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갑사를 다녀와서...

                                      

                                                             

目次

1.序論

2.本論

(1)문화재 구분법

(2)도갑사 개요

(3)도갑사 유적

(4)용어 해설

3.結論



1.序論

어느덧 답사를 다녀 온지 3일이 지나고 있다. 답사를 다녀오기 전에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항상 설레임과 흥분으로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던 것 같다. 특히 이번 답사는 휴학을 하고 맞이하는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이라서 나에게는 더욱 소중한 장소로 기억에 남을 듯하다.

답사 코스를 돌면서 기억에 남는 장소는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자료를 준비하고 발표를 했던 곳일 것이다. 이건 나만이 준비한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설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는 더 심열을 기울여서 준비를 했고 더 자세히 보려 했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사 주제를 ꡒ도갑사를 다녀와서..ꡓ라고 정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선 도갑사라는 문화재를 보기에 앞서 우리들이 흔히 지나치게 되는 문화재는 무엇이고 또 어떻게 문화재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지에 대해서 짧게나마 글을 올리려고 한다.

 이것은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을 키우기 위해서 더욱 사학과라는 역사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할 것 같아서 준비를 해 보았다.


2.本論

(1)문화재 구분법

국보와 보물은 모두 문화재에 속한다. 문화재란 말은 독일어 'Kulturg er'(쿨투어귀터)의 번역어로써, "민족문화의 유산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나라의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문화재'란, "인위적․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가적․민족적․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경관적 가치가 큰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기념물․민속자료"를 말한다.

이러한 문화재는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구체적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재는 지정권자에 따라 문화재청장이 지정하는 국가지정문화재,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가 지정하는 시․도지정문화재․문화재자료로 구분된다.


둘째, 문화재는 내용에 따라 ①유형문화재, ②무형문화재, ③기념물, ④민속자료로 나뉜다.


셋째, 유형문화재는 "건조물․전적․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 등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를 말하는데, 이중에서 문화재청장이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문화재를 보물과 국보라 하고, 그리고 시․도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문화재를 시․도 유형문화재라 한다.


한편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에서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국보로 지정하는데 대체로,


① 특히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크거나,

② 제작연대가 오래되고 특히 그 시대를 대표하거나,

③ 제작의장․제작기술이 특히 우수하여 그 유래가 적거나,

④ 형태․품질․제재․용도가 현저히 특이하거나,

⑤ 특히 저명한 인물과 관련이 깊거나 그가 제작한 문화재가 이에 해당된다.


참고적으로, 남대문을 국보로 지정하고 동대문을 보물로 지정한 이유는, 1395년에 세워진 남대문이 1396년에 세워진 동대문보다 건축년도가 빠르고, 또 남대문이 가지는 정문으로서의 의의와 건축기술적인 측면에서의 비중이 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넷째, 무형문화재는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을 말하는데, 이는 문화재청장이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중요무형문화재와, 시․도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시․도 무형문화재로 구분된다.


다섯째, 기념물은 ①사지․고분․패총․성지․궁지․요지․유물포함층 등의 사적지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것, ②경승지로서 예술적․경관적 가치가 큰 것, ③동물(서식지․번식지․도래지 포함)․식물(자생지 포함)․광물․동굴․지질․생물학적 생성물 및 특별한 자연현상으로서 역사적․경관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 구분된다. 이는 다시 문화재청장이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사적․명승․천연기념물, 그리고 시․도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시․도 기념물 등으로 나뉜다.


여섯째, 민속자료는 "의식주․생업․․신앙․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속․관습과 이에 사용되는 의복․기구․가옥 등으로서 국민생활의 추이를 이해하는 데에 불가결한 것"을 가리키는데, 문화재청장이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중요민속자료와 시․도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시․도 민속자료로 구분할 수 있다.


일곱째, 국보 제1호와 제2호처럼 문화재의 일련번호는 그 문화재의 가치 높낮이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오로지 지정된 순서만을 나타낼 뿐이다.


여덟째, 토지․해저 또는 건조물 등에 포장된 문화재를 매장문화재라 하는데, 이 또한 국가의 귀속자산으로 본다. 그러므로 이를 발견했을 때에는 문화체육부장관에게 신고해야 한다.


이와 같은 문화재 구분법은 답사현장에 갔을 때, 상당한 도움이 된다. 모든 문화재 옆에는 그 문화재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왼쪽에는 한글로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영어(혹은 일어 겸용)로 쓰여져 있다. 한글판의 맨 위에는 항상 그 문화재의 명칭이 제시된다. 명칭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구례 화엄사 사사자 3층석탑(국보 제35호)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

․철원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국보 제63호)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 입상(국보 제80호)

․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호)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국보 제119호)


원래부터 명칭을 갖고 있던 문화재는 거의 없고, 후대에 일정한 원칙에 따라 붙여준 이름들이다. 우선 명칭의 맨 앞에는 지역명이 나오는데, 흔히 군 단위의 지명을 붙인다. 다음에는 소속 기관을 알려주는데, 예를 들어 화엄사라는 사찰에 소속되어 있으면 그 사찰명을 적는다. 그 사찰이 현존해 있으면 '△△사'라고 하며, 사찰이 없어져 버리고 그 터만 남아 있는 경우에는 '△△사지(址)'라고 쓴다. 그리고 문화재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제시되는데, 대개층수(3층․5층등)․재질(석․철조․금제․금동 등)․명칭(탑․불․종, 혹은 비로자나불․여래 등)․형태(좌상․입상) 등을 나타낸다.


문화재 명칭 밑에는 그 문화재의 격이 기록되는데, 국보 제△호․보물 제△․중요무형문화재 제△호․천연기념물 제△호․사적 제△호․중요민속자료 제△호․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호․경상남도 기념물 제△호 등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그 문화재의 가치와 관리․보존의 주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2)도갑사 개요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전기 1456년(세조 2) 수미(守眉)가 중건하였다

신라말, 도선국사의 어머니가 성기동 골짜기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떠내려 오는 참외를 먹고 잉태하여 도선을 낳았으며, 처녀가 아이를 낳았으니 남의 이목이 두려워 아이를 숲에 버렸는데 비둘기 떼가 보살피므로 기이하게 여겨 문수사 주지가 데려다 길렀다는 도선국사의 탄생설화이다. 그래서 ꡐ비둘기 숲ꡑ이라는 한자말의 ꡐ구림ꡑ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도갑사 일주문을 지나 100미터 가량 들어가면 국보 50 호인 해탈문이 나온다. 조선 성종 4년(1473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로 건축양식이 대단히 독특하다. 해탈문 좌우 앞쪽 칸에 금강역사상이 다음 칸에는 보물 제 1134호인 문수동자와 보현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석조 5층 석탑, 수미왕사비가 있고, 절 100미터 위 미륵전에는 보물 89호인  석조여래좌상이, 100 미터를 더 오르면 절을 창건한 도선국사비와 중창한 수미왕사비가 웅장하게 서 있다. 조선 세조 3년(1473년) 신미,수미두왕사가 중창했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총 규모가 966간에 소속된 암자가 12개나 되었으며, 상주한 승려 수가 730명에 달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6.25동

란을 겪으면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다.

지금도 대웅전 뒤 천여평의 빈터에는 주춧돌이 선명하게 군데 군데 박혀있고, 앞뜰에 5 미터에 달하는 스님들이 마실 물을 담아 두는 석조의 크기가 도갑사의 옛 사세와 승려수를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3)도갑사 유적

도갑사 도선 수미비

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에 있는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와 중창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

1974년 5월 22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비는 귀부(龜跌)와 비신(碑身), 이수를 모두 갖춘 전형적인 것으로, 도선국사와 수미선사를 추모하는 비이다.

도선국사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활동한 승려로, 속성은 김(金), 호는 옥룡자(玉龍子)이며 전라남도 영암 출생이다. 15세에 지리산 화엄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불경을 공부하였으며, 중국에 가서 풍수지리를 공부하고 돌아와서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세웠다. 그후 전국 명산대찰을 두루 섭렵하고 나서 백계산 옥룡사에서 평생을 마쳤다. 그의 음양지리설․풍수사상은 고려 ․조선 시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미선사는 조선 전기의 승려로 속성은 최(崔), 본관은 고랑주(古朗州), 호는 묘각(妙覺)이다. 13세에 출가하여 영암 월출산의 도갑사에서 수행하고 20세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후 속리산 법주사에서 신미(信眉)와 함께 수도에 정진하였으며, 선교(禪敎)를 부흥시키는 데 힘썼고, 1457년(세조 3)에 도갑사로 들어가 절을 중수하였으며, 1458년 왕사(王師)가 되었다.

비신의 옆면에 새겨진 구룡문(龜龍文)이 정교한 조법을 보여준다. 17년이 걸려 1653년(효종 4)에 세운 것인데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새로 지은 것처럼 말끔하다. 전체 높이가 약 4.8m, 폭은 1.42m이며 표면에는 약 1,500자가 음각되어 있다. 비의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동․서를 향하여 머리를 쳐들고 있고 비신 측면의 조각 역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향하고 있으며 크고 미끈한 거북이가 비석을 지고 고개를 틀어 절 있는 쪽을 보고 있다.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두툼한 등껍질 위에 가장자리가 말린 넓은 연잎이 조각되어 비신을 받치고 있다. 이처럼 구름이나 연꽃무늬가 아니고 연잎으로 비신을 받친 것은 조선시대의 비에서만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몸통이나 머리에 비하면 발 부분은 빈약하다


도갑사 도선국사진영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에 소장되어 있는 도선국사의 초상화.

1990년 12월 5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도선국사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활동한 승려로, 중국에 가서 풍수지리를 공부하고 돌아와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세웠다고 한다. 그후 전국 명산대찰을 섭렵하고 나서 광양 옥룡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원래 도선국사상은 1456년(세조 2)에 도갑사를 중창한 수미왕사의 발원으로 제작되었다. 이 초상화는 그뒤에 다시 그려진 것인데 인물 초상의 표현 방법, 바닥의 화문석 무늬와 의자의 양쪽에 댄 꽃무늬 띠 등으로 보아 18~19세기에 옮겨 그린 듯하다. 비단에 호분과 진한 채색으로 그렸고 왼쪽 윗부분에는 ꡐ도선국사진영ꡑ이라고 씌어 있다. 약간 오른쪽으로 향하여 앉은 자세로 긴 가지를 들고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은 조선 후기 승려 초상화의 전형을 보여 준다. 도선국사의 초상화는 순천 선암사에도 1점 있는데, 화기에 1805년에 제작된 것으로 씌어 있다. 도갑사의 도선 영정은 인물묘사법과 의습처리, 화문석 무늬 등으로 보아 선암사 초상화와 같은 시기이거나, 단순화된 복장과 옷깃의 끝머리가 안으로 접혀든 점, 의자의 모습, 꽃띠 처리 등으로 보아 선암사 초상화보다 약간 후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초상화는 함께 모셔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77호인 수미왕사진영과 표현 형식이 비슷하여 19세기 초에 수미왕사진영과 함께 옮겨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도갑사 석조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돌그릇.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석조란 큰 돌의 내부를 파서 물을 담아 쓰거나 곡물을 씻는 데 쓰는 돌그릇을 말한다. 도갑사의 대웅전 앞뜰에 있는 300년 된 초대형의 고풍스런 석조는 화강암으로 만든 기다란 네모 모양의 통나무배 모양으로 네 귀의 모서리를 죽였으며 거죽의 밑바닥도 반원형으로 돌려 처리하였다.

승려들이 마실 물을 담아 두는 석조의 안쪽 밑바닥에는 물을 뺄 수 있는 작은 배수구가 있다. ꡐ강희(康熙) 21년 임술(壬戌)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인 1682년(숙종 8)에 제작된 석조임을 알 수 있다. 크기는 길이 467cm, 폭 116cm, 높이 85cm에 이르는 17세기 말의 거대한 석조이다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도갑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화강암 불상.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m. 같은 돌에다 불상과 광배(光背)를 조각하였다. 나발(螺髮)에 육계(肉몲)가 크며 타원형 얼굴이다. 도톰한 눈두덩, 넓적한 코, 덤덤한 입에는 미소를 띠고 있다. 투박한 귀는 짧고, 목은 길지만 삼도(三道)는 형식화되었다. 어깨는 넓지만 부자연스러우며 몸의 굴곡도 단순하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팔도 생동감이 없고 조각기법도 둔하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는 옷주름 몇 가닥을 투박한 선으로 표현하였을 뿐이다. 광배는 주형(舟形)이고 신라의 양식과 달리 곡선미를 찾아볼 수 없다. 두광(頭光)도 홑잎 연화(蓮華)무늬를 표현하였고, 꼭대기와 양옆에 각각 화불(化佛)이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화염(火焰)무늬가 표현되었다. 대좌는 연화대좌(蓮華臺座)로 짐작되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얼굴의 세부표현이 예리하지 못하고 전반적으로 평면성을 강조하였다.


도갑사 소장 동자상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도갑사의 해탈문에 있는 조선시대의 두 목조동자상.

1992년 7월 28일 보물 제1134호로 지정되었다. 해탈문의 뒷쪽 좌우칸에 봉안되어 있으며, 사자를 탄 문수동자상과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상이다. 이들 동자상을 봉안한 해탈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단층건물로 1473년(성종 4)에 건립되었으며, 동자상도 이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① 기사문수(騎獅文殊)동자상:높이 178cm, 목재에 채색하였으며, 동자가 사자 등에 앉은 모습이다. 사자는 네 발을 모두 땅에 대고 반듯하게 선 자세이며, 동자상은 사자의 몸통 한쪽 등에만 두 다리를 나란히 모아서 앉았다. 동자는 쌍계머리에 머리를 묶은 치레가 화려하고 이목구비도 원만하며, 옷차림도 화려한데 상의는 앞가슴이 U자형으로 크게 터졌고 소맷부리는 넓은 편이다.

② 기상보현(騎像普賢)동자장:높이 178cm, 목재에 채색하였으며, 크기와 얼굴 모습 등 문수동자상과 거의 같다. 다만, 옷차림에서 약간 차이가 있으나 문수동자상보다는 덜 화려한 편이다. 두 동자상은 매우 드문 기사(騎獅)․기상(騎像)의 독특한 도상(圖像)으로, 목조상으로서는 유일한 작품이다.


도갑사 수미왕사비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에 있는 수미왕사의 활동과 내력을 기록한 석비.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비는 영암 출신 수미왕사의 활동과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귀부(龜跌)와 비신(碑身), 이수를 모두 갖춘 전형적인 한국의 석비이다. 수미왕사는 조선 세조의 왕사로서 15세기 중엽에 도갑사를 크게 중창한 승려이다. 13세 때 도갑사에서 출가하여 63세에 입적하였고 속리산 법주사에서 경론을 깊이 연구하였다. 도갑사에 돌아와 절을 크게 중창하여, 세조는 그에게 묘각화상이라는 호를 내렸다.

1629년(인조 7)에 만들기 시작하여 1633년에 완성하였다. 전체 높이는 334cm이고, 비석만의 높이는 200cm, 폭 108cm, 두께 21cm이다. 17세기 초에 세운 석비답지 않게 양식과 수법이 특이하게도 고려 전기에 유행하였던 것을 비슷하게 모방하여 건립하였다.

네모난 모양의 대좌(臺座)에 귀부를 갖추고 그 등 가운데에 비신과 비대석과의 연결 부분으로 직사각형의 비좌(碑座)를 설치하였다. 돌거북의 머리는 눈살을 찌푸린 용의 얼굴처럼 표현되었고 목이 짧고 등껍질이 두꺼우며 도식화된 형식이다. 귀부의 앞발과 뒷발은 발톱이 다섯개씩으로 이것도 역시 형식화되고 있다. 비신을 받치는 비좌 주위의 거북등은 6각무늬로 두껍게 처리하였다. 비신 위에 놓여 있는 이수는 밑면에 3단괴임을 하고 윗면에는 꽃잎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른 구름무늬를 섬세하게 양각으로 새겼으며 이수의 가운데 부분과 양귀퉁이에는 각각 쌍룡이 싸우듯이 뒤얽힌 형태로 새겨져 박진감이 넘친다.


도갑사 수미왕사진영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에 소장되어 있는 수미왕사의 초상화.

1990년 12월 5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77호로 지정되었다. 수미왕사는 조선 세조의 왕사로서 15세기 중엽에 도갑사를 크게 중창한 승려이다. 영암 출신으로 13세 때 도갑사에서 출가하여 63세에 입적하였고 속리산 법주사에서 경론을 깊이 연구하였다. 도갑사에 돌아와 절을 크게 중창하여, 세조는 그에게 묘각화상이라는 호를 내렸다.

원래 수미왕사의 초상화는 1633년(인조 11)에 제작된 것으로, 그의 비를 건립한 시기와 같다. 현재 도갑사에 소장되어 있는 이 수미왕사상은 비단에 진한 채색을 사용하였는데 조선 후기 불화를 그리는 안료를 사용하여 불교 회화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약간 왼쪽을 향한 자세로 보리수를 들고 두 다리를 결가부좌하여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다. 화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ꡐ수미왕사진영ꡑ이라고 씌어 있다.

이 초상화는 함께 모셔진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76호 도선(道詵)국사진영과 인물의 묘사와 의습 처리, 화문석 등 여러 가지의 표현 형식이 비슷하여 19세기 초반에 도선국사진영과 함께 옮겨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도갑사 오층석탑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탑은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갖추었고 상륜부(相輪部)에 노반(露盤)이 있고 꼭대기에는 보주(寶珠)를 얹었다. 탑의 기단부 지대석은 지하에 매몰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단층 기단인 듯하다. 기단 면석은 4개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귀기둥과 지주 1주씩을 모각(模刻)하였다. 2개의 판석으로 된 기단 갑석은 두꺼운 편이며, 밑면은 부연이 없이 수평으로 처리하였고, 윗면은 중앙에 오르면서 가벼운 경사를 이루고 1단의 원호(圓弧) 괴임대를 나타냈다.

1층 탑신은 4매 판석으로 꾸몄는데, 기단부에서처럼 박아넣은 것이 아니라 엇물림으로 짰다. 탑신은 2층에서부터 급격히 높이를 줄였으며, 위층으로 갈수록 서서히 체감되었다. 1층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매우 두꺼운 편이며, 낙수면의 물매도 급한 편이고 전각(轉角)도 약간 반전하고 있다. 옥개석의 밑면은 5단의 층급 받침을 갖추고 있으나 간격이 매우 좁다. 옥개석 상면 중앙에 역시 1단의 탑신괴임대를 갖추었다. 2층부터는 옥개석의 폭이 좁아지고 층급받침은 4층부터 점차 축소되고 있다. 탑의 조성 양식으로 보아 지역적 특색을 살린 고려시대의 석탑 양식을 충실히 갖추고 있는 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석탑이 있는 도갑사는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월출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하였다. 원래 도갑사 자리에는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어린 시절을 문수사에서 보낸 도선국사가 나중에 그 터에 절을 다시 지은 후 도갑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전성기를 누렸으며, 조선시대인 1457년(세조 3)에 수미(守眉)대사와 신미(信眉)대사가 중건하였다. 그뒤 1473년(성종 4)에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1776년(영조 52)에 다시 중수하였다. 도갑사는 원래 총 규모가 966간에 소속된 암자가 12개, 승려 수가 730명에 이르는 큰 절이었으나 6․25전쟁과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불탔으며, 현재의 대웅전은 1980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명부전, 미륵전, 해탈문(국보 50), 요사채 등이 있다. 해탈문의 좌우에는 금강역사상이 안치되어 있다. 또 미륵전 안에는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보물 제89호인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밖에도 대웅보전 앞에는 도선․수미의 비가 있다. 또한 이 절의 주위에는 국보 제 144호로 지정된 월출산 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하여 구정봉의 9개 우물, 왕인박사상 등이 있다.


도갑사 해탈문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도갑사에 있는 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옆면 2칸, 단층 맞배지붕의 주심포(柱心包) 형식이다. 석조기단(石造基壇) 위에 선 규모가 작은 문으로, 중앙 칸은 통로로 되어 있다. 원래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안치하였다고 하나 없어지고, 뒷쪽 좌우 칸에 보물 제1134호인 2구의 목조동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구조는 약한 배흘림을 지닌 둥근 기둥 위에 이출목(二出目)의 공포(뱀  包)를 올렸고, 그 위에 대들보를 올렸다.

보 끝은 외목(外目)도리를 받고, 대들보의 양단(兩端) 근처에 마루보 끝을 받치는 포대공(包臺工)의 첨차(墅遮)가 바로 우미량(牛眉樑)이 되어, 앞으로 나오는 것을 기둥 위의 대들보에서 받아, 이것이 주심(柱心)도리를 받친다. 마루보 중앙에는 포대공으로 된 마루대공을 두어 마루도리를 받으며, 마루도리 앞뒤에서 약한 반곡(反曲)을 지닌 소슬합장(合掌)이 역시 마루도리를 떠받치고 있다.

이 문의 건축양식의 특이한 점은 공포가 구조적으로는 고출목 같으나 형태는 출목으로 보이고, 또 대들보나 마루보 위에서 마루도리나 대들보를 지탱하는 포대공의 양식이 기둥머리에 있는 공포와 전혀 달라 마치 다포집 양식의 공포와 같은 형태로 된 점이다. 따라서 이 건물은 주심포집 양식에서 가장 많이, 또 구체적으로 다포집 양식의 수법을 혼용한 가장 뚜렷한 유구(遺構)로서 흥미 있으며, 한국에서 보기 드문 산문(山門) 건축으로 매우 중요하다.

 

(4)용어 해설


*비의 기원: 주대(周代)부터 유래한 목비(木碑)에서 찾는데, 이때는 단조로운 형태의 비신(碑身)뿐이었으며, 이수가 나타나는 것은 한대(漢代)부터이다. 한대의 비의 머리는 원형머리와 규형(圭形)으로 된 두 가지 양식이 있었는데, 특히 둥근머리를 가진 비에서는 훈(暈)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자리를 장식하는데, 이 훈에 가끔 용이나 주작(朱雀) 등을 조식하였던 것이 후세 이수의 기원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 수대(隋代)를 거치면서 석비양식이 더욱 발전하고, 당나라 때에 와서 지금의 이수와 비신, 방부(方趺)․귀부(龜趺)를 가진 석비양식과 수법의 기본형이 등장하고, 이것이 한국에 전해져 고려시대까지 한국 석비의 기본양식이 되기도 하였다. 당나라 때에 완성된 이수의 특색은 둥근머리의 형태에 좌우 2~3마리의 반룡(蟠龍)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반룡의 머리만을 나란히 하여 석비를 물고 비신을 일제히 들어올리는 듯한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이러한 당대(唐代) 석비의 양식이 통일신라시대에 수용되어 한국의 석비에서도 귀부와 이수가 갖춰지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에는 당비의 이수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으나, 9세기 후반기에 가면 둥근 머리형에서 관형(冠形) 또는 개형(蓋形)으로 변화되어 간다.

고려 초기까지 이러한 형식이 이어지다가 12세기 말에는 이수 없는 비신 위에 우진각 지붕형으로 된 규두형(圭頭形) 석비가 나타나고, 14세기 말에는 옥개풍(屋蓋風)의 지붕형 이수를 가진 또다른 형식이 출현한다. 그러다 조선 초기에는 다시 당송시대의 이수를 가진 석비양식이 보이기도 하다가 15세기 말경부터는 고려 말의 옥개형 석비형식을 기본으로 하는 간략한 양식이 주조를 이룬다.

*귀부(龜趺): 삼국시대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비신 위에 두 마리 용으로 장식된 이수(首)를 씌우는 것이 보통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용의 모습 외에 해태 모습을 한 것도 있고, 사실적인 거북 모양에서 점차 변형되어 장중한 것, 패기에 넘치는 것, 우아한 것 등 형태를 달리한 것이 많다.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의 귀부와 이수는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높이 평가된다

*비신(碑身): 비의 몸체부분

*이수(履修):이()자는 본래 뿔이 없는 용 또는 교룡(蛟龍)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그 용어와 양식은 중국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본래는 이기(彛器)․비액(碑額)․석주(石柱)․석계(石階)․인장(印章)․종(鐘)․정(鼎) 등의 표면과 머리 부분에 용의 형체를 조각하여 장식한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비액의 이수가 형체나 크기로 보아 가장 대표적인 것이어서 오늘날의 일반적인 개념이 되었다.

*나발: 고둥과 같은 입자(粒子)로 표현되어 나선상(螺旋狀)으로 금이 가 있는 일이 많다. 이러한 형태의 머리를 말한다

*광배: 중근동(中近東)의 고대신(神)이나 황제의 배후에 둥근 모양의 광명을 나타낸 데서 비롯되어,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그리스도나 마리아, 성신들의 후두부(後頭部)의 원광(nimbus), 또는 전신(全身)의 배후에 그려진 타원형의 거신광(擧身光)이 되었다.

이 광배가 2세기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도상(圖像)에 나타났고, 5세기에는 사도(使徒)에게도 쓰였으며, 6세기에는 성자(聖者)와 천사에게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육계: 불정(佛頂)․무견정상(無見頂相)․정계라고도 한다. 부처 32길상의 하나로서 보통 부처의 머리 위에 혹과 같이 살[肉]이 올라온 것이나 머리뼈가 튀어 나온 것으로 지혜를 상징한다.

*삼도: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세 가지 과정인 견도(見道)․수도(修道)․무학도(無學道)를 말한다 ① 견도: 삼도 중 부처가 가장 먼저 설법한 것으로, 사제의 도리를 깨닫는 수행 과정을 말한다. 사제와 십이연기에 대한 인식이 이에 속한다. 경전에서는 ꡐ이것이 고(苦)임을 알고, 이것이 고의 집(集)임을 알고, 이것이 고의 멸(滅)임을 알고, 이것이 고의 멸에 이르게 하는 도(道)임을 안다ꡑ라고 설명한다. ② 수도: 사제와 연기를 체험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는 수도의 여러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방법에 따라 여러 학파와 종파가 나뉘고 독자적인 수행법이 생겼다. 경전에서는 ꡐ고는 널리 알아야 할 것이고, 집은 끊어버려야 할 것이며, 멸은 실증해야 할 것이고, 도는 닦아야 할 것이다ꡑ라고 설명한다. ③ 무학도: 수도 결과 해탈․열반에 이른 것을 뜻한다. 무학은 더 이상 배움이 없는 경지로,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이 실현된 상태이다. 경전에서는 ꡐ고의 두루 앎을 마치고, 집의 끊어버림을 마치고, 멸의 실증함을 마치고, 도의 닦음을 마친다ꡑ라고 설명한다.

*항마촉지인: 불교에서 석존5인(釋尊五印) 중 하나이다. 항마인(降魔印), 촉지인(觸地印)이라고도 한다. 모든 악마를 굴복시켜 없애버리는 모습으로, 형태는 결가부좌한 채 선정인(禪定印)에서 오른손을 풀어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 끝을 가볍게 땅에 댄 것이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배꼽 앞에 놓은 선정인 그대로이다.

*포대공: 대들보나 마루보 위에 포작형식(包作形式)으로 세운 기둥. 공포부분의 짜임이 간단하게 된 것부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가장 많은 형상은 포대공에 화반대공을 복합시킨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보받침에 쓰이며 종대공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포대공 자체의 짜임 수법은 주심포계 집이나 다포계 집에 관계 없이 계통적 변천과정이 체계화되어 있지 않으나 건물 성격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구부재(架構部材) 중 보의 다듬질이나 가구재의 짜임 형식 등도 중요하나 포대공의 세부수법이 보여주는 시대성이 건축양식 판별에 핵심이 되는 경우가 있다.

*맞배지붕: 가장 간단한 지붕형식이며, 지붕면이 양면으로 경사를 지어 책을 반쯤 펴놓은 八자형으로 되었다. 정면에서 보면 장방형의 지붕면이 보이며, 측면에서는 지붕면 테두리(내림마루)가 보일 뿐이다. 맞배지붕은 측면 가구(架構)가 노출되므로 측면관(側面觀)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공포: 한국 ․일본 ․중국 등지의 전통 목조건축에서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

*주심포: 매우 큰 양간(樑間)을 가지고 건물 내부에 기둥이 없는 넓은 공간을 만드는 데 적합한 가구(架構) 수법을 사용한 건축으로 두공(枓뱀)의 장설(長舌)를 최대로 활용한 건물이다. 우선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놓고 주두 위에만 두공을 짜올리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동자주(童子柱) 아니면 ∧형 복화반(覆花盤)을 둔다. 두공은 기둥머리의 창방 위치에 꽂아낸 첨차(墅遮)부터 시작해서 짜올리며, 벽 전면에서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기 위한 행공첨차(行工墅遮) 이외에는 좌우로 전개되지 않는다. 두공은 2출목으로 한정되며 첨차의 하단은 S형 곡선이 되도록 깎는다. 소루(小累)는 측면이 내반(內反)된 곡선이 되고, 굽 밑에 굽받침이 달리게 된다. 보[樑]의 형태는 네모가 둥글게 깎인 역사다리꼴이 되고, 보 양 끝에서는 보의 굵기가 작아진다. 천장가구(天障架構)는 회칠이나 단청으로 꾸미고 일반적인 천장가구를 하지 않는다.


3.結論

답사는 언제나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는 것 같아서 뜻깊고 보람되는 것 같다. 벌써 답사를 3번이나 갔다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 아쉬운 순간들이 많았고 또 보지 못했던 것들이 후회스럽게 느껴 지고 있다.

반면에 얻어 온 것도 많기 때문에 후회와  즐거움이 나를 기쁘게 하는것도 사실이다. 옛 조상들의 삶과 그리고 정신을 학교에서가 아닌 실제로 가서 보고 배우면서 우리들의 앎을 더욱 충족시켜 주고 더욱 내가 누구라는 주체의식 또한 가질수 있는 계기가 답사가 아닌가 싶다.

학교에서 틀에 박힌 지식이 아닌 산 교육으로써의 지식을 우리들은 답사라는 하나의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산 교육의 현장을 갔다와서 느낄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답사는 단순히 유적과 유물을 보는 것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상님들의 얼과 정신을 우리들이 받아들이고 가꾸어 나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