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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 있어서 올바른 민족관을 위하여

중국중심의 민족관을 극복해야

우리 즉, 한민족에 대한 관심은 우리들의 조상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하는 점에서 드러나곤 한다. 특히, 우리 고대 역사에서 한민족의 공간적 범위가 어느 정도였을까 하는 점 등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더욱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그만큼 역사의 시각이 넓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하는 등 부정적인 반향도 없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민족사의 사실 확인은 때로 인접 국가간의 긴장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 확인이라는 학문과정은 결코 이러한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과거의 그것이 오늘날의 상황에서 어느 한 국가나 집단으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사실은 왜곡될 수 없다. 결코 어떠한 정치적 목적도 역사해석에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왜곡상은 오늘날 고구려와 발해사의 민족사적 귀속문제에 대한 주장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중국이 {삼국사기}를 통해 한국 고대사로 당연시 해왔던 고구려를 당의 지방정권이라 하여 중국사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과거 고구려의 상당부분이 오늘날 중국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현실적으로 숨겨지고, 나타난 논리는 고구려가 당문화의 주변국이었고 당에 조공하였다는 것이다.

이 글은 동아시아사에서 민족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자세를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대 한민족의 실상을 언급하려는 것이다. 즉, 한민족을 이해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중원중심의 중국 기록을 현지인 중심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하고, 그 구체적인 면을 보이려는 것이다.

민족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언어 풍습 종교 정치 경제 등 각종 문화내용을 공유하고 집단귀속감정에 의하여 결합된 인간집단의 최대단위요 문화공동체"로 정의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한민족으로 분류되고 있다.

한편, 현대 한국인은 한민족(韓民族)이며 다른 민족이 융합되지 않은 단일민족국가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 중국인은 한족(漢族)의 단일민족이 아닌 몽고, 만주, 조선족 등 50여개 소수민족이 전체의 약 6%를 포함하고 있는 복합민족국가이다. 그러나, 현대 중국의 한족도 따져 보면, 여러 다른 민족이 융합된 복합민족적 성격이 강한 중화족(中華族) 내지 중국족(中國族)이다. 따라서, 한족의 비중은 오늘날 나타난 비율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 특히, 만주가 중국이 되면서부터의 한족이란 순수한 한족으로써??성격이 매우 희박하게 되었다. 다수의 만주족 등이 한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한민족도 중국의 한족(漢族)과 같이 복합민족적 의미가 있다. 한민족도 오랜 역사를 겪어 오면서 몽고 및 한족 등 여러 민족이 교류 혼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비중은 중국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민족의 현대적 개념은 대략 19세기 이후에 정립되었다. 따라서, 현대 민족의 분포와 의미부여도 이 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입장에서 민족사를 따져 보자면, 단순하게 현대적 민족분포와 특성을 갖고서 민족사를 획정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를 테면, 한민족이 압록강과 두만강이남을 중심으로 정의될 수 있었던 것은 세종임금 시절 이른바 북쪽 변경에 4군 6진이 설치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때를 한민족의 문화공동체 영역이 가장 확대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4군 6진의 설치는 조선 왕조의 시각에서는 '개척'이지만, 한민족사의 입장에서는 '회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만주지역주민들의 역사가 변천되어 오는 과정을 이해하고, 기록이 갖는 중국중심적 시각을 극복할 때라야만이 가능하다. 즉, 남만주의 조선계 숙신과 예맥, 부여, 고구려, 옥저 등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살펴 보면, 이들의 후손인 한민족의 공간적 범위를 한반도에 국한시켜 거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한민족사를 복원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고대사 기록의 상당부분을 중국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최초 국가를 '(고)조선'으로 불렀던 것도 {사기}라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물론 {삼국유사}가 최초의 국가를 '단군조선'이라 하여 {사기}를 보완하고 있으나, {사기}가 갖는 사료적 의미는 {삼국유사}에 못지 않다. 또한 중국측 기록들은 조선이전의 한민족명이라고 하는 '숙신'(肅愼)이나 '예맥'(濊貊)에 대한 기록도 남기면서 한민족사의 복원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중원중심의 기록이 갖는 역기능 또한 적지 않다. 사실과 다르게, 만주와 한반도 주민들의 역사와 문화의 기원이 모두 중원중심으로 해석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급기야 한반도나 만주의 주민들은 모두가 중국의 중원으로부터 기원하였다는 논리로 비약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로 이 부분은 만주지역의 주민들에 대한 실상 파악에 있어서 실로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었다.

종족명이 자칭이 아닌 타칭의 범칭(汎稱)이 됨으로써, 지역 주민들의 종족계통이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중국의 여러 기록들은 만주지역의 종족이 진(秦) 이전에는 숙신이다가, 한대에는 읍루로, 그리고 후위대에는 물길로, 수당대에는 말갈로 그 이름을 바꾸어 왔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들은 이민족의 교체가 아니라 같은 종족의 이름변경이었다. 그러함에도 이렇게 종족명을 바꾸어 부르게 되었던 원인은 기록자의 인식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기록자가 만주지역 주민들을 인지하는 정도가 넓어짐으로 인하여 새로운 ?씰렇資막? 그들을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종족계통상 같은 계열의 주민들이었다. 또한 이들이 스스로 국호나 종족명을 중국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바꾸어 불렀던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인식이 넓어지면서 그렇게 불러 왔다는 것이다.

중원중심의 기록은 중국사적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사기} [조선전]을 싣게 된 배경은 조선의 역사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나라 역사를 영광되게 하였던 주변의 조선이 어떠한 나라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중심으로 자주적 한국고대사를 복원함에는 문제가 많다. 이를 테면, 춘추전국기를 맞아 정치 군사적 압박을 피해 '동이족'이 한반도로 다수가 이동하여 왔다고 하는데, 이 기록을 중심으로 한민족이 바로 이 때에 비로소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미 만주와 한반도에는 상당수의 주민들이 중원과 다른 청동기문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한국인 스스로 '동이족'(東夷族)의 후예라 자처함은 더욱 옳지 않다.

한반도와 남만주의 문화는 중원과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중원과 같이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오면서 문화를 축적하고 있었고, 자연환경의 변화와 함께 신석기 말기에 와서는 독자적 군장국가로 발전하였는가 하면, 청동기시대에는 독특한 세형동검의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보다 강력한 국가를 건국할 줄도 알았다. 즉, 이들이 세운 청동기시대의 고조선은 독자적 역량을 바탕으로 중국과 교류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또한 이러한 독자적 문화환경을 배경으로 하여 부여, 고구려 등이 건국되어, 고구려는 주변의 부?? 옥저 등을 병합하고 중국과 항쟁하며 700여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경성대신문, 1995년 3월 2일)

남만주의 숙신, 예맥, 부여, 고구려, 발해

남만주의 고대인들이 누구였고, 어떻게 살던 사람들이엇을까 하는 의문을 푸는 문제는 여러 기록 특히, 중국측 기록이 갖는 자국중심적 해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라야마니 가능하다. 만주 주민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그 실상을 확인하는 첫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시각은 한민족사를 복원하는 입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숙신과 말갈, 여진이 한민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한민족과 전혀 달리 생각하는 겨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조상에 대하여 기록한 역사서로써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그러나, 아지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환단고기}, {규원사화}나 중국의 {사기} 등도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물론 기록이 있기 이전에도 한민족의 조상들은 남만주와 한반도에서 살아 왔던 것으로 고고학적 자료들이 증거해 주고 있다. 구석기시대를 비롯하여 신석기시대에 있어서도, 이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여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헌적으로 이들이 어떻게 나타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역사시대의 문헌 연구가 역사연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한민족을 가르키는 가장 오래전의 종족명은 '숙신(肅愼)'이다. 그리고 한민족의 최초 국가로 알려진 고조선의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도 바로 이 숙신에서 나왔다고 한다. 말하자면, 숙신이란 조선인들이 자칭했던 종족명을 소리만을 따서 중국식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조선은 숙신과 비슷한 소리로 동쪽의 의미를 갖는 뜻을 따서 만든 국명이라는 이야기다. 이 숙신과 조선에 관한 기록을 위시해서 한민족의 조상은 예맥, 부여, 고구려, 발해 등으로 나타난다.

숙신이 조선과 같은 계통의 한민조의 조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는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숙신이 한민족과 다른 읍루, 물길, 말갈, 여진의 만주족의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의 학자를 비롯해서 많은 학자들은 조선과 숙신의 동일계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숙신이 예맥 등과 전혀 다른 계통인 것처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숙신 기록이 갖는 중국중심적인 부분을 걸러내지 못한 결과이다. 산동 및 요동을 비롯한 남만주의 숙신은 본래 동이??및 고조선과 같은 지역의 주민들을 통칭하는 종족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수당시대에 와서는 흑룡강 중하류의 주민들을 가르키는 종족명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숙신이란 후대의 흑룡강 중하류 주민들로써, 초기 기록상의 숙신과는 다른 주민이다. 다시 말해, 숙신은 두 계통의 종족을 의미하고 한민족과 관련된 숙신은 초기 기록상의 숙신이라는 것이다.

숙신과 같이 다원적인 의미를 갖는 종족명은 말갈과 여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예맥과 읍루, 물길만이 비교적 한 계통의 순수한 종족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조선이나 부여, 고구려는 종족명이었다기 보다 국명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즉, 숙신, 예맥인들이 세운 왕조가 바로 조선이나 부여, 고구려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아무튼, 숙신과 같이 말갈이나 여진도 그 종족 구성이 복합적이었다는 것은 남만주 주민들의 역사복원이라는 시각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남만주 주민들의 종족계통을 막연히 일원론 적으로 생각하여, 숙신(진 이전)→읍루(한)→물길(후위)→말갈(수당)→여진(송 이후)이라하여 이들을 모두 만주족으로 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지역에서 역사를 이어 왔던 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의 역사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민족이동설의 입장에 있는 많은 학자들은 예맥인 등이 대부분 한반도 북부로 이동하고, 흑룡강 중하류에서 살았던 숙신이 남하하여 남만주 전체가 말갈이 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에서 발해가 순수한 말갈의 후예였다거나, 말갈이나 여진으로 불리는 남만주 주민들이 한민족과는 전혀 별개의 종족이엇다고 한다 그러나, 남만주가 주민이동이 그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농경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현지에 남아서 그들의 역사를 계승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것이다. 그렇다면, 예맥, 부여, 고구려의 역사는 모두가 한반도로 이동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현지에서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고, 만주족의 형성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말갈과 여진에 대한 종족계통을 보다 분명하게 언급할 수 있다.

우선 말갈은 고구려시대 즉, 수당대에 중국인들에 의해 불리워지던 타칭(他稱) 및 범칭(汎稱) 비칭(卑稱)의 종족명으로써, 일곱 개의 말갈이 남만주에 나뉘어 있었다는 것이 주 골자이다. 그런데, 이 일곱 말갈은 하나의 종족계통만?르 갖는 그런 종족이 아니었다. 여러 말갈중에서 흑룡강 중하류의 흑수말갈을 제외한 백두산 지역의 백산말갈이나 송화강 지역의 속말말갈 등은 예맥계로써 부여나 고구려와 같은 계통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살던 곳이나 문화가 모두 부여나 구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 그 중요한 근거 이다.

그러함에도, 이들이 고구려와 전혀 다른 계통으로 여겨왔던 것은 중국측 기록이 갖는 중원중심적 시각과 도성이나 왕실중심의 시각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였다. 중국이 전통적으로 변방 종족을 낮추어서 범칭해 왔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아울러 전근대적 역사기록들의 또 다른 특징은 왕실 중심의 역사기록을 해 왔다는 것이다. 다라서 발해를 건국한 '속말말갈 대조영'이란 의미는 '송화강지역의 시골사람 대조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말갈의 원래 모습은 '속말말갈', '백산말갈', '흑수말갈' 등에 붙는 말갈이 아니라, ?熾じ資? 의미하는 속말이나 백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속말(송화강)이나 백산(백두산) 주민들은 예맥계이고 흑수(흑룡강) 주민들은 예맥계와 다른 흑수숙신계통이라는 이야기다. 나아가 이 사실은 송화강, 백두산을 포함한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활동하였던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점을 보다 명확하게 만들었다. 즉, 발해의 피지배주민으로 언급해 오던 다수의 말갈들은 지배층과 함께 거의가 예맥의 후손인 고구려인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여진에 대한 생각도 말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진이란 발해가 멸망하고 난 이후에 보편적으로 쓰인 종족명이다. 그런데, 이들이 살던 곳은 대부분 발해인들이 살던 곳을 포함하고 있다. 단지, 훅수말갈 지역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더 많은 지역은 발해인들이 살던 곳이다. 따라서, 여진이란 발해유민과 흑수말갈의 복합민족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의견은 여진은 훅수말갈인의 후예라고 여겨왔다. 이른바, 민족이동설의 입장에서 흑수말갈이 남하하여 번성하였다는 것인데, 우리 학계도 여기에서 벗아나지 못하고 발해유민의 고려 이동에만 초점이 모아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에 남아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고 있었다.

남만주 고대 주민들에 대한 기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의견차는 심각하다. 이것은 급기야 한중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도 금할 수 없다. 특히, 남북한과 중국 학계의 발해사에 대한 견해차는 심각하다. 즉, 남북한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라고 하는데 반하여, 중국은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이었다하여 당나라 역사, 즉 중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국은 {삼국사기}에도 명확한 고구려마저도 당의 지방정권이었다고 강변한다. 이 부분은 고구려나 발해유적을 답사해 본 사람이??누구나 실감하는 부분이다. 고구려나 발해유적 모두는 '당의 지방정권'임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현재 남만주의 대부분을 중국이 차지하고 있고, 중국의 소수민족정책과 관련이 되어 있지 않은가 한다. 그러나, 일본과 같이 비교적 객관적 위치에 있는 학자들의 발해에 대한 견해는 적어도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이라는 시각을 갖고 {조선사개설}에서 '통일신라와 발해'를 한 개의 장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측의 주장과 매우 거리가 있는 서술이다.

아무튼, 50여개의 소수민족과 함께 중국이 고구려나 발해를 당의 역사로 간주하는 것은 그들의 소수민족정책에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역사의 실상과 현실은 구별되어야 한다. 과거의 역사가 현실에 이로움이 되든 되지 않든간에 역사는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곧 학문이 추구하는 바요,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경성대신문, 95년 3월27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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