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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衛滿朝鮮(위만조선)은 주위의 여러 정치집단들이 漢(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막아 중간무 역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더구나 한의 입장에서는 위만조선이 匈奴(흉노)와 연 결이 될 경우의 위협까지 가중되었다.

이에 마침내 B.C. 109년 漢(한) 武帝(무제)는 王儉城(왕검성)을 공격하였다. 전쟁 초기 위만조 선은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갔으나 일 년여에 걸친 전쟁에서 지배층의 분열 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漢書(한서) 등에는 결국 왕의 암살을 계기로 급격히 무너진 위만조선은 3대 7∼80 여년만에 무너지게 되었고, 그 판도 내에 한은 樂浪(낙랑)·眞 番(진번)·臨屯(임둔)(B.C. 108) 및 玄?郡(현토군)(B.C. 107)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漢四郡(한사군)이라 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한사군의 설치는 설치연대와 설치지역에 대해 아직도 많은 이견들 이 나오고 있다. 이는 위만조선, 즉 고조선의 영역이 어디에 걸쳐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와 직결되는 부분이므로 우리 고대사의 중요한 해결과제임이 분명하 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고구려 大武神王(태무신왕) 15년(32년)에 왕과 왕자 好童(호동)이 낙랑을 항복시 킨 내용이 있고, 이어 동왕 20년에는 또 낙랑을 습멸한 기사가 보인다. 그리고 7년 뒤에는 漢(한)의 光武帝(광무제)가 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郡縣(군현)으로 만들어 薩水(살수) 이 남이 漢(한)에 속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한편 太祖王(태조왕) 4년(56년)에는 고구려의 남쪽 영역이 살수에까지 확대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토대로 볼 때 낙랑이 B.C. 108년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의 내용은 낙랑에 대한 지배는 살수를 경계로 한과 고구려가 分有(분유)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이와 관련하여 정인보가 지 적하였듯이 종래 낙랑군으로 알려졌던 대동강 유역의 출토유물들이 모두 後漢(후한) 시대의 것이라는 사실은 前漢(전한)의 置郡(치군)을 더욱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 다.

또 낙랑 25縣(현)의 평균 호수가 2500여호인 점은 三韓(삼한)의 國(국)들이 평균 2000여호 인 점과 비교해 볼 때, 신채호의 낙랑 25현은 낙랑 25국이라는 해석을 가능하 게 하고 있다. 따라서 낙랑이란 韓(한)과 같이 그 지역에 대한 총칭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漢(한)의 평양지역에 대한 연고는 대무신왕 대에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 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종래 위만조선이 평양 중심이었다는 입장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신채호 등이 4군의 위치를 遼東(요동) 혹은 遼西(요서)에서 찾으려는 견해들 은 위만조선의 영역이 그 곳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