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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 조선

漢(한)이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북중국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많은 유망민들이 고조선 에까지 파급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특기할 만한 사건이 衛滿(위만)의 망명이었다. 燕王(연왕) 에 책봉되었던 노관이 匈奴(흉노)로 망명하자 그의 부하였던 위만은 무리 천여명을 이끌고 고조선의 준왕에게 국경지대인 서변에 거주할 것을 청해왔다. 그는 준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아 博士(박사)직에 임명되고 백리의 땅에 봉함되었으나 차츰 늘어나는 중국 유망 민 세력을 기반으로 오히려 준왕을 공격, 왕위를 찬탈하고 말았다. 이가 곧 고조선 의 세 번째 단계인 위만조선인 것이다. 종래에는 이 위만조선을 순전한 중국인 이주 자들에 의하여 지배되는 식민지 정권으로 이해되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크게 是正(시정) 되고 있다.

이병도는 위만이 정권을 탈취한 배경과 중국 내의 사정을 소상히 설명하고 결국 통 념대로 믿어오던 위만이 중국인이 아니라 조선인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논거가 제시되었다.

첫째, 당시 燕(연)의 영역 내에는 주민 구성이 복잡하여 조선인 계통의 사람들이 있었 고, 둘째, 위만이 結蠻夷服(결만이복)하였다는 기사는 곧 이것이 조선인의 풍속을 말하는 것 이며, 셋째, 職名(직명)에 보이는 相(상) 같은 것이 중국적이 아니라 원시 부족장제의 유풍이 남아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한편 고고학의 측면에서 위만조선을 고찰할 경우 흔히 연의 화폐인 明刀錢(명도전)이 한반 도 북부까지 연의 영역에 가까운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것을 들어, 곧 한반 도의 철기문화가 연으로부터일 것이라는 단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貨幣(화폐)로 서, 交易(교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기원전 7세기를 전후하여 한반도에는 철 기의 보급이 서서히 시작되었고, 따라서 위만조선이 철기문화를 향유한 것은 틀림없 으나 그 때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한 무제의 군사와 정면 대결할 수 있던 조선의 힘도 1·2백년간의 철기문화로는 불가능한 것이며 적어도 수백 년의 鐵製利器(철제이기)를 생산 한 저력 위에서 이룩된 힘이 바탕이 된 것이다.

특히 고인돌과 돌널무덤(石棺墓)은 기원전 10시기 이전부터 만들어지면서 청동기 유물을 반출하고 있다. 그런데 세형동검이 이들 분묘에서 나오거니와, 널무덤(土壙 墓)에서도 세형동검이 나타나는 것은 유물 자체의 전승이 정치적 권력과 함께 계기적 인 발전을 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위만조선의 출현이 주 민의 일대 변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