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학기 전라남도 답사>


          

          천 불 천 탑 의  운 주 사






                 과목명 : 역사현장학습1

                 교수님 : 장준철 교수

                  학번  : 20030417

                  이름  : 최병휘





운주사(運舟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도선(道詵)이 세웠다는 설과 운주(雲住)가 세웠다는 설, 마고할미가 세웠다는 설 등이 전해지나,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법당과 석불, 석탑이 많이 훼손되어 폐사로 남아 있다가 1918년에 박윤동(朴潤東)·김여수(金汝水)를 비롯한 16명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채, 종각 등이 있다.


1942년까지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기만 남아 있다. 크기는 10m 이상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우 투박하고 사실적이며 친숙한 모습이 특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 좌우의 산등성이에 1,000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80년 6월에는 절 주변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소장되어 있는 문화재로는 연화탑과 굴미륵석불, 보물 제796호인 9층석탑, 보물 제 797호인 석조불감, 보물 제798호인 원형다층석탑, 부부 와불(臥佛) 등이 있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우리 국토의 지형을 배로 파악한 도선이 배의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하고 이곳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잘 알려진 부부와불은 천불천탑 중 마지막 불상으로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의 조각이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1,000년 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한다.



 나의 답사 후 느낌...


 처음 운주사에 발을 들였을때가 생각이 난다. 비싼입장료에 과연 볼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했었고 어렴풋한 기억으로 중학교시절에 한번 이곳을 다녀간 기억이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그때는 사진만 잔뜩 찍고 이런저런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 였으나 지금은 史學을 배우으로서 좀더 진지하고 세심하게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컷던지 그때와는 새삼 다른느낌이었다. 이번 답사 코스중에서도 운주사는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있다는 것에 너무 놀라 꼭 세어보리라 들어 갔으나 현재 70여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 그것만이라도 머릿속에 담고 싶은게 간절했다.


 그렇게 걸어서 처음본 것은 운주사 구층석탑.

그건 보물 제796호로 지정되었고. 높이는 10m가량에,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에 딸린 사찰로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도선(道詵:827∼898)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 석탑은 넓은 자연석을 놓아 이를 하층 지대석(地臺石) 겸 기단석(基壇石)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기단 받침을 3단으로 새긴 다음, 상층기단 겸 탑신(塔身)을 올려놓아 9층까지 이루어 졌다고 들었다. 그리고 옥개석의 밑면에 받침을 생략하였거나 각 면에 새긴 조각의 특징 등 탑의 조성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했다.


 

 그위의 운주사 석조 불감

보물 제797호로 지정되었다. 불감은 맨 밑에 4각의 평판석(平板石)으로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그 위로 4각 돌기둥을 세워 석실을 조성하여 이를 받치게 하였으며, 그 위에 팔작(八作)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었고, 석실 전면과 후면에 각각 불상을 안치하였다. 원래는 석실 전후에 석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던 모양이나, 지금은 석문을 달았던 흔적만 남아 있다. 남쪽의 불상은 전체높이 255㎝로 소발의 머리에 길고 예리한 코, 작은 입과 목에 삼도(三道)가 표현되었고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通肩)이며 도식적인 옷주름을 간략히 표현하였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배에 대고 왼손을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인데, 입체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전체높이 264㎝인 북쪽의 불상도 같은 양식을 보이는데 옷 속에 싸인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화되고 경직된 불상 양식과 도식적인 옷주름 표현 등 불상을 새긴 수법은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 양식을 나타낸다.

 가장기억에 남는게 이 석조불감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너무 특히한 모습에 너무 놀랐고 그안에 불상을 모시며 결가부좌한 모습은 매우 인자한 부처의 모습이었다. 주위의 돌과 동전들이 조금 인상을 찌뿌리게 하였으나 이것역시 독특한 모습이었다.



바로뒤의 운주사 원형 다층석탑.

보물 제798호이다. 둥근 이중 기단(基壇) 위에 높직한 10각의 돌을 짜올리고 그 위로 앙련화(仰蓮花: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무늬)를 상징한 원형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그 위에는 짤막한 원형의 탑신(塔身)에 원형 옥개석을 차례로 얹어 6층탑을 이루었는데, 원형은 층수가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각 층의 원형 옥개석은 상층부로 올라감에 따라 완만하게 체감되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옥개석이 모두 원형이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선이 돌려져 있다. 상륜(相輪)에 보륜(寶輪)·보주(寶珠)가 전혀 없는, 버섯모양의 석탑으로 고려의 특색이 있는 희귀한 탑이다.

  그렇게 생긴 와중에도 항상 중심은 바로 서있고 안정된 느낌이 들어 한결 보기 좋았다. 그러나 역시 특이한 모습은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교수님께서는 자유분방한 모습이 특색이며 고려시대의 특색이라고 설명 들은바 있다.


 운주사 와불

세계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형태의 와불이다.

이는 열반상(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이 누운 상)과는 다르게 좌불(앉은 모습)과 입상(선 모습)으로 자연석 위에 조각된 채로 누워있다. 이렇게 좌불과 입상의 형태로 누워있는 부처님은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이 부처님은 좌불 12.7미터, 입상 10.26미터의 대단히 큰 불상이다. 나침반을 갖다대면 거의 정확히 남북으로 향하고 있어 이 천번째 부처님이 일어나면 곤륜산의 정기를 이 민족이 받아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지상 최대의 나라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운주사의 좌불은 비로자나부처님이고 옆에 입상은 석가모니불이다. 그리고 이 두 분을 지키는듯 아래 서있는 노사나불(머슴부처, 시위불, 상좌불)도 옆에서 떼어내 세운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한 삼불 신앙의 형태로서 떼어서 어딘가에 세우려 했던 것인데 과연 어디다 세우려했을까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역사의 기록에서 이런 대단위 불사가 사라진 까닭을 생각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 와불 역시 나에겐 너무 흥미로운 것이 었다. 도저히 어느 절에서도 볼수가 없는 특이한 형태에 불상이 땅에 누워 있다는 것은 나에게 신비감을 주기에 충분 했다. 또 그에 얽힌 이야기들 그러나 자위적으로 훼손하려고 평면으로 쪼개진 모습은 보기 좋지 않았다.


 운주사의 칠성바위

 북두칠성은 농사의 풍요, 생명의 관장, 죽은 영혼이 돌아가는 별로 믿었다한다. 원시시대 고인돌 관뚜껑, 고구려 장군총, 무용총 무덤안의 천상도 북쪽에도 북두칠성이 정확히 찍혀져 있다. 민가의 할머니들이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놓고 새벽에 기원을 드릴 때 북쪽 하늘에 뜨는 별이 바로 북두칠성이다. 불교에서도 우리 민간 신앙을 받아들여 삼신각 혹은 칠성각을 짓고 거기에다 모셔놓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민속신앙들을 수용해 내어 불교가 우리화 되어온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북두칠성의 별을 표현하여 제작한 예는 어디에도 없다.


 이 바위는 역사 스페셜이라는 티비 프로그램에도 나왔다. 그만틈 신비로운 것이며 그만틈 운주사의 빼놓을수 없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바위의 돌들은 지름이 2.7m에서 3.85m에 이르고, 두께도 29cm에서 35cm나 되는 등 매우 큰데, 실제 북두칠성의 밝기 등급과 같이 밝은 것은 크고 어두워질수록 돌의 크기 역시 차례로 작아지고 있다. 또 운주사 경내에 흩어져 있는 탑들의 배치 역시 일등성의 배치와 같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것이 그때 확실히 맞게 했었는지는 잘모르겠으나 옛 선인들의 영특함을 조금이나마 배울수 있었다.


 

 일상 생활을 떠나 밖에 나와서 직접 보고 배운다는 것은 참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 운주사는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었고 광주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더욱 찾기 좋은 곳이었다. 가서 더 많이 보고 배우고 적고 했어야하는데 설명이 이만큼 밖에 미치지 못한게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음... 그곳의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점은 보통 사찰  절  과는 다르게 볼거리가 많았고 그곳에 있는 것들 모두 자유분방함의 모습에 너무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