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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화성 
 

정조는 조선의 일대 변화를 추진했으며, 강대한 조선의 건설을 꿈꾼다. 당시, 정조는 1789년에 이르러, 1762년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60여 차례에 걸친 능행차를 하면서 효(孝)를 앞세워 민심을 얻어 나간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의 중심지로 수원을 선택하고, 그 곳에다가 자신이 꿈꿔온 이상적인 도시를 세운다. 

바로 수원 화성(華城)이다. 수원 화성은 1794년 초부터 1796년 말까지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된,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이다. 수원 화성은 당시 30세였던 정약용이 설계하고 공사를 마무리한다. 그는 규장각에 있던 관련 서적을 모두 섭렵하고, 조선 성은 물론이고 중국·일본 및 서양 등지의 성도 연구하여, 전혀 새로운 개념의 최고의 성을 건설한다. 길이가 5Km에 이르는 긴 성곽은 수원을 길게 감싸안은 채, 합리적이며 실용주의적인 구조로 축조되었다. 또한, 걸어서만도 2시간 30분정도가 걸리는 규모있는 성이기도 하다. 특히, 과학기술과 건축술이 총동원되었으며, 기중기를 설계해 사용함으로써 공사기간과 비용을 30%정도 절약하기도 한다. 지금도 문화예술적 감각과 조형미는 세계적인 수준이라서 한국 성곽 건축물의 으뜸으로 친다. 

지난 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5번째, 세계적으로는 380여 번째로서, 근대 초기의 군사건축으로서 동서양의 과학을 통합하여 발전시킨 건축물로 평가된 것이다. 

자, 이제 수원 화성으로 가 보기로 하자. 수원 화성은 북문격인 장안문을 기점으로, 북동포루→화홍문→방화수류정→북암문→동암문→동북공심돈→ 동대문격인 창룡문→동포루→봉돈→동남각로→남대문격인 팔달문→화양루→남포루→서남암문→서포루→서암문→서장대→ 서포루→서대문격인 화서문→서북공심돈→북서포루→장안문이 둥근 원처럼 둘러싸여 있다. 화홍문은 수원 화성을 관통하는 북쪽 강루 수문 위에 세운 누각으로서, 다리 축성술을 이용하여 보기 좋게 지어 놓았다. 방화수류정은 뾰족한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높은 축대와 긴 기둥으로 올려 지었다. 좁은 지형임에도 온갖 정성을 기울여 지었는데 정자 내부의 마루공간은 매우 섬세하다. 그 위에 올라가면 앞쪽엔 용연 연못물이 소나무·버드나무와 어우러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포루의 건장한 모습이, 왼쪽으로는 아래로 물줄기를 흘려보내고 있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문인 화홍문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몰래 성을 드나들 수 있게 만든 북암문도 있다. 그러면서도, 북암문은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하게 감춰진 형상이며, 사람들이 이 좁은 통로로 이동할 수 있게 배치했다.

 동북공심돈은 넓은 잔디밭과 활터 등이 있으며 수원 화성 중에서 가장 독특한 외모를 보여 준다. 성의 동북쪽 돌출부에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어깨를 딱 펴고 선 모습의 원통형 망루인데, 최상부에는 누각을 세웠으며, 내부에는 나선형 계단이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봉돈은 검은 벽돌을 높이 9.38m로 쌓아 올려 조형미가 넘치게 만들었다. 봉돈 안에는 봉화를 올리는 굴뚝 5개가 줄지어 있고, 벽체 중간중간에는 여러 개의 총구가 대칭형을 이루며 뚫려 있다. 동대문격인 창룡문은 18C 당시 축적되어 있던 국내외의 최신 건축술을 모두 동원하여 '치','옹' 같은 정교한 성곽구조를 갖추었다. 서장대는 가장 조경이 잘 되어 있고, 성벽 안쪽에는 길이 있어 깔끔하게 정리된 산책로 같다. 서장대는 수원 화성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수원 화성의 총지휘 본부였으며, 지금도 전망대로서 훌륭하다.

 암문은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석진 곳에 지어진 건축물인데 북암문, 돈암문, 서남암문, 서암문 등 네 곳에다 지었고, 모양이 서로 달라 각각 제 나름대로의 건축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옹성은 성문에 접근한 적군을 뒤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문 앞쪽으로 길게 반원형으로 성벽을 빼낸 것을 일컫는데, 장안문(북문)·창룡문(동문)·팔달문(남문)·화서문(서문)에 모두 지어져 있으며 지금도 훌륭한 조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물은 삶의 원천인 만큼 수원천을 끼고 성을 세웠으며, 수원 화성을 관통하는 강을 따라 수문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건축 설계 및 축성과정이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고, 「수원능행도」·「외규장각전서」 등에 그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전하고 있다. 

정조는 화성과 더불어 그 궁궐격으로서, 능행차 중에 정사를 돌보고 머물기 위해, 1796년 팔달산 아래 1만 3천여 평에 33동 577칸을 갖춘 화성행궁(華城行宮)을 건설하기도 한다. 행궁의 출입문이었던 경룡관(景龍館)을 지나면 정조가 국사를 보던 정전(正殿)격인 봉수당(奉壽堂)과 임금의 침전으로 쓰인 장락당(長樂堂)이 있었으며, 기타 복내당(福內堂) 등 여러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봉수당 왼쪽의 좌익문(左翊門), 유여택(維與宅), 득중정(得中亭), 건물을 잇는 회랑(回廊), 임금이 걸어다니는 어도(御道) 등이 있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수원 화성과 행궁을 지금처럼 어수선한 도심속에 어지럽게 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화성과 행궁을 다시 복원하여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에 선보여야 한다. 과학기술과 건축술 등 세계인에게 한국의 진면목을 보일 또 하나의 모습으로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속에서 정조와 정약용의 꿈과 포부를 바라보아야 하리라. 또한, 정조능행차도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 재현해내고, 이를 해마다 개최해 나가야 하리라.

 그나마 수원 화성과 행궁을 하나하나 복원해 가고 있어 다행이다. 게다가, 정약용의 도설(圖說) 등을 모아 홍원섭이 펴낸 「화성성역의궤」등 관련 문헌과 발굴기록, 사진 등을 토대로 하고 문화재 전문 건축가를 동원하는가 하면, 남아 있는 기단석 등을 그대로 사용하여 복원하고 있어 더욱 다행스럽다. 또한, 정조능행차를 수원시에서 재현하고 있기도 하다. 대완성을 마무리하는 그 날까지 치밀한 문화 및 역사 복원 작업에 힘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