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학기 역사현장학습을 다녀온후...


                                                         경영학부 99314049 박상연

서론


 경영학부 학생인 나로선 역사현장학습이라함은 당연히 낯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한데에는 이 역사현장학습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평소 역사에 관심은 있었지만 쉽게 접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이곳저곳을 돌아 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학우들과 교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대학생활의 마지막 기회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 답사를 다녀온지 2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여운과 추억으로 남아있다.

 역사현장학습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건 역시 내가 직접 준비하고 발표한 해남에 있는 대흥사(大興寺)였다.


본론


대흥사(大興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는 근대 이전 대둔사와 대흥사로 불리었다가 근대 이후 대흥사로 정착되었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암울했던 조선시대의 불교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존재는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게 한 최대 원동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흥사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도량이다. 서산대사의 구국 정신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지금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祀)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시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매년 지역 내의 여러 학생들은 이 곳에 모여 호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각종 행사에 참여해 오고 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상당 수 존재한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 4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 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 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 320호), 천불전(전남유형문화재 제 48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 52호), 서산대사 부도(전남유형문화재 제 57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 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 94호), 서산대사 유물(전남유형문화재 제 166호), 정조친필 서산대사화상당명(전남유형문화재 제 167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 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 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그 외 성보 문화유산이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 대흥사는 지금도 성불(成佛)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뭇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도량이다


◎ 대흥사 창건연기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다양한 창건연기(創建緣起)가 전하고 있다. 이들 창건 연기는 역사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해당 사찰의 전통과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대흥사에도 몇 가지 창건 연기가 전하고 있다.

 대흥사의 창건 연기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 『죽미기(竹迷記)』,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이 있으며, 1823년(순조 23) 간행된 『대둔사지(大芚寺志)』는 이들 자료를 종합한 내용과 함께 이때까지의 사찰 역사를 총 정리해 놓은 중요 자료이다.

 먼저, 『만일암고기』에 전하는 창건 연기는 426년(백제 구이신왕 7)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이다. 신라의 정관 스님이 426년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 이후 508년(무녕왕 8)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하였다고하나 안타깝게도 이 자료에서 창건주로 소개한 정관존자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죽미기』는 544년(신라 진흥왕 5) 아도화상(阿度和尙)의 창건설을 전하며, 자장(慈藏) 스님과 도선(道詵) 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써는 대흥사의 정확한 창건 시점을 밝히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라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응진전(應眞殿) 앞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말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대흥사는 늦어도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된 고찰로 보아야 한다. 또한 정관존자나 아도화상 같은 분들이 창건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은 그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대흥사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중시되어야할 내용이다.

 

◎ 대흥사연혁


 창건 이후 대흥사의 연혁을 전해 주는 자료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대흥사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시대의 상황을 전해 주는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대둔사지』에 의하면 고려 후기의 천태종 소속 고승인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 스님의 주석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천책 스님이 대흥사 북암(北庵)에 한동안 주석하였으며, 『대둔사지』를 편찬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님이 사용하던 발우가 이 곳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책 스님이 대흥사 인근의 백련사(白蓮寺, 현 대흥사의 말사)에서 출가하고 그 곳에서 장기간 주석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이 기록은 상당한 타당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 앞마당에 신암(信菴), 사은(思隱), 성유(性柔) 등 세 분 고승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이들 고승도 역시 고려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로 보여지긴하나 구체적인 행장은 알 길이 없다. 여하튼 고려시대의 대흥사와 관련한 자료는 매우 부족한 현실이며, 이것은 당시 대흥사가 왕실이나 불교계에서 크게 중시하던 사찰이 아니었다는 측면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대흥사의 위상이 크게 부각된 시점은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이 곳 대흥사에 전해지고 조정과 불교계에서 모두 대흥사를 중시하기 시작했던 조선중기 이후부터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이후 대흥사에서는 13 대종사와 13 대강사가 계속 배출되어 조선불교계를 이끌어왔으며, 조선의 조정에서는 표충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므로써 호국정신의 근원지와도 같은 위상을 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대흥사는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30본말사법 제도 아래에서 44개의 사암을 관장하는 본사로 지정되었다가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결론

 

 이상이 내가 준비한 대흥사의 개관과 역사였다. 전공분야가 아니라 발표할 당시 무척이나 긴장했었었는데 다행이 준비한 내용을 학우들에게 잘 전달해준거 같아 다행이었고, 시간상 자세히 둘러보지 못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점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대학생활중에서 잊지 못할 소중한 답사, 추억이었고 타과생인데도 잘 대해준 후배님들과 친구들 그리고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