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풍속연구

 

제 1 회 : 소개글

중국의 장지립 선생이 지은 '고구려 풍속연구'를 소개합니다.

고구려는 우리 한국 민족의 고대 역사이지만 고구려가 차지하였던 대부분의 영토가 현재 중국에 귀속되어 있는 관계로 중국변방의 소수민족이 건국하여 활동한 중국사의 일부로 간주하는 중국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 글도 이러한 관점에서 서술되었으며 이 부분만 제외하면 고구려의 풍속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와 새로운 관점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이를 번역하여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지은이 장지립은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연구원이며 중국동북민족사, 중국동북지리 등 중국의 북방민족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손진기의 제자로서, 주로 부여, 고구려, 여진

족등 북방 민족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가 깊은 소장 학자입니다.

이 글은 손진기 선생의 60회 생일(회갑) 기념 논총인 '동북역사와 문화' 224쪽에서 285쪽에 실렸던 논문이며,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고구려의 복식습속

가. 고구려의 머리모양과 관모

1) 남자의 머리모양과 관모

가) 고구려의 관

나) 고구려의 책

다) 고구려의 절풍

라) 고구려의 절풍모

마) 고구려의 두건

바) 고구려의 삿갓

2) 여자의 머리모양과 건모

나. 고구려의 복식습속

1) 고구려족 남자의 복식

2) 고구려족 여자의 복식

다. 고구려의 신발

2. 고구려의 혼인습속

3. 고구려의 거주와 건축습속

가. 주택

나. 주택의 실내 생활습속

다. 궁전과 사원건축

라. 도시생활과 건축

4. 고구려의 민간 문학예술과 습속

가. 회화예술

1) 회화의 내용

가) 사회풍속화

나) 동물화

다) 풍경화

라) 장식도안화

2) 회화의 방법, 특징과 가치

나. 문학

1) 음악

가) 현악

나) 관악

다) 타악

2) 무용

5. 절기와 예의습속

6. 체육과 놀이습속

7. 잡기와 여러가지 유희

8. 장례습속

가. 묘의 형태

1) 적석묘

2) 방단 적석묘

3) 방단 계단식 적석묘

4) 방단 계단식 석실묘

나. 장례습속

9. 종교신앙

10. 결론

 

제 2 회 : 들어가는 말

고구려 민족은 중국 동북지역과 한국의 북부에서 활동

하였던 고대의 민족이며, 오늘의 중국 국경내에서 활동

하는 여러 민족과 한국민족의 공통되는 조상의 하나이

다. 고구려 민족은 중국 민족형성의 역사과정에서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선조는 예(濊)와 맥(貊) 민족으로 일찌기 은

(殷), 주(周) 시기에 동북 지역에서 활동하고 발전하였다.

예와 맥 민족은 동북 지역에서 처음으로 정(鼎;세발 달

린 솥)과 격( ;굽은 다리 솥)을 사용한 민족의 하나이다.

또한 은족(殷族)과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맺고 있다.

은(殷) 나라의 귀족인 기자(箕子)는 주(周) 나라 초기에

부족을 이끌고 조선으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선진화된

중국문명을 가지고 갔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경작(耕作),

양잠(養蠶), 방직(紡織)과 같은 기술도 가지고 갔으며, 또

한 조선민족의 융합과 발전에도 기여했다.

고구려 민족은 그들 선조의 문화를 끊임없이 계승하는

한편으로 부여(夫餘)의 귀족출신인 고추모(高鄒牟)의 지

도아래 남쪽으로 이동하여 혼강(渾江) 유역의 졸본천(卒

本川)에 사는 맥인(貊人)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서기전

37년에 그들은 맥 민족과 함께 예와 맥인의 공통되는 졸

본정권(卒本政權)을 세웠다. 이것이 역사상의 고구려(高

句麗)이며 고추모가 왕이 되었다.

서기전 34년에 추모왕은 지금의 환인현(桓仁縣) 오녀

산성(五女山城)의 꼭대기에 흘승골성(紇升骨城)을 쌓아

도읍으로 삼고 점차 사방으로 세력을 넓혀 강대한 고구

려 정권을 세웠으며, 668년 멸망할 때까지 중국 동북 지

역의 대부분을 7백여년간 다스렸다.

길고도 험난하였던 7백여년 동안 고구려 민족은 끊임

없이 중국 한족(漢族)의 선진화된 문화를 받아들이고 자

신들의 전통문화를 풍성하게 가꾸었으며 수많은 고구려

특색의 풍속을 만들었다. 또한 빛나는 민족문화를 창조

하고 인류문화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에 지울 수 없는 발

자취를 남겼다.

고구려 민족의 풍속은 대체로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으니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의 방면이다. 물질생활 방

면의 풍속은 머리 모양, 복식, 음식, 거주, 교통등으로 주

로 지리환경, 기후조건, 천연자원과 생산력의 발전수준의

영향을 받았다.

정신문화 방면은 제사, 혼인, 가무(歌舞), 문학예술, 의

례(儀禮), 상례와 장례, 궁중조례(朝儀)등으로 사회의 물

질생산, 경제토대의 제약과 의식형태등 상부구조의 영향

을 받았다.

그렇지만 사실상 여러 풍속습관에는 물질생활의 내용

에 정신문화의 요소가 포함되기 때문에 양자를 무조건

분리해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풍속습관에 대해서는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

한 바 있지만 그것의 문제와 한계는 비교적 견해가 분산

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필자는 선학들의 연구성과

와 요즈음의 연구성과에 근거하고, 최신의 고고 자료와

문헌사료를 결합하여 고구려 풍속 중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객관적인 고증을 진행시켜, 동북 지역에서 오랜 역

사활동을 하였고 신비로운 문화색채가 충만한 고구려 민

족의 풍속습관에 대한 초보적인 고찰을 시도하였다.

 

제 3 회 : 고구려의 복식습속

1. 고구려의 복식습속

모두 알고 있듯이 복식은 신체를 덮는 용도 이외에도

실용적인 차원에서 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는 기능

이 있다. 따라서 복식습속은 고구려 민족의 당시의 생산

방식과 생활조건, 지리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있다.

다시 말하면 복식은 민족 전통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

이다. 복식은 그 민족의 습속, 심미관, 정서, 문화심리의

형태들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의 양식과 기능은

그 자체로서 민족의 가치관념을 표현한다.

복식의 제작과 착용, 그리고 그것의 전승은 지극히 복

잡한 문화현상의 하나이다. 복식습속은 그 민족의 역사

와 문화발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시각으로 그 민족의 지혜와 창조력을 찾아내야 한다.

가. 고구려의 머리모양(髮式)과 관모(冠帽)

[위략(魏略)]을 인용한 [한원(翰苑)]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대가(大加)는 주로 책( )을 쓰고 소가(小加)

는 절풍을 쓰는데 모습이 고깔(弁)과 같다"

{{

) [翰苑] <蕃夷部>'高麗條' 所引 [魏略]

"大加主著 , 無後, 小加著折風, 形如弁."

}}

라고 하였

으며, [위서] 열전의 고구려조에는 "머리에 절풍을 쓰는

데 그 모습이 고깔과 같으며 옆에 새의 깃을 꽂고 귀천

(貴賤)에 차이가 있다"

{{

) [魏書] 권 100 <列傳> 제 88 '고구려조'

"頭著折風, 其形如弁, 旁揷鳥羽, 貴賤有差."

}}

라고 하였다. 또한 [후한서] 동이

전 고구려조에는 "대가, 주부(主簿)는 모두 책을 쓰는데

관책(冠 )과 같으며 뒤(後)가 없고, 그들의 소가는 절풍

을 착용하는데 모양이 고깔같다"

{{

) [後漢書] 권 85 <동이열전> 제 75 '고구려조'

"大加主簿皆著 , 如冠 而無後, 其小加著折風, 形如弁."

}}

라고 하였다. 이상의

문헌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고구려의 대가와 주부는 책

을 착용한다는 것이다.

[한원]의 기록에 의하면 "그 나라에는 관직을 두는데

모두 9등이 있으며 종2품에 비견되는 등급은 중국말로

주부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대가

와 주부등 모두 종2품 이상의 관원과 왕실에서는 모두

책을 썼다.

여러 사서의 기록에는 아직 소가라는 관명이 나타나지

않고 다만 소형(小兄)

{{

) [新唐書] 권 220 <열전> 145 동이 '고구려조'

[冊府元龜] 권 959 <外臣部> '土風 제1 고구려조'

}}

과 차소형(次小兄)은 7품에 비견되

며 일명 실지(失支)라고도 하는데

{{

) [翰苑] <번이부> '고려조' 所引 [高麗記]

"其國建官有九等...次小兄比正七品, 一名失支."

}}

, 이를 통해 볼 때 소

가는 소형의 별칭이거나 혹은 형(兄)의 착오일 가능성이

있다. 또는 소가란 일반적인 사(士)를 의미할 수 있다.

책( )은 [사원(辭源)]에 이르기를 "머리를 감싸는 건

(巾)으로 처음에는 민간에서 사용하였는데 전한(前漢) 말

기에 이르러 상하(上下)에 두루 통용되었다"고 하였으며

'급취편(急就篇) 이(二)'에는 "관(冠), 책( ), 잠(簪), 황

(簧)은 머리묶음(髮紐)을 고정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으

며 그 주(注)에서 "책( )은 머리를 감싸는(韜髮) 건(巾)

으로 머리를 가지런하게 만든다. 늘 관의 아래에 있으며

혹자는 그것만을 홀로 착용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대체

로 책은 본래 두발이 얼굴을 덮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가졌다. 즉 사방의 두발을 가지런하게 위로 올려 두발이

흩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후에 중국에서는 책에다 머리를 높게 보이는 얼굴덧

개(高顔題)를 하였고 또한 덮개인 책옥( 屋)을 배풀었으

며, 나아가 길고 짧은 귀(耳)를 붙이고 또한 책의 위에

건(巾)을 얹거나 관(冠)을 더하였다. 이때문에 후에는 평

상책이라고도 하는 평건책(平巾 ), 개책(介 ), 공정책

(空頂 )과 같은 여러가지 책의 명칭이 나타났던 것이다.

또한 한대(漢代)의 책은 색의 구별에 따른 용도가 있

었다. 예를들면 제례에 쓰는 감책(紺 ), 밭갈이 때에 쓰

는 청책(靑 ), 사냥에 쓰는 상책( )등이다. 또한 녹책

(綠 )은 백성이 착용하였는데 특히 신분이 비천한 사람

들이 착용하였다.

여러 관리들은 춘복(春服)에 청책(靑 )을 착용하였고,

적책(赤 )은 무관직의 관리들이 착용하였다.

한대에는 관(冠)의 아래에 책을 더하였는데 책만을 홀

로 착용하기도 하였으며, 그 아래의 비천한 사람들은 오

로지 책만을 착용하였고, 미성년 아이들은 공정책(空頂

)을 착용하였다.

{{

)[中國古代服飾史], 周錫保, 中國戱劇出版社, 1984년.

}}

위진(魏晉) 시기 이래로 책은 백성들이 항상 착용하는

것이 되었는데 그 형식은 위가 평평한 평상책이었고, 고

구려 벽화에 나타난 책도 대부분이 평상책이다.

그러나 고구려인들도 또한 관을 쓴 사람이 있었다. 사

실 책과 관은 다른 것이다. 책은 주로 머리를 감싸는 역

할이었다. 머리카락을 안쪽으로 모아 관의 안쪽에 고착

시키고 얼굴을 가리지 않게 하는 것으로 늘 관의 아래에

있었으며 또한 책만 쓸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관(冠)은

변(弁)을 쓰거나 잠황(簪簧)을 머리틀에 가로질러 꽂아서

그것을 고정시켰다. 관과 책은 이 점에서 다른 것이다.

 

제 4 회 : 고구려 남자의 머리모양

1) 남자의 머리모양과 관모

고구려 남자의 머리모양은 대체적으로 2가지 종류로

대별할 수 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모양은 머리 끝에

커다란 홑상투(單 )를 트는 형식으로 가장 보편화 되었

고, 그 구별은 높낮이(高底)에 있었다.

홑상투는 대부분 그 높이가 낮은 편이다. 이러한 형식

은 안악2호분과 약수리 무덤벽화의 문지기, 씨름무덤(角

抵塚)의 역사(力士), 집안현에 위치한 5회묘의 4호무덤과

5호무덤의 천정벽화와 신선그림중에서 볼 수가 있다. 이

런 머리모양은 머리털을 머리정수리에 묶고 호미머리모

양( 首狀)을 드러내는 것이다.

홑상투 중에서 다른 형식은 비교적 높은 것으로 머리

정수리(頭頂)와 상투 사이에 포(布)나 면(棉)등의 방직품

으로 묶고, 둘둘감아 꺾은 머리털을 묶지 않은 부분의

위로 올려서 높이 솟아나는 듯이 보이게 만든 형식으로

그 모습이 높은 상투(高 )와 같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높은 상투는 집안의 5회묘의 4호무덤, 5호무덤 벽화인물

상에 보인다. 이러한 형식은 사회에 유행한 머리 형식은

아닐 것이고 다만 사회의 일부에서 이런 머리 모양이 반

드시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그림 2의 1,

2번 참조)

홑상투말고 다른 하나의 형식으로 겹상투(雙 )가 있

다. 이 형식은 집안현의 5회묘의 5호무덤의 문지기 역사

(力士)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통구 17호묘중의

위사(衛士)(그림 2의 3번, 5번 참조)와 약수리의 시자(侍

者)모습의 그림에 나타난 머리모양도 겹상투이다.

홑상투와 겹상투의 머리모양 중에서 보편적으로 유행

한 양식은 당연히 홑상투였고, 겹상투는 성인중에는 비

교적 적었으며, 청소년에게서 이런 유형이 많이 나타난다.

고구려 남자의 관모는 그 종류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관모는 책, 관, 절풍, 두건, 삿갓(笠)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고구려의 관, 책, 절풍등의 형식은 문헌의 기

재에 의하면 신분의 높고 낮음과 귀천의 구분이 있었으

며, 각종의 재료와 색깔에도 구별이 있었다.

가) 고구려의 관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고구려 벽화무덤 중에서

묘의 주인이 남자인 경우는 대부분이 관을 썼고 그 관의

형식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대체적으로 한대에 중국

에서 유행하였던 무변(武弁)인 대관(大冠)과 유사하다.

중국의 양한(兩漢) 시기에 무관들 사이에서 유행한 관의

형식은 고깔모양(弁形)으로 그 아래에 책을 더하였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고구려의 관은 일정한 신분의

왕실귀족들만이 비로소 쓸 수 있었다. [구당서] 열전 고

구려조에 보면 "오직 왕만이 다섯가지 색에 백라관(白羅

冠)을 쓰는데 흰 가죽(白皮)의 작은 띠를 두르며 그 관과

띠는 모두 금으로 장식한다. 관직이 높은 사람은 곧 청

라관(靑羅冠)을 쓰고 그 다음은 비라관(緋羅冠;붉은비단

관)을 쓰고 두 개의 새 깃과 금은을 꽂아 장식한다"

{{

) [舊唐書] 권 199 上 <열전> 149 上 동이 '고구려조'

"唯王五綵, 以白羅爲冠, 白皮小帶, 其冠及帶, 咸以金飾, 官之貴者則靑羅爲冠, 次以緋羅, 揷二鳥

羽, 及金銀爲飾."

}}

고 하였으며, [북사] 열전 고구려조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

이 쓰는 그 관은 소골(蘇骨)이라고 하는데 대부분이 자

라(紫羅;자주색비단)로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한다"

{{

) [北史] 권 94 <열전> 82 '고구려조'

"人皆頭著折風, 形如弁, 士人加揷二鳥羽, 貴者其冠曰蘇骨, 多用紫羅爲之, 飾以金銀."

}}

고 하였다.

안악3호분의 묘주인은 머리에 백색관을 쓰고 있는데

그 안은 흑색 책으로 머리를 묶었다. 이 인물도 당연히

백라(白羅)로 관을 만들었고, 출신은 한인(漢人)이거나

고구려에 귀화한 고관일 것이다. 기타의 벽화묘 중에서

어떤 묘주인의 경우에는 거친 견(絹) 혹은 황목라(荒目

羅)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짜서 만든 것도 있다. 예를 들

어 약수리 벽화묘와 쌍영총의 묘주인이 쓰고 있는 관은

모두 가는 그물무늬 모양의 문양을 하고 있다.

한대의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무변대관(武弁大冠)과 유

사한 면이 있는 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한족(漢族)의 영

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이것은 한무제가 요동

에 사군을 두고 통치하였던 역사적 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고구려 관의 형식은 비록 대체적으로 대동소이 하지만

그 관의 색채는 문헌기재에 따르면 차이가 있다. 왕의

관은 백색이고, 대신들은 청색이며, 그 아래로는 비색(緋

色)과 자색이 있다. 그 관은 대부분이 비단으로 만들었

고 약간의 것이 면(棉)으로 짜서 만들었다.

특별히 주목할 사항은 집안의 5회묘 5호무덤의 무늬천

정의 서북쪽 제1층 말각석 위에 용을 타고 있는 사람이

쓰고 있는 면관(冕冠)이다. 이것 이외에는 여러 무덤벽화

의 묘주인에서는 아직 면관을 쓴 예를 찾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고구려의 왕들은 왕의 자리에 오를때 당연히

면을 쓰는 예가 있었다. 따라서 반드시 면복도 있었을

것이다. 면복은 중국의 역사에서 역대의 제왕이 입던 복

식이었다. 이에서 본다면 고구려왕과 중국 역대 왕조 사

이에는 매우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면복의 제도는 그 용도에 따라 입는 것이지 늘상 입

는 옷은 아니었다. 그것은 왕의 즉위식이나 국가의 행

사때에 입었을 따름이다.

벽화중에는 중국의 남북조시기에 유행하였던 위모관

(委貌冠)이나 통천관(通天冠)과 유사한 관을 쓴 인물이

보인다. 집안현의 5회묘 4호무덤과 5호무덤의 어떤 인물

이 머리에 쓰고 있는 관식(冠式)이 그것이다.

벽화중에는 이와 같은 류의 관이 있다는 것은 실생활에서

당연히 이런 관이 통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유행이 그렇게 보편화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구려 벽화중의 관은 모두 뒤쪽이 처마처럼 불쑥 솟

아 오른 곳에 붉은 선이 있는데 잠(簪)과 같이 생겼다.

이것이 바로 관과 책을 구별하는 요체이다. 책은 잠이나

변으로 상투를 고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 고구려의 책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의하면 "고구려의

대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쓰는데, 책이면서도 여벌장식

이 없다"

{{

) [三國志] 권 30 <魏書> 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

"大加主簿頭著 , 如 而無餘."

}}

고 하였으며, [양서] 열전 고구려조에서는 "고

구려의 대가와 주부가 머리에 쓰는 것은 책과 유사한데

뒤가 없다"

{{

) [梁書] 권 54 <열전> 48 동이 '고구려조'

"大加主簿頭所著似 而無後."

}}

고 하였다. 이상의 문헌에 의거하여 본다면

고구려 민족의 책은 중국 한족이 쓰는 책과는 다른 점이

있다. 중국 한족이 쓰는 책은 뒤쪽에 얽기(綴)가 있다.

그것은 책의 뒤쪽을 드리운 부분으로 수(收)라고 하는데

속발한 부분과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이

썼던 책은 뒤쪽에 얽기(綴)가 없고 모양도 중국 한족과

는 다르다.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책은 대부분이 평산책(平山 )으

로 꼭대기가 평평하거나 혹은 머리 가운데 쪽이 볼록하

게 튀어나온 모습이다. 그러나 고구려인의 책은 뒤쪽이

튀어 올라왔다. 이는 중국의 고책(高 )으로 뒤가 없는

형태와 유사하다.

고구려의 책은 대체적으로 3종류의 형태가 있다.

안악3호분의 묘주인이 쓰고있는 관의 아래에 있는 책

과 장하독(帳下督)에서 일반 관리, 전리(戰吏)에 이르기

까지 대부분이 쓰고 있는 책이 그 한종류이다. 그 모습

은 버선모양으로 앞에서 보면 뒤쪽이 솟아 올랐고 옆에

서 보면 뒷부분이 삼각형이 되며 그 변두리가 매우 뾰족

하게 솟아 보인다. 벽화 인물의 신분에 근거한다면

백색의 책은 무관이나 전리(戰吏), 관원들이 썼던 것으로

보이고, 홍색이나 다른 색깔의 책은 신분이 비교적

낮았던 사람들이나 궁중의 시위들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종류의 책은 일종의 고책이다. 높이 솟은 부분

이 없고 그 모양이 방형(方形)이며 그것을 쓴 사람은 대

부분이 벽화의 문 옆이나 문짝(門扉)의 위에 있다. 이로

볼때 문을 지키는 위사나 무사들이 이런 책을 썼을 것으

로 보이고 비교적 보편적으로 유행하였던 형태로 보인

다. 장천2호분에 바로 이런 방형책이 보이는데 아마 무사들이

썼던 책일 것이다.

세번째 종류의 책은 안악3호분에서 기실(記室), 성사

(省事), 문하배(門下拜)라는 명문(銘文)이 있는 사람들과

행렬도(行列圖) 중에서 일부분의 기마무사와 의장병사

중에서 쓰고 있는 종류이다. 그 모습은 책의 뒤쪽에 불

쑥 솟아 올라 있는 부분이 2층으로 되어있고, 1층의 높

이보다 2층의 높이가 높다. 이 책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의복은 대부분이 장포(長袍)이거나 삼(衫)이며

깃은 둥글거나(圓領) 혹은 3각형의 단령(短領)이며 선( )은

없다. 마치 앞 섶이 없는 무개금(無開襟) 형태의 장의(長衣)나

바지 아래까지 내려오는 반장의(半長衣)와 유사하다.

이것은 문관이나 궁내의 인물들이 자주 입던 양식이다.

고구려의 벽화중에서 자주 보이는 책관은 신분차별과

지위고하, 그리고 귀천을 구분하기 위하여 제작할때 같지 않은

재료와 색깔을 썼다.

책은 고구려 사회에서 적어도 일정한 신분이 있던 사람들이 머리에 쓰던

장식의 하나였고, 사서의 기재와 같이 대가, 주부만이 썼던 것이었는지는 더욱

탐구를 해야 할 문제이다.

필자의 추측에 의하면 책 위에다 1층, 혹은 2층의 장

식을 가하면서 잠(簪)이나 변(弁)을 상투에 꽂지 않는 형

식의 책은 문헌중에 말하는 대가, 주부가 쓰고 있던 책

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단층이면서 이마나 머리의

정상에만 두르는 책은 거의 일반 사(士)나 귀족들이 모

두 쓸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신분이 낮거나 가

난하고 천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이

다. 그들은 다만 절풍(折風)이나 혹은 머리 위쪽에 건

(巾)을 덮었을 것이다.

 

제 5 회 : 고구려 부녀자의 머리모양

나. 고구려 부녀자의 머리모양과 건모

고구려 부녀자들의 머리모양과 관모, 두건등의 모양은

여러 종류와 형식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고구려 민족

의 특색과 멋이 스며있다.

고구려 부녀자들의 머리모양은 머리쪽(梳 )의 방식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높은 머리쪽

(高 )이고 하나는 드리운 머리쪽(垂 )이다.

첫번째로 높은 머리쪽은 그 머리쪽의 묶음모양에 따라

다시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머리 정수리에서 머리쪽을 지은 후 건(巾)이나

포(布)등으로 쪽을 묶는 모양이다. 이러한 머리모양은 신

분의 상하에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런 종류는

고구려 무용총, 쌍영총, 집안 오회묘 4호무덤, 수렵총 중

의 묘주인의 부인 및 시녀에서 모두 볼 수 있다.

{{

) [通溝], 池內宏, 梅原末治 편

[吉林集安五 墳四號墓], 길림성문물공작대, <考古學報, 84년 1기>

}}

다른 하나는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서 둥글게 말은 형

식으로 쪽의 모양은 홑 고리(單環), 짝 고리(雙環), 세 고

리(三環) 등이 있다. 머리고리와 머리쪽의 구별은 간단하

게 보아서 머리쪽은 중심에 있고, 머리고리는 고리의 중

간이 빈(中空) 모양으로 둥근 고리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머리모양은 힐자계(子;묶음머리)라고 하며

진(晉)에서 처음 하였다. 진(晉) 혜제(惠帝) 원강(元康) 년

간(291-300)에 "부인들이 머리를 묶는데 머리쪽을 지은

후에 비단자락으로 고리를 만든다. 이를 묶음머리라고

하며 궁중에서 처음 시작하여 세상이 모두 그것을 따랐

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머리쪽은 당시에 고구려의

궁중에 전해져 유행한 형식의 하나이다.

안악3호분의 묘주 부인의 좌우에 있는 시녀들의 머리

를 보면 모두 높은 머리쪽을 하고 있는데 가발의 일종으로 이것은

북조(北朝)에서 처음 하였다.

[북사] 제본기(齊本紀)에 보면 "세조 무황제 때에 부인들이 모두 머리쪽을 잘라

가발을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는 새와 같이 생겼으며, 정면에서 보면

머리쪽의 중심이 서쪽에 있다. 궁중에서 처음으로 그것

을 만들었는데 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머리모양은 중국에서 대부분이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여자들이 하였다. 고구려 벽화중에는 묘주 부인과

시녀등의 부녀자들에게서 보인다. 따라서 이런 머리모양

은 신분의 상하에 구애받지 않은 종류의 하나이다.

그러나 머리의 장식은 같지 않았다. 자세히 관찰하면

귀부인이나 왕후의 머리장식은 금, 은, 동과 같은 장식물

로 하였고, 금귀고리도 하였다. 이것은 무형중에 신분의

상하와 귀천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어떤 머리모양의 위에 있는 장식은 걸음걸이

때마다 흔들리는 것이 있다. 걸을 때 마다 흔들리는 이런 장식의

형태와 제작, 동작과 움직임은 양나라 심약(沈約)의 딸인 범정부의

[영보요화]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시의 "구슬꽃에 비취 걸리고,

보배로운 잎에 금빛 마노 사이사이. 연꽃 잘라 만든것도 아닌데, 꽃이 되어

스스로 살아난 듯. 숙인 가지는 빼어난 옷깃을 거스르고, 사뿐 사뿐 걸음은

구슬꽃 흔드네. 구름같은 머리쪽에 꽂혀지니, 눈썹의 뿌리가 쉬이 생기네"

{{

) [詠步搖花], 梁.范靖婦

"珠華 翡翠, 寶葉間金 , 剪荷不似制, 爲花如自生, 低枝拂秀領,

微步動瑤英, 但令云 揷, 蛾眉

本易成."

}}

라는 구절이 그것을 말한다.

고구려 부녀자들이 당시에 대부분 이런 경지에 이르렀

는지는 모르겠으나 우아한 자태와 그리 많지 않은 장식

을 통해서도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고구려 벽화무덤에서 출토한 여러가지 금, 은, 동으로

만든 귀고리, 잠, 변등의 장식품을 통해서도 묘주인의 화

려하고 사치로운 머리장식이 당시의 생활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두번째로 드리운 머리쪽(垂 )은 머리쪽을 머리 뒤쪽

으로 늘어 뜨리거나 혹은 머리쪽을 양쪽 뺨으로 드리우

는 형식이다. 이런 머리모양은 비교적 많이 나타나는데

대부분이 고구려 사회의 일반 부녀자들이 하였으며 신분

의 귀천에 상관이 없었다.

고구려 부녀자들의 드리운 머리쪽 형식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머리 정수리에서

머리 뒷쪽까지 내려오면서 묶고 나머지는 흘러 내리게

하는 것으로 고구려 벽화 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형식

이고, 비교적 많이 유행하였던 형식의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벽화에서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는 형식

으로 머리를 가닥으로 묶어 몸의 뒤로 드리우는 것으로

무용총에서 한 예를 찾을 수 있다.

{{

) [通溝], 池內宏, 梅原末治

}}

비록 이런 종류의 머리모양은 발견된 예가 아주 적으나

고구려 부녀자들의 머리모양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틀림

없고, 이처럼 길다랗게 가닥으로 땋아 드리운 머리모양

은 결혼하지 않는 여자들이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벽화의 그림을 관찰하다 보면 묘주인과 함께 있는 그

부인은 모두가 높은 머리쪽을 짓고 있으며, 나머지 부녀

자와 딸린 식구들은 대부분이 낮은 머리쪽을 하고 있는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높은 머리쪽은 이미 결

혼을 한 부녀자나 혹은 궁중에서 비교적 신분이 높은 시

녀들의 머리모양일 것이고, 낮은 머리쪽은 미혼여자나

일반적인 부녀자들이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구려 부녀자들의 두건과 관모에 대해서는 [구당서]

고구려조에 보면 "부녀자들은 머리에 덮개천(머릿수건)

을 더한다"

{{

) [구당서] 권 199 上 <열전> 149 上 동이 '고구려조'

"國人衣褐戴弁, 婦人首加巾 "

}}

고 하였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머리덮개

천은 고구려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보편적으로 유

행하였던 머리장식이며 관모였다.

고구려 부녀자들이 썼던 관모는 크게 세가지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덮개천이고, 둘째는 털모자이며 셋째는

절풍이다.

덮개천은 고구려의 대부분 무덤벽화에 나오는 여자들

에게서 볼 수 있다. 쌍영총의 부녀자는 이마에 묶음천을

하였고, 각저총, 삼실총의 부녀자는 머리 위에 덮개천을

하였는데 머리를 모두 덮은 것처럼 보인다. 안악2호분의

여자도 덮개천을 하였다.

털모자는 안악2호분의 현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는 부

녀자의 머리 위에서 볼 수 있다. 벽화가 탈락되어 그 모

습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관모 위에 묘사되어 있

는 짐승털로 볼 때 부녀자들이 방한을 목적으로 썼던 털

모자가 확실하다.

고구려의 부녀자들은 절풍을 쓰기도 하였다. 여자들이

쓰는 절풍은 남자의 것과 다른 점이 없다. 쌍영총의 춤

추는 여자중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그 여자는 몸에 왼쪽여밈(左 )의 저고리를 걸쳤고, 저

고리는 깃과 옷 둘레에 선을 하였으며 긴 소매이다. 아

래에는 꽃 무늬 바지를 입었다.

일반적으로 고구려 벽화에서 보면 남자들의 저고리는

모두 수직이나 경사진 모양의 옷깃을 하였는데, 이 여자

의 옷은 아래쪽에 섶이 있고 왼쪽으로 꺾여 있는 것으로

보아 여자의 복식과 똑같다. 따라서 이 그림은 여자가 절풍을

썼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리고 절풍에다 새 깃 두개를 꽂았다. 이런 관모 형

식은 춤추는 중에서 남자를 모방한 형식일 수는 있다.

그렇지만 벽화에 나타난 그림을 통해서 적어도 우리는

고구려의 부녀자들도 절풍모를 썼다는 현상을 추측할 수는 있다.

나. 고구려의 복식습속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고구려인의 의복은 여러 종의

바지가 있으며, 면과 포로 직조할 수 있는 기술수준을

가졌다.

[한원(翰苑)]에는 양(凉) 원제(元帝)의 [직공도]를 인용

하여 "고구려의 부녀자는 흰 옷을 입고 남자는 무늬있는

면을 입고 금은으로 장식한다. 신분이 귀한 사람은 책을

쓰는데 뒷쪽에 금은으로 사슴뿔처럼 만들어 책 위에 더

하고, 천한 사람은 절풍을 쓰고 귀를 뚫어 금고리를 한

다. 웃 옷은 백삼이고 아래는 긴 바지를 입으며 허리에

는 은으로 만든 띠를 두르며 왼쪽에 갈 돌을 달고 오른

쪽에 오자도(五子刀)를 두른다. 발에는 두례답(豆禮踏)을

신는다"고 하였다.

[한원]에서 인용한 [고려기]에는 "그 나라 사람들은

면(棉)을 짜는데 보라빛 바탕에 무늬를 한 것을 으뜸으

로 치고 다음으로 오색 면을 꼽는다. 또한 백삼포, 청포

를 짜는데 아주 아름답다. 그리고 장왈( 曰)도 짜는데

한족의 말로는 접리(接籬)라고 하며 그 털은 말갈의 돼

지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상의 문헌상으로 본다면 고구려 민족의 방직업은 대

체적으로 크게 발전하였고 품종도 비교적 완전하게 구비

되었으며, 옷감과 색깔도 상당히 풍부하기 때문에 그 복

식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의 기본적인 조건이 될 수 있었다.

고구려 민족의 의복은 상의와 하의로 구분할 수 있는

데 그 상의는 저고리( )라고 하며 하의는 바지(袴)라고

한다. 이외에 겉에 입는 포(袍)가 있는데 혹은 오( ;안을

댄 저고리)라고도 부른다.

 

제 6 회 : 고구려 남자의 복식

1) 고구려 남자의 복식

짧은 저고리(短 )를 기본으로 하는 복식이 특징이다.

짧은 저고리의 길이는 일반적으로 궁둥이 선(臀線)에 이

른다. 오늘날의 중국식 중산복(中山服)이나 양복과 그다

지 차이가 없다.

고구려 벽화의 관찰에 의하면 더욱 뚜렷한 특징을 발

견할 수 있다.

짧은 저고리의 앞 섶(襟)은 완전한 개방식과 교차식

섶인 큰 섶이고, 곧은 깃(直領)은 목 아래에서 삼각형을

이루며, 대부분이 왼쪽 여밈(左 )이며, 소매의 입, 옷

깃, 도련에 모두 선( )이 있고, 허리에는 묶음띠를 둘렀다.

짧은 저고리의 소매 통은 폭이 넓고 좁은 것, 길고 짧

은 것의 구분이 있으며, 소박하고 화려한 색채의 구분이

있다. 이러한 구분은 신분의 귀천과 상하의 차이를 반영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인들이 입는 짧은 저고리는 소매가 좁고 소매의

길이도 비교적 짧은 편이며, 저고리의 양식과 색깔도 비

교적 단조롭다. 신분이 비교적 높거나 관직에 있는 사람

들의 짧은 저고리는 소매의 폭이 비교적 넓고 길이도 상

대적으로 길며, 색채가 아주 화려하고 선명한 선이 둘러

있다. 또한 저고리의 옷감과 무늬도 풍부하고 다채롭다.

바지는 지금의 한국인들이 입는 전통옷과 차이가 없으

며 통이 넓고 좁은 차이가 있으며 앞 뒤의 구별이 없는

편당고(便 袴)이고 허리를 졸라매서 고정시킨다. 현재의

한국인과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 노인들은 이러한 바지

를 여전히 입고 있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고구려의 바지는 여러 가지 이

름으로 불리우는데 [남제서]에서는 궁고(窮袴)

{{

) [南齊書] 권 58 <列傳> 39 東南夷 '高麗百濟條'

"高麗俗服窮袴."

}}

, [북사] 에서는 태구고(太口袴)

{{

) [北史] 권 94 <列傳> 82 '고구려조'

"服大袖衫, 太口袴, 素皮帶, 黃革履, 婦人裙 加 ."

}}

, [수서]에서는 대구고(大口袴)

{{

) [隋書] 권 81 <列傳> 46 東夷 '고려조'

"服大袖衫, 大口袴, 素皮帶, 黃革履, 婦人裙 加 ."

}},

[한원]에서는 장고(長袴)

{{

) [翰苑] <蕃夷部> '고려조' 所引 梁 元帝 [職貢圖]

"上衣白衫, 下白長袴, 腰有銀帶, 左佩 而右佩五子刀, 足履豆禮踏."

}}

라고 하였다.

저고리와 바지의 색에는 흰색, 검정색, 노란색, 보라색,

붉은색, 난초색, 녹색등이 있다. 저고리와 바지의 장식무

늬로는 점무늬, 구름무늬, 기하무늬, 십자무늬가 있으며

또한 유색의 바탕무늬등도 있다.

신분이 낮은 평민들의 옷은 색깔이 단조롭고 옷감도

조악하여

{{

) [구당서] 권 199 上 <열전> 149 上 東夷 '고구려조'

"國人衣褐戴弁, 婦人首加巾 ."

}}

대부분이 배(布)나 짐승가죽이다.

{{

) [위서] 권 100 <열전> 제88 '고구려조'

"民皆土著, 隨山谷而居, 衣布帛及皮."

}}

그러나 왕실의 귀족과 관리들의 옷은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의복이 모두 비단으로 짰으며 금은으로 장식한다"

{{

) [위서] 권 100 <열전> 제 88 '고구려조'

"其公會, 衣服皆錦繡, 金銀以爲飾."

}}

고하여 그 화려함의 일면을 알 수 있다. 신분이 높은 고구려 사

람들은 여러가지 무늬를 도안하여 장식한 화려하고도 질

좋은 의복을 착용하였다.

신분이 있는 사람과 왕실귀족들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

는 것 이외에 포(袍)나 오( )로 불리우는 외투를 걸쳤

다. 장삼(長衫)이라고도 불리우는 포는 비교적 길이가 긴

외투로 땅에 그 끌릴 정도이며, 단삼이라고 하는 오는

비교적 짧은 외투로 아래 섶이 무릎 정도에 이른다.

외투 계통의 포나 오는 섶이 고정된 합금(合襟)과 교

차하여 고정시키는 교금(交襟)으로 구분하고 모두 허리

에서 띠로 묶는다.

포나 오도 짧은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옷의 윗쪽이나

허리띠에 장식을 한다. 옛날 중국의 남자들은 모두 옥

(玉)을 허리띠에 찼는데 고구려의 남자들도 귀족계급들

은 반드시 옥을 장식으로 허리춤에 찼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보면 "의복은 모두

비단으로 짜고 금은으로 장식한다"

{{

) [三國志] 권 30 <魏書> 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

"衣服皆錦繡, 金銀以爲飾."

}}

고 하였으며 [한원]

의 기록에는 "허리에는 백색띠를 두르며 왼쪽에는 갈 돌

을 달고 오른쪽에는 오자도를 두른다"

{{

) [翰苑] <번이부> '고려조' 所引 梁 元帝 [직공도]

"左佩 而右佩五子刀."

}}

고 하였다. 이로 볼때 고구려 귀족들은 금은 장식말고도

여러가지 장식물들을 옷과 허리춤에 달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길이가 비교적 긴 포나 삼(衫)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입는

외투이고, 상대적으로 짧은 오( )는 실내에서 입는 외투이다.

통치계급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화려한 포, 삼등은 고

구려 벽화 중에서 그것의 색깔, 무늬를 뚜렷하게 확인

할 수 있다. 최고의 통치계급이 입던 포는 더욱 화려하

다. 안악3호분의 행렬도와 실내생활도 중에서도 확인 할수 있다.

묘주인이 앉아 있는 수레 앞의 기사가 입고 있는 백색포,

묘주인에게 보고하고 아울러 지시사항을 듣고 기록하는 기실(記室),

성사(省事), 문하배(門下拜)의 명문이 있는 관리들이 입고 있는 옅은 녹색포,

전실 남쪽벽에서 손으로 깃발을 들고 있는 기수가 입고 있는 황색포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묘주인이 입고 있는 옅은 자색바탕과 그 위에

붉은 선(紅線)을 한 다채포(多彩袍)는 사서의 기재에 나

타 나 있는 "고구려에서는 오로지 왕만이 다섯가지 색채

의 옷을 입고 백라(白羅)로 만든 관을 쓴다"

{{

) [新唐書] 권 220 <列傳> 145 東夷 '고구려조'

"王服五采, 以白羅制冠."

}}

는 기록과 일치한다.

또한 [구당서]의 "의상복식에서 왕만이 오채(五彩)를

하고 백라를 관으로 쓰며 백피(白皮)의 작은 띠(小帶)를

두른다. 그 관과 띠에는 모두 금은으로 장식을 한다"

{{

) [구당서] 권 199 上 <열전> 149 上 동이 '고구려조'

"唯王五綵, 以白羅爲冠, 白皮小帶, 其冠及帶, 咸以金飾."

}}

는 기록과도 부합된다.

고구려의 귀족들이 입는 포는 왕의 것보다 색깔이 적

다. 그렇지만 녹색, 담홍색, 보라색등 여러가지 색이 있

고, 나아가 이러한 색감을 바탕으로 그 위에 점 무늬, 십

자 무늬, 선 무늬등의 무늬장식을 한다. 집안 5회묘 4호

무덤의 인물화에서도 보라색, 노란색, 회색등 3색 바탕에

녹색 꽃 무늬의 장식을 볼 수 있고, 노란색, 보라색, 회

색, 녹색등 4색 바탕에 붉은 색, 녹색등의 화려한 꽃 무

늬의 포(袍)도 볼 수 있다.

{{

) [吉林輯安五 墳四號墓淸理略記], 길림성박물관, <考古 1964년 2기>

[吉林集安五 墳四號墓], 기림성문물공작대, <考古學報 1984년 1기>

}}

이외에도 다른 벽화중에서

여러 가지 색깔과 무늬 장식의 많은 종류의 두루마기

(袍)를 찾을 수 있다.

당시에 고구려 민족의 귀족계급과 일반 평민의 옷은

같지 않았다. 남자들이 입는 포의 경우에 왕은 다섯가지

색깔의 오채복에 금은을 장식하였고, 귀족들도 비교적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깔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일방 평민은 단지 하나의 색깔을 사용하였고

옷감도 조악한 것으로 갈의(褐衣)가 대부분이었다.

{{

) [신당서] 권 220 <열전> 145 동이 '고구려조'

"庶人衣褐, 戴弁."

}}

또는 아주 세밀하게 가공하지 않은 짐승 가죽으로 포나 오

를 지어서 추위를 이겨냈다.

고구려 귀족들은 귀천, 상하를 가리지 않고 저고리나

두루마기에 모두 허리띠를 둘렀다. 저고리나 두루마기에

는 단추가 없고 허리띠로 옷을 고정시켰다. 허리띠는 통

상 2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면포나 색깔이 있는 면(綿),

, 수(繡) 및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비교적 부드러

운 재질의 혁대로 대부분이 중, 하층 서민들이 사용하였다.

다른 하나는 면포와 가죽에 금은동철과 같은 금속을

붙혀서 만든 허리띠로 장식무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허리띠는 안악3호분중에 보이는데 그 모양을

보면 그 허리띠는 네모난 장식을 고리처럼 &#37953;붙이고 이

어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네모난 띠 판(帶飾板)의 아래

에는 살구나무 잎 모양의 장식을 걸었다. 이런 허리띠는

신분과 관직이 비교적 높고 사(士), 귀족들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 착용하였으며 공개적

인 제례나 행사때에 포(袍)의 밖에 둘렀다.

다른 하나의 복식은 무용총의 묘주인 실내생활도에서

볼 수 있다. 묘주인과 마주 앉아 있는 손님이 입고 있는

옷으로 그 사람은 머리털이 하나 없는 승려이다. 그는

짧은 저고리에 치마를 입고 있다.

문헌의 기재에 의하면 고대의 사람들은 모두 치마(裙)

를 입었다. 이것은 전한, 후한시기, 위진남북조와 수당시

기의 중국 한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만일 공개적인 장소에서 치마를 입지 않고 다만 저고

리, 바지, 잠방이( ;길이가 짧고 앞뒤 구별이 있는 짧은

바지)를 입는 것은 예의없는 태도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저고리와 짧은 바지의 일종인 잠방이는 실내에

서 입는 복장이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비록 위에 삼(衫),

오( )를 입고 아래에 바지를 입었어도 겉에는 반드시

치마로 바지를 감쌌다.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의 귀족들의 옷차림은 바지와 저

고리를 걸치고 치마나 포, 삼은 걸치지 않은게 대부분이

다. 또한 신분이 비교적 낮은 무사, 수렵하는 사람, 병사,

사역하는 사람들도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어도 포나 삼은

걸치지 않았다.

승려가 치마를 입은 것은 비교적 특수한 예에 속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비교적 보편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여러가지 상황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고구려인들은 승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치마를 입었을 것이

다. 다만 벽화중에 그것이 반영되지 않았을 뿐이거나 발

견된 벽화의 부분중에 그러한 그림이 탈락되었을 가능성

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가 입는 치마도

달랐을 것이다.

다른 시각의 예를 든다면 고구려의 승려들은 대부분이

그 민족 성원에서 출가하여 담당하였지만 벽화에 나오는

승려는 중국 한족에서 불법을 전하기 위하여 고구려에

온 사람으로 추측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제 7 회 : 고구려의 혼인습속

2. 고구려의 혼인습속

고구려의 혼인습속은 문헌에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고구려인들은 "혼인을 할 때 말로 결정한 다음에 여자쪽

에서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다. 이를 서옥(壻屋)이라

하고 사위는 날이 저물면 여자의 집 밖에 이르러 스스로

이름을 밝히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여자와 함께

잘 수 있도록 빈다. 이렇게 세차례를 하면 여자의 부모

가 받아 들이고 작은 집에 들어가 잠을 자는데 옆에 돈

과 비단을 놓는다. 여자가 성장하면 데리고 돌아간다. 그

나라는 퐁속이 자유롭다"

{{

) [三國志] 권 30 <魏書> 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

"其俗作婚姻, 言語已定, 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壻屋. 壻暮至女家戶外, 自名 拜, 乞得就女宿,

如是者再三, 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 傍頓錢帛, 至生子已長大, 乃將婦歸家, 其俗淫."

}}

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전체적으로 고구려인의 혼인습속의 특징과

형식을 기술한 것이다. 이로볼때 남녀 쌍방이 만나 서로

동의를 하고 말로써 혼인을 정한 후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무릎을 꿇고 잠자리를 함께 할 것을 구한 다음에

평생을 함께 하는 고구려 남녀의 혼인은 비교적 자유로

웠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민족은 노래에 능하고 춤을 잘 추는 민족이었

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날씨가 따스하고 맑은 날에는

봄, 여름, 가을을 막론하고 "나라의 여러 읍락에서 저녁

이나 밤에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서 서로 나아가 노래하

고 즐긴다"

{{

) [삼국지] 권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

"其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群聚, 相就歌戱."

}}

고 하였으며, 또한 노는데에 "귀하고 천한 사람의 절도가 필요없다"

{{

) [魏書] 권 100 <열전> 제 88 '고구려조'

"其俗淫, 好歌舞, 夜則男女群聚而戱, 無貴賤之節."

}}

라고 표현할 정도로 자유로웠다.

이런 습속은 청춘 남녀들에게 서로 쉽게 접근하는 조

건을 제공하였으며, 서로 연모하는 쌍방에게 애정을 쉽

게 고백하고 구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또한 말을 통해서 감정이 이루어진 후에 "혼인은 남녀

가 서로 좋아하면 그것으로 결정하였으며 남자의 집에서

는 돼지와 술만 보내면 그만이었고 재물로 결혼을 하는

예절은 없었다. 어떤 사람이 재물을 받는다면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부끄러운 짓으로서 딸을 노비로 파는 것과

다른게 아니라고 여겼다"

{{

) [북사] 권 94 <열전> 82 '고구려조'

"有婚嫁, 取男女相悅卽爲之. 男家送猪酒而已,

無財聘之禮, 或有受財者, 人共恥之, 以爲賣婢."

}}

는 한 기록도 있다.

이 단계가 이루어지고 서로의 사랑이 확인되면 여자쪽

에서 작은 집인 서옥을 짓고 하룻밤을 보내게 한다. 이

것은 원시 모계사회의 대우혼(對偶婚)이 남긴 여자쪽 집

에서 남자가 거주하는 풍속의 유산이다.

남자가 자기의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녀를 얻거나

여자가 성장해야 하며, 그때가 되면 처자를 데리고 남자

의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 여자들이 사

회와 가정의 경제, 생산, 생활상의 지위를 반영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혼인은 일부일처제 만은 아니다. 기록에 보면

"풍속이 자유로움을 숭상하는데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 사회에는 유녀(游女)가 많은데, 일정한 남편

이 없다.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서 노는데 귀

천의 절도가 없다"

{{

) [북사] 권 94 <열전> 82 '고구려조'

"風俗尙淫, 不以爲淫, 俗多游女, 夫無常人. 夜則男女群聚而戱, 無有貴賤之節."

}}

고 하였다.

이것은 모계사회의 무리혼(群婚)이 남긴 풍속으로 성

인 남녀 사이에는 성관계에서 어떤 금기나 엄격한 제한

이 없었다. 이런 형식은 현재에도 많은 소수민족에게 남

아 있다. 운남의 영녕현에 사는 납서족(納西族)의 아주혼

인(阿注婚姻)이 그 좋은 예이다.

그 혼례는 "가을에 대마(大麻)를 수확하고 여자들은

저녁에 마을의 공회당이나 풀밭에 모여 달 빛 아래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래를 부르면서 길쌈을 짠다. 남자

들이 앞에 나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의 곁에 가서

귓속말로 밀고 당기면 아주(阿注)를 원하지 않는 여자는

계속해서 길쌈을 짜고 원하는 여자는 길쌈짜는 곳을 떠

난다. 남녀 쌍방이 아주의 관계를 세우고 나면 남자는

여자의 집에 찾아가 잠을 잘 수가 있다.

아주의 관계가 세워진 후에 남녀 사이에는 서로 떨어

져 사는 대우혼 생활이 시작된다. 그리고 처음에는 대부

분이 비밀상태로 지낸다. 남자가 여자의 집에 찾아 갈

때에는 여자쪽의 친척이 떠나야 하며, 먼저 암호로 약속

을 하고 비밀리에 여자가 사는 곳으로 찾아간다. 아침이

되면 몰래 빠져 나와야 한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비밀스런 왕래가 사람들에게 알

려지면 여자는 환영을 표시하고 남자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동거를 시작한다."

{{

) [雲南 寧 納西族的阿注婚姻], 詹永緖 외, <사회과학전선 1979년 2기>

}}

고 한다.

이런 아주혼인은 평생동안 이루어지고 보통 6-7인이

함께 생활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백여명에 이르기도 한

다. 따라서 여자들도 자신이 낳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누

구인지 모른다. 이런 아주혼인은 전형적인 모계사회의

가족제도이다.

고구려의 혼인도 이와 유사하다. 이때문에 미혼이나

기혼의 남녀들의 성관계가 비교적 쉬운 것이다. 기록에

"그것에는 귀천(貴賤)의 절도(節度)가 없다"는 것은 왕실,

귀족과 민간 여자들 사이에도 성관계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자 "관노부의 여자를 통해서 아

들인 위궁을 얻었다"

{{

) [삼국지] 권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

"伊夷模無子, 淫灌奴部, 生子名位宮."

}}

는 기록이 좋은 예이다. 또한 산

상왕은 12년 겨울 11월에 "교사(郊祀)에 쓰일 돼지를 잡

으려고 뒤&#48193;았는데 주통촌에 이르러서도 능히 잡지를 못

하였다. 그곳에 여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스물정도로 얼

굴이 절색이었다. 그녀가 웃으면서 앞으로 나아가 돼지

를 잡았다. 왕이 듣고 그녀를 보고자 했다. 몰래 빠져나

와 밤에 그녀의 집에 이르러 시복에게 말을 전하였더니

그 집에서는 왕이 이르렀음을 알고 감히 거역하지 못하

였다. 왕이 그녀를 방으로 불러 들여서 사통하였다. 아들

을 얻으니 이름을 교체라고 하였다"

{{

)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본기> '산상왕조'

"郊豕逸, 掌者追之, 至酒桶村, 不能捉, 有一女子, 年二十許,

色美而絶, 笑而前執之, 然後追

者得之. 王聞而之, 欲見其女, 微行夜至女家, 使侍人說之,

其家知王來, 不敢拒, 王入室召其女...得子

曰郊 ."

}}

는 기록도 있다.

그렇지만 고구려의 일반 백성들에게 '일정한 남편이

없었다'라는 기록도 있지만 여전히 일부일처제가 주류였

고, 왕실과 귀족들은 다처제 생활을 하였다. 이런 풍속은

고구려의 대형 묘(墓)에서 나타나는 둘 또는 서너개의

관에서 알 수가 있다.

 

제 8 회 : 고구려의 거주와 건축습속

3. 고구려의 거주와 건축습속

고구려는 건축방면에서 풍부한 유산을 남겨 놓았다.

통치계급은 여러 종족 인민들을 통치하기 위한 필요성에

의하여 건국하자 바로 그 도성(都城)을 쌓았다. 그후에

고구려 사회경제의 발전과 민족간의 교류가 강화되는 것

에 맞추어 고구려 민족은 그들의 거주용 건축물과 여러

건축업의 방면에서 독특한 민족적 특성을 드러내면서 수

많은 건축양식을 창출하였고, 수준 높은 기술과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축은 주택,

궁전, 성곽, 사원등이 있으며, 규모가 아주 큰 무덤건축

이 있다. 그렇지만 무덤건축은 종교의식과 장례습속과

관련이 있는 건축물이므로 다른 장에서 설명을 하도록

한다.

고구려의 건축방면은 그들 민족 건축의 품격과 기술수

준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고구려 문화의 발전수

준을 나타내 주고 있다.

가. 주택

주택은 거주지이며, 고구려 민족의 생활과 직접 관계

가 있는 장소이다. 거주의 풍속과 품격은 그 민족을 이

해하는 중요한 창구의 하나이다.

문헌 기재에 따르면 "고구려인의 거주는 산과 계곡(山

谷)에 의지하고 모두 띠풀로 지붕을 하며, 오로지 사원,

신묘 및 왕궁, 관청에만 기와를 사용한다. 그 사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겨울이 되면 모두 긴 구들을 놓

고 아래에 불을 지펴 따스한 기운을 얻는다"

{{

) [구당서] 권 199 상 <열전> 149 上 동이 '고구려조'

"其所居必依山谷, 皆以茅草葺舍, 唯佛寺神廟及王宮官府乃用瓦.

其俗貧 者多, 冬月皆作長坑, 下燃온 火以取暖."

}}

고 하였다.

문헌상에서 볼 때 고구려의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는

집은 산의 계곡에 의지하여 지은 작은 초가집이다. 이것

은 기본적으로 당시의 현실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고구

려 통치계급과 백성들의 주택은 엄격한 등급에 의해 크

기나 형태가 규정되었다. 이 점은 고고학상의 발굴로 증

명이 되었다.

현재 고구려 일반 백성의 집은 보존상의 어려움 때문

인지 발견된 예가 많지 않다. 백성들의 주택은 초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초기의 집 터는 북한의 자강도 시중군(時中郡) 노남리

(魯南里)에서 발견되었다.

{{

) [朝鮮考古學槪要] 193쪽, 李雲鋒 譯, 훅룡강성 문물출판편집실

}}

노남리의 제2호 집 터는 동쪽

과 서쪽이 비교적 긴 장방형의 건물터이다. 이곳에는 동

쪽과 서쪽으로 마주 한 두 방의 구들이 있다. 또한 동쪽

과 서쪽으로 가로 놓여있는 4개의 기둥구멍도 발견되었

다.

건물터의 지면은 가운데 부분이 점토로 발라졌고, 두

개의 구들 사이에는 경계선이 분명치 않았고, 하나의 용

마루 아래에는 두 칸의 방이 배치되어 있다.

두 개 구들의 아궁이는 모두 남쪽에 있고, 구들의 굴

은 대략 북쪽으로 뻗다가 다시 굽어져 서쪽으로 나아간

다. 그 모양이 L자형으로 구성된 홑 굴(單洞)의 구들이

다.(그림 23 참조)

이 건물터는 평면구조로 본다면 지면의 위에 방이 배

치된 형태이고, 건물의 가운데 주춧돌 위에 용마루가 불

쑥 솟아 있고, 가로로 늘어 서있는 기둥의 위에 대들보

가 놓여져 있다. 지붕은 용마루부터 왼쪽과 오른쪽으로

비스듬한 언덕모양으로 아래로 늘어졌다. 기둥과 대들보

가 교차한 곳에 지붕이 맞닿고 그곳까지 벽을 쌓은 가옥

구조이다. 지붕은 산이나 들에 나는 풀로 엮어 덮었는데

요즈음의 초가집과 모양이 같다. 그리고 양쪽은 흙이나

흙벽돌, 풀에 진흙을 이긴 덩어리를 쌓고 그 위에 처마

의 대들보를 놓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3개짜

리 대들보 구조의 집은 아니다.

이와 같은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일반 평민이고, 결

코 지붕에 기와를 언증 수는 없는 구조이다.

이렇게 빈궁한 삶을 살았던 평민과는 반대로 통치계급

의 주택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 이것은 생활이 보다 윤

택하고 화려했던 주택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집안현 동대

자(東臺子)에 있는 고구려 후기의 집터에서 대표성을 찾

을 수 있다.

1958년 길림성 박물관은 동대자 유적지 중에서 회랑을

구성하고 있는 4칸짜리의 1호, 2호 정실(正室)과 3호, 4

호 쪽방의 일부분을 조사하였다.

{{

) [吉林輯安高句麗建築遺址的淸理], 길림성박물관, <고고 1961년 1기>

}}

1실은 정실의 동쪽칸으로 장방형의 구조에 동서의 길

이는 15미터, 남쪽의 폭은 11미터였다. 먼저 땅을 깊게

&#53313;판 뒤에 오리알 크기의 돌과 황토를 넣어 지반을 여러

층으로 만들어 튼튼하게 다지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았

다. 주춧돌은 비교적 가공이 덜되어 거칠었다.

정실의 밖에 위치한 회랑에는 지반을 다지지 않고 주

춧돌 밑에 오이알 크기의 돌만 2-3층 정도 넣어 다졌다.

이것은 주춧돌을 견고하게 하는 한편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땅으로 스며들어, 주춧돌 주변의 흙을 유실시켜

서 주춧돌이 침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곳의

주춧돌은 매우 깨끗하게 다듬여졌다.

실내의 중앙에는 장방형의 석좌(石座)가 있다. 길이는

80센티미터, 너비는 60센티미터, 높이는 1미터이다. 석좌

의 꼭대기는 실내보다 0.6미터 정도 솟았다. 석좌의 윗부

분 가운데에는 동서로 4개의 장방형 홈이 파져있다. 홈

의 크기는 길이 9센티미터, 너비 4센티미터, 깊이 8센티

미터이다.

석좌의 서쪽과 남쪽에는 홈을 판 흔적이 있다. 어떤

것은 석좌의 윗부분 가운데에 뚫려있는 4개의 장방형 홈

과 흔적이 같은게 있다.

지면에 노출된 석좌의 아래 주변에는 오리알 크기의

돌이 깔려 있는데 그 밑으로 석좌의 기단부에까지 미쳐

있어 석좌를 고정시키는 기능을 한다.

석좌는 주변에 깔린 조약돌까지 포함해서 실내 면적의

20%를 차지한다. 석좌의 주변에 깔린 조약돌이 약간 지

면으로 솟아 올라 있기 때문에 실내 중앙은 매우 뚜렷하

게 둥근 기단에 사각기둥형 석좌(圓基方柱形石座)를 형

성하고 있다.

실내의 동쪽 벽에서 남쪽 끝에 가까운 기단 아래에는

아궁이터가 하나 있는데, 매우 두터운 회토(灰土)와 불에

구운 붉은 흙으로 되어 있다. 부근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토기편과 쇠솥 조각이 있다.

아궁이의 북쪽과 연도(煙道)는 서로 이어졌고, 연도는

동쪽벽과 북쪽벽의 기단을 따라 곧게 이어지다가 북쪽벽

기단 서쪽에서 꺾여진다. 연도의 길이는 22미터, 폭은 70

센티미터, 높이는 25센티미터이다.

연도의 양쪽 벽 아래에는 각각 한 층의 조약돌이 깔려

있고, 조약돌 위에는 깨어진 기와가 층층히 쌓여있는데

매우 질서있게 놓여져 있다. 바닥은 기와조각을 깔아 바

닥을 다졌고, 그 위에 석판(石板)으로 연도를 덮었다.

연도에는 연기에 그을린 회토가 있는데 그 색이 매우

옅어 연도를 통과한 연기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연도의 끝에는 둥근 연통과 이어졌는데 직

경이 1미터이며 연통의 벽은 기와조각으로 쌓았고, 바닥

에는 조약돌을 깔았다.

문은 남쪽 벽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2실은 정실의 서쪽칸이다. 평면으로 본다면 방형(方形)

에 가깝다. 동서의 길이는 15미터, 남북의 폭은 14미터이

다. 네개의 벽 아래에는 매우 잘 다듬어진 주춧돌이 있

는데 대부분이 사각형의 몸체에 위 면이 둥근 방체원면

석(方體圓面石)이다.

각각의 주춧돌의 아래에는 모두 2-3층의 조약돌이 다

져있어 주춧돌을 고정시키는 한편 침하를 막는 역할을 한다.

실내의 밖에는 동쪽에 있는 1실의 남쪽 벽 밖으로 서

로 평행하는 회랑의 길이 있다. 실내의 북쪽 벽에 가까

운 곳에 커다란 아궁이가 있는데 아궁이의 벽은 L자형

으로 3개가 나란히 늘어섰고 두 개의 아궁이 굴이 형성되었다.

아궁이 굴과 굴의 사이는 거리가 25센티미터이고, 굴

의 노비는 30센티미터, 깊이는 20센티미터이다.

굴 사이에는 두터운 회토가 있고, 구덩이 부근에는 부

서진 목탄이 있다. 아궁이의 벽은 기와조각을 쌓아서 만

들었고, 굴 바닥은 30-50센티미터 정도의 두께의 석판으

로 구들을 놓았다. 아궁이의 길이는 11미터, 폭은 2미터

이다. 아궁이가 있는 실내의 바닥은 다른 바닥보다 약간

솟았다. 그리고 실외의 지면은 이보다 비교적 낮거나 평

행이다.

아궁이의 남쪽 끝은 아궁이터로서 위에는 30센티미터

두께의 회토가 쌓여졌고, 안쪽에는 불에 구운 붉은 흙과

토기조각, 쇠솥 조각이 섞였다. 그리고 구덩이의 아래는

조약돌로 지반을 다졌다.

이 구덩이의 서쪽 끝의 북쪽에 치우친 곳에는 돌을 쪼

개서 3갈래로 만든 하나의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의 높

이는 25-30센티 높이의 돌로 제한되고, 아궁이의 굴과

굴 사이의 거리는 이 돌의 너비 15-20센티로 제한되었

다. 아궁이 굴은 동서쪽으로 향하였다.

굴의 바닥에는 크기가 두껍기도 하고 엷기도 한 연기

에 그슬린 회토가 쌓였있다. 굴의 면적은 동서 길이가 3

미터, 남북 너비가 2미터이며, 아궁이가 있는 실내의 바

닥은 다른 바닥보다 약간 솟았다.

이 아궁이는 1실의 아궁이와 서로 붙어 있는데, 통하

는 부분의 밖의 남쪽에는 또 하나의 아궁이가 있다. 직

경은 1미터이며 아궁이의 입구에는 불규칙한 돌과 회토

가 쌓였다. 이 아궁이의 서쪽 끝과 연도는 서로 이어졌

고 연도는 남북으로 향했다. 길이는 6미터, 너비는 80센

티미터이다. 연도의 양쪽 벽은 돌을 깨서 쌓았다. 연도의

끝에는 둥근 연통이 있고, 연통 벽의 기단은 돌을 깨서

바닥을 다졌으며, 기단의 밖 주변에는 깨부순 삼각형의

돌로 쌓았다. 연통은 직경 1미터이다.

실내 중앙의 서남쪽에 치우친 곳에는 아주 잘 다듬어

진 주춧돌이 하나 있는데 윗 바닥에는 둥근 원이 두 개

가 있고, 몸체가 육중하며 아래에는 조약돌로 지반을 다졌다.

3실은 2실의 서북쪽 구석에 있다. 4실은 1실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다. 3실과 4실은 유구가 심하게 파손되었는

데 1실과 2실에 딸린 쪽방으로 보여진다.

동대자 유적지의 건물터는 제왕의 궁전이거나 사직을

제사지내는 곳으로 추정된다.

{{

) [集安東臺子高句麗建築址的性質與年代], 방기동,

<東北歷史與考古 1982년 1기>

}}

그중에서 1실은 마땅히

지모신을 신앙하는 곳이고, 1실의 중앙에 있는 석좌는

당시의 신주를 모시던 곳으로 보여진다. 기록에 의하면

고국양왕 9년(392) 봄 3월에 다시 세운 왕실의 사직과

종묘일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기술한 1실과 2실의 실내는 난방 설비가 같지

않다. 1실은 단지 70센티 너비의 연도가 하나 있어 사람

이 머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어떤 제사의식을

거행하던 장소일 것이다.

2실은 너비가 2미터나 되는 구들이 있고, 또한 두터운

회토가 있어 늘상 불을 지피던 곳이다. 아궁이와 구들의

사이에서 일찌기 돌절구, 도제(陶制) 방륜(紡輪)과 구멍

이 있는 네발달린 도기등 생활용구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왕실의 주요한 사람들이 잠자던 곳으로 보여진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궁실을 매우 잘 짓고 거

주하는 곳의 오른쪽과 왼쪽에 큰 집을 지어 귀신을 제사

지내고 또한 영성과 사직을 섬긴다"

{{

) [삼국지] 권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

"其俗節食, 好治宮室, 於所居之左右立大屋, 祭鬼神, 又祀靈星社稷."

}}

고 하였다. 1실은

바로 유적의 왼쪽에 있으므로 문헌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런 건축물은 평면 배치에서 본다면 우리에게 매우

장대하고 화려한 인상을 주며, 아울러 고구려 건축의 특

징인 구조의 대칭, 격식의 근엄함, 형식의 미관등을 알

수 있게 한다.

건국 초기의 비류수 가에 갈대를 엮어 궁전을 만든 기

록과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너무나도 많이 난다.

동대자 유적의 주택은 옆에서 보면 주춧돌 위에 나무

난간이 늘어서고 지붕은 기와로 덮었으며, 여러 방 사이

에는 아궁이와 구들, 회랑이 있는 건축물군이다. 다만

동대자 유적지는 그 부분을 발굴 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통치계급의 가옥 구조의 전모를 알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비교적 상세하게 그 거주하는 건축과 부속건물의 배치

등의 방면에 대한 상황을 묘사하려면 당시의 벽화에 남

겨진 건축도와 전각도 및 완전한 고고발굴의 성과가 필요하다.

북한의 평양시 역포구 무진리 정릉사지의 건물터 토방

(土方)의 주위에는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수구(水溝;개

울)와 돌다리(石橋)가 있다. 정방(正房)의 주위에는 회랑

이 있고 지면은 벽돌을 깔았다. 정방의 안에도 사이기둥

마다 여러가지 장식이 있었고 심지어는 무늬장식이 있는

벽돌로 아궁이를 만들었다. 지붕은 여러가지 무늬가 있

는 벽돌을 썼다.

건물터 주변에는 괴석으로 화원을 만들고 바위 가운데

로 물이 흐로도록 하였다. 이런 집터는 그 구조의 수준

이 매우 높은 건축물이다.

{{

) [조선고고학개요], 이운봉 역, 흑룡강성문문출판편집실

}}

북한 안악3호분의 건축그림과 안악1호분의 전각도에서

도 고구려 통치계급의 주택건축의 배치를 한껏 이해할

수 있다.

{{

) [在朝鮮安岳發掘的一些高句麗古墳], <文物參考資料 1952년 1기>

}}

안악3호분의 묘실은 연실(羨室), 전실(前室), 묘실과 동

서쪽에 이실(耳室:딸린 방) 및 동쪽에서 북쪽으로 향한 L

자형의 굽어진 회랑으로 구성되었다. 이 묘실의 그림과

다른 곳에 나누어 그려진 묘실의 그림과 결합해서 본다

면, 벽화가 표현하는 내용이 이 묘실이 실제의 생활에서

거주하는 주택건축의 부분이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알 수 있다.

묘주인 부부와 시종이 그려져 있는 서쪽 묘실과 주검

이 놓여 있는 주 묘실은 묘 주인의 각기 다른 거실을 상

징한다.

그리고 동쪽 묘실에는 주방, 고깃간, 마굿간, 외양간,

멧돌방, 우물, 수레창고등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주택

건축물의 다른 구역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당시에 통치계급층의 주택에는 주방이 별처(別處)에

지어졌다. 이런 사실은 집안의 무용총, 각저총등의 주방

도에서 모두 증명된다.

주택의 건축은 모두 기와로 지&#42049;을 하였다. 연도(羨道)

는 정실로 가는 대문이고, 전실은 앞 뜰이며, 랑(廊)은

주택의 회랑과 후원으로 볼 수 있다. 이것에서 우리는

앞 뜰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일들을 집행하는 독립된 건

축임을 알 수 있고, 대규모의 질서정연한 주택건축 구조

물이 구성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안악1호분의 전각도는 정원에 치미가 금빛처럼 빛나는

2층건물을 배치하고 주위에는 회랑을 둘러치고 모든 회

랑에는 문루(門樓)를 세우고, 모서리에는 각루(角樓)를

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방과 회랑, 각루등의 건축

물에는 모두 지붕에 기와를 얹었고, 건축물 중에는 도처

에 공포가 있는 기둥을 세웠다. 넓은 정원에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이어진 여러가지 기능을 집행하는 많은 종류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고, 주택의 주위에는 담을 세운 것도 볼 수 있다.

평민들의 주택은 물론이고 통치계급의 호화로운 주택

에도 모두 L자형의 낮고 긴 구들을 놓았다. 이것은 "겨

울에 모두 긴 구들을 놓고 아래에 불을 지펴 온기를 얻

는다"는 기록과 맞아 떨어진다. 아울러 같은 용마루 아

래에 두 개의 방이 있고, 각자의 방에는 다른 구들을 놓

았다. 이것은 당시의 난방시설이며 실내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설구조물이었다.

 

제 9 회 : 고구려의 실내생활 습속

나. 실내생활의 습속

고구려인들이 실내에서 생활하는 습속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이 긴 역사의 과정에서 소멸되었지만, 적지 않은

풍속이 여전히 당시의 생활을 묘사한 벽화에 드러나 있다.

고구려 무덤벽화에서 인물풍속과 사신(四神)을 그린

그림에는 묘주인의 실내생활에 대한 장면이 있다.

그들은 호화로운 집의 사방이 주렴으로 드리워진 실내에서 살았다.

어떤 묘주인은 구들의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평상이나 좌상에 앉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걸상에 앉아있다.

묘주인의 주위에는 시종, 시녀등이 시중을 들고 있다.

평상과 좌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자세는 대부분이 책

상다리를 하였다. 평상과 좌상의 모양은 크게 다르지 않

다. 다만 크고 작은 것과 넓고 좁은 것의 차이만이 있다.

좌상은 다만 한 사람이나 둘 정도가 앉을 수 있을 정

도의 너비이고, 평상에는 두 사람 이상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평상은 앉는 용도 이외에도 누워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좌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죽신이나 코없

는 가죽신을 벗고서 앉아 있다.

이것은 맨발로 좌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나 가죽신을 벗어

방 밖에 두는 그림, 또는 상 앞에 두는 것에서 알 수 있다.

{{

) [舞踊塚 天井壁畵], [狩獵塚 生活圖], [雙楹塚 生活圖] 參照

}}

고구려 민족은 실내에서 활동하거나 생활할 때 주로 신발

을 벗었다. 이것은 실내에서 신발을 벗도록 생활 할 수

있는 환경의 조건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리나 의

복이 더럽혀 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실내의 상(床)위에

상깔개와 같은 여러 물건들을 깔아 놓고 그 위에서 생활

하기 편리하게 하는 구조이다.

묘주인의 실내생활도가 그려져 있는 벽화는 비록 평상

이나 좌상에서 생활하는게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어떤 그

림에서는 걸상에 앉아 있는 생활도도 있다. 걸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가죽신을 신고 앉아 있다. 이것은 실내에서

생활할 때 어떤 시기나 장소에 따라서는 신발을 신고 있

는게 적합하다는 의미이며, 신발을 신고 다니기에 적합

한 장소일 경우이다.

걸상에 앉아 있는 것과 비교할 때 고구려 사람들은 책

상다리를 무척이나 좋아 하는 것 같다. 이것은 당시 사

람들의 습관을 반영한다.

실내생활에서 평상과 구들위에서 활동하는 때가 많기

때문에 상의 다리는 매우 짧게 만들었고, 구들도 크기가

그리 크지 않다.

고구려 시기에 사람들은 신분의 상하와 귀천에 관계없

이 실내에 모두 구들이 있고 방은 동서에 두 개를 두었

다. 그 구조상에서 차이가 하나도 없다. 또한 구들에서

온기를 취하는 난방법도 같다.

구들의 높이가 매우 낮은 사실에서 볼 때 평민들도 구

들 위에서 생활 할 때에는 당연히 실내에서 신발을 벗었

다. 비록 벽화상의 평상과 좌상에는 통치계급의 생활만

이 묘사되어 있지만, 평상에는 방습시설이 구비되어 있

으므로 그 위에서 휴식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었

다. 따라서 평민들도 이러한 시설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

만 벽화에 나타난 그런 화려한 평상보다는 매우 소박했

을 것이다.

다. 궁전과 사원의 건축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그 나라의 왕은 궁실을 잘 짓

는 것을 좋아한다"

{{

) [위서] 권 100 <열전> 제 88 '고구려조'

"其王好治宮室."

}}

고 하였거나 "궁실을 잘 짓는 것을

좋아하고, 거주하는 곳의 좌우에 큰 집을 지어 귀신을

제사 지내고 또한 영성과 사직을 받든다"

{{

) [삼국지] 권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

"其俗節食, 好治宮室. 於所居之左右立大屋, 祭鬼神, 又祀靈星社稷."

}}

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궁실은 두 가지의 뜻이 있다. 하나는

거주하고 활동하는 집을 말하는데 주로 왕궁이나 귀족의

주택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를 받들기 위한 전각이나 묘

당을 말한다.

고구려의 개국왕인 고추모

{{

) [광개토대왕능비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 牟墓志]

"河泊之孫, 日月之子, 鄒牟聖王..."

}}

는 처음에 졸본천에 이르

러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위에 띠집을 지어

그곳에 거주하였다"

{{

)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본기>

}}

고 하였다. 여기에서 띠집이라고 말

하는 결로(結蘆)는 간소하고 누추한 초가집이며, 적어도

궁실이라고 할 때는 비교적 면적이 큰 토목구조의 큰 건

물을 말한다.

3세기 중엽 이후로 중국의 건축양식의 영향으로 고구

려에서도 기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와에는 판기와,

통기와, 와당이 있다.

고구려의 도성인 집안에서 발견된 최초의 권운문(卷雲

紋)이 있는 문자기와는 한대의 기와와 모양이 유사하다.

와당의 문자는 모두 중국에서 유행한 한대 예서의 변체

자이다.

{{

) [集安卷雲紋銘紋瓦當考辨], 李殿福, <社會科學戰線 1984년 4기>

}}

4세기 말에 고구려의 기와는 민족적 특색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부분이 진흙을 구운 붉은색 도기(陶器)이며

기와의 가(瓦邊)가 돌기를 이루는 고부조(高浮雕)식이고

문양은 연꽃무늬, 인동초무늬, 귀면(鬼面)의 세 종류가

있다.

기록에 보면 "그들의 거주는 반드시 산의 계곡에 위치

하고 모두 띠풀로 엮어서 집을 만든다. 오로지 불사, 묘

당, 왕궁, 관청에만 기와를 쓴다"

{{

) [구당서] 권 199 上 <열전> 149 上 동이 '고구려조'

"其所居必依山谷, 皆以茅草葺舍, 唯佛寺神廟及王宮官府乃用瓦."

}}

고 하였다. 이것은 고

구려 사회의 각 계층이 쓰는 주택, 방, 궁실, 전당(殿堂)

등의 규모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집안의 국내성과 환도산성 내에 위치한 규모가 큰 유

적지에서는 대량으로 기와, 와당이 나오며 배열이 정연

한 주춧돌이 보인다. 이것은 마땅이 궁전과 같은 건물이다.

국내성 교외의 많은 유적지에서도 흙기와, 와당등이

나오는데, 이는 관청이나 귀족들의 주택으로 보여진

다.

{{

) [高句麗民俗槪述], 耿鐵華, <求是學刊 1986년 5기>

}}

현재까지의 고고자료에 의한다면 고구려는 중기(427

년)이후 도성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그곳에 안

학궁을 세웠다. 이곳의 궁전과 건축물에 대해서는 그 규

모와 내용이 [조선고고학개요]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안학궁은 총면적 31, 458 평방미터에 달하는 궁성으로

그 안에서 52채의 건물터와 정방형의 궁성 성벽을 발견

하였다. 궁전은 남쪽 성벽을 통과하는 중문(남문)을 기준

으로 남북방향의 중심축을 중심으로 삼았고, 원칙적으로

대칭의 배치를 보여준다.

지세(地勢)의 기복에 따라 5개의 건축군을 배치하였다.

남쪽으로 시작하여 중심축을 따라 제1건축군인 남궁지가

있고, 제2, 제3건축군인 중궁지와 북궁지가 있다.(그림

29 참조) 중심건축군인 3개의 궁전건축 이외에 동북쪽에

동궁지가 있고 서북쪽에 서궁지가 있다.

동쪽의 낮은 습지대는 드문드문 독립건축물을 세웠고,

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큰 연못을 배치하였다.

또한 성안에는 곳곳에 연못이 있다. 북궁의 뒷쪽과 남

궁의 서쪽에는 가산(假山)이 딸린 정원이 있다. 모든 주

요 건물과 부속건물은 이처럼 균형있고 조화로운 배치구

조를 보인다. 이것은 대칭방법이 일으키는 엄숙하고 근

엄있는 효과이다.

남궁을 위주로 하는 중궁, 북궁, 동궁, 서궁의 5개구역

은 대형 회랑으로 둘러쌓인 독립된 건축물이다. 이런 회

랑에 의거하여 서로 연결된 각각의 구역에는 모두 중심

궁전이 있고, 궁전과 회랑에는 모두 문이 있다. 각각의

구역에서 중앙에 위치한 궁전은 규모가 가장 크다.

각각의 구역의 중앙궁전은 모두 2개 이상의 회랑이 구

비된 소궁전을 배치하였고, 어떤 것은 나란히 이어진 회

랑을 교차하여 많은 사각의 공간을 나누어서 그 안에 건

축물을 배치하였다.

이상의 배치상황에 근거한다면 남궁은 국가의 정식 의

례를 행하는 정전이고, 중궁, 북궁과 서궁은 국왕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내전, 침전, 선방(膳房)과 편전(偏殿)

이며, 서북쪽의 궁전은 소규모의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

기 때문에 고대의 궁성제도에 의한다면 이곳은 궁내에서

시중드는 비첩이나 노비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이외에

왕궁내의 동남쪽에 두 개의 건축지가 있다.

안학궁은 거대하고 화려한 궁전으로 가산, 연못등 인

공화원 시설이 세밀하게 분포된 대규모의 궁성이다. 여

기에서는 고구려 민족의 특색이 갖추어진 여섯 꽃 잎,

여덟 꽃 잎의 연꽃무늬 기와와 네 꽃 잎의 연꽃무늬 와

당이 대량으로 나오고 있다.

고구려인이 궁실을 매우 잘 짓기를 좋아한다는 표현은

고구려의 왕릉 위에 세운 향당이나 귀족계층의 묘에 묘

사되어 있는 실내모습등에서 알 수 있다. 태왕능, 장군

총, 천추묘, 서대묘등의 묘 위에는 갈라진 돌 틈에서 대

량으로 건축에 쓰이는 벽돌, 기와, 와당등이 발견된다.

어떤 것은 벽돌이나 기와에 문자가 있다.

고구려는 적어도 3세기 중엽 이후로 주택이나 궁전의

건축에 이미 치미를 사용하였다. 실내의 대들보는 일 두

(一斗), 일 두 이 승(升), 일 두 삼 승의 두공(斗拱)과 주

렴들의 기술과 시설이 있다.

그 부속건물에는 주방, 마굿간, 정자, 우물, 칼가는 방,

대청, 창고등의 시설이 있다. 명주(明柱)식의 건축물과

처마가 치솟는 양식인 대비첨(帶飛 ), 헐산정(歇山頂),

양분정(兩分頂), 경산정(硬山頂), 사아정(四阿頂)등의 건축

양식이 있는데, 이것은 통치계급의 건축이 틀림없다.

불교사원의 건축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소수림왕

2년(372)에 보면 "전진(前秦)의 왕인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와 불상, 경전을 고구려에 보냈으며", 그 3년

후인 "5년(375)에는 초문사, 이불란사를 지었는데 이것이

해동불교의 시작이다"라고 하여 불교의 사원건축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고국양왕은 9년(392)에 교시를 내려 불교를 믿도록 하

였다. 광개토대왕은 2년(393)에 평양에 9사(寺)를 짓고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현재 비교적 중요한 사원의 발견은 정릉사, 금강사(청

암리 폐사), 원오리 폐사, 상오리 폐사, 청호리 규원사,

중흥사, 낙사의 유적지가 있다.

고구려의 사원은 현재의 고고발굴 자료와 발굴상황으

로 볼 때 대체적으로 1 탑 3 불당제로서 북, 동, 서쪽에

3개의 불당과 불당의 정중앙에 한 개의 팔각형 목탑을

세우는 구조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청암리 토성내의 금

강사지를 소개한다.

금강사는 탑을 중심으로 앞쪽 전방 건축군과 후방 건

축군으로 구성되었다. 금강사의 전후방 건축군은 중심축

이 좌우로 대칭되는 구조로 배열되었다. 사원터의 전체

배치는 남쪽에서부터 시작하여 문, 탑, 전당(前堂)의 순

서로 배열되었다.

금강사 전방 건축군 중앙에는 8각형 목탑이 세워져 있

다. 탑지는 직경 25미터, 각각의 변의 길이는 10.5미터이

다. 현재 있는 탑지는 기단부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절단

하여 팔각형으로 만들었다. 주변에 깔린 평평한 돌과 70

센티미터 폭의 돌들은 목탑의 배수구조이다.

기단은 2단계의 계대(階臺;계단식 층대)로 구성되어 있

다. 제1단계 대의 가에는 주춧돌이 배열되어 있다. 주춧

돌은 일반적으로 4각형이며, 여덟개의 모서리(角)에 있는

주춧돌은 오각형이다. 주춧돌의 윗쪽 가운데에는 나무

기둥을 세울 수 있는 홈이 파여 있다.

8각 기단의 동, 서, 남, 북 사방에는 모두 디딤돌이 있

고, 부순 돌로 깔아 놓은 통로는 사방의 전각과 이어졌다.

팔각탑의 남쪽에서 10.57미터 떨어진 곳은 문지(門址)

이다. 문지는 장방형으로 주위에는 부서진 돌을 깔아 놓

은 배수시설이 있다.

목탑의 북쪽은 정전에 해당되는 금당지이다. 목탑의

동쪽, 서쪽은 좌우 불당이다. 8각형 목탑과 문지 및 3개

의 불당은 그 거리가 대체적으로 일정하다.

전방 건축군의 뒷쪽에는 중심축의 선에서 보면 후방

건축군에 속한다. 그곳에서도 몇 동의 건축물터가 발견

되었다. 그 구조와 전방 건축군의 배치는 대체로 비슷하

다. 남쪽은 전방 건축군의 북쪽 불당(금당)이 되고, 동,

서, 북쪽은 건물터가 된다. 모든 터에는 질서가 있고 배치도

합리적이어서 매우 엄숙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제 10 회 : 고구려의 도시생활과 건축

라. 도시생활과 건축

고구려의 성곽은 평지성과 산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평지성은 현재 알려진대로 대부분이 도성이며, 일반 평

민들이 이곳 성에서 생활할 수가 없다. 평지성의 건축과

시설에서 나타난 구조와 배치에서 본다면 생활하는 사람

들은 주로 왕실과 그들의 가족, 귀족, 관리 및 일부의 호

위병사들이다.

산성은 비교적 많이 있는 편인데 그 종류는 초소, 관

애(關隘;방어벽), 군사목적의 산성, 그리고 평지성과 산성

이 결합된 구릉성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구릉성을 평지

성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평양의 장안성이 그 예다.

관애와 초소는 순수한 군사목적의 시설이며, 산성은

전시에만 사람이 머물고 평시에는 머물지 않는다. 구릉

식의 평지성은 장기간 사람들이 거주한다.

초소는 군사상의 전망시설이다. 초소의 위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신호를 보내는데 일종의 봉화대와 같

다. 대체로 3-4킬로미터의 간격으로 초소가 세워지고, 그

위치는 교통의 요로와 군사적인 주요한 지역의 부근에

있는 산의 정상이다.

초소의 주요한 시설구조는 돌을 다듬어 벽을 막들고

벽의 둘레는 30-50미터 정도로 하며 문을 하나 단다. 이

러한 작은 성채의 초소는 고구려의 남북 2도에서 많이

발견된다. 쌍립산성(雙砬山城), 산성자성(山城子城), 신안

고성(新安古城), 고성자성(孤城子城), 전수호성(轉水湖城)

등에서 이런 초소의 시설을 찾을 수 있다.

관애는 교통의 요로에서 험준한 계곡과 계곡의 사이에

구축한 관문이다. 일반적으로 양쪽의 계곡은 험준하고

가파라서 우회로가 없거나 결코 오를 수 없는 곳에 설치

한다. 양쪽 계곡의 끝에서부터 돌을 쌓아 길목을 차단하

여 완전한 방어벽을 만든다. 따라서 사람이나 우마는 반

드시 이 협곡을 통해야만 다닐 수 있다.

이곳의 관애만 지키면 한 명의 병사로도 수백, 수천의

적병을 막을 수 있는 절묘한 방어시설이다. 이런 시설

은 [한원]에서 [고려기]를 인용한 기록의 "고구려는 남

북의 협곡을 가로질러 방어벽을 쌓는데 이것은 번이(蕃

夷)들의 요새이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집안현의 망파

령(望坡嶺) 관애, 관마장(關馬墻) 관애, 통화현의 석호(石

湖) 관애 등이 대표적이다.

산성은 그 규모가 거대하고 건축공정도 장대한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이 산의 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한다. 성

벽은 산의 허리를 따르거나 봉우리를 중심으로 구축하고

천험의 절벽이나 자연지세를 충분히 이용한다.

어떤 성벽은 삐쭉 솟아 오른 절벽이나 암벽을 성벽으

로 삼아 어떤 수식이나 가공을 하지 않는다. 나통산성

(羅通山城)의 동쪽과 남쪽 벽, 흑구산성(黑溝山城)의 대

부분 성벽 및 홀승골성으로 알려진 오녀산성(五女山城)

의 서쪽 성벽이 그 예이다.

{{

) [吉林輯安高句麗覇王朝山城], 방기동, <考古 1964년 2기>

[吉林柳河高句麗羅通山城調査], 徐翰煊. 張志立, 王洪峰, <文物 1985년 2기>

}}

산허리의 낮은 습지나 산의 협곡에는 석재를 짤라 성

벽을 만든다. 더욱이 낮은 지대, 산골짜기, 입구가 터진

곳은 성벽이 더욱 높고 견고하다.

산성의 사방 성벽은 그 안에 완만한 경사의 언덕이나

산봉우리를 껴안아 세 쪽이 비교적 높고 한쪽이 낮은 삼

태기형의 산성을 만든다. 집안의 환도산성(丸都山城), 패

왕조산성(覇王朝山城), 북한의 대성산성(大聖山城)은 이

런 형태에 속한다.

어떤 산성은 두 개의 산성을 하나로 연결해 자매성으

로 하는 경우도 있다.

{{

) 주 64와 같음

}}

또 어떤 산성은 성벽 안에 매우

넓은 평지의 산마루를 안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오녀산

성이 그 예이다.

{{

) [遼寧史迹資料], 요녕성박물관 편, 1962년

}}

또한 성벽이 산골짜기의 분지를 안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길림시의 용담산성, 요녕의 신빈현

에 있는 흑구산성이 그 예다.

성문의 설치는 성마다 모두 다르다. 지형과 지세의 필

요에 따라 설치한다. 일반적으로 낮은 지대나 협곡의 밖

에 만든다. 그 문지(門址)에는 모두 안이 요(凹)자 모양

으로 들어간 반원형의 옹성(瓮城)을 둔다. 이것은 방어

를 쉽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

성은 산 위에 있기 때문에 안쪽으로 움푹 들어 간 옹

성에서는 3쪽면에서 적을 막을 수가 있다. 따라서 옹성

의 밖은 성보다 높이가 낮다. 대체적으로 언덕 아래에

쌓는다.

산성 안에는 저수지, 전망대, 지휘소, 거주지, 창고가

있고, 성벽에는 장대, 망루, 여장등의 시설이 있다.

고구려의 산성은 성벽의 건축방법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눈다.

1. 완전 석재로 쌓은 성벽

2. 안팎은 석재로 쌓고, 그 안에 돌덩이나 흙덩이를 넣

은 성벽

3. 부순 돌덩이와 흙을 섞어서 쌓은 성벽

4. 흙으로만 쌓은 토축 성벽으로 성벽의 기울기는 바

깥쪽은 매우 경사져 수직이고 안쪽은 매우 완만하여 사

람들이 쉽게 오르내릴 수 있고 다니기가 쉽다. 이것은

물론 적을 방어하기 쉽도록 한 시설이다.

5. 일반적으로 여장이 없는 성벽

평지성은 고구려의 성터에서 발견한 예가 드물다. 평

지성은 대부분 도성의 부근이나 도성에 세운다. 다만 벽

화에 나오는 요동성은 예외이다. 그것은 벽화에만 나올

뿐 그 성의 터를 발견하지 못했고, 혹은 이 요동성이

중국 한족이 동북지역에 건축한 그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주서(周書)]의 기재에 따르면 "그 성은 동서로 6 리

(里), 남쪽은 패수에 닿았다. 성내에는 오로지 곡식과 무

기를 쌓아두고 적을 막는다. 적이 쳐들어 오는 날이면

사람들이 성으로 들어가 지키고 왕은 별도로 그 주변에

머물 곳을 짓는데 늘 거주하지는 않는다"

{{

) [周書] 권 49 <열전> 제 41 異域 上 '고구려조'

"其城, 東西六里, 南臨浿水. 城內唯積倉儲器備, 寇敵至日,

方入固守. 王則別爲宅於其側, 不常居之."

}}

고 하였다. 이 문헌기록은 고구려 후기의 도성인 평양성을 말한다.

오로지 창고와 무기가 있어 적을 방비하고, 적이 오면 막는 성은

도성이 아니고 산성이다.

고구려 왕이 평소에 불편하기 이를데 없는 산성에 오

랫동안 거주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옆에 별도의 건축

물을 짓는데 그곳은 산성의 부근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지역으로는 산성의 부근이면서 사람이 살기에 적

당하고 물이 충분하며 교통에 불편이 없는 평지이다. 왕

은 그곳에 주택을 짓고 안전을 위하여 주위에 성벽을 쌓

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평지성이다.

평지성의 대표적인 예는 국내성이다. 그 성은 견고한

석성으로 안쪽에 두 벽이 있다. 성벽은 모두 잘 다듬어

진 방형과 장방형의 돌로 층을 이루면서 돌과 돌이 맞불

리는 형식으로 쌓았다. 성벽은 가로선으로 평평하고 틈

새가 거의 없이 균일하다.

성은 대체적으로 방형이고 길이는 동쪽벽이 554.7미터,

서쪽벽이 664.6미터, 남쪽벽이 751.5미터, 북쪽벽이 715.2

미터이며 둘레는 2,686미터가 되며 성의 너비는 7-10미

터 정도이다.

국내성의 사변 성벽은 일정한 거리마다 튀어나온 치

(雉)가 있는데, 모두 14개로 동, 서, 남쪽 벽에 2개씩, 북

쪽벽에 8개가 있다. 그 치의 크기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

만 대략 길이는 8-10 미터, 너비는 6-8미터이다.

국내성의 서북쪽 모서리, 서남쪽 모서리는 거의 직각

에 가까우며 , 그 모서리에는 철(凸)자 모양의 방형 장대

가 있다.

동북쪽 모서리는 호로박 모양으로, 성벽이 꺾여지는

곳의 동쪽벽과 서쪽벽에 각각 치가 있고 그 거리는 서로

40미터 이며 적을 쉽게 막기 위해서 쌓은 것이다.

국내성에는 원래 문이 6개 있었다. 남쪽과 북쪽에 하

나씩, 동쪽과 서쪽에 두개씩으로 모두 옹성구조를 가진

문이다.

[집안현지]에 보면 "민국 10년(1921)에 문 3개를 중수

하였는데 동쪽은 집문문(輯文門), 서쪽은 안무문(安武門),

남쪽은 금강문(襟江門)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후

세문마저도 모두 없어졌다.

현재의 성내에는 세 갈래의 주요 간선도로가 있다. 하

나는 남북으로 향하는 거리로 남문과 북문으로 통한다.

다른 하나는 동서쪽으로 향하는 승리로(勝利路)로서 동

쪽은 집문문, 서쪽은 안무문과 이어졌다. 세번째는 승리

로 북쪽의 단결로(團結路)로서 그것의 동서 양쪽의 끝은

동쪽벽과 서쪽벽 북쪽에 있는 두 개의 문지이다.

3갈래의 길은 국내성을 6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준다,

북쪽벽에 있는 두 개의 구역은 궁전이 있는 지역이며,

중간의 두 개 구역은 관청이 있는 지역, 남쪽의 두 개

구역은 귀족이 거주하는 곳과 시장이 있는 지역이다.

{{

) [集安高句麗國內城的調査與試掘], 집안현문화국, <文物 1984년 1기>

}}

이상에서 살펴 본 고구려의 산성과 평지상의 상황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평소에 거주하거나 혹은 도성이 되는

평지성을 제외한 다른 산성은 모두 적이 오면 들어가 방

어하는 군사목적의 성곽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고구려

가 산성을 수축하고 이용한 특성을 설명해 준다.

고구려 민족은 장기간 혼강, 압록강 중하류 지역을 중

심으로 활동하면서, 산성을 수축할 수 밖에 없는 이곳의

험준한 산이 많고 너른 벌판이 없는 자연지리적인 조건

을 충분히 이용하였던 것이다.

[삼국지]에 보면 고구려인은 "산곡을 따라 거주하는데

좋은 논밭이 없어 비록 힘써 밭을 갈아도 배를 채우기가

부족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고구려의 국내에 너른 벌판

과 좋은 논밭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그런 곳에 산성을 쌓은 것은 적은 양전(良田)을 확보하

여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 다음으로 고구려는 건국 이래로 줄곧 전쟁이 그치

지 않았다. 어떤 때는 고구려가 통치지역을 넓히기 위하

여 외부로 병력을 일으킨 적도 있다. 기록에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매우 흉흉하고 급하며 노략질을 좋아한

다"는 것은 이를 말해준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외부

세력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도성을 몇차례 함락시키기

도 하였다.

주요한 목적은 역시 외부세력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었

다. 이 점이 고구려 민족 산성의 특성을 말해주는 요인이다.

 

제 11 회 : 고구려의 민간문학예술과 습속

4. 고구려의 민간 문학예술과 습속

풍부하고 다채로운 고구려 벽화예술은 고구려의 역사

를 재현하는 영상(映像)이며, 그 민족의 고대사회의 일부

를 그대로 보여주는 백과사전이다. 그것은 비길데 없는

예술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부족

한 사료를 보충해 주는 엄청난 작용을 해준다.

벽화예술은 근면하고 용감하였던 고구려인들이 남긴

당시의 사회풍습, 전장(典章)제도, 건축예술과 형식, 사람

들의 신앙, 예의, 경제문화등 여러 방면의 발전수준을 보

여주며, 그들의 뛰어난 지혜와 회화기술등을 진실되고

사실적으로 우리의 눈 앞에 재현한다. 우리는 오늘날 벽

화에 나타난 고구려 시기의 여러가지 풍속과 역사를 연

구하여 중요한 탐색 과제들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벽화예술은 비록 1천 4-5백여년 기간동안 각

종의 풍화작용, 비바람, 전쟁, 인위적인 훼손등의 파괴와

부식을 거쳤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났다.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색채와 날아갈듯이 생동감 넘

치는 화면은 고구려인의 탁월한 회화예술을 맘껏 드러낸

회화미술의 걸작이며,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변화무쌍한

벽화는 고구려 화가의 예술기교를 있는 그대로 알려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예술의 원류를 밝혀주고 있다.

고구려인의 회화예술은 중국 고대의 여러 종족 사이에

서로 교류하고 학습하며 공동으로 발전시킨 예술적 유산

이며, 중국문화가 고구려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밝혀주고 있다.

소재와 예술기법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양식은 중국고

대의 회화세계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고구려벽화는

그 내용에 있어서도 중국의 양한(兩漢), 위진남북조 시기

의 것과 거의 같다. 고구려는 중국 양한이래 벽화예술의

영향과 전승을 받아 발전하였다.

고구려 벽화예술과 비(碑), 건축예술, 문학, 조각, 가무,

전설, 문자등의 분야는 당시 고구려 사회의 진실된 문학

예술의 습속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방면의 습속을 회화, 조각과 비,

무용과 음악, 문학과 전설등으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당시 고구려사람들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애

대해 이해를 하고, 고구려 민족의 민속의 발전과 전승,

그리고 맥락과 연원에 대해서도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 회화예술

고구려의 회화예술은 수많은 무덤벽화에 나타나 있다.

고구려의 벽화는 고구려 민족이 남긴 진귀한 예술작품이

다. 그 회화의 품격과 색채에는 고구려 민족의 고유한

특성이 짙게 깔려 있다. 동시에 중국 한족의 영향을 받

았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보인다.

더욱이 6-7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후기의 벽화에는

그 격식과 내용, 기법상에서 현저하게 중국의 영향을 보여준다.

고구려인들은 중국의 한대, 위진 시대의 회화예술에서

그 영양소를 흡수하고, 그것에 바탕하여 그들 민족 고유

의 회화예술의 기교를 결합하여 고구려 민족의 특색이

한껏 들어있는 독특하고 유일한 회화예술을 창조하였다.

현재 이들 벽화는 주로 중국의 집안, 북한의 평양지역

과 황해도 안악지역 일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수는 대

략 70여기가 있다.

이들 벽화는 뚜렷하게 그 규칙성이 나타난다. 어떤 벽

화는 백회(白灰)로 바른 벽에 그린 것이고, 어떤 벽화는

평평하고 반들거리는 석벽 위에 그렸다.

백회의 위에 그린 그림은 그 소재가 대부분 사회풍속

화이고, 석벽에 바른 것은 대부분이 신령을 소재로 한

것이다. 앞의 것은 시대가 초기이고 수량도 대부분을 차

지하며 시기는 북위에서 수나라 시대이다. 뒤의 것은 상

대적으로 늦은 시기인 당(唐)대에 해당되며 수량도 적은 편이다.

고구려 벽화의 회화예술에 관해서는 국내외의 많은 학

자들이 상당한 수준의 연구를 하였다.

{{

) [高句麗簡史] 387쪽, 李殿福, 孫玉良, 삼성출판사, 1990년

}}

이런 전문가의 연구성과와 고고발굴 자료의 정리자의 서술

{{

) [中國東北史], 冬主 편, 길림문사출판사, 1987년

}}

에 근거하면 회화예술, 회화기교, 회화예술의 특징과 가치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점과 평가를 도출해 낼 수가 있다.

1) 회화의 내용

가) 사회풍속화

사회풍속화는 당시 고구려 사회의 여러 방면에 관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대부분이 왕실, 귀족들의 생전 모

습이나 생활장면을 그린 것이다. 예를 들면 연회, 출행,

무용, 수례행렬, 수렵, 전쟁, 잡기와 유희, 창고, 정자, 주

방, 마굿간등이다.

고구려 벽화 중에서 가장 많이 표현된 대상은 인물이

다. 수많은 인물의 형상은 결코 하나의 양식에 의거해서

그린것이 아니다. 인물의 형상은 동작이나 자태를 보아

도 매우 다양하다. 심지어는 하나의 인물마다 그 개성을

매우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안악3호분 묘주인의 부인을 보면 몇 가락을 드리운 머

리카락이며 총총한 눈썹과 꽉다문 앵도빛의 작은 입술,

불쑥 솟아오른 둥그런 머리쪽, 단정하게 앉은 자세가 아

주 절제되면서도 우아하게 표현되었다. 그녀의 존귀한

성격과 지위를 충분히 표현한 걸작이다. 그녀를 시중드

는 시비의 표정도 각각의 자태와 모습이 반영되었다.

묘중에 그려져 있는 여러 관리, 무사, 남녀 시종, 하인,

의장대를 이루는 수 백명의 형상에서 나타나는 표정도

모두 같지 않고 개성이 뚜렷하다. 각자의 특성과 모습이

있을 뿐 만 아니라 각각의 사람들의 얼굴도 매우 정교하

고 치밀하게 그려냈다.

종교신앙과 관련있는 인물의 형상도 그들의 자유자적

하는 초탈한 인격으로 하늘을 나는 모습을 매우 생동감

넘치게 그려냈다.

고구려의 수많은 회화는 주제에 맞는 주인공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통구 12호묘

{{

) [吉林集安通溝十二號高句麗壁畵墓], 王承禮, 韓淑華, <考古 1964년 2기>

}}

, 삼실총에 나오는 무사의 용감한 전투 모습

{{

) [吉林省集安縣三室壁畵墓淸理記], 집안현문물보관소, <文物與考古 1983년 1기>

}}

, 무용총에 나오는 수렵하는 사람의 자태

{{

) [通溝], 지내굉, 매원말치

}}

, 각저총의 씨름하는 역사의 엄숙하고 기지가 넘치는 표정과 그 옆에

서있는 노인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

{{

) [通溝], 지내굉, 매원말치

}}

, 그외에 많은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춤꾼, 노랫꾼, 여러 가지

기예를 펼치는 예인들의 인물형상 등에서 뛰어난 예술경지를

읽을 수 있다.

한마디로 이러한 회화예술의 생동감은 화가가 직접

그 인물들을 관찰해서 얻어낸 예술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 벽화에는 통치계급의 계급관념이 나타나 있다.

왕실 귀족들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크고, 위엄이 넘치고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데 반하여 다른 인물들은 작고 소

박하며 비천하게 그려져 있다. 화공들이 이처럼 평형감

각을 잃은 것은 그들이 통치계급의 영향아래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나) 동물화

고구려 벽화에서 사실적으로 그려낸 동물들은 소(牛),

말(馬), 개(狗), 호랑이(虎), 노루(獐), 사슴(鹿), 닭(谿), 새

(鳥)가 있으며 또한 상상의 동물로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같은 사신(四神)도 있다.

화공들이 그린 동물이나 새들은 매우 박진감 넘치고

생기발랄한 느낌이 충만하다. 초기의 수렵도에 나타나는

동물들의 경우를 보면 머리와 꼬리를 치켜들고 뛰는 모

습이 비록 그 표현수법이 강하고 힘이 넘치는 반면에

사실적인 측면에서는 성숙하지 않는 느낌을 준다. 그렇

지만 중기와 후기에 들어서면 동물의 형태, 동작, 느낌이

완숙한 경지에 이른다.

환상적인 동물에게 생동감을 주기 위하여 화공들은 사

신을 그릴때 매우 거칠은 선을 그려서 그 동물들의 위

엄, 신성을 부각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생동감과 경외심

을 일으키게 하였다.

동물을 그릴 때에는 그와는 다르게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흉폭하고 두려움을 주는 성질과 자태를 그림으로

기세를 누그러 뜨리고 훈치시키는 경지를 이루어 낸다.

동물화 중에서 사람들에게 뚜렷한 느낌을 주는 주제는

역시 사신도이다. 아시다시피 사신은 상상의 동물이고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신(神)이다. 따라서 화공들은 있는

힘을 다하여 기교를 부렸지만,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동

물들은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사실적이며 생동감 넘

치게 그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화가들은 두 가

지의 다른 기교와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사신도와 동

물화를 그렸다. 이 점이 고구려 회화예술의 최고 경지를

말하는 것이고 화공들의 고명하고 재치있는 예술미학인

것이다.

다) 풍경화

풍경화는 주로 그리고자 하는 주제를 자연 사물과 결

합하는 방식을 쓰고 상징성을 표현에 덧붙혔다. 풍경화

의 주요한 대상은 산, 나무, 구름이다.

초기의 풍경화는 다만 회화의 주제와 자연의 경관을

함께 도상(圖象)의 형식으로 간단하게 그려냈다. 그런데

후기에 들어서면 도상은 간단해지는 반면에 형태를 묘사

하거나 입체감을 표현하는 수법이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

있다. 6-7세기경에 조성된 진파리 4호분의 연도(羨道)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산을 둘러싸고

조성된 연화지(蓮花池), 산 위에 꽉 들어찬 푸른 소나무,

사방의 바위등이다.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연못에 가

득 핀 연 꽃은 하나 하나가 모두 가볍게 흔들리는 듯한

모습이다. 연화지는 어둡고 칙칙한 무덤의 내부를 환하

게 비추고 향기를 사방으로 뿜어내는 듯한 착각을 일으

키게 만드는 걸작이다.

{{

) [高句麗文化] 제 5장, 高 譯, <東北亞歷史與考古信息 1990년 1기>

}}

여기에서 고구려 풍경화의 예술적 수준과 경지를 볼 수 있다.

라) 장식도안화

고구려의 벽화에는 여러 종류의 다채로운 장식 꽃 무

늬가 있다. 대체적으로 식물 무늬, 기하 무늬, 구름 무늬,

기둥과 두공 및 별들이다.

식물무늬는 연꽃 무늬와 인동 무늬가 가장 많고, 그

아름다움은 벽화의 내용을 매우 풍부하게 변화시킨다.

이외에도 당초 무늬가 있다.

기하 무늬는 주로 고리 무늬(環紋)이다. 거북등 무늬,

톱니날 무늬, 병풍 무늬, 십자 무늬도 있다.

구름 무늬는 구름을 도안(圖案)시킨 무늬이다. 어떤 구

름 무늬 중에는 다른 무늬 장식을 그 옆에 덧붙인 것도 있다.

고구려 벽화 중에는 많은 수량의 기둥(柱), 두공(斗拱),

시렁(桁). 서까래( )등 건축구조물이 그려져 있어, 묘실

이 하나의 완전한 궁전건축과 같다. 이것이 이른바 고구려는

궁실을 잘 짓기를 좋아한다는 기록과 부합되는 증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