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주차 [발제 1][발제 2]


新石器時代의 社會와 文化

김민주
김미성
김수영
김현철

Ⅰ. 자연환경과 문화의 성립

우리나라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문화가 성립하는 것은 후빙기의 기후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의 마지막 빙기인 뷔름(Wurm) 빙기가 끝나고, 지구상의 기후는 현재와 같은 자연환경으로 변하였다. 그로 인해 과거 구석기시대의 대형동물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서서히 전멸해 가는 대신 플랑크톤의 대량 서식으로 해산물이 풍부해졌다. 이 때부터 인간에 의해 해안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개더미가 만들어졌다. 해안가에서 눈에 띠는 조개더미는 해안선의 변화와 당시의 주변환경이 현재와 어떻게 다른지를 가늠하게 해 주었다.
또한, 지형과 해안선도 신석기에 들어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산맥, 강이 형성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이루었는데, 특히 우리나라의 내륙지방에는 무수한 산맥이 분포되어 있어 단절된 지역상이 나타나기도 하나, 반면 큰 강과 해안선을 따라 통합의 양상이 나타나 안정된 생활기반을 바탕으로 문화의 전파와 확산이 이루어졌다. 산맥과 강에 의한 단절과 통합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자연환경은 신석기시대의 문화형성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해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문화가 서로 다른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여러 개의 소문화영역으로 구분되는 기본적인 배경이 되었다.

Ⅱ.유적분포와 문화영역 구분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주거지, 무덤, 조개더미 등과 이러한 확실한 유구(遺構)외에도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포함층유적(包含層遺蹟)을 들 수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유적은 대부분 해안이나 강가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석기문화의 특징은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와 빗살무늬토기(櫛目文土器)로 대표된다. 이것은 유적발굴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80% 이상이 토기이며, 여기엔 주민집단의 전통성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어 문화의 지역상을 밝히는 데 가장 적합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융기문토기는 토기의 겉면에 진흙띠를 말아붙이거나 손끝으로 토기 표면을 눌러 돋움으로써 돋을띠를 만들어 여러 형태의 무늬를 베푼 토기로 남부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토기의 겉면에 빗 같은 시문구로 찍거나 그어서 만든 점 선 원 등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합하여 각종 무늬를 베푼 토기이다. 이 토기는 북쪽에서 내려와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신석기시대 말기까지 계속 제작. 사용된 토기로 지역이나 시기차에 따라 그릇의 모양이 다르기도 하고 무늬를 베푼 공간과 내용에 차이가 있어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지역구분이나 편년을 하는 데 절대적인 자료가 된다.
빗살무늬토기는 그릇의 형태에 따라 함경도와 평안북도지방에서는 납작밑의 토기가, 중.서부.남부지방에서는 둥근밑의 토기가 출토되어 크게 두 지역군으로 구분된다. 또한 둥근밑의 빗살무늬토기는 중서부지방과 남부지방의 토기로 구분된다. 이러한 결과로 미루어 신석기시대 문화영역은 동북.서북.중.서부.남부지방의 네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서로 계통을 달리하는 문화의 주민들이 각 지역에 정착해서 살았음을 말해준다.

Ⅲ.유적(遺蹟)과 유물(遺物)

1.유적(遺蹟)
유적은 160여 군데에 이르고 있으나 이중 발굴조사를 거쳐 유적의 성격이 확실히 밝혀진 곳은 50군데도 채 안된다. 이것은 각종 긴급발굴조사로 인해 순수한 학문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술발굴(學術發掘)이 부진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기인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근래에 남해안 도서지방의 조개더미유적들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인골이 남아 있는 무덤이 조사되고 조개더미를 남긴 사람들의 주거지가 조사된 점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①주거지(住居址)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는 대부분이 움집으로, 여러 모양(평면 원형.타원형.방형.장방형)의 구덩이를 판 후 그 중앙부에 돌 또는 진흙으로 테를 둘러 화덕을 만들고 그 주변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은 형태이다. 움집터의 조사결과로 볼 때, 신석기시대인들은 주거지 어깨선까지 서까래를 내려박아 덮은 원추형집을 만들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한편에 출입구 시설을 두어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움집외에도 바닥에 돌을 편 부석주거지와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과 바위그늘을 생활공간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유적이 강이나 바닷가에 면해 있어 당시 사람들이 농경 외에 어로나 해산물재취 등에 크게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부석주거지는 당시 지표면에 돌을 깔아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원추형의 지붕을 덮어만든 것으로. 평양 청호리. 강화 삼거리. 등에서 조사되었는데. 대부분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있어 그 확실한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②무덤
신석기시대의 무덤으로는 1988년 전까지만 해도 웅진 시도, 부산 동삼동과 금곡동의 조개더미유적 그리고 해미 휴암리의 산위 포함층유적에서 적석유구(積石遺構)와 울진 후포리에서 조사된 세골장유구가 그 대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들 유구에서는 선사시대 시대편년의 가장 중요한 자료인 토기가 출토되지 않아 그 시대가 불분명한 실정이었다.
그런 가운데 통영 연대도조개더미에서 시기가 확실한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무덤은 피장자의 머리가 서쪽으로 틀어져 눈이 동쪽의 바다 쪽을 향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장례의식의 한 양식으로 밝혀졌고, 또 두개골과 다리뼈 일부가 포개진 채로 검출되었다는데, 이것은 무릎을 구부려 가슴을 붙여 태아형으로 묻은 굽혀묻기로 밝혀졌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의 무덤은 시신 위에 적석(積石)을 한 모습이 전형적으로 보이나 연대도유적에서와 같이 조개더미의 단애부에 노출된 무덤유구의 흔적으로 볼 때 시신의 주변에만 돌로 장방형의 테를 둘러 만든 무덤의 조사가능성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후포리를 제외하면 모두 조개더미에서 조사된 것으로 조사범위가 내륙지방으로 확대되면 신석기 시대의 무덤의 양상은 보다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③조개더미
조개더미는 주변에서 이 조개더미를 남긴 사람들의 집자리와 매장유규가 대규모로 조사되기도 하여 조개더미 안에서 검출된 다양한 내용물과 함께 선사시대의 문화와 자연환경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적이 된다.
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강물과 바다물이 만나는 지역에 생기는 풍부한 플랑크톤의 서식으로 조개류가 번창하였다. 얕은 해안지역이면 어디서나 조개더미가 분포되어 있는데, 특히 간만의 차이가 심한 남해안과 서해안은 적합한 환경으로 동해안지역보다 더 많은 분포가 밀집되어 있다.
조개더미 유적으로는 서포항, 연대도 욕지도, 상노대도, 송도, 시도, 궁산리 등이 유명하며, 신석기시대의 조개더미는 대부분 함수성조개로 구성된다. 이밖에 담수성도 있고, 양쪽이 섞여 있는 것도 있는데 이처럼 인자가 다양한 것은 해안선의 변화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함수성조개와 육산달팽이류의 퇴적상황과 조개껍질에 나타나는 성장선을 분석하여 조개류의 퇴적시기를 구체적으로 확인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이동거주를 추적하기도 한다. 조개더미의 규모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인간집단의 규모와 살았던 기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분포면적, 총체적 등을 구해 당시 거주했던 인간의 규모와 기간을 파악할 수 있다. (발제: 김 수영)

2.유물(遺物)
①토기(土器)
*중.서부지방
토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중.서부지방의 빗살무늬토기는 아가리가 곧추 끝난 반란형(半卵形)의 토기로 그 겉면에 점.선.원 등의 기하학적인 요소를 배합하여 만든 무늬가 나타나는 토기를 말한다. 이 토기는 모래흙 또는 진흙에 점력(粘力)을 높이고 수축률을 줄여 토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돌가루.운모.석면.활석 등을 섞은 바탕흙으로 빚었다. 한데가마(露天窯)에서 섭씨 700-800도 정도로 구운 것으로, 구워지는 도중 대기 중의 산소가 유입됨에 따라 토기의 겉면 색깔을 갈색 계통으로 발현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궁산리, 평양 남경과 금탄리, 봉산 지탑리, 암사동, 광주 미사리, 웅진 시도, 내평리유적 등을 들 수 있다.

*동북지역
동북지역의 빗살무늬토기는 바닥이 납작한 것이 특징이다. 그릇의 종류에는 깊은바리(深鉢形土器), 바리토기, 대접, 사발, 잔 등이 있다. 그 겉면에는 점.선.원 등의 기하학적인 요소를 배합해 만든 생선뼈무늬, 문살무늬, 점줄무늬, 타래무늬, 번개무늬 등이 베풀어져 있다. 이 지역 토기의 바탕흙으로는 진흙에 모래알이나 조개가루를 섞은 것을 사용하였다. 이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인 서포항 유적은 신석기시대 전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밝혀져 이지역의 신석기시대 전반적인 문화양상을 파악하는데 기준유적이 되었다.
한편 1980년대 초에는 양양 오산리에서 대규모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조사되고 서포항유적의 토기와는 모습을 달리하는 납작바닥의 빗살무늬들이 출토되어 또다른 문화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서북지방
서북지방은 전.중기의 뚜렷한 특징을 갖는 유적이 조사되지 않아 확실한 문화양상을 파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미송리동굴 유적 아래문화층에서는 생선뼈무늬, 삿자리무늬 등 동북지방계의 무늬외에 내몽고 일대와 적봉홍산후, 장산열도의 칠무늬토기무늬로 자주 사용되는 꼬불무늬가 출토되어 동북지방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구체적으로 비교를 할 만한 자료는 아직까지 보고되지 않았다.

*남부지방
남부지방에서는 다른지역과는 달리 빗살무늬토기 이전에 만들어져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융기문토기가 토기의 겉면에 점토띠를 말아 붙이거나 기면양편을 손끝으로 눌러 돋혀 만든 무늬를 베푼 토기로 융기성의 폭에 따라 덧무늬와 돋을 무늬토기로 구분된다. 토기가 출토된 유적은 주로 해안가에 분포하나 최근 내륙강가유적에서도 확인되었다. 융기문토기가 출토된 유적은 거의가 조개더미 유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둥근밑의 빗살무늬토기가 이지역에 출현하는 것은 융기문 토기가 극성을 보이는 목도기부터이다. 그러나 목도기의 빗살무늬토기 문양은 음각에 의해 만든 점열무늬. 문살무늬 등 일부구연부무늬에 그치고 있다. 이 지방 빗살무늬토기의 기형은 둥근밑빗살무늬토기 외에 중서부 지방에서 출토 예가 없는 목항아리. 귀때형토기. 물결형아가리토기 등이 제작되고 붉은칠토기가 목도기(牧島期)에서부터 출현한다.

②석기(石器)
신석기시대가 구석기시대보다 발전되는 기술적인 요인의 하나는 석기를 제작할 때 갈아서 만드는 수법이 등장한 것이다. 석기는 종류에 따라 어로용. 수렵용. 농경용. 일상생활용으로 구분되며 이러한 쓰임새의 차이에 따라 도끼는 섬록암 등 단단한 재질의 돌로 살촉은 점판암 등 짜개지기 쉬운 재질의 돌로 숫돌은 편암 사암 등 잘 갈리는 성질의 돌로 만들어 사용한 지혜를 보여준다.
*어로용
물고기를 잡는 데 쓰는 석기로는 그물추가 가장 많으며 이밖에 이음식낚시와 작살이 출토되었다. 그물추를 보면 직경이 2-5cm인 납작한 강돌의 양옆을 때려내어 실걸이를 만든 것으로 투망이나 맞둘이의 밑에 매달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주로 강가에서 고기를 낚던 연장으로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의 유적에서부터 출토되고 있는데 동북지방이나 남부지방보다는 중.서부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수렵용
동물을 잡는데 사용된 석기에는 살촉과 창끝이 있다. 살촉은 대부분 버드나무잎형. 보트형. 보트형의 밑둥을 판 양나래형이 유행했다. 양나래형은 밑둥 끝에서부터 만입된 형태와 밑둥 중앙부에 깊게 홈을 파준 형태가 있는데 전자는 동북지방에서 후자는 중서부지방에서 출토되어 지역차를 보이기도 한다.

*농경용
농사를 짓는 데 사용된 석기로는 낫. 보습. 괭이. 도끼. 갈돌. 갈판 등이 있다. 낫과 보습은 중.서부지방의 유적인 지탑리, 금탄리, 암사동에서 주로 출토되어 지역에 따라 농경방법에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이밖에 화전을 일구는 데 벌목용으로 사용된 도끼와 곡물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던 갈판과 갈돌도 직접적인 농경구는 아니지만 농경에 부수되는 석기의 일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상용구
일상생활에 사용된 석기로는 나무를 자르고 다듬는 데 쓰는 도끼 끌 대패 자귀 곡물이나 도토리 등 열매를 분말로 만드는 데 쓰는 갈돌 갈판 그리고 의식주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칼. 송곳. 가락바퀴. 발화석 등이 있으며 이러한 석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망치돌과 숫돌이 출토된다. 이밖에도 생활필수품인 칼. 송곳. 톱 그리고 실을 꼬기 위한 가락바퀴도 출토되었다.

③골각기
동물의 뼈를 짜개어 갈아 만든 골기는 우리나라 전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조개더미유적에서 대부분 출토되어 석기와 함께 신석기시대의 연장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어로구
물고기를 낚는 데 사용된 골기로는 낚시바늘. 흘리개. 작살 등이 있다. 그 중 작살을 살펴보면 작살은 서포항유적을 비롯한 동북지방조개더미에서 주로 출토되었는데 버드나무잎형의 한쪽 끝에 민지를 한 개 만들어 고기를 찌를 때 몸통에 박혀 빠지지 않도록 만든 것과 밑을 뭉퉁하게 하고 끝을 뾰족하게 한 형태에 1-3단의 양나래민지를 만들어 찌르도록 한 종류가 있다.

*수렵구
수렵구에는 살촉과 창끝이 있다. 살촉은 동물뼈. 사슴뿔. 이빨을 갈아서 만든 것으로 버드나무잎형. 보트형 등 돌살촉과 같은 형태의 것도 있으나 돌살촉과는 달리 끝을 뾰족하게 한 촉몸 밑에 긴 슴베를 달아준 특이한 모습이다. 골기로 만든 수렵구는 동북지방의 조개더미유적에서만 출토되어 문화의 지역차를 보여준다.

*농경구
농경구에는 낫.뒤지개.뿔괭이가 있는데 뒤지개는 사슴뿔의 뾰족한 끝을 가공하지 않은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씨뿌릴 구멍을 파던 도구로 생각된다. 뿔괭이는 사슴뿔로 만든 굴지구(掘地具)이다.

*일상용구
의식주생활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골기에는 송곳. 칼. 바늘. 바늘통. 삿바늘. 숟가락. 무늬돋치개 등이 있다. 무늬돋치개는 신석기시대의 토기인 빗살무늬토기에 무늬를 베풀던 도구이다. 농포유적에서는 뼈를 톱니바퀴모양으로 갈은 것이 출토되었으며 궁산리 유적에서는 뼈끝에 홀을 여러 줄 파주어 그으면 줄무늬가 들어가도록 한 것이 출토되었다. 숟가락은 서포항유적 제4기층에서 머리부분만 남은 채로 1점 출토되었는데 머리부분의 크기는 길이 7cm, 너비 5cm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숟가락의 출토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식문화 발달정도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④토제품
흙을 빚어 구워 만든 연장으로는 가락바퀴 흙알 토기뚜껑 등이 있다. 그 중 가락 바퀴를 살펴보면 가락바퀴는 중앙부의 구멍에 나무를 끼워 돌리면서 실을 꼬던 연장으로 그 직경은 4-5cm가 일반적이다. 토기뚜껑은 따로 만들어 사용한 것이 아니라 부서진 토기조각을 원반상으로 가공하여 사용한 것이 궁산리유적에서 출토되었다. (발제: 김 미성)

Ⅳ.경제생활과 문화

1.수렵(狩獵)과 어로(漁撈)

*수렵(狩獵)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는 시기와 지역에 상관없이 동물을 잡는 데 사용한 창끝과 살촉이 출토되었다. 창끝은 나무나 대나무자루 끝에 끼워서 던져 동물을 잡던 것으로 그 역사는 구석기시대 전기까지 올라간다. 창은 화살보다는 명중도가 낮고 던질 수 있는 거리가 제한되어 있어 화살이 등장함에 따라 사용빈도가 적어졌다.
활은 활.현.화살로 구성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유적에서는 아직까지 활과 현이 출토된 예가 없이 단지 돌이나 짐승뼈로 만든 살촉만이 출토될 뿐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늪지유적의 유물보존상태가 좋아 활의 출토 예가 알려져 있는데 이와 같은 예로 볼 때 활은 1미터 전후의 단궁(短弓)으로 생각되어진다.
활과 창을 이용한 사냥 대상은 유적에서 출토되는 동물뼈의 종류로 보아 사슴. 노루. 멧돼지. 산양. 표범. 곰. 족제비. 너구리. 물개. 여우. 독수리 등으로 그 대상이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어로(漁撈)
고기를 잡는 데 사용한 도구로는 뼈로 만든 낚시와 작살 그리고 뼈로 만든 미늘과 돌로 만든 축을 묶어서 사용하는 이음식어구와 함께 강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강돌의 양 모퉁이를 떼어내어 그물추로 쓴 연장들이 출토되었다.
낚시와 작살은 서포항을 비롯한 동북지방의 유적에서, 이음식어구는 오산리, 동삼동, 욕지도, 연대도 등 동해안과 남해안의 환태평양연안인 리아스식해안가 유적에서, 그물추는 대동강. 재령강. 한강 등 내륙강안유역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어 지역의 자연환경에 따른 고기잡이 방법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그물추는 직경이 10cm 이상인 대형도 간혹 발견되나 2-5cm인 소형이 대부분으로 강가유적에서 주로 출토된다.
작살은 민지가 한쪽 또는 양쪽에 마련된 단장고정식의 삽입식으로 밑둥의 형태로 볼 때 직접 자루에 꽂은 후 끈으로 묶어서 사용한 것 외에도 소켓을 통해 자루와 연결시켜 사용한 것도 보인다. 이음식어구는 수심이 깊은 동해안과 남해안의 원양어업에 사용되는 도구로 이 연장이 출토되는 곳은 모두 리아스식해안으로 간만의 차가 적고 수심이 깊은 지역에 치중되어 있다. 갈고리낚시바늘은 서포항 5기층에서 출토된 3점이 유일하다.

2.농경(農耕)

우리나라 신석기유적에서 출토되는 농경용 연장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지탑리2호집터의 바닥에서는 피 또는 조로 생각되는 것이 3홉 가량 토기에 담겨 있는 채로 출토되었고 남경31호 집터에서는 탄화된 좁쌀 1되가 출토되었다. 이 두 유적은 각각 신석기시대의 전기와 말기에 편년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원시적이나마 농경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포항. 암사동. 궁산리 등의 유적에서는 괭이. 보습. 낫. 도끼. 뼈낫 등이 출토되어 농경의 존재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중.서부지방
중.서부 지방의 신석기인들은 도끼류와 돌낫 등을 이용하여 나무와 풀 등을 잘라내고 불을 지른 후 괭이와 보습을 이용해 땅을 갈고 뒤지개 등으로 구멍을 뚫어 그곳에 씨앗을 심는 단계의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확은 뼈낫이나 돌낫을 이용 했으며, 탈곡은 갈판과 갈돌을 이용했던 것으로 추측되어 농업의 수준은 괭이나 보습을 이용한 화전(火田)농경에 바탕을 둔 사경농경 단계로 파악된다.

*동북지방
동북지방의 농경용 연장의 종류는 중.서부지방과 대체로 일치하나 돌이나 뼈로 만든 낫이 출토되지 않는 점과 갈돌. 갈판의 출현시기가 늦고 또 유적의 규모에 비해 그 출토량이 적은 것이 차이점으로 지적된다. 연장의 대체적인 양상으로 볼 때 농경수준과 단계는 중.서부지역과 마찬가지로 사경농경 단계였던 것으로 짐작되나 농경용 연장의 종류로 볼 때 농경의 규모와 발달정도는 중.서부지역보다 부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부지방
남부지방은 동삼동. 수가리. 상노대도 유적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유적의 형성시기가 길고 상당량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농경용 석기로 생각되는 것은 동삼동에서 출토된 괭이 5점에 불과하다 이로 볼 때 이 지역의 주민들은 농경에 비중이 적은 경제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신석기시대 우리나라의 각 지역은 그들 나름대로의 자연환경에 따라 농업의 비중이 제법 컸던 중. 서부지역과 동북지역 그리고 농경의 비중이 크지 않았던 남부지역으로 구분된다. 신석기시대의 농경은 출토된 유물과 검출된 곡물로 볼때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괭이와 보습을 사용한 사경농업을 실시한 것으로 생각되며 대상곡물은 피나 조 같은 잡곡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3.의생활과 장신구 (裝身具)

*의생활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 의생활에 관계되는 것은 가락바퀴, 칼, 삿바늘, 바늘통, 송곳, 실 등을 들 수 있다. 가락바퀴는 토기조각을 원반형으로 갈고 그 중앙부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과 진흙을 산반형. 구형. 원추형. 산형으로 빚고 그 중앙부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의 두 종류가 있는데 전자는 중.서부지방에서, 후자는 동북지방과 남부지방에서 주로 출토된다. 가락바퀴는 그 중앙의 구멍에 나무봉을 끼워 돌려 실을 꼬던 도구로 부산 동삼동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조각에는 꼰실로 만든 그물로 찍어 나타난무늬가 들어 있어 가락바퀴를 사용한 흔적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바늘은 사슴이나 생선뼈를 갈아 만든 것으로 이른시기부터 고루 출토되었는데 궁산리에서는 바늘에 베실이 꿴 채로 출토되어 당시 식물성섬유를 실로 사용하여 바느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재단에 필요한 칼, 구멍뚫는 데 사용한 송곳 등이 대부분의 유적에서 출토되었으나 현재의 이런 유물만으로는 그들이 어떠한 형태의 옷을 어떻게 만들어서 입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이러한 부족한 자료는 일본의 신석기시대유적에서 출토된 토우(土偶)와 직물흔적이 바닥에 찍혀 있는 토기를 통해 어느 정도 복원될 수 있다. 이러한 외국의 예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관련유물로 볼 때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인들도 식물섬유나 동물섬유를 짜서 만든 편포(編布)와 가락바퀴나 베틀을 이용해 만든 직포를 옷감으로 해서 간단한 형태의 옷을 만들어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신구(裝身具)
신석기시대의 장신구로는 목걸이의 수하식과 팔찌가 대부분이며 이밖에 신암리에서 귀걸이로 생각되는 토제품조각이 출토되었다. 목걸이수하식의 형태는 굽은옥형, 뱀.개.새 등의 동물형, 추상적으로 표시한 인물형, 장방형.원형의 석제품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것들이 만들어진 재료는 동물의 이빨과 뼈. 돌. 흙. 옥 등 다양하나 공통적인 것은 머리부분에 구멍을 한 개씩 뚫어 끈에 꿰어 장식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팔찌는 조가비의 중앙부를 떼내고 그 테두리를 사용한 것과 벽옥이나 곱돌 또는 대리석을 둥근 고리로 갈아서 만든 것이 있다. 신암리의 귀걸이는 흙을 원판형으로 빚어 구워 만든 것으로 표면에는 깊은 선을 동심원상으로 나타난다. 두점 모두 작은 조각만 남아 있어 정확한 착장방법을 알 수는 없으나 일본 신석기시대의 귀걸이에서처럼 귀구멍에 끼워서 착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4.예술(藝術)과 신앙(信仰)

신석기인들의 신앙적 대상은 천재지변에서 오는 자연환경의 공포에 대한 정신적 안정을 구하는 것에서부터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축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신앙과 주술은 어떤 조형물을 매개로 하여 영적 대상에 접근하게 되는데 이러한 조형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예술이 탄생되기 때문에 원시미개사회에서 신앙과 예술은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서포항의 목걸이수하식으로 쓴 장신구는 대부분 밑이 뾰족하고 위가 방형 또는 원형으로 생긴 것으로 위에 구멍을 뚫어 끈에 끼울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중 한 점은 방형부분에 두 눈과 입을 상징적으로 파주어 사람을 형상화한 것으로 자루의 배부분에 8개의 점을 파주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여성상을 상징한 것으로 생각된다. 인물토우는 흙을 빚어 만든 것으로 농포리. 신암리. 동삼동에서 출토되었다. 토우중에는 여성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점은 당시에 여신신앙이 숭배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특히 여성상에는 유방과 궁둥이를 과장해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밖에도 연대도에서 조사된 무덤이 살림공간의 주변에 바로 조영된 점은 죽은 사람과 산사람이 같은 생활공간에서 공존한다는 일체화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암사동주거지의 경우 새로 만든 주거지의 화덕 바로 밑에 먼저 만들어진 주거지의 화덕이 파괴되지 않은 상태로 겹쳐서 발견되는데, 이것은 당시 인간이 갖고 있었던 불에 대한 외경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Ⅴ.연대(年代)와 사회(社會)

1.연대(年代)

① 상대연대
상대연대의 결정은 고고학적 자료의 선후관계를 밝히는 것으로 층위의 순서가 기준이 되는 층서학(層序學), 그리고 토기나 석기를 비롯한 유물의 형식비교를 바탕으로 연구되는 형식학적 방법이 있다.
중서부지방의 토기는 네 형식으로 구분된다. Ⅰ식은 구연부 동부 저부의 3부 위에 서로 다른 문양이 시문되는 것이다. Ⅱ2식은 저부에 무늬를 생략한 것이다. Ⅲ3식은 토기 전면에 고기뼈무늬 한 종류만 나타난다. Ⅳ식은 무늬가 전혀 시문되지 않은 토기와 덧무늬 한 줄, 손톱무늬 한줄 등 무늬가 퇴화되어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Ⅰ- Ⅳ식은 층위상으로도 그 순서가 확인되고 있다. 즉 층서학 및 형식학적 방법으로 볼 때 중서부지방의 토기는 Ⅰ식은 전기 Ⅰb와 Ⅱa식은 중기, Ⅱb식과 Ⅲa.Ⅲb식은 상한이 후기전반과 후반으로 상대편년된다.
동북지방토기는 서포항유적에서 층위상으로 출토된 토기로 볼 때 Ⅰ.Ⅱ기층 토기류는 전기에 Ⅲ기는 중기에 Ⅳ.Ⅴ기는 후기에 편년된다.
남부지방토기는 다른 지방과는 달리 융기문토기에서 빗살무늬토기로 발전되었는데 빗살무늬토기의 무늬에도 지두문. 신선문. 계통의 집선문. 압인문 등 중.서부지방과 동북지방의 토기에 보이지 않는 문양이 시문되어 있어 지역적인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지역의 토기는 융기문토기→ 구연부에만 시문된 빗살무늬토기(전기)→ 전면무늬토기(중기)→ 구연부무늬로 퇴화→ 한 줄의 빗금무늬, 겹아가리토기(후기)로 변화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②절대연대
상대편년은 시기의 선후관계는 밝힐 수 있으나 연대를 분명히 하는 데에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등에 의한 절대연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얻어진 방사성탄소연대는 60가지 예에 이른다. 이를 상대편년된 지역별 유적에 대입할 때 중.서부지방은 암사동이 기원전 5300-기원전3200년, 남부지방은 동삼동이 기원전 5000-기원전1500년으로, 동북지방의 오산리유적은 기원전6000-기원전4400년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수치로 볼 때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1000년까지 5000년간 존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2.사회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사회는 동남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의 원시미개민족 즉 신석기시대문화수준에 머물러 있는 주민들의 생활상과 비교해서 유추해볼 때 신석기시대인들은 모든 행위가 공동체적인 집단행동으로 이루어져 공동생산. 공동소유. 공동분배에 기초를 두고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생산활동에서 여성의 역할이 큰 경제생활을 영위해 자연히 모계씨족사회에 바탕을 둔 사회조직체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대부분의 원시미개민족들의 혼인 및 가족제도가 모계(母系)인 점에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씨족모계사회는 농경이 본격화하는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남성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부계(父系)사회로 넘어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Ⅵ신석기문화의 종말

1.중서부지방

중서부지방에서는 신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가 층위를 달리하여 조사된 평양 금탄리와 남경유적을 통해서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의 일시적인 동반현상과 민무늬토기문화의 정립상을 살필 수 있다. 신석기문화층인 금탄리2문화층에서는 토기 겉면 전체에 생선뼈무늬가 베풀어진 토기, 몸통에 덧무늬 한 줄을 덧대준 토기, 빗금줄무늬 서너 줄을 등간격으로 베풀어준 토기와 함께 다수의 빗살무늬계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남경유적 신석기시대 말기 토기의 양상도 대체로 빗살무늬계 민무늬토기의 비율이 전체 토기의 30퍼센트에 가까워지는 등 민무늬토기 문화에 더욱 접근하고 있다.

2.동북지방

서포항. 범의구석유적 등 신석기시대의 만기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와의 공반관계를 살필 수 있다. 서포항 신석기시대 5기층에서는 4기층에 보이던 번개무늬.삼각무늬.점줄무늬.생선뼈무늬 등 신석기시대 말기의 무늬들이 퇴화해 없어지는 대신, 빗살무늬로는 생선뼈무늬만이 아가리에서 몸통일부에 베풀어지는 토기 외에 민무늬의 겹아가리토기가 증가된다.
범의구석의 신석기시대유적에서는 10기의 움집터가 조사되었다. 여기서는 민무늬토기에는 굽다리잔과 간토기들도 보이는 데 그 수량은 같이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보다 많아 신석시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양상을 잘 보여준다.

3.서북지방

신암리유적은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문화층이 퇴적되어 있다. 이 신석기시대 말기의 빗살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의 영향이 깊게 나타나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청동기시대 층위에서 출토되는 무늬가 없는 미송리형토기로 이어진다.

4.남부지방

남부지방의 신석기시대 말기의 문화층은 부산동삼동과 금곡동. 농소리. 상노대도유적에서 확인되었다. 이 유적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문화층이 형성된 곳으로 말기에 이르면 무늬가 아가리에 일부만 베풀어진 것, 무늬가 퇴화하여 간단한 빗금무늬만 들어 있는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같은 아가리를 겹아가리로 만든 민무늬토기가 출토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신석기문화는 이의 계승. 발전 속에서 청동기문화로 접어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원래의 신석기시대 문화인이 새로운 문화의 소지자인 청동기시대인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것보다는 서로의 혼거 속에 보다 발달된 문화의 경제체계를 갖고 있었던 청동기시대의 문화로 발전되어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발제: 김 현철)

참고문헌

한영희, 「신석기 시대의 사회와 문화」, 『한국사』1, 한길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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