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중부
그는 예종 1년인 1106년에 태어나 명종 9년이던 1179년 까지 생존했던 고려중기의 무인이다. 본관은 해주 (海州)이며, 처음 주(州)의 군적(軍籍)에 올라 상경하여 공학금군(控鶴禁軍)을 거쳐 인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었다. 궁중 에서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인 김돈중(金敦中)이 촛불로 그의 수염을 그을리자 김돈중을 묶어놓고 욕보임으로써 김부식의 노여움 을 받기도 하였다. 의종초에는 교위(校尉)를 거쳐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그런데 당시 무인들은 문신들에 비해 경시되는 정도가 극에 달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견룡행수(牽龍行帥)인 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가 거사할 것을 제의하자, 그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하여 의종을 거제도로 귀양보내고 명종을 새로 옹립하는 등 무신정권시대를 열게되었다.
무신란 직후 의종의 개인 저택을 차지하고 자신과 외가의 관향(貫鄕)을 승격시켰으며,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중서시랑평 장사(中書時郞平章事)가 되었고 1등공신에 올랐다. 1173년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의 란을 진압하면서 다시 한번 문신들을 살해하였다. 이듬해 9월에 서경유수 조위총이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군이 파견되었는데, 이때 그의 아들 균(筠)이 종참(宗 ) 등을 이용하여 이의방을 제거했다. 그 결과 이의방-정중부의 연합정권이 무너지고 그는 문하 시중에 임명되어 무인집정에 올랐다. 정중부정권의 수립으로 이의방의 무력에 눌려지내던 상급무인들이 정치일선에 실력자로 등 장했으며, 문신들과의 관계도 다소 원만해졌다. 1175년 궤장( 杖)을 하사받았으며, 이듬해 조위총의 난을 평정했다. 1178년 치사 (致仕)했다. 남의 토지를 탈점하여 전원(田園)을 광범위하게 설치했으며 정권을 남용했다. 1179년 상급무인들이 잇따라 죽으면서 정중부 일가의 권력집중이 심화되었으며, 문신들과의 연계를 담당하던 사위 송유인(宋有仁)이 문신의 대표격인 문극겸(文克謙)- 한문준(韓文俊)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문신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그러던 가운데 경대승(慶大升)에 의해 정균-송유인과 함께 피살되었다.


■정중부의 난〔=경인란(庚寅亂), 1170년〕
고려 초기 문반과 무반은 모두 1∼9품에 이르는 단일 관계체제 안네 일원적으로 편 성되어 양반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문반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군대를 지휘·통수하는 병마권까지 장악하기에 이 른다. 이에반해 무반은 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로 전락하는 등 외면적으로 문반에 비해 경시되고 훨씬 세력이 미약했 다. 또한 그러한 정치적 배경 외에 10∼11세기 이래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발생되는 부(富)가 대부분 문신귀족층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즉, 문신귀족층은 고리대와 토지개간·토지탈점, 대외무역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해갔다. 이러한 사회 ·경제 상황으로 인 해 민(民)의 대규모 유망현상이 일어났으며, 군인들은 군인전(軍人田)조차 문신정권에 탈점되어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 에서 의종은 문신들과 함께 유락으로 세월을 보냄에 따라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국가재정이 낭비되었으며, 백성들로부터의 착귀가 가중되었고, 무인들에 대한 천대는 극으로 치달았다.
그리하여 1170년 8월 무인인 상장군 정중부는 의종이 문신들과 보현원에 가게 되었을 때 이의방·이고와 함께 거사를 일으키기 로 모의했다. 왕이 보현원에 가는 도중 5문(五文) 앞에서 시신(侍臣)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무인들로 하여금 씨름을 하게 했는데 , 이때 문신 한뢰(韓賴)가 승부에서 진 대장군(大將軍) 이소응(李紹膺)의 뺨을 때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정중부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에게 당한 수모를 떠올리며 분노하여, "벼슬이 3품인 상장군을 어찌 그리 욕을 보일 수 있는가"하며 한뢰 를 나무랐다. 그리고 저녁 무렵 왕의 가마가 보현원에 가까워지자 이고·이의방과 함께 거짓 왕지(王旨)로 순검군(巡檢軍)을 모 아 왕을 둘러싼 문관 및 대소신료(大小臣僚)·환관(宦官)을 몰살했다. 무인들은 다시 개경으로 군졸을 보내 문관을 학살했다. 이 에 당황한 의종은 무관들을 상급으로 회유하려 하였으나,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은 의종을 거제도로 내몰고 대신 왕제(王第) 익 양공(翼陽公) 호(晧)를 왕위로 올렸다. 그리하여 자신들은 새로 즉위한 명종에 의해 벽상공신으로 봉해지고, 정사를 좌우했다. 이 난으로 많은 문신들이 살육되고
대신 무인들이 집권하여 군사권은 물론이고 문인의 직능이었던 정치·행정권까지 독점했으며,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문신인 문극 겸(文克謙)·이공승(李公升)·서공(徐恭) 등을 기용하여 국정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정중부의 난을 계기로 약 1세기 동안 무신 정권시대가 지속되었다.

■ 무신란 발생원인에 대한 여러 주장
상기(上記)한 바와 같이 정중부의 난은 약 1세기 간의 무신정권시대를 열었다. 그렇다면 무신란의 발생원 인은 무엇일까?
▶ 윤용균(尹瑢均) : 문관이 무관을 억제하여 그 직권을 빼앗아 경멸함으로 말미암은 문·무의 반목에다가 의종이 문신을 편애 하고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은 것이다.
▶ 변태섭(邊太燮) : 꾸준히 계속된 무반의 정치·경제·사회상의 지위상승과 숭문정책(崇文政策)과의 충돌이다.
▶ Edward J. Schultz : 문신세력 등의 공격에 의해 정치적으로 고립되고 있던 의종이 내시(內侍)·환관(宦官)을 자신의 정치세 력으로 성장시켰으나, 이들의 횡포가 무신들을 격분케 한 것이다.
▶ 하현강(河炫綱) : 의종은 의식적으로 무신을 천대하지 않았고 각지에의 행차는 그 왕위의 보존에도 문제가 있던 현실에 대한 불안감의 발로이지 경박 방종한 성격의 탓만은 아니다. 유교와 비불교사상(非佛敎思想), 문신세력과 왕실의 대립 갈등, 인종(仁 宗) 때 이래 왕권의 실추로 말미암은 무신의 왕권 경시와 같은 시대적 상황이 무신란 발생이라는 시대전환의 요인인 것이다.
▶ 이기백(李基白)·정두희(鄭杜熙) :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몰락해가던 군인들의 불평이 집약된 것이다.
▶ 강진철(姜晋哲) : 사회·경제체제의 모순으로 고난을 겪던 농민·병사의 동조 → 전시과 체제의 모순 극대화에 의한 것이다.



◆ 참고 문헌

- 제2판 한국사 연구입문, 지식산업사, 1987

- 이만열, 한국사 연표, 역민사, 1985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인터넷의 각종 역사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