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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문화
Ⅰ.서 론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늦어도 지금으로부터 200만년 전인 홍적세 초로 추정되고 있다. 이 홍적세는 기후 변동이 심하여 빙하 기와 간빙기가 되풀이되었고 그에 따라 해수면의 변동과 동식물의 분포 변동이 빈번한 시기였다. 그러다가 약 1만년 전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기후의 극한 변동은 대체로 종식되었다. 그리고 기온이 올라감에 따라 양극 지방의 두꺼운 얼음이 서서히 녹 으면서 기후는 보다 온난다습 해졌다. 신석기 시대라 하면 후빙기의 새로운 자연 환경속에서 농경 목축에 의한 식량생산 경제를 배경으로 전개된 문화로 인류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구석기 시대의 수렵채집 경제활동에서 벗어나 농경?목축을 기반으로 한 정착생활을 하며 토기와 마제석기를 사용해 새로운 문화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 시기의 농경의 시작은 인류문화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쳐 사회질서의 개편을 가져오고 새로운 문화가 진행되어 농경을 하나의 혁명적인 사건으로 보고 이 시기를 신석기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토기?간석기와 함께 신석기 문화의 3대 요소를 다 가지고 있지도 않고, 각지의 신석기 문화 시기와도 다르고 범세계적으로 통용되지는 않는다. 토기?간석기 등의 요소로 문화가 번성한 지역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신석 기 시대가 이 범주에 속한다.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는 충적세의 가장 오래된 토기의 출현에서부터 청동기 사용 이전까지, 주로 채집?고기잡이?사냥에 의한 식량공급을 배경으로 전개된 토기문화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다음글에서는 신석기 문화의 시기구분, 각종 유물, 유적지,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본 론

1.자연환경

당시의 기후는 후빙기라고하는 범세계적인 기후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200만∼300만년이란 오랜기간에 걸 쳐서 계속된 빙하시대가 지금부터 약 1만년 전후로 물러가자, 지구상에 후빙기가 도래한다. 충적세가 시작되면서 대륙북쪽을덮 고 있던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녹아내림에 따라 바다로 흘러들어, 전세계적으로 해수면이 점차 올라가게되었다. 이에 따라 100m전 후 깊이인 황해나 대한 해협도 이때에 형성되고 지금같은 반도의 모습을 갖게 되엇다. 이로 인해 서해안에서는 8000년저ㅓ에 7.3 m,4 000년전에1.7m정도로 낮아져서 후빙기초에는 얕은바다가 육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지형조사에서 6000∼3000년전 사이 에 현재보다 2∼3m높은 곳에서 모래톱이 발견되엇고, 동해안에서도 3∼7m노ㅠ이의 해안단구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기온 이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사이에 나타난 것이다.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견된 육지동물의 종류를 보면 사슴노루멧돼지 물개 개 말 소 같은 종류의 것이 있다. 어패류는 남아 있는 상태가 양호해서 이 연구로 바다의 온도, 계절 등의 해석이 가능함으로 더욱 비 중을 두어야겠다. 추운 기후로 나무가 자라지 않아 초원을형성하엿던 지역이 기온이 높아짐에 따라 온난대 식물이 자라 숲이 우 거지 게 되엇다. 미사리등 신석기 유적에서 참나무 소나무 가문비나무 느티나무 종류를 단편적이나마 알 수 있다. 식물상에 관한 자료 로는 꽃가루의 분석이 필요하다.

2. 사 회
1) 농 경
인류가 수백만년이나 되는 오랜세월에 걸친 사냥 채집경제단계의 생활에서 급격한 발전을 이룩한 계기는 농경을 하면서부터다. 농경은 사람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사회진보의 한 과정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농경의시작에는 기후조건의 변화라는 요인이고려되어야한다. 기후가 온화해지면서 생활조건이 좋아지자 인구 도 증가햇다.인구증가와 식량부족에 따른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출현한 것이 농경이었고 생활조건을 자연에만 의존하지 않 고 스스로 생산해 내기 시작한 것은 자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엿다. 지탑리에서 조나 피로 보이는 탄화된 곡물 이 돌보습 돌낫 갈돌과 함께 출토되면서 농경의 존재가 인정되었다. 영산강 유역의 꽃가루분석에 의해 약 3500년전부터 벼가 이 지 역에서 재배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서해안 우도에서는 신석기 말기로 추정되는 빗살무늬토기의 바닥에서 볍씨지국이 발견되었 다. 농경이 진행되면서 경작도구도 다양해지고 형태도 개선되엇는데 돌삽 보습 괭이 등이 주로 이용되엇다. 그리고 수확한이삭을 갈 돌에 갈아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내어 먹게 되엇다. 이때 경작된 곡물은 조 피 같은 잡곡류엿다. 또한 짐승을 길러 잡아 먹는 목축도 행해ㅈ다. 농경의 발달과 함께 안정된 정착생활이 가능해지고 이에 따라 취락이 대형화하였으며, 사회생활도 분업화 되는 등 신석기 사회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2) 사냥 고기잡이 식물채집

짐승은 인간의 식량자원으로서 커다란 이용가치가 있으며 뼈 뿔 이ㅃ빨 등은 개인의 일상생활에ㅐ 필요한 연모의 재료로 이용되었다. 사냥은 중요한 식량획듣 수단이었는데 구석기 시대의 근거리 사냥에 비하여 활과 화살을 이용하여 먼 거리에서 날짐승을 사냥할 수 있게 되었다. 유적지에서 돌화살촉이 발견되엇고 전지역에 걸쳐 성행되었고 사슴 멧돼지의 뼈가 가 장 많이 발견되어 즐겨먹던 육류로 짐작된다. 뭍짐승외에도 날짐승도 중요한 사냥물이 되엇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 나라 는 해안이 잘 발달되어 어종이 풍부했고조개류해초류도 많아ㅓ는데 이런 환경에서 고기잡이 기술이 개발되어 작살 사용 낚 시질 그물치기 등의 방법을 사용하엿다. 수십종의 어종이 확인되었고 식량자원확보에 큰공헌을 한 것 같다. 초기에 낚시질이 성 행하다 가 중기 후기에는 그물치기를 이용한 공동자업으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식물자원이 풍부해서 신석기 시대에 는 쉽게 식량을 얻을수 있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상록활엽수림과 낙엽활엽수림으로 덮여 있었고 야생식물인 도토리가 많 이 출토 되고 있어 주식으로 여기며 좋은 식량자원으로 생각하고 갈돌과 갈판의 출현도 도토리ㅏ를 가공하기 위한 연모로 사용되 엇다.

3. 주거생활

강가나 해안가에서 신석기 시대의 집자리와 조개더미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신석기시대주민들은 식량자 원이 풍부한 큰강ㅇ나 바닷가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생각한다. 신석기시대의 집은 동굴을 이용하거나 바닥에돌을 깔고 ㅁ난든것도 있으나 보편적인 형태는 움집으로 해안가 언덕이나 큰강가의대지위에 지엇다. 움집은 지르ㅜ이 4∼6m되는 원형이나 네모꼴의 구 덩이를 50∼60cm정도파서 바닥을 만들고, 바닥에 화덕등 필요한 내부시설을 한 뒤 지붕을 덮은 것으로 별도의 벽체시설이 없이 서까래가 바로 땅에 닿은 집이다. 바닥에는 진흙을 깔거나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풀이나 짐승가죽을 깔고 생활 하였을것으로 추정되며 지붕은 움구덩이 주위에 서까래를 걸치고 서까래의 다른 한쪽끝이 중앙에 무이게하여 뼈대를 형성한후 나 뭇가지나 갈대 등의 풀을 덮어 만들어 원추형이나 사각추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계단이나 경사면을 만들어 출입 구 시설을 하기도 하고 밑이 잘린 토기를 거꾸로묻어 만든 저장시설도 있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집내부를 적절히 사용하여 다목 적으로 이용했다. 보통18㎡크기의 집을 짓고 평균 4∼5명으로 구성된 가족을 단위로하는 핵가족사회인 것으로 짐작된다.

4. 토기와 석기

1) 토 기

신석기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토기의 출현으로 대표적으로덧무늬토기와 빗살무늬토기가있다. 덧무늬토기 는 토기표면에 진흙으로만든 띠를 붙여서 무늬를 만든 것으로 뾰족밑 또는 둥근 밑의 빗살무늬토기와는 달리 납작밑인것니 특징 이며 부산동삼동 통영 사노대도 등에서 빗살무늬 토기층보다 아래층에서 출토되엇다. 이 토기는 주로 해안가를 따라 분포하는데 김해 부산 충무 연대도 여수 돌산도 등 남해안과 북쪽으로는 양양 오산리 서쪽으로는 흑산도까지 분포하고 있다. 이가리 무늬 토 기는 강원도 양양 오산리에서 덧무늬토기와 함께 나오는 납작밑의 토기로 그릇의 아가리 아래 부분에 갈대 같은 가는 사문구로 누르거나 찔러서 나타나는 점열로 평행띠무늬 물결무늬 지그재그 무늬 등을 사문하였는데 무늬중에는 덧무늬 토기와 같은 것이 있다. 빗살무늬 토기는 한국 신석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신석기문화를 빗살무늬 토기문화라고 하기도 한다. 빗살무늬 토기는 밑이 뾰족한 발형과 납작한 항아리나 화분형을 하고 있고, 그릇표면은 빗모양의 무늬새기개로 누르거나 그어서 각종 기히 학작 무늬를 민들었다/. 이 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토기의 형태 무늬에따라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어 4개의 지역군으로 나뉜다. 중서부 지방은 뾰족바닥을 기본으로 하면서 무늬는 초기에 바닥, 몸통, 아가리에 각기 다르게 새기다가 차츰 같은 무늬로 새기며 나중에는 바닥, 몸통의 순서로 무늬가 생략되어 청동기시대의 무늬없는 토기로 변하여 간다. 남부지방 토기 는 바닥이 뾰족하지만 약간 둥근편이고 처음에는 아가리 부분에만 무늬를 넣다가 전면에 무늬를 새기게 되나 차츰 중서부 지방 과 마찬가지로 무늬없는 토기로 넘어 간다. 동북지방의 토기는 중기이후의 것으로 태토에 석립이나 패각이 혼합되어 있고,, 토기 의 형태는 대부분 바닥이 납작하고 깊은 바리 모양이다. 함북웅기 서포항 유적의 층위 조사에 의하면 이른 시기에는 짧은 선이나 점이 몸통 윗부분이나 아갈 둘레에 새겨져 있고 중기이후에는 점선 무늬와 타래무늬가 등장하여 후기에는 번개무늬 붉은 칠토기 와 함께 무늬없는 토기의 비중이 크게 증가한다. 서북지방의 토기는 조사된 유적의 수가 적을뿐아니라 조사된 것의 대개가 후기 에 해당하여 전기의 야상을 잘 알수가 없다.

2) 석 기

갈아서 만든 마제 석기의 출현은 토기와 함께 신석기 ㅁ문화의 표식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초기 부터마체법이 알려져 있었지만 타제의 전통도 계소ㅓ되어 마제법은 신석기 중후기가 되어야 보편화 된다. 석기의 종류로는 사냥 도구인 화살촉, 창 고기잡는데 쓰이는 이음 낚시바늘 그물추 작살 ㅉ직개살과 공구인 돌도끼송곳 바늘 숫돌 토기 무늬새기게, 그 ㅡ리고 농구인 돌괘이 반달칼 곡물을가는데에 사용하였을 갈돌과 갈판등이 있는데 생업인 고기잡이와 사냥에 관련된 도구가 큰 비 중을차지 한다.

3) 골 각 기

조개더미에서 약간의 골각기가 출토되는데 바늘 찍개살 송곳 토기무늬새기개 작살 돼지이빨로 만든 낫 등 이 있다.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한 사람 얼굴 모양의 조가비는 사람 모양의 토우 생식기형 석물과 한ㅁ께 원시종교 또는 신앙을 상정하게 되며 웅기 서포항에서 출토된 각종 골각기는 당시 사람들의 미의식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5. 의식행위와 예술

신석기 시대에는 의식주 해결과 함께 초자연적인 존재오하의 관계에서 의식행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황해도 서포항 지역의 유적지에서 여자의 모습을 닮은 조각상이 발견되었는데 얼굴은 세 개의 점으로 단순화 시키고 있다. 몸체 의 중앙부분에 중심점과 그것을 둘러싼 7개의 점이 둥근 꼴을 이루고 있다. 이런 표현은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당시는 여자 중심으로 운영되는 모계사회였기 때문에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풍요로운 생활과 종족유지와 번창을 비는 ㄸ뜻이 담겨있는거 같 다. 신석기인들의 조갇에는 자연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담겨져 있다. 이들의 자연의 섭리에 대한 이해는 자연 현상이나 산 하 천 같은 자연물에ㅐ도 혼령이 있다는 애니미즘 단계에머물렀다. 태양과 물에 대한 숭배가 으뜸이었고 빗살무늬토기에 번개무늬나 나 선무늬가 새겨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고 짐작된다. 또한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고하여 영호ㅓ과 조상을 숭배 하게 되었고 사람과 영혼을 연결ㅎ두는 존재의 무당과 주술의 힘을 믿는 샤모니즘이 있었다. 그리고 씨족의 기언을 특정동물과 연관시 키는 토테미즘이 있어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생존을 우한믿음 섹몌를 가지고 있던 것 같다.

6. 주 요 유 적

1) 궁 산 리

평남 온천군 해운면 운하리에 있는 신석기 시대의조개더미 유적으로 1950년도에 발국조사되었다. 이 유적 에서 발견된 집자리 5기와 3개의 구덩이에서는 빗살무늬토기와 골각기 석기가출토되었다. 궁산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는 점토질 바닥흙에 활석과 서면을 섞은 것과 모래와 운모를 섞은 것이 있으며 바닥은 대개가 둥근바닥을 하였으나 납작바닥 도 간혹 출토되고 있다. 무늬로는 아가리에는 점열문 조문 중호문 어골문이 몸통에는 종주어골문 더블유문 찰과문이 새겨져 있 다 . 한편 궁산리에서는 괭이 굴봉 뒤지개 낫 등 농경에 관계되는 유물이 신석기시대의 다른 유적에 비해 다량으로 출토되어 있 어 원시농경이 본궤도에 이른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물고뼈도 출토되고 있어 농경에 적합한 기후 였음을 시사하여 준다. 그러나 유 적이 해안가에 위차하고 있고, 그물추가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궁산리의 주된 생업경제는 어로 였을 것으로생각된다. 이외 에도 다량의 방추차와 실이 끼어 있는 상태의비늘이출토되어 잇어 직조기술을 였볼수 있다.

2) 양양 오산리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 위치한 한반도 최고의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동해안에서 내륙으로 200m떨어 진 쌍호라고 불리는 자연 호숫가의 사구위에 형성되어있다. 1980년부터 6차례에 걸쳐 서울대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어 6개의 자연 층위가 확인되엇는데 청동기 시대 유물이 출토된 Ⅰ층을 제외하고 모두 신석기시대 문화층이다. 오산리 신석기시대 문화층에서 뾰족바닥의 빗살무늬토기 납작밑 토기 유무문토기 덧무늬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뽀족바닥 빗살무늬토기와납작밑의 아가리무늬토기 사이의 선후관계를 밝혀주었다. 석기로는 결합식 낚시바늘 톱 사각형 돌칼 흑요석기 등이 출토되엇다. 특히 이들 토기 중에는 어업관게토기들이 다수 출토되고 있어 어업이 생활에 큰비중을 차지하고있음이 밝혀졌다. 연대는 최하층에서 출토한 목탄시료에 대한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연대측정한 결과 기원전 6000∼5000년전으로 추정되고 있어 한반도 신석기 문화를 기원전 6000 년경까지 소급 가능케 되었다.

3) 부산 동삼동

부산시 영동구 동삼동에 있는 조개더미 유적은 사적 제 266호로 지정되었다. 동삼동 유적은 1969∼71년에 걸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워졌다. 남해안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이 유적은 3가지 문회층으로 구분되는 데 아래층에서는 원시무문토기와 덧무늬토기가, 중간층에서는 뾰족바닥의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가, 위층에서는 아가리 부분에만 무늬가 있는 빗살무늬토기와 아가리 부분을 접어 붙인 겹아가리토기가 출토되었다. 석기와 골기로는 혈암으로 만든 납작한 도끼 와 조개로 만든 팔지, 뼈를 강아 만든 결합식 낚시바늘과 흑요석재 긁개와 격지가 아래층에서 출토되었고, 중간층에서는 사람 모 양의 토우, 생식기형 석물, 조가비에 구멍을 뚫어 눈과 입을 나타낸 얼굴 등이 있다. 동삼동 유적은 신석기시대 전 기간에 걸 쳐 형성되어 남해안 신석기 문화를 편년하는데 있어 표준이 되는 유적이다.

4) 서울 암사동
사적 267호로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있는 선사거주지로 1925년 대홍수때 발견된 이후 여러차례조사 발굴 도엇다. 세 개의 문화층에서 25개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는데 최하층은 전형적인 빗살무늬 토기 문화층으로서 선사거주지의 대부분 이 이 층에서 발견되엇다. 집자리는 평면형태가 원형에 가까운 모서리가 둥근 네모난 움집으로 내부에서 동을 돌려 만든 화덕이 있다. 토기는 태토에 활석 석면이 섞여있고 무늬는 다양하다. 석기는 주로 강가의 자갈을 이용하여 만든도끼 화살촉 그물추 갈 돌 등이고 자연유물로는 탄화된 도토리와 새뼈가ㅣ 있다.

7. 시기구분 및 성격

서기전 5000년경부터약 1500년동안의 전기 신석기 문화는 서해안지역에서는 전형적 빗살무늬토기Ⅰ류가 주 류를 이루는 유적물 동해안 지역에서는 구연ㄴ부에만 무늬를 새긴 평저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오산리 하츠와 함북 서포항 Ⅰ,그 리 고 남해안 지역에서는 융기문 토기ㅏ와원시무문토기의 조도기로 대표된다. 전기에는 주로 어로생활에 전념하면서 수렵이나 채 집 활동을 병행하였던 어로 수렵 사회적 성격을 가진다. 신석기 시대 중기는 서해안지역의 경우 전형적 빗살무늬토기에 변화가 생겼 고 동해안에서는 어골문이 성행되는 시기이다. 서기전3500년경에서 2000년경ㄲ 약1500년 동안이다. 전기와 마찬가지로 수혈 거주 지에서 생활하였으며 생활도궁나 생활경제에 있어서 전기와 큰차이가 없고 아직 농경이전 단계의 어로 수렵에 의존한 사횡 해당 된다. 후기에 서해안지역의 경우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와 퇴화되어 구연부에만 시문하게 되며, 동해 남해안지역에서도 퇴 화 변 형되는 시기이다. 서기전 2000년에서 1000년까지의 대략 1000년간인데 이 시기에들어가면서서해안지역에서 생업경제상 중 대한 변 화가 일어난다. 지탑리유적에서 피 또는 조 등의 재배곡물이 석제농경구와 함께 발견되고, 궁산리에서는 돌가래 뿔갈이 빨로 만든 낫과 같은 농경구가 발견됨으로써 한정된 지역에서나마 후기에들어서면 초보적 단계의 전작 농경이 시작됨을 알려주고 있는 것 이다.

Ⅲ. 결 론

이상 신석기시대의 전반적 개관을 살펴봤다. 인류문명의 발전단계의 하나이자 석기시대의 새로운 부분으로 서 신석기시대는 홍적세에서 충적세로 전환 타제석기에서 마제석기로의 전환 그리고 수렵, 어로 채집에서 가축사용 농경으로의 전환을 그 특징으로한다. 채집경제 단계에서 생산경제 단계로 변해가면서 산업혁명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획기적인 발전 을 이루었고 그런 발전은 계급의 성립 도시와 국가의 탄생을 촉진 시켰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문화유적은 150군데가 넘으며 전국 적으로분포되어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신석기시대 자료를 볼때 자연환경은 지금과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따뜻햇고 바닷물의 높 이 도 더 높을 때도 있었다. 움집을 짓고 살며조개더미를 형성하기도 했으며 잡곡농사를 지엇고 어로와 사냥을 생활수단으로 이 용했 다. ㅠB.C1000년경부터 청동기가 들어오면서 새문화의 확산이 가속되었고 B.C500년경이 되면 지석묘, 청동기가 전국을 완전 히 덮 게되어 일부지역을 제외히고는 신석기 문화는 완전히 소멸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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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