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학습 둘째날 첫번째로 방문한 무위사는 한적한 곳에 위치한 자그마하고 조용한 절로 삼국 통일 후 875년 헌강왕때에 도선국사가 갈옥사로 창건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 효공왕이후 선종인 가지산문계통의 선각국사 형미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바았다 조선시대 나라에서는 1407년 12월에 각처의 명찰로 자복사를 삼게 하였는데 이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고려후기의 천태종 백련결사 운동의 영향을 받아 선종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그 성격이 변하였다 1430년 세종12년에 국가적인 사업으로 극락전이 건립되었는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 삼존불과 후불벽화가 조성되었다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재생 의식으로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의 식인 수륙재를 행하는 수륙사로 무위사는 지정되었다. 죽은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는 곧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복수심까지 포용하려는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의식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절은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아 절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일도에 으뜸이었 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점차 법당과 요사가 훼손되어져 몇개의 전각만 남아 그흔적만 엿볼수 있다. 1678년 숙종4년에는 제사때 깃발을 꼽는 당간 지주가 극락전 앞마당에 제작되었다 당간지주는 굵은 돌로 튼튼하게 만들어져 절의 화제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1739년 영조15년에 해초 스님의 공덕으로 전각이 보수되었는데 당시 미타전. 천불전. 시왕전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절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극락전이 국보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해방이후 1956년에 극락전을 수리 보수하고 보존각을 새로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인했다 1975년에는 편광영 탑비와 사리탑 등에 대한 정화 불사에 이어 봉향각. 해탈문. 명부전. 천부전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1991년에 산신각을 짓고 1995년에는 이미있던 동쪽요사를 늘려 지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건립된 국보13호인 극락보전은 무위사 입구에서 맨처음 대하는 해탈문을 지나면 정면에 위치한다. 조선초기인 1430년에 건립된 건물로 정면3칸 측면3칸 주심포 맞배집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세워진 주심포 건축중에서 가장 발달된 구조형식을 지니고 있어 국보로 지정되었다 다듬돌과 거친돌을 바른층으로 쌓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배흘림을 한 원주로 세웠다 기둥위에는 삼출목의 공포를 올리고 있다. 가구구조는 이중량 구조로 되었으나 건물 측면을 보면 이중량으로 보이지 않고 두고 주위에 중종보단이 올려저 있다 건물의 전면에는 3칸 모두가 빗살무늬창을 달았으며 측면에는 정자살무늬창이 달려있다. 건물의 내부에는 기둥이 없는 공간이며 불단 위쪽에는 닷집모양의 보개천장을 올리고 단상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다 특히 불단 후면의 수월관음도 아미타극락희도 등의 탱화는 회화사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작품으로 국보급에 속하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극락전은 1955년 완전해체 수리되었는데 그때 벽화는 대부분이 건물에서 분리되어 1974년 신축된 벽화보존각에 전시되었으며 1979년 건물의 동서양벽에서 해체된 벽화도 추가로 난에 진열되어 있다 후불벽화를 그리기 위해 따로 세워진 벽면에 그려진 아미타불은 호화찬란한 고려불화의 영향과 조선초기의 새로운 수법이 표현된 걸작으로 국내에 현존하는 조선조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오래된 작품이다. 조선 성종 7년(1476)에 화원 대선사 해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는 온화한 색채나 신체의 표현 등 고려시대의 특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간결한 무늬나 본존불과 같은 크기의 기타 인물 표현 등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외에 6인의 나한 등이 새롭게 등장하여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배치되는 조선초기의 특징적인 중심구도(中心構圖)로, 고려불화의 2단구도와 뚜렷이 구별된다. 조선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키형광배를 지닌 아미타불은 삼산형의 머리에 정상계주가 표현된 알맞은 크기의 육계가 둥그스럼 하다. 둥글면서 약간 풍만한 듯한 얼굴과 이마, 알맞은 눈, 코, 입이 단엄하게 그려진 건장한 아미타불의 자세는 안정되고 당당하다. 역시 맺고 끊음이 분명한 유려하고 힘있는 필선(筆線)으로 결정지은 당당한 형태의 협시보살인데 대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배치된 점은 고려후기에 유행하던 지장신앙(地藏信仰)의 영향이거나 화기(畵記)에 명확히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라 쓰여 있듯이 수명장수(壽命長壽)의 뜻을 더 강조한 것 같다. 부드러운 붉은색과 부드러운 녹색을 주조(主調)로 한 밝은 채색, 옷 문양이나 사각대좌(四角臺座) 등에서 보이는 간략화된 영락장식이 화려하고 섬세하다. 단아한 형태, 밝은 채색, 구불구불한 을 사용한 주름선, 의법, 장식 등은 고려불화의 영향인 반면 중심구도라든가 키형광배, 정상계주 등 세부(細部)에서 조선시대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다. 아미타불 후불벽화의 뒷면 그림인 하얀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씌어져 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동측 내벽 중앙에 그려진 벽화인 삼존불화는 가로로 긴 화면 가운데에 설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협시보살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삼존불 사이와 주위로는 합장한 채 본존을 향하고 있는 입상의 두 보살상과 6비구를 배치하였으며, 멀리 뒤로는 마치 기암의 월출산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암산을 그려 넣었다. 비교적 활달한 필치에 적황색의 색조, 당당한 체구의 인물 형태 등에서 고려 색채가 어느 정도 엿보이긴 하지만, 사각형의 얼굴과 연꽃대좌의 형식적인 꽃잎 표현 등 조선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본존불의 낮은 육계와 정상계주, 고식(古式)의 눈ㆍ코ㆍ입 표현, 다소 위로 올라간 왼손, 회화성이 돋보이는 자연스러운 옷주름 처리 등은 이 삼존불도를 후불벽화와 거의 같은 시기의 그림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요소들이라 할 수 있겠다. 동벽(東壁)의 설법도는 중앙의 본존과 좌우협시보살이 동일선상에 위치하고 그들 사이로 2보살과 6명의 성문중(聖聞衆)이 작게 배치된 횡적(橫的)인 구도로서 일반적인 탱화에서 보이던 상하단이 구별되는 구도와는 다른 면모를 이루로 있다. 이러한 점은 벽면의 모양에 따르는 변모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