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는 이루 말할수 없는 유적이 많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때론 우리는 우리 주변의 것을 소홀히 여기기 쉽다.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점에서 이번 답사는 내가 그동안 소홀히 여겼던 것들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답사는 3월 23일부터 25일까지 2박 3일의 일정으로 다녀왔다. 길면길고 짧다면 짧은 이번 답사에서 정말 많은곳을 다녔다. 그 중에 네마리의 사자상이 탑을 받치고 있는 화엄사와 서산대사 부도가 있는 대흥사 그리고 쌍계사가 기억에 남는다. 그 웅장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것 같다.  이번 답사를 가기전에 나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런것들에 대한 약간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계기로 그동안의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위에 말한 세 사찰 이외에도 많은 곳을 다녔는데 모든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고 평생 잊혀지지 않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감명을 준 것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애환이 서려 있는 다산초당이다

다산초당에 가기 위해 우리는 대흥사를 보고 버스를 탔다. 그리고 다산초당이 있는 귤동마을에 도착하였다.

귤동마을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 유산기에도 나왔는데 눈으로 확인할수 있어서 색다른 느낌이었다. 책에서 옛 귤동마을을 보았는데 정말 많이 바뀐것을 확인할수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란 그 누구도 어떻게 하지 못하나 보다. 귤동마을을 지나 우리는 초당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초당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하지만 주위에 빽빽하게 서있는 나무들로 인해서 이런 노고는 잊혀지는 듯 했다. (아마 그곳의 자연이 너무나 빼어나기 때문인 듯하다) 나무들의 푸르름이란 그 옛날 선생의 청렴함을 말하는 듯 했다. 조금 후에 우리는 초당에 당도할수 있었다. 이곳이 정약용 선생의 채취가 묻어있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득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면 선생이 살았던 자취를 더 확실히 확인할수 있었을 텐데....... 한편으로 초당이 이런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니 이걸 건립한 사람의 노고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상도 못할 것 같다.(지금의 것이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험준한 곳에 이런 아름다운 집을 지을수 있다니.......)

 그렇다면 실학을 집대성하고 우리 나라 역사에 많은 공헌을 한 정약용선생은 왜 이곳으로 유배를 온 것일까??

 정약용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와의 사이에 약현, 약전, 약종 다음인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호는 삼미․다산․사암․자하도인․태수․문암일인 등이고 당호는 여유당이다.

마재는 남인이 많이 살아 정약용 역시 학문적,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는 특히 성호 이익을 따라 실학을 추구했다. 그가 일생을 실사구시 학문에 힘쓰게 된 것은 경기도 암행어사를 지내며 어려운 살림에 고초를 겪는 백성과, 가난한 백성을 곤경에 몰아넣는 관리들을 직접 보게 되면서. 정약용은 학문을 실생활과 연관시키는 한편, 실학의 학문적 입장을 정리하는데 힘썼다. 

그는 서학과 청대의 고증학까지 수영하여 학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기존의 유학에서 독립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의 학문을 '다산학'이라고도 하며 '실학을 집대성했다'고 그를 평가하는 것은 이런 업적에서 나온 것이다.

정약용과 떼내어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정조이다. 10년 차의 나이지만 두 사람은 군신이면서 사제, 학문적 정치적 동지였다. 정약용이 정조의 의지를 읽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헌신을 한 것처럼, 정조 역시 정약용이 '서학쟁이'란 비난을 들으며 정적들에게 위협을 당할 때도 그를 지켜주었으며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후원해주었다

오늘날 정약용이 과학기술에서 특히 남다른 업적을 남긴 데는 정조의 힘이 컸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수원에 성을 만들어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하고, 정약용으로 하여금 성곽을 설계하도록 맡겼다. 정약용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에 가기 이해 한강을 건널 때 배와 널빤지를 이용한 배다리를 만들어 수백명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정약용은 벽돌과 성벽 중간부분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등 기존에 볼 수 없던 방법을 이용해 성곽을 만들었다. 또한 기중기를 설계하여 비용과 인력 낭비가 없도록 하여 혁신적인 방법으로 성을 축조했다. 화성은 물을 다스리는 치수와 성의 본분인 방어 시설을 잘 갖춰 과학적인 설계를 하여 '성곽의 꽃'으로 꼽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조는 당쟁을 없애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순의 하나로 화성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화성으로 수도를 천도할 계획도 염두에 두고있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기득권을 가져온 양반 세력을 약화시키고 새 땅에 새 포부를 실천시키려는 열망에서였다. 그러나 48세의 아직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니, 정조의 사후 어린 순조를 대신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외척이 득세하고, 개혁은 물거품이 됐다. 정약용 역시 정조가 죽자마자 유배당하게 됐다.

 학문을 사랑하고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인재를 골고루 기용해서 쓸 줄 알았던 정조가1800년 6월 28일 뜻밖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 이후로 정조가 그 학문의 깊이로 인해 마음으로 깊이 아끼던 정약용의 삶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하였다.

당시 끊임없는 당쟁으로 시파와 벽파의 싸움이 계속되었고 서양사상과 함께 전래된 천주교까지 민간에 파고들어 세력을 키울 때에 사학죄인으로 몰리던 다산의 집안에도 무거운 근심의 그늘이 쌓여 있었다. 승지를 지내고 병조참의를 지내면서 재상의 벼슬이 눈앞에 있던 다산, 천주교도라는 모함에 휩싸여 편안하던 날은 다 지나가고 시련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님을 자초지종 상세히 토로한 장문의 상소를 올려 임금까지도 통쾌하게 사실을 파악하여 목민관으로 나가 훌륭한 치적을 올리고 돌아왔건만, 시기하고 모함하던 다산의 반대파들은 그냥 두지를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라에서 그렇게 심하게 금령을 내리고 탄압을 했지만, 자형 이승훈과 바로 손위 형님인 정약종 등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화란이 닥쳐옴도 모르고 천주교를 전도하고 호교론을 펴면서 폐족으로의 길만 걷고 있었다. 그러던 무렵 다산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주며 가장 큰 보호막이던 일세의 영특한 임금 정조대왕이 뜻밖에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정조의 위세로 약간은 점잖던 벽파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진보적인 학자들까지 모두 천주교 신자, 즉 사학죄인으로 모함하여 죽이고 말겠다는 듯 기세 당당히 판을 벌이고 있었다. 정조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화란이 일어나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이기양,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등이 모두 감옥에 갇히고, 끝내는 대부분 목을 베이고 약전, 약용은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천리타향인 전라도의 흑산도와 강진군으로 기약없는 유배살이를 떠나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때는 1801년 신유년 봄, 음력 2월 28일 만물이 소생의 기운으로 들녘이 푸릇푸릇 생기를 돋우워 갈 무렵이었다. 

사학(천주교)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신유사옥에 연루된 다산은 이로 인한 계형 약종의 참형을 가슴으로 쓸어내리며 경상도 장기로 떠나게 된다. 같은 이유로 중형인 손암 약전도 전라도 신지도로 떠나갔다. 거기서 봄.여름. 가을을 다 보낸 10월 20일 밤, 황사영의 백서사건(천주교인 황사영이 신유사옥의 내용을 북경에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비밀히 알리려던 사건-황사영은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으로 인해 또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올라온다.

 일련의 이러한 사건들은 겉으로는 천주교와 관련된 종교사건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벽파가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계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었던 만큼 그들의 생명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혐의가 없는 다산 형제를 어떻게 죽일 수 있었겠는가. 

무혐의로 감옥에서 풀려난 두 형제가 또 다시 오랏줄에 묶이어 다산은 강진으로, 손암은 흑산도로 떠나던 날이 그 해 11월 5일이다. 형제는 나란히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나주읍에서 북쪽으로 5리 지점에 있던 율정점까지 와야했다. 그곳에서 잠을 자고 나면 각자의 귀양지로 떠나야 한다. 강진은 나주에서 남쪽으로, 흑산도는 서쪽으로 가야만 한다.  오랏줄을 풀고서 헤어지던 날은 11월 22일 이었다.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데 형제는 어떻게 눈물을 참을 수 있었으랴....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두 사람 말을 잃어

억지로 말 꺼내니 목이 메고 오열 터지네.  <율정별(栗亭別)>


정약용이 다시는 만나지 못할 형님에 대한 애절한 이별의 슬픔이 느껴진다.

그들은 이렇게 헤어져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다산은 눈보라치는 북풍을 안고 영산강을 건너고 월출산을 넘어 귀양지 강진에 도착한다. 역적에 다름없는 국사범이던 탓으로 행여 말이라도 걸거나 눈으로 보기만 해도 큰 전염병에라도 걸릴 듯, 거들떠보거나 말을 붙이기도 꺼려하였으며, 누구 하나 쉽사리 숙소를 내주는 이 없었으니 더군다나 추운 겨울 다산의 마음을 더욱 시리게 하였을 것이다. 다행히도 가난한 주막집의 노파가 따뜻한 인정으로 뒷방 하나를 내주어 겨우 잠자리를 하나 얻게 되었다.....

방에 들어가면서부터 문을 닫고 밤낮으로 외롭게 혼자 살아가자 누구하나 말 걸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기뻐서 혼자 좋아하기를 "나는 겨를을 얻었구나" 하면서, <<사상례>>3편과 <<상복>>1편 및 그 주석을 꺼내다가 정밀하게 연구하고 구극까지 탐색하며 침식을 잊었다....

 정약용은 그 오막살이 주막의 뒷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지극히 선비다운 당호를 붙이고 만 4년을 지냈다. 사의재란 생각, 용모, 언어, 동작의 네 가지를 의로써 규제하여 마땅하게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이다.

 사의재(四宜齋)란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며 살아가던 방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바로 엄숙함이 엉기도록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도록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후중하게 해야 하니 후중하지 못하면 곧바로 더디게 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때문에 그 방의 이름을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四宜之齋)이라고 하였다. 마땅함이라고 하는 것은 의에 맞도록 하는 것이니 의로 규제함이다. 나이만 들어가는 것이 염려되고 뜻을 둔 사업은 퇴폐됨을 서글프게 여기므로 자신을 성찰하려는 까닭에서 지은 이름이다. 때는 가경 (嘉慶)8년(1803) 11월 10일 동짓날....

귀양온지 3년째인 갑자년(1804년) 10월에는 <<상례사전>>이라는 방대한 <<예기>> 연구서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전해(1803년) 봄부터 연구하기 시작하여 동짓날인 11월 10일부터 본격적으로 저술을 시작하여 갑자년 겨울에는 <<주역>> 연구서의 초고인 '갑자본'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사의재는 다산의 많은 경전연구 중에서도 가장 득의의 연구로 자부했던 <<상례>>와 <<주역>>연구의 산실임에 분명하다. 다산은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여 그 어렵던 시절에 그런 연구를 이룩해내었던 것이다.

 다산은 줄곧 사의재에 파묻혀 지내며 학문연구에 골몰할 뿐이었는데 다행히 그 시절에 강진에서 멀잖은 고금도에 귀양와 있다가 풀려서 서울로 돌아간 친구 '김이재'가 다산에 대하여 충분한 설명을 해주었던 탓으로 다산에 대한 경계의 눈빛이 다소 풀렸다고 한다. 그래서 예부터 알고 지내던 향촌의 윤씨 일가와 왕래하기 시작하였고, 읍내 이속들의 자제들이 글을 배우러와 훈장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다산은 이곳 사의재에서 불철주야 학문을 연구하고 철학적 논리를 세워가는 한편, 때때로 농어촌 강진 풍물을 시로 읊으며 가난하고 궁핍한 18세기 후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듯 묘사했다. <<아학훈편의>>라는 2천자로 된 아동용 교과서를 편찬하여 천민의 자식들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달픈 모습에 한없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격과 율에 까다로운 중국시에서 벗어나 우리 감정과 우리 숨결에 맞는 '조선시'를 지어서 다산답게 높새바람(高鳥風), 마파람(馬兒風),밥모, 돈모, 바깥양반, 뇌물등 수없이 많은 전라도 토속어를 시어로 활용하면서 우리말과 우리풍토를 사랑하였다.  

 1805년 강진읍의 뒷산 보은산방(현 고성사)으로 거처를 옮긴 다산은 이곳에서 당대의 유명한 승려인 혜장(1772~1811)과 만나게 되고 이 유교와 불교의 학문적 만남은 후에 다산이 『大芚寺誌(대둔사지)』․『萬德寺詩(만덕사시)』등 불교관계의 저술을 남기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주로 주역을 연구했다.

 고성사는 바로 보은산방, 다산의 <<주역>> 연구서가 저작된 산실의 하나이고, 아들에게 <<상례>>와 <<주역>>을 가르치던 서당이기도 했다. 우두봉은 그리운 손암 형님을 사모하여 한없이 눈물을 흘리던 산봉우리이다. 보은산, 우두봉, 우이산, 북산, 형제봉 등의 이름을 지닌 강진읍의 뒷산은, 다산이 8년 동안 강진읍에 머물던 시절에 가끔 올라가 답답한 마음을 풀고, 보고 싶은 중형 손암 선생을 그리워하던 곳이다. 다산보다 네 살 위인 손암은 학문과 덕행으로 다산이 언제나 선생님으로 모시던 형제지기의 기막힌 사이였다. 귀양올 때에 율정점에서 헤어진 뒤, 만날 길이 없던 두 형제는 서로 그리워하다 지칠 지경, 우연히 동명의 섬과 산 이름이 울컥 형님 생각을 간절하게 해주어 다산이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던 곳이 바로 여기이다.

 절정에 오르고 나서 서쪽을 바라보니 바다와 산이 얽혀 있과 안개와 구름이 꺼졌다 솟으며 나주의 여러 섬들이 역력하게 눈 앞에 있었다. 다만 어떤 것이 형님이 계시는 우이섬인가를 가리지 못했다. 이날 중 한 사람이 따라왔는데, 그 중이 말하기를, "보은산의 다른 이름은 우이산이고, 절정의 두 봉우리는 형제봉이라고도 합니다" 라고 하였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형님이 계신 곳과 내가 있는 곳 두 곳 이름이 우이이고, 봉우리 이름 또한 형제봉이라니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슬퍼만지고 산에 오른 기쁨이라고는 없어져버렸다. 돌아와서 시를 지었다.


나주의 바다와 강진 사이 200리

험준한 우이산을 두 곳에 만들었네

3년 동안 묻혀 살며 풍토를 익혔으나

흑산도의 이름이 여기 있음 몰랐네

인간의 안력이야 애쓴들 멀리 못 봐

백 보만 멀어져도 눈앞이 희미해라

더구나 흙비 구름 끼어 술빛처럼 짙으니

눈 앞의 섬들이야 더욱 구별 어렵구나

손에 준 옥돌 신표 바라본들 무엇하랴

괴로운 마음 쓰린 창자를 남들은 모른다네

꿈속에서 서로 본 듯 안개 속 바라보니

눈물만 흐르고 천지는 어둑해라

 <구일등보은산절정망우이도(九日登寶恩山絶頂望牛耳島)>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학문에 열정을 펼치던  다산은 1808년 (순조 8) 봄에 해남윤씨들에 의해  茶山草堂(다산초당)으로 옮겨 생활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유배가 풀릴때까지 머무는 동안 (1808~1818.9) 18제자와 강론 (講論) 및 본격적인 학문탐구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등 500여 권의 저술활동이 이루어져 조선 실학사상의 산실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내가 감히 범접도 못하는 정약용 선생이 이곳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초당에 당도하면  약간 좁은 평지가 나오고 정면에 초당이 있다.  다산초당(茶山草堂, 14.3평)은 남향으로 앉혀져 있고, 초당 건물의 서측, 한 단 낮은 곳에는 서암(西庵, 8평)이 남동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동암(東庵, 8평)은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남동쪽으로 약 35m가량 떨어진 곳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다시 조그마한 언덕을 사이에 두고 약 30m되는 지점에는 남동향을 하고 있는 천일각(天一閣)이 있다.


 다산초당(茶山草堂) 은 1930년대 이후에 멸실된 것을 제1차 복원사업 때 복원한 건물이다. 정약용이 거주할 당시에는 초막(草幕)이었으나, 관리상의 문제로 기와지붕을 얹었다. 전후와 좌우로 퇴(退)를 둔 정면 3간, 측면 1간의 팔작집이다. 평면구성은 중앙과 서측으로 2간의 대청을 들이고 동쪽으로는 1간의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좌우측과 전퇴(前退)에는 모두 툇마루를 시설하였다. 막돌 허튼층 형식의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으며 기둥 위로는 주두없이 창방을 걸었다. 창방과 주심도리의 장여사이로는 소루(小累)를 끼웠으며 보머리 밑으로는 포작(包作)없이 보아지만 끼웠다. 가구(架構)는 2고주(高柱) 5량가(梁架)로 전면의 주심도리(柱心道里)만 굴도리이고 나머지는 납도리로 되어 있다. 비록 복원되었지만 자연과 조화된 초당은 그야말로 신선의 삶을 연상하게끔 하는것 같았다.  선생이 이런 곳에서 있었다니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선생은 싫었겠지만!!) 이 삭막한 시대에 이런 자연과 동화되는 곳이 몇 군데나 있는지 잠시 추이해 본다. 있기는 하겠지만 이런곳도 없을것 같다. 초당을 보고 눈을 돌리면 초당을 중심으로하여 왼쪽으로 동암이 있는데 동암(東庵)도 역시 정약용이 거처하던 시절에는 초막(草幕)이었다 한다.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여권의 책을 집대성한 곳으로 일명 송풍암(松風庵)이라도 하는데, 이는 동암 근처에 소나무들이 무성하여 솔바람이 불어오는 암자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허물어져 없어진 것을 제1차 복원사업 때는 석축 공사를 실시하고, 제2차 복원사업 때 완전복원 하였다. 정면 3간, 측면 1간 반의 맞배지붕 납도리집으로 전면 반간은 툇마루를 놓은 퇴간(退間)이다. 중앙간에만 우물마루를 깔았고 그 양측으로는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구조는 낮은 막돌허튼쌓기 형식의 기단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운 일고주(一高柱) 5량(梁) 형식이다. 초당도 그렇지만 동암도 상당히 아기자기한 것을 느낄수 있었다. 이 곳에서 선생의 학문이 완성됐다니 한편으로는 놀랍고 정말 존경스럽지 않을수 없었다. 과연 그 시절 나였으면 어떻게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면서 조금씩 초라해 지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서암(西庵) 또한 정약용의 유배 당시에는 초막이었으며, 윤종기, 윤종벽, 윤종상, 윤종신 등 18명의 제자들이 거처한 곳이다.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허물어져 없어진 것을 1975년 제2차 복원사업때 건립하였다. 정면 3간, 측면 1간 반의 맞배집으로 구조는 동암과 같고 다만, 평면형식에서 차이가 보인다. 중앙에 미닫이문을 설치한 2칸 방을 들이고 그 전면으로는 툇마루를 시설하였으며, 그 옆으로는 전퇴(前退)를 포함하여 부엌을 배치하였다.

초당은 이렇게 네채로 구성되어 있다. 

초당에는 다산초당 동암에는 다산동암 서암에는 보정산방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다산 초당의 이 글씨는 다산 선생의 글씨는 집자한 것으로 선생의 올곧은 학식의 견해가 묻어난다 그리고 보정산방은 추사 김정희의 중년 글씨로 약간은 어린아이가 쓴 듯한 느낌이 든다. 솔직히 나도 저 정도는 쓸수있을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다 생각뿐이고 어찌 추사와 나를 비교하겠는가.....

초당을 보고 오른쪽 산기슭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천일각이 나오는데 천일각이 앉혀진 자리는 원래 '동(東)재'하 하여 과거엔 잔디밭이 있는 평평한 평지로 사람들이 이 산을 넘다 쉬어가거나, 정약용이 형 약전(若銓)을 그리며 앉아있곤 하던 곳이라 한다. 그러나 이 평평한 곳에 1975년 2차 복원과정중 '천일각'이라는 누각을 앉히게 되어 지금은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천일각에서 바라본 구강포의 풍경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그 어떤 조각가라도 이런 아름다운 조각은 할수 없으리라......


다산초당에는 선생이 직접 글씨를 쓰고 마련한 다산 사경이 있다. 그것은 정석 다조 연지석가산 약천이다 그 중에 정석과 다조는 지금도 선생의 채취를 맡을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할수있다 나머지는 애석하게도 복원된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세월의 풍파를 이길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은것을.........

다조 

다산이 직접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이던 곳이어서 '다조(차부뚜막)'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원래 '다조'는 다인(茶人)들이 흔히 사용한 기구로 풍로에 굴뚝이 달리거나 굴뚝 구멍이 있어 차에 연기나 나무냄새가 배이지 않게 한 독특한 구조를 가진 화덕이다. 옛날에는 추녀밑에서 흔히 차를 끓였는데, 당시에는 연료가 숯이나 나무 등이었으므로 연기나 가스때문에 보통 바깥에서 불을 피워 차를 끓였다. 따라서, 차를 마시는 방과 제일 가까운 밖에서 끓이면, 방문을 열었을 때 찻물 끓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앉은 자리에서 탕관도 들여올 수도 있어 편리했을 것이다. 다조는 일단 보기에는 약간 평평한 바위같다 하지만 이 것이 선생의 채취를 맡을수 있는 유일한 것중에 하나라니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다.

 약천

정약용이 직접 발견한 샘으로 물맛이 좋아 사경(四景)의 하나로 손꼽은 듯 하다. 현재는 다산초당원 서북쪽 모퉁이에 있으며, 예전의 위치와 같은지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지만 「약천」의 주(註)에서 '정자의 서북쪽에 있다(藥泉在池亭西北)'는 것으로 보아, 현재 '약천'이라 불리는 곳과 거의 유사한 지점에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정석

다산초당원 서북쪽에 있는 바위에 정약용이 해서(楷書)로 쓴 글자를 가르킨다. 정원에 있어 암각의 행위는 회화에서의 낙관(落款)으로 비유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행위는 정원의 소유주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고 글자 자체에서 자신이 품고 있는 정원에 대한 의미를 함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정약용은 이 글씨를 써넣음으로 해서 이 곳의 주인이 자기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연지석가산

연(蓮)이 자라고 있다던 연지석가산은 지금의 다산초당의 동쪽에 4.6m×9.6m의 규모로 방형(方形)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 못안에는 원도(圓島)가 있다. 세 봉우리의 석가산을 나타내기 위해 돌을 쌓아놓았으나 그 모양은 그리 아름답지 못한 상태이다. 또, 못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대나무 홈통을 이용하여 못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있지만, 이것 또한 비류폭포라 하기에는 그 규모가 상당히 외소하며 정약용이 만든 당시의 모양과는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못은 집앞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외의 곳에 설치하는 것은 피하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못의 위치는 건물의 툇마루나 대청마루에 앉아 있을 경우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일반적인 사항이다. 결국, 현재 다산초당 건물의 동쪽에 있는 연못의 위치는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못의 모양은 원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산림경제』에서도 정약용은 '원지(圓池)' 형태의 못을 권장하고 있으며, 「사경첩」에 있는 '연지석가산'의 시에서도 "산 샘물울 끌어다 빙둘러만든 연못(引山泉環作沼)"이라 하여 당시에 있었던 연못을 원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현재 다산초당원에 있는 방지형의 못의 형태는 잘못 복원된 것이다.


답사를 다녀와서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우리것에 대하여 무지 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절의 가람배치라든가 ,역사 그 속에 담겨있는 조상들의 지혜와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한것들........정말 나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었다.

 답사를 준비 하고 또 내가 발표한 다산초당에 대해 공부 하면서 지금까지 내가 몰랐던 것을 알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답사에서 모든것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일정이 너무 빡빡하게 짜여져 있어서 어떻게 보면 건물의 겉모습만 본 것이 아닌가?? 한다. 좀더 시간이 많았더라면 그 곳의 하나하나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