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를 다녀와서

 

 

ꋾ 송광사                     ꋾ 대웅전                    ꋾ 보조국사 감로탑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 제1차 중창 *


석조 대사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폐허화된 길상사가 새로운 규모로 중창되고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지눌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이다. 지눌은 9년동안의(명종 27년, 1197~희종 원년, 2004) 중창 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 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드디어 송광사가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거조사로부터 길상사로 정혜결사를 옮겨와 수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가까운 곳에 정혜사라는 절이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산이름도 송광에서 조계로 바꾸었다. 뒤에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송광사로 불리게 되어 조계산 송광사로 되었다.




* 제2차 중창 *

지눌이 타계한 다음 그의 법을 이는 진각 혜심(眞覺 慧諶) 스님은 수선사의 전통을 이어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자 다시 절이 비좁게 되었다. 강종(康宗)이 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리어 절을 크게 증축하였다.


* 제 3차 중창 *

혜심 스님이후 180년이 지난 조선조 초 16국사의 마지막 분인 고봉화상께서 원을 세워(1395년) 유서 깊은 도량을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고봉의 뜻을 계승하여 중인(中印)선사께서 중창 불사를 완성하여 90여 칸의 증축을 하였다한다.


* 제 4차 중창 *

정유재란으로 침입한 왜군이 불을 질러 역사적 도량은 일시에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에 응선(應禪)화상께서 복구의 손을 대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지리산에 계시던 부휴 대사를 모시어 불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때 600여 명의 제자들이 송광사에서 부휴 대사의 지도로 공부했다고 한다.


* 제 5차 중창 *

헌종 8년(1842)에 큰불이 나 대웅전을 비롯한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정유재란 이후 두번째 겪는 수난이었다. 불이 난 이듬해부터 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시작되어 철종 7년(1856)까지 무려 14년의 시간이 걸려 2,150여 칸이 다시 세워졌다.


* 제 6차 중창 *

5차 중창으로부터 70, 80년 뒤인 1922년에 주지 설월(雪月)스님과 율암(栗庵)스님에 의하여 1928년까지 퇴락한 건물들을 고치고 개와를 바꾸는 등 전반적인 중수가 있었다.


* 제 7차 중창 *

1948년에 일어난 여순반란과 6.25사변의 발발은 조계산 송광사 일대를 공비의 노략과 살육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산중에 은신한 이들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국군 토벌대는 작전상 절 주변의 숲을 벌채하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공비들이 1951년 2월 절을 지키던 노인들을 학살하고 5월에는 절에 불을 질러 대웅전등 중심부를 불태워 버렸다. 1955년부터 주지 금당(錦堂)스님과 화주 취봉(翠峰)스님의 원력으로 5년 동안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 제 8차 중창 *

1969년 조계총림이 발족하면서 방장 구산(九山)스님께서는 승보 종찰다운 도량을 가꾸어야 된다는 원력에, 사부대중이 뜻을 함께하여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년여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였다.


* 제 9차 중창 *

1990년대에도 계속하여 관음전, 문수전, 정혜사(定慧社) 등의 해체 중창과 산내암자 복원불사 및 국보 국사전과 국가보물인 하사당, 약사전, 영산전 등의 보수를 하였고, 특히 2000년부터 임경당, 해청당, 사자루, 응진전, 불조전, 월조헌, 취정루 등의 중요 건물을 대대적으로 해체 보수하고 종무소, 선호당(善護堂), 다송원(茶松苑), 효봉영각, 수석정, 죽림정사, 목우농원 등을 신축 또는 중창하여 현재 80여 동(棟)의 장엄한 모습을 이루게 되었으며, 지금도 계속하여 산문 진입로의 옛길 복원 및 건물 보수불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송광사에서는 전국 사찰 가운데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보 제42호인 목조삼존불감, 국보 제43호인 고려고종제서, 보물 제572호인 수선사형지기, 보물 제1366호인 화엄탱화, 보물 제1376호인 티베트문법지 등 기타 동산문화재(動産文化財)와 고문서(古文書) 전적류(典籍類)의 과학적인 보수(補修) 및 보존처리와 체계적인 자료정리를 계속하면서, 성보박물관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각종 특별전시회를 기획하여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있다.




 사찰을 여러 곳을  둘러 보았지만 친구들과 구경을 하였을 뿐 설명을 들으면서 구경을 한 곳은 송광사 뿐이라서 나의 머리 속에 기억이 더 남는 것 같다. 송광사 우리나라의 거이 끝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에 위치하고 있다. 송광사는 삼보사찰(三寶寺刹)중 승보사찰(僧寶宗刹)로 불리우는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선사가 창건했다는 말과 보조체징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후에 고려시대 때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불일보조국사지눌 주석한 정혜결사도량이다. 지눌 이래 송광사에서는 16분의 국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한 사찰에서 한 분의 국사를 배출 하기도 어려운데 무러 16분의 국사를 배출 하였다는 설명을 듣고 정말 송광사라는 사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로 들어와 서산스님과 쌍벽을 이룬 부휴 선수스님에 의해 승보사찰의 전통을 이어 왔고, 그래에는 효봉, 구산스님이 그 전통을 이어와 한국정신사상사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도량이 이 곳 송광사라고 자랑스럽게 설명을 해 주시는 그 분의 모습에 대단히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나라의 크고 작은 전란을 겪으면서 옛 절간의 모습이 많이 소실되고 지금은 스믈 여섯채만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한다. 최근에는 6.25때 소실된 가람들이 많이 복구되어 70여동에 이르는 가람들이 웅장하게 골짜기를 메우고 있어, 옛날의 절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 할 수 있었다.

 

 

산사에 들어가려면 개울을 건너야 한다. 개울을 넘어야만 혼탁한 속세의 풍진을 떨칠 수 있고, 사바의 번뇌를 씻을 수 있다. 송광사 앞을 휘감아 동구로 굽이쳐 흐르는 개울은 나그네의 풍진을 깨끗이 벗어놓으라며 청량각 아래를 흐른다. 청량각(淸凉閣, 맑고 시원하게 씻어주는 문설주)은 깊숙한 계곡에 홍예(虹霓,무지개)다리를 쌓고 그 다리 위에 지붕을 올린 지붕다리건물이다. 청량각 지붕 아래를 지나면서 위를 올려다보면 보위에 턱을 괴고 있는 용이 산사로 들어가는 이들을 굽어살피고 있다. 그 익살스런 모습이 속세의 번뇌를 맑고 시원하게 씻어주고 있다. 또 다리 밑에는 쇠고리에 엽전 두 닙이 걸려 있는데 이 엽전은 절을 짓고 남은 돈을 걸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엽전은 돈을 바르게 쓰라는 의미에서 걸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대웅보전..종고루를 지나 드디어 부처님 계신 내정으로 들어섰다. 마당에는 불탑이 없어 더욱 넓었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던 가로누운 '아'자형 대웅전 건물이 정면으로 우뚝 솟아 있다. 이 건물은 8차 중창불사 때 당대의 최고 전문가들이 불사에 직접 동참하여 자기 연구 성과를 거리낌없이 반영한  결과라 한다. 대웅보전 안에는 삼세여래와 사대보살상을 봉안하였는데, 삼세불이란 과거, 미래, 현재를 주관하시는 부처님을 말한다. 석가모니 현세불이 중앙에, 좌우로 과거불인 연등불, 미래불인 미륵불이 계신다. 사대보살상이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말한다.



지장전 앞을 나와 약사전, 영산전을 일견하고 불일문 계단을 올랐다. 정말 들어 가서 스님들의 영정을 보고 싶었는데스님들이 참선 수행하는 선방출입문이라 외부인들의 출입을 제한하여 들어 가서 구경을 할 수 없었다.5월의 영산홍은 국사전 지붕을 불태우듯 뒷동산에 만발하였다. 국사전(國師殿)이야말로 승보사찰 송광사를 상징하는 곳이다. 고려시대에 왕으로부터 나라의 스승이라는 국사 칭호를 받은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한 열 다섯 분의 국사와 조선시대에 그 공덕이 그 옛날의 국사와 같다고 하여 종문에서 국사의 칭호를 붙인 고봉(高峰)화상을 합한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는 곳이다. 1951년 대화재에도 국사전만은 화재를 피하였는데 이는 국사들의 법력에 의한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건립 년대를 확실히 할 사료는 없지만 대체로 1450년 전후의 건물로 판정하고 있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석조기단은 특이하게도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장방형의 석물을 가로로 눕히기도 하고 세로로 세우기도 하여 쌓았다. 국사전은 국보 제56호로 지정되어 매우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우리의 멋진 문화를 보며...감탄이 절로 나왔다. 한국 문화재에 대한..자부심또한..크게 갖고,재밌는 일이지만..관심을...갖을거란.....작은 다짐을 하게 되었다.

송광사를 뒤로 한 채 나오면서 친구들과 내려 오면서 기회가 주어진다면..다시 한 번 꼭 와서 제대로 천천히 보고 가야겠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답사가 은근히 기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더 관심있게..답사에 참여할걸..하는...자그마한..후회도 있지만..보다..배운것도 많고..또한..많은걸..얻었으니, 다행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