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갑사 [ 道岬寺 ]



과      목 : 역사현장학습1

담당교수 : 장준철 교수님

학      번 : 20030309

이      름 : 구서천



서론


본론

Ⅰ. 연혁

Ⅱ. 문화재


결론


서론


 바쁜 일상생활에 익숙해져버린 때쯤 답사를 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나서는 여정이라 그런지 어린아이의 설레임이 다시금 눈을 떴다.  3월 28일, 오전 7시 40분 우리는 이번 답사의 목적지인 전남지역으로 출발했다. 답사의 대부분이 절이나 암자, 박물관이었는데 그 중 도갑사라는 절은 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워 옛부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에 자리잡은 도갑사. 여기서는 발표한 내용인 “도갑사의 연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문화재는 간단히 알아보고자한다.




본론


Ⅰ. 연혁

 도갑사는 신라의 4대 고승 가운데 한 분이신 도선(道詵)국사께서 창건하신 대가람으로 설화에 따르면 구림리는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의 탄생과 관련이 깊은곳이다. 신라 말, 도선국사의 어머니는 성기동 골짜기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서 떠내려오는 참외를 먹고 잉태하여 도선을 낳았다 한다. 그러나 처녀가 아이를 낳았으므로 남의 이목이 두려워 아이를 숲에 버렸는데 비둘기 떼가 아이를 보살피므로 신기하게 여겨 도로 데려다 문수사 지주에게 맡겨 기르도록 했다.그 후 장성한 도선은  중국에 가서 풍수지리를 공부하고 돌아와서 문수사터에 도갑사를  세웠다고 한다. 도선국사의 뒤를 이은 수미왕사와 연담선사, 허주선사, 초의선사 등 역대 고승대덕들이 주석하시면서 깨달음의 참다운 이치를 널리 펼치셨다. 해탈문(국보 제50호)과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문수 보현보살 사자 코끼리상(보물제1134호), 대형석조, 그리고 도선수미비 등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도갑사는 월출산 남쪽 도갑산(해발 376m)을 등지고 주지봉을 바라보는 넓은 산자락에 자리잡은 도량으로 신라말 헌강왕 6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재 고려시대의 기록은 자료 유실로 알려진 것이 없고 조선 이후의 발자취는 소상히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원의 중창은 1456년(세조2년) 수미(守眉)왕사에 의해서였다. 수미왕사는 왕실의 어명을 받들어 국가적 지원으로 966칸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세웠고, 부속 암자만 해도 상동암, 하동암, 남암, 서부도암, 동부도암, 미륵암, 비전암, 봉선암, 대적암, 상견암, 중견암, 하견암 등 12개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사원중창은 그 후로도 계속 진행되었는데 '억불숭유'의 열악한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대규모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도갑사가 불교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1653년(효종4년)에는 '도선수미비'와 '월출산도갑사석교 중창비'가 세워졌는데, 당시 영의정과 형조판서 등 국가의 지도급 인사들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도갑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 후로도 사원의 중수는 계속 이어져 1677년(숙종3년)에는 당간석주를 세웠고, 1682년에는 대형 석조(石槽)를 조성하였다. 18세기 중엽에는 연담 유일 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당시 불교사전이라 할 수 있는 '석전유해'를 편찬하였다. 그런데 19세기 이후의 연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유실되었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도 일제시대와 6.25전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 더구나 1977년 참배객들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웅보전과 안에 모셔져 있는 많은 성보들이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차츰 옛 가람의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1996년 주지로 부임한 범각(梵覺)스님에 의해 '도갑사 성보관'이 건립되는 등 유관기관의 역사적 검증을 거친 제8차 복원불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도갑사의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앞으로 도선국사의 재조명에 힘입어 새로운 불교문화의 성지로 자리잡아 나갈 것이다.


Ⅱ. 문화재


 새로 지은 일주문을 지나 숲길로 오르면 제일 먼저 순례자가 지나게 되는 것은 해탈문(국보 제50호)이다. 해탈문은 도갑사 입구에 사문으로서 경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돌기단위에 세운 소규모의 문이지만 그 구조가 기묘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옛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 한 칸씩에는 금강역사상이 안치되어 있다.

1473년(성종4년)에 중건된 이 건물은 단아하면서도 고졸한 단층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정면으로 길손을 맞이하는 방향을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왼쪽 길에서 직각으로 틀고 앉아 있어, 여느 절집의 가람 배치와는 사뭇 다른 첫인상을 주는 문이기도  하다. 계단 소맷돌에 새겨진 태극무늬에 눈길이  머물다가 문 안쪽으로 시선을 모으면, 안에 모셔진 금강역사상,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상, 사자를  탄 문수동자상의 작고 아기자기한 모습들이 여느 대가람과 다른 도갑사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앙증맞다고 한다면 불경스러운 표현이 될지 모르나, 크기가 아담한 이들 목각상들이 주는 단순한 이미지 그대로, 도갑사의 절 마당은 작고 소박하다. 아담한 고려시대 오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1호)과 새로 만든 석등을 앞세운 대웅보전이 가운데서 조용히 순례자를 맞고, 눈을 조금 돌리면 명부전과 요사채, 수미왕사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2호)가 각각 마당 한구석을 말없이 차지하고 있다. 오직 소리 내어 움직이는 것은 명부전 앞 커다란  통나무배  모양의 석조(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에 흐르는 물뿐, 절을 에워싼 대나무들과 마당 한켠의 고목 느티나무도 말없이 숨죽인 채 신사를 침묵의 세계로 인도한다.


저승 세계의 심판관들인 시왕이 봉안되어 있는 단촐한 명부전에서는 다른 무업보다 누군가를  쥐어박을 듯한 자세로 눈을 부라리고 있는 금강역상에 눈길이 오래도록  머문다. 적극적인 몸동작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근엄하게 앉아 있는 시왕들보다 좀더 자신의 잘못을 뒤돌아보고 겸허해지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대웅보전 한 켠에 있는 수미왕사비는 1629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1633년(인조 11년)에 세워진 비이다. 세조때의 승려인 수미왕사의 활동과 내력을 기록한 비로서 귀부와 비신, 이수가 모두 잘 남아있다.

절 마당을 벗어나 잘 자란 대나무 숲 사이로 난  작은 길을 오르면,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을 봉안하고 있는 미륵전에 닿는다. 석조여래좌상은 한 개의 돌에 불상을 조각하고 광배를 조각한 멋으로 전체 높이 3m, 불상 높이가 2.2m이다. 불상의 얼굴은 타원형으로 담담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항마인의 수인에 조각 수법은 전체적으로 둔한 편으로, 고려 말기의 불상 형식을 띠고 있다.

대나무들로 둘러싸인 산언덕 위에 자그마하게 있는 이 건물은 미륵불을 모셔야 할 전각 이름과 달리 석가여래가 모셔서있어 고래를 갸우뚱거리게 하지만, 대좌와 불신, 그리고 광배까지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불상이 의젓하게 앉아있다.


미륵전에서 내려와 산 쪽으로 난 길로 조금 가면, 왼편 펑퍼짐한 터에 도선수미비가있다. 이것은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와 중창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이 비는 높이가 무려 4.33m에 달한다. 비의 갓돌은 두 마리의 용이 동서를 향하여 머리를 쳐들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비신의 양측면 역시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대리석으로 된 비 아래에는 아주 크고 미끈한 거북이가 비석을 진 채 고개를 조금 틀어 절 쪽을 바라보고 있다. 멀리서는 비석의 웅장함에 놀라고 가까이서는 섬세하게 조각된 무늬에 놀라게 되는 이 비석이 완공된 것은 1653년(효종 4년)이었지만 만드는데 무려 17년의 세월이 걸린 조선시대 조각품이라 한다.



결론


어느덧 2학년에 접어들어 답사를 가게 되었다.

처음 가는 답사라 그런지 많이 부족하고 미숙하였던 것 같다. 일정이 바쁘다보니 시간에 쫓겨 구경을 잘 하지 못한 것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이번 답사는 나의 눈을 한번 더 크게 해 주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다음 답사 때에는 이런 미숙한 점을 보완하여 더 좋은 답사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