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신라에 "골품제"라고 흔히 불리고 있는 세습적 신분제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골품제는 원래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의 두 골과 6 ∼ 1두품의 여섯 두품의 8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뒤에 성골이 소 멸되고 3 ∼ 1두품은 평민으로 혹은 백성으로 불리우며 그 세분된 의미를 잃게 되었다. 그 결과로 진골·6두품·5두품·4두품· 평민의 5등급으로 정리되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부분에서 여러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졌었다. 그리고 오늘날 여기에 대한 연구 도 한층 심도 있어졌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골품제의 법제적인 규정에만 치중하는 것은 아닌지. 이 골품제의 법제적인 규정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역사가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규정 밑에서 살고있던 인간들의 움직임이 어떠했는가를 이해해야만 골품제가 보다 깊이 이해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골품제도 속에서 매번 쟁점이 되어 왔던 진골과 성골이 아닌, 가장 그 사회에 불만이 많고 세력이 점차 중대해진 6두품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2. 골품제와 6두품
먼저 골품제의 여러 신분층 속에서 6두품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규정을 알아보자. 우선 6두품인 최치원의 말에 의하면 6두 품이란 표현보다는 "득난(得難)"이란 말을 더 표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이는 6두품이 좀처럼 얻기 어려운 귀성(貴姓) 이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즉, 비록 진골보다 많다 하더라도 이 얻기 어려운 귀성이 수십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왕족과 왕비족이 진골로 고정되어 있는 골품제 하에서 6두품은 왕은 물론이고 왕비도 될수가 없는 신분층이었다. 뿐만아니라 진골과의 결혼대상에서도 제외된 신분층이었다. 그리고 비록 결혼은 하더라도 처첩으로 다루어졌다. 이것은 신분제적 제약의 엄 격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신분의 차이가 혈통에 기준을 두는 것인 이상 신분
층의 차이에 따라 결혼의 대상이 제한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만 현재 6두품이 그보다 신분이 낮은 5·4두품 과의 사이에 결혼관계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골품제에 있어서의 6두품의 위치를 말하여 주는 중요한 현상의 하나는 관등 및 관직에 일정한 제약이 있었다는 점이다. 6두품 은 신라의 17관등 중에서 제 6위인 아찬(阿 )에 까지밖에 오를수 없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진골이 제5위 대아찬(大阿 )이상 제 1위 이벌찬(伊伐 )까지도 오를수 있는 것에 비하여 심한 제약이 있슴을 알 수 있다. 한편 6두품보다 낮은 5두품은 제 10위인 대 나마(大奈痲) 이상으로 오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제 9위 급찬(級 )으로 부터 제 6위 아찬(阿 )까지는 5두품 이하의 신분층 보다 6두품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급찬에서 아찬까지의 관등은 6두품의 독점인 것이 아니라 진골도 되는 것이다. 6두품으로 볼때는 급찬 이상으로 오를 수 있는 특권보다도 아찬 이상으로 진급이 허락되지 않는데 대한 안심이 더 큰것 이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것은 자연스러운 심리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며 불평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점을 감안해서 아 찬(阿 )에는 중아찬(重阿 )에서 4중아찬(四重阿 )까지가 첨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들도 제 6위요 제 5위인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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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찬은 아니지만 보통 아찬보다는 높은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중아찬(重阿 )∼4중아찬은 대아찬(大阿 )으로 오를 수 없는 6두품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이들
관등을 누린 사람들은 이를 모두 6두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등에 따르는 특권과 제약은 관직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중앙의 部·府의 장관직은 대아찬 이상 만이 임명되도록 함으로써 결국 진골 신분에 한하도록 규정되어 6두품은 기껏해야 집 사부(執事部)의 시랑(侍郞)이나 부의 경(卿)등 차관직에 오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골품제에 포함되는 왕경인(王京人)에 한하 는 것이고 따라서 6두품도 왕경인이었다. 골품에 따라 주어지는 관등은 경위(京位)로 되어있다. 그런데 경위는 왕경인에 한하여 주어지는 것이며 거기에 소경인이 (小京人)이 첨가되는 정도였다. 그밖의 모든 지방인은 경위와는 체계를 달리하는 외위(外位)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경위를 가진 사람만이 중앙관직에 임명되는 것이므로 신라 왕경인은 말하자면 일종의 지배자집단(支配 者集團)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6두품이 최고의 신분층은 못되었지만 왕경인으로서 지배자집단에 속하는 중앙귀족이 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3. 6두품 귀족의 활동
6두품 귀족이 주어진 신분적 상황 속에서 얻더한 사회적 활동을 하였는지 알아보자. 그러한 활동 속에는 국외로 망명하는 사 람들의 활동도 있지만 국내에서의 활동에 한하여 보고자 한다.
첫째는 그들이 종교적인 면에서 특출했다는 것이다. 그예로 원광이나 원효를 들 수 있다. 원광이나 원효는 모두 불교의 신앙 속에서 골품의 신분적 차별을 초월하는 높은 경지를 체득하려 하였다. 거기에는 일종의 진골 신분에 대한 사상적인 반박이 내포 되어 있다. 신라 말기의 선종이 또한 6두품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선종은 지방의 호족과 결합하여 중앙의 귀족에 반발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데 여기에는 6두품 귀족의 일부가 가담하고 있다. 즉, 신분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를 열어 놓 으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두번째는 학문적인 면에서 6두품의 진출을 주목해야 한다. 신라에서 "유학자"라 칭해지는 강수와 설총은 모두 6두 품 출신이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면서 최치원 등의 당 유학생 출신의 학자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유당학생 중에는 6두품 출신 이 많다. 그리고 6두품 출신이 정치적으로 진출하는 경우에는 이 학문의 길을 통하여서였던 것이다. 원광과 원효는 불교로써 사 회적으로 출세한 인물이기는 하다. 그러나 6두품이 관직에 나가는 주된 길은 학문의 길이었다. 6두품이 학문을 통해 관직으로 진 출하는 길도 국학과 독서 3품과가 설치 됨으로서 더욱 촉진되었다. 국학의 학생이 되는 데에 가장 흥미를 가진 것은 6두품이었을 것이고 또 국학의 학생을 상대로 실시된 독서3품과의 응시자는 응당 6두품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6두품은 국학과 독서 3품과 를 통해서 전제 당권하의 관료로 출세하여 갔던 것이다. 6두품은 정치적 출세를 위해 왕권과 결탁하였을 가능성을 볼 수 있다. 6 두품의 반발은 왕권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골 귀족에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6두품 귀족들이 왕권과 결합하여 골품제의 한 계 안에서 정치적 참여를 하는데 만족하는 동안은 그들로 말미암은 사회적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신라 말기가 되면서 골품제 자체를 타파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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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이 6두품 속에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6두품 귀족들의 반발이 노출된 것은 신라 중대의 전체주의가 무너진 이후 진골 귀족들의 세력이 다시 대두하여 중앙의
정치무대에 골품제의 여러 모순이 나타나는데 대한 비판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6두품 스스로의 사회적 역량에 대한 자각이 커지고 이와동시에 신라 국학에 입각하는 것 보다도 당에 유학하는 경향이 늘어나서 그들이 당의 과거제에 의한 입신 출세의
법을 스스로 보고 경험했기에 자극이 되었으리라 본다. 6두품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뒤 고려 왕조에서 새로운 관료로 등용되 었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골품제의 제약을 벗어나 중앙의 최고귀족이 되어 그들의 학문에 바탕을 둔 정치 이념을 실천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4. 맺는 말
신라의 주축이 되었던 골품제. 그중에서도 가장 불만이 많고 만족을 모르던 계층인 6두품. 능력우선이 아닌 예전부터 짜여진 골자 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신분층. 초기의 수긍하고 추종하던 세력이 후에 반발세력으로 대두했는가 생각해 보면 그들 의 지식 축적이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6두품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있어서 종교나 학문과 같은 지적인 능력에 의해 서 출세의 길을 트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정치적 출세를 위하여는 학문을 매개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는데 대개는 왕권 과 결합하여 국왕의 사랑 속에서 정치적 참여를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찬이나 집사 시랑 이상으로 승진할 수는 없었지만 국 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큰 경우도 있었다. 국학과 같은 유교 교육기관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