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의 대한 고찰

 

Ⅰ. 머리말

 

Ⅱ. 르네상스의 의미와 배경

 

Ⅲ. 휴머니즘의 의미와 성격

 

Ⅳ. 휴머니즘의 인간관

 

Ⅴ. 맺음말

 

Ⅵ. 참고문헌

 

 

 

 

 

Ⅰ. 머리말

 

중세 말기에 시작된 Renaissance는 서양역사에서 많은 부분을 變化시켰다. 이 시기에 있었던 유럽의 전반적인 변화들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시작으로 유럽 사회의 전체적인 운동으로 變貌하게 되고, 이것으로 인하여 많은 文化的, 精神的 발전을 이룬 것은 확실한 사실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르네상스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하기엔 과장된 측면이 있을 것 이다.  

우리는 그동안 “인간과 세계의 재발견” 이라 칭하면서 르네상스를 근대 세계의 첫 단계로 단정한 古典的 해석에 치우쳐왔다. 그 만큼 르네상스는 중세 말기에 새로운 가치관과 그것에 의한 일련의 혁신적 변화로 인한 新聞化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문화 운동인 르네상스를 역사상의 위치 문제에 있어 과연 근대의 시작, 즉 중세와 근대의 대립적인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르네상스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 중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명명하며 르네상스시대를 찬란한 黎明의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중세가 르네상스와 대립되는 암울한 시기였을까? 이것은 르네상스의 近代的인 면만을 강조하여 中世的 경향을 도외시 한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로 르네상스의 의미와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르네상스문화의 두드러진 현상중의 하나는 고전고대가 끼친 심대한 영향이었고, 그렇게 평가하게 한 주요한 움직임은 Humanism으로 불려져왔다. ‘르네상스’란 용어와 마찬가지로 휴머니즘도 그 본질과 영향 문제에서 상당한 논쟁을 야기 시켜왔다.1 위에서 언급했듯이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르네상스를 주도적으로 이끈 지적 운동이다. 이러한 휴머니즘은 중세의 어떤 영향에서 전개되었을까? 또 그것의 本疾은 무엇이며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어 현재까지 쓰여 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휴머니즘이 어떠한 방향으로 르네상스를 이끌었으며 많은 사가들이 남긴 課題는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Ⅱ. 르네상스의 의미와 배경

 

「 Renaissance 」 란 프랑스어인 「 Renatre 」 란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 재생 」 또는 「 부흥 」 이란 뜻을 갖고 있으며, 그 어원은 이탈리아어의 「 Rinascita 」 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再生과 復興은 서양의 고대문화, 즉 그리스와 로마문화의 부흥을 의미하며 결과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옛 문화의 “재생”이라기보다 신문화, 신시대의 제 분야에 걸친 하나의 革命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용어의 뜻을 최초로 제안한 자는 이탈리아의 미술가요 건축가요 화가인 바사리(1511~1574)로서 그는 1550년에 간행된 「 미술가열전 」 에서 그리스와 로마미술의 부흥을 논하였다. 그에 의하면 로마제정기에 완성의 영역에 도달했던 미술이 중세에 이르러 침입한 야만인에 의해 파괴되고, 추악하고 조잡하고 혼미한 중세양식이 지배하다가 이것이 부활한 것은 치미부에 Cimabue (1240~1302?)와 지오토 Giotto (1266~1336)에서 라고 볼 수 있으며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1475~1564)에 이르러 완전한 고전양식이 재생하여 융성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처음에는 미술분야에 그 중점을 두게 되었고, 르네상스란 말을 처음으로 역사상의 개념으로 이용한 것은 그 후 프랑스의 사가인 미슐레 Jules Michelet (1793~1874)가 그의 저서 「 프랑스사」 에서 이 말을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최초의 말의 의미는 제 15~6세기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고대문예의 부흥, 즉 그리스 로마문화의 재생이란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 후 영국의 시인이요 비평가인 아놀드 Matthew Arnold (1822~1888)가 문명비평서인 「 교양과 무질서 」 란 평론에서 「 Renaissance 」 란 영국식 표기를 하였으나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2

그 후 계속해서 스위스의 사가인 부르크하르트 Jacob Burckhardt (1818~1897)교수가 그의 세계적인 명저인 「 이탈리아 르네상스문화 」에서 사용함으로써 이 말은 단지 고대 문예부분에만 그치지 않고 이것과 동시에 나타난 여러 사회관계의 갱신과 발흥 등 환경의 확대를 포함한 일체의 文化개념과 歷史개념으로써 널리 일반적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면 유럽의 중세적 질서로부터 근대적 질서의 추이를 역사상의 용어로 사용함으로써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3

지금까지 르네상스의 용어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르네상스의 성격은 무엇인가? 르네상스는 유럽역사상 문화의 과도기적 현상으로 그리스 로마문화의 재생운동 일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친 문화적‧정신적으로 하나의 혁신운동이며 근대로 나아가려는 운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운동은 오랜 중세의 현실부정에서 오는 신중심적인 사고방식을 탈피하고 현실을 긍정하려는 문예부흥기의 인문주의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철학사조에 의해서 강화 확대된 관념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운동은 合理的이고 人間中心的인 문화운동이기도 하며 市民的인 성격을 띤, 개성의 해방과 자각을 요구하는 운동이며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을 발견하려는 혁신운동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르네상스는 일종의 선구운동으로 봉건적인 억압으로부터 반항하는 인간권위주의운동이며 신중심적 사고방식으로부터 탈피운동으로 상공업의 발흥이 가져온 世俗性의 성장으로 시민사회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운동으로 하여 결과적으로 철학은 신학의 밑 부분에서 이탈하게 되고 이상적인 세계에서 현세의 입장으로 전환 되었으며 천국의 우월에서 의욕과 가치의 세속화가 우월시 되어 자연의 본성에 새로운 사실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르네상스 운동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먼저 일어나 미술면에서 가장 먼저 화려하게 개화되었으나 이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경제,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혁신적 신문화운동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르네상스는 유럽 사회의 전체적인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방면에서 일어난 커다란 변화를 겪는 역사적 과도기의 현상이었다. 이와 같은 전반적인 過渡期를 보통 근대의 出發點으로 간주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르네상스는 역사상의 특정사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역사해석상의 용어 내지 시대구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대구분의 경우와 같이 절대적 기준, 즉 모든 역사가들이 인정해야 하는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은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중세적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단순히 근대의 시작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하나의 구분된 시대로 보았다. 그와는 상반된 중세연구가들은 르네상스가 독특하거나 결정적인 운동이 아닐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중세와 르네상스와의 분한선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함께 근대가 시작한다는 역사 해석의 관점은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되므로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왔다.

르네상스 운동은 도시와 상업의 부활이 가장 빨랐던 이탈리아에서 제일 먼저 일어났으며, 또 급속히 전개되었다. 인간의 자아의식이 움트고 權威에 대한 비판이 싹트는 가운데 지적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와 같은 개성의 각성은 고대문명의 부흥을 배경으로 한 르네상스 휴머니즘에 의해 촉진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러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당시의 휴머니스트들의 주장과는 달리 중세의 문화적 유산을 함께 계승한 결과로 나온 所産이기도 하였다. 바꾸어 말해서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를 뛰어넘어 고전고대에 직접 연결된 것이 아니라, 중세의 사상과 문화의 전통을 좀더 창조적인 것으로 전환시켜 놓았다고 할 수 있다.4

한마디로 중세와 근세를 비교해봄으로써 나타나는 특징들이 단숨에 나타난 변화가 아닌 르네상스란 시기를 거침으로서 서서히 근세의 특징들과 사회가 발전하며 胎動될 수 있던 것이다. 그 시기는 완전히 중세적이라고도 근대적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양자가 혼합된 새로운 변혁으로 나아가려는 변화와 태동의 시기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특징적인 문화는 거기에 대응하려는 특징의 정치적‧경제적 사회 상태를 기반으로 하여 발생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세계역사의 발전과정을 보더라도 그 기반이 변화하였을 때 문화도 변화하여 갔음을 알 수가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중세사회에 고유한 여러 특성이 점차로 변화하면서 동시에 종래의 잠재적인 요소 내지 거의 영향력이 없던 요소가 현저한 역사형성의 힘으로서 나타나는 시대였다. 따라서 시대와 사회에는 중세적 유산이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중세적 유산은 바로 封建制度와 카톨릭사회였다. 이 둘은 世俗的 질서와 精神的 생활을 지배하였다. 즉 중세의 충성에는 이와 같은 두 차원이 있었다. 첫째로는 영주에 대한 개인적인 忠誠과 服從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보다 높은 차원의 보편교회에 대하여 모든 크리스트교인이 갖은 공통된 충성과 복종이 있다. 하지만 이런 중세사회구조의 기본이 되는 두 제도는 13세기말부터 차차 그 활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에 이르러 중세적 유산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확고한 위치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된다. 십자군전쟁 이후 기사계층이 몰락하고, 형식화되고 부패화된 기존의 카톨릭이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혁신을 열망하게 됨으로써 이 이중적인 충성 구조는 중앙집권적인 군주국가의 싹이 틈으로써, 이제 사람들은 ‘왕’에 대해 새롭게 그들의 충성을 다하려고 하게 되었다.5  

또한 장원경제 속에 해상도시에서 비롯된 貨幣經濟가 침투하게 됨으로써 자연경제, 자급자족, 폐쇄적 단위, 경작상의 계약(공납, 지대, 부역, 등의 노역)과 같은 여러 가지 특징은 차차 애매하게 되었다. 화폐의 침투단위가 넓어지고 잉여농산물의 매매가 행해짐에 따라 장원은 외부와 교통왕래에 대하여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장원은 더 이상 폐쇄적인 생활단위로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더욱이 흑사병의 도래로 인한 인구의 격감은 농민들의 지위상승에 큰 역할을 해 영주의 봉건적 수탈과 강제적 경작원칙에도 차차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6

이런 장원체제를 붕괴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화폐경제는 상업과 도시의 발달과도 밀접하다. 중세 말에 상업이 질적으로 다양해지고 양적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도시의 인구 및 기조가 비로소 하나의 강력한 역사형성력으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도시민은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여 화폐를 거래수단으로 사용해 농촌지역으로까지 화폐경제를 파급시켰고 장원의 경제생활까지도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7

상업의 부활은 11세기에 이탈리아의 베니스를 중심으로 한 해상도시와 비잔틴 제국과의 통상이 재개됨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북방에서의 네델란드의 무역과 함께 점차 통상행위가 내륙으로 확장됨에 따라 서구의 모든 지역이 원격지의 산물에 접촉하게 되었다. 이런 상업의 부활은 도시생활도 일편적으로 재생시켰고, 도시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어 도시인구를 증진시켰으며, 도시를 새로운 중심으로 발전시켰다.8

이런 사회, 경제상의 변화는 사람들의 의식세계까지도 바꾸어 놓게 되었다. 중세말기의 상공업의 발달은 시민계급을 등장케 하여 오랜 세월을 두고 지속되던 계급이 분해되면서 개개인의 자각심을 일으키게 하여 현세를 살려는 의욕 즉 물질욕을 증진시켰다. 이러한 시민계급의 대두는 자유스런 인간문화를 요망하게 되고 동시에 종래의 봉건적 지배로부터 탈피하게 되어 그들의 활동무대는 다양하고 자유롭게 되었다.

도시의 발달은(12~3세기) 화폐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세속정신이 성장하고 아울러 자유의 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도시는 곧 인간의 자유 활동의 장소가 되어 비판정신을 심어 주었으며 원거리무역을 통하여(동바무역의 성행)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2 ~3세기에 들어서면서 일어나기 시작하여, 봉건제도의 쇠약이 시작되면서 인간적인 자각이 발생하게 되었다. 더욱이 대학의 발달과 사라센문화의 유입이 이를 자극하여 정신개발이 일어나 르네상스를 자극하였다. 여기에 또한 지리상의 발견은 인간의 시야를 확대시켜 지금까지의 폐쇄된 인간의 생활 터전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새로운 인생관과 사회관, 그리고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서양 중세의 특색중 하나로서 가장 먼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강대함에 있다. 즉 당시 사회는 그리스도교에 의해 모든 것이 지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이는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러나 사회의 진보, 경제적인 발달, 특히 상공업의 발흥에 의하여 사람들은 물질적 충족을 추구하게 되고 여기에 일반 사람들의 인심은 현세적 향락적 개인주의적 또는 이기주의적인 것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러한 발전은 종래의 그리스도교 정신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여 문화전반에 걸쳐서 하나의 새로운 경향의 발생을 촉진시켰다.9

이렇듯 중세적인 유산 속에서 그 유산이 점차 쇠퇴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새로운 싹은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新文化運動을 만들어 내는 原動力이 되었고, 그 원동력의 중심에 있던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먼저 시작되었던 것일까? 위에서 언급된 사회상을 기반으로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된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곳에서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도시적 전통이 계속되었으며, 특히 십자군전쟁 이후 지중해를 무대로 세계상업이 활발하여 海港都市인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와 내륙도시인 밀라노, 피렌체 등의 도시가 잇따라 경쟁적으로 발달하였다.

이러한 도시에서는 中繼貿易이 활발하였고, 유럽인들보다 우월하여 아라비아 사람들과도 평화적인 접촉을 통하여 그들로부터 어음이나 해상법, 도량형 등 상업기술과 항해기술을 배워 東西貿易이 활발하였다. 이들 도시들은 거의 고대적 도시국가적인 특성을 갖고 도시자치제의 집합체가 정치를 담당하여 독립적인 民主制를 취하였으나 상공업의 발전과 다불어 점차 대시민, 대조합등의 상업귀족을 중심으로 한 寡頭政治로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피렌체의 메디치가가 그 대표이며 뒤에 서술하겠지만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인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예술은 활기를 띄게 되었다.10

또한 이 지방은 고대로마문화의 유산이 풍부하게 남아 있었던데 대한 큰 자극과 터키인의 박해에 있었던 동로마제국의 많은 학자들이 고전을 휴대하고 이탈리아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고대정신을 눈부시게 자극한 것이다.

이탈리아 지방에 있어서의 르네상스는 처음에는 신흥 시민층 사이에서 일어나 발전하였으나 차츰 도시의 실권이 메디치가 등의 부호귀족에 장악되어갔다. 그럼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메디치가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메디치가의 역사는 바로 그대로 르네상스의 역사였다. 메디치 가문은 14세기에 부와 자유주의의 명성을 획득하면서 피렌체의 정치에 關與하기 시작했다. 고시모드 메디치와 그의 손자 로렌조 드 메디치는 고전을 수집하고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고 장려하였다. 피렌체는 메디치가의 적극적인 보호와 장려로 많은 고전학자들을 운집케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로렌조는 늘 인문주의자들에게 서적을 빌려주고 접했으며, 그의 시골 저택을 장식하기 위해 조각가, 건축가, 화가들을 고용하였고, 그들의 재능을 鼓舞하였다. 이런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한 예술과 학문의 지원으로 메디치가는 큰 명성을 얻게 되었고, 결국은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 클레멘트 7세 등의 교황을 배출했다.

 

Ⅲ. 휴머니즘의 의미와 성격

 

“휴머니즘”의 경우 그것의 역사적 기원은 최근의 연구 결과 비교적 분명히 밝혀졌다. 휴머니즘(Humanism)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9세기 초였다. 독일의 교육학자 니타머(F.J.Niethammer)는 보다 실용적이고 보다 과학적인 훈련에 대한 점증하는 요구에 대항하여 중등학교에서의 그리스 및 라틴 고전 교육을 强調하기 위해 1808년에 ‘후마니스무스’(Humanismus)란 용어를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19세기의 다수 사가들은 교과과정에서 고전의 핵심적 역할을 옹호하고 확립한 르네상스 학자들, 그리고 그 전통을 19세기까지 지속시킨 학교들을 16세기에 독일의 일부 도시에 설립한 르네상스 학자들에게 그 용어를 적용했다.11 비교적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기원이 르네상스 자체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른 유사한 낱말 “휴머니스트”(Humanist)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에 경시될 수 없다.   

라틴어 후마니스타(humanista)는 불어‧영어 기타 언어 의 그것에 상응하는 용어들은 16세기에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수‧교사학생들을 위해 널리 사용된 용어들이었고, 그 용법은 18세기까지 낯설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 용어는, 지금까지 알려진 그것의 최초의 출현으로부터 판단할 때 과거에 각 분야를 가르친 그들의 동료들과 유사하게 ‘우마니스타(umanista)라 부른 이탈리아대학생들의 학생들의 은어로부터 비롯한 것 같아 보인다.

르네상스의 절정기에 만들어진 용어 후마니스타는 또 다른 옛 용어, 즉 ‘휴머니티스’(humanities)혹은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12로부터 유래했다. 이 용어는 키케로나 겔리우스 고대 로마의 저자들에 의해 일반적 의미의 교양 혹은 문학 교육에 분명히 적용되었으며, 그 관례는 14세기 말에 이탈리아 학자들에 의해 회복되었다. 15세기 초에 이르러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는 명확히 한정되는 일단의 과목을 의미하게 되었고, 이들 각 과목의 연구는 라틴어로 서술한 권위 있는 고대 라틴작가들 및 그보다는 덜하지만 그리스작가들을 잃고 해석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의미의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는 16세기와 그 이후에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휴머니티스’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그 反響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철학적 경향이나 체계가 아니라, 중요하되 영역이 한정된 연구를 강조하고 발전시킨 문화적, 교육적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고전이나 철학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문학으로 묘사될 수 있는 일단의 주제들이 그 영역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스고전, 특히 라틴고전에 몰두한 휴머니스트들의 철저하고 포괄적인 연구가 18세기 후엽 이래에 근대의 고전학자들의 그것과 다른 특수한 성격을 띄게 한 것은 바로 이 문학적 선입견이다. 더욱이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는 철학의 한 영역, 즉 도덕철학을 포함하되, 수학 ‧ 천문학 ‧ 의학 ‧ 법학 ‧ 신학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시대의 대학 교과과정과 과목 분류 체계에서 화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영역인 논리학 ‧ 자연철학 ‧ 형이상학 등을 분명히 제외한다. 이 확실한 사실이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그 시대의 철학, 과학, 혹은 전반적 학문과 동일시하려는 거듭된 시도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反證으로 보여진다.13

휴머니즘의 의미와 성격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와 같은 휴머니즘을 어떠한 시선으로 볼 것인가? 휴머니즘의 해석에 관한 문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르네상스를 새로운 문화운동으로 본다면 그 운동의 지도 이념이 바로 휴머니즘이었고 르네상스를 과도기라는 時代槪念으로 파악한다 하더라도 그 시대정신을 이끌어간 지적 운동이 휴머니즘이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에 대한 해석에 관계없이 휴머니즘은 근대문화 탄생의 知的 土壤이라고 할 수 있다.14

대략 14세기경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던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교육․정치․역사․미술․종교 등 다방면에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르네상스 문화에 큰 기여를 했다. 따라서 르네상스에 있어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차지하는 큰 비중만큼 그 해석에 대한 다양한 연구업적들이 産出되었다.15

Burckhardt의 문화사적 종합이래, 르네상스 내지 르네상스와 관련된 르네상스 휴머니즘에 대한 해석은 부르크하르트에 대한 비판과 수정을 통하여, 최근에는 하나의 새로운 종합적 해석을 시도하려는 경향이 크다.  즉 부르크하르트에 의한 전통적 해석인 르네상스 시대의 새로운 점을 살리면서 중세와의 關聯性을 추구함으로써, 이제 르네상스는 1350년에서 1600년 사이에 일어난 미술, 문학, 학문 뿐 아니라 정치, 과학 등 모든 것에 적용시키려 하거나, 혹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해 가는 하나의 과도기로서 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중의 하나가 고전 고대의 부흥과 관련된 르네상스 휴머니즘에 대한 해석이었다.

먼저 Jacob Burckhardt로 대표되는 전통적 견해에 의하면, 휴머니즘이 生에 대한 새로운 가치와 철학을 형성하는데 이바지 했으며, 따라서 그것을 중세와의 분명한 斷絶로서 보는 즉 휴머니즘은 그러한 근대정신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두 개 경향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중세적 특징을 강조하는 경향과 또 하나는 휴머니즘의 역사적 중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들 경향의 특징은 르네상스 휴머니즘과 중세 문화 사이에 어떤 繼續性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 점이다.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 사이에 살아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전통적 견해의 본질적인 특징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Baron과 Kristeller였다. 이들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단일하고 균일한 운동으로서 보지 않고, 다양하면서 서로 느슨하게 관련된 운동으로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은 본질적으로 고전 연구에서 비롯된 휴머니스트 운동 내지 휴머니즘을 出發點으로 한다는 점에서 共通點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는데 Baron은 주로 정치, 사회적 배경과 관련하여 해석하였으며 이에 비해 Kristeller는 르네상스가 새로운 哲學運動이었다는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을 반박하고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원래 고전 修辭學의 전통에 기반을 둔 문화적․교육적 프로그램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에겐 휴머니즘은 그리스 소피스트들에게까지 소급되는 서양문화에서의 수사학적 전통의 한 특징적인 단계일 뿐이었다.16 Trinkaus는 Kristeller의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휴머니스트들이 그들의 文學的, 修辭學的 연구의 여러 국면을 종교적, 윤리적, 정치적 관심의 종합에서 찾고자 했다는 것을 실증적 문헌 연구를 통해서 고찰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Baron 계열의 입장도 수용하고, Kristeller 자신의 견해를 보완함으로써,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해석에 있어서 진정한 종합의 可能性을 제시하고 있다.

 

Ⅳ. 휴머니즘의 인간관

 

앞에서 르네상스의 배경부분에서 설명했듯이 중세 말부터 화폐경제의 성장과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봉건적 전통의 타파 역할을 했고, 경제가 번영함에 따라 현실세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사람들로부터 자기 자신과 주변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17즉 부르크하르트의 말대로 「세계와 인간의 발견」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르네상스가 근대세계에 공헌한 가장 큰 업적은 아마도 ‘인간의 발견’일 것이다. 「인간의 발견」은 물론 신을 닮게 창조된 인간의 尊嚴性을 전적으로 외면하진 않았지만  원죄로 인해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되었던 짐을 안고 있던 중세의 인간관과는 다른 인간관을 제시했다18. 르네상스인들은 이제 자아의식의 각성과 개성을 깨달게 되어 인간을 ‘정신적 個體’로 인식했으며 인간의 덕성과 능력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다.19 이 같은 ‘인간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다채롭고 개성적인 르네상스 문화가 꽃피게 되었고 근대 개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르네상스인들의 강한 자아의식과 개성은 그들의 명예 추구욕에서 잘 드러난다. 르네상스의 문인․학자․예술가․참주들은 한결같이 불후의 명성을 얻으려는 열망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였고 또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당시인들의 명예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강했는가를 다음 예문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밀라노의 참주인 스포르자를 살해하려다 실패하여 사형을 당하게 된 지롤라모는

 

“정신 차려라 지롤라모! 세상 사람들은 오랫동안 나를 기억할 것이다. 죽음은 괴로우나 명예는 영원하다.”

 

라고 했다한다. 명성을 얻고자 하는 심리에서 자서전․전기․역사서가 많이 저술되었다.첼리니의 자서전과 보카치오의 단테전, 바자리의 이탈리아 미술가 평전, 빌라니의 피렌체 명인전 등이 대표적 예인데 이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적 심리상태를 객관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특히 개성의 발달로 다재다능한 만능인(l'umo universale)을  출현시켰다. 알베르티는 인문학 자연과학 예술 분야에 모두 정통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걷기, 말타기, 구두 고치기, 동전 높이 던지기에서도 자신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호언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회화․건축․시․음악 등에 두루 통달한 만능의 천재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20

또한 개성의 인식과 자아의 自覺은 愛鄕心을 가지게 했고, 그것은 다시 후에 민족주의, 國民主義思想을 발전케 해 민족통일과 국민주의적 개혁의 촉진에 밑걸음이 되었다. 또한 개인에 대한 자각은 마침내 인간 전반의 문제로 확대시켜 그 결과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의 관념이 대두되었다. 이 같은 관념은 주로 마네티, 피치노, 피코 같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擁護되었다.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알베르티의 신념과 “인간은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는 피코의 믿음21은 중세의 부정적 인간관을 긍정적 인간관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과 高貴性은 혈통과 가문이 아닌 개인의 덕성과 능력에 달려 있다고 믿게 되었다. 또한 르네상스인은 현실세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生과 쾌락을 찬미했다. 22

이런 르네상스기의 人間像은 전기와 후기가 다소 다른데 미란도라는 自由意思에 의해 성장하고 자유롭게 스스로를 형성, 스스로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상을 제시했는데 전기의 인간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카스틸리오네는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교양을 지니고, 우아한 인간성을 가진 만능인을 주장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가 난숙기에 접어든 말기 단계의 상류사회 즉 르네상스 후기의 인간상을 제시했다. 이는 후에 진정한 유럽 紳士의 이상이 되었다.    

「세계의 발견」은 자연 속에서 신의 섭리를 찾고자 했던 중세와 달리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아름다움을 즐기며 자연의 法則을 탐구하고 묘사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이런 관심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修辭와 道德을 중시하는 인문학에 역점을 두었으므로 자연과학의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휴머니즘에 내포된 현세주의는 세계와 자연으로 눈을 돌리게 해  지리상 발견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르네상스시대의 인간관은 다채롭고 개성적인 르네상스의 문화의 원동력이었으며 근대 개인주의가 발전하게 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자체가 중세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듯이 인간관 또한 古典的 ,聖書的,敎父的,中世的 자료에 의한 것이기에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어진다. 하지만 그 자체가 적어도 인간성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기독교적 인간관이 고전적 인간관과 결합해 중세의 그것에 비해 보다 낙관적 인간관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Ⅴ. 맺음말  

 

이제까지 서양의 근대문화의 토대로 일컬어지고 있는 르네상스의 사회와 사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르네상스를 흔히 근대의 始發漸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실상 명확하고 구체적인 현실적 현상이 르네상스를 구분 한다기보다도 차라리 우리의 의식과 관념이 그 구분의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르네상스는 역사의 시대구분상 하나의 중요한 시점이며 또한 역사인식의 매우 편리한 수단이 된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중세를 암흑시대로 치부하며 그와 반대로 르네상스를 찬란한 근대의 시작으로 보아왔다. 하지만 과연 르네상스를 근대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까? 르네상스는 분명 서양근대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만큼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그 시기 자체에는 근대적인 토양만큼 중세적인 분위기 또한 강하게 남아 있다. 근대적이기도 하지만 중세적이기도 하다.  좀 더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중세의 끝 점과 근세의 시작점 그 중간의 과정을 걷고 있는 단계라 말할 수 있다. 즉 분명 그 시기는 어느 시기에도 포함되거나 혹은 포함될 수 없는 과도기적인 단계의 移行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르네상스시대의 사람들은 강렬한 시대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떠한 것인가, 그들의 시대는 얼마나 훌륭하고 광영된 것인가를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내용의 새로움과 획기적인 발전에 대한 자각은 중세 사람들에게는 없었다.

르네상스 사람은 중세로부터 문화적 유산 가운데의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하나의 커다란 역사적 과도기의 사회가 당시대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계승하였으며 그러한 전통적 문화내용이 실상 오랫동안 그 후의 유럽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였다는 점이다. 즉 18세기 중반에 이르도록 봉건사회의 특징적인 국면이 존재하였으며 낭만주의 운동이 유럽 사조를 지배하기까지는 라틴문화의 여러 요소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속하였다. 그러므로 서양근대의 특징이라 불리 우는 특성들은 르네상스에서 출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서양사회에 특징적으로 자리 잡고, 근세 혹은 근대라 불리기에 충분한 시기는 르네상스시기에는 이르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의 종교개혁, 과학혁명, 사상혁명, 산업혁명 등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근대세계의 특징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가 새로운 가치기준,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 등 근대의 토양임에는 분명하지만  서양근대세계의 특징이 르네상스에 의해 모두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쟁들을 접어두고  르네상스는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 창조된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문화적 사회적 현상이며 역사가 일구어낸 산물인 것이다. 즉 르네상스 자체는 고전주의와 인문주의의 양태를 띄고 나타났다. 대내외적인 협조와 경쟁의 심화 속에서 인간의 意志와 行爲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인간 중심적이라는 새로운 價値基準이 추구되었다. 여기서 동로마제국의 몰락으로 활발히 유입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르네상스는 고전주의운동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은 고대문헌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문화세계에 접함으로써 비판적인 안목을 함양할 수 있었으며, 점차 宗敎的이고 의사 歷史的인 교의에 입각해 있던 기존의 가치체계를 비판대상으로 삼으면서 새로운 전망을 발전시켜 나갔다. 즉 과거의 역사의 소산들과 현재 만들어 가고 있는 역사의 변화들이 모여 새로운 신문화 운동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르네상스는 르네상스를 통해 깨달았던 인간의 가능성, 개인들이 만들어낸 소산인 것이다.

 

Ⅵ. 참고문헌

 

● 차하순, 『서양사총론』,탐구당, 1992.

● 김영한, 『서양의 지적운동 ∥-르네상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서울, 지식 산업사, 1998.

● 차하순, 『르네상스의 사회와 사상』, 서울, 탐구당, 1984.

● 조경래, 『서양근세사』, 서울, 일신사, 1987.

● 진원숙, 『서양사산책』,서울, 신서원, 1999.

  ●  진원숙, 「西洋近代史의 諸問題」, 계명대학교출판부, 1990.

● 이혜령,『근대정신의 대두』,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한울 아카데     미, 1995.

● P.O. Kristeller, 진원숙 역, 『르네상스의 사상과 그 원천』,계명대학교출판부, 1995.

 

 

 ▷ 참고논문

 

 

● 박찬문, 「르네상스 휴머니즘에 대한 종합적 해석을 위한 일고」,『전남대역사학연구』,13, 1996.

 

● 차하순, 「르네상스 문제에 대한 종합적 해석」,『역사학보』25호,        1964.

 

● 곽차섭,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해석에 대한 재검토- Kristeller 학파의 수사학적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역사학보』108호, 1985.

 

 

 

 

 

 

 

 

진원숙, 「西洋近代史의 諸問題」, 계명대학교출판부, 1990. p.19.

조경래, 「서양근세사 」 ,일신사, 1987, pp.17~18.

부르크하르트의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여러 가지 비판이 나타났다. 첫째로 르네상스는 급작스럽게 성립한 것이 아니고 오랜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육성된 것이며 다만 14세기 경부터 현저하게 나타난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호이징하의 비판으로서 르네상스 중에는 중세적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으며 근세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차하순, op. cit., pp.240.

차하순, 「 르네상스의 사회와 사상 」 , 탐구당, 1984, p.21.

배영수 편, 「 서양사 강의 」, 한울아카데미, 1992, p.78.

차하순, op. cit., pp.30~31.

조경래, op. cit., p.20.

조경래, op. cit,. pp.20~21.

조경래, op. cit., p.22.

P.O. kristeller, 「르네상스의 사상과 그 원천」, p.41.

오늘날의 인문학(humanities)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으로 후마니타스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문이다.

P.O. kristeller, op. cit., pp.41~42.

김영한,「 서양의 지적운동 II-르네상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 서울지식산업사,1998. p.14.

곽차섭, 「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해석에 대한 재검토-Kristeller 학파의 수사적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 「역사학보」 제 108호, 1985, p.173.

박찬문, 「르네상스 휴머니즘에 대한 종합적 해석을 위한 일고」, 「전남대역사학연구」 ,13,1996.

조경래,『서양근세사』,일신사,1987,p.41.

진원숙 ,『서양사 산책』,신서원,1999, p.177.

이혜령,「근대정신의 대두」,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한울 아카데미, 1995.p.180

김영한, op. cit., p.32

그러나 피코가 말한 인간은 신에게 도전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존재처럼 신에게 있어 불괘한 존재가 아니라 동물과 천사 사이에서 신과 실제로 하나가 되는 힘을 자기 안에 가진 존재였다.진원숙,앞의 논문 , p180.  

김영한 ,op, cit., pp.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