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화엄성지 화엄사




본문


            <화엄사 각황전>


화엄사는 넓디넓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지리산국립공원의 관문이라 할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구례는 지리산이 양 어깨를 펴 포근하게 감싸고 수정같이 맑은 섬진강이 흐르는 퍽 기름진 땅이다.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신라와 백제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왜구의 침입 또한 잦았으며, 지리산의 여느 곳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컸다. 석주관․피아골․화엄사․천은사․연곡사 등에 전쟁의 흔적이 뚜렷하다. 본래 백제의 구차례현1)이었던 구례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현재의 이름으로 고쳐져 곡성군에 속한 현이 되었으며, 고려 초에는 남원부에, 그 후 1895년 구례군이 되었고, 1897년 전북에서 전남으로 편입되었다.


 화엄사는 노고단으로 오르는 지름길이 나 있는 초입이라 언제나 만원이다. 들목에는 여관과 기념품가게들이 밀집하여 집단시설지구를 이루고 있지만, 일단 긴 계곡길을 따라 화엄사로 들어서면 경내의 장엄함이 초입의 분주함을 말끔히 씻어준다.

그럼 여기서 화엄사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자.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인도 승려 연기가 세웠다는 화엄사는 선덕여왕 11년(642) 자장이 중창했다. 장륙전(현재 각황전)과 화엄석경2)을 의상이 만들었다 등등 여러 가지 창건설이 있었으며 1979년 발견된 『신라화엄경사경』(新羅華嚴經寫經)에 의해 8세기 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황룡사 소속의 화엄학 승려였던 연기에 의해 창건된 절임이 명확히 밝혀졌다. 670년(신라 문무왕 10)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10찰(華嚴十刹)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이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공양한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2호인 석등(石燈),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이 있으며, 보물 제132호인 동오층석탑(東五層石塔), 보물 제133호인 서오층석탑, 보물 제300호인 원통전전 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구층암(九層庵)․금정암(金井庵)․지장암(地藏庵)이 있다. 억불정책을 썼던 조선시대에도 성황을 이루었으며, 숙종 28년(1702)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둘렀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도 7년만인 인조 8년(1630)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에 의해 중수되어 선종 대가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이때 비로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후 부분적인 중수가 있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화엄사에 들어서면 첫 번째로 일주문부터 시작하여,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까지 직선형으로 건물들이 조금씩 비껴서 있다. 그럼 간단하게 산문에 대해서 알아보고 계속해서 절의 내부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일주문은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불리는데 흔히 지붕을 얹은 일반 건축물이라면 네 개의 기둥을 사방에 세우고 지붕을 얹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일주문만은 사방이 아닌 일직선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양식을 보이게 된다. 그것은 일심(一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부산히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이런 심오한 의미를 지닌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이 나온다. 금강문 양쪽으로 금강역사가 모셔져 있다.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이며 대체로 불탑(佛塔)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담당하며, 인왕역사(仁王力士)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온갖 비밀스런 사적(事蹟)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5백의 야차신을 거느리면서 현겁(賢劫) 천불(千佛)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보통 사찰 문의 왼쪽에는 밀적금강(密蹟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서 있게 된다. 우리 나라 금강역사상의 특징은 중국 및 일본과는 달리 무섭다기보다는 악의(惡意)가 없는 순진성을 읽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무서운 모습을 취하여 악귀를 쫓아내겠다는 의미보다는 그 순진성으로 수미산을 올라온 지친 구도자에게 더한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고 함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천왕문과 금강문을 세운 까닭은 사찰을 외호하고 악귀등을 내쫓아 사찰을 청정도량으로 만들려는 데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찰을 찾는 사람들의 방일한 마음을 엄숙하게 만들고, 또 이 수호신이 지키는 사찰을 모든 악귀가 범접하지 못하는 청정한 장소라는 신성관념(神聖觀念)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사천왕은 청정도량으로서의 사찰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수행자의 마음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제거하여 다시 일심 정진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거기에 서 있는 것이다. 단지 사찰을 청정도량으로 지키고 악귀를 내쫓기 위해서라면 사천왕이나 금강역사보다 더 힘이 강하고 법력이 깊은 사찰 안의 부처님이나 보살들로 족할 것이다. 그리고 일체중생을 남김없이 모두 제도하겠다는 부처님의 도량일진대, 어찌 악귀나 사심있는 자의 침범을 두려워하겠는가. 실로 수미산 중턱까지 오른 그 장한 구도자에게 포기함이 없이 끝까지 오를 것을 격려하기 위하여 금강역사와 사천왕은 그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사 사사자석탑>



 이 영역을 지나고 나면 보제루가 나타난다. 이곳은 승려와 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보제루를 돌아서면, 정면에 대웅전, 왼쪽에는 각황전이 있다. 이 두 건물은 화엄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영역이라 말할 수 있다. 대웅전 앞에는 두 개의 오층석탑이 있는다. 이 두 개의 오층석탑도 중요하지만 화엄사의 하이라이트인 각황전 뒤쪽으로 나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있는 사사자삼층석탑을 보기 위해 일단은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조교언니와 함께 계단을 올랐는데 108개라는 소리를 듣고선 우리는 하나씩 세면서 걸어올랐다.

 

다보탑과 같은 시기에 건조된 특수형 석탑으로 다보탑에 비할 만큼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이 곧 화엄사 4사자 3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상층 기단에 돌사자 4마리를 각 모서리에 배치하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인데 신라시대 사자탑으로는 유일하며 그 작품이 뛰어나서 다보탑과 함께 한국 이형 석탑의 쌍벽으로 이루고 있다. 이 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수 양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데

 

<효대>

첫째는 상층 기단의 구조에 있어서 판석으로 이루어진 면석을 조립한 것과는 달리 4마리의 사자를 배치함으로써 각 면의 양 우주와 탱주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사자상을 일반형 석탑의 부재에 사용한 예는 이 석탑이 최초라 하겠으며 이후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여러 기가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시작을 바로 이 석탑에 둘 수 있다. 사자를 불교적인 여러 조형 미술품에서 표면 장식과 주요 부분 구성에 이용하는 등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사자는 불교에서 연화와 함께 상징적인 존재로 불상의 길상(吉相)중에도 ‘상신사자상(上身獅子像)’‘사자협상(獅子頰相)’등이 있고 문수보살의 대좌로 사자좌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와 사자와의 관련을 밀접시키는 뜻은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는 관념에서 여래의 위치에 비유한 데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불신(佛身)조성에 사자의 용맹한 기상을 적용시켜 소위 왕자의 기풍을 지닌 사자의 위엄을 표현하고자 이용하였던 것이다.


 둘째는 하층 기단 면석의 각면에 여러 종류의 천인상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조각하고 초층 탑신에도 각 면에 문비를 모각한 좌우에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을 양각하여 장엄을 다하였다. 이러한 여러 조각은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의 정형에서는 볼 수 없는 이후 전형에서 장식적으로 변한 특수형 석탑에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고려시대에까지 계승되어 오늘날 많은 유래를 보고 있다.

 

특히 사자상의 표정이 다들 달랐고, 이것은 인간의 감정인 희노애락을 표현한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왔기에 더욱 와닿았다. 특이한 점은 그 앞에 효대라고 해서 탑을 공양하는 듯한 인물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 인물상은 화엄사를 창건했다는 연기조사라고 하고, 사사자삼층석탑의 스님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한다.

석탑을 보고 내려와 각황전 앞에 섰다. 각황전은 각황전은 현존하는 우리 나라 불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이 각황전의 규모와 웅장함 때문에 대웅전은 조금 위축되어 보인다. 그 앞의 석등은 세계에서도 가장 큰 석등인데 뒤쪽에 있는 각황전과 좋은 짝이 되어 우뚝 서 있다. 각황전에서 내려와 석조에서 물을 떠서 목을 축이고 대웅전을 보고 화엄사와 이별을 해야 했다.



가람배치

화엄사의 가람배치는 화엄법계의 연화장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보통의 사찰은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직선상으로 되어 있지만 화엄사는 불이문ㆍ금강문천왕문이 태극의 형상을 이루고 있으며, 보제루ㆍ운고각으로부터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또하나의 태극형상을 이루고 있다.

첫 번째의 태극은 세간법을 비유한 것이며, 두 번째의 태극은 출세간법을 비유한 것이다.

화엄사의 경관은 변화가 있는 가운데 조화를 이룬 훌륭하고 특이한 공간미학을 지니고 있다.















사학과에 오면 답사를 간다는 선배들의 말에 답사를 가면 어떨까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답사를 가게되니 기대이상으로 너무 좋았다. 사찰들을 둘러보면서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풍광과 선조들이 남긴 유산을 보면서 이번 첫 답사는 아름답게 보낸 것 같다. 시간을 체크하면서 다녀서 이곳저곳 머리에 기억이 생생하다. 산줄기 강의실 밖에서 직접적으로 유물과 유적을 보면서 옛 선조들의 숨결과 혼을 느낄 수 있었다. 현대에도 어려운 기술로 그 당시에 건축을 짓고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화엄사는 웅장하면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스님께서 직접 설명해주신 사사자삼층석탑이 제일 기억에 남고 그 앞에서 마지막까지 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게 해주신 교수님께 너무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마지막 답사코스여서 그랬는지 조금은 서운하고 내려가는 길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사진을 보고 있는데 정말 뜻깊고 역사를 기행한 것 같아서 내가 자랑스럽다. 다음 답사때에도 이렇게 많은 것을 공부하고 많은 것을 배워서 나를 역사인으로 만들고 싶다.


1) 전라남도 구례군의 백제 때 행정구역.


2) 신라시대에 명필 김생(金生)이 쓴 글씨를 새긴 것으로 전하는 판석(板石)의 화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