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답사를 다녀와서...(담양 소쇄원)

                                

3월 23일 우리는 역사현장학습이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전남 답사를 떠났다.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가보는 답사라 걱정 반, 설레임 반의 마음을 가지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하여 2박 3일의 짧은 시간동안 깊은 추억을 간직한 채 돌아와 아직도 그 시간들을 생각하면 가슴 설레이게 한다.

많은 답사지를 돌아보며 멋있었던 곳, 신기했던 곳이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역시 내가 조사를 하여 발표를 했던 곳 같다.

하지만 내 머릿속 한편에 있는 또 하나의 답사지는 담양 소쇄원이다.

산길을 타고 올라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어우러져 있는 소쇄원에서 봄바람이 불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을 때의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소쇄원을 다시 한번 설명하자면 이와 같다.

 

위    치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외


지정번호 : 사적 제 304호


소 유 자 : 사유(제주양씨 산보의 후손 양원로(양재영) 061-382-1071


규    모 : 정원 일원(1,500평)


시    대 : 조선 중종(1530년대)


지정 연월일 : 1983년 7월 20일


개    요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곁의 담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內園)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五曲門)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 모두 22종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은 1530년(중종 25년)에 양산보가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 (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등 10여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 남아 있지 않다.

제월당(霽月堂)은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을 위한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광풍각(光風閣)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1614년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역시 팔작지붕 한식이다. 정원의 구조는 크게 애양단(愛陽壇)을 중심으로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광풍각(光風閣)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가적(道家的)인 색채도 풍겨나와 오암(鰲岩), 도오(桃塢), 대봉대(待鳳臺) 등 여러 명칭이 보인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소쇄원사십팔영시(瀟灑園四十八詠詩)」(1548)가 있으며, 1755년(영조 31) 목판에 새긴「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소쇄원은 1528년 처음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1530년 전후에 착공한 것으로 보여 진다.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때 소쇄원에서 꼭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있고, 1528년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는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에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1536)에

소쇄원이 조영된 것이라 하였다.

1542년에는 송순이 양산보의 소쇄원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 개인이 꾸몄다기보다는 당나라 이덕유(李德裕)가 경영하던 평천장(平泉莊)과 이를 모방한 송순, 김인후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에는 소쇄원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있어 당시 소쇄원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담양소쇄원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수양과 학문뿐 아니라 선비문화의 형성 또한 중요한 일이었으니 그를 위한 장소인 정자나 별서를 가꾸는 일은 그들의 정신세계의 총체적 결과였다. 소쇄원을 비롯하여 면앙정, 명옥헌, 송강정, 식영정 등이 대표적인 것들인데 그 중에서도 소쇄원은 주거기능을 갖춘 별서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정원건축으로 평가받는다.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1502~1557)가 30대에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그 후대에도 계속 확장이 이루어져 왔다. 양산보는 15세에 조광조를 만나 그 문하에서 수련한 유학자였는데,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후 그 유배지까지 따라갔다가 사약을 받는 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고향으로 은둔하여 이 소쇄원을 만든다.

소쇄원은 수 많은 기록이 남아 증언하듯 많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풍광과 여유를 즐긴 장소요, 그들의 정신세계를 격정적으로 토로하던 문화 담론의 산실로 자리하였다. 성리학의 거두 김인후를 비롯하여 송순, 기대승, 정철, 송시열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이곳을 넘나들며 그들 학문의 지평을 넓힌 것이다. 물길이 있는 계곡을 가운데 두고 전체 1500평 정도의 경사지에 꾸며져 있지만 사실 소쇄원의 영역은 지금은 차가 다니는 국도변에 심어진 대나무 숲에서 시작한다. 울창한 대나무의 숲이 만드는 벽과 물길 사이로 난 좁고 길다란 길은 세속의 세계를 빠져나와 선계로 오르는 참배길이어서, 흐르는 물소리에 대나무 숲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더해서 만드는 그 오묘한 분위기에 이미 우리의 마음을 씻는다.

대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대단히 다이내믹한 풍경의 계곡이 밝은 햇살을 받으며 전개되는데 그 생김새가 대단히 복잡하다. 북쪽 계곡에서 흘러온 물길이 이런 저런 바위 틈과 위를 지나며 부딪치고 모아져서 서로 다른 소리를 만들어 계곡 안을 가득 채운다.

건너편에는 집이 두 채가 있는데 위에 있는 3간의 집이 이 소쇄원의 주인이 거처하는 제월당(霽月堂)이며, 아래 가로세로 각 3간의 팔작지붕의 집이 주로 손님들이 기거하는 광풍각(光風閣)이다. 광풍제월이라 했던가. 주인 거소는 정적, 손님 거처는 동적 비갠 후 떠오른 달빛에 부는 청명한 바람…. 참으로 기운이 맑고 밝아 가히 소쇄하지 아니한가. 듣기만 하여도 마음은 이미 맑아진 듯하다.

이 작은 두 건물은 지극히 소박하고 간단하다. 따라서 햇살 가득한 아름다운 자연 계곡에 순응하듯 그냥 세운 두 건축…. 이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소쇄원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몇 개의 레벨 차이로 인해 다양한 동선을 만드는 이 계곡 속에 이뤄진 공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위 사이에는 다리도 있고 징검돌도 있으며 세족할 공간도 있다. 물레방아도 있고 연못도 있으며 경사진 지형을 오르기 위한 계단과 석축 등이 슬쩍 슬쩍 있는데 이들이 심상치 않은 것들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인공 건조물이다.

이들이 앉은 방식을 보면 대단히 교묘하다. 주인이 기거하는 높은 곳에 있는 제월당의 레벨에는 꽃과 나무와 담장과 수평으로 연결되는 정적 요소들로 이뤄져 있고, 풍류의 손님들이 드나드는 광풍각은 그 모양도 활개치듯 오르는 처마선이 흐르는 물과 변화무쌍한 바위와 그들이 만드는 소리들과 함께 대단히 동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그 두 레벨 사이에 주된 통로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 길은 때로는 단을 디디고 때로는 바위를 건너며 때로는 물길을 도는 유보도(遊步道)가 되어, 두 다른 레벨을 이으면서 서로 교류하게 하고 부딪치게 하여 일체를 이루게 하는 매개공간이다.


소쇄원의 겉모습만 보고서는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알 수 없다. 겉모습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 곳은 양산보가 조광조의 죽음을 목격한 후 충격을 받아 지은 것이라고 하니 비극적이지 아닐 수가 없다.

이것으로 담양 소쇄원의 보고서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