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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의 對外關係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徐榮洙(단국대학교 역사학과)
 
 

차 례
 
 

머리말

1. 建國期의 동아정세와 대외관계

1)東北亞의 국제정세

2)渤海의 건국과정

3)建國期의 대외관계

2. 勢力膨脹과 국제관계의 변화

1)영토확장과 黑水靺鞨

2)新羅의 東北邊防備와 대립

3)日本과의 國交 수립

4)登州攻擊과 대당외교

3. 成長期의 대외관계

1)대당외교

2)신라와의 경제적 교섭

3)일본과의 경제외교

4. 海東盛國의 대외관계

1)대당외교와 영토확장

2)신라와의 외교적 경쟁

5. 滅亡期의 대외관계

맺음말
 
 
 
 

머 리 말

渤海는 우리에게 과거의 神話이자 미래의 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통일 한국의 건설이라는 과제를 안고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渤海史는 새로운 해답을 던져 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한국고대사에 산적해 있는 미해결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발해사는 아직도 깊은 베일에 싸여있어 그 실체가 분명히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발해사 연구가 취약하였던 주된 이유는 발해에 관한 史料가 소략하고 그 活動舞臺가 오늘의 우리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渤海人이 저술한 史書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 남아 있는 사료의 대부분이 中國이나 日本의 사서에 기록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도 매우 단편적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渤海의 영토가 韓半島 북부와 中國의 滿洲 및 러시아의 沿海州에 걸쳐 있었던 까닭에 남북분단 이후 우리 역사학계에게 있어 발해의 故地는 금단의 땅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현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나 연구가 우리측에 잘 전달되지 못하였다. 최근에 이르러 발해 유적의 현지조사가 가능해짐에 따라 우리학계의 발해사 연구는 질적이나 양적인 면에서 장족의 발전이 이루어져 가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발해사 연구는 建國主體 및 歸屬 문제에 치중되어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남북한에서는 발해가 高句麗의 계승국이라는 입장을, 중국에서는 靺鞨族이 세운 唐朝의 지방정권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渤海史의 自國史 編入이라는 命題가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여기에서 그간의 발해사 연구가 주관적 경향으로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제가 발해사의 주요 과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정된 사료와 주관적 경향에 매몰되어서는 그 해명이 요원할 뿐만 아니라 발해사의 본질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발해사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대한 연구에서 건국주체의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따라서 발해사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학계의 본격적인 참여로 이러한 점들이 해명되어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 글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대외관계사를 중심으로 발해사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발해는 建國期에는 물론 海東盛國을 거쳐 滅亡期에 이르기까지 주변 여러나라와 부단한 항쟁을 통하여 영역을 확장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외교 및 문화교류 등 다양한 교섭을 전개하였다. 당시 東아시아의 국제정세는 돌궐, 거란등 북방세력의 남하로 唐帝國으로 표현되는 中國的 世界秩序의 동요가 심하였다. 발해는 이러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국가를 형성하고 성장하였다. 더욱이 발해는 朝貢道(鴨?府-唐), 營州道(長嶺府-遼東, 遼西), 扶餘道(扶餘府-契丹), 日本道(東京龍原府-日本), 新羅道(南京南海府-新羅) 등 국가의 사방에서 외국으로 가는 체계적인 交通路를 개설하였던 국가이다. 이는 발해가 대외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발해의 대외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없이는 발해사의 실체를 밝힐 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발해의 국가형성과정이나 건국 주도세력의 성격이 모호한 상태에서 국가와 국가간의 정치적 교섭관계를 중심으로 한 대외관계의 연구는 출발부터 장애에 부딪친다. 그러나, 발해에 관한 문헌사료중 대부분이 발해와 중국 및 일본과의 대외관계에 관한 사료이므로, 현존하는 대외관계 사료를 망라 재구성해 본다면, 역으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왔던 발해의 국가 형성과정은 물론 나아가 발해가 주변세계에 대응해 국가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보다 역동적인 渤海像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이러한 대외관계의 연구는 궁극적으로 발해의 正體性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정체성은 自體的으로 自生하는 것이 아니라 外部의 자극에 반응하여 형성되는 공동체의 自意識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발해사에 대한 체계적인 시대구분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나, 최근에 조명되기 시작한 발해와 신라의 교섭관계는 대체로 다섯 시기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발해의 대외관계를 발해사의 발전과정에 따라 건국기, 팽창기, 성장기, 중흥기(해동성국), 멸망기등 다섯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一. 建國期의 동아정세와 대외관계

1. 동북아의 국제정세

발해가 건국된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668년 고구려의 멸망과 신라의 한반도 통일로 야기된 하나의 전환기가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 있었다.

買肖城 전투와 伎伐浦 해전에서 신라에 패배한 唐은 676년 한반도에서 철수하여 安東都護府를 요동으로 옮기고 재차 한반도에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新羅의 강력한 저항은 물론서쪽으로는 吐藩의 공세와 북으로는 突厥의 압박으로 이를 포기하고 동북아 제세력의 길목인 요동지역을 안정하는 데 주력할 뿐이었다.

北아시아의 형세는 隋唐帝國에 의해 와해되었던 돌궐이 재흥하여 680년대에는 고비사막의 북에서 세력을 떨치며 당을 압박하였다. 당시의 돌궐은 제2 帝國시대로 서로는 天山산맥으로부터 동으로는 興安嶺을 넘어 서부 만주 일원에까지 세력을 뻗어왔다. 이러한 돌궐의 재흥에 따라 만주 서북으로는 庫莫奚, 契丹, 室韋 등 새외민족이 새롭게 준동하기 시작하였으나, 동부 만주지역은 靺鞨 諸部 가운데 가장 강성했던 黑水靺鞨이 고구려 멸망 이후 세력을 확장하여 남진하다가 691`692년경 唐의 李多祚에게 패배하여 물러난 뒤, 새로운 구심체를 형성하지 못한 채 고구려유민과 말갈 제부족이 산거한 상태로 있었다.

신라의 경우도 한반도에서 당군을 축출한 이후 새로 병합한 지역과 주민을 경영하여 대내적 체제정비에 주력하였던 까닭에 서북지역이나 만주로의 군사적 진출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이 676년 이후 동만주 일원은 당, 돌궐, 신라 중 어느 쪽도 세력을 뻗치지 못하고 있었던 국제적 역학관계에서 일종의 힘의 공백지대였다. 대내적으로도 고구려유민이나 말갈 제부족이 요동, 동만주, 영주 등에서 새로운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나 통일된 구심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북아의 정세 속에서 大祚榮을 중심으로 營州지역에서 일어난 고구려유민의 연합세력은 당제국과 항쟁을 수행하면서 동진하여 渤海를 건국하자 새로운 힘의 구심체로 등장하였으며, 건국이후 짧은 기간에 급속하게 성장하여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2. 建國過程

발해의 건국이 契丹 李盡忠의 亂을 계기로 이루어 진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진충의 난은 당이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퇴하여 평양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겨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을 통치한 지 약 20여 년이 지난 則天武后시대 萬歲通天 연간(695~697)에 일어난 사건이다.

渤海의 건국을 전하고 있는 {舊唐書}, {五代會要}, {新唐書}의 기록은 대체로 일치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서로 상충되어 종래부터 연구자간에 적지 않은 견해 차이가 있었으며, 발해의 귀속문제를 둘러싼 국제적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기록을 비교하여 당시 동북아 정세와 관련하여 발해의 건국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첫째, 高句麗 멸망 후 高麗別種인 乞乞仲象과 大祚榮및 그 가속이 營州로 徙居되었다. 669년 당은 平壤과 遼東지역의 민호 38,200호를 唐 內地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육로로 徙居된 자들이 거친 곳이 營州였다. 大祚榮집단이 遷徙된 시기와 세력 규모에 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대체로 7세기 중반 이후 唐內地로 옮겨진 유민집단 가운데 일부였음은 분명하다. 중심인물인 대조영의 출자는 분명하지 않지만 {三國遺事}와 {帝王韻紀}에 '大祚榮이 高句麗의 옛 장수?라고 기록되어 있어 高句麗의 귀족 출신으로서 상당한 고위직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營州에서 萬歲通天 중 李盡忠의 반란을 틈타 高麗別種 大祚榮, 乞乞仲象의 무리와 靺鞨人 乞四比羽의 무리및 高麗餘種이 696년에 東走한다. 乞四比羽집단에 대해서는 崔致遠의 [謝不許北國居上表]를 통하여 그 연원을 짐작할 수 있는 데, 高句麗의 對唐전쟁에 깊이 참여하는 등 反唐적인 색채가 강하였기 때문에 唐이 高句麗의 민호를 내지로 이주시켰을 때 그 遷徙대상에 포함된 집단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셋째, 이들은 각각의 무리를 이끌고 東走하여 일차로 정착하는 곳은 遼東지역으로서 天門嶺 서쪽의 옛 高句麗 땅이었다. 그 구체적인 지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太子河 유역의 梁水지역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목재? 철? 소금? 수산물이 풍부하여 국가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던 지역이었다. 渤海 멸망 후 耶律羽之가 발해 유민을 이 곳으로 옮기면서 渤海의 고향이라 지칭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으로 보인다.

넷째, 李盡忠이 죽은 뒤 唐이 乞四比羽를 許國公에 乞乞仲象을 震國公에 책봉하나, 乞四比羽가 이를 거절하자, 則天武后의 명을 받은 李楷固는 먼저 乞四比羽를 격파한다. 乞四比羽의 죽음에 이어, 乞乞仲象을 대신한 大祚榮도 李楷固와의 싸움에서 패하자 무리를 이끌고 天門嶺 동쪽으로 이동한다.

다섯째, 李楷固가 天門嶺을 넘어 계속 공격해 오자, 大祚榮은 2차 전투에서 高麗餘種과 靺鞨 乞四比羽의 남은 무리를 병합하여 李楷固를 격퇴시킨다. 이때의 大祚榮집단은 高句麗系와 靺鞨系의 연합적 성격을 띄게 된다. 營州 탈주 후 별개의 집단으로 활동하던 집단들이 大祚榮의 기치 아래 하나로 연합하여 天門嶺 동쪽에서 李楷固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둠으로써 渤海 건국 과정의 최대 위기를 극복하였다.

여섯째, 契丹과 奚의 突厥 귀속등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로 唐의 토벌전이 불가능해지자 大祚榮은 무리를 이끌고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여 太白山의 東北 桂婁(혹은 읍루)의 옛 땅을 차지하고 東牟山에서 축성한다.

일곱째, 大祚榮의 용맹이 알려지자 靺鞨의 무리와 高麗餘燼이 점점 귀속해 온다. 大祚榮은 이들 세력을 복속하여 聖曆 중인 698년에 건국하여 振國王으로 칭하고 당을 견제하기 위해 突厥과 통교한다.

이와같이 발해는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에 힘입어 고구려의 지배종족이었던 예맥계와 戰士집단인 말갈계 고구려 유민이 연합하여 동부 만주 지역에 건국한 국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3. 建國期의 對外關係

발해는 7세기 후반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국가를 형성하였던 까닭에 건국 초기부터 돌궐, 신라는 물론 적대국인 唐과도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전개하여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고 대내체제의 안정을 기하였다.

가. 突厥과의 외교적 교섭

발해는 건국직후 막북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突厥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였다. 이때 돌궐은 默輟可汗(693`716)의 치세로 당이 武后와 韋后의 실정으로 내부의 통치체제가 문란해 진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여 당을 압도할 정도였다. 당이 천문령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발해 정벌을 시도하지 못한 것도 돌궐의 등장때문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당군과의 치열한 항쟁과정에서 국가를 세운 발해는 국가적 존립을 도모하기 위해 당과 대립하는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러한 발해의 대당 견제외교는 유연, 돌궐 등 북방 유목민족과 제휴함으로써 중원 왕조를 견제하고자 하였던 고구려의 전통적 외교정책을 계승한 것이며 이후 발해의 대 북방외교의 기본 틀이 되었다.

나. 新羅와의 외교적 교섭

일반적으로 종래의 연구에서는 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적대적이거나 소원한 관계로 파악되어 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보다 능동적인 입장에서 그 관계가 검토되고 있다.

이시기 신라와 당의 관계는 아직 소원하였으며 신라는 대일외교를 보다 중시하였다. 그 까닭은 舊百濟領 문제에 연유한다. 당이 신라의 구백제령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신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던 까닭에 신라는 문무왕 8년(668년)이후 사실상 당과의 정식 국교를 단절하고 대당전쟁기에 들어가는 데, 국교가 재개된 신문왕대에도 대당 강경책을 고수하였다. 신문왕 12년(692년)의 태종 무렬왕의 묘호를 고치라는 당의 요구를 거절한 신라의 태도에서 당시 신라와 당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당과의 직접적인 충돌과정에서 등장한 발해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여 신라와의 외교관계를 추진하여 건국 직후인 700년경 신라에 사신을 보내었다. 이러한 사정은 최치원의 [謝不許北國居上表]에 보이는 데, 이 기록에 의하면 발해는 건국 직후에 대조영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었고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 5품인 大阿?의 秩을 주었다고 한다. 安鼎福도 {東史綱目}에서 이것을 효소왕 9년(700년)의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재5품관을 주었다는 표현은 물론 신라의 발해에 대한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이지만, 당시의 국제적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발해는 건국직후 국가의 터전을 마련하던 시기이고, 신라는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하여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하던 시기였으므로 당시 발해의 국력은 신라에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신라로서는 발해의 건국을 크게 경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치른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던 까닭에 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당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동쪽으로 도망해와 나라를 세웠던 대조영에 대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지원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다. 對唐外交

발해는 이러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잘 활용하여 돌궐, 신라등 주변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외적인 안정을 얻게 되었고, 이것을 기반으로 말갈제부를 복속시키는 등 급속한 세력확장에 성공하게 된다.

발해의 건국 자체가 反唐的인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당은 발해 건국 7년만인 705년 中宗이 즉위하자마자 張行及을 보내어 발해의 국가적 존재를 인정하였다. 당측에서 본다면 측천무후의 실정으로 발발한 거란의 이반, 발해의 건국, 돌궐의 성세에 대해 발해를 회유하여 대립하고 있던 돌궐 및 그 예하에 있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당의 외교적 회유에 발해는 비록 당과의 대립 속에서 건국하였지만 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계속 당과 대립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당의 선진문물은 발해의 발전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돌궐은 정치, 군사적으로는 강대한 국가였으나 유목국가라고 하는 문화적 성격상 발해의 발전에 그다지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당과 발해는 여기에서 이해관계가 일치되어 발해는 왕자 大門藝를 보내어 宿衛케 하였고 당은 발해를 정식으로 인정하려고 하였다. 물론 당시의 당으로부터 발해가 받은 '계루군왕'의 책봉호를 두고 중국학계에서는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중국적 자존의식의 표현일 뿐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변화는 돌궐의 반대로 더 이상의 외교적 진전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발해 역시 건국 직후 돌궐과 통교하여 대외적 안정을 구하였으므로,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당의 睿宗이 즉위한뒤 돌궐의 묵철가한이 당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구하니, 당은 공주를 降嫁함으로써 돌궐과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후 당과 발해의 교섭은 이전과 같이 돌궐의 저지를 받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발해는 713년에 정식으로 당과 국교를 수립하고 당과 교역을 시작하였으며, 716년이후에는 매년 당에 조공사행을 파견하여 선진문물을 흡수하는 동시에 외교적으로도 국제적 승인을 통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가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강온 양면의 외교정책을 적절히 구사하여 발해는 이미 高王 대조영대에 이미 '乃建國自號震國王...盡得扶餘 沃沮 弁韓 朝鮮 海北諸國'({新唐書}[渤海傳])한 것으로 보아 이미 상당한 세력 팽창을 이루어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二. 勢力膨脹과 국제관계의 변화

高王 大祚榮의 뒤를 이은 武王 大武藝代에 이르러 발해는 당을 비롯한 주변제국과 외교관계를 지속하는 한편, 周邊 勢力에 대응하여 팽창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러한 대외확장정책의 결과 당과는 긴장관계에 들어가게 되며,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급속히 변화한다. 黑水靺鞨의 이반과 新羅와의 대립, 당과의 무력충돌등을 통하여 발해는 격심한 체제 위기를 느끼기도 하였으나, 돌궐, 거란, 일본과의 외교적 제휴를 통하여 이를 잘 극복함으로써 오히려 국제적으로 세력을 인정받는 동시에 대내체제의 정비를 보다 가속화 할 수 있게 되었다.

1. 領土擴張과 黑水靺鞨

당과의 투쟁 과정에서 탄생한 발해는 건국 즉시 돌궐·신라 등과 통교하여 당의 직접적 위협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적극적으로 주변 제세력의 복속·병합에 나섰는 데, 고왕의 뒤를 이은 무왕은 拂涅部, 越喜部, 虞婁部, 鐵利部 등의 靺鞨諸部를 통합하여 귀속시킴으로써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리하여 당시 발해의 영역은 西쪽으로는 涑沫水 중하류 유역, 東쪽으로는 沿海州, 南쪽으로는 豆滿江을 넘어 南沃沮의 故地까지, 北쪽으로는 湄陀湖를 넘어 東北은 阿速水 중상류까지, 西北은 忽汗水 중하류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무왕의 영토확장에 위협을 느낀 黑水靺鞨은 渤海와의 화친관계를 깨고 唐과의 연결을 도모하였다. 722년 黑水部 추장이 唐에 내조하자 唐 玄宗은 ?勃利州刺史?를 제수하였고, 724년에는 長史를 파견하여 ?黑水都督府?를 설치하였다. 이는 渤海의 배후에 唐의 세력이 형성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발해는 앞뒤로 당의 협공 위협을 맞게 되었다.

어느 정도 발해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흑수말갈이 발해의 세력 팽창이 두려워 당에 기미주를 요청한 데에서 발해의 영향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의 멸망으로 힘의 진공 상태에서 분산·자립되어 있던 세력들이 구심점으로 등장한 발해의 세력권에 들어왔지만, 고구려와는 달리 그것이 직접적 정복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한편, 당이 이 시기 흑수말갈에 기미주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까닭은 무었일까. 당이 개원 1년(713년)에 최흔을 사자로 보내어 발해를 정식으로 인정한 뒤 발해는 거의 매해 당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한 가운데 개원 8년 당은 발해에 사신을 보내어 함께 契丹과 奚를 치고자 했다. 이는 묵철가한 사후 毗伽可汗(716∼733)이 즉위하면서 강성해진 돌궐이 다시 당을 侵寇하기 시작하고 거란도 이러한 영향으로 당을 배반하고 돌궐에 복속하게되자 당은 돌궐을 견제하기위해 발해와 함께 거란을 공격하고자 한 것이다. 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발해가 돌궐측에 참여하는 것을 사전에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당과 발해의 연합에 의한 거란 토벌전이 없엇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발해는 이 제의를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당은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발해의 배후에 있는 흑수말갈에 기미주를 설치한 것이다.

건국한 지 20여년밖에 안되는 발해로서는 세력팽창이 바로 병합에 의한 영토확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발해의 세력권 안에 있는 말갈제부가 당에도 입공하고 돌궐에도 입공한 것이다. 말갈제부가 개원 29년(741년)까지 각자의 이름으로 당에 입공한 것은 적어도 이 때까지는 말갈제부의 자립이 여전히 유지되고 발해가 이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음을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발해의 배후에 위치한 흑수말갈의 이반은 발해에 심각한 위협을 주었다.

이러한 흑수말갈 문제를 둘러싸고 발해의 지배계급은 의견대립 끝에 왕제 大門藝가 당으로 망명하는 등 지배계급의 분열상을 보였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발해는 大壹夏를 보내어 흑수말갈을 토벌하였다. 그 결과 개원 14(726)년 이후 23(735)년간에 말갈제부의 당 입공회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는 발해가 흑수말갈에 대한 당의 기미주화 정책에 정면으로 대응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당과의 군사적 대결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2. 新羅의 東北邊防備와 대립

발해 건국기의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이는 발해와 신라가 각각 당과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왕 대무예대의 세력팽창에 따른 발해 세력의 남하는 신라에 위협을 주게 되었으며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점차 대립양상을 뛰게 되었다.

聖德王 20년(721)에 신라가 북쪽 국경에 장성을 축조한 사실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구고구려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발해의 세력팽창은 신라에 편입된 고구려인과 말갈인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통일전쟁 후 십년도 안된 神文王 4(684)년에 고구려 유민 報德王 安勝의 조카 大文이 반란을 일으킨 점으로 보아, 당시 신라가 고구려유민을 9誓幢에 편제한 것이 완전한 복속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체제내에 편제한 신라로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舊高句麗 勢力이 건국한 渤海의 세력팽창이 이들에게 동요를 불러 일으켜 결국 신라의 지배를 거부하게 하는 사태를 염려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로서는 이러한 내부 동요를 막기 위해 발해에 대해 방비를 한 것이다.

이 시기에 발해와 신라의 관계를 알려주는 사료는 이 장성축조 기사밖에 없다. 그러나 성덕왕대는 신라의 대외관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즉, 적극적으로 대당교섭을 한 반면 대일 외교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이 시기는 발해는 일본과 국교를 개시한 때이기도 하다. 이러한 국제관계를 고찰한다면, 비록 발해와 신라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기사는 없다 하더라도 양국의 대립관계가 심화되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3. 日本과의 國交 樹立 -新羅의 대당외교에 대한 발해의 대응-

발해는 이러한 국제관계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일본과의 외교적 교섭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발해와 일본의 국교성립 과정을 살펴보면, 養老 4년(720년) 일본이 먼저 말갈국에 사신을 파견하였다.({續日本紀}) 여기서의 말갈은 곧 발해이다. 이때 발해는 아무런 대응이 없다가 7년 뒤인 727년에 일본에 사신을 보내고 이듬해 일본이 답사를 보냄으로써 양국의 국교가 성립하였다.

720년 일본이 먼저 사신을 파견한 것은 일본과 신라의 외교적 관계가 변화하던 시기에 발해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즉, 일본에서는 720년에 8세기초의 대신라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藤原不比等이 사망한 후 新羅에 대한 외교관계가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한편, 신라는 구백제령 문제로 당과 대립이 격화되면서, 대당강경책을 견지하고자 대일 국교재개로 나아갔으나 신라와 당의 첨예한 대립은 당의 토번으로의 관심 이행 및 대외정책기조의 소극화로 인해 점차 완화되어, 구백제령 문제가 680년대 말에 해소되자 신라로서는 일본의 고답적인 태도를 감수하면서 대일외교를 추진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었다.

한편, 당은 이 때가 돌궐과 각축하던 현종시기로 돌궐의 예하에 있는 거란을 제압하기 위해 발해에 사신을 보냈지만 발해가 거부하자 당으로서는 발해 및 거란·돌궐세력을 견제하는 측면에서 흑수말갈에 대한 정책과 궤를 같이하여 신라와 적극적으로 외교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신라 또한 발해의 남하와 체제내에 편입된 高句麗·靺鞨人의 동요에 대비한다는 측면과 690년대까지 구백제령을 완전히 편입한 뒤에는 체제 정비를 위해서 당의 선진문물이 필요한 점에서 대당외교로 노선을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에 있어서는 일본의 이용가치가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일본측에서는 신라를 번국시하여 670년대의 신라와의 관계를 대일종속이라는 외교형식으로 파악하여 정식화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양자의 주장의 차이가 그후 양국대립을 낳게 되는데 690년대의 대일 소극외교는 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본이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그러나 720년 무렵은 발해가 대당외교를 통하여 대외적 안정을 얻고 대외팽창에 전념할 때이므로 일본과의 관계를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725년 무렵에는 흑수말갈이 당의 기미주로 되면서 주변 정세가 변화하였다. 즉 아직 세력확장에 불과하고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黑水靺鞨의 離叛은 바로 靺鞨諸部의 離脫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는 발해를 근저로부터 붕괴시킬 위험이 농후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와 당의 밀착은 발해에게 매우 위협적인 요소로 등장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발해는 비로소 727년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군사상 상호원조를 맺을 수 있는 동맹자의 여부를 탐문하였다. 이 시기 발해의 正·副使에 임명된 발해의 사신이 모두 武官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발해의 사신 파견의 목적이 정치와 군사상의 필요에서 나온 것임을 말해준다. 이후 발해와 일본의 외교적 교섭은 성덕왕30(731)년 일본의 신라 침공계획을 계기로 보다 긴밀한 관계가 이루어졌다.

4. 登州攻擊과 대당외교

흑수말갈에 대한 당의 기미주 정책은 발해에 상당한 위기감을 조성하여, 발해는 흑수말갈을 토벌 하였다. 그러나 흑수말갈의 토벌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 있는 당과의 전쟁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발해의 지배층은 내분에 휩싸이게 되어 대문예는 武王에 반대하여 당으로 망명하고, 이후 발해는 흑수말갈 문제를 기본축으로 하고 대문예 송환문제가 덧붙여지면서 당과 대립이 더욱 첨예하게 되었다.

발해는 처음에는 이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발해의 대당 宿衛가 집중하는 데, 상주외교사절로서의 기능도 갖는 宿衛의 빈번한 파견은 흑수말갈과 대문예 송환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의도였다. 즉, 발해는 흑수말갈에 대해서는 군사적 토벌을 감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흑수말갈의 배후에 해당하는 당에 대해서는 외교사절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아울러 대문예 송환문제는 분열된 발해 지배계급의 수습책이라는 측면에서 당과의 교섭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唐 玄宗은 오히려 大門藝에게 ?左耀騎將軍?의 벼슬을 주어 발해의 의도를 무산시켰다.

당의 이러한 강경 자세는 결국 발해로 하여금 등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발해의 등주공격은 체제위기를 극복하기위한 전쟁인 동시에 국제전의 양상을 뛰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발해의 등주공격을 둘러싼 경과는 등주공격에 이어 당이 신라와 함께 발해의 남변을 공격(733년)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당이 신라와 연합한 사실 못지않게 발해와 거란, 돌궐이 한 진영을 이루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곧 발해의 등주공격은 일종의 국제전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732년 突厥의 지지 하에 契丹도 唐을 공격하기로 약속해 옴에 따라 그 해 9월 장군 張文休에게 唐의 登州(現 蓬萊)를 공격하였다. 이때 발해 장군 張文休는 해로로 登州를 기습 공격하여 登州刺史인 韋俊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이어 발해는 거란과 연합하여 요서의 馬都山(山海關 부근)을 공략하였다. 거란은 당과 발해의 중간에 있어 완충지대에 해당한다. 때문에 당은 거란을 정벌하고자 발해와 연합을 요청한 바 있지만, 그 요청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발해와 거란을 한편으로 인정하여, 발해에 대해서는 흑수말갈에 기미주를 설치하는 형태로 나아가고, 거란에 대해서는 토번의 항복을 계기로 전면전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와중에서 발해가 거란과 연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발해의 대당강경책은 733년 나당연합군의 발해남변 공격, 734년 당의 거란 격파, 돌궐 비가가한의 사망 등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일변한다. 발해는 개원 23(735)년 왕제 大蕃을 來朝 시킴으로써 이전의 강경노선을 철회하였다. 이는 돌궐세력의 쇠퇴에 의한 것이다. 735년 돌궐은 해와 거란에게 격파당하였다. 이때 돌궐은 비가가한이 사망한 이후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발해가 돌궐과 우호관계를 지니면서 당에 무력침략을 감행하다가 이 시기 외교방침을 바꾼 것은 이러한 동북아 역관계의 변화에 기인한다.

그러나 발해 내부문제로 들어가면, 黑水靺鞨을 비롯한 靺鞨諸部의 통합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등주공격으로 야기된 신라의 발해 남쪽 공격은 발해로서는 몹시 위험한 지경에 빠져들게 하였다. 비록 신라의 북침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덕왕 33(734)년 신라가 발해를 공격하겠다고 당에 요청한 사실이 이것을 말해준다. 신라는 편입된 高句麗·靺鞨人들의 동요를 방비하기 위해, 발해의 세력 남하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발해남변 공격의 실패는 신라에 발해라는 존재를 널리 인식하게 만들었고 그에 따라 신라에 편입된 고구려 말갈인의 동요 가능성은 한층 커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는 당과 발해의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이러한 내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발해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발해는 체제존립을 위해 당의 등주를 공격하는 강격책도 불사했지만, 그러나 건국이 일천한 발해로서는 인근 말갈제부의 완전한 복속 편제와 이러한 대외확장을 뒷받침할 체제정비가 시급히 요구되는 대내적 문제와, 발해의 대당강경노선에 동조한 거란의 대당복속과 돌궐의 세력약화 그리고 신라의 북진책 등 대외적 문제에 봉착하면서 결국 대당강격책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대내외적 모순이 극심한 727년에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添當列國 濫摠諸國 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이라하여 고구려의 후예임을 표방한 점이다. 발해의 건국집단이 구고구려 세력인 이상 고구려 후예 의식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무왕 대무예의 경우 보다 적극적으로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이는 분열된 발해 지배층의 내적 통합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발해에 체제 존립을 위협하는 당이라는 존재 앞에서 고구려 계승의식은 적극적인 자의식으로 등장한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발해의 세력권내에 포함된 말갈제부를 복속시키기고 흑수말갈의 이탈에 따른 말갈제부의 동요에 대해 발해의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능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전 고구려 지배하에 복속되었던 말갈은 당연히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발해의 건국과 발전과정이 점진적이 아니라 국제관계의 세력균형 상태에서 탄생한 만큼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단기간의 세력확장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러나 세력확장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여기에 흑수말갈과 당, 그리고 신라가 커다란 위협으로 등장하면서 발해는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내적 통합을 위해 고구려 계승의식이 적극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三.渤海성장기의 대외관계

발해는 제3대 문왕 대흠무 (737-794)시대에 이르러 도읍을 上京 龍泉府로 옮기고 말갈제부에 대한 영토의 확장과 함께 內治에도 힘을 썼으며 이러한 국력 성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당 실리외교를 전개하였다.

1. 대당외교

大武藝에 이어 그의 아들 大欽茂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文王이다. 大欽茂는 父王이 무력에 의존했던 것과는 달리 내치에 힘을 기울이면서 대외적으로 평화 외교정책을 취하였다.

즉 唐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여 관무역의 이득을 꾀하는 동시에 天寶년간 중기에 上京龍泉府의 동쪽인 忽汗水 중류 및 湄타湖 일대의 拂涅部를 병합하여 그 지역에 東平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755년경에 상경으로 천도를 하는데 上京은 위치가 忽汗水 중류유역에 자리잡고 있어 黑水部를 견제하는데 중요한 위치가 되는 곳이었다. 이는 곧 국력이 신장하여 黑水部에 대해서도 자신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후 이를 바탕으로 鐵利部와 越喜部를 병합하고 그 지역에 鐵利府? 懷遠府? 安遠府를 설치하였고, 이로써 발해의 세력이 忽汗水 상류유역과 阿速水의 동부 지역까지도 도달하게 되었다. 또한 虞婁部를 병합하여 그곳에 定理府? 安邊府를 설치했고, 率賓河로 진출하여 率賓府를 설치하는 등 동해에 도달하는 세력판도를 이루었다.

738년 즉위시에 당으로부더 <渤海郡王>이라고 받았던 칭호가 762년에 이르러 <渤海國王>이란 칭호로 격상되었다. 그리하여 대조영 이래 실질적으로 국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형식상 독립된 국가로 인정 받은 것은 이 때에 이르러서였다.

2. 신라와의 경제적 교섭

문왕 대흠무가 재위하던 시기는 신라가 중대사회에서 하대사회로 넘어가던 시기에 해당된다.이 시기에 이르러 발해와 신라는 상설 교통로가 개설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당서}에는 발해의 주요교통로가 5개 열거되어 있다. 龍原府의 동남쪽은 바다인데 일본으로 가는길이고, 南海府는 신라로 가는길이고, 鴨연부는 조공하는길이고,長領府는 營州로 가는길이고, 夫餘府는 거란으로 가는 길에 해당되었다. 이러한 5개의 교통로 중 하나가 신라로 가는 길이니 발해와 신라는 상호왕래가 빈번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와 발해사이에 상설적인 교통로가 있었던 정황을 {삼국사기} 권 37에 인용된 <고금군국지>의 기록을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발해의 柵城府 (동경용원부)와 신라 천정군(덕원) 사이에 39개의 驛(약1170리)이 있었다고 하였다. 발해의 동경에서 신라의 국경도시까지 역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통하여 신라와 발해사이에 상설적인 교통로가 개설되어 있었음울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교통로를 따라 신라는 여러번에 걸쳐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발해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발해에 대한 기록을 삭제하여 버림으로써 단지 단편적인 두 자료밖에 확인되지않고 있다.

{三國史記} 권 19에 의하면 신라 원성왕 6년 (790년) 3월에 一吉찬식 伯魚를 북쪽나라(발해)에 파견하였고, 헌덕왕4년(812) 9월에 級찬 崇正을 북쪽나라에 파견 하였다고 한다.

3. 일본과의 경제외교

문왕대에는 일본과의 외교를 재개하였다. 문왕 3년(739년)에 재개된 대일외교는 모두 11차에 걸쳐 진행 되었다. 대체로 전기의 외교는 일본의 신라 침공계획에 따른 군사외교의 성격을 지녔으며, 후기에는 전기와는 달리 군사외교라기보다는 경제, 문화외교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四. 海東盛國의 대외관계

발해사에 있어 문왕이 죽은 후 795-817년사이는 5` 6대를 거쳐 쇠퇴의 기미를 보이다가 10대 선왕 대인수시대에 이르러 대당 실리외교와 대일 경제외교를 통하여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이른바 해동성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대당외교와 영토확장

文王 이후 渤海는 가계 내의 정권다툼으로 빈번히 왕이 교체되었고 점차 국세가 부진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大祚榮의 직계가 아닌 大仁秀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宣王이다.

大仁秀는 大祚榮의 아우인 大野勃의 4代孫으로 재능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하는 경험이 풍부하여 왕족의 신임을 받았다. 大仁秀는 정권을 잡은 즉시 李繼常 등 26人을 唐에 파견하여 이 사실을 알렸다. 唐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大仁秀는 唐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그의 통치시기에 819년을 제외하고 매해 唐에 사신을 보내어 실리외교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선왕 大仁秀의 효과적인 통치하에서 渤海의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은 다시 한번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渤海는 이러한 대당외교를 기반으로 국력을 강화하고 먼저 新羅를 쳐서 이긴 다음 湄陀湖 以北에 산재하고 있는 靺鞨諸族의 정벌을 단행한다. 이때 제일 먼저 정복한 종족은 拂涅部이다. 拂涅部는 이미 大武藝 때부터 服屬을 시켰으나 大欽茂 이후 혼란기에 渤海로부터 이탈한 종족이었다. 大仁秀는 군사를 파견하여 拂涅部를 다시 귀속시킨 후 더욱 북쪽으로 진출하여 鐵利部와 虞婁部를 귀속시켰다. 이후 湄陀湖 以北의 三江평원 일대는 다시 渤海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특히 문헌에 보이지 않지만 이때에 黑水 하류의 黑水部까지 세력을 넓혔던 것으로 보인다. 黑水部는 唐 穆宗 이후부터 唐에 진공을 끊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大仁秀의 영토확장에 따라 그 통로가 끊겼거나 渤海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大仁秀는 새로 정복한 지역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새로 정복한 지역에 새로운 행정기구를 설치하였다. 越喜部의 故地에는 懷遠府와 安遠府를 설치하였고, 鐵利部의 고지에는 鐵利府를 설치하였으며 그 아래 州와 縣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大仁秀는 遼東지역에 唐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遼河유역의 小高句麗國을 병합하여 이 곳에 木底州 ?若忽州 ?玄兎州 등을 두었다. 이후 遼東진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10세기 초에 契丹이 이곳으로 진출하기 전까지 遼東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대당외교와 이러한 영토학장정책은 표리의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당시 발해의 대외전략의 일면을 보여준다.이로써 渤海의 영역이 西部로는 嫩江 하류일대에서 遼河 중류일대를 지나 鴨綠江 하류일대까지, 東部로는 沿海州에서 阿速水 하류일대까지, 南部로는 浿水(現 大洞江)와 泥河(現 龍興江) 일대까지, 北部로는 黑水 일대를 모두 통제하였다. 大仁秀는 이상과 같이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渤海의 최대판도를 형성하였으며, 이에 맞추어 5京 15府 62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기에 이르렀다.이리하여 선왕 大仁秀 시기에 渤海는 중흥을 맞이하였고 그 결과 ?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2. 발해와 신라의 외교적 경쟁과 대립

한편 신라는 下代의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급기야 822년에 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헌덕왕이 김헌창의 반란을 평정하기는 하였으나 국세는 날로 쇠약해갔다. 이리하여 신라와 발해의 국력의 세기는 점차 역전되어 갔다.

따라서 이 시기는 당의 혼란과 신라의 혼란을 틈타 대인수가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에 해당하고, 따라서 발해의 영토 확장에 따른 양국간의 충돌이 예상되는 시기이다.즉, 발해는 당 元和중 (818-820)에 신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빼앗고 여러 郡邑을 두었음이 {遼史}지리지 東京道조에 보이고 있다. 이에 신라는 발해를 방비하개에 이르렀으니 826년 7월에 牛岺太守 白永에게 명하여 漢山의 여러 州郡 사람들 1만명을 징발하여 대동강에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그 길이가 300리나 되었음이 {삼국사기} 권 10에 나타난다.

한편,대당외교에 있어서도 발해 사신과 신라 사신사이에 서로 윗 자리를 차지하려는 爭長 사건이 벌어졌다. 897년 당에 사신으로 간 발해왕자 大封裔가 발해를 신라의 위에 놓도록 요청하였다. 그 이전 까지 신라가 윗자리에 있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발해의 국력이 신라보다 우위에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이와 같은 요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발해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당시 발해의 국력이 신라보다 우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쟁장 사건과 함께 당의 賓貢試 급제에서의 서열도 문제가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현재 2개의 예가 보이고 있다. 김육불의 {발해지국장편} 권10에는 9세기 말경 발해 오소도와 신라 李同 사이에 서열 다툼이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이때는 오소도가 상위에 급제하였다. 또 {고려사} 권 92 崔彦위전에 의하면 906년 최언위와 발해 오소도의 아들 烏光贊이 서열다툼을 벌여 최언위가 상위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五. 멸망기의 대외관계

해동성국으로 칭해지던 발해가 10세기 초 거란과의 전쟁과정중에서 변변히 싸워보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멸망한 까닭에 발해의 멸망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나오고 있다. 그간의 발해 멸망원인에 관한 연구는 발해 지배계층의 분열, 사치풍조등에 초점이 두어졌으며 심지어는 발해의 멸망이 백두산의 화산폭발에 의한 것이라는 소설과 같은 견해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발해의 멸망 원인은 당시 동북아의 정세의 변화와 발해의 방어체제및 거란의 군사적 기동력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9세기 말부터 10세기 전반기의 동아시아는 하나의 전환기라고 할 것이다. 안사의 난이후 쇠퇴하기 시작한 당제국은 황소의 대난을 겪으면서 907년에 멸망하고 후량이 들어서면서 5대가 시작되었다. 북아시아의 형세는 시라무렌강가에서 발흥한 거란이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북중국으로 진출하는 한편, 동쪽으로 발해를 위협하였다.

한반도 내에서는 신라가 쇠망하고 후삼국의 혼란을 겪으면서 후백제와 태봉(고려)이 세력다툼을 벌이던 시기이다. 결국 이때는 한반도와 중원지방 모두 혼란기에 접어들고 이 틈을 타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이 세력 확장을 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제적인 형세는 발해에 불리한 입장에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된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발해는 점차 외교적으로 고립화되기 시작하여 발해는 외교적 능력을 발휘할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는 곧 발해의 쇠망을 가져오게 하였다.

발해는 거란 발흥 초기에는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어 918년에는 사신을 보내기도 하지만 이후 거란의 동쪽진출에 위협을 느껴 상호 적대적으로 된다. 919년 2월 거란이 발해인들을 약?하여 遼陽으로 끌고가자 924년 5월 발해가 군대를 보내어 거란 遼州를 공격하여 刺史 張秀實을 죽이고 사람들을 납치하여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의 생산의 요충지인 요동의 상실은 발해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한편 거란의 핍박을 경계하여 925년경에는 발해가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結援하였음이 {契丹國志}(권1)에 보이고 있다. 이보다 앞서 921년에는 발해가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아울러 通婚하였던 듯한 기록이 {資治通鑑} 권285에 보이고 있다. 만일 이 기록이 신빙성이 있다면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이룩한 뒤에 발해에 대해 취하였던 일련의 정책의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거란이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고려측은 거란이 발해와의 연화를 파기한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꾸짖고 멸망 뒤에 유민들을 계속 받아들이면서 특히 大光顯에게는 왕씨의 성을 주어 종적에 올린 것은 고려 태조시 발해 왕실과의 혼인 정책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편적 사료를 통해 발해의 외교적 노력의 일면을 엿볼 수 있으나 당시의 급변하는 동아정세속에 발해의 외교적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발해는 거란과 정면 대결하였으나 부여도 방면으로 진출한 발해의 주력군인 路相의 3만군이 거란에 격파되자 수도는 유목민인 거란의 기습공격을 막지 못하고 926년 정월 붕괴하였다.
 

맺 음 말

渤海의 대외관계를 당시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거시적인 입장에서 재검토하였다. 발해는 건국기부터 해동성국을 거쳐 멸망기에 이르기까지 주변제국과 부단한 항쟁을 통하여 성장하였으며, 자존과 성장을 위하여 당, 돌궐, 거란, 신라, 일본등과 다양한 교섭을 전개하였다.

발해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당시의 세계제국 당과 강온 양면에 걸치는 외교정책을 구사하여 당의 선진문화를 수용하여 해동성국이라는 국가적 성장을 도모하였을 뿐만아니라, 때로는 당의 압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라, 일본, 돌궐, 거란등과 통교하는 한편, 군사적으로 당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돌궐, 신라, 거란등과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때로는 제휴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전쟁을 하는등 능동적으로 대응하였다. 일본과의 외교는 전반기에는 주로 군사외교를 전개하였으며, 후반기에는 경제, 문화외교로 전환하여 실리를 도모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과정에 나타나는 강렬한 고구려 계승의식이다.

한편,이러한 검토의 결과 渤海의 正體性을 어느 정도 극복 파악할 수 있게 되엇다. 발해는 예맥계와 말갈계 고구려유민이 건국한 고구려의 계승국가이며, 당시의 국제사회에서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당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된 왕조 였으나 중국학계에서 주장하는 바와같이 당의 지방정권이었던 것은 아니며 당당한 독립국이었다.

일반적으로 책봉체제내에서의 조공국이란 정치적 신속을 전제로하여 연호의 차용등 중국적 의례를 받아들이는 관계를 이름하는 데, 발해는 광개토대왕이후의 고구려 전통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년호를 사용하였을 뿐만아니라 정혜공주묘비에서 보는 바와같이 大王, 皇上등의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押靺鞨使, 許王府등의 예에서 보는 바와같이 번국을 거느린 동북아시아의 강국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발해의 대당외교는 주변 제 지역의 복속이나, 경제적 욕구를 달성하기 위한 방편적 실리외교의 하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9세기 말부터 진행된 당제국의 와해와 한반도의 혼란등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발해는 외교적으로 고립화되기 시작하여 발해는 외교적 능력을 발휘할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는 곧 발해의 쇠망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결과 거란에게 생산의 요충지인 요동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후는 생산력이 취약한 발해의 입지상 유목민족인 거란의 기동력을 방어 할 수 없게 되어 발해는 멸망하게 되었다.

<參 考 文 獻>

史 料

* {三國史記}, {三國遺史} ,{渤海考}

* {北史}, {隋書}, {舊唐書}, {新唐書}, {五代會要}, {遼史}, {資治通鑑}, {冊府元龜}, {松漠紀聞}, {道里記}, {唐會要}

* {類聚國史},{續日本紀}

論 著

* 이용범, {中世 東北亞細亞史}, 亞細亞文化社, 1976.

* 王承禮 著, 송기호 譯. {渤海의 歷史}, 翰林大學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 최무장 譯, {渤海의 起源과 文化}, 藝文出版社, 1988.

* 김정배 外, {渤海國史}, 정음사, 1988.

* 方學鳳, {渤海史硏究}, 정음사, 1989.

* 서병국, {渤海, 渤海人}, 일념, 1990.

* 박시형 著, 송기호 譯, {渤海史}, 이론과 실천, 1991.

* 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신서원,1994

* 송기호, {발해정치사연구},일조각,1995

* 노태돈 외,{한국사10-발해},국사편찬위원회,1996

* 임상선 편역 {발해사의 이해},신서원,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