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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三國史記)
 
삼국사기 편찬사

편찬에 이용된 자료
편찬의 목적
삼국사기의 서술특징
편찬 참여자

편찬 당시의 시대상
삼국사기의 내용
현존하는 판본
 

 
 삼국사기 편찬사

김부식(金富軾)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1145년(인종 23)경에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이다. 중국의 정사체인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1174년(명종 4)에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보내었다는 기록이 《옥해 玉海》에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이미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2차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며, 성암본 (誠庵本)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잔존본(殘存本)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 궁내청(宮內廳)에도 소장되어 있다. 

3차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다. 이는 김거두(金居斗)가 발문에 의해 알려졌는데, 일실되어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4차판각은 1512년에 있었는데, 이는 이계복(李繼福)의 발문으로 확인된다. 이 책은 흔히 중종 임신본(中宗 壬申本), 정덕임신본(正德壬申本) 또는 정덕본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목판으로 간행된 것은 여러 종이 전래되고 있으나 완질본으로는 이병익(李炳翼)과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목판은 1669년(현종 10)에 증수, 간행된 《동경잡기 東京雜記》에 보면 이때는 사용할 수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으로 간행된 것은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것으로 내사기(內賜記)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경으로 추정되며 소련과학원 동방연구소 레닌그라드지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도 《성종실록》과 《국조보감》 등에 삼국의 역사가 미전되는 일이 없도록 인출, 반포할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은 기록이 보이나 전해지는 판[傳本]이 없어 그 자세한 여부는 알 수 없다. 


 편찬 참여자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 (崔山甫), 이온문(李溫文), 허홍재(許洪材), 서안정(徐安貞), 박동계(朴東桂), 이황중(李黃中), 최우보(崔祐甫), 김영온(金永溫) 등 8인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정습명(鄭襲明) 2인의 관구(管句)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이들 10인의 편찬 보조자들은 대개 김부식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자료의 수집과 정리에 어느 정도 독자적인 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거의가 내시(內侍), 간관(諫官: 諫議大夫, 起居注)출신이어서 이들의 현실비판의 자세가 《삼국사기》 편찬에 반영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편찬에 이용된 자료

이 책은 이들 편찬자의 독단적인 서술이 아니라, 《고기 古記》, 《삼한고기 三韓古記》, 《신라고사 新羅古史》, 《구삼국사 舊三國史》와 김대문(金大問)의 《고승전 高僧傳》, 《화랑세기 花郎世記》, 《계림잡전 鷄林雜傳》 및 최치원(崔致遠)의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 등의 국내 문헌과 《삼국지 三國志》, 《후한서 後漢書》, 《진서 晋書》, 《위서 魏書》, 《송서 宋書》, 《남북사 南北史》, 《신당서 新唐書》, 《구당서 舊唐書》 및 《자치통감 資治通鑑》 등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이때 책임 편찬자인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각 부분의 머리말 부분, 논찬(論贊), 사료의 취사선택, 편목의 작성, 인물의 평가 등을 직접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편찬 당시의 시대상

국사편찬은 왕권강화의 기념적 사업인 동시에 당시의 정치 문화수준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편찬도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부의 정치상황 위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때는 고려 건국 후 200여년이 흘렀고, 고려의 문벌 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문화가 융합됨으로써 고려왕조의 안정을 구가하는 과정에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정리가 필요하였다. 다음으로 당시의 조정에서는 거란 격퇴 이후의 국가적 자신과 여진의 위협에 따르는 강렬한 국가의식이 고조되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소실된 국사의 재편찬은 단순한 유교 정치이념의 구현만이 아니라 민족의식의 차원에서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는 지나친 사대주의적 입장이 들어있다라는 인식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당시 고려사회는 문벌귀족간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고 있었다. 특히 김부식 가문과 윤관 (尹瓘) 집안의 대립, 김부식과 이자겸(李資謙)의 충돌 등 격심한 문벌가문들의 갈등이 겹쳐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비리가 쌓이고 있었다. 여기서 분열과 갈등을 국가멸망원인으로 강조함으로써 현실비판의 뜻과 이를 후세에 알리려는 역사의 교훈을 주기 위하여 역사편찬은 불가피하였다고 생각된다. 


 편찬의 목적

여기서 우리는 김부식의 〈진삼국사기표〉를 통하여 그 편찬 동기와 목적 및 방향을 엿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의 식자층들까지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첫째 중국문헌이 우리나라 사실을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였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 둘째 현존의 《고기》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하여야겠다는 것, 셋째 그러므로 왕, 신하, 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규범을 드러내어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본기, 지, 표,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내용

1. 본기 (本記)

중국사서는 열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삼국사기》는 본기가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본기 내용이 신라에 12권(통일신라 7권 포함), 고구려에 10권, 그리고 백제에 6권을 할애하여 신라에 편중하지는 않았다. 원래 본기는 주요사실의 기록으로서 주로 왕의 치적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나 본기 내용을 정리하면 정치, 천재지변, 전쟁, 외교 등 4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이들이 시대에 따라 각기 일정한 비율로 증감되고 있었다. 

정치기사는 본기 중에서 가장 큰 부분으로서 그 안에는 ① 축성(築城), 설책(設柵), 수궁실(修宮室) 등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는 기록, ② 민심수람과 국민의 결속을 강행하려는 순행(巡幸)의 기사, ③ 관리의 임면(任免)이나 관청의 설치에 관계되는 기록, ④ 조상과 하늘의 제사와 흉풍에 따른 종교적 관례에 관한 기사, ⑤ 기타의 내용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정치기사의 내용은 삼국의 사회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축성과 궁궐조성 기록은 백제가 가장 많아 일찍부터 대외전쟁에 시달렸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신라는 관리의 임면기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여 순조로운 왕권의 성장과정을 엿볼 수 있다. 둘째의 순행기사는 135회의 기록(신라 52회, 고구려 47회, 백제 36회)이 있으나 삼국의 양상은 각기 달랐다. 즉, 신라는 구휼과 군사상 필요를 비롯하여 권농, 영토확인, 수렵, 구인(인재등용) 등의 목적이 많았고, 백제, 고구려는 수렵 (군사훈련)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그외 제사, 구인, 독려, 지세파악 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출행시기(出幸時期)가 천재지변과는 큰 관계 없는 1, 2월에 집중되고 있으며, 백제, 고구려는 1∼3세기에, 신라는 9세기에 빈번하였다는 점은 그것이 다른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왕권이 약할 때 왕은 지방출장을 많이 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셋째의 관리임면 기록은 태자, 왕비의 책봉이나 관리의 임명 등으로 왕권의 구체적 행사표시로서 신라에서 제일 큰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넷째의 종교적 기능에 관한 기록은 시조, 종묘에 대한 제사, 풍요의 기원과 재난의 예방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백제가 가장 빈번히 나타난다. 

천재지변기사는 930여회의 자연변이의 기록이다. 이는 600여회의 천재와 330여회의 지변으로 구분되거니와, 여기에는 상응하는 정치적 기능을 수반하고 있다. 천재에는 혜성, 5성, 유성, 일식 등으로 대표되는 자연현상과 가뭄, 홍수, 벼락 등의 천재가 있으며, 지변에는 지진, 화재, 동물변이, 수변(樹變), 인변 등이 있다. 이러한 천재지변에서도 혜성, 일식, 지진, 가뭄, 용 등이 큰 영향을 주는 구징(咎徵)으로서 특정사건의 예고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들은 사망, 전쟁, 모반 등을 예언하는 것으로 천재와 지변은 상호 연관성이 있어 그에 대응하는 대책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정확한 천재지변의 기록은 고대 과학의 발달을 가져와 일식(14.8년), 가뭄(9.2년), 지진(10.3년)과 같은 주기의 산출이 가능하였다. 

전쟁기사는 삼국이 존속한 10세기간에 연 28개국과 440여회의 전쟁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전쟁은 삼국간에 일어난 경우와 외국과의 싸움으로 구별되거니와, 고구려는 대외전을 주도하였고, 백제는 신라와의 싸움에서 시련을 받았다. 그러므로 백제는 국가발전이 둔화되었고,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싸움이 적었으므로 중국과의 항쟁을 주도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다. 

끝으로 외교기사는 연 34개국과 620여회의 교섭기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외교기록은 거의가 조공(朝貢)으로 대표되는 한중관계가 중심이 되지만, 중국측에서 온 기록도 상당히 많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외교는 정치적 안정과 짝하는 것으로서 장수왕과 후위(後魏), 성덕왕과 당나라와의 관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조공이 중화사상의 표시라고 하여도 결코 종속관계는 아니었고, 삼국의 자아의식은 유지된 것이다. 특히 외교관계 기록에는 조공이라는 광의의 개념 속에는 진하(進賀), 사은(謝恩), 인질 (人質), 구법(求法), 숙위(宿衛), 숙위학생 등 다양한 외교사절이 있었고, 책봉 (冊封), 조위(吊慰), 책망(責望) 등 중국측 사절도 포함되었다. 특히 외교기사에서 특기할 사실은 16명의 숙위와 10여명의 숙위학생들에 관한 것으로서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있었던 독특한 외교적 존재이다. 

2. 지(志)

《삼국사기》에는 잡지(雜志)라 하였으나, 그 내용은 지이다. 제1권은 제사(祭祀)와 악(樂), 제2권은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제3∼6권은 지리지이다. 그리고 제7∼9권은 직관지(職官志)인바 중앙관부(7권), 궁정관부(8권), 무관과 외직(9권)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제도의 해설에 치중하였고, 특히 지리지에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은 오행지에 중심을 둔 《한서 漢書》나, 예악지에 중점을 둔 《당서 唐書》와 그 특징이 다르다. 우선 제사지에는 5묘(廟), 3사(祀)의 설명이 중심이며, 악지는 악기, 가악(歌樂), 무(舞), 악공(樂工)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리고 복색조, 기용조, 옥사조에 나타난 금지조항은 전국민을 하나의 법규 속에 묶어 국민의 의미를 제시한 것이며, 4두품과 평민간의 같은 대우는 주목할 내용이다. 지리지가 큰 비중으로 취급된 것도 일종의 영토의식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직관지에서는 중앙행정관부에 있어서 14관부와 19전(典: 7寺成典 포함.)의 균형적 배려와 궁정관부가 110여개가 넘고 있어 강력한 왕권유지의 제도적 뒷받침을 엿보게 한다. 

3. 표 (表)

표는 박혁거세 즉위년(서기전 57)부터 경순왕 9년(935)까지를 연표 3권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중국문헌의 연표에 재상표(宰相表), 종실표(宗室表), 방진표(方鎭表)가 있는 경우를 대조할 때 그 내용이 빈약하고 간소하다. 

4. 열전 (列傳)

열전 10권은 중국문헌에 비하면매우 빈약한 편이다. 따라서 인물기준도 항목별(名臣, 循吏, 酷吏, 儒林, 叛逆 등)로 된 것도 아니고, 왕후/공주열전도 없다. 특히 10권의 열전 중에서 김유신(金庾信) 개인열전이 3권이나 되며, 나머지 68인을 7권에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7세기에 활약한 인물이 34인이고,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21인이나 되고 있어 위국충절의 인물나열이 핵심이 된다. 

제1∼3권은 김유신전으로 그 안에 선조(武力, 舒玄)와 후손(三光, 允中, 巖)의 업적을 강조하였고, 제4권은 을지문덕(乙支文德), 거칠부(居柒夫), 이사부(異斯夫), 김인문(金仁問), 김양(金陽), 흑치상지(黑齒常之), 장보고(張保皐), 사다함(斯多含)의 전기이다. 제5권은 을파소(乙巴素), 후직(后稷), 밀우(密友), 박제상(朴堤上), 귀산 (貴山), 온달(溫達) 등 10인의 전기이다. 

제6권은 강수(强首), 최치원, 설총 (薛聰), 김대문 등 학자의 열전이다. 특히, 최치원의 마한 고구려설이나, 백제의 해외진출에 대한 견해는 설총의 〈화왕계 花王戒〉와 함께 대표적인 내용이다. 제7권은 해론(奚論), 관창(官昌), 계백(階伯) 등 19인의 전기이다. 여기에서는 찬덕 (讚德)과 해론, 심나(沈那)와 소나(素那), 반굴(盤屈)과 영윤(令胤), 비령자 (丕寧子)와 거진(擧眞) 등 부자가 순국한 충의열사의 기록이 중심이 된다. 

제8권은 향덕(向德), 성각(聖覺), 김생(金生), 솔거(率居), 도미(都彌) 등 11인의 전기이다. 특히, 효(향덕, 성각), 충의(劒君), 기예(김생, 솔거, 百結), 열녀(薛氏女, 도미),효녀(知恩) 등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다. 제9권은 창조리(創助利)와 연개소문 (淵蓋蘇文)의 열전으로서, 결국 왕을 시해한 반신(叛臣)의 기록이다. 제10권은 궁예 (弓裔)와 견훤(甄萱)의 열전으로 결국 나라를 망친 역신의 기록이다. 

5. 기타: 논찬(論讚)

《삼국사기》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논찬이다. 논찬이란 역사서술에 있어서 사신의 견해를 나타낸 사론(史論)을 말하는바, 《삼국사기》에는 논과 찬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논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에 10측, 고구려본기에 7측, 백제본기에 6측, 열전에 8측 등 모두 31측의 논찬이 있다. 그 내용은 대개 예법준칙, 유교적 덕치주의,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이 중심이 되지만 그러한 유교적 명분과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견지하면서도 우리 현실과 독자성을 고려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띠고 있다. 그것은 내물왕의 동성취처(同姓娶妻)나 혁거세의 왕후동반순행을 옹호한 점이나, 신라 3보(寶)와 할고지효(割股之孝)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난한데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는 신채호(申采浩) 이후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유교중심의 사대적인 개악서(改惡書)는 아니었다. 12세기의 시대정신과 사회상을 고려할 때 그러한 중국중심의 풍조 속에서 우리나라를 찾으려는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중국의 전통적인 사학이 가지고 있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객관적 서술자세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특히, 정부주도하의 관찬(官撰)이라는 역사편찬의 본을 정착시켜 조선초의 역사서술, 특히 《고려사》 편찬에 기여함으로써 전통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삼국사기의 서술특징

첫째, 이 책은 처음부터 삼국을 하나의 완성된 국가로 보았으며, 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파악하였다. 말하자면 1세기부터 삼국이 국가로 성장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므로, 태조왕, 고이왕, 내물왕을 역사적 전환점으로 보지 않았으며, 역사변천을 발전사관으로 파악하여 신라, 고려의 교체(交替)를 당위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둘째, 이 책은 역사내용을 하늘과 땅 사이의 관념적 사고를 통하여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김부식은 자연의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역사내용을 추출시켰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왕의 정치행위가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셋째, 이 책은 역사를 교훈으로 삼았기 때문에 편찬 당시의 현실비판을 특정한 과거사실인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의 내분과 결부시켜 지도층의 분열과, 폭압자의 최후를 역사의 필요성으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김부식은 묘청(妙淸)일파의 패배나 견훤, 궁예의 멸망을 통일에 대한 분열의 응징으로 설명함으로써 역사의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넷째, 이 책은 강렬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종래 《삼국사기》의 사대성에 대한 반론으로서 우리나라 현실과 독자성을 강조한 김부식의 사론에서 엿볼 수 있었다. 끝으로 이 책은 역사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영웅주의사관이 아니라, 고대에 있어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함은 물론 멸사봉공(滅私奉公)의 공적인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에 희생하는 인간의 도리를 중시하려는 것이었다. <申瀅植>


 현존하는 판본

1. 보물 제722호 

권44∼50 1책. 목판본. 13세기 후기에 인간된 것으로 성암고서 박물관 (誠庵古書博物館)에 소장되어 있어 성암본이라고 통칭한다.(위의 사진 참고) 이 책은 현존하고 있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초간본을 복각(覆刻)한 판에서 찍어낸 후쇄본(後刷本)이다. 권말의 끝부분 장(張)이 떨어져 간기나 발문이 없다. 또한 복각할 때 사용한 초간본의 상태가 좋지 않은듯하다. 초간의 원각에서 탈락된 것을 그대로 판각한듯하여 초간본의 후쇄본을 가지고 복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상태가 좋지 않고 잔존본이기는 하나 이것으로 중종조 간본(刊本)의 오류와 탈락된 글자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2. 보물 제723호 

50권 9책. 목판본. 1512년(중종 7)에 간행된 《삼국사기》 완질본이다. 명나라 무종, 즉 정덕연간에 간행되어 정덕본이라 통칭한다. 이 책은 1512년경에 판각된 보물 제525호와 동일한 판본으로 보인다. 이계복이 중종 7년에 쓴 발문에 의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모두 경주부(慶州府)에만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마멸되어 1행에 겨우 4, 5자를 해독할 수 있을 정도이므로 경주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부임한 자신이 성주목사(星州牧使) 권주(權輳)에게서 완본(完本)을 구하고 경상도 감사 안당(安) 및 도사(都事) 박전(朴佺)과 의논하여 여러 읍에 나누어 새기게 한 다음 경주부에 돌려받았던 것이다. 

이 발문이 《삼국유사》에만 붙어 있으나 여기에 《삼국사기》가 언급되어 있고 판본 또한 이무렵의 것이므로 《삼국사기》의 간행기록으로 볼 수 있다. 이 판본에는 3종의 판에서 찍어낸 것이 섞여 있는데, 고려의 원각판(原刻板)으로 여겨지는 것과 1394년(태조 3)에 새긴 판에서 찍어낸 것이 섞여 있다. 그리고 권14 제1장 하반부와 권26 제2∼9장 하단의 일부분이 파손되어 본문이 결실되어 있고 어떤 것은 새김을 생략한 것도 있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중종조 간본 가운데 완질본으로 인쇄가 가장 선명하다. 1931년에 고전간행회에서 이를 간행하였으며 성암 고서박물관에서 1984년에 영인하여 증수보주(增修補註)하여 학계에 제공하였다. 서울의 이병익이 소장하고 있다. 

3. 보물 제525호 

50권 9책. 목판본. 1573년(선조 6)에 찍어낸 것이다. 명나라 무종, 즉 정덕연간에 간행되어 정덕본이라고 통칭한다. 이 책은 1512년경에 간행된 보물 제723호와 동일한 판본인데, 권수부분에 모필로 쓴 ‘萬曆元年 月日 玉山書院上’이라는 기록이 있어 1573년에 경주부에서 찍어 내어 옥산서원에 보내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완질본의 《삼국사기》이나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하다. 보물 제723호가 발견되기 전에는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 완질본이었다. 경상북도 경주군 옥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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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에 있어서의 歷史敍述(高柄翊, 金載元博士回甲記念論叢,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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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三國史と三國史記(末松保和, 朝鮮學報 39/40, 1966),
三國史記の板刻と流通(田中俊明, 東洋史硏究 39―1,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