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루●


○목차○

1.서론

2.본론

-구름 속을 나르는 새가 사는 집  운조루

-운조루의 가옥구조

-운조루의 소장품(조선후기 생활의 생생한 재현)


3.결론


※1.서론※

답사를 다녀 온지 몇 주가 흘렀지만 그때의 그 추억들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소중한 보물로 간직될 것 같다.

답사를 다니면서 많은 곳을 다녔지만 그 중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아무래도 내가 직접 공부하고 발표를 해서인지 구례 운조루 였다.

그때 공부도하고 발표도 하였지만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운조루에

대해 알아 보려한다.

본론에서는 운조루의 명칭. 가옥구조, 운조루가 가지고있는 소장품 등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2.본론※

*①구름 속을 나르는 새가 사는 집 운조루*


토지면을 감싸고 있는 풍후의 핵심에는 운조루가 있다.   '구름 속을 나르는 새가 사는 집' 금환낙지의  핵심에 운조루가 있다는 얘기다.   운조루는 지금으로부터  2 백여 년  전인  1776년 경상도 안동태생의  유이주 라는 사람이 명당의 핵심에 99칸 집을 짓고 그 일가들을 모두 살도록 만들었다.  운조루 창건주 유이주는 놀기를 즐겼지만  부모에 대한 효성이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기개가 남달랐다고 한다. 유이주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 땅을 아껴 두었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이라는  뜻과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본래 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 혜사에서 따온 글귀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개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에서 첫 머리인 운과 조를 따온 곳이다.   한편 운조루 창건 과정에서는 운조루가 명당의 증거라는 사건이 발생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집터를 잡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 자리에서 어린아이의 머리크기만한 돌거북이  출토됐다.   이는 운조루의 터가 비기에서 말하는 금귀몰니의 명당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해석됐다.   이 돌거북은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가 지난 1989년 도난당했다.    운조루의 또다른 가보는 홍살문에 걸려 있는 호랑이 뼈이다.    유이주가 평북 병마절도사로 부임하면서 삼수갑산을 넘게 됐다.   새재에 이르러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채찍으로 그 호랑이를 잡아 가죽은 영조대왕에게 바치고 뼈는 잡귀가 침범하지 못하게 운조루  홍살문에 걸어 두었던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이 일로 유이주는 영조대왕으로부터 박호장군이란 칭호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호랑이 뼈는 민간에 만병통치 약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바람 난 남편의 바람기를 잡는데도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인근 마을은 물론 타지에서 온 여인네들이  조금씩  갉아가는 바람에 이중 삼중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기도 하다.    명당 중의 명당에 터를 잡은 운조루에서는 아직까지 일반인들이  기대하고 생각하는  고관대작이나  입신양명한  걸출한 인물이 배출된 것은 아니지만 재산이 자손대에 이르면서 꾸준히 늘었고  자손들이  관직에  많이  진출한 점을 들어 명당의 효험이 발하고 있다는 주장도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부귀영화,  입신양명의 기준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명당의 효험이 발생하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현재 유이주의 10대손이 관리하고 있는 운조루는 중요민속자료 제 8호로 지정돼 있다. 

 

*② 운조루의 가옥구조*


운조루가 아직까지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명당주의 명당에 집을 지었다는 것도 있지만 이 저택이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충실하게 따른 역사적 유물로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 고 있기 때문이다. 유이주에 의해 창 건된 운조루는 7년간의 대공사를 거쳐 완공될 만큼 규모가 대단했다.  조선시대 대군들이 지을 수 있었던 60칸을 넘어 99칸 규모였다.   일부에서는 운조루 창건 당시에는 1백칸을 넘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유이주가  두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79칸이라고 돼 있으나 기타 친인척들의 거처를 위해 만들어졌던 방을 생각하면 1백칸은 족히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2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가 노후되어 오늘날에는 60여칸만이 전해진다.   운조루의 규모 및 구조는 조선 왕조의 양반가옥의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데 호남지방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그 규모가 웅장하다.   집의 구성은 T자형 사랑채, ᄃ자형 안채가 중문간, 행랑채 등과 서로 연이어 있고 사당이 동북부에 있다.   구조양식은 민도리집 양식으로 집은 사랑채, 안채가 연이어 있으나 합각을 형성해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현재는 대문,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 연당 등으로 돼 있고 벽은 이중으로 안팎에서 발라 외부온도 변화에 적응하도록 되어있어  조선시대 건축양식이 과학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대문 앞으로는 도랑을 내어 맑은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연못의 흔적도 보이는데 문 앞에는 말을 묶어 두는 하마석도 있다.   지금은 도랑에 불과하지만 옛날에는 넓은 연못이 있었다.   문의 형태는 솟을 문형에다 문 위에 홍살을 세웠고 화강석의 초석 위에 사각 한 변 22㎝의 기둥을 세웠다.   문짝은 높이 303㎝, 너비 135㎝으로  원래부터 문턱은 없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큰 사랑채가 턱 버티고 서서 오는 이를 맞이한다.   높이1.2 m의 축대 위에 약 22㎝의 단이 있어 그 위에 세웠고 석재는 할석이다.  전국적으로 150년 이상된 30칸 이상의 고가는 19채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운조루는 건물 재료의 단단함이나 문의 크기, 운조루에서 살았던 유씨 집안의 생활용품 등 자료가 그대로 보존돼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더욱 높게 평가되고 있다.


*③운조루의 소장품 (조선후기 생활의 생생한 재현)*


국립민속박물관이 1987년 운조루에 소장중인 문적 및 서화, 가구 등을 조사, 건물자료에 못지 않은 주요 자료들이 전해오고 있음이 밝혀졌다.


①전적(典籍)류 -326종 811책- 1967년 1월 32종 145책이 성균관 대학교에 기증되고도 아직도 194종 666책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 유이주(1726~1797)가 근무한바 있는 상영공첩등록(商營公牒謄錄) 수성지(秀城誌) 등이 있으며 유억(1796~1852)이 근무한 함흥의 병아영중기(兵亞營重記)등도 있다. 이 집안에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전적은 이미 소개한 유제양의 일기 是言과 그의 손자 유형업의 일기 紀語 이다.

한말과 일제말기까지 계속된 이 일기에는 동학난, 의병,3․1만세, 고종 및 순종 승하 ,토지조사 및 측량, 주세제도, 담배전매과정 등을 실감할 수 있도록 기록하고 있다.이 두 일기는 한국농촌경제연구소에 의해 번역 간행되었다. 《시언》은 1851년부터 1922년 사이의 일기이며 《기어》는 1898년 1937년까지 사이의 일기이다.


②고문서 -26종 636건- 고문서 중 431건이 가옥 및 토지이동에 관한 명문류이며 41건은 호구단자로 신분 및 혼인관계의 변천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교지만도 65건이다.


③향촌문서-40종- 《구례군 향약적》등 군 관련 문서가 7건,《토지면 가좌성명성책》등 면문서 21건,《오미동본환미분식성책》등 당시 면 군의 행정과 사회관행 마을의 신분 구성과 세금, 동네 경비의 상황과 관행을 알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1890년 오미동에는 13호가 살았으며, 그중 6호는 노비였으나 갑오경장 직후인 1895년 노비 가구는 4호로 줄고 전체호수도 21호로 갑작스럽게 8호가 늘어나고 있다. 같은 기간에 자작농 4호가 1호로 줄면서 점차 소작농이 늘어나는 현상도 살필 수 있다.


④ 서화류 및 현판 윤사국 이익회 김정희 등 글씨 편액 21점, 추사 김정희의 팔곡병풍 등,글씨 16점, 석봉의 글씨 등 서첩 26점, 채용신이 그린 이산공영정 등 11점이 있으며 운조루를 그린 오미동 가옥도 등 많은 그림을 1987년 8월과 11월에 도둑이 들어 훔쳐 갔다.

이 집에는 이밖에도 흰삿갓,초립,흑립,수레등 수많은 민속자료가 있다. 전시관을 지어 일반에게 관람의 기회를 마련한다면 그 어떤 박물관의 소장품에 지지 않을 만 하다.


운조루는 외형적인 보존상태 뿐만 아니라 선조들의 기록, 유물이 거의 훼손됨 없이 보존돼 있어 조선 후기 호남지방 양반가의 생활 자체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유씨 집안 사람들은 모든 생활의 모습을 글로 남겼고 유품이나, 흔적, 자료들을 오늘날까지 소중히 간직해 오고 있다.

먼저 가도(家圖)라 하여 건물 배치도를 만들어 놓고 운조루의 개보수에 대한 각종 기록들을 남겨 놓았다.

수많은 서적들을 소장한 운조루는 이들 서적들을 분류하여 보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30-40년 단위로 도서정리를 해 그 상황을 기록하는 등 세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또 고문서류도 종류와 시기, 혹은 특별한 품목별로 체계있게 보관하였는데 매매계약서 같은 경우는 유씨 집안과 직접 매매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던 전대의 명문들 까지 보관하고 있다.

이같은 기록의 세밀함은 대대로 이어진 후손들의 일기나 치부책, 동네문서에도 그대로 반영돼 조상들의 생활면모를 이해하는데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아들 장가들일 때의 제비용에 대한 기록, 부친 장례시의 절차와 비용, 조문객의 명단, 심지어는 일제시대의 세금교부서와 영수증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서 사용된 문서와 기록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운조루에 보관돼 있는 전적류는 320종 811권으로 1967년 32종 145권은 성균관에 기증됐다. 고서는 모두 26종 636권이 잇는데 대부분 가옥, 토지 이동에 관한 것이고 신분 및 혼인관계의 변천을 알 수 있는 자료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서화는 추사 김정희의 부친 김노경의 글씨와 김정희의 팔폭병풍등이 있었으나 지난 89년 8월과 11월 두차례 오미동 가옥도와 거북돌들 많은 소장품이 도난당해 아쉬움을 주고 있다.

생활용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대대로 내려 온 전승유물과 생활용품, 집기, 도구들이 거의 훼손되거나 버려지지 않고 보존돼 있어 민속박물관으로 복원하여 옛 구례의 영화를 재현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3.결론※

   

이번 답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지만 특히 옛 유적과 사찰들을 보면서 조상들의 지혜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어 좋았고, 또한 대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대학생다운 공부를 해본 경험이었으며 시간에 쪼들려 충분히 고적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내려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옛 역사의 한 토막을 직접보고 느낄 수 있었던 답사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