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천주교 박해 / 허준용

신동엽 / 이주영

성곽 / 오영옥

백제의 고분 / 정현정
 



 
 

< 천주교 박해 >


 


- 94 허준용 -

조선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인 17세기 이후 나라전체가 황폐화를 맞이 하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적 위기와 재난 속에서도 정치적 지배계층에 있는 계급들은 정권쟁탈을 일삼는 당파싸움 만을 계속하고 있었고 조선왕조는 전체적으로 개혁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를 위하여는 새로운 이념이 요청 되었다. 따라서 주자학의 덕치주의 재검토하고 새로운 이념을 찾아 나선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쟁을 배경으로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 학자들이였다. 관념적인 공리론을 비판하고 정치, 경제, 사회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학문 곧 실학과 함께 서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사실에 입각한 진리탐구를 지향한 고증학(考證學)과 서양문물 그리고 비판 정신을 동반한 실학은 그 근원을 다같이 천주교에 두고 있다.

17세기 초에 천주교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종교로서가 아니라 서학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사상 곧 학문적 대상으로서였다. 명에 왕래한 이수광(李?光,1563-1628)이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한 이후 이익(李瀷1681-1763)과 실학자들에 의한 비판적 소개가 뒤따랐다. 성호학파(星湖學派)안에는 신후담(愼後聃), 안정복(安鼎福)과 같이 천주교를 비판하는 계열도 있었지만 또한 이벽(李蘗), 권철신(權哲身) 등과 같이 천주교를 적극 신봉하려는 계열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1784년 세례를 받고 온 것을 계기로 적극적인 신앙활동이 전개 되었다. 귀국한 이승훈은 당시 이미 서학에 조예가 깊은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어 줌으로써 이들은 한국천주교의 세 초석이 되었다. 그후 이들은 권일신의 형제와 정약용의 형제 그리고 이가환등과 함께 기독교를 연구하며 신앙생활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한편 주자학의 보수적 정통주의 사회속에 완전히 이질적인 사상체계를 가진 천주교의 신앙 집단이 형성되자 이는 곧 사회문제로 확대되어 갔다. 천주교의 운동은 주자학적 전통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더구나 이것이 정치적 파쟁과 관련됨으로써 집권층과의 정면 충돌을 야기하였으며 극심한 탄압 속에서 지하운동으로 연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천주교의 초기 100년의 역사는 실로 박해와 순교사의 점철이였다. 첫수난은 천주교 신앙에 열렬하였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북경주교의 가르침을 따라 제사를 폐지하고 조상을 상징하는 위패를 불사르자 그들은 관헌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형을 당하였다. 조선조의 유교체제하에서는 효도 사상과 결부 되어 4대조까지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게 되었다. 이것을 갑자기 우상숭배라고 죄악시하여 폐지하려는 것은 곧 유교체제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큰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한국 순교사의 첫장이 되는 신해교난(辛亥敎難.1791)이다.

두 번째 수난은 순조의 정사를 가로맡은 대비 김씨의 서교 탄압에 대한 교서로 일어났다. 이는 정권을 둘러싼 당쟁의 여파로 일어났다. 정조 때에는 당쟁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썼을 뿐만 아니라 남인이였단 채제공(蔡濟恭)이 영의정으로 있었으므로 남인 출신이었던 당시 천주교인들에 대한 큰 박해가 없었다. 그러나 채제공이 가고 그뒤를 이어 정조가 가게 되자 서인파에서는 때가 왔다는 듯이 곧 사교로 낙인 찍힌 서교배척을 빙자하여 남인들에 대한 학살을 계획한 것이었다.

11세에 왕위에 오른 순조의 정사를 가로 맡은 대비 김씨는 서교를 뿌리째 없애라는 교서를 내리었다. 이른바 서교라는 것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헐어 없이 하고 스스로 짐승으로 되게 한다하여 신도들을 역적으로 몰아 씨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남인의 중진이요 천주교의 지도자였던 이가환(李家煥), 권철신(權哲身), 이승훈, 정약종, 홍락민 등이 모두 순교 하였고 정약용(丁若鏞), 정약전, 이치훈 등이 유배됨으로써 남인과 서교가 일시에 몰락해 버린다. 이러한 박해에 난을 피한 황사영(黃嗣永)은 북경 주교에게 호소문을 보내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는데 이것이 '황사영의 백서(帛書) 사건' 이다. 이 백서 속에는 청나라 황제의 힘을 빌든가 외국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신교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심지어는 "비록 이 나라를 진멸한들 성교의 표양에 해로울 것이 해로울것이 없다고 까지 썼다. 이로써 정부는 서교를 더욱 민족적 사교로 낙인찍고 박해 하게 되었다.

세 번째 교난은 기해년(己亥年.1893)에 있었다. 천주교는 거듭되는 박해 속에서도 쇠퇴하지 아니하고 회복하며 발전해 갔다. 30년 경에는 신도수 1만명을 헤아리게 된 것이다. 이에 교황청은 1831년을 기해 조선 교구를 설치하고 북경교구로부터 독립케했다. 그리고 프랑스인 신부를 주교로 임명했다. 이러한 성장에 대해 보수적인 유교 정권 체제는 자신의 무력감과 함께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 조정안에는 세도간의 알력이 있었다. 당시 헌종의 섭정을 맡아 보던 안동 김씨 순조비(純祖妃)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썼다. 그런데 세도를 누리던 풍양 조씨 일파(憲宗의 母后측)는 김씨 세도를 몰아낼 구실로 김씨의 대천주교 정책을 힐난하고 나섰다. 드디어 우의정 이지연의 사학 박멸 주장과 함께 기해교난이 시작되었다. 이때 전국적으로 돌린 왕명으로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이 있었다. 이것은 천주교가 나라망치는 사교라는 것을 천명한 글이었다. 곧 하늘과 사람을 혼돈하고 삼강오륜을 파괴하는 반사회적 집단이라는 것이었다. 이 무렵 순교 당한 정하상이 남긴 "상재상서"(上宰相書)가 있다. 이것은 천주교의 교리를 풀고 참종교임을 변호한 상서 형식의 글이다. "상재상서" 는 "척사윤음"과 함께 초기 천주교의 수난을 불러 일으킨 사상적 특징이 무엇이었나를 말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왕명으로 전국적으로 수천명이 투옥되고 순교자만 해도 130여명에 이르렀다. 그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의 순교를 전후한 박해도 있었다. 그러나 철종대에는 대체로 천주교가 자유로이 발전하여 말년에는 선교사가 12명에 신도수는 2만 3천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섭정기에 천주교 최대의 수난인 병인교난(丙寅敎難.1866)의 비극이 일어났다. 이 병인 대학살 사건의 원인은 극히 애매하다. 직접적인 동기는 조야의 보수파들이 서교 배척열을 재연시키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서교와 서양의 침략세력을 동일시 했다. 천주교를 침략세력의 앞잡이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은 세계정세 에 대한 무지와 유교적인 전제주의와 배타적인 쇄국정책이 결합되어 천주교도의 대학살이라는 비극을 초래한셈이다. 1866년이후 3년을 두고 학살한 교인의 수는 무려 8천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때에 프랑스 신부는 9명이나 순교했다. 그리하여 3만에 가깝던 천주교 신도들은 거의 종적을 감추는 사태에 이르렀다. 실로 한국 천주교의 초기 100년은 처절한 순교의 역사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 금장태·유동식 공저, 《한국종교사상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6.

- 노길명, 《가톨릭과 조선후기 사회변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여구소, 1990.

-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25호》, 역사비평사, 1994.
 



 
 

< 신동엽 >


 


-96 이주영-

. 들어가며

신동엽이 작고한지도 어언 20년이 지났다. 지난 20년간 신동엽의 문학은 작고한 어느 시인보다 지속적으로 일반독자들에게 읽힌 셈인데, 이같은 현상은 신동엽의 시문학이 민족문학의 새 지평을 개척한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60년대에 한국 시단의 풍토에서 볼 때 이단적인 존재로 비칠 수 밖에 없었던 신동엽은 김수영과 함께 병약하고 폐쇄적인 개인주의적 세계에 함몰되어 있던 힌국 시문학 일대 각성과 활력을 불어넣어주는데 독보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엽은 조선조에나 유행했던 영미문화와 식민자본세력의 앞잡이에 묻어 들어온 각종 외래사조가 50년대 한국문단을 지배하는 것을 배격하면서 이미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시를 쓸 것을 주장할 만큼 깨어있는 의식의 소유자였다. 또한 그는 확실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되는데 그것은 탈이데올로기적인 중립적 인간관과 세계관이었다고 여겨진다.

신동엽의 시문학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족문학의 새 지평을 개척한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분단시대 민족모순의 현실에 저항하면서 민족공동체의 동질성 회복과 그 삶의 전망을 민중적 관점에서 확신하면서 참여시를 썼다는 것, 그리고 그가 참여시인이긴 하지만 단순히 정치적인 시를 쓴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재반문명이 내포하고 있는 허위적 가치를 전면 부정하고 인간의 원초적 생명의 실현을 정신적 기반으로 하는 참여시를 썼기 때문이다.

. 신동엽의 시와 중립적 세계관

1. 신동엽의 중립적 세계관

신동엽의 시의식은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현장을 묘사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의 시의식은 우리가 살아왔거나 아니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얻으려는데 경주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최대 관심은 민족이 처한 현실적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저항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신동엽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로부터 벗어난 인간해방의 상태를 염원하고 있다. 그가 염원했던 인간해방 민족해방의 모습은 그의 특유한 표현인 '알맹이 사상'으로 집약되어 표현된다.

전쟁 이후 숱한 외래사조들이 한국문단에 판을 치며 횡행했던 50년대 말에 등단한 신동엽은 순수파시인들이나 모더니스트들이 견지했던 탈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현실이나 역사로부터 도피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탈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보다 치열하게 자기 현실과 역사로 귀환하는 철저한 중립적 세계관을 밑바탕으로 시작활동을 했다고 판단된다. 순수파나 모더니스트들이 그것을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데 비해 신동엽은 한국사회와 민족을 억압하고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고통과 질곡의 원인을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을 유포하는 외세와 외세에 결탁한 지배세력에 기인한다고 보고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목적으로서 탈이데올로기적 관점을 가졌다. 말하자면 민족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정치적 이상으로서의 탈이데올로기적 관점이었던 것이다.

또한 신동엽의 '알맹이'사상은 탈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바라본 우리의 역사적 조건과 민족적 현실에 대한 명중한 비판적 사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다시 말해 이 땅에서 영위되고 있는 삶의 부정적 행태를 통해 무엇이 인간의 해방된 상태이고 무엇이 인간의 올바른 삶의 양식인가를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역사적 존재양식'을 추구해 나간 것이 바로 그의 중립적 인간과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동엽의 인간 또는 세계에 대한 중립적 세계관은 오늘의 문명의 성격이 인간 또는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그의 중립적 세계관은 현대사회의 모든 문명을 뿌리 없는 고목에 세운 허깨비로 간주하고, 진정한 인간 사회란 대지에 뿌리박은 사회라고 믿고 있다. 그의 처녀시인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속의인간생명의 원초적 본질인 대지가 곧 신동엽의 시정신의 모태가 된 중립사상의 근원임을 알 수 있다.

2. 민족 알맹이의 중립적 염원

신동엽의 중립적 세계관이 민족의 실체와 운명적으로 결합하면서 탄생한 시가 그의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이다. 1967년 신구문화사 간 '52인 시집'에 발표한 이 시는 신동엽이 그 동안 추적해온 민족의 알맹이 사상이 중립적 세계관과 만나면서 분출해 나온 우렁찬 목소리였다. 그가 '껍데기는 가라'는 한 마디로 이 민족사의 비극을 요약할 수 있는 통찰력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중립적인 인간관과 역사관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민족의 알맹이들이 역사의 껍데기들을 행해 몸부림쳤던 4월 혁명이나 갑오농민전쟁의 아우성만이 이 민족의 알몸들이며, 그 아우성만이 민족사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그의 이 시 한편은 분명 이 나라의 아름다운 공동체의 결합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이 시를 발표한 이후 그는 민족의 알맹이 사상에 깊은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수운이 말하기를'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왜 쏘아'등의 시에서 그는 한결 원숙한 기법을 가지고 되풀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 나오면서

신동엽은 냉전논리가 극심하게 기세를 떨치던 50년대 말에 등단하여 이후 10년간 당시 한국 시단 풍토에서는 특이한 존재일 수 밖에 없었던 탈이데올로기적 중립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우리 현실의 부조리와 민족모순을 소재로 한 우수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중립적 세계관은 현대문명을 맹목기능자의 허구성 위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진정한 문명은 대지에 뿌리박은 전경인적 관점에서만 새로 건설할 수 있다는 자연 중심적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이같은 신동엽의 탈이데올로기적 중립적 세계관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통찰한 우수한 시들을 쓰게 한 가장 큰 힘이었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냉전시대 죄우이념에 얽매여 대부분의 문학인들이 자기가 소속해 있는 사회와 삶의 핵심적 문제들을 간과할 수 밖에 없었던 데 비해 신동엽은 민족문제의 본질을 성공적으로 작품화하는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민족 문제의 본질을 핵심적으로 구체화시킨 것이 '알맹이'사상과 '껍데기'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상들이 극명하게 작품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중립적 세계관이 지향했던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현대문명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구체적인 자기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힘과 확신을 주는데 근본이 된 탓이라고 본다.

그가 죽은 후 수십년이라는 역사적 체험을 겪은 다음에 그의 '알맹이'와 '껍데기'사상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우리의 현실을 볼 때 그의 중립적 세계관은 탈이데올로기적인 민족주의적 방향을 뚜렷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 점만으로도 그의 작업이 민족문학의 한 선구적 업적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 강은교, <신동엽 연구>, 《국어국문학논문집 9권》, 1989.

- 김창완, 《신동엽 시 연구》, 시와 시학사, 1995.

- 김준오, 《신동엽》(60년대 의미망을 위하여), 건국대학교출판부, 1997.
 



 
 

< 성곽 >

- 96 오영옥 -

우리나라 전국에는 수많은 성곽이 남아 있다. 높은 산에는 산성(山城)이 있고 야트막한 산에는 토성(土城)이 있으며 평지나 바닷가에서는 퇴락했지만 역사의 이끼가 덮인 읍성(邑城)의 성벽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성곽 유적은 우리 조상들이 삼국시대 이래 끊임없이 이어진 외적의 침입에 맞서 이 강토를 지키려 했던 호국 의지의 표상이다.

1. 성곽의 기원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성곽이 나타났는지는 분명히 밝힐 수는 없다. 문헌상에 나타난 것으로는 「사기(史記)」조선전(朝鮮傳)에 평양성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처음인데 이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에 해당된다.

남한에서는 이보다 훨씬 늦은 삼한시대에 성곽에 관한 문헌기록이 보인다. 고고학적인 성과로는 대체로 서기 2세기 이후에 남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성곽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있다.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되는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성책(城柵)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발견된 예가 있다. 그러나 철기 문화를 누리고 삼국의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서기 1세기 무렵에는 적어도 삼한이나 삼국에 성곽과 비슷한 방어 시설이 생겨났다고 보이며 백제나 신라는 그 영역의 확장에 따라 성이나 책을 신축했으며 삼한의 여러 세력들도 취락 주변에 성을 가지고 있어 성을 기초 단위로 한 성읍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인다.

2. 성곽의 발달

삼국의 성곽 시설로는 대부분 간단한 목책이었을 것으로 추축되며 본격적인 석축에 의한 성곽은 삼국이 고대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3세기 이후에 가능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목책의 시설물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토성으로 발전해 갔으며 그 다음 단계에는 많은 인력과 경비가 소요되는 석성을 쌓았다. 목책은 나무 기둥을 엮어 세워 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만든 원시적인 울타리 성이었지만 삼국시대에 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에서도 목책성이 주요 방어 시설로 활용되었다.

토성은 흙을 다져 넣어가며 쌓는 판축법(板築法)과 토성이 축조될 곳의 좌우 흙을 파내 둔덕을 쌓아올리는 삭토법(削土法)이 있는데 판축식은 주로 평야에서, 삭토식은 산등성이에서 사용되었다. 목책성이나 토성, 석성 등은 그 출현 시기가 각기 다르지만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기능에 따라 혼재(混在)해 왔으며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벽돌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정조(正祖)때 수원성 축성에서 부분적으로 채택되었을 뿐 우리나라의 성곽은 석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3. 성곽의 종류

1) 도성

도성은 왕궁이 있는 도읍지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고조선시대에 평양성의 존재가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며 삼국시대에도 도성을 쌓았다.

2) 산성

우리나라 성곽의 대표적인 형태는 산성이다. 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널리 유행하였던 형식이다. 산성은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기 때문에 적으로부터 쉽게 노출되지 않고 또 성에서 오래 항전을 계속할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을 갖추었다. 성벽은 산꼭대기로부터 골짜기에 걸쳐 고리 모양으로 돌아나가고 가장 낮은 쪽 근처에 성문과 수구를 설치하고 가장 높은 곳에 망루를 세웠다. 산성은 대체로 골짜기를 감싸고 축조되므로 성 안에 많은 병마를 주둔시킬 수 있었고 군량 창고, 병영, 장대장, 치(雉), 각루(角樓), 암문(暗門), 수구 등이 있었다. 적의 내침이 있으면 군사와 백성들까지도 일단 산서으로 피하여 굳게 성을 지키면서 장기적인 항전에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산성은 피란성(避亂城)이라고도 부른다.

3) 읍성

읍성은 지방 행정 관서가 있는 고을에 축성되며, 성 안에 관아(官衙)와 민가를 함께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읍성은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아울러 갖는 특이한 형태이다. 읍성은 평지에만 쌓는 일은 드물고 대개 배후에 산등성이를 포용하여 평지와 산기슭을 함께 감싸면서 돌아가도록 축조되었다. 이런 형식은 산성과 평지성의 절충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평산성(平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읍성의 형태는 부정형의 타원 또는 원형을 이루며 돌이나 흙으로 쌓았다. 행정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갖는 읍성은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존재이며 고려말에 처음 등장하여 조선 초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읍성은 남해, 서해안 지방과 북쪽의 변방에 주로 축조되었다.

4)장성

국경의 변바에 외적을 막기 위해서 쌓은 것이 장성(長城)인데 행성(行城) 또는 관성(關城)으로도 부른다. 장성은 이름 그대로 길이가 수십 킬로미터나 되는 큰 규모의 성으로 산과 산을 연결하여 축조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 장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것은 고려 때 쌓은 천리장성이다.

4. 시대의 성곽

1) 고구려의 성곽

고구려는 북방에서 여러 민족들과 다투면서 영토와 국력을 확장하고 고대 국가로 성장한 이후 중국의 수, 당과 세력을 겨루었으므로 일찍부터 축성술이 발달하였고 성곽전에도 뛰어났다. 초기 고구려의 성곽은 대부분 만주 지방에 남아 있는데 요동 반도로부터 요하 동쪽에 걸쳐 제1방어선을 이루고 다시 후방으로 제2,3의 방어선을 이루도록 배치하였다. 대부분의 이들 산성은 성돌을 정연히 쌓아올린 석루로서 산정부터 골짜기에 걸쳐 고리 모양으로 돌아나갔는데 이러한 형태는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산성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구려 산성은 대체로 삼면이 높은 산 또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남쪽만 완만하게 경가사가 낮아진 곳에 쌓았으며 성벽은 수직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2) 백제의 성곽

백제는 두 번이나 천도를 하면서 삼국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성을 쌓았다. 또한 토성과 목책을 많이 설치하였는데, 이는 백제의 영토가 산상보다 평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백제의 축성은 왕도를 방어하는데 주력하였는데 위레성시대에는 한강 유역에 말갈과 고구려를 방비하는 축성을 많이 했고 웅진 시대에는 공주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에 고구려와 신라를 막기 위해 성을 쌓았다. 사비 시대에는 부소산 위에 왕궁을 둘러싼 토성랦 부소산성을 쌓고 외곽으로 반달 모양의 나성을 만들었으며 정연한 도성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

3) 신라의 성곽

고대 국가로서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출발한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가 기원전 37년에 서울에 금성(金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금성이 성곽을 의미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신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던 내물왕대부터 법흥왕대까지는 주로 왜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동해 연해변과 통로에 축성이 많이 이루어졌다.

4) 통일신라의 성곽

통일신라시대에는 삼국이 정립했던 시기처럼 외적과 직접 대치하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토 개편에 따라 행정의 중심 지역과 황해도, 평안도 등 새로 국경이 된 북방 지역에서 대부분 축성이 이루어졌다. 경덕왕(敬德王) 때까지 국토의 재정비에 따라 축성도 계획적으로 추진하였다. 문무왕(文武王)때에는 왕도 중심의 방어선이 완성되고, 신문왕 때에는 지방 중심지인 소경(小京)의 성곽이 축조되었으며 효소왕(孝昭王),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북방으로의 진출과 함께 장성의 축조가 이루어졌다. 신문왕대에는 행정의 중심지역에 성을 쌓았다. 헌덕왕(憲德王) 18년에 평양 북계선이 확정되었고 그 이후에는 축성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5) 고려의 성곽

고려는 태조 이후 예종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동안 북방의 변경에 많은 성을 쌓았다. 이러한 변경의 축성은 건국 이후 고려가 추구해 온 북방 정책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고려는 북방 국경 지대에 설치한 동북계, 서북계의 양계에는 남쪽의 주, 현과는 달리 주진을 설치, 여기에 주진군을 두었다. 고려는 3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겪은 뒤 서해안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 북방의 수비를 튼튼히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석성보다 토성을 더 많이 쌓았으며 도성인 개경이나 강화에도 토성을 쌓았다. 끊임없이 외적의 침략에 시달렸으므로 석성보다는 손쉬운 토성 쪽을 택하였던 것 같다.

6) 조선의 성곽

① 조선 전기의 축성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말 왜구에 대비하기 위한 연해(沿海)읍성의 축조가 계속되었으며, 한편 북방 변경에서는 행성(行城)의 축성이 이루어졌다. 세종, 성종대에 읍성 축조가 활발하여져 이제까지 읍성이 없던 곳에 새로 성을 쌓았다. 읍성과 산성의 축성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개국 이래 왕성한 외침 대비책은 세월이 지나면서 평화 분위기가 계속됨에 따라 문약(文弱)에 흘러 성곽에는 무관심하게 되었다.

② 조선 후기의 축성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산성 수축의 불비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임진, 병자호란으로 수도를 적군에게 유린당하였던 조정에서는 도성 수비와 축성 논의가 분분하여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축성하였고 강화산성을 수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종래 우리나라 성곽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어나면서 그 개선책이 논의되었는데, 특히 실학자들은 돌보다는 벽돌로 쌓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 수원 화성을 빼고는 벽돌로 축성한 성곽은 볼 수 없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그 하나하나가 역사의 매듭이요,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이다. 유난히 외침이 잦았던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외적을 막아 국토를 지키려 했던 선인의 끈질긴 호국 의지의 산물이며, 분열되어 있던 시대에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다른 세력끼리 각축을 벌이는 과정에서 쌓고, 빼앗고, 빼앗기던 현장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 반영환, 《한국의 성곽》, 대원사, 1991.
 



 
 

< 백제의 고분 >

- 96 정현정 -

백제의 고분은 그 도성의 이동과 시대적 변천에 의하여 신라, 가야 고분보다 다양하게 변화한다. 즉 백제는 한성, 웅진, 사비로 서울을 세 번 옮겼기 때문에 세 군데에 고분 중심지가 있으며 각각 시대적 변천을 보이고 있다.

1. 前期고분

1) 고분의 입지와 분포

전기 고분은 한강 연안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 시대의 백제고분은 대체로 평지 또는 낮은 구릉의 사면에 축조되어 있다. 평지에는 적석총과 토광에 목관, 옹관 등을 안치한 봉토분이 군집하고, 구릉의 경사면에는 주로 횡혈식 석실분이 분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입지 선정은 중기, 후기의 고분이 거의 구릉의 경사면에 축조된 것과 대조를 이룬다.

2) 고분의 구조

① 분구

전기의 고분에는 적석총과 봉토분이 있는데, 적석총인 석촌동 제 3, 4호분의 분구는 크고 작은 막돌 또는 포갠 돌을 계단식으로 쌓아올려 축성한 방대형이고, 봉토분은 대체로 원형이고 가락동 1, 2호분과 같이 방형의 것도 있으며, 내부 주체 위에는 황색 진흙을 덮었으며 그 위에는 석회와 진흙을 섞은 흙을 덮고 다시 그 위에 갈색 진흙을 덮은 다음에 포갠 돌과 냇돌을 섞어 봉토 전면에 깔고 흙갈색 진흙을 덮었다.

② 내부구조

전기고분은 적석총, 토광묘, 석실묘, 옹관묘 등이 있다.

적석총은 원래 수십 기가 있던 것이 모두 파괴되고, 현재 석촌동 3, 4호 두 개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 조사 결과 그것이 기변 길이 30m, 높이 5∼6m정도의 방형의 3단으로된 계단식 적석총으로 드러났다. 적석은 우선 두툼한 장방형 판석을 지대석처럼 한 줄로 깔아 기단부 외곽으로 하고, 그 위에 크고 작은 할석을 자갈돌과 함께 쌓아 2단의 계단식 층단을 만들고 괴임돌을 돌렸다.

봉토분은 크게 토광묘와 석실묘의 둘로 나눌 수 있다. 토광묘는 땅 위에 구덩이를 파고 목관을 매장하는 가장 간단한 형식인데, 봉토의 표면 가까이에 돌이나 기와를 한 겹 깔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직장토광묘, 목관토광묘, 적석 토광묘등이 있다.

석실묘는 가락동, 중곡동, 나주읍 매룡리의 구릉에 산재해 있는데, 내부구조는 대체로 횡혈식 석실이다. 석실묘는 언덕의 남향 경사면이나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석실은 평면이 방형이고 연도가 남벽 동쪽 가까이 열린 자형과, 장방형 석실의 남벽 중앙에 열린 모字형의 두 가지가 있다. 석실이 방형의 경우는 네 벽의 윗 부분은 안으로 기울게 쌓아올리고 그 위에 한 장 또는 몇 장의 천장돌을 얹었고, 장방형의 경우는 역시 천장을 좁히며 올라가다가 천장돌 몇 장을 한 줄로 덮고 있다. 그리고 연도 입구는 석편으로 막았고 봉토를 덮었다. 그리고 봉토기선을 따라 護石(호석)을 한 줄 정도 돌리는 예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석실분은 그 구조상(방형의 분구라든가 내부구조상) 고구려 석실분을 따르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합장묘, 가족묘라는 점에서도 역시 고구려 계통이라 하겠다.

옹관묘는 합구식 옹관묘와 안팎의 판석을 이용하여 소형 석곽을 짜고 그 안에 옹관을 안치한 형식이 석곽 옹관묘가 있다.

2. 中期고분

공주시대에 내려오면서 돌무덤은 없어지고, 자형 석실묘와 장방형 석실묘가 유행하고 따로 중국계 벽돌 무덤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평지에서 구릉으로 입지가 전환되는 동시 현실의 배수구 설치가 하나의 약속처럼 된다.

1) 고분의 입지와 분포

백제 중기의 고분은 공주부근에 분포되어 있고, 이 시기의 고분은 평지묘가 없고 구릉에 모여 있는 점이 서울 지방의 평지, 구릉 혼재 방식과 다르다. 즉 전기 고분의 입지에서 보는 것처럼 평지에 축조한 고분은 거의 없고 남향한 구릉의 정상 또는 비탈에 축조하였다. 그리고 연도 및 현실의 방향이 멀리 바라보이는 남쪽 산과 직선을 이루게 축조한 점이 입지 선정의 특징이다.

2) 고분의 구조

① 분구

중기시대의 분형은 원형으로서 초기 고분에서 보이는 방형은 없다. 봉구의 크기는 오랜 세월이 경과하는 사이에 봉토가 유실되어 완전한 상태는 찾아보기 어려우나 대체로 약 35∼36m, 높이 10m 안팎이다. 무녕왕릉의 예를 보면 동서 19m, 남북21m, 높이는 현실 바닥에서 분구의 정상까지 7.5m이며 분구의 유실을 막기 위하여 봉토에는 석회를 섞은 사질토을 사용하였고, 분구의 동쪽 기저부에는 호석을 둘렀다. 이렇게 분구 축조에 석회를 사용한 예는 고구려 고분에서도 볼 수 있고, 초기 고분인 가락동 제 2호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내부구조

중기 고분의 내부 구조에는 수혈식 석곽, 횡혈식 석실등과 전축분, 옹관묘 등이 있다.

수혈식 석곽은 일반적으로 평면이 장방형이고 네 벽을 포갠 돌로 수직으로 쌓아올렸으며 천장에는 크고 작은 판석을 가로로 덮은 형식이다.

횡혈식 석실은 연도와 현실로 이루어진 것으로, 공주 지방에는 길이 3m정도이고 남벽에 짧은 연도가 달린 장방형 석실분이 군재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울 지구의 장방형 석실에서 발전한 공주형 석실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다시 부여를 거쳐 전라도 지방까지 퍼진 순수 백제식 석실분 형식이라고 하겠다.

횡혈식 석실은 천장 또는 석실의 구조에 의하여 다음 다섯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1) 네 벽을 포갠 돌로 1m 가량 쌓아올린 후 그 위로부터는 맞조인 궁륭형 천장을 이룬 것, 2) 네 벽을 막돌로 쌓고 그 위에 몇 장을 덮은 상자형, 3) 네 벽을 몇 장의 판석을 세워서 만들고 긴 벽의 위에 2단쯤 돌을 내밀어 천장받침으로 하고 그 위에 천장돌을 덮은 것, 4) 몇 장의 판석을 세워서 벽을 만들고 천장은 판석을 人자로 맞대어 만들 것, 5) 납짝돌로 네 벽을 쌓되 긴 벽의 위를 안으로 기울게 하고 맨 위에 돌을 이어서 덮은 터널형이 있다.

전축분은 중국에서는 한대 이래로 성행하여 육조시대에도 계속되었고, 남경 부근에는 남조시대의 전축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공주시대의 백제는 남조와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그들의 전축분을 받아들였으며, 현재는 송산리 6호분과 무녕왕릉의 두 기만이 남아 있으나, 원래는 공주시대에 여러개의 전축분이 건설되었던 듯 싶다.

<송산리6호분>

6호분은 공주 유일의 벽화고분이기도 하며 길이 4m, 너비 2.5m의 남북으로 긴 터널형 묘실로서 긴 배수구가 연도를 통해 밖으로 뻗고 있다. 벽은 벽돌을 길이모쌓기, 작은모쌓기를 번갈아 쓰며 쌓되 무령왕릉의 四平一竪와는 달리 四, 八, 九平一竪등으로 가지각색이다. 한편, 6호분의 긴 동, 서 두 벽에는 각 3개씩, 짧은 북벽에는 1개의 불꽃 모양 등감이 만들어졌고 또 그림 부분만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사신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터널형 벽돌무덤은 남제(478∼501), 양(502∼556)등 육조전축의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나 벽화만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무녕왕릉>

1971년 7월 스며드는 습기를 막기 위해 그 뒤쪽에서 배수구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또 하나의 전축분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곧 유명한 무녕왕릉이다. 왕릉은 남면한 산의 경사면을 폴 3.8m로 파고 들어가 터널형 전분을 만든 다음 봉토를 덮은 것으로 그 기부에는 약간의 호석을 돌렸다. 크기는 현실이 남북 4.2m,동서 2.72m, 높이 2.93m이고 그 앞에 2.9×1.04×1.45m(높이)의 연도가 달리고, 연도의 끝에 있는 아아치문을 벽돌과 석회로 단단히 막고 있었다. 또한 긴 배수구가 그 앞 두 무덤 사이를 지나 경사면까지 뻗고 있다. 현실과 연도의 바닥은 같은 높이지만, 연도에서 현실로 들어서는 부분이 한단 낮아져서 신발 벗는 자리처럼 되고 또 그 안쪽 공간을 관실처럼 한 단 높여 주는 효과도 내고 있었다. 무령왕릉에 쓰인 벽돌은 6호분과는 달리 연꽃무늬로 장식되었으며, 쌓는 방법은 벽면은 四平一竪, 천장 곡면부는 三平一竪로 통일되어있다.

한편, 벽에는 동서 양벽에 각 두 개 북벽에 한 개의 양파 모양등감이 만들어져 있고 그 밑에는 무늬 없는 벽돌을 여러 장 세워서 영자창을 모방하고 있다.

3. 後期고분

1) 고분의 입지와 분포

백제후기 고분의 입지는 대체로 공주부근과 동일하게 구릉 위 또는 구릉사면을 선정하고 있다. 부여를 중심으로 근교지역에 정벽산성, 성흥산성하의 구릉 위에 군집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부여읍의 능산리고분군은 유명하다. 한편 청마산성내로부터 서남의 구릉 위에도 고분군이 있다.

2) 고분의 구조

분구

분형은 그 외형이 확인되는 것은 모두 원형의 봉토분이고 대부분의 분구는 오랜 세월을 경과하는 사이에 유실되어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가 곤란하다. 분구의 경은 대체로 22∼28m였을 것으로 보인다.

② 내부구조

후기고분에는 토광묘, 수혈식 석곽분, 횡혈식석실분, 옹관묘, 화장분등이 있는데 대체로 공주부근의 고분을 계승 발달시켰고 공주시대의 전축분은 조영되지 않는다.

토광묘는 지표 아래 평면이 장방형인 토광을 파고 시체를 아무런 시설없이 안치한 직장 토광묘이고, 수혈식 석곽도 이전의 그것과 같은 형식이다.

횡혈식 석실은 축조 재질, 벽면의 구성, 천장의 형태, 연도의 위치 등 구조 형식의 특징에 의거하여 1) 현실의 평면이 장방형이고 포갠 돌, 막돌 등으로 벽면을 구축하였는데 네 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안쪽을 기울어졌으며 천장에 큰 판석을 덮고 있는 것 2) 현실의 평면이 장방형이고 벽면은 큰 판석으로 구축하였고 천장의 형태는 천장 중앙부가 양쪽 끝이 경사진 것, 편평한 것, 반원통을 이룬 것등이 있는 것 3) 하나의 분구 안에 2개의 가늘고 긴 횡혈식 석실이 나란히 있는 특수한 구조 형식의 것(나주 흥덕리 석실분)등이 있다.

<능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 왕릉 6기는 장방형의 상자형 션실에 짧은 연도가 남쪽 벽 중앙에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기본적으로는 서울에서 공주로 퍼져내려운 장방형 석실이지만, 연도부는 끝이 벌어지는 고구려식인 것이 주목된다. 또 둥근 봉토에 호석을 돌린 예도 있다.

능산리 1호분은 벽화가 있어 유명하며, 크기는 2.75×1.12×1.55m(높이)이다. 네 벽과 천장은 작 물갈이한 편마암판으로 되어 있고 네모난 돌을 깐 바닥 중앙에는 한 사람용 관대가 만들어져 있다. 벽화는 돌 표면에 직접 사신도를 그린 점에서는 고구려의 강서무덤, 집안 사신총 등과 같으나 색채가 보다 부드럽고 사신들도 현실감이 나도록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나는 구름, 연꽃무늬 등이 그려졌으며, 그 연꽃이 고령의 고분벽화의 그것과 닮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또한 화장묘가 부여지방에서만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불교의 전래로 유행하게 된 새로운 장법으로 보통 화장을 한 후 뼈만 추려서 토기에 넣어 지하에 매장하는 방법이다.

한편, 영암군, 나주군 등 영산강 하류 유역은 옹관묘가 군집해서 발견되고 있다. 옹관은 고신라 지역에서도 죽은 사람의 신분이나 연령에 따라 석곽묘에 부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영산강 하류 지역에서는 독립된 묘제로 집중되어 있어 옹관 특수 지대라고 하겠다. 이 역사시대 독널을 이 지역의 어떠한 특수 이유에 의한 전총 묘제라고 생각되며 경상도 지역에서처럼 일상 쓰는 독이나 항아리를 대용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관으로 만들어지고, 그것도 길이 1.3m, 지름 90cm, 두께 5cm나 되는 거대한 것이고, 금동관을 쓰고 칼을 찬 지방 호족이 묻혀 있다는 데 특색이 있다.

옹관들은 같은 봉토 안에 여러개가 묻혀 있으며 신촌리 6호분, 덕산리 2호분은 봉토가 일본의 전방후원분식으로 뒤가 둥글고 앞이 펀펀한 대지처럼 되어있되, 옹관은 후원부가 아니라 전방부에 묻혀 있다. 또한 덕산리 3호분은 봉토 주위에 도랑을 파돌린 흔적이 있어 일본 고분과의 유하성도 지적되고 있다.

【참고문헌】

- 김원룡, <삼국시대 묘제 및 부장품>, 《한국고고학 개설》(제3판), 일지사, 1986.

- 김원룡, <백제의 고분>, 《한국의 고분》, 교양국사총서2, 1985.

- 윤무병외, 《한국사대계》(상고), 삼진사, 1975.

- 김기웅, <고분>, 《빛깔있는 책들》, 대원사, 1991.
 
 



 
 

답사자료집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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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서산 지역 개관 : 최희정, 손덕호, 이정원, 이동희, 이성미, 김미란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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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하혜경 - 96

부여 지역 개관 : 박인수, 김명재, 김미월, 유정민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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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고분 : 정현정 - 96

신동엽 : 이주영 - 96 

편집에 참여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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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 정경문 편집인 : 김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