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이번이 이제3번째 답사였다.그동안 많은곳을 돌아 다녔지만 이번에는 가장친숙한 전라도 지방을 기행하였다.

개인적으로 참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 저번 충북답사때는 음식도 맞지않고 해서 이번답사는 다행이라는 생각이들었다.


많은곳을 돌아다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기억에 남는곳은 아무래도 발표주제를 맡았던 대흥사와 박물관과 청자도요지였다.

평소는 아니지만 도자기에 약간의 관심이 있어서 박물관을 돌아볼때는 시간가는줄 몰라서 모두들 빠져 나가고 난다음까지 있었던 기억이 난다.

흙하나로 그렇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도자기를 구워낼수있었다는게 참신기할뿐더러

청자도요지에서는 엣것을 다시살린다는 의미에서 예전의 방식을 그대로 재현해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큰감명을 받았다.

 *대흥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는 근대 이전 대둔사와 대흥사로 불리었다가 근대 이후 대흥사로 정착되었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암울했던 조선시대의 불교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존재는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게 한 최대 원동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흥사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도량이다. 서산대사의 구국 정신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지금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祀)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시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매년 지역 내의 여러 학생들은 이 곳에 모여 호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각종 행사에 참여해 오고 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상당 수 존재한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 4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 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 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 320호), 천불전(전남유형문화재 제 48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 52호), 서산대사 부도(전남유형문화재 제 57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 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 94호), 서산대사 유물(전남유형문화재 제 166호), 정조친필 서산대사화상당명(전남유형문화재 제 167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 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 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그 외 성보 문화유산이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 대흥사는 지금도 성불(成佛)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뭇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도량이다


대흥사가 유명해진데는 서산대사를 빼놓을수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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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가르쳤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결백이 밝혀져 선조의명으로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임금마저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73세의 휴정은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의 모든 승려들이 총궐기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스님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의승군은 휴정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게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왕이 환도한 후에는 늙었다는 핑계로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총섭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스님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라는 존호를 드렸다. 1604년(선조 37)에 세속 나이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니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웠고, 스님의 유촉에 따라 금란가사와 발우 등은 부도와 함게 대흥사에 봉안되어 오늘에 전한다. 서산대사의 제자는 1000여 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네 사람이 유명하여 서산 문하의 4대파라 일컫는다. 서산대사의 저술로는 선가에서 귀감으로 삼아야 할 말씀들을 모아서 간단한 주를 붙인 「선가귀감」과, 선과 교를 대비하여 풀이한 「선교석」, 선과 교의 차이를 간결하게 해설한 「선교결」, 수도생활에 필요한 주문을 모은 「운사단」, 시문을 모아 놓은 「청허당집」이 있다. 사실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유촉으로 그 유품을 보관하면서부터 조선 후기 불교계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서산대사를 모시는 표충사를 세움으로써 절은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임진왜란 때 구국의 승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서산대사에 의하여 조선시대의 불교는 다시 부흥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대흥사의 주요문화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大興寺 北彌勒庵 磨崖如來坐像)



 

  북미륵암 삼층석탑

(大興寺 北彌勒庵 三層石塔)

 


 

 탑산사 동종(塔山寺 銅鐘)


 

 

 


   응진전 앞 삼층석탑

(大興寺 應眞殿前 三層石塔)




*13대종사와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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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못가본곳이 많은데 다음답사는 강원도가 될것같다.

아쉽게도 다음이 마지막 답사가 될듯하다.

 이번답사때 제대로 보지못했던 것들을 더느끼고 더생각할수있었음 하는바램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