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란 실제로 경험하고 느끼는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 답사가 나에겐 소중한 경험이었고 감동이었다. 전라남도 일대를 돌면서 내가 모르던 새로운 것들을 접했을 때의 그 느낌이란 아무리 전문적인 책이나 자료라 할지라도 이보단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특히나 국보라는 귀중한 것들을 내 손에 직접 어루만질 때의 느낌은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도갑사의 해탈문, 쌍계사의 진감선사대공탑비, 연곡사의 북부도 등은 나에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런 감탄과 함께 나의 무지에 대한 반성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많은 교훈을 가진 문화재가 내 주변에 있는 사실조차 모른채 문헌에 의지하던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도 갖게 해 줌과 동시에 앞으로 내가 역사 속에서 얻어야할 것들이 무엇인지도 알게 해주었다는 것이 이번 답사의 또 하나의 수확이었다.. 나는 이번 답사에서 낙안읍성에 대해 발표했고 준비과정속에서 또 하나의 지식과 견문을 얻었다.



낙안축성 이야기

 낙안읍성은 조선조 태조 6년 낙안 출신 의병장인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토성으로 쌓았다. 그후 인조 4년(1626~1628)임경업 군수가 낙안 군수로 재직하면서 지금의 석성으로 중수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임경업 군수가 하루밤 만에 쌓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임경업 군수께는 누나가 한 분 계셨는데 성곽을 쌓는 것을 누나가 돕기위해 내기를 하였다. 임 경업 군수가 성곽을 쌓는 동안에 누나는 병사들이 입을 옷을 만들기였는데 누가 떠 빨리 하는가 하는 내기였다고 한다. 누나는 봄에 목화를 심고 가꾸어 수확을 하여 당시 2.000 여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군복을 만들고 임경업 군수는 병사와 주민들을 동원하여 성곽을 쌓는데 누나가 옷을 다지어 놓고 나서 성곽을 보니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누나가 생각하기를 일개 아녀자가 일국의 장수를 이긴다는 것도 그렇고 특히 수많은 병사들의 사기가 내려갈까 염려가 되는지라 다지어 놓은 군복 중에 한 벌의 옷고름을 짤라 놓고서 성곽이 다 쌓아 지기를 기다렸다가 동생이 성곽을 모두 쌓은 후에 옷고름을 다시 달아 일부러 저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모르는 병사들은 기뻐 환호하고 사기는 충천하였으며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여겼다고 한다. 동생과 군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동생에게 승리를 안겨준 아름다운 누나의 모습 이야말로 전통적인 우리 여인상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낙안읍성(1)


1. 명 칭 : 낙안읍성(樂安邑城)

2. 지정별 : 사적 제302호('1983. 6. 14 지정)

3. 소재지 :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면 동․서․남내리

4. 연 혁

 낙안읍성(樂安邑城)에 대한 기록은 "문종실록(文宗實錄)"(1450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1454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1년),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74년추정), "여지도서(輿地圖書)"(1765년), "대동지지(大東地志)"(1864), "낙안읍성(樂安邑城)"(1901), "낙안노인당지(樂安老人堂誌)"(1961)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백제시대(百濟時代)부터 조선말기(朝鮮末期)까지 군소재지(郡所在地)였던 낙안읍성은 원래 마한(馬韓)의 옛터로서 이미 부족국가 시기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동내리(東內里) 즉 동문(東門)밖에 분포되어 있는 몇기의 支石墓(고인돌)로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백제(百濟)때에는 파지성(波知城)이었는 바 분차군(分嵯郡) 혹 분사(分沙)라고 불리었고, 7세기에는 분차주(分嵯州)라고 했다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분영군(分嶺郡)이라고 고치고, 고려(高麗) 태조(太祖) 23년(940)에 현재와 같은 명칭인 낙안(樂安)(혹은 陽岳)으로 개칭하였고 현종(顯宗) 9년(1018)에는 나주(羅州)로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 2년(1172)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지군(知郡)으로 승격시켰다.


 조선시대(朝鮮時代)시대에는 세종(世宗) 12년(1466)에 군(郡)으로 고쳤으며 중종(中宗) 10년(1515)에는 자식이 어미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여 현(縣)으로 내렸다가 뒤에 다시 올렸다. 명종(明宗) 10년(1555)에는 사노(私奴)가 그 주인을 죽이는 사건으로 다시 현(縣)으로 내렸다가 선조(宣祖) 8년(1575)에 다시 군(郡)으로 승격했다.


 그 뒤에 19세기 말까지 낙안군수(樂安郡守)는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였다.


 1910년인 융희(隆熙) 4년에는 낙안군(樂安郡)이 폐지되고 7개면이 순천군(順天郡)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에는 낙안이 순천군(順天郡) 낙안면(樂安面)으로 개칭되고 해방후 1949년에는 순천시(順天市)가 독립되면서 승주군(昇州郡) 낙안면(樂安面)으로 되었다.



5. 낙안읍성마을 주변현황

 낙안읍성은 현재 67,490평(문화재지역(文化財地域) 41,018평, 보호구역(保護區域) 26,472평)이 사적지(史蹟地)로 지정되어있는 곳으로 광주에서 약 77㎞, 순천에서 약 35㎞이고 벌교와는 인접되어 있다.


 주위에는 송광사(松廣寺), 선암사(仙岩寺)와 주암(住岩)땜 등 많은 관광자원이 산재되어 있는 곳으로 읍성 뒤에는 진산인 금전산(金錢山)이 있고 앞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이 마을은 행정(行政)상 3개의 里로 형성되어 있는데 동내리(東內里), 남내리(南內里), 서내리(西內里)로 구성되어 있다.

6. 유적 및 유구현황


 낙안성(樂安城)은 "대동지지(大東誌志)"에 의하면 「백제시대(百濟時代)에는 파지성(波知城)이었으며 읍성(邑城)은 고토축(古土築)이었으나 조선조(朝鮮朝)에 석축(石築)으로 개축(改築)하였다.」고 기록되었고, 단종 3년인 1455년 전라도 관찰사였던 이석형(李石亨)의 기문(記文)에 의하면 「태조 6년(1397)이곳 출신으로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였던 김빈길이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편안할 겨를이 없어서 부민(部民)을 거느리고 토성(土城)을 쌓았다」고 기록되었으며,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세종 6년(1424) 9월 「낙안성(樂安城)의 토축성(土築城)을 잡석으로 개축하되 구기(舊基)를 넓혀 쌓았다」고 하였다.


 이 이외의 문헌들에서는 그 규모 등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며, "향전(鄕傳)"에는 「임경업(林慶業)장군이 군수재직시인 인조 4년(1626)에 쌓았다」고 전하고 있으나 성종 12년(1481)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낙안성(樂安城)의 소재를 기록하고 있어 조선초기 또는 휠씬 이전부터 있었던 성곽을 임경업 장군이 개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문헌들과 현유적(現遺蹟)을 비교하여 추정하면, 체성(體城)의 기본 축성기법도 조선초기에 축성된 다른 읍성들과 같은 기법으로 되어있어 고래(古來)로 토축(土築)이었던 것을 태조때 재축하였고 세종때 구기(舊基)를 넓혀 석축으로 개축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후 문종 원년(1450) 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都體察使)인 정분(鄭 )이 이들 지방의 읍성을 순찰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였는데 「낙안읍성은 보수하고 부대시설(附帶施設)을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복명하였는데 어느정도 보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에는 옹성․해자가 없었다고 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임진왜란을 겪고 난후인 인조때까지는 이들 시설이 모두 갖추어지면서 보수가 있었던 거서으로 보여진다.


 성의 둘레와 높이도 기록들이 서로 다른데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592보, 문종실록에서는 2,865척(尺)이라 하였고, 다른 문헌들에서는 1,592척(尺) 또는 1,590척(尺)이라 하였다. 높이에 대해서도 문종실록에서는 「평지에서 9.5척(尺), 높은 곳에서는 8.5척(尺)으로 되었다」고 하였으나 동국여지승람 이후의 기록에서는 모두 높이는 8척(尺)이라고만 하였다.


 문종실록에서는 여장(女墻)․적대(敵臺)는 있고 옹성은 없다고 기록되었으나 여지도서에서는 옹성이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여장․적대는 세종때 석축으로 개축하면서 쌓았을 것으로 보이며 옹성은 문종이후 인조때까지는 갖추어졌을 것으로 보여진다. 문종실록에서는 옹성은 없고 적대는 "십이내말축입(十二內末築入)"이라 하였으나 다른 기록에는 옹성이 6이라 하였고, 낙안읍지(樂安邑誌), 읍선생안(邑先生案)에서는 옹성이 8개소로 기록되었으나 오기(誤記)로 보인다. 여장에 대한 기록으로는 문종실록에 여장이 420이고 높이는 2.5척(尺)이라 하였으나 여지도서와 그 이후의 기록에서는 모두 660이라 기록되었다.


 현재 성곽은 동문, 남문, 서문지 등 3개의 문과 연결되어 총 1,406m로 성내의 객사(客舍)․관아(官衙)․민가(民家) 등을 둘러싸고 있으며, 대다수의 성벽이 상부는 훼손되고 하부는 잘 남아있는 상태이었는데 동문남측 인접부문, 서문남측의 옹성인접부분, 남문서측 일부에는 미석(眉石)이 남아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붕괴되어 알 수 없으나 주민들의 중언에 의하면 약 50년전까지만 해도 동측 성벽위에 토석혼축(土石混築)의 평여장(平女墻)이 있었는데 높이는 약 6척(尺)정도이고 약 5m간격으로 총안(銃眼)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낙안읍성 보존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1984~1988년간에 성곽 1,245m, 동남문(東南門)의 옹성 2개소, 치성(雉城) 4개소가 보수 복원되었다.


 성곽의 높이는 3.8~5.2m로 일정하지 않다.


7. 결론

 위의 내용이 낙안읍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다.


 그리고 내가 느낀 몇가지 사실을 말한다면, 첫째로 낙안읍성의 역사적 사료로서의 값어치이다. 이 낙안읍성은 몇 안되는 읍성중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며 그 규모 또한 여타 다른 성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낙안읍성의 구조와 위치를 보면서 당시 시대의 성의 제작기술과 성이 만들어진 계기를 낙안읍성을 통해 다른 여러 성들의 숨겨진 사실들 까지도 고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낙안읍성의 보존노력이다.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신청을 할 계획에 있고 한국전쟁 이후로 파손된 많은 부분을 수 년간에 걸쳐 보존/보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낙안읍성이 비록 물질문명에 많이 길들여져 있기는 하지만 과거의 주거환경과 생활방식이 많은 부분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순히 읍성이 이곳에 위치하고 그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일 수도 있으나 그와 더불어 당시의 생활양식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