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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발해사 연구

-민족사적 계승문제로 본-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만에 세워져 698년부터 926년까지 만주, 연해주와 평안도, 함경도에 있던 왕조였다. 그러나, 발해의 주민이 어떤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이룩한 문화가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발해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각기 발해의 영토에서 현대사를 이어 가고 있는 한국과 중국, 러시아의 견해가 다른 것은 일면 이해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하는 것은 역시 발해가 고구려인들이 세운 국가이었는가, 고구려인들과 종족적 계통이 다른 말갈인들이 세운 국가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발해사의 실증적 연구를 통해 점차 밝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나, 또한 이 문제를 뒤로 하고 발해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정치?경제적 지배 관계나 문화 담당자 등 역사의 주인공에 대한 인식없이 발해사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없이 역사 연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민족사적 계승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한국은 발해사를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사로 보면서, 신라와 발해가 양립하였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라 부른다. 이와 같은 주장은 《구당서(舊唐書)》에 대조영 등이 ‘고구려별종‘高麗別種’’이었다고 할 뿐만 아니라, 발굴되고 있는 발해문화가 고구려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남북한이 모두 같은 입장이다.

다만, 북한이 발해 건국에 따른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발해의 주민구성을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대부분이 고구려유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남쪽의 통설과 다르다. 그러나, 피지배층 다수의 고구려유민설은 이미 필자가 밝혔던 바여서 남북한의 발해사 연구를 따로 구별해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즉, 발해의 주민구성문제에 있어서 필자는(1988) 다수의 고구려유민설을 북한보다(장국종,1991) 앞서 밝혔고, 적어도 발해 건국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로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였던 적이 있다.

한국학계와 가장 대립된 견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중국이다. 중국은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인 ‘홀한주(忽汗州)’나 ‘발해군(渤海郡)’으로 간주하고 그 건국 주체와 주민들에 대해서도 고구려유민과 다른 ‘말갈(靺鞨)’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발해왕이 당으로부터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책봉을 받았으며, 발굴되고 있는 발해문화가 당 문화 일색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고구려와 다른 말갈족이었음은 《신당서(新唐書)》에 대조영이 속말말갈이라고 쓰여 있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단지,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정치적으로 부속되었던 종족이었다는 것이다. 발해가 고구려계가 아니었다는 주장은 그들의 선배인 김육불이 인정하였던 발해문자 사용설도 부정하고 발해(지배층)의 언어가 중국어(漢語)를 사용했다고까지 한다. 이러한 논리는 하나 같이 발해는 당의 지방사로서 중국사의 일부라는 생각과 통한다.

그런데, 중국학계의 이러한 연구는 문화혁명 후인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2편 이상의 발해사 논문을 발표한 학자수도 한국이나 일본을 능가한다. 이러한 숫자는 지리적 위치가 큰 이유였겠으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정책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한편, 러시아는 발해가 고구려를 일부 계승한 면도 있지만, 대체로 고구려와 다른 계통의 말갈인들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말갈(말갈)였다고 한다. 발해가 말갈인들로 구성된 국가였다는 점에서는 중국학계와 같으나,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이 아닌 주권국의 독립국가였다는 점에서는 한국학계의 주장과 같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도 아니었고, 당의 지방정권도 아닌 말갈족이 건국한 독립국가였다는 주장으로써, 발해사가 한국사나 중국사 어느 한 쪽일 수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학계의 발해사에 대한 시각중에 주목되는 점은 발해가 중앙아시아계통의 문화를 상당히 수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발굴된 발해문화가 중앙아시아계통의 장식물 등이 있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그 중에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돌궐문자와 같은 것도 발견된다는 것이고, 중앙아시아와의 ?담비길?을 설정하는 것도 주목된다.

이러한 발해사에 대한 견해는 주로 샤프쿠노프 일 개인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최근의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발해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새로운 해석도 시도되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독립 말갈국가’였다는 대전제는 지켜지고 있으며, 다만, 발해유적의 발굴과 함께 고구려적 요소가 전보다 더 인정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한편, 오늘날 일본의 발해사 연구는 민족사적 계승문제보다 정치-외교적 문제의 실증적 고찰에 더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물론 민족사적 계승문제에 있어서도 일본은 이미 괄목할만한 연구를 하였던 적이 있다. 일본은 그들의 대륙침략 시절, 만선사관(만선사관)의 만주사로써 발해가 취급되면서 근대적 발해사 연구를 주도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그들의 정치적 의도에 의하여 발해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진 결과로 인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의 발해사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는 큰 의미를 갖는다. 상경용천부 유적을 비롯한 발해유적 발굴이 대체로 일본에 의해 시작되었고, 기록에 없던 발해사를 메꿀 수 있게 한 것도 일본 학계의 공헌이 컸다고 인정된다.

발해의 민족사적 계승에 관한 일본의 견해는 만선사관이 지배적이었 시절 토리야마(조산희일)와 시라토리(白鳥庫吉)에 의해 주도되었다. 당시 발해왕으로 불릴 정도로 발해사에 집착하였던 토리야마는 중국측 기록을 주로 분석하여 발해는 대체로 말갈족의 국가였다고 주장하였는가 하면, 발해사신들에 관한 기록이 많은 일본측 기록을 분석한 시라토리는 발해의 고구려계승설을 주장하였다. 1945년 이후 일본은 대체로 발해의 주민구성을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시라토리의 이원적 주민구성론을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원적 주민구성론은 오늘날 남한학계의 통설이 되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달라졌지만, 초기 북한의 박시형도 40% 고구려유민과 60%말갈설로 이를 수용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발해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제삼자적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일본이 오늘날 가장 한국학계와 가까운 연구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주목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발간된 한국사개설서인 《조선노역사》(1974)가 ‘통일신라’와 함께 ‘발해’를 한국사의 한 부분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발해국의 주민구성과 발해의 조상문제가 이렇듯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알려진 바와 같이 발해인들에 의한 자신들의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중국측 기록 등 남아 있는 다른 기록에 대해서도 각기 보는 시각이 다른 것은 역사연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대사의 민족사적 이해관계로 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그러나, 역사의 복원은 현대사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역사적 과정을 밝혀 현대사가 된 이유가 설명되어야 한다. 현대사의 모습이 과거부터 있어 왔다는 논리는 식민사관 이외의 다른 것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먼저 발해사의 당시적인 입장에서 발해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하고, 학문의 보편성을 살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을 보완해 주는 고고학적 발굴은 그 의미가 크다. 작년과 올해에 걸쳐 대륙연구소와 러시아 극동고고민속역사연구소 및 조선일보가 공동주관한 한러 발해유적 공동발굴이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중국학계와 대립하고 있는 한국학계의 발해사 연구는 매우 열악하다. 대학에서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에서 발해사를 연구하는 학자는 2-3명(현재 일반대학원 석사논문 6편)뿐으로써 이 숫자는 현재 일본의 4-5명 정도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까지를 합하면 그렇지가 않지만, 중국보다는 매우 적은 편이다.

특히,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주목된다. 북한은 우리보다 먼저 중국과 러시아에서 각각 발해유적을 공동발굴한 바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이 발해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그들이 발해의 옛 땅에 살고 있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발해의 건국만을 유독 ‘창건’이라 부르는 것은 그들 정권의 ‘창건’과도 비유되는 것이어서, 한국사적 정통성문제와 관련하여 정치적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때문에 발해사에 대한 정책적인 지원도 크다.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안에 발해사연구실을 따로 두고 있는 것부터가 우리와 다르고, 그 인력면에서도 조선시대 등 다른 분야 학자들까지도 발해사 연구에 투입되는 등 역사.고고학적 측면에서의 지원은 고중세사의 다른 어느 분야보다 높다. 이러한 결과는 그들의 기관지인 《력사과학》과 《조선고고연구》에 발해사 논문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무튼, 북한의 이러한 분위기는 남쪽이 학자들의 분발과 일부 학자들에 국한하여 민간에서 지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한국학계의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대륙연구소와 고려학술문화재단 및 언론의 지원아래 다른 어느 때보다 커졌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것은 또한 중국과 러시아 등 다른 지역의 발해사연구를 부추기고 있는 경향도 없지 않다. 중국과 러시아가 빵의 문제로 인해 학문적 인기가 하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사 연구는 비교적 현상유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해사 연구가 과연 학문적 입장에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현대사의 정치적 입장에 있는가 하는 점은 실로 걱정되는 분야이기도 하다. 학문외적 생각들은 발해사에 관심을 갖는 뜻있는 분들의 생각에서도 가끔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해사 역시 학문적 보편성에 입각해야 한다는 점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학자들이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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