數가 없는 開州(개주)를 뺀 숫자임) 그밖에 戶數나 丁數를 알 수 없는 州縣도 31州 20縣이나 더 있다. 이를 숫자가 있는 州縣의 호수평균이 1주현에 840戶가 되므로 전체주현 76주현을 곱하면 63,840戶가 된다. 물론 이것은 가설이지만 어렴풋이 나마 그 윤곽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州縣은 모두 거란(契丹) 東京道內(동경도내)의 州縣(주현)들이다.

셋째 전쟁중 포로로 잡혀간 발해인들이나 强制移置(강제이치)한 戶口(호구)이다. 거란인(契丹人)들의 전쟁행태를 살펴보면 대개 巡略(숭략)하면서 人戶(인호)와 가축, 物貨(물화)를 약탈하여 均分(균분)하고 親王(친왕), 公主, 大臣들은 頭下州縣(두하주현)을 만들어 人戶를 안치하기도 하고 일반주현이나 陵戶(능호)에 移置(이치)하는 것이 그들의 습속이었다. 발해유민을 移置(이치)시킨 것을 보면 대략 2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 시기는 太祖時代로 발해를 멸망시킨 후 곧 바로 단행한 遷徙(천사)이다. 이 때 遷徙(천사)한 지역은 거의 上京道(상경도)의 17州縣(2個州, 15個縣)으로 그 戶數는 遼史 地理志(요사 지리지)에 의하면 33,800戶(약 169,000名)이며 同史 兵衛志(동사 위병지)에 의하면 軍丁數(군정수)도 65,500名에 달하였다. 어떤 縣은 縣民(현민)을 모두 옮기기도 하였다. 둘째 시기는 世宗, 穆宗(목종), 聖宗時代(성종시대)인데 이때는 대개 東京道(동경도) 및 中京道(중경도) 내의 여러 州縣(주현)에 移置(이치)시키고 있음이 특징적이다.(물론 一部 縣에는 太祖때 옮긴 人戶도 약간 있다) 그리고 漢人(한인) 등 기타 종족과 雜居(이거)시켜서 문화, 민족 등의 동질성 상실과 相互牽制(상호견제)를 꾀하였던 것 같다. 이렇게 ?虜(부로)나 遷徙(천사)된 人戶 中에는 거란(契丹) 太祖와 太宗으로부터 그 驍勇(효용)을 인정받거나 또 거란(契丹)의 柔懷策(유회책)에 의하여 國阿輦斡魯朶(국아연알로타)(거랑어로는 심복이라는 말)에 편입되어 별도로 궁의 호위를 맡는 渤海司(발해사)가 설치되었다. 그 대우는 遙輦氏(요련씨)와 奚王衆(해왕중)과 동등하였으나 그 서열은 遙輦氏(요련씨) 다음 奚王衆(해왕중)의 위였다. 그리고 官府(관부)도 北面諸帳官(북면제장관)에 속하는 遙輦九帳大常袞司(요련구장대상곤사), 大國舅司(대국구사) 다음에 渤海帳司(발해장사)이다. 자세한 관제는 알 수 없으나 다만 渤海宰相(발해재상), 渤海太保(발해태보), 渤海撻馬(발해달마 扈從之官=호종지관) 渤海近侍詳穩司(발해근시상온사)가 있고 또 北面軍官(북면군관)에 속하는 渤海軍詳穩司(발해군상온사)도 있었고 北面邊防官(북면변방관)에 속하는 渤海軍都指揮使司(발해군도지휘사사)도 있었으며 일부는 屬珊(촉산=精銳部隊정예부대)에 소속되기도 하였다. 이상으로 보아 거란(契丹)에 仕宦(사환)하거나 軍人 등으로 활동한 一部類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는 太宗이 東丹都(동란도)를 忽汗城(홀한성=天福城천복성)에서 南京(東平府)로 천도함에 따라 많은 발해인호가 동경으로 옮겨졌었다. 이때 일부는 고려로, 일부는 여진으로 도망하였다. 아마도 遷徙過程(천사과정)에서 도망자가 속출하는 것은 곤궁한 백성들이 옮기려 해도 재력이 부족하여 옮기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에 太宗은 "困乏不能遷者, 許上國富民, 給贍而隸屬("곤핍불능천자, 허상국부민, 급섬이예촉")"이라 下詔(하조)한 것을 보아 忽汗城 一帶(홀한성 일대)의 民人들을 모두 옮기려 했던 것 같다. 비록 옮기기 싫더라도 아마 그 곳에 定住하지는 못하고 東南이나 西南으로 도주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 東丹國都 遷都問題(동단국도 천도문제)는 실상 太宗이 그 兄인 東丹王에 대한 불신과 猜疑之心(시의지심)에서 빚어진 것이라고는 하나 만만치 않은 발해유민집단을 분산하려는 의사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에는 국외로 投附(투부)한 유민들의 정황을 살펴보겠다. 그들이 가장 많이 投附한 곳이 陸接(육접)하고 있는 고려이다.

高麗太祖 王建(왕건)은 거란(契丹)이 발해를 멸망시킨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太祖天授(태조천수) 25年(942) 契丹使行(거란사행) 30人이 낙타 50匹(필)을 선물로 몰고 와서 好和(호화)를 청하자 太祖는 "契丹嘗與渤海連和, 忽生疑貳, 背盟殄滅, 此甚無道, 不足遠結爲隣("거란상여발해연화, 홀생의이, 배맹진멸, 차심무도, 부족원결의린")"이라 하고 交聘(교빙)을 끊고 使者(사자)를 海島(해도)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다리 밑에 매어 굶겨 죽이는 등 강경 일변도였고 거기다 한술 더 떠서 後晉(후진)의 승려 襪羅(말라)가 오자 이 襪羅(말라)를 시켜 後晉 高祖(후진 고조)와 동맹하여 거란(契丹)을 치고자 시도한 적도 있었다. 이런 太祖였으므로 발해유민들이 歸附(귀부)해 오는 것을 환대하였다. 어떤 때는 田莊(전장)을 하사하고, 또 어떤 때는 작위를 내리고, 賜姓(사성)을 하는 등 자못 후대하였다. 특히 934年(太祖 17) 7月 世子 大光顯(세자 대광현)이 歸附(귀부)했을 때에는 宗籍(종적)에 편입시키고, 元甫職(원보직)을 내리고 白州(백주)를 지키며 渤海宗祀(발해종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러면 발해유민이 고려에 歸附(귀부)한 수가 얼마나 되었을까? 이들이 歸附(귀부)해 온 시기를 2期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1029年(太平 9) 大延琳(대연림)의 興遼國(흥료국)을 기점으로 하여 전후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925年(天授 8)에서 979年(景宗 4)까지를 1期 로 하고 1029年(顯宗=현종20)부터 1117年(睿宗=예종12)까지를 2期로 나누어 보겠다. 1期는 발해멸망직전 내부의 알력과 또, 멸망 직후 거란(契丹)이 渤海殘部(발해잔부)를 토벌하자 이들과 항쟁하다가 피해 오거나 또는 東丹都 遷徙時(동란도 천사시)에 도망한 者, 抗遼勢力間(항요세력간)의 알력에서 도망한 者 등으로 보이며 한 집단의 수가 매우 많은 것이 특징이며 상당히 지위가 높은 대관들이 많았다. 1期에 歸附(귀부)한 숫자에 대하여 다소 논란이 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약 63,000명 정도로 나타나는데 뒷날 이를 근거로 기술한 문헌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즉 東國通鑑(동국통감 卷 12)에는 數萬戶(수만호)로 渤海國志長編(발해국지장편 卷 16)에는 [人有數萬之多(인유수만지다)]라 하였으며 柳得恭(유득공)의 渤海傳(발해전)에는 [十餘萬人]이라 하였다. 왜 이런 해석이 나왔을까? 고려사의 기술이 발해세자 大光顯(대광현)이 來投(내투)한 기사에 [率衆數萬來投(솔중수만 내투)]에서 비롯되었다. 1期에 來投(내투)한 다른 기사가 혹은 戶數(호수) 혹은 人數(인수)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人數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만약 戶數로 본다면 景宗(경종) 4年(979)의 [數万(수만)]과 합쳐서 4万戶 其他 22,800人을 합하여 계산하면 약222,800명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인구를 宋史 高麗傳(송사 고려전)에서 2,100,000이라는 숫자를 문종, 예종시대수치로 본다면 고려초기는 불과 1,500,000정도였을 것이다. 농경기술이 그리 발달되지 못했을 이 때에 과연 6分의 1 가량의 投歸者(투귀자)들을 수용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宋으로 投化(투화)한 자들도 있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燕地域(연지역)으로 移置(이치)되었던 遺衆(유중)이 끝내 동화되지 못하고 979年(태평흥국 4) 宋遼戰後(송요전후)에 종정하였던 일부 발해중 酋帥 大鸞河(추사 대란하)와 少校 李勛(소교 이훈) 등 16人이 주동이 되어 부대가 幽州(유주)에 머물 때 부족 300騎(기)를 거느리고 宋으로 투항하였다.

이렇듯 발해유민들은 거란(契丹)의 徙民政策(사민정책)에 의하여 契丹國內(거란국내)의 각지에 옮겨져서 漢人(한인)이나 기타의 민족과 混居(혼거)하면서 거란(契丹)의 控制(공제)를 받았으며 일부는 抗遼勢力(항료세력)에 가담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외국으로 投歸(투귀)하는 등 발해유민은 점차 살아져 갔다. 이것은 비단 발해인 뿐만 아니라 漢人(한인), 女眞(여진), 高麗人(고려인)들도 역시 같은 방법의 대우를 받았다.

Ⅲ. 발해유민의 초기재건운동

1. 후발해

앞서 기술한바와 같이 발해멸망 직후부터 일부 중앙의 유민세력과 거란(契丹)에 점거되지 않았던 서남부의 여러 府州(부주)의 抗遼復國運動(항요복국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거란군)契丹軍에 의하여 중요 부주가 토평되고 한동안 거처를 찾기 위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나 契丹 太祖가 서거하고 황위계승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황후 述律(술률)이 상당기간 국정을 천단하였고 급기야 황차자 堯骨(효골)이 계위하면서 여기에 따르는 무리는 뒷날까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 兄인 東丹王(동란왕)이 세력을 길러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문제 삼을 경우을 우려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정략적인 천도와 감시로 동단왕을 경계하던 중 930年(天顯천현 5) 후당으로 망명하자 태종은 한시름 놓은 채 부당한 계위를 보상하려는 심리에서 인지 중원경략을 획책하여 마침내 석경당을 도와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을 창업하게 하였다. 얼마 후 다시 후진을 멸망시키는 등 중원정국간여에 여념이 없었다. 그가 귀국도중 난하에서 급사하자 남정군중에

황위계승 자격자로는 동단왕의 아들 兀欲(올욕) 밖에 없어서 그가 계위하게 되었다(世宗). 이에 불만을 품은 조모인 述律太后(술률태후)와 叔父 李胡(숙부 이호)가 兀欲(울욕)의 入京을 저지하므로 해서 한 동안 대치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온 나라가 그 정국 수습에 진력하게 되었다, 世宗이 이렇게 어렵게 皇位를 얻었지만 그 위인이 平庸(평용)하여 邊地(변지)의 동태는 물론 자기 수하인들의 인심동향 마저 살피지 못해서 결국 재위 4年만에 弑害(시해)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穆宗(목종, 太宗의 長子 壽安王수안왕)은 좀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술과 사냥으로 소일하며 小臣들을 죽이는 것을 즐길 정도였다. 더구나 낮에는 자고 밤에는 술을 마시는 버릇으로 백성들은 그를 [睡王수왕](잠자는 왕)이라 별호를 붙일 만큼 정치에는 게으름을 피웠다. 그러나 결국 39세의 젊은 나이에 近侍(근시)의 食刀(식도)에 生을 마감하였다. 그 뒤 世宗의 둘째 아들 耶律賢(야율현)이 계위하였으나(景宗) 그 역시 凡常한 君主는 못되었다. 따라서 이 3帝治世 36年間은 自保에 급급할뿐 遠方諸處(원방제처)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때를 틈타서 東北一隅(동북일우)의 발해유민과 여진인들이 滋蔓(자만)하여 거란(契丹)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세력형성이 이루어 졌다. 곧 후발해가 존재한 生女眞이라는 지역이 생겼다.

3帝와 聖宗初期(성종 12세즉위 소태후 섭정)에 이르는 기간에 발해유민들이 후발해를 세웠다, 그러나 史料(사료)의 부족으로 연구의 한계성이 있어서 추측에 의한 주장이 있을 뿐이다.

먼저 선학들의 所論(소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후발해의 건국은 언제 되었는가? 日人 日野開三郞(일야개삼랑)은 929年 5月 以前이라 주장하였고, 북한 朴時亨(박시형)은 발해멸망후 그리 오래지 않은 시기에 건국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건국운운 하는데 대해서는 고려의 여지가 없지 않다고 본다. 비록 발해 末王(말왕)인 大??(대인선)이 上京에 移置(이치)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忽汗城(홀한성)에서 옮겨진 것은 발해 멸망후 6個月이 지난 뒤의 일이므로 적어도 大??(대인선)이 臨潢府(임황부)로 옮기기 전후 얼마의 기간에는 건국이라는 名分이 없었을 것이고 게다가 不意에 급습을 당하여 멸망한 처지라서 부국을 위하여 여러 지방의 세력이 부동의 기간에 반요운동을 펼치었으므로 그 기간 중에는 중심세력이 없었던 듯 하며 926年 8月 回跋府(회발부)와 長嶺府(장령부)가 평정되면서 중요 근거지를 모두 잃고 한동안 세규합에 진력하였다가 鴨?府(압록부)와 南海府(남해부), 龍泉府(용천부)등 거란에 유린되지 않은 府들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中心勢力이 形成되면서 홀한성쪽으로 세확장에 노력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존속기간에 대해서도 日人 和田淸(화전청)은 후발해이후 정안국이 건국까지로 보아 10餘年으로 보았으며, 日野開三郞(일야개삼랑)은 1007年(統和통화 25)頃까지로 보아서 81年間으로 추정하였다. 여기에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대씨발해의 부흥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화전청의 주장이 타당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934年(高麗太祖 17, 天顯 9)에 世子 大光顯(대광현)이 고려에 투귀한 것은 烈氏(열씨)가 대씨발해을 이어받고 太子 大光顯이 계승치 못한 이유가 있지 않을가 한다.

다음에는 후발해의 중심위치가 어디냐는 것이다 이용범 교수는 후발해, 정안국이 모두 압록강류역에 자리잡았고 이 곳에서 성장, 발전하였고 또, 정권이 교체되고 여기서 멸망하였다고 하였다. 또 日野開三郞(일야개삼랑)은 대발해 수도였던 龍泉府(용천부)라 하였으며, 朴時亨(박시형)은 옛 발해의 扶餘府(부여부)가 가까운 곳이라 하였다. 그러나 忽汗城(홀한성)은 東丹都(동란도)를 移置(이치)하면서 그 일대의 民戶(민호)를 모두 遷徙(천사)시키고 一空이 된 상태였고 扶餘府(부여부)는 곧 거란 黃龍府(황용부)로 東北을 控制(공제)하기 위한 군사주둔지가 그 부근에 布列(포열)되어 있어서 여기도 부적한 곳이다. 지정학상으로 본다면 다만 압록강류역의 鴨?府(압록부)만이 적지라 하겠다. 압록부에는 神, 桓, 正, 豊 四州(신, 환, 정, 례 4주)가 있는데 그 중 어느 곳일 것이다. 이 곳은 鴨?府(압록부), 南海府(남해부), 龍原府(용원부), 長嶺府(장령부), 顯德府(현덕부)의 中心에 위치하고 있어서 각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후발해는 세력의 성장과 함께 5대와도 교섭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929年(天成 4) 高正詞가 후당에 들어가 방물을 바치자 明宗은 그에게 太子洗馬(태자세마)의 관직을 사하였으며 931年(長興,장흥 2)에는 成文角(성문각)이 후당에 갔었으며 그 다음 해인 長興 3년에도 使臣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었고 935年(淸泰,청태 2)에는 南海府都督 列周道(남해부도독 열주도)가 方物을 바치고 檢校工部尙書職(검교공부상서직)을 받고 왔으며, 같이 갔던 吳濟顯(오제현)은 試光祿卿(시광록경)을 받고 왔다. 이 사행이 파견된 기간은 929年부터 935年까지 였다. 이 짧은 기간 몇 차례밖에 안 되는 사신 파견기록이지만 당시 후발해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史料이다.

2. 定安國(안정국)

遼 太宗代(요 태종대)에는 여진, 鐵驪(철려), 靺鞨(말갈), 達盧古(달로고)等이 순순히 공납을 하더니 穆宗(목종), 景宗時(경종시)에 와서는 다만 여진과 철려만이 부정기적으로 공납하여 왔다. 이때 발해유민국인 정안국과 ?惹國(왕야국)은 宋과 통교하면서 거란에게는 완전히 적대시하고 있었다. 경종년간에 들어오면서 여진이 거란의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감행하자 발해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保寧(보령)7年(975) 발해인 黃龍府衛將 燕頗(황룡부위장 연파)가 거란에 반기를 들고 都監 張?(도독 장거)를 죽였다. 이때 景宗은 耶律葛里必(야율갈리필)을 보내어 토벌케 하였다. 그러나 도망하는 部衆(부중)을 追捕(추포)치 못하고 회군하였다.

이러한 사건들로 거란은 점차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참인데 마침 중원을 통일한 宋 太宗이 여세를 몰아서 979年(太平興國 4年) 正月 친히 북한정벌을 나서서 곧 易州(역주, 현 河北徐水하북서수) 및 ?州(탁주 현 河北?縣하북탁현)을 점령하고 곧바로 幽州(유주)에 이르러 幽州城(유주성)을 포위공격하기 旬日(순일,10일)이 지났으나 拔城(발성)하지 못하고 진퇴만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요의 大將 耶律休哥(야율휴가)가 북한을 도우려 진군해 왔었다. 이에 송요양군이 접전 끝에 송군이 高梁河(고량하 현 年平西直門外)에서 대패하고 태종도 홀로 驢車(여거)를 타고 逃遁中 流矢(도돈중류시)에 맞아 겨우 목숨만 유지하는 곤경을 겪었다. 太宗은 이 전역을 부끄럽게 여기고 다시 한번 설욕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 뒤 宋遼(송요)의 변경에는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쪽 하나 크게 진전은 없었다. 이때 遼 景宗(요 경종)이 붕어하고 경종장자 聖宗이 年이 12歲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宋은 이것을 기회로 여겨서 요를 다시 정벌하려고 준비하였다. 이번에는 지난번의 쓰라린 경험을 되살려 철저한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 일환으로 대외교정책을 펴 나갔다. 먼저 요와 관계가 나쁜 고려와 정안국과 ?惹國(왕야국)과 結構(결구)하려고 노력하였다. 太宗은 이들과 ?角之勢(기각지세)를 이루어 腹背(복배)에서 공격을 하면 거란군의 세력분산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안국은 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 거란의 국내사정으로 인하여 거란의 영향이 미치지 않고 있던 地域에 있었다. 그러나 국내의 정변을 거듭하느라고 세력이 대단하지 못하였다. 宋史에 의하면 본래 馬韓(마한)의 종족으로 거란에 攻破(공파)되어 그 酋帥(추수)가 남은 무리들을 규합하여 西鄙(서비)에서 건국하고 開元(개원)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스스로 定安國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彊域(강역)도 꽤 넓었던 것 같다. 이용범박사는 추정하기를,

그 강역은 옛 발해의 서경 압록부 아래쪽의 神州, 桓州, 豊州, 正州의 압록강 유역의 3주와 북으로는 長嶺府 즉 현재의 輝發河 상류의 山城子까지를 포함하고 동으로는 당시까지 아직 거란군의 유린을 겪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던 함경도의 옛 발해의 남경과 동경을 포함한 간도 전역은 물론이거니와 그 북의 松花, 牧丹 양강의 상류지역까지 포함된 후발해의 그것을 계승해 왔던 것으로 믿어진다.

고 하였다. 만약에 이와 같이 광대한 지역에 골고루 행정능력이 미치어 조직적인 부흥운동을 전개했더라면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구발해왕조의 부흥이란 생각이 변해져 갔다. 그리하여 후발해의 중심세력이었던 大氏가 쫓겨나고 烈氏(열씨)가 국왕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定安國이란 나라를 세웠으나 烈氏王朝도 곧바로 權臣(권신)인 烏氏(오씨)에 도전을 받았던지 얼마 안가서 烏氏가 王이 된다. 필자가 살펴 본 결과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일로 보아 부흥운동이라기 보다는 이미 부흥된 후발해 위에서 왕권투쟁을 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첫째, 발해 멸망 후 꼭 일곱 해 뒤인 934年(후당 폐제 즉위년, 賜太宗 天顯,사태종 천현 9年)은 요 태종이 한창 후당의 정국변화에 관심을 쏟고 있던 때이므로 동북의 후발해 즈음은 염두에 없을 때인데 세자 대광현이 부중수만이나 인솔하고 고려에 투부했다는 것은 후발해내의 세력다툼에서 대씨일파의 실세로 보아지며,

둘째, 대광현이 고려에 투부한지 36年이 되는 970年(개보 3年)에 정안국왕 烈萬華(열만화)가 송에 표문을 보냈던 것으로 보아 지난번(934年) 大氏를 몰아 낸 세력이 열씨가 아니었나 생각되며, 또 973年(開寶 6年)에 宋에 보낸 표문에는 국왕이 烏玄明(오현명)으로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열씨에서 오씨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후발해가 五代와의 교섭에서 발해 세자 大光顯(대광현)이 고려에 投附(투부)한 이듬해(935年)까지는 발해(발해는 이미 927연에 멸망되었음)라 칭해 왔는데 그 다음부터는 발해란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對宋 교섭시는 아예 定安國으로 국호를 썼다. 그리고 남송열전에서도 열씨와 오씨의 정안국과 발해국을 별도로 다루었다.

장기적인 정권 싸움으로 國基(국기)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비록 영역은 넓다고 하나 政令(정령)이 고루 미치지 못하고 또 협심협력하지 못했던 관계로 그리 세력을 떨치지 못하고 말았다.

거란이 원래 의도한 최종목표는 중원진출에 있었다. 앞서 기술한 西征(서정), 東伐(동벌)은 그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태종이 하북진출에 성공한 나머지 渤海餘衆攻討(발해여중공토)는 중지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발해 옛 영역은 부흥세력이 자만할 수 있었다. 太宗도 발해여중에 일격을 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숙지하고 있었겠지만 利(이)가 큰 중원진출로 여가가 없었고, 또 귀로에 급사하고 말았으며, 그 뒤를 이은 世宗, 穆宗(목종), 景宗(경종)은 재위기간이 짧고 또 위인이 정략이 없어 거란국세는 일시 ?削(산낙)된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러자니 국가의 장원한 계책을 세워 추진해 나갈 수 없었다.

景宗의 뒤를 이어 聖宗이 帝位(제위)에 오르자 母后(모후)의 지극한 보살핌과 몇몇 보신들의 보좌로 즉위초부터 군국중사를 완급을 따라 하나씩 하나씩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중원땅에 53年間이나 혼국이 계속된 까닭으로 그 시기를 이용하여 漠北(한북)을 통일할 수 있었고, 또 石晉(석진)을 공멸하고 河北地方(하북지방) 깊숙히 진입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거란이 수대동안 정정이 불가한 틈에 송이 중원을 통일하고 그 여세가 漠北(한북)까지 밀려와 石晉(석진)때 遼(요)가 취득한 燕雲(연운) 16州 탈환을 시도하는 전쟁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 첫 번째인 979年 戰에서는 高梁河(고량하)에서 가볍게 물리쳤지만 宋太宗이 再圖(재도)를 위해 거란의 배후에서 叛遼復興國(반요복흥국)을 이루고 있던 定安國과 ?惹國(왕야국)을 선동하고 출사시기를 정하는 등 자못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인후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거란으로서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는 상황에 왔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더 방관못할 일은 고려의 태도였다. 발해멸망후 발해유중을 영입 하고 거란을 禽獸之國(금수지국)이라 하여 夷狄視(이적시)하고 交聘(교빙)하지 않았으며 石晉 때 高麗 太祖가 西域僧襪?(서역승말라)를 맞아 晋高祖와 연합하여 거란정벌을 논의한 바 있었고 그 후 晋 출제때 진측에서 연합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으니 거란이 이런 움직임을 모를리 없었고 또 高麗가 周, 宋과 통교하여 빈번한 왕래가 이루어지자 고려정토가 급선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와는 祖宗以後尙今(조종이후상금)까지 직접충돌은 없었지만 충돌의 요소는 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宋太宗이 高梁河之役以後 聯麗制遼策(연려제료책)을 강화하고 또 使臣 韓國華(한국화)를 보내어 출정을 재촉하는 등의 자세는 契거란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요는 먼저 송의 좌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려를 경략하여 송세력을 전제하고 그리고 송과 겨룰 작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統和元年(통화원년) 곧바로 행동에 옮겼던 것이다. 그 첫 시도가 고려정벌에 있어서의 길목을 여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983年(統和元年) 10月 병마를 정돈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宣徽使兼侍中 蕭蒲領(선희사겸시중 소포령)과 林牙 蕭肯德(임아 소긍덕)이 東征軍(동정군)에 임명되어 旗鼓(기고)와 銀符(은부)를 받고 동정길에 올랐다.

다음 해인 984年(統和 2年) 4月까지 約 6個月間 압록강하류를 정벌하고 일단 개선하였다. 그로 인하여 정안국과 고려에 직접압력을 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직 고려경내로 막바로 내닫기에는 정안국이 마음에 걸렸던지 주저하기 1개년여세월이 흘렀다. 그간 준비를 하였다가 985年(統和 3年) 7月 다시 甲兵整頓令(갑병정돈령)을 내리고, 또 東征軍(동정군)의 병기와 도로를 점검하는 등 자못 서두르더니 그 해 8月 출정을 시도하였으나 沼澤(소택)에 물이 많아서 군마의 이동이 불편하므로 일단 중지하였다. 그 해 閏 9月 얼음이 얼고 물이 자자지기 시작하자 그 틈을 타서 東征再開令(동정재개령)을 내리었다. 그 후 약 5個月만에 정안국을 평정하고 그 이듬해인 986年(統和 4年) 林牙 耶律謀魯姑(야율모로고)와 彰德軍節度使 蕭?覽(창덕군절도사소달람)이 먼저 돌아오고 뒤이어 樞密院使 耶律斜軫(추밀원사, 야율사진) 林牙 蕭勤德(소근덕) 等이 개선한다. 그때 정안국은 완전히 망하게 된다. 遼史(요사)에 의하면 林牙 耶律謀魯姑(야률모로고)와 彰德軍節度使 蕭?覽(창덕군절도사소달람)이 바친 동정부획물외에도 樞密使 耶律斜軫(추밀원사, 야율사진)과 林牙 蕭勤德(소근덕)이 올린 부획물은 生口(인구)가 10餘萬이요, 馬가 20여만필이나 되었고 그 밖의 물건들도 많았다.

그 뒤에도 몇차례 대소공격이 계속되는데 이것은 아마 渤海餘衆(발해여중)이 도입해간 곳을 찾아 행해진 공략이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5年이 지난 991年(統和 9年)에는 압록강하에 威寇(위구), 振化(진화), 來遠(래원)等 三城을 축조하고 屯戌兵(둔술병)을 배치하여 忽汗水畔(홀한수반)의 ?惹國(왕야국)과 여진 등의 대송통로를 막았다.

요가 정안국을 정벌한데는 고려정벌에 후환이 될 점도 있거니와 정안국이 직접 宋과 통교하면서 宋 太宗의 북벌계획에 동조하여 국서의 왕래가 잦은 등의 행위에 원인하였다고 보겠다. 그 당시 상황으로 宋은 거란의 배후에 자리잡은 정안국의 원병이 필요하였고 정안국 역시 자국의 부지 내지 대거란전쟁을 감안할 때 聯宋制遼之策(련송제요지책)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안국이 송과의 관계를 더욱 본격적으로 교섭하려고 나섰던 것은 981年(太宗 太平興國 6年) 이후이다. 즉 태평흥국중 송태종이 원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음을 듣고 981年 겨울 정안국왕 오현명이 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거란의 재화가 곧 미칠 것을 염려하고 宋의 밀획을 받아 승병을 거느리고 조토에 나서겠으며 명을 어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宋太宗도 동심협력하여 같이 거병하여 보자는 요지의 하조가 있었다. 그 이후 순화 2年(991年 요성종통화 9年)까지도 그 명맥은 유지하며 표문을 보내고 있었다.(정안국은 이미 985年에 멸망되었음) 한마디로 정안국의 성격은 요에 굽히지 않고 절의를 지킨 발해유중으로 自保를 위한 小國家에 지나지 않았다. 결코 발해왕조를 부흥시키려는 집단이 아니라 후발해의 지도적 지위였던 대씨를 몰아내고 열씨가 왕이 되었다가 다시 오씨가 왕이 되는 등 왕권의 교체도 잦았을 뿐 아니라 부흥이라는 것과는 이미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다.

3. ?惹(왕야)

?惹(왕야)는 忽汗水(홀한수)의 상류인 上京龍泉府(상경용천부)와 中京顯德府(중경현덕부) 사이에 있는 忽汗湖(홀한호) 부근에 위치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惹(왕야)의 위치에 대하여 續資治通鑑長編(속자치통감장편)에 의하면 ?惹(왕야)는 東京城(동경성, 遼陽城) 東北 600里에 위치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그 국경은 동남으로 고려와 접하고, 또 북으로 여진에 이르고, 동쪽으로 압록강을 넘으면 곧 신라라고 하였다. 이 신라라고 한 데는 혼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렴풋이나마 그 위치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여기에 대하여 일인학자 池內宏(지내굉)도 ?惹(왕야)는 鐵驪(철려)와 고려북계의 중간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人戶가 10,000餘戶나 되었다고 하며 한자를 썼고 또 印(도장)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惹란 名도 문헌통고에는 烏舍城浮?府琰府王(오사성부투부염부왕)이라 하였는데 宋史의 烏舍城을 말하며, 遼史에는 ?惹部, 또는 屋惹國(옥야국)이라 하였으며 宋史, 松漠紀聞(송막기문), 契丹國志(거란국지) 等에는 烏舍(오사), 屋惹(옥야), 溫熱(온열), 金史(전사)에는 ?的改(왕적개), 烏底改(오저개), ?史(왕사)에는 吾者(오자), 明史(명사)에는 ?者(왕자), ?狄哈(왕적합)이라 부른 것이 ?惹(왕야)이다.

일찍이 宋과 통왕하면서 宋과 연합하여 요를 공략할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995年(統和 13年) ?惹王 烏昭度(오소)도 <屬國表(촉국표)에는 烏昭羅였음>와 燕頗(연파)가 함께 鐵驪國(철려국)을 공격하였다. 철려국은 거란에 급히 이 사실을 고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거란은 즉각 奚王和朔奴(해왕화삭노)로서 都部署(도부서)를 삼고, 蕭恒德(소항덕)으로 副部署(부부서)를 삼고, 耶律斡臘(야율알랍)으로 行軍都監(행군도감)을 삼아서 곧바로 출정하였다.

거란(契丹)이 선뜻 출정한 裸面(裸=裏이면)에는 두가지 理由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는 지난번 발해인 연파가 반란하여 요의 추격을 피하여 ?惹城(왕야성)에 피한 것을 잘 庇護(비호)해준 일 때문이고, 둘째는 宋太宗이 岐溝關戰役以前 助戰出兵(기구관전역이전 조전출병)을 요구하자 받아들인 때문이다. 이 두가지 일을 되돌려 상술해 보면 출정이유가 자명해진다.

연파사건은 곧 975年(保寧 7年) 黃龍府衛將 燕頗(황룡부위장 연파)가 都監 張?(도감 장거)를 살해하고 요에 반하자 遼廷(요정)은 敞史 耶律曷里必(창사 야율갈리필)을 보내어 평정케 하였다. 그가 출정한지 두달이 지난 그해 9月 치하에서 격전을 벌인 결과 연파가 패주하였다. 야율갈리필이 그 동생 安博(안박)을 보내어 추격케 하였다. 그러나 연파는 부중을 이끌고 왕야성으로 피하였다. 安博(안박)은 더 이상 추격치 못하고 회군하게 되었다. 그 뒤 연파는 일당 1,000여호를 거느리고 왕야성을 나와 通州城(통주성)을 쌓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더 이상 방치하면 隣近諸部衆(인근제부중)을 통합하여 거란(契丹)에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할 가능성을 생각하였던 것 같다.

두 번째의 결송공벌은 곧 981年(太平興國 6年) 宋太宗이 대거공요를 앞두고 서로 출정시기를 정하였던 것이다. 그때 宋太宗이 왕야국에게 발병상응하도록 하조한 조문을 보면,

朕纂紹丞構, 奄有四海, 普天之下, 岡不率?, ?太原封城, 國之保障, 頃因竊據, 遂相承襲, 倚遼爲援, 歷世逋誅, 朕前歲親提銳旅, 盡護諸將, 拔幷門之孤壘, 斷匈奴之右臂, 眷言吊伐, 以蘇黔黎, 蠢玆北戎, 非里構怨, 輒肆?食, 犯我封略. 一昨師逆擊, 斬獲甚衆. 今欲鼓行深入, 席捲長驅, 焚其龍庭, 大殲醜類, 索聞爾國寇讐, 迫於呑倂, 力不能制, 困而服屬, 困於宰割. 當靈旗破敵之際, 是隣邦雪憤之日, 所宜盡出旗帳, 佐予兵鋒, 俟其?滅, 沛然封賞, 幽?土宇, 復歸中原, 朔漠之外, 悉以相與, ?乃協力, 朕不食言.

이라고까지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왕야세력은 제법 컸던 것으로 간주된다. 宋史에서도 발해국전에 이 이야기를 실었고, 續資治通鑑長編(속자치통감장편)에서도 981年(太平興國 6年) 7月 丙申日(병신일)에 장차 대거 거란정벌을 앞두고 사자를 보내어 발해왕에게 하조하였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왕야도 곧 후발해의 계통을 이은 것이라 간주된다.

그렇듯 출정조원을 약속했으나 그러나 宋遼開戰之日(송요개전지일)에는 遼軍(요군)이 두려워서 감히 발사하지 못하고 자기보호에 급급할 뿐이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왕야정벌에 나선 전술한 和朔奴軍(화삭노군)은 鐵驪(철려)에 留陣(류진)하며 수개월 동안 휴식을 취하고 군위를 보이자 왕야가 스스로 항복을 청해 왔다. 그러나 교만해진 거란군은 청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虜(부노)를 얻을 생각으로 급작이 왕야성을 공략하였다. 이에 궁지에 몰린 왕야왕 烏昭度(오소도)는 계책을 내어 戰棚(전붕)을 虛構(허구)하고 ??(비예)사이에 적군을 유도하여 적군이 비에 오르면 지주가 부러지면서 위에 오른 자는 모두 죽게 되는 전략을 썼다. 이런 전법에 도저히 당해낼 도리가 없음을 깨달은 도부서 和朔奴(화삭노)가 회군하려고 하자 부부서인 동경유수 소항덕이 극구 반대하고 나왔다. 그는 회군반대이유로,

吾奉詔來討, 無功而還, 諸部謂我何若, 深入多獲, 猶勝徒返從.

이라고까지 하면서 전리품으로 生口를 얻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행군도감 耶律斡臘(야율알랍)은 蕭恒德(소항덕)의 심입공략론을 못마땅하게 여겨 "深入恐所得不償所損"("심입공소득불상소손")이라 우려를 표시하였으나 끝내 항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 그의 주장을 따라서 왕야성동남지를 순략하고 고려북비를 돌아서서 회군하였다. 그러나 길이 生疎(생소)하고 지형이 험조하여 인마사상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의 정황을 요사 해화삭노전에서 보면,

副部署蕭恒德, 讓掠地東南, 循高麗北界而還, 以地遠糧絶, 士馬死傷甚衆

이라 기술하고 있다. 이 정벌은 遼廷(요정)으로써는 득보다 손이 훨씬 큰 전역이었다. 어줍지않게 생각하고 호기를 부리던 당시 북아의 대국이 일개 보잘 것 없는 부중에 패하고 게다가 회군중 스스로 궤멸하는 꼴이 되었으니 승리만 거듭하던 聖宗으로서는 노기를 억누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996年(統和 14年) 4月 패전의 죄를 물어 왕야정벌에 참여하였던 奚王和朔奴(해왕화삭노)와 東京留守 蕭恒德(동경유수 소항덕)등 5人將帥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그 다음해인 997년(統和 15年) 왕야왕 烏昭度(오소도)가 거란군의 재침을 염려하여 스스로 降附(항부)해 왔다. 그러자 요는 再征(재정)의 구실을 잃고 요와 왕야의 불화는 끝나고 말았다. 그 뒤 요는 왕야, 蒲盧毛朶部(포로모타부), 曷懶女眞(갈라여진) 방면으로 진출하려고 노력을 계속하였으나 끝내 성공치 못하고 말았다.

비록 만기에 가서 요의 군세에 항부하여 공을 바치기는 하였다 하더라도 스스로 行한 자구행위였으며 요의 세력이 직접 미치지는 못하였다.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부흥국을 이룩하지는 않았으나 東北 깊숙히 요의 세력이 침투치 못하도록 제지하는 몫을 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Ⅳ. 晩期 再建運動(만기 재건운동)

1. 大延琳(대연림)의 興遼國(흥요국)

거란의 오랜 외정으로 확대된 국경은 군민들에게 그만큼 부담을 가중시켰다. 더욱이 피정복민인 발해·?項(당항)·吐渾(토혼)·奚(해)·室韋(실위) 등은 잦은 정복사업에 참여해야 하는가 하면 동남수만리전선에 수자리를 살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또 상당수가 병기제작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그 生活은 곤약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병합되어 요의 일부민화되었지만 완전히 동화되지는 못하였다. 비록 政·軍 等 국가통치기구에 참여하고 있어도 역시 그 한계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비록 발해가 타부에 비하여 우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1019年(開泰 8年) 오랫동안 끌어오던 麗遼(려료)의 투쟁에서 화해가 모색되고 화평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거란은 지난번 고려와의 전쟁에서 몇번이나 실리를 거두고 돌아 온 쓰라린 경험을 상기시키시면서 고려서북변의 戌兵(술병)을 완전히 철수시키지 못하고 鴨綠江畔(압록강반)의 보주·선주 양진을 남겨 놓았으며 고려 역시 요의 이러한 미지근한 태도를 방관만 할 수 없어서 北鄙(북비)의 接遼國境地帶(접요국경지대)의 동향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어쨌든 가장 큰 문제였던 대고려관계가 정상궤도에 오르자 요는 동요지방에 비로서 刻苦監?之法(각고감국지법)과 關市之征(稅)(관시지정(세))을 시작하였다. 그 시행초에 馮延休(빙연휴), 韓紹勳(한소훈) 등이 좀 심하게 하자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이와 같은 대내적으로 어수선한 기회를 이용하여 東京舍利軍詳穩(동경사리군상온) 大延(대정림)琳이 1029年(太平 9年) 部衆(부중)을 이끌고 거사하였다. 그들은 먼저 東京留守駙馬(동경유수부마)를 蕭孝先(소효선) 과 南陽公主(남양공주)를 가두고, 戶部使 韓 終勳(한종훈), 副使 王嘉(왕가), 四捷軍都指渾使(사첩군도지혼사) 蕭頗得(소파득) 等을 죽였다. 그리고 大延琳(대연림)이 스스로 등위하여 국호를 興遼(흥요)라 하고 天慶(천경)이라 建元(건원)하였다. 그는 곧 관부의 장을 임명하고 주변의 각주현이 모두 내부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미구에 남북여진이 모두 대연림에게 내부하였다. 그리하여 한때 그 세력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서방의 瀋州(심주)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였다.

한편 요정은 대연림이 거사하던 날 밤 부유수 왕도평이 성을 몰래 넘어 도망하여 사변을 고하므로 동경의 변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곧 제도병을 징집하는 한편 우선 가까이 있었던 國舅詳穩 蕭匹敵(국구상온 소필적)에게 本部管轄兵(본부관할병)과 家兵으로 要害處(요해처)를 방어하고 대연림의 서방진출을 막는 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또한 渤海太保 夏行美(발해태보하행미)도 군사를 거느리고 보주에서 屯戍(둔수)케 하였다. 이때 대연림이 밀서를 하행미에게 보냈는데 이것을 통수 耶律蒲古(야율포고)에게 알리자 행미휘하 발해병 800餘名이 포고의 손에 살륙되었다. 대연림은 행미의 배반으로 동로로 나갈 길이 막히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황룡·보주가 모두 내부하지 않음을 알고 서방으로 진출하여 심주를 취하려 하였다. 이때 요정에서 절도사 소왕육과 절도부사 張傑장걸(主張假降주장가항, 退興遼軍以其功퇴흥요군이기공 自瀋州節度副使자심주절도부사 當瀋州節度使당심주절도사)이 대연림에게 항복을 청하므로 연림이 사기를 늦추고 있는데 요군은 그 기간을 이용하여 준비를 완료하였다. 대연림이 속은 줄 알고 공격하였을 때에는 이미 때는 늦었다. 그리하여 끝내 발성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다만 남방에는 남방여진이 모두 추종하고 고려 또한 적대시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였다. 그때 고려는 대연림의 거사를 전해 듣고 조신간에는 요에 대한 설욕의 기회로 보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때 주전론자는 형부상서 곽원이었다. 원은 어전회의석상에서 "鴨綠江東岸契丹保障, 今可乘機取之"("압록강동안거란보장, 금아승기취지")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崔士威(최사위)·徐訥(서눌)·金猛(금맹) 等의 시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반대에 부딪쳐 결국 성공치 못하였다. 최사위 等 신중론자의 변으로는,

兵者危事, 不可不愼, 彼之相攻, 安知非我利耶, 但可修城池, 謹烽燧, 以觀其變耳.

라고 하였다. 국왕도 최사위의 신중론을 따라 관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郭元(곽원)은 끝내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변의 요의 둔수지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 성내다으로 發疸(발달)이 생겨 죽었다.

延琳(연림)이 瀋州敗退以後(심주패퇴이후) 요의 諸道兵(제도병)이 第次로 도착하자 不得已退師(부득이퇴사)하여 ?城固守(영성고수)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한편 밖으로는 통할 수 있는 곳이 남방의 고려이므로 계속 사신을 보내어 군사원조을 청해 왔다.

그동안 요는 대군이 징발되자 南京留守燕王 蕭孝穆(남경유수연왕 소효목)이 도통이 되어, 國舅詳穩(국구상온) 소필적이 요동으로부터 동경에 도착하였고, 도통 蕭孝穆(소효목)은 전군에 하령하여 東京城四面(동경성사면)에 各各 5里밖에 성보를 쌓고 포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연림의 군대가 대단히 두려웠던 존재였던지 駙馬延寧(부마연령)은 출정하였으나 그 妹(누이)와 같이 혈지에 숨어 버리고 오직 공주 최팔만이 뒤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동경성 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그해 8月에 가서야 사면초가인 동경성내에서 요군에 밀통하는 자가 생겨났다. 즉 장군 楊詳世(양상세)가 몰래 요군과 통하고 그날 밤 남문을 열고 대연림을 잡아 바쳤다. 이로써 대연림이 반요부국을 꾀한지 1年餘만에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비록 대연림이 高왕의 후예이긴 하였으나 전발해왕국을 부흥한다는 생각보다는 발해인중심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성격이 더 짙다.

2. 古欲의 稱王叛遼(고욕 칭왕반요)

발해가 멸망한 지 이미 200여년이 되었으나 그러나 발해인은 시종 거란과 타협할 줄 모르고 자신들의 독립을 부르짖고 나섰다. 물론 요에 의부하여 세록을 받고 지나는 부류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끊임없는 대요투쟁을 계속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이때는 요도 이미 만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1114年(천경 4年) 10月 생여진 완안부의 공격으로 영강주의 전봉이 어이없이 무너지자 전군이 총동원되는 정세였다. 이때 요내에 산재해 있던 발해인들이 기회를 타고 반요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요의 영강주패전이 있었던 다음해인 1115年(天慶 5年) 2月 발해인 고욕이 요주에서 반요기병하여 스스로 대왕이라 칭하였다. 그는 기병초 먼저 두하성과 결구하고 보기 3만을 거느리고 자립하였다.

요는 가득이나 생여진(종안부)에 밀리고 있는 참인데 발해인마저 반기를 들자 더욱 더 낭패를 당한 셈이다. 요정은 그해 3月 소사불유 등을 시켜 토벌케 하였으나 그해 4月에 도리어 고욕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요정은 다시 남면도부서 소도소알을 도통으로 삼아 다시 토벌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해 5月 소도소알과 고욕이 결전을 벌인 결과 또 요군이 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욕은 일시 그 성세가 대단하였다. 비록 전쟁의 규모는 적다고 하더라도 요군으로서는 일개 토비에 불과한 고욕군에게 이차나 패하였으니 전군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소도소알은 전의를 잃고 계략으로 물리칠 작전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계략이 적중하여 그해 6月 고욕을 잡게 되었다. 이로써 고욕의 반요부국운동은 칭왕 5個月만에 망하였다. 그러나 시기로 보아 고욕의 반요운동이 거란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즉 발해인 및 거란제속부가 반요부금하는 일이 속출하였다.

3. 高永昌의 大渤海(고영창의 대발해)

고욕의 반요운동은 타족중에 어떤 가능성을 제시하였던 것 같다. 고욕의 반요운동이 종식된 후 불과 1年만에 동경의 고영창이 일어나 국호를 大元(대발해황제)이라 하고, 융기라 건원하였다. 고영창은 발해세족으로 발해가 亡하자 요양에 천사되었다가 거란에 벼슬하여 공봉관이 되었었다. 천경 5年에는 발해무용마군 2,000人을 모아 백초곡에 둔을 치고 완안군(여진)을 방어하고 있었다. 원래 사건의 발단은 동경유수 소보선의 학정에 있었다. 또 한편에는 발해인의 소질이 한려하여 범법자는 용서받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이런 정황하에 1116年(天慶 6年) 正月 초하룻날 밤 永昌이 東京의 악소년 10여인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술김에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유수부의 담을 넘어 들어갔다. 아문에 들어가 "막 군변이 일어났으니 계비를 하십시오,"라고 하자 숙소에 있던 유수 소보선이 나타나자 그 자리에서 자살하였다.

동경호부사 대공정이 변란이 일어났음을 듣고 유수사를 권행하여 부유수 고청신과 함께 제영의 해한병 1,000여인을 모아서 난을 진압하는 한편 수모자 수십인을 수색하여 살륙하니 창졸간에 인심이 흉흉하여져 진압할 수 없어졌다.

영창은 곧 발해군마를 거느리고 동경성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고영창이 기병한지 3일이 되던 날 대공정이 문루에 올라 영창이 돌아올 것을 설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때의 요금의 전황으로 보아 만약인 경우 영창이 금으로 투항한다 하여도 신명은 보전할 수 있었던 상황이므로 요의 태도가 어떻든 그리 걱정할 형편은 아니었다. 기병 5日이 되던 날 밤 동경성내에서 횃불이 오르는 것을 신호로 성문은 열리고 영창의 기병은 쉽게 입성할 수 있었고 대공정과 고청신을 쉽게 몰아낼 수 있었다. 대공정은 거전하였으나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마하 잔병 100여명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도주하였다.

이렇게 하여 간단히 동경성을 탈취할 수 있었고 곧 칭제건원하였다. 영창의 군세가 알려지자 불과 10일 사이에 요동 50여주가 귀부하여 왔다. 그러나 영창이 군사를 보내어 순략하는 중 살략을 많이 하였으므로 각주군에 살고 있던 해인호가 가족을 거느리고 요수를 건너 피해 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 때문에 조금씩 인심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위세가 날로 더해가자 그 다음날인 윤정월에는 거란귀덕주수장 야율여도가 광주를 들고 귀부해 왔다.

사태가 점점 더 엄중하게 발전되어 가자 요정에서는 재상 장림과 소한가노에게 명하여 요의 실업자중 강장한 자를 뽑아서 충군케 하였다. 그리하여 20,000餘名의 군사를 얻었다. 그해 5月 초순 현주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영창이 요하삼우이수구에 설책하고 거전하였다. 장림은 영병수천으로 의병을 삼고 정기를 간도로 도하시켜 심주로 들어가게 하였다. 나중에야 영창은 이것을 알고 군사를 보내어 10일 사이에 30여회를 싸웠으나 결국 영창이 패하여 동경성으로 물러났다. 琳은 군마를 몰아 동경성외 5이지점인 태자하에 성채를 쌓고 사람을 시켜 영창을 초무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장림이 각부에 5日치 양식을 준비하고 파성지계를 결행하려 하였다. 그로부터 2日 후 먼저 안덕주의를 도하시키고 잇달아 대군이 일제히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대군이 반즈음 건넜을 때 철기 500으로 갑자기 나타나 출기불의에 하로를 막으니 임군이 퇴하여 다시 구채로 물러났다. 3일이 되던 날 임군은 도강할 수도 없고 양식은 떨어져가고 하여 전전긍긍하다가 7일이 되는날 밤 몰래 태자하의 성채를 나와 심주로 돌아갔다. 늦게 안 영창이 기병으로 후미를 추격하여 많이 죽이고 사로 잡았다. 임은 겨우 잔병을 수습하여 심주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대요전에는 선전하였으나 대금전에는 불리하였다. 먼저 요와 대상상태에 있는 동안 달불야를 금에 보내어 "원병력이취요"라고 제의하였다. 金은 호사보, 호돌고 등을 보내어 영창에게.

同力取遼固可, 惟應去帝號如能歸款, 當以王爵處之.

라고 하였다. 영창이 또 달불야를 호사보, 호돌고와 같이 가서 교섭케 하였으나 금주는 표사가 불손하고 또 발해인 부로를 청환하였다고 대약사노를 달불야와 같이 보내 영창을 초유케 하였다. 이때 심주의 장림군이 다시 공격을 하였으나 궤주하기 바빴다. 그리하여 임군은 요주에 퇴보하였고, 영창은 금군이 심주에 입성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가노 탁자에게 금인 1개와 은패 50개를 주어 금군진영에 들어가 명호를 제거하고 칭번할 것을 청하였다. 때마침 발해인 고정이 항복해 와서 하는 말이, "영창비진항특적이완사"라고 하므로 알로가 드디어 진병공토하니 영창은 금사 호사보를 죽이고 항거하였다. 금병이 동경성에 이르자 영창이 수산하에서 거전하였으나 패하고 기병 5,000名을 거느리고 장송도로 도분하였다. 이때 人心은 세태를 쫓게 마련이어서 동경인 은승노선가 등이 영창의 처자를 잡고 성문을 열어 금에 항복하였다. 미구에 달불야가 변심하여 영창과 탁자를 붙잡아 금군에 보냈다. 그리하여 영창은 금군전에 살해되고 말았다.

이 고영창의 칭제건원은 발해인들이 요금의 전쟁을 기회로 다시 부흥해 보려던 마지막 운동으로 그 성격은 대연림의 흥요국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Ⅴ. 結言(결어)

발해유중들은 926年(천현원년) 발해국이 멸망한 직후부터 반요항전을 시작하여 1125年(保大 5) 거란이 멸망할 때까지 全 기간에 걸쳐 연속적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다. 이는 침략전쟁을 해야할 이유 없이 자국의 편의에 의하여 이웃나라를 멸망시킨데 대한 줄기찬 항변이기도 하다. 이런 무자비한 거란의 행위에 이웃인 고려도 분노를 금치 못하고 무도한 금수의 나라로 규정하고 국교마저 단절하였으니 거란의 행위가 정당치 못했음을 대변해 준 것이라 하겠다. 정당치 못했던 행위가 얼마만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준 한 예라 하겠다.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을 시기별 성격별로 정리하여 보면 대개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첫째, 멸망 직후 아직 거란의 순략을 받지 않았던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 남해부의 발해재건투쟁이고,

둘째, 동란도를 요양(東京)으로 옮긴 후에 되살아난 후발해와 왕야, 정안등 재건세력들이며,

셋째는 이미 거란에 사환하고 있던 유민들이 반요부흥의 틈이 생기자 주변 여진인들을 충동질하여 세운 大延琳의 흥요국이 있으며 또 여진인들이 자립하여 반요항쟁을 벌리자 이에 자극을 받은 고욕의 칭왕반요와 고영창의 대발해국건국이 있었다.

실상 발해의 항쟁을 거란의 무도에 대한 항변이라고도 하겠지만 풍속 습관이 같지 않은 발해인이 거란의 직접통치를 견디기 어려웠고 또 문화적으로 한층 높았던 발해인들의 심목중에는 거란을 야만시하고 동화하여 들지 않았고 게다가 거란인이 발해인들을 거란의 구성원으로 대하지 않았음에도 문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