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la.kyungsung.ac.kr/~hangc/blsahoe.htm
발해국의 주민구성

<ALIGN=CENTER>+------------------<목 차>----------------------+

<ALIGN=CENTER>서론 및 결론

<ALIGN=CENTER>1. 종족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ALIGN=CENTER>2. 언어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ALIGN=CENTER>3. 문화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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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및 결론

발해사를 보는 시각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러시아 등이 각각 다르다. 잘 알다시피 한국은 발해사를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사로 보면서, 신라와 발해가 양립하였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라 부른다. 그러나, 중국은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인 '渤海郡'으로 간주하고 그 건국 주체와 주민들에 대해서도 고구려유민과 다른 '말갈'이라고 한다. 이 논리는 결국 발해는 당의 지방사로서 중국사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중국학계의 이와 같은 견해는 한국학계와 대립을 보이고 있다. 한편, 발해땅의 일부에서 현대사를 이어가고 있는 러시아에서도 발해에 대한 견해는 한국과 다르다. 즉, 발해는 고구려를 일부 계승한 면도 있지만, 대체로 고구려와 다른 계통의 靺鞨人들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독립국 靺鞨史라고 한다. 발해사는 한국사나 중국사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당의 지방정권도 아닌 '독립국가'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중국과 러시아가 발해사를 자국사 내지 독립국사로 간주하여 그들의 역사에 기록하려는 것은 일면 타당하다. 즉, 지역사적인 측면에서 그들은 지금 과거 발해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도 발해의 후손을 자처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다르다. 즉, 민족사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인들은 발해멸망 이후부터 계속 발해 옛 땅의 일부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에도 발해 후손을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자면, 발해사람들이 당시 그들을 어느 나라사람이고 그들의 조상을 누구라고 생각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발해 주민들이 스스로를 고구려후손으로 생각하였는가 아니면 '靺鞨' 후손으로 자처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제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말갈의 실상을 밝히는 것이다.

흔히들 발해의 주민은 지배층이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이 고구려계와 다른 말갈인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원적 주민구성론은 우리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로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그런데 이 견해가 반영하고 있는 종족계통은 肅愼[先秦]→읍루[漢]→勿吉[後魏]→靺鞨[隋·唐]→女眞이라는 말갈의 단일계통설에 입각한다. 이러한 종족계통설이 그대로 문제가 없다면, 이원적 발해주민구성론은 일정하게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에 의해 발해사는 고구려유민사가 아닌 말갈사 즉, 만주사로 봄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글에서 발해의 주민구성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다수가 고구려유민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한다. 발해 지배층의 고구려유민설은 白鳥庫吉이 '(발해의) 왕조 및 상류사회를 조직한 자가 고구려인'이라는 점을 주장하고부터 였다. 그의 논거는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 ?(발해는) 옛 고구려의 땅을 다시 찾아 거하고 있다?는 기록과 ?고구려국왕 대흠무가 말하다?는 것, 그리고 일본에 보낸 85명의 발해 正使 중에서 26명이나 옛 고구려의 姓과 같은 高氏였다는 점, 그리고 당시 일본이 渤海를 高句麗[高麗]라고도 하였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이후 발해 지배층의 고구려인설은 박시형, 三上次男 등에 의해서도 수용되어 오늘날 한국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학계의 주장들도 대부분은 피지배층의 말갈설을 지지한다.

그러나, 중국학계의 한결같은 논조는 지배층 역시도 고구려와 다른 말갈족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新唐書}의 '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라는 것에 입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과 일본이 지배층의 고구려계설을 인정하는 것과도 아주 다르다. 잘 알려진 대로 대조영 등의 고구려계설은 {舊唐書}의 '高麗別種' 기록과 앞의 白鳥庫吉 등의 논증에 힘입고 있다. 따라서 발해의 주민구성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과연 '靺鞨'이 어떻게 史書에 기록되었으며, 그들의 실상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말갈문제와 관련하여 세 편의 글을 통해 이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다. 이에 의하면, '靺鞨'은 唐·宋代인들이 그들의 동북방주민들을 汎稱, 卑稱하였던 종족명이었고, 고구려의 피지배주민들의 卑稱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자세 특히, 피지배주민들에 대한 卑稱的 자세는 {三國史記} 등도 받아들여 발해의 주민구성 문제를 혼란스럽게 하였다고 하였다. 요컨대 고구려변방의 만주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불렀던 종족명이 아닌, 고구려와 唐·宋 지배층이 일방으로 불렀던 호칭만을 가지고 이들의 종족계통이나 歷史像을 복원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즉, 한국과 중국의 전근대적 역사서술이 갖고 있던 왕조중심적이고 중국중심적이었던 시각을 극복할 때에만이 발해사의 실상을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및 중국사에서 '靺鞨'족의 존재를 고구려와 따로 구별하여 인정하는 것부터가 문제라는 것이다. 만주지역에서 스스로 왕조를 개창하여 국호를 선포하였던 조선, 부여, 고구려가 그들의 종족명에 더 가깝고, 왕조 개창에 성공하지 못하였던 흑수인들의 경우는 '黑水靺鞨' 등으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黑水靺鞨'도 어차피 타칭이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구별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동양사에서 이미 일개 종족명으로 그 시민권을 획득한 '靺鞨'을 존중한다면, '高句麗靺鞨'(속말말갈과 백산말갈 등과 같이 고구려주민이자 고구려계인 말갈)과 '黑水靺鞨'(고구려계가 아닌 말갈)로 나누어 부름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따라서 고구려, 발해사에 있어서 '靺鞨' 기록이 갖는 진실은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치력 확립이 어떠했는가 하는 점 등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고구려의 말갈지배 방식에 관한 연구가 갖는 의미는, 중앙의 지방지배 방식이라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 이것이 고구려인의 이민족의 말갈지배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입장이 말갈의 종족계통과 고구려와의 정치적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입증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발해어에 대한 자료가 없는 상황이기에, 발해어의 계통은 오히려, 그들의 종족계통에서 발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발해어가 고구려어를 계승했다는 사실은 발해가 고구려와 풍속이 같았다는 {新唐書} 기록과 그들의 이름을 통해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渤海語는 夫餘-高句麗系로써 발해는 고구려말을 주로 쓰는 국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종족적인 측면에서 발해의 대부분은 고구려땅을 계승하였고, 흑수인의 남하가 고구려 전역을 망라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언어적인 측면에서도, 발해어의 잔재가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는 滿洲語가 흑수계의 肅愼語보다 예맥계의 夫餘-高句麗語의 잔재가 더 많을 것이며, 이 만주어는 또한 '夫餘韓語系'의 후손인 한국어와도 친연관계에 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고 생각한다. 한편, 문화적인 측면 특히, {舊唐書}에서 고구려인의 주거특징이었다고 전하는 온돌장치가 발해주민의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는 점등은 문화적으로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는 증거들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발해의 이원적 주민구성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類聚國史}(日本, 菅原道眞 撰)의 발해백성 관련 기사의 말갈은 피지배층을 汎稱하는 것이고, 士人(土人)은 곧 발해백성 중에서 都督, 刺史 등이 될 수 있는 지배층을 밝히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 이것이 곧 발해의 이원적 주민구성론을 반증하는 결정적 자료도 될 수 없다는 점도 밝히려 한다.

1. 종족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靺鞨' 기록이 문제가 많다는 점은 이미 여러 선학들에 의해 줄곧 제기되어 왔다. 우선 말갈족의 단일계통설에 대한 비판은 중국학계에서부터 있어 왔다. 즉, 읍루는 숙신의 일부라는 주장이 청대 지리학자인 丁謙에 의해 논증되어 馮家昇에 의해 지지를 받았고, 최근에는 薛虹이 이를 지지하고 있다. 더 나아가 숙신과 읍루는 그 계통이 전혀 다르다는 傅斯年, 李學智 등의 주장도 제시되어 있고, 일본의 池內宏과 한국의 리지린, 김정학 등도 이와 같은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숙신을 읍루의 선조로 보는 단일계통설은 여전히 楊保隆 등에 의해 강력히 주장되어 묵시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말갈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정약용의 거짓말갈(僞靺鞨)說이 있고, 말갈이 단일 종족명이 아니라 몇 개의 종족에 대한 總稱이었다는 說(日野開三郞, 孫進己), 그리고 말갈이 濊 또는 濊貊系였다는 주장들(日野開三郞, 孫進己, 權五重)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 제기가 있게 된 것은 말갈이 살았던 곳이 과거 그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흑룡강중하류의 숙신 등에 비해 남북만주 지역에서 한반도까지를 포함하여, 과거 예맥 및 부여, 옥저등이 살았던 곳과 상당부분 중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숙신족의 남하로 인한 말갈의 번성이라고만 볼 수 없는 문제이다.

필자도 선학들의 연구에 힘입어 따져본 결과 말갈의 단일계통설과 아울러 발해의 이원적 주민구성론이 문제가 있다고 단정을 내릴 수 있었다. 즉, 말갈의 조상으로 알려진 肅愼도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흑룡강 중하류의 肅愼, 고조선과 계통을 같이 하는 남만주의 肅愼이 있으며, 말갈로 기록되는 주민들도 흑수말갈만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말갈은 예맥의 고구려계였다. 다시 말해, 흑수말갈을 제외하고, 발해건국의 주체가 되었던 송화강유역 주민[粟末靺鞨]과 백두산유역 주민[白山靺鞨] 등은 모두가 고구려유민이었다. 따라서 발해국의 주민은 고구려유민과 말갈의 이중적 구성이 아니라, 고구려유민을 중심이었다.

발해주민의 고구려유민설은 북한에서도 주장되고 있다. 북한의 발해주민 구성에 관한 논의는 말갈 기록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으나, 발해의 주민들이 대개가 고구려유민이었다고 한다. 즉, 장국종은 종래 박시형설인 소수의 고구려유민(40%정도)과 다수의 말갈(60%정도)설을 따르지 않고 다수 주민의 고구려인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와 같은 문헌적 근거로는 말갈이 고구려와 다른 이민족이었다면, 거란의 남북원제도와 같이 이들을 다스리는 특별제도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것이 없이 200여년간 유지되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말갈'이 살았던 지역에는 고구려계로 볼 수 있는 예맥, 옥저 등이 포함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숙신 그것도 흑룡강중하류의 숙신만을 의식해서 발해의 주민구성을 고구려유민과 말갈의 이원론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중국인들의 만주지역사에 대한 기록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더욱 자세히 기록되고 있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만주사의 새로운 변화에 발견에 기인하다 보다 기록자의 지식이 확대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즉, 黑龍江 中下流 地域 주민들로 알려져 있으면서 말갈의 조상들로 알려진 肅愼에 대한 역사적 실상은 晋代에 그 실마리를 찾고({三國志}卷30, [東夷傳]의 읍루]), 隋·唐代에 가서야 비로소 중국측 기록에 자세히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晋書}卷97, [四夷,東夷傳]의 肅愼, {隋書}卷81, [東夷列傳]의 靺鞨). 그러나 문제의 말갈은 唐代의 {隋書}[東夷列傳]에 처음 고구려 등과 함께 立傳되었으나, 그 이후의 {舊唐書}(後晋) 등에는 [東夷列傳]이 아닌 [北狄列傳]으로 그 분류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록상의 변화는 어디까지나 중국측의 일방적인 분류방식이었던 것이지, '靺鞨'인 자신들의 종족적 변화가 아니었다. 아울러 이러한 기록상의 중국중심적 원칙은 말갈의 단일계통설에도 적용되었다. 즉, 만주 주민들이 秦 이전에는 스스로 肅愼이라고 하다가 漢代에는 읍루, 後魏(元魏)代에는 勿吉, 隋·唐代에는 靺鞨이라 그들 종족 이름을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변화가 아닌 중국측의 일방적인 인식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중국중심적 세계관이 확립되고 있던 唐代인들은 만주 전 지역 주민들을 말갈이라 汎稱하였다는 것이다.

발해가 중국측 기록에 처음 입전되는 {舊唐書}(後晋, 945)는 [北狄列傳]에 '渤海靺鞨'과 '靺鞨' 등을 싣고 있다. 공식적인 '渤海'를 '渤海靺鞨'로, 그리고 黑水靺鞨을 '靺鞨'로 입전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舊唐書}보다 115년 늦은 宋代에 편찬된 {新唐書}(1060)는 [北狄列傳]에 '渤海'와 '黑水靺鞨'을 입전시켜 발해에 대한 입장을 달리하였다. 즉, 이것은 발해를 말갈로 인식하지 않고 '渤海國'으로 인식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같이 중국측의 발해와 흑수말갈에 대한 기록상의 변화는 발해사의 변화에 기인했던 것이 아니라, 사서 편찬시대 지성들의 역사인식에 의거하였다. 발해인들이 스스로 '말갈'에서 '발해'로 그 명칭을 바꾸어 갔던 것이 아니다. 발해를 말갈이라 칭했던 것은 발해건국 직후 당의 일방적인 칭호였고, 그 이후 두 나라 관계가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발해라는 국호가 정식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말갈이란 중국측의 일방적 호칭으로써 존칭이 아닌 그들의 동북방 주민(종족)에 대한 卑稱이었다. 사서에 발해를 '靺鞨'이나 '渤海靺鞨'로 썼던 것은 '말갈'인들이 세운 발해로서의 표현방식의 차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우호 내지 대립관계에 대한 인식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예는 신라측의 기록도 마찬가지로써 신라인들은 발해를 '발해'로 부르지 않고 대개 '발해말갈'이나 '말갈'이라 하였다.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족 및 발해족의 형성을 언급한다. 이러한 이론적 근거는 고구려와 발해가 왕실을 세워 700여년 또는 200여년을 거치면서 새로운 종족으로 형성되어 나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발해족이란 다수의 말갈인들이 중심이 되어 새롭게 형성한 종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종족 형성론은 고구려나 발해족의 형성과정에서 그들은 하나의 역사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거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라면, 700년이 넘게 존재하였던 고구려지역에서는 고구려족이 형성되었다고 해야 한다. 아울러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발해가 세워져 발해족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곧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족 형성 부족이었던 부여, 옥저등이 언어·문화적인 측면 등에서도 같은 계열이었다고 중국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고구려족의 형성에 논의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발해족의 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발해족이란 숙신계의 말갈이 주체가 되어 예맥계의 예맥, 부여, 옥저, 고구려족을 일부 흡수하여 漢化한 민족공동체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고구려족은 고구려가 성립할 당시의 일개 고구려족이었던 것이지 700여년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형성된 고구려족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唐書}등에 '濊貊故地', '高句麗故地'등이 구별되어 나오는 것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말갈인들만이 살았다고 해야할 '肅愼故地'도 함께 나온다는 점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것 같다. 단지, 孫進己 등이 말갈의 종족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을 정도이다.

발해족의 형성과정 즉, 발해의 주민구성에서 다수로 언급되고 있는 말갈의 존재는 정식으로 {隋書}[東夷列傳]에 立傳되었다. 이에 의하면, 말갈은 粟末部, 白山部, 安車骨部, 號室部, 拂涅部, 伯?部, 黑水部 등의 7부로 구성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고구려와 말갈은 결코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없다는 논거로 이용되어 오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같은 {隋書}'東夷列傳'에 말갈과 대등하게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함께 입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黑水部 이외의 말갈지역은 과거 예맥 및 부여, 옥저등이 살았던 곳과 대부분 중복되고, 발해시대에는 모두가 발해가 되었던 곳이다. 그렇다면, 산동 및 요동지역의 숙신과 남만주의 예맥, 그리고 옥저 등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가? 楊保隆 등의 주장대로 하자면, 이들은 대개 한반도 북부로 이동하였고, 흑수지역의 숙신이 남하하여 번성한 말갈들로 가득차다 되었다는 것이다(한반도남하설, 민족이동설). 그들은 이른바 고구려족이 되지도 않고 말갈족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지역은 농경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곳으로써 그토록 민족의 교체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리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종족명의 변화가 그 지역사의 변화에 기인했던 것이 아니라, 중국측 기록자들의 지식확대와 인식변화에 따른 면이 강했다. 따라서 남만주 지역에 넓게 퍼져있던 예맥, 옥저 등이 결코 모두가 한반도 등으로 남하했다고는 볼 수 없다. 예맥계 주민의 명칭이 다르게 불리워졌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만주지역 주민을 통칭하여 불렀던 '말갈'이라는 종족명은 별 의미가 없고, 粟末, 白山, 黑水人과 같이 앞의 지역 이름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요컨대 粟末靺鞨(粟末部 靺鞨)이란 松花江流域 주민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어, {新唐書}에 나오는 粟末靺鞨 大祚榮이란 송화강 출신 대조영이란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족으로 존재하다가, 隋·唐代에 와서 말갈족으로 그 종족명이 일원화되면서 백산부 말갈이니 속말부 말갈 등으로 차별화되고 있는 것은 민족이동이 아닌 역사인식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말갈의 문제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 가야 할 문제는 {三國史記}의 말갈이다. 즉, 중국측 말갈이 {北齊書}[武成帝紀]에서는 河淸 2年(563)에 처음 나오는 것에 반하여, {三國史記}에서는 東明聖王 원년(B.C.37)부터 景明王 5年(A.D.921)까지에 걸쳐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측 기록과도 같은 말갈이 그대로 전제되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唐書} 등 다른 어떤 곳에도 없는 말갈이 수처에 나오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결론을 말자면, 이곳의 말갈은 대개가 고구려나 백제의 변방주민들에 대한 卑稱에서 연유한 것이다. 전근대인들이 都城 중심의 지배층을 '國人'이라 하였던 예가 말갈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三國史記}에 보이는 바와 같이, 慶州가 新羅의 다른 이름으로 쓰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사실을 고구려에 미루어 보면, 고구려사람 하면 평양 중심이었지 않았을까 한다. 이러한 왕조중심적 차별의식은 결국 {三國史記}가 말갈을 B.C년간부터 10세기까지 삼국의 변방주민들로 등장시켰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요컨대, 발해건국의 주체가 되었던 속말인(속말말갈)과 백산인(흑수말갈) 등의 종족적 계통은 고구려인과 같은 예맥계였으며, 이들을 말갈로 기록하였던 것은 중국인들의 만주주민들에 대한 卑稱이자, 고구려 피지배주민들을 도성중심의 고구려인과 구별하여 기록하였던 결과였다.

2. 언어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발해인들이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였을까 하는 문제 역시 발해국의 주민구성과 관련된다. 발해인들의 언어가 중국인들과 달리 독특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A-1. 渤海靺鞨의 大祚榮은 본래 高句麗의 別種[高麗別種]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祚榮은 家屬을 이끌고 營州로 옮겨가 살았다. (中略) 聖曆(則天武后) 年間에 스스로 振國王에 올라 突厥에 사신을 보내고 통교하였다. 그 땅은 營州 동쪽 2천리 밖에 있어 남쪽은 신라와 서로 닿고, 越喜靺鞨에서 동북부로 黑水靺鞨까지 지방이 2천리에 민호가 십여만이며, 勝兵이 수만명이다.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고, 문자 및 典籍[書記]도 상당히 있다({舊唐書}卷199下, [北狄, 渤海靺鞨).
2 그 나라 사람들은 왕을 일컬어 '가독부', 또는 '성왕', 또는 '기하'라 하고, 命은 '敎'라 하며, 왕의 아버지는 '老王', 어머니는 '太妃', 아내는 '貴妃', 長子는 '副王', 다른 아들들은 '王子'라 한다({新唐書}卷219, [北狄, 渤海]).
3. 振國은 본래 高句麗였던 나라로써 그 땅은 營州의 동쪽 2천리이고, 남쪽으로는 新羅와 접해 있으며, 越喜靺鞨에서 동북으로 黑水靺鞨에 걸쳐 지방 2천리에 編戶 10여만이 있으며, 병사는 수만인이며,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고, 文字 및 典籍[書記]도 상당히 있다({冊府元龜}卷959, 土風).
4. 속말말갈은 동모산에 의지해 있었으니, 후에는 발해가 되었으며, 왕을 칭하였으며 10여대가 이어졌다. 문자와 예악, 관부제도가 있었으며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金史}卷1, 世紀).

 

위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발해는 문자가 있었으며, 그들의 풍속은 고구려와 같았다는 것이다. 또한 문자와 관련이 있지만, 발해는 그들 독자의 언어도 가졌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그들의 왕을 '가독부(可毒夫)' 또는 '성왕(聖王)', '기하(基下)'라 하였던 사실에서 알 수 있지 않은가 한다. 특히, '가독부(可毒夫)'의 사용은 신라의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니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어 오던 토착어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왕실 언어에서도 唐에서는 命이라 하던 것을 발해에서는 '敎'라 하였고, 왕의 아버지는 '老王', 어머니는 '太妃', 아내는 '貴妃', 長子는 '副王', 다른 아들들은 '王子'라 하여 唐 및 宋과 달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자와 언어의 자주성이 입증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해의 언어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한 성과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발해의 문자에 대해서는 출토된 기와 문자를 중심으로 몇 편의 글이 나왔고, 이에 부수적으로 발해어에 대한 언급도 있었으나, 이러한 견해들은 대개 발해의 漢語(中國語)說을 주장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다만, 북한의 김영황은 발해어의 잔재가 {고려사}의 발해유민 기록에서 확인된다고 주장하면서, 발해어의 특징이 고구려 및 백제, 신라어와 공통점을 갖는다고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B-1. (925 高麗 太祖8年)9월 6일 발해장군 신덕 등 500명이 내투하였다. 10일에 발해 예부경 대화균, 균노 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이 민 100호를 데리고 내부하였다({高麗史}1, [世家]1).
2. (925 高麗 太祖8年)12월 29일 발해좌수위 소장 모두간 검교개국남 박어 등이 민 1000호를 데리고 내부하였다({高麗史}1, [世家]1).
3. (928 高麗 太祖 11年)3월 2일에 발해인 김신 등 60호가 내투하였다({高麗史}1, [世家]1).
4. (1032 德宗 元年)5월 7일에 발해의 살오덕 등 15인이 내투하였다({高麗史}5, [世家]5).
5. (1032 德宗 元年)6월 12일에 발해의 혜음약이 등 12인이 내투하였다. 16일에 발해의 소을사 등 17인이 내투하였다({高麗史}5, [世家]5).
6. (1033 德宗 2年)4월 발해의 수을분 등 18인이 내투하였다. 23일에 발해의 가수 등 3인이 내투하였다({高麗史}5, [世家]5).
7. (1033 德宗 2年)5월 29일에 발해의 감문대 정기질화 등 19인이 내투하였다({高麗史}5, [世家]5).
8. (1033 德宗 2年)12월 21일에 발해의 기질화 등 11인이 내투하자 남쪽지역에 살게하였다({高麗史}5, [世家]5).

 

위의 사료들을 근거로 하여 김영황이 발해어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于音(B-5): 이것은 [오롬]의 이두식 표기로서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乙音]으로 표기하였고 신라에서는 [于老音]으로 표기하였다.
若已(B-5): 이것은 고구려 서천왕의 이름인 [若友]와 마찬가지로 [아기]의 이두식 표기이다.
首乙分(B-6): 이것은 7세기 초 신라사람인 [首乙夫]와 마찬가지로 [수리보]의 이두식 표기이다. 발해의 인명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어미(뒤붙이)인 [-불], [-한], [-도] 등도 역시 삼국시기에 많이 쓰였던 것들이다.
'―불': 발해인명자료에는 [깃불]의 이두식표기인 [奇叱火](B-7,8)가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고구려 인명자료에 나타나는 [然弗], [乙弗]과 마찬가지로 인명에 붙는 어미 [-불]이 붙어서 된 것이다.
'―한': 발해인명자료에는 [모도한]의 이두식표기인 [冒豆干](B-2)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신라 김알지의 아들인 [새한(勢漢)], 백제의 [웃한(烏干)]과 마찬가지로 인명에 붙는 어미 [-한}이 붙어서 된 것이다.
'―도': 발해인명자료에는 [사로도], [신도]의 이두식표기인 [薩五德](B-4), [申德](B-1)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文德], 신라의 [于德], 가야의 [武德]과 마찬가지로 인명에 붙는 어미 [-도]가 붙어서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孫秀仁 등은 발해어의 漢語說을 주장한다. 즉, 그들은 발해족이 한 공동체가 되어서는 漢語(中國語)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발해족 형성의 한 부족이었던 숙신(퉁구스)계의 말갈인들은 원래 알타이계의 퉁구스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예맥계의 예맥, 부여, 옥저, 고구려족은 고아시아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이들이 발해족이 되어서는 일부 지방변방의 민족집거지 이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漢語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발해인들은 따로 글자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발해가 그들이 사용하는 말이 漢語였기에 글자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은 발해와 그 후손인 한국 및 여진, 만주족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이 없다. 또한 그들이 그들 고유의 문자를 설령 만들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것이 그들의 漢語 사용 근거가 될 수 없음도 명확하다. 하물며 발해가 한자와 다른 '발해문자'를 사용하였을 강력한 자료가 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의 漢語 사용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발해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400여개의 '문자기와'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150여개의 문자와 부호가 발견된 것으로 조사·보고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일찍이 관심을 가졌던 중국의 김육불은 이 중에서 몇 종의 '殊異字'는 발해가 한자를 기초로 하여 만든 글자라 하고, 이것은 그들이 한자로서 사상을 표현하는 이외의 보충수단으로 삼았다고 하여 '渤海文字'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반적 견해는 김육불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발해문자의 존재 가능성은 앞의 사료A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발해가 자못 文字와 書記(또는 禮樂)가 있었다'고 하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국의 李强은 여기서의 문자도 '渤海文字'가 아닌 '漢字를 사용하였다'는 근거라고 하나, '文字'를 漢字로 바꾸어 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발해문자의 존재가 인정된다면, 발해는 漢字의 吏讀를 썼던 신라보다 오히려 자주적 문자생활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발해의 고고학적 문자기와 출토와 {舊唐書} 등의 기록은, 비록 발해문자가 일반적으로 널리 쓰여진 것도 아니고 그 생명도 길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발해 언어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즉, 이것은 발해가 결코 漢語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발해가 그들의 독자적 언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발해의 후손들이 살았던 한반도와 만주 주민들의 언어를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아, 발해어의 잔재가 가장 잘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한국어나 만주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두 언어는 서로간에는 친연성이 있으면서도 중국어와는 그렇지 못하다. 이렇게 볼 때, 고구려어와 발해어의 잔재는 한국어에서 뿐만 아니라, 만주-퉁구스어(특히, 남퉁구스)에도 남아 있어야 한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발해어가 만주어에 남아 있을 개연성은 발해가 멸망하고 그 지역 주민들의 역사가 대체로 거란과 여진의 역사로 계승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발해어의 모습을 찾는 작업은 일정하게 고구려나 백제, 신라어에 못지 않게 만주어와의 관계에서도 행해져야 한다. 이것은 고구려어가 퉁구스어이거나 한국어와 퉁구스어의 중간언어였다는 견해와도 통한다. 또한 이것은 한국어가 알타이계가 아닌 독자적인 한국어계라는 주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어가 만주-퉁구스어와 함께 알타이계로 분류될 수 있는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산동 및 요동의 숙신과 예맥 기록을 중심으로 보더라고, 한국의 상고사는 적어도 남만주 전역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즉, 종족계통상으로 보더라도, 한국어는 적어도 만주어와 같은 母系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어의 祖語를 만주 전역까지를 포함한 넓은 범위에서 찾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동질 집단으로 볼 수 있는 상고사의 언어 문화적 공간은 후대의 이질화되었던 시기보다 훨씬 광대했다. 언어 문화적 동질성이 이질화되었던 것은 삼국의 분립과 남북국의 대립, 그리고 이민족에 의한 발해의 멸망, 나아가 고려 및 조선이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일정하게 계승했던 遼 金 淸과 대립하면서 漢族 중심의 문화를 지향하였던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언어의 동질성은 매우 넓은 범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발해어와 관련을 지어 생각할 수 있는 한국어와 만주어는 그 계통이 보다 세분된 시기의 언어였다. 이것은 李基文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언어를 韓系, 夫餘系, 肅愼系의 3대 語群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언어계통에 대한 생각은 한국어가 앝타이어계라는 람스테드의 견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알타어 속에 포함된 현대 한국어는 '韓系語'와 '扶餘系語'가 계승·발전하여 '夫餘韓語群'의 한국어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원시 부여계어는 부여, 고구려, 예, 옥저어 등이고, 이들은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하나의 고구려어로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어가 알타이계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를 제외하자면, 고구려어의 발전과정에 대한 이기문의 생각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발해어의 생성 및 발달과정도 설명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고구려어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발해어의 계통분류를 따지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 언어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김영황의 주장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발해어에 대한 자료는 그들의 이름속에 그 대강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물론 漢化된 이름도 적지 않지만, 발해어의 실상은 오히려 그렇지 못한 토착어에서 찾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해어는 그 계통이 알타이계와는 다른 독자적 조선말이라는 것이다. 물론, 고대 조선말은 기록상의 濊貊과 韓族들이 쓰던 말이며, 발해는 예맥어를 계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濊貊'이나 '韓'은 당시의 조선말이 아니었고, 濊의 우리말은 '새것', '동쪽', '쇠'의 뜻을 갖는 '사/사라/사리'였으며, 貊은 '밝은것', '불'의 뜻을 갖는 '바라/버러/보로/부루'였고, 韓은 '큰/클'의 뜻을 갖는 '가나/가라'였으며, 이것을 한자음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濊', '貊'과 '韓'이라는 것이다.

발해어가 예맥계의 부여-고구려어를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국호에도 나타나 있다. 류렬은 '渤海'를 원래 삼국시기 이전에도 있던 우리나라의 고장이름이었다고 하면서, 한자로 이것은 '勃海', '滄海' 등으로 표기되었으며, '勃海'는 '바라바다/바라바라'에 대한 소리-뜻 옮김에 의한 이두식 표기로써 '파란바다'라는 뜻이며, '滄海'는 '勃海'를 뜻으로 옮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발해어의 잔재가 위와 같이 濊, 貊, 韓語의 후계인 고구려, 백제, 신라어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면, 渤海의 국호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즉, '渤海'의 '渤'이 '貊'과 통한다는 것이다. 渤海의 어원에 관한 견해중에 상당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은 渤海가 漢의 郡名인 '渤海郡'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을 중심으로 쓰여지던 '發朝鮮'의 '發'이 '貊'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渤海'의 '渤(發)' 역시 '貊'에서 나왔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발해어의 祖語로 여기면서 만주지역의 또 다른 언어계통으로 꼽히는 것은 부여-고구려어와 함께 알타이어계로 분류되고 있는 肅愼語이다. 이것은 부여계어와도 구별된다고 하여 퉁구스어군의 대표적인 언어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읍루는 그 사람모양이 부여와 흡사하고, 언어는 부여 고구려와 같지 않다"는 기록에 근거한다. 또한 숙신어의 발해 祖語說은 말갈의 선조로 숙신을 상정하면서, 말갈과 고구려가 전혀 별개의 종족이라는 종래의 말갈에 대한 단일계통설에서 일정하게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읍루가 부여-고구려와 언어가 달랐다는 {三國志}가 辰韓과 馬韓의 언어가 달랐다고 믿기 어려운 기록도 남기고 있는가 하면, 말갈의 종족적 다원성을 인정하는 선에서는 숙신어가 곧 발해어 나아가 만주어의 祖語였다고 상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숙신어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흑룡강 중하류의 흑수인(숙신)이 남만주의 예맥인과 거리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이것의 독자성은 일정하게 인정될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숙신어가 전파되어 그 뒤 만주전역의 언어가 되었다고는 생각키 어렵다. 이른바, 만주-퉁구스 祖語가 곧 숙신어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역사적으로는 오히려 송화강지역(속말말갈)과 백두산지역(백산말갈)의 예맥후예들의 부여계 언어가 만주어의 祖語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러한 사실은 만주어가 부여-고구려어를 많이 계승한 한국어와도 친연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아무튼, 숙신어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단순히 만주어를 숙신어의 직계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흑수인(이른바 숙신)의 남만주 남하와 예맥인의 한반도 남하 즉, 민족이동설을 전제로 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그러나, 예맥인이 살던 남만주 전역이 흑수인들로 메꾸어졌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말갈의 종족계통을 흑수인의 후손으로 보는 단일계통설이 갖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갈로 불리는 지역 주민들의 대부분은 예맥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문화와 종족의 교류 및 소수의 민족이동은 인정된다 할지라도, 전면적 민족이동에 따른 종족 교체설은 그 사실성이 희박하다. 언어가 인간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에, 당시의 언어 연구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학적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의 발해어의 계통분류는 오히려 종족계통에 대한 연구에서 그 실체가 밝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사가 갖는 특징 중의 하나는 그것이 인접한 종족(국가)의 언어에 대하여 비교적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三國志}[魏志 東夷傳]에 濊와 高句麗, 東沃沮, 夫餘의 언어나 풍습이 모두 유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나, 읍루의 언어가 부여와 달랐다고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隋書} 및 {舊唐書}에 나타나는 등 말갈과 고구려, 흑수말갈과 발해 등의 기록에서는 서로간의 언어나 풍속에 대한 비교가 적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말갈과 고구려, 그리고 말갈과 발해의 언어를 비교하여 기록한 곳은 전혀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이 중국측의 여러 기록에 말갈어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기록자의 무지에서 오는 것이었거나, 속말 및 백산인의 발해어가 고구려의 풍속과 함께 고구려어와 같았다는 것이 고려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종족적 측면에서 보자면, 다원적 말갈인들의 언어를 일원적으로 따로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흑수인(흑수말갈)과 고구려 및 발해와의 언어는 (흑수)숙신의 연장선상에서 달랐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말갈로 불리는 백산 및 속말부의 언어를 고구려 및 발해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辰韓과 馬韓의 언어가 달랐다고 하는 것과 같이, 발해어가 말갈어와 달랐다는 착오도 일으킬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발해어는 말갈로 기록되는 사람들과 동질적이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 때문에 발해어와 말갈어를 구별하고, 말갈어의 계통성을 따져 보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발해어의 범주에서 백산인과 속말인 등의 언어가 언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발해어의 계통을 따진다면, 대개 이것은 고구려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알타이계에 속하는가의 여부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발해어가 고구려어를 가장 잘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고구려와 발해의 풍속이 같았다는 {舊唐書}, {冊府元龜}등(사료A)에 의한다. 풍속의 범주에는 언어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즉, {三國志}에서도 확인되듯이, 고구려와 부여가 '言語諸事'가 같았다는 사실과 같게 보자는 것이다. 아무튼, {新唐書}[室韋傳]은 (흑수)말갈어와 실위어가 같다는 내용까지 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의 언어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주목하여 볼 점이라고 생각한다. 즉, 발해와 말갈의 풍속과 언어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말갈의 다원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들 아래에서 고구려 및 발해언어의 계통성이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추론될 수 있다고 믿는다. 숙신 기록이 갖는 이중성과 말갈로 기록된 주민들이 고구려의 예맥계가 중심이었다는 점이 인정된다면, 언어학적 의문도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李基文이 '肅愼族이 女眞族의 先祖라고 하는 通說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며, 현재로서는 이렇게 못박느니 보다 퉁구스족의 어느 선조라고 해 두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는 지적과 통한다. 만주어의 祖語를 결코 숙신어에만 한정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만주어에는 고대 숙신어(필자의 흑수숙신)의 잔재보다 부여계 고구려어의 잔재가 더 많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발해어는 부여-고구려어계로 보다 확실히 정리될 수 있다. 그 일례로, 앞에서 김영황의 논급에서도 확인되었다시피, 발해 토착어의 하나로 볼 수 있는 발해왕을 가리키는 '可毒夫'(사료A-2)가 부여의 '馬加', '牛加' 등의 '諸加'의 '加'와 통할 개연성이 높다. 단지, 발해어를 숙신계로 보려는 생각은 숙신어의 실체가 모호한 상황에서 언어학적인 결과에 기인한다기 보다, 숙신이 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로 발전해 왔다는 만주주민의 종족적 단일 계통설에 더 의지해 있다. 문제는 고구려나 발해어에 남아 있을 숙신계 언어의 잔재가 얼마나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흑수인들의 문화수준과 고구려-발해의 문명발달사로 볼 때에, 거의가 부여-고구려어로 편입되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발해의 주민구성과 관련하여 발해인들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다른 언어를 쓰는 이질적 집단이었는가 하는 점도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200여년간이나 왕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언어 장벽을 극복하여 통치할 수 있는 언어정책이 나왔어야 한다. 이것은 장국종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민족 통치를 위한 특별제도가 있었어야 한다. 아울러 발해의 이원적 종족구성론에 대한 의문은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었다고 보여지는 都督, 刺史가 종족이 다른 사람으로 임명되었을까 하는 문제와, 발해가 수도를 지방으로 네번씩이나 옮길 수 있었던 문제 등에서도 나온다. 이러한 의문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문화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풀리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발해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전혀 이질적 문화를 계승한 국가였다고 볼 수 없다. 발해의 주민들은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을 막론하고 역사적 동질성이 강한 국가였다. 그렇다고 발해는 이들이 중국측이나, 러시아의 주장처럼 고구려계와 다른 말갈인들로 구성된 국가도 아니었다.

발해의 지배층은 알려진 바와 같이 고구려 왕족이었던 高氏 귀족들이 대거 참여하여 고구려어를 사용하였던 것처럼 그들의 피지배 주민들도, 비록 그들이 지방의 촌사람으로 차별은 받았을지라도,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어를 사용하였던 고구려계 주민이었다. 이와 같은 두 계층간에 통할 수 있었던 고구려어는 700여년간의 고구려역사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물론 토착의 방언도 있었다고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서로가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의 그런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발해가 고구려어와 전혀 달랐다고 상정하고 있는 '靺鞨語'(숙신어 후예)를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더더욱 지배층 일부에서라도 중국어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3. 문화계통 상에서의 발해인

발해가 고구려계였다는 사실은 그들의 문화적 계승관계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문제삼고 있는 피지배주민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덜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들이 주로 지배층문화에 집중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발해문화의 특징들에 대한 해석이 주로 상경용천부를 비롯한 발해의 오경터 주변 유적에 집중되어 왔던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발해의 고구려문화 계승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북한의 경우를 보더라도 발해와 고구려문화의 비교는 이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발해의 고구려계승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고구려의 강서큰무덤, 진파리1호무덤, 통구사신무덤 등과 발해의 정혜공주묘를 비롯한 六頂山 고분군과 삼령둔 및 북대 고분 등이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측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귀족문화에 대한 비교관찰은 발해문화의 계승성을 밝히는 데에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고구려의 외교가 隋唐과도 빈번하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고구려문화에는 일정하게 외래의 것이 수용되었을 것은 예상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예술이나 벽화 등은 외래문화의 영향이 쉽게 나타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전적으로 고구려나 발해문화를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다. 외래문화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할 수 있는 고분축조 및 성곽 축성방법 등에서는 비교적 고구려의 고유성이 발해에 대부분 계승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과 귀족들이나 쓸 수 있었던 석실고분 등을 고구려와 발해문화의 비교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고구려인들의 거의가 이러한 무덤들을 쓸 수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구려와 발해의 서민들이 사용했던 무덤들은 말갈묘의 한 특징으로 제기되고 있는 흙구덩이의 土壙墓[土坑墓]계통에서 찾아야 한다. 토광묘의 축조 방식은 오늘날의 매장 방식과도 가장 가까운 것으로써, 일반적인 토광묘는 거의 계획적으로 발굴되지 않고 있다. 토광묘의 발굴은 대체로 지배층의 대형고분 발굴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통례인 것 같다. 이러한 것은 고구려나 발해시대의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인민중심의 역사를 한다고 하는 북한의 고고학에서도 토광묘에 관심은 소홀하다. 물론 이와 같은 것은 토광묘 유적의 빈약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복원을 위한 계획적 발굴이라는 측면보다 유물찾기 내지 보물찾기식의 발굴이 아직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물이 없고 유적이 빈약하다고 해서 이것을 고구려나 발해시대의 부수적인 묘제로 보거나, 고구려나 발해와 다른 말갈묘로 볼 수는 없다. 사료를 통해 볼 때, 말갈은 고구려의 변방피지배 주민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토광묘는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 주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고구려와 발해문화의 비교가 지배층중심이라는 사실은 기와무늬를 비교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기와를 썼던 계층이 지배층에 한정되었다는 사실은 {舊唐書}(東夷列傳, 高麗)가 입증하고 있다. 즉, {舊唐書}는 기와가 '오직 佛寺·神廟 및 王宮·官府' 등에서만 사용되었고, 일반 서민들의 지붕은 오늘날의 초가집을 연상케 하는 '茅草(띠)로 이엉을 엮어'지었다고 한다. 발해의 서민들도 이와 같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舊唐書} 등은 발해의 정치·군사적 관계만을 주로 전하고 있을 뿐 이러한 부분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한 발해문화의 특징으로 꼽고 있는 이른바 말갈관(靺鞨罐)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짚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 발해의 종족구성을 말갈로 보는 중국학계에서는 말갈관 즉 ?배가 부른 항아리 모양의 단지?[深腹筒形罐]를 말갈인(발해주민)들이 쓰던 그릇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고 있다. 이러한 관은 돈화육정산 무덤떼나 상경용천부터 및 다른 주거지에서도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이 고구려유지였던 자강도 자성군 법동리 하구비와 대성산 기슭의 고구려무덤에서도 나왔다. 그렇다면, 발해의 이른바 말갈관은 누가 쓰던 것인가? 말갈인들이 고구려에서 썼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인들이 발해지역에서 썼다고 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후자의 편에 있다. 지배층과 풍속이 같았던 피지배층 ?말갈?이란 피지배주민들을 부르는 중국측의 일방적 종족명에 불과하였다.

발해의 피지배 주민이 고구려유민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생활터에서도 확인된다. 1977년 黑龍江省 東寧縣 團結遺址에서 발해의 집터가 네개 발견되었는데 모두 '平民住宅'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발해의 주민들이 고구려유민이었다는 중요한 단서가 발견되었다. 물론 중국측에서는 이것에 대한 의미를 고구려와의 관계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張太湘과 같이 이와 같은 작은 살림터가 발해의 一夫一妻制를 반영하는 遺址라든지, 이곳에서 五銖錢이 나왔다고 하여 ?黑水?와 ?黃河?의 경제적 교류가 있었다는 등의 해석을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고구려인들의 특징적인 살림터로 {舊唐書}도 인정하고 있는 온돌(火?)이 발견되었다. 이 역시 장태상은 이곳의 온돌을 ?地火龍(땅고래)?으로 표현하고 이것이 발전하여 벽난로와 온돌이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구들 ???자가 중국에서 온 여진어라고 하여 중원과 이곳의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이곳 유지에 대한 해석을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보는 것은 발해 만주지역의 고고유지들에 대한 중국측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이곳이 고구려후손들이 온돌(구들) 장치를 하고 살았던 발해의 서민 주거지였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온돌을 고구려인들이 썼다고 하는 사실은 다음의 {舊唐書}가 잘 보여주고 있다.

C. (고구려인들의) 주거는 반드시 산골짜기에 있으며, 대개 茅草(띠)로 이엉을 엮어 잇고, 오직 佛寺·神廟 및 王宮·官府만이 기와를 쓴다. 일반인의 생활은 대부분 가난하고 겨울철에는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한다. 밭농사와 누에치기는 대개 중국과 같다({舊唐書}卷199上, [東夷, 高麗]).
 

위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고구려의 주거생활이 중국과 다른 점이 몇가지가 있는데, ① 산골짜기에서 산다 ② 집은 띠로 이엉을 엮어 이어 지은다 ③ 기와는 佛寺·神廟 및 王宮·官府에서만 사용한다 ④ 일반인들은 대개 가난하고 ⑤ 겨울철에는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하는 온돌장치를 한다는 점이다. 위의 내용은 거의 중국인들 특히 기록자의 위치에 있던 唐, 五代의 지성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일반인들이 가난하다는 것은 고구려나 唐·五代인을 막론하고 지배귀족들의 입장을 반영한다.

이것은 분명 고구려인들이 唐과 五代인들과 다른 주거생활을 누리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이것에 근거하여 한국학계에서는 온돌의 기원을 고구려로 언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와 같은 온돌은 북한의 고구려유적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온돌이 발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점은 발해사의 민족사적 귀속문제와 함께 발해의 주민구성문제를 푸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 주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또한 구들 장치는 지배층유적의 하나인 上京龍泉府의 궁성 서쪽 '침전터'에서 7개가 발견되고 있으며, 북한의 함남 신포시 오매리 발해유적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발해인들에게 일반화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구려인의 온돌은 발해의 수도나 지방에 상당히 많이 보급되었던 난방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발해인들이 온돌시설을 하였던 근거는 러시아의 연해주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은 발해의 지방문화라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하는데, 노보고르데예프까, 스타로렌첸까, 꼬르싸꼬프까, 꼰쓰딴띠노프까 유적들에서 모두가 온돌이 나왔으며, 발해유민들이 살았던 아나니예프까 유적에서도 역시 나왔다. 그런데, 이곳이 고구려시대에도 변방의 말갈지역으로 꼽히고 있다는 데에 온돌발견의 의미가 있다. 발해의 주민구성에 관한 중국이나 러시아,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의 이원론대로 하자면, 이곳은 발해인이 아닌 말갈인들의 전형적인 문화가 발견되어야 할 지역이다. 즉, {隋書}[靺鞨] 등에서 보이는 말갈은 온돌이 아닌 땅구덩이를 파고 사는 鑿穴[竪穴] 생활을 하였다.

D-1.주거는 대개 山水에 의지하며, 우두머리를 大莫弗瞞돌이라 하는데, 東夷 가운데서는 强國이다. 徒太山이라는 큰 산이 있어 사람들이 매우 숭상하고 두려워 한다. 산 위에는 熊 ? 豺 狼이 있으나, 모두 사람을 헤치지 않으며 사람도 이들을 감히 죽이려 하지 않는다. 지대가 낮고 습하여 흙을 둑과 같이 쌓고 구덩이를 파서 거처하는데, 출입구는 위로 향하게 내어 사다리를 놓고 드나든다({隋書}卷81, [東夷, 靺鞨]).
2. 집이 없고 모두 산간이나 물가에 의지하여 움을 파고 그 위에 나무를 걸쳐서 흙으로 덮는데, 모양은 마치 중국의 무덤과 같다. 서로 모여서 사는데, 여름에는 水草를 따라 나오고 겨울에만 움 속으로 들어간다({舊唐書}卷199下, [北狄, 靺鞨]).
3. 거처하는 집이 없고 山水에 의지하여 움을 파서 그 위에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는데, 마치 무덤과 같다. 여름에는 水草를 따라 나오고, 겨울에만 움안에 들어가 산다. 오줌으로 세수를 하니 夷狄으로서도 가장 지저분하다({新唐書}卷219, [北狄, 黑水靺鞨]).

 

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말갈인들이 '長坑'이나 '火坑'생활을 하였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말갈인들도 고구려인들과 같은 주거문화를 갖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舊唐書}와 {新唐書} 모두는 말갈인들의 주거(사료D)가 분명히 고구려인의 '長坑'(사료C)과 달랐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풍속은 같았다고 전하고 있다(사료A-1,3). 결코 고구려와 말갈(사료D-1) 나아가 발해와 흑수말갈(사료D-2,3)의 주거문화가 같았다고는 하지 않는다.

이렇다면, 적어도 高句麗 渤海와 (黑水)靺鞨의 주거문화는 달랐다고 해야 하고, 온돌이 발견되는 주거지는 대개 高句麗 渤海系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온돌이 말갈의 주거지로 알려진 연해주 등의 발해지역에서까지 발견되고 있다. 말갈족의 실체를 인정하고 고구려와 말갈을 이질적으로 보는 기존의 견해대로 하자면, 이러한 사실은 몇 가지 해석을 가능케 한다. 첫째는 고구려인들이 말갈지역까지 동북상하였을 가능성과, 둘째는 말갈인들이 고구려 문화를 전승하여 생활하였을 가능성, 셋째는 말갈도 위의 {舊唐書}와 {新唐書} 내용과 달리 고구려와 같은 주거문화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다. 세번째 견해는 온돌문화는 고구려인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동북방 각족이 갖고 있던 일반적인 주거문화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갈을 동북방 주민의 범칭으로 보고 흑수말갈을 제외한 지역의 주민을 대체로 예맥계의 고구려계로 보는 견해대로 하자면, 이른바 말갈지역에서 나오는 온돌문화는 별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고구려인들의 일반적인 온돌문화가 변방의 어느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면 그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돌문화에 대한 중국학계의 견해는 온돌의 고구려기원설을 부정한다. 크게 두 견해가 있는데, 첫째는 숙신기원설과 둘째는 동북방 각족 기원설이다. 전자는 渤海와 女眞, 滿族 등이 온돌을 사용하였던 것은, 그들의 조상이 숙신이기에 숙신이 온돌을 발명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의 사료 D에서 본 바와 같이 숙신계의 흑수말갈인들은 온돌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위의 고구려인들이 온돌을 사용하였다는 사료C를 살피지 못하고 있고, 고구려와 발해후손을 자처하는 한국인들의 일반적 주거문화가 온돌이라는 것도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두번째의 견해는 비교적 구체적이다. 이 견해는 사료 C의 '長坑'을 온돌의 기원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앞의 {舊唐書}의 '長坑'에 의거하여 온돌문화의 기원을 고구려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견해이다. 중국의 王世蓮은 長坑은 사계절용인 火坑(온돌)과 다르며 이것은 겨울에만 임시로 쓰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長坑 기록에 근거하여 火?(온돌)의 기원을 고구려에 찾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하면서, 온돌은 일개 민족과 왕조에서 발명된 창조물이 아니며 만주(중국 동북) 지역 주민들이 추위와 싸우면서 이룩한 문화산물이며, 이것은 고구려만이 아닌 다른 北方 各族도 서로 익혀 사용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그 예로 여진도 온돌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온돌의 기원과 발전을 이해하는 데는 몇가지 고려되어야 할 것이 있다. 즉, 온돌은 처음부터 수준높은 것이 아니었으며, 이것도 역시 역사발전과 함께 꾸준한 발전을 하여 왔고, 온돌의 고구려 기원설과 관련해서는 고구려사의 발전과 형성과정이 중요한 논거가 되어야 한다. 다시말해, 고구려의 민족과 문화가 B.C.년간의 건국초부터 멸망할 때까지 건국초와 같은 소수의 종족과 좁은 문화를 소유하였던 것이 아니라, 700년의 역사와 함께 광대한 민족과 문화를 형성 발전시켜왔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다면, 고구려의 온돌을 발전된 시기의 여진의 것과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여진 시기의 것은 발해문화를 거친 한 단계 높은 온돌문화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王世蓮이 고구려의 온돌(長坑)과 여진의 온돌(火坑)을 비교하는 것은 여진은 고구려계가 아니라는 이유가 더 큰 것 같다. 그러나, 여진이란 발해 멸망 후에 본격적으로 사용되어진 종족명으로써, 이것 또한 말갈의 용례에서와 같이 발해유민과 흑수말갈을 범칭하였던 종족명이다. 발해가 고구려영역을 대부분 차지한 국가였고, 이들 문화가 대부분 고구려후손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여진지역에 고구려적 요소가 많았을 것은 당연하다. 이 지역에서 여진으로 불렸던 사람들은 흑수말갈인이 남하 번성하여 형성된 그런 종족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적 발해유민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온돌문화의 형성시기를 고구려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는 사실은 북한의 고구려유적에서 확인되고 있고, 또한 문헌적으로도 '長坑'이 곧 온돌을 의미하는 '火坑'이라는 사실은 중국의 유명한 {辭源}과 {中華大字典}에 따른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의 온돌이 '火坑'이기에 이것의 기원이 '長坑'일 수 없다는 논리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적 보수성이 강한 것 중의 하나인 주거문화의 상징인 온돌이, 오늘날 고구려 후손을 자처하며 고구려문화를 가장 잘 계승하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도 주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세계에서 온돌을 주택난방의 가장 쾌적한 장치로 인식하면서, 아파트에서까지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라는 사실도 온돌의 역사적 내력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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