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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國史의 新構想
하마다 코사쿠(濱田耕策)*
1. 머리말

[발해국사(渤海國史)]라는 말은 일본 사람에게 있어서는 世代에 따라 떠오르는 역사상(歷史像)이 다르다. 1932년 3월에 [만주국(滿洲國)](중국사람들이 말하는 "위만(僞滿)")의 옛 땅(故地)을 연상하는 세대도 있고, 또 [渤海]의 [渤]자를 한자로 정확히 쓸 수 없었던 학생시대를 기억하는 세대도 있다.

일본에서 발해국사는 "수수께끼"와 같은 숨겨진 나라로서 흥미가 깊다. 또 호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698년 발해국의 건국에서 926년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 239년간에 34회나 일본에 사자(使者)를 파견했다. 일본의 역사서인 {속일본기(續日本紀)}를 시작으로 {續日本後記}에 이르는 '六國史(6종류의 일본의 正史)'에는 발해국 사자의 도착에서 귀국에 이르기까지의 접대행사와 우호관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8세기 후반 발해국의 제3대 왕인 대흠무(大欽茂, 文王)시대에, 외교문서의 형식을 둘러싸고 일본의 율령관료가 발해국 사자에게 형식의 수정을 요구했던 일은 있었지만, 대개 양자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계속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일본인의 고대사상 안에서 발해국사를 우호의 대상이 였다고 보는 것인데, 그 반면에는 발해국사의 전체상이나 내부의 문제점을 고찰하는 일을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닌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일본의 동양사학계, 더욱이 일본 고대사학계에서는 당의 율령제도를 받아들인 신라, 일본, 발해의 각국 정치·사회체제를 서로 비교연구하고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통일적으로 연구하려고 하는 문제의식이 높아가고 있다. 이러한 방향에서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발해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한편, 한국에서는 발해국사를 한국사의 영역안에 어떻게 편성하는가 하는 강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발해국사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경향이 있다. 이 문제의식은 조선왕조 18세기의 실학, 역사지리학 연구의 높은 관심으로부터 나타난 문제의식이 있었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최남선, 현대에 들어와서는 북한의 박시형, 또 민족문화추진회 회장인 이우성 선생 등이 저명한 연구자로 알려져 있다.

또, 중국에서는 현대의 소수민족 문제와 관련해서 발해국사는 [당에 복속된 주변민족의 지방정권이고], [한(漢)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적인 다민족국가인 중국 역사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라고 보는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한국, 중국의 문제의식은 발해국사의 무대와 사람들이 현재의 한국, 중국의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고, 우리들 일본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깊이 있는 역사의식일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연구자인 나는 발해국사 개개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해서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2. 발해국왕(渤海國王)의 즉위(卽位)와 책봉(冊封)

발해국의 성립은 698년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일본의 {類聚國史}에 引用된 {日本後紀}의 발해국 소개 기사(記事)에 [문무천황(文武天皇) 二年(698年)이라고 되어 있는 것에 의거하고 있다. 여기서 {日本後紀}는 840年에 편찬된 것으로, 약 140년후의 기록에 의해 건국년대가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발해국의 정치동향은 727년 이래 일본에 온 사절과 그들이 갖고 온 외교문서에 의해 일본에는 잘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698년에 발해국이 건국되었다고 하는 정보도 신뢰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발해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보다도 압도적으로 일본의 역사서인 '六國史' 중에 많이 있다. 중국의 당(唐)대에 발해국은 1년에 수회(數回)나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했다. 파견되었다는 사실만은 중국의 역사가는 역사서 중에 편찬했다. 그러나 견당사(遣唐使)의 이름이나 그 외교문서의 내용, 그리고 토산품의 이름등에 대해서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다. 당에는 서아시아, 남아시아, 북아시아의 각지로부터 많은 국가나 민족의 사자(使者)가 왔기 때문에, 그 국명과 민족명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끝나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율령제(律令制)하의 관료들의 국제의식하에서 발해국과 신라국의 사자(使者)를 조공사(朝貢使)라고 보고 있다. 그 때문에 사자(使者)에 대해서 일본의 律令政府는 일본의 관위를 수여(授與)하고 있다. 다만 신라국, 발해국의 사자(使者)는 이 관위(官位)를 그들 자신의 국가에서는 활용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740년대 이래 신라국은 발해국과의 대립관계에 대응해서 당과 밀접한 관계를 진전시키고 있다. 그 때문에 [군자국(君子國)]의 존칭을 당으로부터 얻고 있다. 이러한 관계에서 신라국의 사자(使者)와 일본 정부와의 사이에는 외교상의 마찰이 자주 발생했다. 그러나 발해국은 신라와의 대항관계에서, 또 무역의 이익을 통해서 말갈등의 제씨족(諸氏族)을 통치하기 위해서도 일본과의 관계 유지에 노력했다. 일본 관료의 입장에서는 발해국의 사자(使者)는, 현재적 관점에서 본다면, 좁은 국제의식(國際意識)을 만족시키는 사자(使者)로서 접대했고 외교상의 일을 상세하게 기록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발해국의 역사사료(歷史史料)가 외교관계사료를 중심으로 일본의 역사서(歷史書)에 잘 기록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발해국의 국왕은 초대(初代)의 대조영(大祚榮)으로부터 마지막 왕(末王)인 대인선(大??)까지 15대의 왕이 계속해서 즉위했다. 왕통(王統)은 일관되게 대씨(大氏)가 지키고 있고, 부자(父子)·형제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다만 2번의 예외가 있다. 대흠무의 뒤를 이어, "족제(族弟)"인 대원의(大元義)가 즉위했고, 또 제10대 국왕인 대인수(大仁秀)는 대조영(大祚榮)의 제(弟)인 대야발(大野勃)의 4대손이었지만 즉위했다. 이 2예는 왕위 계승의 예 중에서는 이례적이지만 역시 대씨(大氏), 더구나 건국자 대조영의 혈통을 강하게 계승한 대씨(大氏) 일족(一族)의 중심부에 있던 인물이다. 이 15인의 발해왕은 즉위 후에 일찍 사망한 왕을 제외하면 즉위한 즉시, 즉위와 前王의 사망사실을 당에 보고하고, 또 즉위를 당의 황제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고애(告哀)·구청(求請)의 사자(使者)를 당에 파견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해서 2∼3개월 후에 사자(使者)가 파견되는 일이 많았고, 또 1∼2년 후에 파견되는 예도 있다. 당에서는 발해 사자(使者)의 보고를 받으면, 사망한 발해국의 前王을 조문하고 또 새로운 왕의 왕위를 승인하는 [책봉(冊封)]의 사자(使者)를 파견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이 3가지 있다. 첫 번째, 발해국에서 새로운 왕이 즉위하여 이 일이 당에 보고되고, 당으로부터 책봉사자가 발해국의 왕도(王都)에 도착하고, 책봉의 칙서가 발해국의 왕정(王廷)에 도착할 때까지 1∼2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당의 기록에는 발해국에서 前王의 사망과 새로운 왕의 즉위와 당으로부터의 책봉이라는 3가지 일이 같은 年月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발해국왕의 즉위와 사망의 해(年)가 연구자들 사이에 1∼2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중국의 사료(史料)를 정리하고 검토해서 발해국왕의 즉위와 사망의 연도(年度)를 밝힌 것이 자료(資料)【1】이다. 당대(唐代)에 있어서, 예를 들면 840년대에 일본의 학문승(學問僧)이었던 엔인(円仁)은 오대산(五台山)으로 여행을 했었다. 엔인(円仁)은 산동반도(山東半島)에서 발해국으로 귀국하는 발해국 왕자를 만나고 있다. 이 때 엔인(円仁)의 노정은 평상시에는 1일에 60리정도이다. 현재의 거리로는 약 32㎞이다. 발해국으로부터의 견당사(遣唐使)가 당의 도읍인 장안에 갔다가 당의 책봉사와 함께 발해의 도읍인 上京까지 되돌아 오는 일정은 빨라야 1년 전후는 필요하다.

두 번째, 당의 황제가 발해의 새로운 왕을 책봉하기 위해 발해국에 파견한 책봉사는 8인을 사료(史料)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흠무(大欽茂, 3대)의 책봉으로부터 6인은 모두 환관(宦官)임이 주목된다. 이것은 당이 주위의 많은 국가의 왕을 책봉하기 위해 사자(使者)를 보냈는데 그 사자들이 환관이었다고 하는 예를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다. 단지 당의 환관이 매(鷲)를 얻기위해 신라국에 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신라국왕을 책봉하기 위한 사자가 아니다. 신라국에는 관위(官位)가 높은 문인이 책봉사로서 파견되어 오고 있다. 발해국왕을 책봉하는 사자들이 환관이었던 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커다란 과제이다.

세 번째, 발해국의 새로운 왕은 당으로부터의 책봉사를 맞이해서 그 왕위를 승인받으면, 즉시 일본에 왕위의 계승·책봉을 보고하는 사자를 보내고 있다. 발해국왕은 왕권에 종속된 여러 말갈부족을 통치하기 위해 책봉을 받는 일을 빼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홀한주도독 발해국왕(忽汗州都督 渤海國王)]이라는 왕호는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 속에서 서의 거란 제부족과 북의 흑수말갈, 또 발해왕권에 종속된 여러 말갈부족을 통치하기 위해 필요한 권위가 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발해국왕은 책봉을 받은 후에도 자신의 즉위와 책봉의 일을 신라국에는 보고하고 있지 않다. 적어도 통지했다고 하는 기록은 없다. 신라와 발해국 사이의 국내사정은 당의 도읍에서 상대방 견당사나 유학생의 귀국에 의해 전해진, 이른바 때늦은 정보였다고 보인다.

다만 762년, 발해국왕 대흠무를 당은 발해군왕(渤海郡王)의 지위를 높여서 [발해국왕]으로 책봉했다. 763년 전반에 책봉사 한조채(韓朝彩)가 발해국의 상경에 도착했다. 이 때, 한조채는 일본의 입당(入唐)학문승인 계융(戒融)을 동반하고 있다. 계융을 일본에 귀국시키는 일도 환관인 한조채의 하나의 사명이었다. 계융은 무사히 763년 10월 6일 일본에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이 발해의 도읍에 머물고 있던 한조채에게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조채는 계융이 일본에 귀국할 수 있었는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신라에 가서 신라정부로 하여금 일본에 사자를 파견시키게 하여 계융의 정보를 구했던 것이다.

한조채는 발해국을 출발해서 764년 초에는 신라의 도읍인 금성(金城), 현재의 경주에 입성(入城)했다. 한조채는 상경을 출발해서 동경-남경을 잇는, 이른바 [신라도(新羅道)]를 통해서 신라에 들어가 금성에 도착했다고 추측하는 연구자가 몇사람인가 있다. 그러나 나는, 한조채는 발해와 당을 잇는 [발해도(渤海道)](상경-서경-압록강하구)를 통해서, 거기에서 해로에 의해 당과 신라를 잇는 당은현(唐恩縣, 현재의 南陽半島 唐城鎭)의 항에 도착해서, 육로로 금성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당과 발해, 당과 신라의 도읍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당의 대종(代宗)황제의 칙사인 한조채는 이 대도를 통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신라도]는 39역(즉 30리마다 1역을 설치했기 때문에 39×30=1170리⇒655km이다. 그런데 이 [신라도]는 이름을 [신라도]라고 하지만 실제 외교상에서는 발해와 일본을 잇는 루트의 육로 부분이다. 신라와의 경계에는, 지금의 덕원에 신라는 탄항(炭項)관문을 설치하고 있다. 금성에서 이 탄항관문에 이르는 루트는 신라인들이 충분이 활용했던 루트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경계(警戒)를 엄중히 한 루트였다고 생각된다.
 
 

3. 발해국가(渤海國家) 성격의 일측면(一側面)

발해국은 698년 대조영이 왕권을 확립해서 성립했다. 이 국가는 건국 초에 고구려 유민과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던 말갈의 여러 민족으로 사회가 구성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왕권은 처음에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여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윽고 대흠무의 시대에 이르러 새로운 정치이념을 수립했다. 그것이 중국의 이상이라는 "주(周)"대를 배운다는 것이었다. 발해국의 건국시대, 당은 바로 측천무후(武則天, 武后 623-705, 황제위 684∼704)의 시대였고, 무측천은 국호를 당으로부터 [주(周)]로 고치는 등 주대를 하나의 이상으로 하여, 이를 모범으로 한 정치를 했었다.

발해국왕의 시호로는 고왕(高王), 무왕(武王), 문왕(文王), 성왕(成王), 강왕(康王), 정왕(定王), 희왕(僖王), 간왕(簡王), 선왕(宣王)이라는 9인의 왕의 시호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당의 장건장(張建章)이 830년대에 발해에 가서 기록했던 {발해국기(渤海國記)}에 보이는 것인데, 선왕(宣王)의 뒤인 4인의 왕에게도 시호는 봉해졌을 것이다. 이 9인 중에 고왕(대조영)외에 8인은 모두 [주(周)]의 왕의 시호와 같다. 아마도 대무예(大武藝)에게 [무왕]의 시호를 봉했던 대흠무(大欽茂)의 즉위시대에는 [주]의 정치를 이상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연호의 제정에서도 볼 수 있다. 대무예는 즉위해서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정했다. 그 후 1왕대에 1연호를 정했다([一世一元制]). 대흥(大興, ?曆), 중흥(中興), 정력(正歷), 영덕(永德), 주작(朱雀), 태시(太始), 건흥(建興), 함화(咸和)의 연호를 정했다. 연호는 처음에 즉위칭원(卽位稱元)의 법에 따라서 새 왕이 즉위한 달에 개원(改元)했다. 그러나 830년 후반에 즉위한 대이진(大?震) 때에는 분명히 유년칭원[踰年稱元]의 법을 채용했다. [즉위칭원] 법에서는 전왕이 사망한 해의 남은 월일을 새 왕의 원년으로 세는 것이 된다. 그러면 1년 안에 전반과 후반에서, 1년을 2개의 연호로 세는 것이 된다. 이것은 사망한 전왕에 대해서 "불효"라고 하는 비판이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831년 정월에 나온 [함화]의 연호 이후, 발해국 연호의 실예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시호의 경우와 같이 마지막 왕의 대까지 각 왕대마다 정해졌었다고 생각된다.

발해국이 시호와 연호를 제정하고 있었던 일은 당의 관료나 지식인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신당서]에서는 이것을 [그 나라가 사사로이(몰래) 시호를 쓰다]라든가 [사사로이(몰래) 연호를 고치다]라고 기록했다. 중국의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외국의 왕은 황제의 신하의 일원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일이 상례였으므로, 책봉을 받은 발해국왕의 시대에 연호와 시호가 독자적으로 채용되고 있다는 일은 이해 못할 일이었지만, 당은 이것을 문제시하지 않았다.

당시 [남조국(南詔國)]에서도 독자적으로 연호를 정하고, 시호에 황제의 칭호를 채용하고 있던 예도 있다. 645년 신라는 진덕여왕의 시대에, 법흥왕대 이래 100여년간 사용해온 독자적인 연호제를 당 고종의 압력을 받아들여 폐지했다. 이 신라의 정책과 발해의 시호·연호제도를 비교해 보면 발해가 당과의 관계에서는 책봉을 받는 나라이면서도, 국내적으로는 독자적인 정치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것이 인상깊게 남는다. 그 독자적 연호와 시호를 강고하게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우선 첫 번째로, 고구려 이래의 전통을 생각할 수 있다. 391년에 광개토왕이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정했고, 그 뒤에도 고구려는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를 채용해 왔다. 이와 같은 전통은 어디로부터 생겨난 것일까?

두 번째로 발해국은 그 통치하에 수령에게 통솔되어 이동가능한 말갈의 크고 작은 다수의 씨족을 다스리고 있었던 일이다. 일본에 사절을 보낼 때마다 발해정부는 이들 부락의 수령 90여명을 동행시키고 있다. 수령들은 바다를 건너는 위험을 넘어 일본에 와서 주로 모피를 무역하고 [목면(木綿)=실크]를 입수했던 것이다. 이 수령들은 발해국의 어디에 거주하고 있던 수령들일까? 나의 생각으로는, 일본에 바다를 건너온 수령들의 대부분은 사자(使者)가 일본으로 가는 루트상의, 즉 상경에서 동경 그리고 남경부로 나아가는 루트에 거주하는 수령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른바 [신라도] 부근의 수령, 즉 본래 백산말갈부(白山靺鞨部)의 수령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의외라고 생각되지만, 항해술에 뛰어났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자주 기록되어 있는 신라를 습격한 말갈이 이들이고, 또 12세기에는 [도이(刀伊)]라고 불리어 고려의 동해안을 습격하고, 때로는 대마도(對馬島)에서 구주(九州)북부까지를 습격한 일도 있는 것이다. 발해 정부는, 신라가 8세기 후반이래 탄항관문(炭項關門)과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해서 발해국을 경계했기 때문에, 백산말갈의 각 부족이 신라와 행하고 있던 모피무역의 대안으로 말갈의 수령들 90여명을 일본에 안내하여 모피와 [목면=실크]의 교환무역을 실행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발해국은 고구려 유민을 정치적으로 중심적 존재로 하면서도 다수의 말갈 제부족을 수령을 통해서 통치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통치가 느슨해진다면 말갈은 흩어져서 인접된 거란족 등에게 부합한다는 일도 예상했을 것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전통적인 중국에 대한 정치자세와, 국내에 다수의 씨족·부족을 편성하고 있던 발해국에서는 국가의 정치이념을 숭고한 이상상(理想像)에서 구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바로 여기에 [예(禮)], [의(義)]를 중시한 [주(周)]를 이상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흠무의 두명 공주의 묘지(墓誌)에는 {상서(尙書)}, {시경(詩經)}, {예기(禮記)}, {주역(周易)} 등 중국의 고전을 전거로 아주 잘 활용하여 문장을 짖고 있다. 또, {신당서} 발해전에는 830년대의 발해 정치제도가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충(忠), 인(仁), 의(義), 지(智), 예(禮), 신(信)이라는 육부의 중앙행정기구가 설치되어 있던 것을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흠무의 시대를 정점으로 해서 발해국은, 말갈의 제씨족을 통치하는데에 성공하여 유교의 통치사상을 실천하는 고대 국가로서 번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당의 지식인으로부터 [해동의 성국(海東之盛國)]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4. 맺는말

발해국의 역사는 현재 중국, 한국, 북한, 러시아, 일본 등에서 각각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주목되고 있다. 나는 발해국의 정치체제, 사회, 문화 등등과 신라국의 정치체제, 사회, 문화 등등을 비교 대비시켜서 고찰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발해국의 최대영역과 신라국의 영역을 비교하면 약 10대 1이어서, 발해국의 광대함에 압도된다. 골품제라고 하는 신분제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한 통일신라, 한편 수령제라고하는 각부족의 수령을 지배하는 것으로 광대한 영역 안에서 말갈부족을 통치했던 발해, 양자를 일체화시킨 역사를 생각하기 전에, 양자의 특징·차이·공통성 등을 고찰해 가는 일은 한국 고대사상(古代史像) 그 중에서도 신라사상(新羅史像)을 보다 한 단계, 그 풍부한 역사를 현대에 소생시켜 줄 것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