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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조선

史記(사기) 宋微子(송미자) 世家(세가)조와 漢書(한서) 地理志(지리지) 燕(연)조의 기사에 의하면 殷(은)을 멸망시킨 周(주)의 武王(무왕) 이 은의 왕족으로 현인의 평을 듣던 箕子(기자)를 朝鮮王(조선왕)에 봉하였다고 하고 있는데, 이것 이 바로 기자전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 古朝鮮(고조선)조의 기사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봉해지자 단군은 阿斯達(아사달)로 부터 숨어서 山神(산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李承休(이승휴)가 지은 帝王韻紀(제왕운기)에는 기자조선을 후조 선이라 명명하고, 이는 41대 928년 동안 계속되다가 準王(준왕) 때에 멸망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문헌상으로는 단군조선 다음에 기자조선의 성립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중국 이나 일본학자들 이외에는 오늘날 기자조선을 종래의 견해대로 따르지 않고 있는 것 이 일반적인 학계의 경향이다.

기자가 동래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견해를 부정하고 여기에 대치하여 韓氏朝鮮(한씨조선) 설을 주장한 이병도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三國志(삼국지) 東夷傳(동이전) 馬韓(마한)조에는 준왕의 南奔(남분)을 언급하는 가운데 준왕이 위만에게 공탈되 어 左右官人(좌우관인)을 거느리고 「走入海居韓地(주입해거한지) 自號韓王(자호한왕)」이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종래에는 준왕을 箕準(기준)이라 표기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기준이란 기사가 사서에 없는 것으로 보아 箕(기)라는 것이 姓(성)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韓地(한지)라든가 韓王(한왕) 등의 韓(한)은 준왕이 남쪽에 와서야 비로소 생긴 것이며 준왕 이전부터 있었던 칭호가 아니라고 보 고, 실은 韓氏朝鮮(한씨조선)이기 때문에 韓(한)의 명칭은 준왕이 옴으로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해석하였다.

또 한편 이와는 달리 기자전설의 의미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하려는 입장도 있다. 즉 기자 바로 그 사람은 아닐지라도 기자로 상징되는 어떤 집단, 예컨대 자기의 先 祖(선조)히 기자라고 믿는 어떤 族團(족단)이 대동강 유역에서 고조선을 건국한 것이 이른 바 기자조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견해가 바로 그것인데, 이는 東夷族(동이족)라는 것을 그 배경으로 깔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이 족단의 본거지는 山西省(산서성) 太谷(태곡) 지역이 었으나 殷周(은주)의 교체기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서 동쪽으로 이동, 大凌河(대릉하)·遼 河(요하)를 거쳐 마침내 대동강 유역에 도달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가능한 설명으로도 기자조선의 실마리는 명쾌하게 풀어졌다 고는 할 수 없으며, 그럴 경우 기대할만한 시각으로서 고고학의 성과를 들 수 있다.

김정배는 문헌의 약점을 고고학의 입장에서 증명해보고자 하였다. 기자조선의 시대가 전대의 단군조선과는 민족적·문화적으로 상이하다고 보고 민무늬토기 문화 이래의 우리 나라 청동기 시대가 이 단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즉 모든 사료는 한결 같이 기자조선의 존속기간을 명시하고 있고, 기자조선을 부인한다 하더라도 기자라는 인물과 그 주변 인물들의 東來(동래)를 부정하는 것이지 소위 기자조선이 점하고 있었던 시대나 그 문화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에서 기자로의 교체시기 는 문헌상에 나오는 교체시기(B. C. 1122년), 즉 B. C. 12세기를 그대로 믿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 경우 청동기 문화의 담당주민이 알타이어계의 예맥족이었으므로 기 자조선 대신에 예맥조선으로 명칭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고고학이 기여할 수 있는 역사학에서의 긍정적 역할을 고려할 때 무척 합리적인 견해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