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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해양활동에 대한 연구
윤명철 ( 동국대 강사)

1. 서론

동아시아는 중국 지역과 북방으로 연결되는 대륙의 일부와 한반도, 일본열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역사상을 파악하고자 할 때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육지위주의 질서 속에서 그 이해의 답을 구하고있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해양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한일 양지역을 둘러싼 지역은 오히려 해양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반도를 중심축으로 하여 일본열도와의 사이에는 동해와 남해가 있고,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는 황해라는 내해 (inland sea)가 있다. 그리고 한반도의 남부와 일본열도의 서부, 그리고 중국의 남부지역(장강 이남을 통상 남부지역으로 한다.)은 이른바 동중국해를 매개로 하여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동해를 가운데 두고 한국와 일본 러이사 그리고 중국의 변방이 만나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은 내부적이건, 대외관계에서건 동아시아의 역사발전에서 해양적 역할이 매우 크다는 일반적인 추측을 할 수 있게 한다. 이 지역에서 명멸했던 모든 종족들과 국가들은 이 해양의 영향을 어떠한 형태로든 받은 것이다.

특히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 복잡한 민족구성과 역학관계의 장 속에 있었다. 삼국통일전쟁이 끝난 이후 국제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발해는 주변국들과 역학관계를 조정하면서 나름대로 자기 위치를 설정하고 보다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던 당시의 현실과 소강상태인 국면에서 외교와 경제의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이때 해양은 외교적 위치를 강화시키고,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매우 효용성 있는 수단이 되었다. 발해는 동해와 황해를 활동무대로 하면서 해양활동을 활발히 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이 있었고, 실제로 활발했었다. 그럼에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발해의 해양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없었다.

2장. 해양활동의 역사적인 환경

1절 황해와 동해의 자연조건
 
 

2절 역사적 위치와 역할의 계승성

고구려의 발전은 국내적 요인 외에 국제질서의 능동적 적응이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즉 군사력을 뒷받침할 경제 문화력은 물론 국제정치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해양활동이 활발하고 해양을 장악하므로써 주변국들간의 외교망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한반도를 둘러싼 역사활동 지역에 지중해적 성격을 부여하고, 고구려는 이 질서의 중핵에서 각국간의 조정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것은 해양활동의 성장을 기본 토대로 했다고 주장하였다. 발해를 이해하기 위하여 고구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는 특히 4세기에 이르러 남북으로 분단된 한족과 북방의 유목민족, 그리고 고구려 백제 등이 정치 군사적으로 대결할 때 부터 해양을 훌륭하게 활용하였다. 5세기 광개토대왕 대에 들어와 국제전략을 수정하고, 지중해적 국가로서 발돋음 하였다. 즉 대륙의 동?서?북으로 팽창하여 만주지방을 완전히 석권하고, 남으로 과감하게 진출하여 백제 신라는 물론 가야지역까지 국가전략수립의 영향권하에 두었다.

뿐만 아니라 장수왕 시기에 이르면 동해는 몰론이지만 해양력을 바탕으로 황해 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즉 대륙과 한반도와 주변 해양을 한 틀 속에 넣고 조정할 수 있는 동아시아의 완전한 중핵자리를 확보하였다.

국제질서의 형태가 변화되어 전에는 마치 20세기의 냉전시대처럼 중국 등 1~2개의 중심국을 핵으로 주변부 반주변부 변방으로 편성되었고, 각국간의 교섭도 중간의 매개국가를 거친 간접적 형태이었는데, 이제는 다수의 선이 동시에 연결되는 多重 혹은 多核 방사상형으로 되었다. 즉 분단된 남북조(상해와 북경), 북방의 유연(러시아), 그리고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동등한 중심핵이 되고, 백제 신라 가야 왜 거란 말갈 등 주변국들은 서로간에 교섭을 갖게되었다. 지금의 구도와 별 차이가 없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고구려는 대륙과 해양을 공유하면서 각국들의 교섭을 관리하고 통제하고 조정했다. 백제 신라 가야,왜 등이 북중국정권(현 북경)과 교섭하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 때로는 남조정권과의 교섭마져 막았다. 뿐만 아니라 해양통로의 확보를 잇점으로 분단된 중국세력들(북경, 상해)간의 복합적인 갈등을 등거리 해양외교로서 적절히 이용했다.

초기에는 북위와 충돌을 하였고, 송과도 군사적 충돌을 하였다.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주도권을 더욱 발휘하여 430년 대북위포위 전선을 펼 때에는 해양으로 송과 관계를 맺었으며, 송이 439년 북위와 군사적 대결을 할 때에는 말 800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는 육로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해양을 통한 비밀외교로 성사시킨 예이다. 고구려를 둘러싼 남북 양국간의 갈등은 외교사료에서도 재미있게 나타난다. 이처럼 고구려는 동아지중해에서 중핵조정역할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강국이 된 것이다.

발해는 초기에 당 신라 일본 흑수말갈, 거란 등과 복잡한 역학관계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 속에서 존립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정책과 능력을 계승하는 한편, 지중해적 국가로서 육지질서와 해양질서를 공유하고 해양력을 강화시켜야 했다.

그렇다면 발해가 해양활동을 활발히 해야 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등주 공격 등에서 나타나듯이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

당시 발해를 둘러싼 동북아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가 ?다. 대조영은 689년에 진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당은 초기에는 발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발해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돌궐과 연합을 시도하였다(698년 경). 그러나 당은 발해를 회유하여 712년에는 중간에 있었던 거린과 해를 공격해주길 요청했다. 그리고 당은 거란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했다. 그럼에도 승리를 한 거란이 돌궐을 두려워 하여 당에 항복하였다.

점차 발해는 당과 화친을 시도하면서 영주의 평로절도사를 통해 교역과 외교를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719년에 무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자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강하였다.

그 때는 흑수말갈과 긴장관계에 있었다. 흑수말갈은 당에 예속되어 발해에 적대적이었으며, 당은 그들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출정한 대문예는 이를 반대하다가 당으로 피신하였다. 발해는 흑수말갈을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이 즈음 거란은 돌궐과 동맹하면서 당을 공격할 것을 발해에 제의하였다. 한편 당은 신라와 관계를 개선하고 있었므로 발해는 여러가지 목적을 띄고 張文休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등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등주를 점령하고, 자사인 韋俊을 죽인 후에 전격적으로 철수하였다. 해양작전의 진면목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때 당은 대문예를 시켜 육로로 공격하게 하였으며, 733년에는 신라로 하여금 협공하게 하였다. 김윤중이 갔으나 국경에 도착하기 전에 추위로 인하여 실패하고 회군하였다. 이후 신라는 독자적으로 정벌을 추진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 후 762년에 이르러 당은 발해국으로 부르면서 공존 관계를 유지하였다. 살펴보았듯이 발해는 현실적으로 당과 교섭하고 외교관계를 유자하기 위하여 해양활동이 필요했고, 등주공격에서 보여지듯 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해군력의 증강이 필요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해양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765년 고구려의 유민인 이정기가 평로치청 절도사(압신라발해양번사)가 되어 발해교섭의 창구가 되었다. 제나라 역시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에 힘입어 해양활동이 활발했다. 운하를 장악하고 발해와 교역을 행했다. 등주로를 이용하여 특히 말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발해의 해양활동은 신라와의 관계에서도 매우 필요했다.

양국은 사신이 오고 간 경우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적대적 관계였다. 700년 경에는 고왕이 먼저 파견하여 화해를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만 사신을 통해 고왕에게 제5품인 대아찬의 벼슬을 수여하였을 뿐이다. 733년에 신라는 당과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8세기 말경에는 대동강 하구부근에 장구진을 설치하였다. 이는 당과의 관계 외에도 발해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790년과 812년에 신라는 북국(발해)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양국은 늘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미 삼국통일전쟁에서 확인되었듯이 본격적인 해양전이 벌어지는 시대에 발해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해양력의 증강이 필요했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발해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특히 일본을 끌어들여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동해를 통한 해양외교를 활발히 해야만 했다. 그것은 일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와 일본은 초기에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668년 부터 738년 까지 신라가 사신을 무려 40회나 파견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긴장관계에 돌입하였다. 일본은 신라를 공격하는 계획(759 혹은 758년 이전 계획)에 발해를 끌어들이기 위해 사신을 적극적으로 파견하고, 병선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신라도 방어준비를 하고 축성 작업(황해도 일대)을 벌였다. 결국 이 계획은 무위로 돌아갓으나 발해와 일본이 적극적으로 해양접촉을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신라가 803년, 806년(애장왕)에 일본 당 등과 화해무드를 조성하면서 역학관계는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발해는 이러한 현실적인 정치?외교적 이익 외에 명분을 위해서도 일본외교를 활발히 했다. 고려 계승의식이 강했는데 728년에 1차 사신을 파견한(24명중 8명만 생존)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의 계승성을 선언하기 위해서였다. 고구려 판도를 회복했고, 부여이래의 전통을 계승하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후에도 고구려 계승자임을 밝히고 있다. 일본에서는 발해를 고려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파견한 견발해사들 가운데에 고려씨들이 있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동아시아의 정세가 안정되면서 각국간에는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교역을 하면서 국가의 이익을 확대시키기에 힘썼으며 문화도 활발히 교류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해양활동은 동아 지중해 각국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구체적인 과정은 오늘은 생략한다.

3장 발해의 해양문화

1장 항해술

항해의 방법에는 沿岸航海, 近海航海, 遠洋航海가 있다. 인류의 역사 이래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항해는 연안항해이다.

근해항해는 연안항해와는 달리 육지와 일정하게 떨어져 항해하므로 해안의 환경보다는 해양자체의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이를테면 조류나 육지풍의 영향을 비교적 덜받는다. 고대항해, 특히 외교?군사적인 항해에 많이 활용되었다. 황해는 거리가 짧은 내해, 지중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부분 지문항법을 활용한 근해항해에 큰 난관은 없었을 것이다. 원양항해는 빈번하지 않았으나 점차 자주 시도되었다. 특히 고구려는 천문도, 고분벽화, 유물들에서 나타나듯 천문학 발달하면서 원양항해에 이용하였다.

<해양조건 검토>

(해류)

동아시아의 해양은 쿠로시오(黑潮)의 범위대에 속한다.

동중국해의 쿠로시오는 중국연안에서 일본전역에 걸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면서 일본 외해에서 북태평양을 동방으로 흘러가는 난류계의 해류이다.

대한난류는 쓰시마를 가운데에 두고 동수도와 서수도로 나뉘어진다. 서수도를 통과한 해류는 북북동으로 흘러 원산 외해와 울릉도 부근에 이르러 동쪽으로 전향하고 동수도를 통과한 해류는 북동방향으로 흐르면서 일본서안을 끼고 올라간다. 이 해류의 유속은 계절과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평균 1kn내외이며 물의 방향은 항상 북동으로 향하고 있다.

한편 중국연안을 남하하는 해류는 발해 및 북해북부에서 기원하며 중국대륙 연안을 따라 남하하여 남중국해 방면으로 사라지는데 동계에는 수온이 낮다. 황해, 동중국해의 해류는 바람의 영향, 중국대륙으로부터 하천수의 유입량의 변화 등에 의하여 변화가 많다.

<바람 >

해류와 함께 양 지역간의 교섭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조류와 바람이다. 특히 이 해역의 바람은 계절에 따라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항해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동아시아는 계절풍으로 인하여 해류의 방향이 영향을 받는다. 여러가지 자료는 삼국시대의 對外使行이 계절풍과 해류의 영향받으며,帆船을 이용했음을 알려준다.

동해는 겨울에 주로 北西風이지만 偏北風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高句麗人인들은 주로 겨울철에 동해연안을 내려오는 南流에 편승하여 沿岸水의 영향, 地域潮流의 도움을 받아서 北東系列의 바람을 활용하면서 항해를 한 것이다. 돌아올 때는 반대가 된다. 비록 시기가 떨어지지만 이러한 계절풍의 이용은 渤海人들의 對日本航海,唐人과 일본의 교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2절 항로에 대한 고찰

<황해 항로>

당과 발해는 육로로 교섭을 하기가 함들었다. 중간에는 해? 거란인들이 길을 막고있었므로 보다 안전한 해로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신당서 지리지 賈耽의 道里記에는 당에서 출발할 경우에는 登州( 봉래)를 출발하여 廟島群島를 따라 북상하는데, 大射島 龜飮島 烏胡島를 거쳐 馬石津에 도달하여 여순을 거쳐 요동반도 남안을 쭉 따라가다가 압록강 하구인 서안평으로 들어가는 길이 기록되있다. 그러니까 황해북부 사단항로는 서경 압록부인 압록강 하구를 출발하여 노철산항로의 근해를 부분적으로 이용하면서 발해만으로 들어가는것이 있다. 등주에는 발해사신들이 묵던 관이 있었다.

원인의 입당 구법 순례행기에는 발해의 교관선이 청산포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기록은 발해선들이 산동권에서 활동하였음을 알려준다. [신당서] 권 213 이정기전을 보면 "貨市에 발해의 명마가 매년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인 산동의 이정기 일가가 세운 제나라(765~819년)와 50여년간 교역을 한 것이다. 아마 서한만 , 대동강 하구, 산동지역은 고구려의 유민들이 활동을 했고, 이후의 황해연안의 해양민들은 고구려 유민과 백제의 유민들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크다.

발해는 황해에서 남방과의 교섭도 있었다. 이 항로는 산동반도 해역권에 들어온 다음에 황해서안의 연안 내지 근해권을 이용하여 양자강유역까지 남진해 가는 항로이다. 황해의 한반도 연안을 타고 올라가는 해류가 중국근해로 붙어 남진하는 물길을 찾아 그 길에 편승을 해야한다. 가능하면 북에서 남으로 부는 바람, 특히 북동계열의 바람을 활용하면 훨씬 용이하게 진행될 수 있다. 이 항로는 처음 고구려와 오와의 233년 교섭에 사용한 이후 고구려와 남조가 교섭하는 데 이용했다.

또한 후대의 기록이지만 輿地紀勝(권 11. 兩浙東路 慶元府 明州景物 下)에는 명주 창국현의 매잠산은 고려 신라 발해 일본 등의 선박이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곳이라고 하였다. 명주는 현재의 영파로서 중국 대외무역의 본거지였으며, 당시 장보고의 선단이 활약하였으며, 장우신 등 뛰어난 항해가 있었다. 신라초 등 신라와 관련된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동해 사단 항로 >

발해는 황해에서도 활약을 하였지만 역시 일본과의 관계때문에 해양활동은 동해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727년에 2대 무왕인 대무예가 24인을 처음으로 파견한 이후 총 36회의 사절이 파견되었다. 34회는 공식사절이고, 민간인 1회. 멸망후에 1회였다. 그러나 그 외에 민간인들간의 교역이 있었을 것이다.

동해항로의 출발지는 동해와 연변하고 항구 조건이 좋은 곳은 다 해당이 딘다. 고구려는 주로 元山 혹은 그 이북의 咸興灣 근처의 항구에서 일단 연안항해를 해서 내려온 다음에, 三陟 혹은 그 아래에서 먼바다로 나가 斜斷으로 일본열도 혼슈우 중부 이북지방으로 航進했을 것이다. 물론 중간에는 지형지물이 없으므로 鬱凌島와 獨島를 左右로 보면서 방향을 측정했을 것이다. 黑潮에서 분파된 해류는 동해 남부나 중부에서 출발한 선박을 일본해안으로 자연스럽게 밀어 붙이므로 물길과 계절풍을 활용했을 것이다.

해 역시 이를 이어받았다. 신당서 발해전에 의하면 기본적인 東京 龍原府의현재 琿春현 팔달성을 나와 鹽州(포시에트만)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그 아래 현재 先鋒에 해당하는 두만강 하류 지역에서 출발했으며, 때로는 南京 南海府(현재 鏡城의 吐號浦)근처에서 출발하기도 했다. 고구려와 발해인들은 결국 동해북부를 斜斷으로 길게 횡단하거나 남으로 내려온 다음에 다시 일본쪽으로 붙어 북상하는 흐름을 택해 혼슈우 중부에 도착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항해는 매우 곤란했던 듯 풍랑을 맞고 익사자가 많이 생긴일이 있었다.
 

표류도

< 도착지>

그러면 그들은 어디에 도착하였을까?

발해인들이 도착한 지역은 혼슈우 남단의 이즈모(出雲)와 중부의 쓰루가(敦賀), 그 이북의 北陸인 노또(能登)半島의 북쪽인 加賀,니이가타(新潟), 민간 교섭인 경우에는 홋카이도 까지였던 것 같다. 그런데 도착하는 과정을 더 구체적으로 보면 越後 이북이 6번, 北陸이 12번, 但馬 이서가 11회이다.

발해사 항로도
 
 
 

(이즈모)

이즈모 지역은 동해를 사이에 두고 경상남도 울산이나 포항지방과 위도상( 북위 35,5도)으로 보아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다. 양 지역 사이에는 항로가 2개 있었다. 하나는 동해남부 또는 남해로 부터 리만한류를 타서 북위 30도 부근에서 대한난류 西派를 횡단하여 본류에 올라타서 출운 서안에 도달하는 직접항로이다. 제 2의 항로는 한반도 동안에서 출발하여 隱岐에 도착하고, 다시 島根灣頭 혹은 因幡해안에 도착하는 것이다.

( 도표)---표류병
 
 

이 지역은 해양조건 상 신라계와 관계가 깊다. 그러나 가야는 물론 고구려도 진출하였다. 고구려와의 공식적인 교섭은 應神 28년, 仁德 12년(324) 58년(369)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러나 시마네(島根縣)지역의 이즈모(出雲) 등에 고구려 문화의 흔적이 있고, 해류의 흐름 등을 감안하면 동해 남부 또한 고구려 해양활동 범위였을 것이다. 발해도 이 지역에 도착하였다. 출운에 4번,오끼제도에 도착한 것이 1번이다.(825년高承祖 부사 高如岳. 다음해 5월에 귀국.)

(북륙으로의 도착.)

속 일본기등의 문헌자료는 가하가 일발교류의 기지이고, 능등의 복량이 출항기지였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발해선의 북륙으로의 래착을 상세하게 보면 월전 3회, 가하 5회, 능등 3회, 약협 1회로 되고 있다.

{日本書紀}에는 고구려인들이 繼體天皇과 欽明天皇원년, 敏達天皇 2년?3년에는 도착한 지점이 越國 혹은 越의 해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월전국의 가하군은 석천현에 잇는데, 금택시의 해안지대에는 발해사신을 안치하고 공급하는 시설이 조영되었다. 사신이 도착하면 대사 등은 수도로 가고 일부는 남아서 귀국준비 겸 교역을 하였다. 돌아갈 때 이 곳에서 출발하였다.

가하는 570년 1차 고구려 사신들이 도착한 후에 교류의 주요한 경로가 되었다. 능등은 3회 도착하였는데, 사신들은 福良津( 石川현 富來町 福浦)에 안치.

883년(원경 7)에는 발해사절이 귀환하는 배를 만들기 위하여 백성들이 福良泊의 큰 나무들을 벌채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들 지역에는 심지어는 발해의 사무역선들, 신라의 사무역선들도 도착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견당사가 북로를 택할 때에는 발해는 중간기지역할을 하였다. 능등국은 이러한 북방외교 루트의 거점이었다. 763년(천평 보자 7년)에는 처음으로 발해에 파견되엇던 배가 ?能登號?로 명명되기도 하였다.

노또반도 아래인 후꾸이현의 쓰루가(敦賀)지방은 고구려 발해는 물론 신라?가야와도 관계가 깊어 이 지역이 선박들이 자연스럽게 도착하는 지점임을 알려준다. 와카사만(若狹灣)을 중심으로 白城?白木, 白石神社 등 시라기神社들이 많이 있고, 加羅國의 왕자 都怒我阿羅斯等이 穴門( 현재의 下關)에 착하였다가 이즈모를 지나 越國(福井縣 敦賀市)에 닿은 기록이 있다.

쓰루가는 고구려인이 진출한 곳이다. 欽明王때 고구려 사신과 道君이라는 지방호족이 밀무역을 했다고 다른 호족이 조정에 밀고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고구려와 왜가 교섭과 교역을 하였음을 알려준다. 발해도 역시 사무역선들이 이 항로를 택해 들어왔다.

그런데 참고할 만한 사실이 있다. 후꾸이 현의 三國の浜을 출발한 일본의 배가 있었다. 58인이 탄 배는 북해도를 향하여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우연히 포시에트만에 도착하였다. 그 후 심양과 북경을 거쳐 서울 부산을 통해 오오사카에 도착하였다.(1646년, 6, 17일). 이 사실은 양 지역간의 교섭이 이미 오래전 부터 있어왔음을 시사하고 있다.

( 도착 지역 변천의 의미)

그런데 도착한 지역이 시대적으로 유형화 되며 변천하고 있다. 무엇인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월후 이북에는 8세기대, 단마 이서(은기나 출운 등)는 9세기대에 한해 있다.(*그것도 후반임) 반면에 북륙으로는 758년(제 4차 사절)부터 922년(제 34차 사절)의 165년간에 걸쳐서 꾸준히 도착하였다. 따라서 북륙이 발해와 일본 교류의 중심적인 장소이었다. 하지만 시대별로 집중되는 현상은 분명히 있다. 이것은 항해술 등 해양지제의 영향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다.

8세기 대에는 월후 이북에 주로 도착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관련이 있을것 같다.

9세기에 들어와 산음에 도착하는 이유는 발해가 신라와 긴장관계가 완화되어 한반도 남부 근해를 항해하는 것이 가능해진 탓일 수도 있다. 또한 강남에서 당나라의 상인이나 당의 물건들을 운반하는 신라배들이 서일본(큐슈의 타자이후)에 빈번하게 들어오고, 교역활동을 활발히 하면서(장보고 선단. 장우신) 발해가 강남교역권과 접촉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원인의 입당구법 순례행기에 발해의 교관선이 청산포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후대 기록이지만 輿地紀勝(권 11. 兩浙東路 慶元府 明州景物 下)에는 명주 창국현의 매잠산은 고려 신라 발해 일본 등의 선박이 바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곳이다라고 한다.명주는 중국 대외무역의 본거지이고,신라상인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장우신 등 장보고의 선단이 있었던 곳이다. 특히 후기의 발해선들은 정치적인 목적 보다는 교역 등 경제적인 목적이 강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그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양국간의 관계는 일본이 신라와 관계가 악화된 9 세기 초 부터는 밀접해져서 예전 처럼 도착한 다음에 축자의 태재부를 경유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연안의 곳곳에 객원을 민들고 후구라쓰( 福良津)의 관항화가 진행된 것은 이 때문이다.

<시기>

발해인들의 항해시기는 어떠했으며, 그것은 항해술,조선술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바다에서의 항해는 바람이 절대적이다. 특히 발해항로는 특히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근해항해 및 원양항해를 주로 한데다가 해류의 기본 방향이 항해하는데는 도움이 별로 되지 않으므로 바람의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남향하는 한류를 타고 무엇보다도 북서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발해사 도표
 
 
 

즉 위의 도표를 보면 발해인들은 일본에 갈 때는 늦가을부터 초봄에 걸쳐 부는 북풍계열의 바람을, 歸還時에는 늦봄부터 여름에 걸쳐 부는 남서풍계열을 이용하였다. 즉 초기교섭은 8월이었으나, 700년대에서 800년대에는 10월에 10번, 11월에 8번,11월 하순이 1번, 음력 12월이 4번 등이다. 그러나 점차로 12월과 1월이 많아진다. 전체적으로 36번 중에서 17번이 10, 1월에 집중되고 있으며, 특히 10월중순이 5번이다. 7월에 1회와 8월에 2회의 예가 있을뿐 4,5,6,9월에는 하나도 없다. 이로보아 고구려나 발해인들은 일본열도로 항해할 때 음력 10월에서 1월 사이에 출발했다. 즉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서 계절풍을 의식적으로 이용을 했다.

동해의 계절풍은 북서-북-북동으로서 발해사가 내왕하는 데는 거의 순풍이 되는 풍향이다. 반대로 여름의 계절풍은 남서로서 발해사가 귀항하기에는 순풍이다.

더우기 36번 가운데 과반수인 17번이 10,11월에 집중된 것은 겨울계절풍이 강해지지 않는 中秋에서 晩秋를 선택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10월 중순에 5번이나 있는 것은 겨울 계절풍이 불기 시작하기 직전이다. 계절풍은 기후학적으로는 10월 13일에서 17일 경부터이다. 그 시기와 발해사가 동해를 건너는 시기는 분명히 일치하고 있다. 한편 발해사가 귀국할 때 출경과 출국은 전부 3월에서 8월에 집중되어 있고 9월에서 1월에는 1번도 없다. 즉봄 부터 여름의 남 또는 남서의 계절풍을 이용했다.

4절 조선술.

동아시아권에서 범선을 사용한 예는 갑골문자에서 나타나고 있고,정에는 범이 그려져 있다. 法顯의 {佛國記}에는 바람을 항해에 활용한 기록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6개월 정도의 장기항해용 선박을 제조할 수가 있었다. 越絶書에 의하면 大翼이란 군선은 길이가 120尺 (1척은 약 23cm) 폭이 1丈6尺 총승무원은 91인으로서 그 가운데 전사 26인 櫂卒(노꾼)이 50인, ??에 3인이 있었다. 魏가 나라를 세운 후에 王浚에게 명하여 큰 배를 운반하게 하였는데 길이가 120步, 수송인원은 2000여명에 달했다. 배위에 나무로 성을 만들고 루각을 일으켰다고 한다.

高句麗人들의 造船術은 역시 발달했을 것이다. 杜佑의 {通典}에는 馬?水를 설명하면서 고구려에 大船이 있었다는 기록을 하고있다. 그런데 長壽王은 강남에 있었던 송나라에게 말 800필을 보냈다. 우수한 능력을 갖춘 대규모의 船團이 이동했을 것이다. 일본서기에도 사신들의 규모가 나와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이러한 능력을 전수 받았을 것이다.

한편 일본은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 한민족의 일본열도 진출은 조선술의 발달을 빼놓고는 셩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왜국은 6세기 중반 이후에 오면 조선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일본은 이후에도 백제선을 만드는 등 조선술의 영향을 받았다. 東征繪傳繪卷}에 그려진 造船 풍경을 보면 고대 百濟 新羅인들이 조선을 지도하는 것이 보인다.

신라인들의 조선술은 이미 중국에서 알려져 있다. 중국 연안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재당신라인들은 고구려 백제, 산동의 이정기로 대표되는 집단의 능력을 계승하였다. 752년에 동대사대불 개안 때 신라사신과 상인들이 대거 일본에 갔다. 700명의 7척의 배를 타고 갔다. 839년에는 태재부에게 신라배를 건조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일본의 견당사들이 신라배로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으며,승려 등 민간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원인이 타고 귀국한 신라배가 현재 히에이산 明德院에 그림으로 남아있다. 쌍돛대에 활대가 9개,사각돛과 누각이 있었는데 돛을 물레를 이용하여 조정하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으며, 그 능력을 바탕으로 통일신라처럼 비슷한 정도의 해양능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등주공격에서 보듯이 군선을 보유하였고, 배 2척에 105명 정도의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니까 배를 운용하는 기본인원 외에 약 50여명식 한배에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에는 고구려와 유사하다. 물론 말갈의 능력도 계승하였다. 참고적으로 일본의 견당사는 1척당 140명 전후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4장 발해의 현재적 의미.( 해양질서를 중심으로)

발해는 유민들이 건국한 광복국가다. 그리고 멸망 이후 200여년후에도 광복운동을 한 나라다. 자주성과 정체성을 상실해가는 우리에게 한민족의 자유의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역사는 세계화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다양한 국제성, 뛰어난 외교정책, 그리고 다수의 종족과 이질적인 문화를 수용하여 보편성을 획득하고 세계성을 지향해가는 모습은 21세기를 맞는 우리에게 세계화의 의미와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발해는 우리에게 절박하고 현실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21세기에 우리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하고, 어떠한 위치를 차지해야할까에 대해서 반성과 함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21세기를 2년 앞두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너무나 많다. 전면적인 질서의 재편과 패러다임의 대 변혁을 앞에두고 지구와 인류는 새로운 실험에 직면하고 있다. 서구의 강대국들은 세계화의 덫을 쳐놓고 이젠 노골적으로 자집단주의를 찬양하고 실현하려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지역 역시 협력체 내지 블록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특히 최근의 사태는 절박감 마져 ?게 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과 각각의 이익 때문에 정치적인것보다는 경제나 교역, 문화교류 등 보다 실질적인 이익을 내세우면서 협력체의 결성과 파트너쉽의 가능성들을 시험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오래전 부터 아시아 경제지도를 작성하여 왔다. 1988년에 환일본해(동해)경제권을 주장하여 남?북한과 러시아를 자국의 경제영역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최근에는 풍부한 자금력을 배경으로 동해와 연변한 니이가타(新瀉) 도야마(富山) 등 각 도시들이 남북한의 도시들, 중국과 러시아 등의 도시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경제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이른바 환일본해 이론이다.

한편 중국 역시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국지경제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화교경제권을 비롯하여 환발해경제권, 복건성과 대만을 연결하는 양안경제권, 화남경제권 등 다양한 이론 및 국지경제권과 함께 산동성 요녕성 한국의 서해안을 연결하는 환황해경제권(1989년), 동북삼성 내몽고 산동반도 몽골 시베리아 요동지역 한반도 일본열도를 모두 포함하는 거대한 동북아경제권의 구상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 일본 등 지방자치단체와도 개별적인 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도 고르바초프가 1991년에 불라디보스톡 연설을 한후에는 태평양에 대한 관심을 공식적으로 표명했고, 1992년 1,1에는 군사항인 불라디보스토크를 개방하였다. 그 외에도 일본과 환동해경제권에 참여하고 유엔개발기구(UNDP)가 주도하여 러시아 북한 중국이 공동으로 참여한 동북아지역 협력프로젝트가 있다. 이 계획은 러시아의 크라스키노 등 핫산(KHASAN)지구와 중국의 훈춘, 북한의 나진?선봉 등 두만강 하구 지역을 자유무역경제지구로 선정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복잡하고 불투명한 국내사정으로 인하여 아직은 동아시아지역의 이익과 활동에는 소극적인 편이다.

북한도 1991, 12월에 나진?선봉지역을 자유무역경제지구로 선포하고, 1993년에는 자유경제 무역지대법을 제정하여 동해를 활용한 경제발전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은 서해만 개발계획, 중국과의 황해경제권 등을 추진하고 있으며, 2년전 부터는 동경과 서울 북경을 잇는 베세토(BESETO) 이론, 동해 중부와 일본의 쓰루가 니이가타 등을 연결하는 동해경제권 등 여러가지 이론을 구상하고 있다. 그 외에 영종도 신공항 건설, 부산항만의 확장 건설 등 나름대로 대책을 세우고 있다.

이렇게 각국은 많은 구상과 이론들을 내세우고 있으나 선언적이고 국지경제권의 개념인데다가 지극히 지역주의형이다. 따라서 유기적 연결이 안되고 중복되는 지역들이 매우 많다. 이런 무정부적인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큰 원으로서 하나의 모델이 필요하다. 그런데 모델 내지 협력체가 구성될 때 우리? 입지는 매우 불리하고 열악하다.

그런데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지정학적으로 아주 절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반도는 동아지중해의 중핵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지중해에서 해양은 모든 지역과 국가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네트워크이다. 남북의 통일이 이루어지면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양쪽에 가지고 있고 동해 남해 황해 동중국해 전체를 활동범위로 하고 일본열도와 중국, 러시아를 육로와 해로, 공로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결절점이다. 단순한 가운데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힘이 모인 혈맥이고, 동시에 주변국을 조정할 수 있는 통제거점이다. 이러한 중핵연결지의 역할은 정치 외교뿐 만 아니라 경제적이나 교역상에서 이익과 위상을 높힌다.

우리는 역사상에서 이러한 중핵조정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예를 고구려의 발전과정에서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으로 대표되는 5세기 경의 동아시아는 분단된 중국과 고구려, 북방 세력 등 3개정도의 중심축이 있고, 그를 핵으로 한 주변의 소국들이 서로 연결하는 다중 방사상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고구려는 대륙과 해양을 공유하면서 동아지중해의중핵에서 각국들의 교섭을 관리 조정했다. 특히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세력들이 북중국정권( 현 북경)과 교섭하는것을 막고, 해양통로의 확보를 잇점으로 분단 중국세력들( 북경 , 상해)간의 복합적인 갈등을 등거리 해양외교로서 적절히 이용했다. 또한 유연,돌궐등의 북방세력들(현재 러시아)을 동원해 대중국 포위전선을 구축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동아지중해에서 중핵조정역할을 잘 수행하여 강국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발해가 역시 그러하다.

발해의 번성과 멸망과정은 동아전략을 수립하는 하나의 모델이 될수 있다.

초기의 위기국면을 해양외교를 이용해서 잘 극복하였고, 그후 절묘한 외교와 교역을 통해서 200여년 동안 평화롭게 문화를 꽃피우면서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불충분하지만 동아시아의 중핵에서 각국간의 역학관계를 조정하고 때로는 자기 위치를 유리하게 조성하였던 것이다.

발해의 옛땅은 이들 경제권을 비롯한 모든 힘의 방향이 모두 미치는 지역인 만주일대이다. 연해주 일대가 그러하고, 특히 러시아의 크라스키노, 중국의 훈춘, 북한의 나진 선봉지역을 중심으로한 UNDP의 동북아 협력 프로젝트는 과거 발해의 수도와 대일본 출발항구가 있던 곳이다. 발해는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환경때문에 학문외적으로 각국 간에 예민하게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결국 발해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각국이 동북아전략을 수립하는지표가 된다.

현재 황해는 중국의 힘이 강화되고 있고, 결국은 한국과 중국의 당사자 문제가 주가 되겠지만, 동해는 상대적으로 중국의 힘이 약하고 동아시아 모든 나라의 힘이 골고루 미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발언권을 더욱 강하게 할 수 있고, 입지를 유리하게 차지할 수 있다. 이때 발해의 대일본 해양외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5장 결론

21세기를 목전에 둔 현재 우리가 해야할 일은 자명하다.

동아지중해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공질성이 강한 하나의 권역이란 사실을 인식하여야한다. 그리고 그 기본성격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 효율적으로 질서의 재편을 유도해야 한다. 특히 21세기 동아시아에서 중핵이란 사실을 우리는 물론 상대에게도 인식시키고, 중핵조정역할을 잘 수행하여야 한다. 그래서 협력체 구성의 리더로서 동아시아의 평화구도를 유지해야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지중해적 질서임을 인식하고 해양력을 강화함은 물론 해양을 활용하여 문화 경제 정치 군사 등을 새질서에 걸맞게 변화시켜야 한다. 이 때 이론적 근거와 당위성을 제공하는 것은 역사이다. 발해가 21세기에도 효용성이 무궁한 역사이고, 특히 해양활동은 구체적인 방법론과 현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천여년 간 묻혔있었던 발해가 이제 다시 의미있는 존재로 부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