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한 사 회

1. 辰國社會(진국사회)의 成長(성장)

漢江(한강) 유역 이남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하나의 文化的(문화적) 統一性(통일성)을 가진 정치적 세력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 지방에 지석묘가 발생하는 것과 때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진국은 B.C. 2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史記(사기)』 115 조선전의 기사에 의하면 진국은 漢(한)에 글을 보내에 직접적인 通交(통교)의 길을 트고자 하였다. 이는 中國(중국)의 金屬文化(금속문화)에 대한 욕구의 표현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던 衛滿朝鮮(위만조선)과의 경쟁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漢(한)의 郡縣(군현) 통치가 실시되자 古朝鮮(고조선) 지방으로부터 많은 流移民(유이민)이 진국사회로 들어왔다. 진국사회는 처음 20여년간은 한강 이북의 眞番郡(진번군)과, 그 철폐 이후에는 樂浪郡(낙랑군) 예하 南部都尉(남부도사)와 직접 접촉을 가지는 한편 이들 유이민을 통하여 더욱 발달된 금속문화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사회적 변화도 급속히 진전되어, 그 결과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는 馬韓(마한)·辰韓(진한)·弁韓(변한)의 三韓(삼한)이 등장하게 되었다.

2. 三韓(삼한)의 成立(성립)과 位置(위치) 問題(문제)

三韓(삼한)이 성립되던 시기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의가 거듭되고 있다. 본래 '韓(한)'은 辰韓(진한)만을 가리키는 호칭이었으나, B.C. 1세기 경 북쪽으로부터 남하한 유이민들이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진한 사회를 성립시키게 되자 대체로 安城川(안성천) 이남의 충남·전라 지방에 이미 성립되어 있던 先住民(선주민) 사회가 각기 馬韓(마한)과 弁韓(변한)을 칭하게 됨으로 하여 성립되었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三韓(삼한)의 성립에 대해서는 定設(정설)이 없는 실정이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三韓(삼한)의 위치 문제 또한 확고한 定設(정설)이 없다.

대체로 馬韓(마한)을 경기·충청·전라 지방, 辰韓(진한)을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지방, 弁韓(변한)을 낙동강 서남쪽의 경상도 지방으로 보는 것이 대표적인 견해이지만,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예성강 이남의 경기 일원과 춘천 서쪽의 강원 일부를 辰韓(진한), 안성천 이남의 충청·전라 지방을 馬韓(마한), 영남 지방을 弁韓(변한)으로 보는 설도 있다.

3. 辰王(진왕)의 출현과 目支國(목지국)

A.D. 2세기 후반에 들어와 後漢(후한)이 약화됨에 따라서 郡縣(군현)의 통제력도 자연 미약해졌다. 이에 따라 樂浪郡(낙랑군)의 통제를 받던 土着(토착) 세력들이 많이 한강 이남 지역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었는데, 三韓(삼한)은 이들 세력을 흡수하여 점차 강성해졌다. 바로 이 시기에 三韓(삼한) 사회에는 연맹장으로서의 辰王(진왕)이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後漢書(후한서)』 85 東夷傳(동이전) 韓(한) 조에는 馬韓人(마한인)을 共立(공립)하여 辰王(진왕)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는 目支國(목지국)을 거점으로 하여 三韓(삼한) 세력을 대표하였다고 한다.

이 辰王(진왕)의 존재에 대해서도 많은 이견들이 있지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그 사실성을 긍정하여 이를 三韓(삼한) 전체, 특히 馬韓(마한) 여러 나라의 盟主(맹주)로 보는 것이다. 이 聯盟(연맹)에 실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아마도 여러 小國(소국)과의 宗主(종주)·附庸(부용) 관계를 기본으로 하면서 小國(소국)들을 대표하여 中國(중국) 郡縣(군현)과의 외교 교섭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이 辰王(진왕)에 의해 대표되는 삼한 세력의 推移(추이)·發展(발전)은 百濟(백제)·新羅(신라) 양국의 건국 및 초기의 발전과 직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