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arae.kangwon.ac.kr/~ba93001/h9804.htm
일본서기를 통해 본 한국과 일본의 기원

 일본의 천손강림 전설(일본의 건국신화)은 우리의 단군의 실체와 유사한 점을 많이 담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는 천제자(天帝子)인 환웅이 고마족의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환웅은 천신족(天神族)이고 웅녀는 지신족(地神族)인 것이다. 일본서기에 있어서는 남방게 천조대신(天照大神)과 북방게의 고황산령신(高皇産靈神) 사이에서 천진언언화경경저존을 얻게 된다. 천조대신은 말 그대로 천조신이고 고황산령존은 국신이다. 이렇게 볼 때 일본서기에서 단군에 버금 가는 신은 곧 천진언언화경경저존이라 할 수 있다.일본 토속의 남방신화와 비류백제 유민의 이념이 담긴 북방신화가 혼합하여 이루어진 일본서기 신대(神代)에 있어서도 또 하나의 특기할 만한 것은 담로도(淡盧島)에 관한 기사이다. 이는 곧 일본신화의 주체가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형성에 비류백제가 깊이 관여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선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사 부터 고찰해 보자.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조에 보면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여자 하나를 얻었다. 왕은 그 여자를 방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어느 날 그녀는 문틈으로 비쳐드는 햇빛을 받아 곧 임신하게 되고, 얼마 후 알을 낳았다. 이 알에서 나온 아이가 주몽이다.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고 사서에 나타나 있다. 금와왕은 이 후 일곱명의 아들을 더 두었는데, 그들은 영특한 주몽을 시기하여 없애려고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섬부(陝父)등을 이끌고 졸본천(卒本川)으로 피신했다. 마침 졸본부여왕(卒本扶餘王)은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자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즉각 후게자로 삼았다. 그리고 젊은 과부였던 자기의 딸 소서노(召西奴)를 아내로 삼게 했다. 당시 졸본권은 압록강 중류 중국측 지류인 혼강(渾江) 지역에 있었고, 졸본 부여 역시 이 근처에 있었다. 말하자면, 주몽은 동부여 송화강 근처에서 도망온 것이다. 하여튼 주몽은 도망와서 일약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아내 소서노는 죽은 남편 우대(優臺)와의 사이에 비류(沸流)라는 자식이 있었고, 주몽과의 사이에서 온조(溫祚)를 얻었다. 그녀는 두 자식을 키우며 고구려 건국에 온 힘을 쏟았다.
드디어 졸본왕이 죽었다. 이에 왕위를 계승한 주몽은 22세(삼국유사에는 12세)의 나이로 졸본부여를 손아귀에 넣었다.이때는 중국 한효원제건소(漢孝元帝建昭) 2년(B.C 37년)이었고, 신라 박혁거세 21년 갑신년(甲申年)이었다. 주몽은 왕위에 오르자 아내 소서노를 멀리했다. 이는 소서노가 졸본 지역의 원주 세력임을 내세워 죽은 전남편의 아들 비류를 다음 계승자로 내세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주몽은 그녀와 소원한 관계를 핑계로 동부여에 있을 당시의 아내였던 예씨부인(禮氏夫人)을 다시 맞아 들여 두 사람 사이에 난 유리(類利)를 태자로 삼았다. 하루 아침에 고구려 건국의 공로와 왕비 자격은 물론 자기 몸에서 태어난 아들의 와위 계승권마저 잃어버린 그녀는 B.C 18년 유리가 왕위에 즉위하자 마자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도망을 쳤다. 이들이 망명하여 최초(B.C 17년)로 안착한 곧은 대방고지이다.(대방고지의 위치에 대해선 학설이 분분하다. 지금의 요동반도의 서쪽, 북경의 동쪽지역이라는 설과 황해도 지방이라는 설이 있으나 전자의 경우가 최근 제기되고 연구되어 지고 있다.) 삼국사기에 그들이 남쪽의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다.(여기서 패수와 대수가 나오는데 패수와 대수의 위치의 고찰에 있어 지금의 지명으로 그 위치를 파악하려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대수와 패수의 위치는 지금의 요동지역으로 추정된다.) 대방고지에 안착한 그들은 대방고지 주위의 강대국들에 위협을 느껴 패수(浿水)로부터 남하하여 미추홀에 상륙한다.(B.C 7년) 미추홀에 도착한 두 형제는 새로운 도읍을 물색했다. 그 들은 십여명의 신하를 데리고 부아악(負兒嶽)에 올랐으나 의견이 서로 달랐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고 싶어했고, 온조는 그 반대였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져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위레성(지금의 하남시로 추정)에 안착했다. 삼국사기에는 미추홀이 인천지방으로 나와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아산 인주로 나와 있다. 그후 온조는 백제의 시조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의 위례성은 내륙에 자리잡고 있어 백성들을 다스리기 편했으나 비류의 미추홀은 바닷가인 관계로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도읍으로 부적합했다고 나와 있다. 그래서 비류 또한 후회한 나머지 자살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온조쪽에서 본 편향된 역사기술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비류왕의 자살 여부는 다른 역사적 사실을 종합해볼때 그 오류가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비류와 온조가 분립하여 나라를 연 2년 뒤인 B.C. 6년의 삼국사기 기사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위례성에서 늙은 할망구가 남정네로 둔갑하고 침입했으나 오호가 입성하면서 당시 61세였던 늙은 할망구 소서노는 변사를 당하고 만다. 또 이 직후에 온조는 경기도 광주로 쫓겨가는 괴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서 위례성을 공격한 '오호'는 온조를 공격하기 위해 대치하고 있던 이부동복(異父同腹)의 비류일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오호의 위례성 입성은 온조를 공격한 비류의 골근상쟁(骨筋相爭)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소서노'는 두번 출가하여 두번 다 결혼에 실패한 비련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망명후에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高朱蒙)에 대한 배신의 한을 풀기 위해서 언제나 마음속에 칼을 갈고 있었다. 하지만 각기 아버지가 다른 의붓형제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의 이러한 뜻도 저버리고 서로 싸우면서 분열을 꾀했다. 그녀는 그들을 화해시켜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61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소서노는 나이 어린 온조를 중심으로 분열을 획책하는 무리들을 없애려고 모종의 밀계를 꾸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남자로 변장하고 위례성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오호(비류)가 입성을 하기도 전에 밀계가 탄로나 소서노는 온조의 강경파에 의해 무참히도 살해된 것이다. 온조는 "모친의 시해 때문에 형제가 더 불안하게 되었으니 지난 날에 봐 둔 한수지남(漢水之南;지금의 광주)으로 잠시 옮겨 항구적인 대책을 강구한다"며 즉각 광주 천도를 단행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비류는 온조를 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직도 완벽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비류가 자살했다는 온조측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비류에 관한 또 하나의 설은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백잔(百殘)과 이잔(利殘)에서도 엿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 1절에 보면 영락 6년 병신(丙申; 백제 아신왕 5년 서기 396년)에 왕이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의 서해안에 상륙하여 백제를 토벌했다......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은 세(勢)가 약하여 남녀 천명과 세포(細布) 천필을 내어 바치고 맹세하기를 "지금이후 부터는 길이 신복(臣服)이 되겠다"고 했다.'
이 기사에서 이잔과 백잔이라는 한자가 나오는데, 일부학자들은 이 두 나라가 단일국의 백제를 지칭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근거없는 낭설이다. 백잔과 이잔은 우선 표기부터가 다를 뿐 아니라 존속과 멸망 연대도 엄연히 다르다. 이잔(비류백제)은 396년에 멸망했고, 백잔(온조백제)은 660년까지 존속했다.
그렇다면 이잔국을 왜 비류백제라고 하는가? 광개토대왕의 작전 경로를 따져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수군으로 정벌을 나서기 이전에 토벌한 18개 성과 수군 출발 이후에 함락시킨 37개 성을 가지고 있었다. 수군 이전에 육로로 함락시킨 18개 성은 거의가 한강 이북에 분포되어 있다. 여기에 포함된 'X拔城'은 추적한 결과 공주성의 별칭인 거발성(居拔城)임이 판명되었다. 또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도 미추홀에 정착했던 비류가 서기18년에 공주성으로 터전을 옮겼다고 했다. 일본서기에는 공주가 구마나리(久麻那利), 즉 웅진(熊津)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서기 392년에 광개토대왕은 관미성(關彌城; 비문에는 각미성<閣彌城>)을 포함한 한강 이북의 18개 성을 4만 대군으로 함락시키고, 관미성을 전진기지로 하여 경기만으로 남하, 충남지역의 37개성을 함락시킨 것이다. 이에 관해 광개토대왕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백잔성(온조백제)의 적들이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재차 대항하자, 크게 노한 광개토대왕은 아리수(阿利水; 한강의 옛이름)를 건넌 다음 부하 장수를 파견하여 3~4개의 성을 공격케 하니 이에 궁핍해진 백제왕은 남녀 포로 천여명과 세포 천필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이 기록으로 볼 때, 광개토대왕은 육로로 회군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당시 온조백제는 근초고왕 23년(371)에 경기도 광주에서 한산(지금의 서울)으로 천도했었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비류백제를 멸하고 아리수를 넘어 온조백제를 항복시켰다는 얘기가 된다.
분명 충남지역에 있었던 이잔국은 비류백제였다. B.C. 17년에 대방고지에서 건국하여 공주성(거발성)으로 천도한 비류백제가 고구려의 습격을 받고 멸망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있다. 광개토대왕이 죽자 그의 아들 장수왕이 즉위를 했다. 장수왕은 고구려의 판도를 최고로 넓힌 장본인이다. 그는 재위 63(475)년에 온조백제를 다시 공략하게 된다. 한성은 초토화 되고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전사하고 말았다. 신라로 원정군을 청하러 갔던 문주왕만이 살아 남아 지난날 비류백제의 도읍처였던 공주로 남천하지만, 477년에 병관좌평(兵官佐平)인 해구(解仇)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게된다. 그리고 이어 삼근(三斤)이 왕위에 올랐다.
관제에 있어서도 중국의 주서(周書)와 양서(梁書)에 의하면 비류백제와 온조백제가 완전히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온조백제의 공주 도읍시대 관제는 중앙의 귀족을 각 지방에 임명하는 주서의 중앙집권적인 오방십군현제(五方十郡縣制)였으나, 비류백제는 22담로(擔魯; 郡縣)에 왕실의 자제 종친을 분가시킨 양서의 지방자치적 담로제를 취하였다. 이를 연구한 일본의 어느 학자는 담로제는 5세기의 특징적인 관제였다고 했다. 이 5세기(400~499)란 바로 비류백제의 멸망 직후부터 온조백제가 공주로 내려간(475)직후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어쨌든, 396년에 비류백제가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자 그에 종사했던 유신(遺臣)은 바로 담로주(擔魯主)들이었는데 대부분은 온조백제에 귀화했고, 온조백제가 공주로 남천한 이듬해인 476년(문주왕 2년)에는 일부가 탐라주(耽羅州; 제주도)로 귀화하기도 했다.
비류백제가 지방 군현의 관제를 '담로'라 했기 때문에 그 지명이 아직까지도 많이 전해오고 있다. 우선 제주도의 옛 이름은 '탐라'이다. 여기서 '탐'과 '담'은 같은 계통의 음이고 '로','라','나'의 음은 땅을 뜻하는 옛날의 동의어이다. 그러니 탐라와 담로는 같은 말임을 알 수 있다. 담(擔)은 맬 첨(擔也)으로서 담(擔)과 통하고 또 담은 담(擔)의 속자이다. 중국의 한자 자전인 집운(集韻)에 보면 첨(擔)을 담이라고도 표기했다. 조선초기의 권문해(權文海)라는 사람도 그의 저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담로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밖의 예로서는 담임, 담당, 담책등이 있다.
더구나 제주도는 서기 227년에 비류백제의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에게 점령 당한적이 있다고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조는 적고 있다.
옛날에는 '담'을 담(擔), 담(淡) '冬音''斗音'으로 표기했으므로, 우리나라 옛 지명에서 이 계통의 지명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공주를 중심으로 한 한,일간의 교류영역은 일본거기 응신천황8년조에도 나타나 있듯이 예성강(禮成江)유역인 곡나(谷那), 서산, 당진, 예산, 아산, 홍성, 보령지방과 차령산백 서쪽 지역(支侵), 차령 이남의 충남북과 전남북의 서남한 지역(峴南; 차령이남), 경남, 남부지역(東韓之地), 제주도등을 들수 있다. 그 지방에는 고대 비류백제의 식민지적 담로제(지방 군,현)의 흔적이 다수 엿보인다. 예컨대, '옥명(玉名)'은 일본말로 '다마나'라 하는데 '다마'는 '담', '나','라','로'와 함께 땅이라는 뜻이다. 이것 역시 담로를 뜻하는 것으로 비류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대판만에는 아예 '담로'와 똑같은 담로도(淡路島)라는 섬이 있다.
서기 18년에 비류백제에서 백가구나 되는 많은 유민들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기사가 '주서(周書)'와 '수서(隨書)'에 보이고, 실제 일본 구주에는 7개의 담로가 있었다. 대마(對馬),일기(壹崎),이도노(伊都奴),투마(投馬),사마대(邪馬臺)등이 이에 해당된다. 서기 100년경에는 비류백제 유민들이 구주(九州)지역에서 키작은 원주민(고고학상에 나타난 남방계 원주 왜인)들을 정복하고, 이어 비류백제 왕실의 자제종친(子第宗親)이 담로주로 파견되어 다스렸다는 위지'왜인전'기사가 유독눈길을 끈다. 일본서기에 있어서는 앞서 천신들이 대팔주국을 낳을 때 제일 처음으로 담로주를 낳았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음신(이장염존)과 양신(이장낙존)이 부부가 된후에 성교하여 산월에 이르매 이들은 담로주를 모태로 대일본을 낳았다.'
이는 비류백제의 식민지 담로가 대일본 탄생에 모태가 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또한 신대기(神代紀)에 비류백제의 도해(渡海)집단이 일본으로 건너가 구주에 정착하고 일본역사의 주역이 된 부분이 나타나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에는 소전오존이 일본에서 신라로 건너갔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일본의 신대(神代)가 먼 옛날이 아닌 신라시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반도의 역사시대에 일본이 신대였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일설에는 소전오존의 선주지가 웅성봉(熊城峯)으로 나와 있다. 웅성은 일본학자들도 지적했듯이 일본어로 '구마나리'이고, 이는 공주의 옛 이름인 웅진(熊津:곰나루)의 일본식표기이다. 다시 말해서 소전오존의 고향은 하늘도 일본본토도 아닌 우리나라 충남 공주(公州; 구마나리)라는 얘기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잘 살펴보면 소전오존은 성질이 흉폭하여 많은 죄를 짓고 공주(웅성)를 탈출한 후에 신라 땅이 '소시모리',즉 증시무리(曾尸茂梨; 진해로 추정됨)를 거쳐서 일본의 구주로 피신했다는 역사적 고찰을 이끌어 낼수 있다.
다음은 신대에 나오는 경진주신(輕津主神)이 구주 동남의 일향출운으로 피신해 있는 소전오존의 후예 대기귀신을 추적하여 현재의 도근현 출운으로 재추방하였다는 기사이다. 그리고 국조인 고황산령존은 소전오존의 후예를 평정한 대물주신에게 황손 경경저존(瓊瓊杵尊)을 보내면서 그를 영원히 받들도록 엄명을 내린다. 이에 경경저존은 동남구주의 고천원에 도착하여 왜국(담로국)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담로이다. 경경저존은 비류백제에서 파견된 담로계의 왕실자체 종친일 수 밖에 없다.
8세기에 씌어진 일본신찬성씨록(日本新撰姓氏錄)에도 황손이 양신, 즉 천신으로 나와 있고, 대물주신이 자신의 시조로 묘사돼있는 만큼 건국신화(神代)에서 음신과 양신의 교접은 대물주신(음신)과 황손(양신)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대면 경경저존은 어느 천황을 지칭하는것 일까? 일본 건국신화에서 처음 나타난 통치기구는 담로주였고, 이것이 천황국가 탄생에 모태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누차 강조했다. 엄격히 말하면, 구주의 담로시대와 기내(畿內)의 천황시대는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120년이란 긴 세월의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서기 편자는 두 시대를 하나의 단일 황통으로 묶어 만세일계(萬世一系)를 꿈꾸었던 것이다. 더구나 일본 사학은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담로시대의 연대를 120년 올려 보아야 한다는 이른바 2주갑 인상론을 줄기차게 펼쳐온게 사실이다.
중국의 위지'왜인전'을 살펴보면 서기 200년 무렵에 일본에는 히미고가 구노국(拘奴國)과 싸워서 전사하고, 그 뒤에 종녀(宗女)가 왕이 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또 서기 265년에 대강 그 인물과 동일한 사람이 진나라에 조공을 바쳤다고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신공황후는 뒤에 '신공황후조(條)'에도 나오지만 즉위 연도와 사망등이 불투명해 실존성이 희박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굳이 신공황후의 신존성을 인정하고 본다면 신공황후 52년 칠지도(七枝刀)문제가 걸린다. 칠지도는 현존하는 유물이고 그 칼에는 '泰和四年'이라는 중국연대가 새겨져 있다. 이 연도를 추적해 보면 두 가지 밖에 없다. 즉, '魏國 太和 四年=230년'이 아니면 '中國東晋 太和 四年=369년'중에 하나라는 얘기가 된다.
일본 학자들은 이를 두고 2주갑(周甲) 인상론에 의거해 동진의 369년으로 그 기년을 잡았다. 그렇게 될 경우 신공황후는 4세기 여왕이 되어 히미고와 완전 분리되고 신공을 히미고와 대응시킨 일본서기와도 정면으로 대치된다. 말하자면, 스스로 모순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국 연대인 230년도로 보면 놀랍게도 위지의 히미고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가 일치한다. 위국은 한말(漢末)의 삼국 가운데 한로서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을 대신하여 화북에 세운 나라이다.
아무튼, 백제가 칠지도를 보낸 신공황후 52년을 서기 230년으로 보면 신공황후의 즉위 ㅇ녀수가 69년이므로 그녀의 사망연도는 서기 247년(신공 69년)이 된다. 그리고 히미고의 사망연도도 역시 247년(魏正 8년)이다. 사망연도가 같다는 것은 두 여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칠지도의 태화 4년은 서기 230년으로 봄이 마땅할 것이다. 또한 2주갑 인상이란 말도 필요없다. 신공황후 52년이 서기 230년이라면 그녀의 즉위연도는 179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또 신라측의 기록을 보면 이보다 6년전인 173년에 왜국의 여왕이 사신을 신라에 파견했다는 말이 있다. 이때가 신라 아달왕(阿達王) 20년이었다. 이는 중국, 일본과 불일치한다. 179년에 즉위한 신공황후인데 6년전인 173년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신공황후앞에 제위했던 중애천황 재위연수를 기록상으로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즉 중애천황이 9년(170~179)동안 재위했다고 했으나 실제는 4년(170~174)에 불과하다. 신공황후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173년부터 황후로 즉위하기까지 6년(179년)동안은 남왕파(男王派)와 여왕파(女王派)가 싸움을 벌인 암흑기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위지 '왜인전'에도 '왜국은 본래 남자왕이 지배하였으나 수년간의 내란 끝에 여왕이 됐다'라는 기록이 있고 또 '남자왕이 70~8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난리가 났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분석해보면 왜국의 성립 시기는 중애천황 말년(173)에서 70~80년전인 서기 100년경(93~103)이 된다. 이는 서기 18년에 공주를 도읍한 비류백제의 해외 세력이 100년경에 일본구주로 진출하여 식민지 담로주를 세웠다는 것과 일치하며, 이 담로주의 건설자가 비류백제의 황손 경경저존이었다는 것과도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경경저존은 신화중의 이름일뿐 실제 이름은 숭신천황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숭신천황은 도해자였다. 또한 그는 일본서기에서 10대왕인데도 불고하고 '어조국(御肇國)''소지초국(所知初國)'이란 시조칭호가 붙어 있다. 이에 일본서기의 편자는 국가 기원을 아득한 옛날로 끌어올리기 위해 역사를 조작하고 가짜 천황을 숭신이전에 나열했던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응신천황이 서기270년에 즉위했다고 하나 그의 원년 기사에는 실제 즉위연도가 '太歲庚寅', 즉 390년으로 나와 있다. 이때는 백제진사왕 6년이었다. 270년과 390년사이에는 120년(2주갑)의 차이가 있다. 이 시기를 두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일본열도의 암흑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국가도 왕도 없던 시기라는 것이다. 일본의 사할자들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줄기차게 2주갑 인상을 주장해 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난데없는 응신천황이 나타나 기내(畿內)지역인 나라에서 국가를 세웠던 것이다. 일본의 江上彼夫라는 할자는 이를두고 응신천황이 1대 신무천황과 동일인물이라고 역설했다. 그 이유로 신무천황이 서기전 660년에 황위에 올랐다고 하나 거짓말이고 10대 숭신부터 14대 신공까지는 비류백제의 담로주가 일본을 통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15대째인 응신천황이야말로 일본역사상 최초의 천황이 된것이다. 또, 신무천황은 북구주에서 기내로와 즉위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 그러기에 북구주에서의치적은 기록되어 있으나 기내 이후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 반면 응신천화응ㄴ 출생지가 북구주였다고 했으면서도 북구주에 관한 기록은 없고 기내 이후 치적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양쪽의 기록이 합쳐져야 완전한 기록이 된다. 학자들은 응신과 긴무를 동일인물로 보면서도 신무즉위전에 있었던 전사(前史) 7년을 도외시했던 것이다. 응신에게도 당연히 있어야 했던 전사 7년이다.
일본서기 은신천황원년기사를 보면 태세경인(太歲庚寅), 즉 390년에 즉위했다고 되어 있다. 응신천황의 전사 7년(기내까지의 이동사실)을 그의 즉위 원년에 더하면 397년이 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397년이 바로 비류백제가 명망한 396년 그 이듬해가 된다. 공주를 탈출한 비류백제 황손 경경저존이 일본으로 건너가 응신(신무)으로 즉위한 것이다(397년).
응신천황의 성은 백제왕의 성인 '眞'씨였다고 '일본신찬성씨록'은 전하고 있다. 이는 곧 응신조(應神朝)가 기내 백제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경경저존, 즉 응신(신무)이 일본으로 망명하고 난 뒤 270년 만에 온조백제는 신라의 참공을 받아 멸망하였다(660). 이에 응신의 망명정부는 본국과의 유대관계가 끊어지자 비로소 국가의식에 눈 떠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정하고(670) 새로운 출발을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일본인은 원래부터 일본인이 아니었다. 또한 천황도 원래부터의 천황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비류백제에서 건너간 도해인의 후손이며 기내 백제의 백성이다. 또한 천황도 기내백제의 천황일 뿐이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편자는 응신천황의 망명을 은폐하고 역사를 왜곡시켜 놓은 장본인이다. 우리는 앞서 열거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발전을 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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