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이 글은 고조선(단군조선)의 역사를 알기 쉽게 요약한 것이다. 그간 학교 교육에서는 고조선의 역사를 자세하게 가르치

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고조선에 대한 이해는 우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특히 오늘

의 시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의 운명이 걸려 있는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세운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조선이 건국됨으로써 고조선의 통치 영역 안에 살고 있

던 사람들이 하나의 통치 조직 속에서 공동체를 형성하여 민족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의 사회

와 문화부터 우리의 민족사회 또는 민족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도 고조선의 강역이

었던 한반도와 만주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하나의 구가로서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사회와 문화가 우리 민족사회와 문화의 뿌리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각 지역 단위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민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사회와 문화는 우리 민족사회와 문화의 원형인 것이다.

고조선의 사회와 문화를 그 원형으로 하여 다른 사회와 문화의 자극과 영향이 첨가되어 기초와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고

조선으로부터 계승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 민족 본래의 모습을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변화를 거쳐 오늘의 모

습에 이르렀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을 것이다. 선진국이 되기 위한 준비는 고조선에 대한 바른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열림 : 고조선은 왜 중요한가.

 

개인이나 집단에게 있어서 그것이 발전한다는 것은 기왕에 있었던 것에 새로운 것이 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전을 위새 시로 더해진 것은 창조를 의미하며 창조는 서로 다른 것이 만나 자극과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일어나는 것이

다. 자극과 영향이 없다면 창조는 일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발전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분명

해졌다. 우리 민족은 다른 나라 사람이나 다른 민족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나라나 다른 민

족의 문물과 접촉하면서 자극과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도전과 응전이라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가치관은 개인이나 민족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 본질이 되는 것이다. 본질적인 것과 더불어 기능적인 것도 필요하

다.

민족의 가치관은 어떻게 작용할까? 첫째, 가치관 정립은 민족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국제사회의 개방화는 우리

민족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우리 민족이 외래 문물에 종속되는 기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나름의 가치관을 갖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올바른 경제 성장을 위해서도 우리 민족의 가치관

정립은 필요한 것이다. 둘째, 민족의 가치관 정립은 통일공동체 형성에도 기여할 것이다. 남북한 거주민들이 공감하는 가

치관을 세우는 일은 진정한 민족 동질성 회복이 될 것이다. 셋째, 민족의 가치관 정립은 사회병리 현상의 치유를 위해서

도 필요할 것이다.

조선의 조정은 유교를 젖어 학문의 지도 이념으로 삼았고 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국의 천자가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

이다. 500여 년 동안 계속되었던 그러한 세월이 조선시대가 끝나면서 우리 민족은 일제의 강점을 맞이하였고 일제는

역사를 왜곡하면서 까지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광복 후 우리는 군정시대를 맞게 되었다. 군정의 교육

정책은 서구 문물의 우월성을 선전하기에 바빴다. 이러한 자존심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열등의식을 씻어 내야 만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능력과 가치관을 올바로 인식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올바른 역사와 민족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민족 철학은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 민족의 가치관이나 민족 철학이란 민족의 구성원 모두가 공감하는 것이어야 한

다. 우리의 역사에는 우리 민족 사회와 문화의 특성이 들어 있다. 우리 민족의 가치관은 생활고 교육 그리고 유전인자를

통해 전달되어 우리의 잠재적 정서를 형성하고 있으나 그것을 체계화하여 가르쳐 주지 않으면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의 가치관을 세우고 민족 철학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고조선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성을 갖는 것은 고조선은 우리 민족 본디의 것을 거의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조선 사회와 문화의 성격은 바로 우리 민족 사회와 문화 특성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풀림 1 단군은 누구인가

 

단군은 누구이며 실제로 존재했는가? 단군은 어떤 사람이며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고조선의 통치자였던 단군에 대한 인식이 불확실하다면 고조선에 대한 이해도 바를 수가 없다. 고조선에 대한

이해가 바르지 못하면 우리 역사 전체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단군은 고조선을 통치했던 통치자에

대한 칭호였다. 단군은 고조선의 최고신인 하느님의 아들 또한 하느님을 받드는 종교의 지도자라는 의미의 칭호였다. 고대

에는 종교가 정치 위에 있었으므로 단군이라 중국의 정치적인 한이라 명칭보다 권위를 지닌 명칭이었다.

북한에서 발굴된 단군릉은 무엇인가? 1993년 10월 2일 북한의 평양 방송은 북한 사회과학원의 단군릉 발굴 보고문

을 크게 보도하였다.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에서 서북쪽으로 좀 떨어진 대박산의 동남쪽 경사면 기슭에 위치해 있

다. 『삼국유사』「고조선」조에는 고조선의 도읍이 아사달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군릉 주변 지명 가운데 아사달

산이나 아달동 등은 고조선과 관계가 있는 지명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일대의 지명과 호수명은 고조선 및 단군과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군릉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단군릉의 발굴 결과 그 연대가 지금부터 5,011년 전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이 연대가 옳다면 이 무덤은 고조선보다 늦은 시기의 무덤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최고의 통치자만이

착용하였던 금동관의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발굴된 단군릉이 진짜라면 단군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부정된 이후 가공된 인물로

치부되어 왔는데 그러한 단군이 실존했던 인물로 확인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단군릉 발굴 소식

이 전해졌을 때 우리는 당연히 크게 환영했어야 옳았을 것을 애써 부인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발굴 사실이나 그곳에

서 출토된 유물까지 조작된 것처럼 말하는 것은 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단군릉 발굴 내용은 조작된 것일까? 단군릉에서 출토된 유골은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측정한 결과 그 연대가 지금부터

5,011년 전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단군 왕검은 중국의 요(堯)임금이 즉위한 해에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 임금이 즉위한 해는 서기전 2333년이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와 『제왕운

기』에 기록된 고조선 건국 연대를 따르면 단군릉의 유골에서 얻은 연대는 그보다 685년이나 앞선다. 그리고 출토된 금동

유물에 관한 것이다. 금동릉 만드는 기술은 청동기가 출현한 후 수백년이 지나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군릉에서

출토된 금동을 5,011년 전의 것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민족이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수백년 앞선 지금부터

5,500년전(서기전 3500년)경으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 가운데 쇠로 만든 못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못들은 고구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것이다. 철제 못이 만일 단군이 묻힌 시기에 만들어졌다면 고조선 초기나 그보다 이른

시기에 철을 사용했다는 것이 되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철기 문호 개시 연대로 보아 그것은 불가능하다.

단군릉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단군릉의 연대가 옳다면 그 연대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연대가 종

래의 연대보다 너무 많이 올라가기 때문에 혹시 단군릉의 연대 측정에 잘못은 없었을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발굴자들에 의하면 단군릉의 양식은 서기 4-5세기경의 고구려 무덤 양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 단군릉을 고구려 시대에

개축했을 것으로 본다. 고구려 시대의 무덤에는 선인이나 신선을 벽화로 그린 무덤이 더러 있다. 신선은 부차적인 것이나

단군릉에는 선인이 주제로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 무덤이 단군릉임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군을 선

인이라고 불렀음이 『삼국사기』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개축된 능은 고구려 시대의 무덤과 구별하기 위하여 벽화를 고

구려의 그림과는 달리 그렸다는 것이다. 철제 못이 관에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발굴자들은 말하고 있는데 단군릉을 개축하

면서 관까지 새로 만들어 넣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단군릉의 발굴 결과는 다음으

로 정리된다. 첫째, 단군릉의 유골에서 얻은 연대와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각각 다른 시기의 것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

다. 둘째, 단군릉의 연대 측정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두 해서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옳을 것으로 성급하

게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풀림 2 고조선 이전에는 어떤 사회가 있었나.

 

고조선은 어떤 과정을 거쳐 건국되었을까?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는 많은 고을들이 생기게 되자 고을을 이끌어 나갈 정

치 지도자인 추장이 출현하게 되었고 고을은 아직 완전한 국가는 아니었지만 정치 권력이 처음으로 출현한 사회였다. 그

고을중 가장 먼저 발달한 나라는 아사달(阿斯達)이었다. 옛말에 아사는 아침을 달은 곳을 뜻한다.

인류 사회 초기는 어떠한 발전 과정을 거쳤을까? 완전한 사름은 언제 지구상에 나타났을까? 고인(古人)들은 약

5만년 전까지 살았다. 그후 새로운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신인(新人)이라고 한다. 학술 명칭으로는 슬기슬기사람이라고

하며 학자들은 신인들이야 말로 오늘날 살고 있는 지금 사람의 직접 조상이라고 한단. 원인과 고인·신인들은 모두 석기를

사용했다. 뗀석기를 도구로 사용했던 시기를 구석기시대라 한다. 구석기는 지금부터 1만 년 전에 끝났으며 떠돌이 생활

을 했기 때문에 식량을 오래 저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재산을 개인이 따로 소유할 필요가 없었다. 재산공유제였던

것이다. 완전한 평등사회였고 무리시대라 한다. 원인이나 고인은 이류의 기원 문제나 그 진화 과정 등을 연구하는데 있

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각 지역 사람들의 직접적인 조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는 신인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 민족의 조상이나 뿌리를 찾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신인들이

지구상에 출현한 초기부터 한반도와 만주에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을까? 무리를 이루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대략 1만년 전(서기전

8000년)부터 붙박이 생활에 들어갔고, 농사를 짓고 짐승을 길렀으나 이동할 수가 없어서 수확을 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

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각 마을이 하나의 독립된 사회 단위라하여 마을시대라 불렀다. 마을을 이

룬 사람들은 씨족이였고 집이 필요하니 지하식 움집이나 지상식 집을 지어 석기는 두고두고 오래도록 사용할 것이기에 정성들

여 다듬고 잘 만들었다. 이러한 간석기를 신석기라 부른다. 재산은 구성원들이 공유하였으며 빈부나 신분의 차이가 없었고

정치적인 조직도 없었으며 모계사회였다. 그러나 이전의 무리사회에 비하면 서열이 있었으므로 무리사회를 완전평등사회라

한다면 마을사회는 서열평등사회라 한다. 당시 사람들은 작물을 심어놓고 그것들이 잘 자라기만 바랄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사냥과 고기잡이· 그러모으기 등이 경제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큰 모험인 농사를 짓

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이전에 툰드라나 초원이었던 지역에 나무가

자라 숲이 우거지게 되며 이전에 살았던 몸집이 큰 짐승은 죽거나 이동해 가고 사슴·노루·토끼등 작고 날쌘 짐승들이

나타나면서 사냥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기후가 따뜻해져 출산율이 증가하니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우니 농업과 목축

은 인류사회의 식량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그 후 농업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영구적인 마을로 변해 갔

다.

정치권력은 언제 출현하였을까? 지금부터 6,000년 전(서기전 4,000년)경에 여러 마을들이 연맹을 맺어 고을을 형

성하였다. 개개인이 재산을 사유화하고 빈부의 차이가 발생하면서 정치권력을 가진 추장이 출현하였고 통치조직도 만들어

졌다. 또 종교 지도자도 출현하므로 서 평등한 사회가 깨어진 것이다. 부권사회로 변했고 전쟁도 자주 일어났다. 이

시기의 공동묘지에서는 다른 무덤들보다 규모가 크고 부장품이 많은 무덤이 발견되었다. 어떤 이유로 구성원들 사이에 평등한

사회가 깨지고 불평등과 전쟁이 일어난 이유로 기후 변화를 연결시켜 생각하겠다. 기온이 상승하면서 출산율이 매우 높

아져 인구는 증가하고 농업 생산은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여서 사람들은 식량에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재산사유제

출현하면서 약탈전쟁과 세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고 마을연맹이 이루어져 고을이 출현하였을 것이다.

 

풀림 3 고조선은 언제 건국되었나.

 

청동기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청동은 주로 농구보다는 종교의식의 의기(儀器)로 상용되었으며 지배층의 독점물이었다.

청동기의 출현은 인류 역사에서 과학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국가의 출현과 밀접한 관

계를 가진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청동기문화 유적 가운데 그 연대가 가장 이른 것을 기준으로하여 유적은 항상

새로운 곳이 발견될 수 있으므로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시대 개시 연대를 서기전 2500년 경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러

므로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문화 개시 연대는 중국의

황하 유역이나 시베리아 또는 중앙아시아보다 앞선다는 점이다.

국가란 어떤 사회라 말할까? 국가가 출현한 사회를 문명사회라 한다. 국가에 대한 개념이 분명해야 한다. 우리

나라나 중국 같은 농업사회에서는 국가가 출현한 이후에도 마을들이 씨족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거주 형태가 혈연 중심

이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모든 지역에 공평하게 적용될 수 있는 국가 단계 사회에 대한 개념 정의는

<법이 출현하여 그것이 권력을 뒷받침한다>는 하나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즉 합법적인 권력이 출현한 사회 단계인

것이다.

고조선은 국가 단계의 사회였을까. 고조선이 역사학에서 말하는 국가 단계의 사회였는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고조선에

법이 존재했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이점을 분명하게 해주는 내용이 중국의 『한서』『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살인을 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힌 사람은 곡물로 보상하며 도적질한 사람은 노비로 삼되 노

비를 면하고자 하면 사람마다 50만의 속죄금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민족은 언제 형성되었을까. 민족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언어·풍습·종교·

정치·경제 등 각종 문화 내용을 공유하고 집단귀속의식에 의하여 결합된 인간 집단의 최대 단위인 문화공동체라고 정의

하고 있다. 이들은 단군을 최고 지도자로하여 하느님을 믿는 동일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동일

한 정치체제와 경제상황 속에서 생활했다. 2,30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서로가 같은 나라

에 속해 있다는 귀속의식이 강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 민족은 토착인들이 아닐까. 한반도와 만주의 주변에서 가장 이른 청동기문화는 황하 유역의 이리두문화(二里豆

文化)인데 서기전 2200년경이며 시베리아에서 가장 앞선 청동기문화인 미누신스크문화는 서기전 1700년 경이다. 그

러므로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인들이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또는 시베리아 등지에서 이동해 왔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민

족은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던 것이다.

 

풀림 4 단군사화는 무엇을 말해 주나.

 

단군사화는 조작된 것일까. 이것은 일제의 고조선 말살 정책의 영향이다. 일제는 우리 겨레의 정체성(正體性)

과 사상의 뿌리를 말살하려고 고조선의 존재를 부인하였고 단군신화를 조작된 것이라고 몰아부쳤던 것이다. 일제의 어용학

자들은 단군신화와 고조선에 대해서 기록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고려 말기에 쓰여진 점을 들어, 고려가 몽

골의 침략을 겪은 후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단군사화와 고조선을 허위로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일연 스님과 이승휴

선생은 불교와 유교 학자로서 그들의 학문 경향은 서로 매우 달랐을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저서에 거의 동일한 내용의 단

군사화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단군사화는 오래전부터 전해왔으며 고려시대에는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

로 생각된다.

단군사화는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단군사화의 내용은 선사시대의 우리 역사를 전해주는 유일한 것이다. 고고학이

선사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게 되었다. 고고학은 신화나 전설이 말하지

않은 부분을 보충해 주거나 신화나 전설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주기도 하지만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단군사회를 분석해

보면 첫째는 환인 단계, 둘째는 환웅 단계, 셋째는 환웅과 곰녀가 결합한 단계, 넷째는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한

단계이다. 단군 왕검이 세운 고조선은 고고학적으로는 청동기시대였고 사회발전 단계로서는 국가사회였다. 환웅과 곰녀가

결혼했다는 것은 하느님을 섬겼던 환웅족과 곰을 섬겼던 곰족의 결합을 의미하므로 후기 신석기시대에 여러 마을이 연맹을

맺었던 고을나라시대를 말하여 준다. 환웅이 지상에 내려와 혼자서 생활했던 시대는 전기 신석기시대로서 마을사회시

대를 말한다. 환인시대는 구석기시대로서 무리사회를 말한다.

 

풀림 5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무엇을 뜻하나.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바르게 사용되고 있는가.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고조선이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었으며 원래 어떤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삼국유사』「고조선」조

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었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스님은 단군조선에 대한 항목의 명칭을 고조선이라 하였다.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는 근세 조선이 출현하기 전이었으므로 고조선이라는 의미는 근세 조선 이전의 조선을 뜻하는 것이 아

니라 위만조선과 같이 후에 출현한 조선보다 오래된 조선이라는 뜻이다. 고조선은 단군조선만의 명칭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

이다.

조선이라는 국명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고조선의 국명은 <조선(朝鮮)>이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 왕검이 나

라를 열고 비로서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고조선이 건국되던 서기전 2300년 경에 우리 민족이 한자를

사용하여 국명을 지었을까? 이병도 선생은 조선이라는 명칭은 아사달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았다. 『삼국유사』에 고

조선의 첫 도읍이 아사달로 기록되어 있는 점에 착안하여 조선은 고대 조선어의 아사달이 한자화되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

다. 후에 그들이 나라를 세우고 중국과 교류를 갖게 됨에 따라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조선이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

다.

중국인은 조선의 유래를 어떻게 보았는가. 중국의 기자가 망명하여 그 지역에 거주하게 되자 그 지역을 기자조선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것이 지역 명칭으로 고착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이라는 명칭이 산수라는 강명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수라는 강명이 조선이라는 명칭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풀림 6 고조선은 얼마나 넓은 나라였나.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어디였을까.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진제국의 동북부 국경은 조선에 미쳤고 요동에 이르

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대 요동의 위치는 갈석산 지역을 요동이라 하였으며 갈석산은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하류 동부

유역이다. 난하가 요수였음을 알 수 있다. 요동은 요수 유역을 말하므로 지금의 난하가 요수였다면 고대의 요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동은 무슨 뜻이며 어느 곳에 있었을까. 지금의 요서 서부 지역이다. 요동이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기준으로

하여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한다. 요동을 기준으로 해서 요수라는 말이 생겼던 것이다. 이로 보아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고 요동은 난하 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요하와 요동은 난하로부터 동쪽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

져 위치하였는데 언제 어떠한 원인으로 그 명칭이 이동하였을까. 지금의 요하는 요수가 아니었으며 중국인들이 그것을 요수

또는 요하라고 부른 이후에도 우리 민족은 그 강을 압록강 또는 안민강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일반적 의미의 요동은 자연히 동쪽으로 이동하였지만 행정구역인 요동군은 행정구역과 명칭의 개편이 없는 한 이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어느 곳이었을까. 만리장성은 북쪽에 있던 흉노와 동북쪽에 위치해 있던 동호 및 고조선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앞에서 지금의 갈석산 지역이 요동이었으며 만리장성이 그곳에서 끝났음을 확인하였다. 갈석산

에서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은 사실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갈석산에서 시작된 만리장성이 지금의 난하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뻗어갔던 것이다.

고조선의 패수는 어느 강이었을까. 고조선과 중국 사이의 국경에는 패수(浿水)라는 강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 온다. 고

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었던 패수는 다음 두 가지 조건을 갖춘 강이어야 한다. 지리적으로 고조선과 중국의 원래 국경보

다 약간 중국쪽에 위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서한이 고조선과의 국경을 원래보다 후퇴시켜 패수로 국경을 삼았기 때문

이다. 시기적으로 고조선시대에 패수로 불린 강이어야 한다. 고조선과 국경을 이루었던 패수는 중국 고대의 요동군 내를

흐르고 있었던 지금의 난하 하류였거나 그 서부 지류 또는 난하보다 약간 서쪽이 있었던 강이어야 한다.

고조선의 남부와 북부 경계는 어디까지였나. 남부 국경은 청천강이나 예성강으로 보았으나 고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동검이 한반도와 만주 전지역과 북경 너머에서까지 출토됨으로써 고조선의 남부 경계는 한반도의 남부 해안선이었던

것이다. 『제왕운기』에 따르면 부여는 원래 고조선에 속해 있었는데 부여의 영토는 흑룡강과 어르구나하까지 였다.

고조선은 진개에게 영토를 빼앗겼나. 고조선은 중국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을 받아 그 서부 2천 리를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위략』은 연나라가 조선의 서방 2천리를 빼앗었다고 하여 영토의 일부를 빼앗겼고 『사기

』「조선열전」은 조선과 진번을 복속시켰다하여 조선을 완전히 멸망시켰던 것이라 한다. 예컨대 조선이라는 나라 서쪽

변경에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었다면 위 두 기록은 옳은 것이다.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후 기자조선과 진번이 모두 고조선

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는 것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후 후퇴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진개가 후퇴하지 않고서야

진개가 차지했던 기자조선과 진번이 고조선의 영토가 되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번한의 위치는 어느 곳이었을까 『위략』에는 연나라의 진개가 조선의 서부 2천리를 침략한 후 국경을 만번한으로

삼았다고 했다. 만번한의 위치가 확인되어야만 진개의 고조선 침략이 일시적인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가 분명해

진다. 위치는 서한의 요동군 내에 문현과 번한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국시대에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후 국경

이 되었던 만번한은 후에 서한 요동군의 문현과 번한현이 된 곳을 합한 지역을 통칭했던 지명이었다고 학자들은 본다. 요

동군안에 있었던 만번한은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 유역에 위치해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조선과 중국의 국

경은 갈석산으로부터 난하 유역으로 형성되어 되어 있고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후에도 국경을 난하 유역에 있던 만번한

지역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진개는 후퇴를 했던 것이었다. 고조선은 오히려 연나라의 동부 땅 일부를 차지

하여 그의 침략을 응징했음을 알 수 있다.

 

풀림 7 고조선은 어떤 형태를 가진 국가였나.

 

과연 고조선은 성읍국가였을까. 성읍국가란 도시국가라는 말이다. 인류의 역사는 세계모든 지역에 공통되는 보편성도 있

지만, 특수성도 있다. 그리스에서는 거주민들이 자급자족이 불가능하므로 상업을 하기 좋은 곳으로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되고,

우리나라는 자급자족이 가능하였으므로 자연 마을들이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것들이 연맹체를 형성하고 국가를 출현시켰던 것

이다. 대부분은 신석기시대 이래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와 만주 고대사회의

기초가 마을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우리나라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은 서양의 도시국가와 같은 성읍국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수많은 마을들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마을집적국가였던 것이다.

고조선은 어떤 구조의 국가였을까. 이 시기에는 하나 하나의 마을이 사회의 독립된 단위였으므로 마을 사회라 한다.

마을들이 연맹체를 형성하고 재산사유제가 출현하며, 빈부의 차이가 일어나 정치 권력을 가진 추장도 출현한다. 신분의

분화도 일어나 이 시기를 마을연맹체사회 또는 고을나라라고 한다. 고조선의 단군은 각 지역에 있는 고을나라들을 추장들에

게 위탁하여 통치하였던 지방분권국가였던 것이다.

고조선의 사회신분은 어떠했을까. 고조선의 중앙에는 단군의 직할국이 있었고, 도읍 즉 아사달이 있었다. 도읍보다 더

중요한 곳이 있으니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시였다. 신시는 고조선의 종교 성지로서 고조선의 정신적 중심지였다. 고조선의

사회 구조는 읍·국읍·이사달·신시 등의 명칭을 가진 마을들이 상하관계로 중첩되어 있는 고조선의 사회신분과 직결되었

다. 마을이 중첩된 고조선의 사회 구조는 바로 씨족이 사하로 중첩된 구조이다. 이렇게 보면 고조선 사회의 신분 조직은

지배 귀족인 제가 또는 대가, 피지배 신분이면서도 자경농민인 평민, 귀족에 종속되어 있었던 종속농민인 하호, 노예 신분인

노비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씨족단위가 되어 씨족신분제임을 알 수 있다.

고조선 마을의 성격은 어떠했을까. 고조선에는 생산노동에 종사했던 신분의 사람들고 생산 노동에 종사하지 않은 신분

의 사람들이 있었다. 청동기는 지배층의 독점물이었으며, 이들의 무덤에서 농구가 출토되지 않은 것은 이들이 농경에 종사하

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농구가 출토된 무덤은 농경에 종사했던 피지배층의 무덤이다. 고조선의 국가 경제

라는 측면에서 민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 농토를 개간해서 농사를 지어 생산량은 많지 않

았을 것이고, 인구도 고조선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조선의 국가 경제니 하호와 노비들의 노동에

의해서 뒤받침되었을 것이다. 고조선의 사회 구조로 보아 하호의 인구가 가장 많은 비율차지하고, 주된 생산 담당자며, 노

비들은 보완적인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다른 집에 거주하기는 하였지만 하나의 가족공동체였을 것이며, 고조

선의 씨족마을의 기초는 가족공동체였던 것이다.

고조선의 통치조직은 어떠했을까. 『사기』「조선열전」에 의하면 위만조선에는 관료조직으로서 왕을 보좌하고 행정을

총괄하는 직책인 비왕이있고,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으로서 장군이 있다. 왕의 유고시를 대비해서 그 뒤를 이을 태자

가 봉해져 있다. 고조선의 통치조직에는 신정조직과 혈연조직의 요소도 있고, 신정조직은 종교조직을 말한다. 고조선은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관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관제에다 신정조직을 추가하여 고조선을 구성한 여러 씨족들의 융합을 꾀하고

통치자의 신권통치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혈연조직을 강화해 나감으로써 권력의 독점과 영속화를 추구하였다.

고조선의 도읍은 어디였을까. 중국의 『한서』「지리지」·『요사(遼史)』「지리지」·『대청일통지(大淸

一統志)』등에서는 고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험독(險瀆)이라는 지명이다. 위만조선의 도읍 또는 옛 조선의

도읍명은 『사기』「조선열전」에는 왕험, 『삼국유사』「위만조선」조에는 왕검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우리 고대어의 검(儉)을 중국인들은 험(險)으로 기록했음 알 수 있다. 따라서 험독이나 검독은 우리 민족이 세운 고대국

가의 도읍이었을 것이며, 중국에서는 도읍을 험독이나 검독으로 부른 적이 없다. 고증 결과 그 위치는 험독들과느 다른 곳으로

확인되었고, 험독들은 위만조선의 도읍이 아니다. 고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북진 동

남·본계시 지역·평양 지역등이다.

 

풀림 8 고조선 사람들의 경제 활동은 어떠했나.

 

고조선의 농업은 어떠했을까. 동아시아 사회는 고대로부터 농업을 경제의 기초로 하였다. 치수시설이 충분하게 갖추어지

지 않았던 고대에 있어서의 농경은 큰 강의 유역보다는 그 지류나 작은 강가에서 발달되었다. 서기전 1000년 경까진는

전지역의 기온이 지금보다 높아 농사짓기에 좋은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조선의 유적에서는 곡물 가공 공구가 많이 출

토되었는데, 추수가 농토 개간보다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농업이 매우 발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민

들의 협동으로 농사를 지었고, 마을의 거주민들은 씨족이 단위를 이루어 이들을 하호라 불렸다. 후기에 이르면 철기가 보급되

어, 철기 유물로는 농구와 무기등 그 밖의 것들이 출토되고 있다. 농업 발달의 기초 위에서 조세제도가 확립되고, 발달된

농업을 바탕으로하여 목축업도 성행했다. 후기로 오면서 집짐승의 뼈가 늘어나 농업의 발달과 더불어 목축업이 점차 발달했

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서는 어떤 곡물을 재배했을까. 출토된 공구를 보면 농토를 개간하기 위한 공구는 없고, 이미 개간되어 경작을

계속해 온 농토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마을사회시대(전기 신석기시대)의 농업은 고을나라시대(후기 신석기시대)를 거

쳐 계속 발전하여 고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벼·보리·조·기장·콩·팥·수수·피 등의 오곡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곡

물과 대마나 황마 같은 섬유식물들이 재배되었고, 이러한 곡물의 낟알들은 유적 등에서 출토되었다. 이와같이 다양한 곡물

들이 고조선에서 재배되었다는 것은 고조선의 농업이 매우 발달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고조선의 수공업은 어떠했을까. 고조선의 대표적인 수공업제품은 청동기와 철기이다. 청동기에는 비파형동검이 출현하기

이전과 비파형동검시대이다. 청동으로 이미 칼 등의 무기와 공구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므로 이러한 청동기는 목기나 골기·각

기 등을 가공 하는 데도 이용되어, 이러한 가공 공구의 출현하여, 이전 시대의 가공 기술에 그것이 추가됨으로써 수공업 발

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수준이 그 만큼 고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파형청동검문화는 고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비파형동검은 그 자체가 우수한 무기이며 섬세하고 정교한 기

술을 필요로 하는 공예품이다. 청동기 제조의 기술 수준은 청동제 장식품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품질이 세련되어 있는 점

에서 알 수 있다. 강상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실로 만든 장식품은 높은 금속 가공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다. 직경이

0.25밀리미터 정도의 가는 구리실로 짠 것이며, 오늘날의 기술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고조선 후기에 이르러 철기가 보급된

면서 수공업은 한층 더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연철, 6세기 경부터는 선철을 사용하였고, 제철 기술 발달의 영향을 받아

청동 기술도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여 세형동검문화가 출현해 청동기문화의 제품도 한층 더 다양해지고, 기술이 각 지역으로

널리 보급되어 청동 제품에 지역적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형동검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발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고조선의 상업은 어떠했을까. 고조선의 농업과 수공업 등의 발달은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열대나 아열대 지역에

서 생산되는 보배조개가 출토되어 남중국 또는 그 이남 지역까지 교역을 했음을 말해준다. 교역은 육로보다는 해로를 이용했

고, 해로를 이용하기 위하여는 큰 배가 있어 고조선의 조선 기술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을 것이다. 고조선은 중국

에 활과 화살·돌화살촉 등을 수출하였고, 동물의 가죽도 수출하여, 고조선의 모직 기술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이러한 수출을 통하여 고조선은 막대한 외화를 보유하였고, 각 유적지에서 명도전 외에도 포전·반량전 등의 중국 화

폐가 출토되어 국제무역을 통해서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경제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대국이였고 수준 높은 청동기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러한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

서는 그에 필요한 경제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 경제적 수준을 확인하는 것은 고조선의 국력과 사회수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조선의 경제수준이 낮지 않았음은 많은 중국인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이주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고조선이 경제와 사회가 낙후되어 있어서 사람이 살기에 불편하였다면 많은 중국인들이 이주해 오지 않았을 것이

다.

위만조선의 경제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위만조선의 영토는 원래 고조선의 서부 변경이므로 경제수준은 고조선의 경제수준

을 계승하고 있었다. 위만조선은 우거왕 때에 서한 무제(武帝)의 침략을 받아 멸망되었다. 서한은 무제시대에 경

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국력이 가장 강하였다. 오랫동안 강하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경제

적 기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풀림 9 고조선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어떠했나.

 

고조선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살았을까. 옷차림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고조선의 뒤

를 이은 여러 나라의 풍속에 대한 기록을 통해 고조선의 옷차림을 알 수 있다. 고조선 문화층에서 출토된 남자 인형은 두

루마기나 도포 같은 겉옷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자를 즐겨 썼던 것으로 보인다. 모피의류를 중국에 수출한 것으로 보아

모피 의류도 매우 발달 해 있음을 알았다. 가락바퀴가 많이 출토되는 것은 당시에 천을 생산하기 위하여 실 뽑는 일이

활발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은 고조선 사람들이 길쌈하고 옷짓는 것을 매우 중요한 생활의 일부로

생가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고조선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고조선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식료를 이용하여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먹는 데 대나무나 나무로 만든 그릇과 숟가락을 이용함으러써 매우 위생적이고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사람들의 음식문화는 어떠했을까. 사람들의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조미료를 사용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들이 사용했던 가장 기본일 되는 조미료는 소금이었을 것이다. 술도 생산되었을 것이다. 유적에서는 잔이 출토되었으며 5

월제와 10월제 등 하늘에 제사 지내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 때에선 나라 안의 남녀노소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노

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이미 상당히 발달한 음주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술이 있었다면 당연

히 식초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먹거리와 술은 음식문화를 한층 풍요롭게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 고조선의 건물은 대개 반지하였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 많았다. 난방시설

의 열량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시설을 하여 서기전 2세기 경이 온돌을 발명했다. 고조선 집자리에서는 간막이 시설

을 한 것도 발견되었다.

고조선에는 어떤 풍속이 있었을까. 고조선 사회의 기초는 각지에 산재해 있었던 마을이었으며 마을들은 씨족으로 형성되

어 있기 그 기초는 가족공동체였다. 국가에 대한 의식도 가족공동체에 대한 의식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

조선에는 통치의 수단으로서 이미 법이 존재하고 있었다. 죄를 지어 죄를 면하고자 하면 면할 수도 있는데 설자 죄를 면

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그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 혼인의 대상으로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조선에는 도

둑이 없어 대문이나 방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고조선에서 신분 차별은 어떠했을까. 고대 사회에서는 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정치권력이 출현하고 사회신분의

분화가 일어났다. 고조선은 절도죄에 대한 처벌이 상해죄에 비하여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느낌이 있는데 이것은 사유재

산 보호를 매우 중요시 했음을 알 수 있다. 사유재산 보호는 결국 이들 지배 귀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

신분에 따른 차별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弘益人間>과 <在世理化>이념

이 정치사상과 사회사상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풀림 10 고조선 사람들은 어떤 종교를 믿었나.

 

고조선 종교의 명칭은 무엇이었을까. 단군 왕검을 선인 왕검이라고 부르고 단군을 선인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고조선의

종교가 선교(仙敎)였으며 그 지도자를 선인이라 불렀고, 그 길을 선도(仙道)라 하였다. 선인은 고조선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칭호였으며 고조선의 종교가 선(仙)을 추구하는 선교였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서 신들의 계보는 어떠 했을까. 국가의 종교안에서 신들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 신을 받드는 씨족이 그 국가 안

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동일하다. 단군사화에서 환웅과 곰·호랑이는 수호신을 의미하고 그 가운데 하느님을 숭배한 환웅족

은 가장 높은 신분을 차지하였고 환웅족과 통혼을 한 곰족은 그 다음의 신분을 차지하였으며 호랑이족은 그보다 낮은 신분이 되

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조선의 단군은 어떤 신을 섬겼을까. 단군은 몽고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탱그리와 같은 뜻으로 하느님 또는 하느님을 섬기

는 사람을 뜻하는 해모수는 우리말의 해머슴애가 한자화된 것이다. 해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종교 풍속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고조선 종교 풍속에는 고조선 사람들의 가치관이 들어있다. 거수국에는 하느

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한 사람씩 있었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이라 불렀다. 그리고 소도라는 종교 성

지가 있다. 고조선에서는 청동검·청동거울·청동방울 등을 손에 들고 몸을 치레거리로 장식하고 노래와 춤으로 신을 기쁘

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전해오는 제사의식은 일종의 종교의식인데 음식과 술로서 조상신을 접대하고 있

다.

고조선 종교가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종교사사은 바로 그 사회의 도덕·윤리·예의·제도·법 등의 기본이 되는

가치관을 형성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종교사상은 그 사회의 종교문화라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의 종교사상은 인본주의적,

<홍익인간>이념이다. 사람들은 물론 신까지도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공영의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 고조선의

종교사상이 사물은 3을 기본 요소로하여 구성되어있고 3단계의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고 알게 해준다.

 

풀림 11 고조선의 과학기술은 어떠했나.

 

고조선의 청동 주조 기술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고조선의 주된 금속 제조 기술은 청동과 철에

대한 것이다. 인류 사회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청동기의 출현에 있어서, 고조선 지역이

중국의 황하 유역보다 수백년 앞선 서기전 2500년 경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조선 지역이 그만

큼 문화의 발전이 빠르다는 것을 알게 해줄뿐만 아니라 사회의 진화도 빨랐음을 의미하는 것이

다. 고조선 지역에서 국가의 출현도 앞섰던 것이다.청동에 아연을 적당히 배합하면 합금의 색깔과

유동성을 조절할 수 있는데 아연을 의도적으로 배합하여 청동기를 주조한 것은 한국 청동기만의

특징이다. 고조선에서는 청동기를 주조하는 데 있어서 돌이나 모래를 이용한 거푸집과 더불어 밀

랍틀도 이ㄷ했던 것으로 보인다 . 밀랍틀은 하나의 제품을 만들 때 생산 능률은 낮지만 아주 섬

세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청동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구리를 얻기 위하여 동광(銅鑛)을 개

발하였다.

고조선의 제철 기술은 어느 수준이였을까. 고조선 후기에 이르면 철기가 출현하였다. 청동기가

주로 무기나 의기로 사용되었던 것과는 달리 철기는 농구 등의 생산 도구로 이용되어 생산 증대

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조선의 일반 과학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출토된 유물에 미루어 도금,판금,누금,맞머리못(리

베트),땜질 등과 같은 금속 가공 기술도 매우 발달해 있었다. 또한 천문,침술, 건강식품,약초에 대

한 지식도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조선의 수준 높은 학문과 과학 기술의 짐작은 <후

한서>의 '왕경열전'과 '동이열전'의 '예전'을 통해 알수 있다.

 

풀림 12 고조선의 문학과 예술은 어떠했나

고조선 사람들은 어떤 글들을 남겼나. 고조선이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했었는지의 여부는 아직까

지 확인 되지 않고 있지만 한자가 일찍부터 사용되었음은 확실시 되며 수준 높은 문학 작품들이

있었다. <공후인>의 작가가 평범한 서민의 아낙이었음으로 미루어 즉석에서 가사를 만들어 노

래를 부를 수 있었으므로 가사 문학이 일반 평민 사이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또한 상당히 체계적인 풍수지리 이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 사람들의 예술 수준은 어떠했을까. 상당히 수준 높은 예술을 즐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음악에선 공후, 슬의 현악기와 석경의 타악기, 새다리뼈를 이용하여 만든 피리의 관악기등 여러

종류의 악기가 보급되어 있었다. 이러한 악기는 종교의식은 물론 일상행활에서도 사용되었을이다.

영고, 동맹, 무천,5월제,10월제에서 온 나라 사람이 밤낮없이 연일 먹고 노래하고 출음 추었다는

자료로서 무용도 발달했던 것으로 짐작되며, 경상남도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 양전동 암

각화, 내몽고자치구 동부의 백차하유역의 암각화 등으로 미술또한 높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짐작

된다. 또한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청동거울 등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청동기의 형태와 제품의 정

교함, 매우 섬세한 문양 등은 고조선의 높은 공예 수준을 알게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