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학의 배경과 그 성격
16세기 말에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사림들은 당리당약적인 당쟁에만 몰두하고 부국강병을 외면하였다. 왜·호란 후에도 성리학만 최고의 가치로 내세워 華夷論적 입장을 고수하고 문화·사회의 폐단 시정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 국 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였다.
16세기 말(선조·광해군 때) 일부 동인 중에서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의 균형적 발전,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한 문화·정치를 혁신하려는 움직임(정여립·정인홍)이 대두하였다. 그들은 예언 사상을 신봉(도교·비결·정감록 등)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학문적 체계를 세우기도 전에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새로운 문화 운동으로서 학술·종교·철학·문학·예술 등 모든 문화 분야에서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학술 분야에서 나 타난 새로운 학풍을 실학이라고 한다. 실증적이고 실용적이며 과학적, 근대 지향적 성격으로 실학은 정권에서 소외된 농촌 선비 나 재야 학자들(남인·소론·노론 서자)에 의해서 주도되었으므로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2. 농업 중심의 개혁 사상 ( 중농 학파 )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제도의 개혁 (토지·조세·교육·관리 선발·군사 제도 등)을 추구하여, 지주 제의 철폐와 자영농의 육성을 주장하였다(경세치용 학파). 대부분 남인 출신이며,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이 대표적 인물이었다 .
반계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저술하여 중농 학파 실학을 체계화했고 균전론에 의해 관리와 사·농·공·상에게 차등을 두어 토지를 재분배하여 자영농을 육성하자고 주장하였다. 또 자영농을 중심으로 하는 병농 일치의 군사 조직과 사농 일치의 교 육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문벌 숭상, 적서 차별, 과거제도, 노비 세습제 등을 비판했으나 가정 내에서의 적서 차별, 천민 차별, 문음·노비 제도 자체는 인정하여 유교적 한계성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성호 이익은 성호 학파를 형성하여 안정복·한치윤·정약용·이긍익 등에게 영향을 주었고, 저서로서 백과 사전적인
성호 사설과 제도 개편론인 곽우록이 있다. 토지 제도에 있어서는 한전제에 의해 농가 매호에 영업전을 지정해 주고, 매매 할 수 없도록 하자고 주장하였고, 그 외의 토지는 매매를 허용하여 점진적인 토지 소유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국가 빈곤과 농촌 피폐의 원인으로 6가지 좀(노비제·과거제·문벌·사치나 미신등의 기교·승려·게으름)을 규정하였다. 고리대와 화폐의 폐 단을 비판(폐전론)하고, 환곡 대신 社倉 제도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중농 학파의 사상을 포함한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의 3부작과 탕론·전론·원 목 등의 논설이 대표적이다. 이 저서들은 500 여권의 여유당 전서에 포함되어 있다. 목민심서는 지방 행정 제도의 개 혁 방안으로, 지방관이 지켜야 할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경세유표는 중앙의 여러가지 제도 개혁방안을 제시했고, 흠흠신서는 형법 제도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정약용은 남인 출신으로 신유 박해(1801) 때 전남 강진에서 18 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의 토지 제도는 여(30호 단위의 부락) 단위로 토지를 공동 경작하고 , 노동량에 따라 소득을 분배하는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로 閭田制를 구상하고 보다 실현 가능한 방안으로 국가가 장기적으로 토 지를 사들여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자영 농민을 육성하고, 아직 사들이지 못한 지주의 토지는 병작 농민에게 골고루 소작하게 하자는 내용의 井田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는 국방·정치·과학 분야에서의 개혁으로 향촌 단위의 방위 체제와 백 성의 이익과 의사가 반영되는 민본적 왕도 정치를 주장하고, 수원성의 설계와 거중기의 사용, 한강 주교 설계를 하였으며 종두법 을 주제로 한 마과회통을 편찬하였다.
기타 중농적 실학자로는
색경을 지은 박세당, 산림경제를 지은 홍만선,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 등이 있다.
중농적 실학사상은 한말의 애국계몽 사상가와 일제시대의 국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상공업 중심의 개혁 사상 ( 중상 학파 )
18세기 후반에 크게 발달한 상공업과 청·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북학파라 하며,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외국 여행의 경험이 많은 노론 집권층에서 다수 배출되었다.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 혁신 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利用 厚生 學派라고도 한다.
대표적 인물로 농암 유수원을 먼저 꼽을 수 있다. 그는 중상 학파의 선구자로
우서를 저술하였는데 중국과 조선의 문 물을 비교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했다. 유수원은 농업의 전문화·상업화와 농업 기술의 혁신을 통한 생산의 증대를 주장하였다. 또한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부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합자를 통한 경영 규모의 확대, 대상인의 지역 사회 개발 참여를 적극 주장하였다.
담헌 홍대용도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저서
담헌서에 지전설을 주장한 의산문답과 균전제를 주장한 임하경 륜을 남겼다. 또한 기술 문화의 혁신과 신분 제도의 철폐를 주장했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 강병의 근본이라고 믿었다.
세번째 인물로 연암 박지원을 들 수 있다. 저서로서
열하일기, 농업기술을 알린 과농소초, 한전론을 설명한 한민명전의가 있다. 그는 농업 부문의 개혁안으로 한전론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영농 방법 혁신, 상업적 농업 장려, 농기 구 개량, 관개시설 확충 등 농업 기술의 개선을 통한 생산력 증대에 큰 관심을 가졌다. 상공업 부문에서는 수레·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초정 박제가를 들 수 있다. 그는 저서로 청의 풍속·제도 소개, 사회·경제 개혁안을 제시한
북학의를 남 겼다. 그의 개혁 사상은 상공업의 발전을 강조하여 청과의 통상을 강화, 수레·선박의 이용 증대, 절검보다 소비를 권장하였는데 이는 소비가 생산의 촉진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학자들의 사상은 농업 중심의 유교적 이상 국가론에서 탈피하여 보다 적극적인 부국 강병책을 제시하였으며, 후 에 개화 사상가( 박규수·김옥균 )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참 고 문 헌

- 한국사 연구입문, 한국사 연구회, 지식 산업사, 1992

- 한국사, 이윤채·서경원, 한유 출판사, 1990

- 한국사 연표, 이만렬, 역민사, 18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