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에 관하여                          


 

서론-이번답사중 기억에 남는곳을 뽑으라면 나는 화엄사라고 말하고 싶다 .

멋진산들과 좋은환경들속에 자리잡은 화엄사는 내가 중학교때 이후 처음와본곳이다

예전에 한번와봤던곳이라서 더욱 관심이 가져졌다.

그럼 화엄사에 대해서 지금부터 화엄사에 대해서 설명해보자면 이와같다.


본론-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이다. 창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인도 승려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전하고 있다. 670년(신라 문무왕 10)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10찰(華嚴十刹)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이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그리고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때 비로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


사지(寺誌)에서는 당시의 화엄사는 가람 8원(院) 81암(庵) 규모의 대사찰로 이른바 화엄 불국세계(佛國世界)를 이루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하였고 고려시대에 네 차례의 중수를 거쳐 보존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승려들 또한 학살당하였다. 범종은 왜군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섬진강을 건너다가 배가 전복되어 강에 빠졌다고 전한다. 장육전을 두르고 있던 석경은 파편이 되어 돌무더기로 쌓여져오다가 현재는 각황전(覺皇殿) 안에 일부가 보관되고 있다. 1630년(인조 8)에 벽암대사(碧巖大師)가 크게 중수를 시작하여 7년 만에 몇몇 건물을 건립, 폐허된 화엄사를 다시 일으켰고, 그 뜻을 이어받아 계파(桂波)는 각황전을 완공하였다.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공양한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2호인 석등(石燈),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이 있으며, 보물 제132호인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 보물 제133호인 서오층석탑, 보물 제300호인 원통전전 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구층암(九層庵)․금정암(金井庵)․지장암(地藏庵)이 있다


화엄사의 보물과 국보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ꡐ각황전ꡑ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화엄사 대웅전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인조 때 건립된 것으로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현존하는 화엄사의 당우(堂宇)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인조 14)에 벽암     (碧巖大師)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의 현판은 36년 선조의 여덟째 아들 의창군(義昌君)이 썼다. 대웅전 앞에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석단(大石壇)과 대석계(大石階)가 있고 전면 주간(柱間)에 각각 세 짝으로 된 문짝을 달았으며 그 위로 교창(交窓)을 냈다. 공포(包)는 3출목(三出目)으로 되었고 불단 후면에 3개, 불단 전면 좌 ․우에 2개의 높은 기둥을 배치하여 대들보를 받쳤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불단 위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비롯하여 3구의 금동불을 안치하였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기단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5.5m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엄사는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서쪽에 있는 호남 제일의 사찰로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이다. 이 탑 외에도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 화엄사 동오층석탑(보물 132), 화엄사 서오층석탑(보물 133),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보물 300) 등의 중요한 유물들이 전해온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탑은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다.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얹은 후 꼭대기에 상륜부를 얹어놓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지대석 위에는 높직한 3단 받침이 있고 하층 기단의 면석 각면에는 탱주(撑柱)가 없으나 그 대신 3구씩의 안상(眼象)을 음각하고 그 안에 천인상(天人像)을 1좌씩 12구를 양각하였다. 상층 기단에는 우주(隅柱) 대신 연화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암수 2쌍의 사자를 지주(支柱) 삼아 네 귀에 배치하였다. 사자들이 에워싼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 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사자의 두부에는 연화대가 있어 이것들이 갑석(甲石)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첫 탑신의 4면에 문비형(門扉形)을 모각하고 그 좌우로 정면에는 인왕상(仁王像) 2구, 양측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 2구, 뒷면에는 보살상 2구를 두고, 탑신은 2층에서부터 단일석으로 되어 있다. 옥개석은 초층부터 3층이 모두 같은 형식으로 처마의 받침이 5단씩이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살짝 들린 처마에서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조각수법이나 건조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시대의 사자석탑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수한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각황전 앞 석등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5.5m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엄사는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서쪽에 있는 호남 제일의 사찰로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이다. 이 탑 외에도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 화엄사 동오층석탑(보물 132), 화엄사 서오층석탑(보물 133),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보물 300) 등의 중요한 유물들이 전해온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탑은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다.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얹은 후 꼭대기에 상륜부를 얹어놓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지대석 위에는 높직한 3단 받침이 있고 하층 기단의 면석 각면에는 탱주(撑柱)가 없으나 그 대신 3구씩의 안상(眼象)을 음각하고 그 안에 천인상(天人像)을 1좌씩 12구를 양각하였다. 상층 기단에는 우주(隅柱) 대신 연화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암수 2쌍의 사자를 지주(支柱) 삼아 네 귀에 배치하였다. 사자들이 에워싼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 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사자의 두부에는 연화대가 있어 이것들이 갑석(甲石)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첫 탑신의 4면에 문비형(門扉形)을 모각하고 그 좌우로 정면에는 인왕상(仁王像) 2구, 양측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 2구, 뒷면에는 보살상 2구를 두고, 탑신은 2층에서부터 단일석으로 되어 있다. 옥개석은 초층부터 3층이 모두 같은 형식으로 처마의 받침이 5단씩이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살짝 들린 처마에서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조각수법이나 건조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시대의 사자석탑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수한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화엄사 원통전전사자탑 기단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00호로 지정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화강석제이다. 2중기단에 지대석 위에는 직사각형의 하층 기단이 있으며 그 위의 중석(中石)은 무문석재(無文石材)이다. 갑석(甲石) 밑에는 1단의 각형 부연이 있고 위에는 1매의 판석(板石)을 두었다.

그리고 상층 기단에는 4구의 사자가 밑에 복련석(覆蓮石)을 밟고 있고, 두부에는 앙련석(仰蓮石)을 썼으며 그 위에는 1매의 판석이 연꽃무늬로 둘러싸였다. 탑신은 방주형으로 석탑의 탑신으로는 이례적으로 높고, 각면에는 방광(方)을 둘린 속에 신장상 1구씩이 얕게 조각되어있다.





화엄사 동오층석탑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6.4m, 재료는 화강석이다.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서쪽에 있는 화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로 신라 때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고쳐 지었다. 화엄사 대웅전 앞에는 동서로 쌍탑(雙塔)이 서 있는데, 동5층석탑은 동쪽에 있는 탑으로 크기는 서로 비슷하지만 조각과 장식이 화려한 서5층석탑에 비해 장식이 없고 단정하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단층기단(單層基壇)에 지대석(地臺石) 위에는 4장의 하대석이 있으며 하대석 위에는 우주(隅柱:탑 몸돌의 모서리에 세운 기둥)․탱주(撑柱:탑의 기단 면석 사이에 세우거나 면석에 돋을새김한 기둥 모양)를 지닌 중석(中石)이 있고, 그 중석의 탱주면은 2구(區)로 나누어져 있다. 그 위 갑석 4장 밑에는 부연이 있는데 그 갑석 자체는 완만한 경사가 졌고 그 위에 l단의 각형받침이 있으며 탑신부(塔身部)의 각층 각면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탑신부는 1층 몸돌이 높이에 비해 넓다. 지붕돌은 매우 평평하고 얇은데, 받침은 각층 4단씩이고 추녀밑은 수평이다. 몸돌을 따라 지붕돌의 체감률도 큰 편이며, 1층과 2층의 차이가 크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불탑의 맨 꼭대기 지붕 바로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과 복발(覆鉢:불탑의 노반 위에 있는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놓여 있다.


이 석탑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쌓은 형태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겼는데, 통일신라시대인 875년(헌강왕 1) 무렵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결론-이번 답사를 계기로 난 전라남도에 있는 무궁무진한 훌륭한 문화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환경속에 자리잡은 문화재들, 이것들을 잘보존해서 우리 후손들에게 보존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답사는 솔직히 힘들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보람있었던 계기가 된거 같았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우리 문화재를 아는 일에 더욱 힘쓰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