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 武臣執權期 農民抗爭에 대한 考察

 

 

 

 

圓光大學校

인문학부 역사학전공

99316063

전 지 현

나 종 우 교수님

 

目        次

 

 

Ⅰ. 들어가는 말

 

Ⅱ. 武臣政權期의 社會變動의 原因과 背景

 

Ⅲ.武臣政權期에 發生한 民亂

1.賤民의 亂

(1)亡伊·亡所伊의 亂

(2)奴婢 萬積등의 抗拒

2.農民의 亂-金沙彌·孝心의 亂

 

Ⅳ. 나오는 말-社會變動의 意義와 結果

 

 

 

-參  考  文  獻-

 

 

 

 

 

 

 

Ⅰ.들어가는 말

12世紀의 貴族社會는 貴族사이의 반란으로부터 붕괴되어 갔으며 武臣亂에 의하여 실질적으로 解體되었다. 門閥貴族의 사회에서 武臣들의 사회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무신들의 집권이 영속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무신란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변화가 단순히 文武사이의 정권교체에 그치지 않았음은 주지할 수 있다. 이러한 貴族社會의 上層構造로부터의 붕괴는 자연히 身分秩序를 무너트렸으므로 下層部인 農民·賤民의 叛亂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1170년(의종 24)의 무신정변은 고려사회의 시대적 전환을 마련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즉, 이를 계기로 문신정권이 붕괴되고 무신정권이 성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 사상적인 측면에서 敎宗에 대신하여 禪宗 체계인 曹溪宗이 확립되는 큰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신정권기는 고려사회를 前·後기로 구분 짓는 시대적 분기점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무신정권기는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農莊이 확대되는 가운데 전국적인 農民抗爭이 전개된 시기로 특징 지워진다.1) 즉, 武臣亂 후에는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문신계의 반항과 이와 연결된 사원 세력의 항쟁, 그리고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무인 상호간의 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農民과 賤民의 봉기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들 농민과 천민의 봉기는 양반관리들의 정치적 반란과는 달리 사회경제적인 모순에 의한 하층민들의 반항이었으므로 民亂이라 할 수 있다. 무신란으로 정권을 잡은 무인들이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농민들은 民田을 빼앗기고 또한 지방관리의 가렴주구로 생활이 곤궁해져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광범하게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농민의 동요는 이미 무신란 이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문신귀족들의 토지점탈과 농민에 대한 과중한 수취는 농민들로 하여금 유민으로 떠돌아다니게 하였으며, 이들은 때로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무신란 후의 집권무인들은 보다 과중한 수탈을 감행하여 농민생활이 더욱 곤궁하여졌으므로 농민들은 무신 상호간의 정권다툼으로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봉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民亂은 明宗∼神宗間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는데, 이유는 무신정권의 형성기인 明宗대와 최충헌의 독재정치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神宗대에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하였으므로 민란이 발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고려 후기에 있어서 신분제의 동요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정치적인 변동이었다. 신분제 동요의 내용은 신분이동이 전에 비해 커졌다는 것인데, 신분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지금까지 가장 중시한 것은 신분을 고정시키는 일이 신분을 이동시키는 일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후기의 사회가 되어서도 신분고정은 여전히 강조되었지만, 신분이동이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 되어 갔다. 신분이동에서 중요한 것은 낮은 신분층이 높은 신분층으로 나아가는 일이었는데, 양인에 견주어질 수 밖에 없는 한미한 집안 출신들로서 원의 세력에 줄을 대어 권문세족으로 등장하는 일마저도 생겨나게 되었다. 향리신분 출신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중앙귀족이 되는 일마저도 생겨났다. 향리신분 출신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중앙귀족이 되는 일도 전에 비하여 증가하였다. 이러한 신분간의 활발한 이동등도 민란의 배경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武臣政權期에 전국적으로 발생한 農民·賤民亂등의 사회변동이 발생한 원인과 배경, 무신정권기에 발생한 민란의 전개 과정-賤民의 난에서는 亡伊·亡所伊의 난과 萬積의 난, 農民의 난에서는 金沙彌·孝心의 난을 중심으로-과 이러한 민란으로 인한 사회변동에 대한 결과와 그 의의에 대하여 알아볼까 한다.

 

 

 

 

 

Ⅱ.武臣政權期 社會變動의 原因과 背景

武臣政權期는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많은 혼란이 야기된 시기였다. 이른바 民亂으로 불리는 많은 賤民의 反亂이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특히 明宗·神宗期의 12∼13세기에 集中的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그같은 民亂의 선행 단계라 할 수 있는 백성들의 流民化는 이미 睿宗朝부터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토지제도가 문란하여졌을뿐더러 농민들에게 과다한 稅役을 부담시켰으므로 많은 백성들이 농토를 잃고 떠돌아다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즉, 武臣亂이 일어나기 전의 고려왕조의 사회경제적 모순은 農民의 항거를 초래할 소지를 이미 배태하고 있었고, 또 그것이 유민이나 도적 등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그 위에 무신난 이후 武人執權者의 수탈과 토지겸병은 이전의 모순을 더욱 악화시켰고, 農民生活을 더욱 궁핍으로 몰아넣었으며, 무신 상호간의 권력쟁탈은 정치질서마저 붕괴시켰다.

따라서 이 시기의 농민의 지배층에 대한 최후의 항거의 한 형태 즉, 民亂의 발생은 피할 수 없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武臣政權期에 발생했던 農民·賤民의 봉기는 고려사회의 政治的·經濟的·社會的 矛盾이 폭발되어 일어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유는 이미 무신정권이 성립하기 이전부터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산발적으로 일어났으나 무신정권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원인의 첫째는, 고려사회가 12세기가 되면서 귀족 사이의 반란으로 중앙집권력이 이완되고 지방통제가 악화됨에 따라 지방관의 착취와 억압이 격심하여졌으니, 이러한 경제적 착취에 대한 農民·賤民의 반항이 곧 民亂이라 하겠다.

우선 무신정권이 성립하기 이전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면, 仁宗代에 李資謙과 妙淸의 난이 발생하여 집권층 내부의 권력 다툼이 표면화됨으로써 중앙집권체제가 동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毅宗은 仁宗代 이래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시키기 위해 이에 위배되는 여러 귀족들을 숙청하였으나, 문신 지배층의 압력과 그 자신의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도리어 의종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백성들로부터 수탈을 강화하였으므로 농민들의 유망이 더욱 늘어갔다.2) 그리하여 의종 6년에 洪川,3)  9년에 全州,4) 16년에는 伊川·安峽·東州·平康·永豊(平山)·宣州(德原)·谷州 등 각지에서 도적이 일어났으며5) 그 이후에도 남쪽에서 계속적으로 소요가 일어났다.6) 따라서 毅宗 24년(1170)에 일어난 무신정변이 성공하게 된 원인은 무반 지위의 상승과 더불어 귀족사회의 수탈체제에 신음하던 피지배층의 광범위한 지지와 성원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일반 군인층, 농민들의 호응으로 성립하였음에도 피지배층을 위한 수취체제의 개편이나 지방관 수탈을 근절하기 위한 적절한 시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무신들의 목적은 문신을 대신해서 정권을 장악하여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일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李高·李義方·鄭仲夫 등 무신집정자들은 무신들의 회의기관인 重房을 중심으로 서로 권력 다툼을 벌여 높은 관직을 경쟁적으로 차지하고 토지겸병에 열중하는 것이어서, 무신들의 정권 장악을 위한 내부 투쟁은 국가의 기강을 더욱 문란하게 하여 중앙의 통치체제는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신정권 초기에 상장군·대장군이 모여 국정의 전반을 논의하던 重房政治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중방에서 어떤 일을 명령하면 그 아래 將軍房에서 반대하고 장군방에서 명령하면 그 아래 郞將房에서 반대하여 서로 대립하는 형세에 이르렀다.7) 지배층 내부 갈등의 표출과 무신권력자들의 부패타락은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켜 지방관의 가렴주구를 감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했을 뿐 아니라 농민 봉기가 일어났을 때 정부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더해 전근대사회에서 지방관의 탐학으로 인한 농촌사회의 파탄이 농민봉기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고 있다.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의 약화를 틈타 지방관은 농민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시켰다. 지방관의 탐학은 이미 무신정권 이전부터 성행하여 백성들이 유망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무신정권 이후에는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역량이 없으면서 재물에만 눈이 어두운 자들이 많아져서 농촌사회는 완전히 파탄에 이르게 되었고, 무인 집권자 중에는 재물을 탐하여 벼슬을 파는 자까지 있어서, 이제 지방관의 탐학은 중앙의 권세가와 연결되어 자행되고 있었다.

둘째로, 武臣亂 이후 田柴科體制가 무너졌고 그에 따른 貴族의 大土地私有化와 農莊의 擴大가 이룩되면서 農民들은 流民·賤民化되었으므로 이에 대항하는 반란이 격증될 수 있었다.

田柴科體制를 경제기반으로 한 高麗王朝의 지배체제는 12세기 초엽이래 지배질서가 문란하여지면서부터 전시과체제의 모순이 露程되기 시작하였다. 집권자들에 의한 大土地私有는 李資謙亂後에 仁州李氏 一門이 강탈한 토지와 노비를 本主에게 반환케 한 조치에서 보듯이8) 문벌 귀족체제하에서 이미 그러한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권세가들에게 토지를 빼앗긴 자가경영 농민층의 佃戶化가 진행되었고, 자가경영 농민의 수취에 의존하던 國家의 재정은 그 기반이 동요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전반적인 붕괴의 길을 밟기 시작하였다.9)

田柴科體制의 붕괴와 병행된 토지겸병의 진전은 무인정권의 진행과 함께 본격화하였다. 무인들이 대거로 토지겸병에 진출한 것은 본래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빈약하였던 위에 일단 장악한 정권을 지탱해 나가기 위하여서였던 것이니, 이는 농업을 주요한 산업으로 하는 당시에 있어서는 토지와 인구는 모든 재부의 원천이요 권력의 기초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鄭仲夫가 집권하자 널리 田莊을 설치하였다든가,10) 慶大升 死後 정권을 잡은 李義旼을 실각시킨 직후 明宗에게 올린 封事 중

      「在位者가 貧鄙하여 公私田을 탈취하고 이를 兼有하니

       一家의 豪沃이 州에 가득차고 郡에 걸치게 되었다.11)

 

라고 하는 사실 12)등은 당시의 사정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중앙에 있는 무신권력자들의 약탈적인 토지의 겸병이 강행 진전되는 것에 편승하여 지방의 수령들도 鄕吏, 使令들과 결탁하여 비교적 부유한 농민들로부터 貢役의 代價인 役價를 미리받아 횡령하고 그 실지부담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전가하였으므로 그들은 이에 견디기 어려워 유리도산 하였다.13)

이처럼 明宗朝에 이르러서는 위로는 국가의 權要에 있는 위정자들에서부터 아래로는 守令과 鄕吏에 이르기까지 남의 土地를 침탈하면서 권세가들에게 편중된 현상으로 귀착되게 되었다. 이렇게 중앙, 지방의 公田·私田이 權貴들에 의하여 점탈을 당한 결과 자영농민은 佃戶로 몰락하게 되었고, 자영농을 토대로 해오던 國家의 재정수입은 현저히 감소되게 되었다. 이는 곧 田柴科體制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며 田柴科體制의 붕괴는 농민생활을 가속도로 피폐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田柴科體制의 붕괴와 대토지소유의 확대는 자영농민층의 몰락과 佃戶化를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광범한 無田農民을 創出케 되었고, 이들 無田農民은 광범한 유민의 발생과 직결되었다.14)

셋째로, 民亂의 발생은 지금까지 살펴본 정치적, 경제적 모순 때문에 기인 된 것만은 아니다. 무신집권기의 광범위한 피지배층의 항쟁에는 단지 農民·賤民·奴隸들만이 가담했던 것이 아니라 지배층에 가까운 향리·토호 그리고 同正職 소유자들도 상당수가 이에 호응하였다.

무신집권기의 지방관은 일반 백성들뿐 아니라 부유하나 중앙과 연계된 권세가 없는 토호들에 대한 수탈도 병행하였는데, 이것이 西北民의 항쟁이나 慶州와 淸州民의 봉기에서 토호 등 향리층이 광범위하게 가담했던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公州 鳴鶴所民의 봉기나 경주민의 항쟁에서는 정치권에서 소외된 관인층인 동정직 소유자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農民·賤民들 못지않게 고려사회의 불만계층은 同正職 소유자들이었다. 同正職은 正職에 준하여 설정된 散職으로서 閑職 및 初入任職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에 初補되는 자들은 대기하였다가 규정에 따라 實職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관료층이 팽창하여 同正職을 가진 散職자들이 희망하는 실직으로의 진출은 어려워졌다. 결국 同正職 소유자들은 지배층인 官人層에 속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대우가 선행되지 않았고, 이것에 대한 사회적인 불만이 그들로 하여금 農民·賤民들의 봉기에 가담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民亂의 또 다른 요소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주로 賤民들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武臣政權期에 전통적인 身分秩序가 문란해진 데다가 그와 관련하여 피지배신분층의 社會意識이 크게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원래 高麗는 貴族·良民·賤人 등의 신분으로 구성된 신분사회로서 이러한 신분제도는 상층신분인 문신귀족이 정권을 차지하였던 貴族政治期에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실제로 무신란 이후에는 下剋上의 풍조가 사회 전반에 걸쳐 팽배하여 종래의 엄격했던 신분질서는 동요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보잘것없는 신분 출신의 무인으로서 크게 출세하는 사람도 나오게 되었거니와, 事婢의 몸에서 태어난 賤系出身인 李義旼이 武人執政이 되었다든가, 할머니와 어머니가 모두 官妓였던 曹元正 이 樞密院副使(正3品)의 요직에 오른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비슷한 사례는 더 찾아지는데, 이러한 상태의 진전은 천민들로 하여금 재래의 身分制에 대한 관념을 변모시킴과 동시에 그들의 지위 상승 의욕을 크게 자극하고 있었다. 이에 더해 새로운 집권자로 등장한 무인들의 가문이 대개 미천하였으므로 이전의 엄격한 신분질서는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즉, 피지배층은 신분이란 태어나면서 받아들여야 할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될 수도 있고, 또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임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執權武臣 자체가 일반 州人이나 천민출신으로 行伍에서 기용된 무인으로 구성됨에 따라 집권층에 대한 백성들의 관념이 변화하게 되었다. 이제 민중들은 정권을 잡고 있는 집정자도 자기들과 다를 바 없는 신분이라는 관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신분에 대한 백성들의 관념상의 변화는 기층사회의 사회의식의 향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인집권기의 民亂이 農民의 반란 뿐 아니라 신분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奴婢·賤民의 蜂起도 두드러진 것은 이는 바로 신분질서의 붕괴에 따른 신분관념의 변화가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시대 農民·賤民의 항쟁은 초기에는 단순히 지방관의 탐학에 대한 항거로 출발하였으나, 그들이 항거하는 과정에서 점차 의식의 각성을 가져와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자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民亂 발생의 원인과 배경으로 고려시대의 사회 경제적 모순, 중앙통제력의 약화, 그리고 민중의식의 성장 등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요컨대 고려사회는 토지소유관계나 군현제, 그리고 신분제 등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모순이 武臣政權의 성립을 계기로 더욱 가속화됨으로써 전국적인 農民·賤民의 항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Ⅲ.武臣政權期에 發生한 民亂

1.賤民의 亂

(1)亡伊·亡所伊의 亂

서북지방에서 趙位寵 등의 항거가 한창일 때 남부지방에서도 이른바 南賊이라 불리는 백성들의 民亂이 일어났다.  

南賊 가운데에서 가장 기세를 떨친 것은 明宗6년(1176) 정월에 公州 鳴鶴所에서 일어난 亡伊·亡所伊의 무리였다. 먼저 所의 성격을 간단히 알아보면, 所의 기원은       「신라에서 주·군을 설치할 때 그 田丁·호구가 현이 되지 못하는 것은 鄕이나      部曲을 두어 그 곳에 있는 읍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는 또 所라고 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金所·銀所·銅所·鐵所·絲所·紬所·紙所·瓦所·炭所등 구별      이 있어 각각 그 생산물을 공급하였다.」15)

는 史料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지방제도는 각지에 존재하던 동족집단을 신분적 계층적으로 편성한 것으로서 鄕·部曲처럼 所가 군현제의 일환으로 편성된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런데 鄕·部曲이 농경을 주업으로 했던 데 비해 所는 金·銀·銅·磁器등 특수공물을 생산하였다. 그러므로 농경을 주산업으로 하고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려사회에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은 소에게 집중적으로 요구되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所는 국가의 대안없는 수탈체제에 시달려 왔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현종대 이후는 거란과, 인종대 이후는 여진과의 관계에서 역시 소민의 수탈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所를 기반으로 발달하는 수공업이 국가의 소에 대한 맹목적 수탈체제에 시달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음에 비해 농업은 상당히 발전하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고려 전기에는 一易田·再易田이 많아 常耕田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다고 보여진다.16)그러나 인구의 증가·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점차 常耕田이 증가되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문종대 이후의 통치기구 체제의 완비, 문물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이를 토대로 중세사회에서 생산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농경도 상당히 진척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고려 토지제도사 연구에 관한 여러 학설에 따르며 結負制는 온산물의 소출을 기준으로 마련한 제도(면적의 단위)로서 그것이 실제의 면적을 표시하는 頃畝法과 일치하여 고려 중기 이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 후기 언제부터인지 그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隨等異尺制라는 새로운 量田法이 채택되어 결부제의 내용에 큰 변동이 생겼다. 이같은 변화는 경지 일반이 휴한농법의 단계를 지양하여 常耕化하고, 다시 그 상경화한 토지가 비척도에 따라 소출액에 차등이 있었다는 사실의 전제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17) 특히 무신정권 전후의 혼란기와 원 간섭기에는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가중되고 있어서 생산계층으로서의 농민층에게는, 休耕을 통한 농지경영의 소출을 넘어서는 토지생산력의 증대가 요청되고 있었다.18)이같은 농경의 발전은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상경화는 고려 중기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常耕田의 확대로 인해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의 생활은 점차 향상되고 있었다. 그러나 토지생산력이 증가하여 일정한 수익이 보장되자 지배층은 이들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 토지겸병에 착수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은 이자겸이었다. 이 이후에도 권세가들은 탈점·매매·기진·개간 등 여러 형태를 통하여 민전을 탈취하였는데, 이로 인해 고려사회는 지주와 전호 혹은 전호도 되지 못하고 토지로부터 유리되어 떠돌아 다니는 유랑민 등 여러 계층으로 분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는 무신정권이 성립된 이후에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가속화되는 형편이었다.

이같은 농경사회의 분화로 인해 토지를 잃어버린 농민층의 불만과 국가의 직접 수탈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소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 합세하여 드디어 鳴鶴所民의 봉기를 낳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鳴鶴所民이 일어난 사실에 대해「公州 鳴鶴所 사람 亡伊·亡所伊 등이 무리를 불러모아 山行兵馬使라고 스스로 칭하고 공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정부는 祗候 蔡元富와 郞將 朴剛壽 등을 보내어 달래었으나 적은 따르지 않았다.」19) 라는 사료가 전한다. 이러한 기사 내용으로서는 난이 어떤 연유로 발발되었는지 구체적인 실상은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민란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그 지역의 토호나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이 원인이었는데 대표적인 경우로서 明宗 12年이(1182)에 일어났던 管城·富城 그리고 全州民의 봉기를 들 수 있다.

물론 이 사건들이 발생하게 된 근본 원인은 국가의 대민수탈체제에 대한 반발, 피지배층 의식의 향상, 지배층의 변화로 인한 중앙집권체제의 약화 등 내부적으로 잠재된 고려사회의 여러 요소가 결합되어 봉기하게 되었지만, 그 중에서 특히 지방관의 수탈로 인한 반발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들 반란은 대체로 탐학한 지방관을 교체하고 백성들을 진무함으로써 진압되었다. 그런데 이들 농경민이 지방관의 직접 통치하에 있었으므로 대입하는 형세를 보임에 비해 所는 중앙정부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鳴鶴所의 봉기는 바로 중앙정부에 대립되는 형태로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公州 鳴鶴所에서 일어났던 반란의 주모자는 亡伊·亡所伊였다.20) 그런데 이 봉기에서 그 도화선이 되는 사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것이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분노에 의해 폭발된 것이 아니고 서북민의 봉기나 경주지역 농민항쟁처럼 미리 계획된 것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일시적인 監務 파견 등으로 회유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수취체제의 변화나 신분구조의 개편 등 국가적인 큰 변혁을 통해서가 아니면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들이 봉기했을 때 所民뿐 아니라 주변 농민들도 적극 호응하였다.

亡伊·亡所伊가 이끄는 鳴鶴所民이 일어나서 바로 공주를 함락시켰다는 사실은 주변 농민들의 호응이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는 국가나 지방관의 수탈과 더불어 권세가의 대토지겸병에 대한 농민의 불만이 표면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들은 黨與를 모아 가지고 山行兵馬使를 자칭하면서 봉기하여 公州를 함락하는 한편 조정에서 召募하여 파견한 壯士 3천을 패퇴케 할 정도로 그 규모나 세력이 대단하였던 것이다. 이에 정부는 무력에 의한 토벌을 중지하고 회유책을 써 亡伊의 향리인 鳴鶴所를 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선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忠順縣으로의 승격은 국가의 기본정책에 위배되는 조치였다.

무신정권의 성립이래 서북면지역과 남부지역 등에서 연이은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무신정권에 대한 불만이 중앙정계에 까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남적에 대한 토벌군의 파견에 즈음하여 여러 영부의 군인들이 이름을 숨기고 방을 붙였는데,

               시중 鄭仲夫의 아들 承宣 筠과 사위 僕射 宋有仁이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르                 며 횡포하고 방자하다. 남적이 일어난 것은 그 근원이 이로 말미암은 것이                 다. 만약 군사를 동원하여 가서 토벌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 무리들을 제거                 한 뒤에 하는 것이 옳다.21)

이러한 글에서 중앙정계의 일각, 특히 무신들 내부의 鄭仲夫정권에 대한 불만과 그에 따른 정국의 분열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들이 농민항쟁의 원인이 鄭仲夫정권의 탐학에 있다고 파악한 점은 주목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毅宗 시해사건 이후 무신정권의 정당성 내지 도덕성에 대한 불만을 끊임없이 제기하여온 문신 및 하급관료, 同正職 소유자들이 亡伊·亡所伊의 무리들을 끌어 들여 정권을 타도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농민항쟁의 역량이 무신정권 자체를 위협할 만큼 성숙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려정부의 鄕·所·部曲과 같은 천민집단에 대한 대책을 보면, 유공자의 출신지역은 郡·縣으로 승격시키고 그 반대되는 경우에는 郡·縣을 部曲·所 등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위기감을 느낀 고려정부는 명학소를 승격시켜서라도 봉기의 확산을 막으려고 했지만 사실은 국가적 지배질서의 원칙을 정부에서 먼저 무너뜨림으로써, 이제 백성들이 힘을 앞세워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쟁취하려고 할 때에는 정부도 양보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주어 피지배층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즉, 鳴鶴所民은 忠順縣으로의 승격과 지방관 파견에 만족하여, 정부가 叛民에게 보복하지 말고 생업을 보장하라는 정도였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봉기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叛軍은 그에 만족치 않고 도리어 禮山縣을 공략하여 監務를 살해하는 등 더욱 기세를 올렸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정부는 다시 무력토벌로 정책을 바꾸어 大將軍 鄭世猷와 李夫를 處置兵馬使로 삼아 각기 左右道로 보내어 치게 하였던바, 기록에 의하면 亡伊·亡所伊 등은 이에 동 7년 正月「來降」하였다 한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來降한 이들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곡식을 주어 향리로 돌려보냈다는 것인데, 이로써 보면 아마 저들의 來降은 단순한 항복이 아니라 정부와의 어떤 타협에 의한 것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亡伊 등은 다음 달인 2월에 다시 봉기하여 伽耶寺(瑞山 所在)를 寇掠하고, 다시 3월에는 弘慶院(稷山 所在)을 불태우며 10여 명의 승려를 살해하였다. 그리고는 주지승을 시켜 개경정부에 서신을 보내,

          「이미 우리의 鄕里를 승격시켜 縣으로 삼고, 또 守令을 설치하여 按撫              하고는, (다시) 돌이켜 兵士를 발하여 來討하고 우리의 母妻를 잡아 가              두니 그 의도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칼날 아래에서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하지 않고 반드시 王京에 이른 뒤에야 말겠다」

22) 항변하고 있다. 이러한 亡伊 등의 말로 짐작컨대 정부에서는 임시 방편으로 이들을 회유·타협하고는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억압·공격한 것 같으며, 이에 亡伊·亡所伊의 무리가 재차 봉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정부는 鳴鶴所民과 강화를 맺어 縣으로 승격시키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주민들을 안무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사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所民의 가족을 인질로 가두었던 모양이다. 이에 鳴鶴所民들은 정부가 所에서 縣으로 승격시켜 준 자체가 봉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일시적인 조처였음을 깨달았다. 정부가 바라는 것은 봉기의 진압이지 봉기가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여 피지배층의 요구를 적극 수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신분해방을 확실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도 결국은 정부타도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피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정부의 기만적이고 미봉적인 대책과 더불어 또 하나의 불만 대상은 지방의 토호와 더불어 대지주의 성격을 지닌 사원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농민을 수탈하는 정도에 있어서 지방관이나 토호 못지않는 사원의 지주적인 성격이 그들을 가장 괴롭혔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사원은 왕실이나 귀족들의 개인 사찰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 많았으며, 또 그들의 비호를 받아 많은 토지와 인구 그리고 소도 장악하고 있었다. 국가의 강제노역에 의한 사원 건립은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는 정부나 지방관에 대한 원망으로 표현되었겠지만, 또한 그들이 지은 후에 정부의 비호 아래 많은 賜田을 가지고 그 곳에 안주하는 승려들이나 사원이 지닌 성격 자체에도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사원의 귀족적이고 지주적인 성격은 농민봉기가 발생했을 때 타도의 대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叛民은 한때 牙州(牙山) 등 충청도 전역을 공략하여 공주뿐 아니라 청주관내 郡·縣이 모두 농민군의 손에 함락되는 등 다시 기세를 떨쳤으나, 정부는 회유를 통해 난을 진압하려는 작전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토벌을 감행23)하였다. 이러한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밀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亡伊·亡所伊 등은 항복을 요청하였고, 7월에 이르러서 마침내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무려 1년 반이나 지속된 公州지역 農民·賤民의 항쟁은 여기서 끝을 맺게 되었다.  

이와 같은 公州 鳴鶴所民인 亡伊·亡所伊 등의 봉기는 武臣政權 이후 남쪽에서 일어난 民亂 중에서도 상당히 대규모적인 것으로서 고려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集團賤人인 所民이 중심이 되었다는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民亂과 마찬가지로 농민반란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면서 동시에, 叛民에 대한 회유책으로 所를 縣으로 승격시킨 사실에도 나타나듯이 신분해방운동의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고려사회는 鄕·所·部曲등 천민지역이 점차 해체과정을 거쳐, 고려 말기에는 이것이 거의 없어졌으며, 조선시대에 가서는 완전히 소멸되어 郡·縣과 같은 일반 행정구역에 편입되었다.

고대적인 잔재를 극복하게 한 이 같은 사실이 고려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鳴鶴所民의 봉기가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더해 亡伊라는 천민출신의 지도자가 나왔다는 것은, 이후에 일어났던 滿積의 난의 효시가 된 듯하며, 그들의 목표가 신분해방을 거쳐 정부타도를 표방한 점에서는 慶州民의 항쟁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2)奴婢 萬積등의 抗拒

李義旼 勢力을 제거하고 새롭게 등장한 인물은 崔忠獻·崔忠粹 형제였다. 崔忠獻은 쿠데타에 성공한 후 그의 정치세력을 공고히하기 위해 동생 崔忠粹마저 제거하였으며, 明宗을 폐위시키고 神宗을 옹립하였다. 그는 국왕에게 封事 10條를 올려 고려 사회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지적함으로써 앞서의 집정자와 차별성을 나타냈으니,24)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조 국왕은 화재로 인하여 다시 지은 옛 궁궐로 옮길 것

제2조 우리 나라 관제는 祿의 수량으로 계산된 것이다. 정원 이상의 관리를 줄일                  것.

제3조 관직에 있는 자가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公田·私田을 모두 차지하였다. 그리                하여 한 집의 비옥한 토지가 州·郡에 차고 넘치게 되어 국가의 수입은 줄어들고 軍         費는 부족해졌다. 해당 기관을 단속하여 공문서를 검토하고 무릇 빼앗은 것들은 모         두 본주인에게 돌릴 것.

제4조 아전들이 불량하여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걸핏하면 백성들을 침해하며, 또 권세        있는 집안의 하인들은 田租를 다투어 징수한다. 능력있는 사람을 지방관으로 보충하        여 백성들의 산업이 파괴되지 않도록 할 것.

제5조 여러 도에 나가 있는 사신들의 供進을 금할 것.

제6조 승려들의 궁궐 출입과 사원의 利息을 금지할 것.

제7조 군현 아전들의 탐욕을 按察使가 막지 못하고 있다. 안찰사로 하여금 아전의 잘잘못을        가리도록 할 것.

제8조 사치를 금지할 것.

제9조 비보사찰 이외의 사원은 모두 없애버릴 것.

제10조 臺省 책임자를 가려서 임명할 것.

 

이러한 건의서는 앞으로 그가 통치하고자 하는 방향을 제시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제1조는 그가 건의서를 올린 지 불과 석 달 이내에 국왕이 궁궐을 延慶宮으로 옮김으로써 그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제2조와 10조는 관리의 수를 줄이며 적임자를 가려서 임용하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중앙의 관리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崔忠獻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하도록 만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적임자란 어차피 주관적인 성격이 가미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관직을 그대로 지닐 수 없었음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러한 崔忠獻의 封事 10條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부분은 지방관의 탐학과 대토지소유의 금지인데, 3·4·5·7조는 아전이나 권세가의 백성 침탈을 안찰사로 하여금 방지하도록 하라는 내용인데, 이미 그가 정권을 장악할 무렵에는 권세가는 州·郡을 경계로 삼을 정도로 대토지겸병이 유행하여 빈부의 차이가 심각하였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러한 내용만으로는 그가 대토지소유를 반대한 인물로 이해하기 쉬우나, 그 자신이 후일 대토지겸병을 강행하여 진주와 전라도의 일부를 농장화한 것으로 보아 그가 농민편에 서서 개혁을 요구했다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그의 封事 10條보다 10년 전인 明宗 18年(1188) 3月에 내린 국왕의 조서 또한 崔忠獻의 封事와 마찬가지로 수령의 탐학을 금지하거나 대토지겸병을 방지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崔忠獻은 그 이전부터 원성의 대상이 되어온 대토지겸병을 방지하기 위한 시책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농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해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없음을 알고 이같은 건의를 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결국 고려왕조는 대토지소유자인 권세가의 기반 위에 서 있는 나라임에도 이것을 방지해야 하는 모순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崔忠獻이 정권을 잡은 후 백성들의 항거운동은 南都地方에 앞서 먼저 수도 開京에서 발생하였다. 神宗 元年(1198) 5月에 일어난 奴婢 萬積과 味助伊 등의 반란이 그것이었다.25) 《高麗史》卷 129 列傳 崔忠獻傳에 실려 있는 그의 경과와 내용을 소개하면,

         (神宗) 元年에 私동 萬積 등 6人이 北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公私奴隸를

         불러 모아놓고 모의하여 말하기를, "國家에는 庚癸 이래로 朱紫가 많이

         賤隸에서 나왔다. 將相이라고 무슨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무리들만 어찌 능히 筋骨을

         수고로이 하며 매질 밑에서 곤욕을 당하겠는가" 하니 諸奴가 모두  

         그렇게 여겼다. 黃紙 수천 장을 잘라 모두 丁字를 새겨 표지로 삼고

         약속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興國寺 步廊에 모여 毬庭으로 나아가

         일시에 떼를 지어 북치고 소리치면 闕內의 宦者들이 반드시 호응할 것이며,

         官奴 등도 안에서 (일어나) 베어 죽일 것인즉, 우리 무리 역시 城中에서

         봉기하여 먼저 崔忠獻 등을 죽인 후 인하여 각기 그 주인을 살해하고,

         賤籍을 불태워 三韓에 賤人을 없게 하면 公鄕將相은 우리들이 모두

         할 수 있다."하였다. 기약한 날에 모두 모였으나, 무리가 수백 명도 되지

         않으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다시 普濟寺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令하여 이르기를, "일을 비밀리에 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삼가 누설치 말라"하였다. (그런데) 律學博士 韓忠愈의 家奴인 順貞이

        變을 忠愈에게 고하고, 忠愈는 (다시) 忠獻에게 고하였으므로 드디어

        萬積 등 100여 명을 붙잡아 江에 던져 버렸다.26)

 

賤民 중에서도 제일 미천한 신분인 노예만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 발생했던 사건으로서, 그들은 중세사회의 가장 큰 존립기반인 신분제를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그들이 궐기한 목적은 崔忠獻등 奴婢의 소유주를 죽이고 노비문서를 소각하여 삼한에서 賤人을 없앰으로써 농예해방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선 이 항거운동이 규모가 매우 크고 또 계획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7) 처음의 기약한 날에 아주 적게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리가 수백 명에 이르렀고, 표지로 삼기 위해 준비한 黃紙가 수천 장이나 되었다는 데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또한 봉기 가담자들이 각기 담당해야 할 일들이 미리 계획되고 행동의 순서까지도 치밀하게 짜여졌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 봉기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가 노비신분으로부터의 해방에 있었다는 사실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무신정권 이래, 특히 李義旼정권기에 천계 및 하급신분층에 속한 사람들이 정계로 많이 진출한 데 따라 이들의 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 예로 平章事 金永寬의 家奴였던 平亮은 '務農致富'하여 면천하고 散員同正職까지 얻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아들과 처남을 관료의 딸과 혼인시키기까지 하였다. 28) 이러한 사실이 물론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봉기를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항거운동의 주동인물인 萬積은 崔忠獻의 奴婢였다. 특히 崔忠獻정권이 變革보다는 復古의 뜻을 강하게 지니면서 기존 신분질서를 고수하려고 하자 바로 권세가의 노비들로부터 반발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밖에 味助伊·順貞 등 가담한 무리의 대부분도 奴婢였다고 생각되는데, 여기에 동조한 궁궐내의 官奴는 말할 것도 없고, 宦者들 역시도 賤人이었다. 이들은 그와 같은 압박을 받고 지내는 같은 賤人身分으로 일제히 일어나 주인을 죽이고 賤籍을 불태워 우리나라에서 賤人의 존재를 없앰으로써 그같은 신분에서 해방이 되고자 기도했던 것이다. 물론 萬積등이 자기들은

「筋骨을 수고로이 하면서도 매질 밑에서 곤욕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상기시키고 있음을 볼 때 실제적으로 그러한 신체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궐기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만,29) 이들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분해방을 달성하려 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萬積 등의 항거운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정권의 탈취까지도 획책했다는 점에서 보다 큰 특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武臣政權이래, 특히 李義旼政權期에 천계 및 下級身分層에 속한 사람들이 정계로 많이 진출한 데 따라 이들의 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같은 욕망은 특히 宮闕내에서 동조하기로 되어 있던 宦者와 官奴들이 더 강렬했겠지마는, 하여튼 이들은 將相이라고 해서 무슨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도 때만 오면 얼마든지 그 지위에 올라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또 그같은 현상을 이미 武臣亂 이후 현실적으로 나타났던 상황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저들은 이번의 봉기를 통해 公鄕將相이 되어 정권을 장악할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30)

보다시피 萬積 등의 항거운동은 배신자의 밀고로 인해 거사 이전에 진압되고 말았지만 위에서 지적했듯이 그 규모나 계획의 치밀성뿐 아니라 신분의 해방과 정권탈취를 함께 기도한 노예 중심의 봉기로서 매우 주목할 만한 운동이었다. 萬積의 亂은 실패했으나, 노비들의 신분해방운동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져, 그 뒤 神宗 6年(1203)에는 다시 개경에서 家동들의 習戰事件이 일어났다. 즉, 이해 4月에 나무를 하러 나온 家동들이 東郊에서 隧를 나누어 전투연습을 하다가 崔忠獻이 파견한 사람에 의해 50여 명이 체포되어 강에 던져진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31) 아마 이번의 사건 역시 萬積 등의 항거운동과 연관시켜 생각하여 볼 수 있을 듯싶은데, 이는 萬積의 亂 이후에 불문에 붙여졌던 남은 무리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신분해방운동이라 생각되나 자세한 내용은 물론 잘 알 수가 없다.

萬積의 亂이 실패한 이후에도 賤民들의 반란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러한 萬積 등의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그것은 이후 농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지방에서 奴隸와 部曲民이 같이 수탈을 당하는 계층으로서 처지가 비슷한 농민과 연합하여 봉기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당시 농업위주의 사회에서 노비들은 결국 대부분 농경에 종사하는 자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각종 농민항쟁에 적극 가담하여 신분해방을 기도하였다. 1200년(神宗3) 4월을 전후한 시기에 진주의 公私奴婢들이 봉기하여 협주의 奴兀部曲民과 연합한 것이나, 5월 密城(密陽)의 公私奴隸들이 관청의 은그릇을 훔쳐 雲門의 도적에게 투항한 것, 그리고 8월 금주(金海)의 雜族人이 봉기하여 호족을 살해하였다고 한 것 등은 崔忠獻의 私奴였던 萬積의 봉기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 部曲民·雜族人·公私奴隸들마저 농민항쟁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농민항쟁은 신분해방을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2.農民의 亂-金沙彌·孝心의 亂

李義旼 執權期에 해당하는 明宗朝 후반에 들어와 비교적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民亂은 말기에 이르러 다시 발생하게 되었다. 李義旼 政權期에 일어난 가장 대규모의 농민항쟁은 明宗 23年의 金沙彌와 孝心으로 대표되는 雲門·草田民의 봉기였다.  그 시발이 明宗 20年 正月에 東京(慶州)에서 일어난 南賊으로서, 이들의 봉기의 원인은 일반적인 민란처럼 권세가의 토지겸병으로 인한 유민의 증가와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에 견디지 못하여 일어나게 된 것으로, 치밀한 계획 하에 봉기했다기보다는 우발적으로 발발하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들이 일단 봉기하자 같은 처지에서 신음하던 주변 농민들의 적극적인 가담에 힘입어 경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32)  이에 정부에서는 按察副使 周惟저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가 치게 하였으나 그것을 미리 알아차린 적들이 대항하고 나서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그 뒤 同 12월에는 中郞將 姜純義를 南路捉賊使로 삼아 출정케 하고 있으며, 다시 몇 년이 지난 同王 23年2月에 東南路按察副使 金光濟가 적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京兵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을 보면 東京과 그 주변 백성들의 항거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온 것 같다. 이러한 경주지역의 소요는 당시 執政者였던 李義旼의 정치적 기반을 뒤흔들 수 있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李義旼은 慶大升이 집권한 기간 동안 경주에 은둔하면서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그 결과 경대승이 죽은 후에 바로 중앙에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경주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는 사실은 피지배층의 그에 대한 반감도 일조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농민들은 경주가 본향이며 신분적으로는 그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낮은 李義旼이 정권을 장악하자 크게 충격을 받고 고무되었다. 즉, 그들도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정치적 실력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과 더불어 그의 피지배층을 위한 적절한 시책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층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이전에 비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토착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토지겸병을 자행하자 그들도 힘만 있으면 李義旼처럼 될 수 있겠다는 자각과 더불어, 농민봉기의 불길이 번져나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明宗 23年 7月에 이르러 마침내 金沙彌와 孝心이 중심이 된 대규모의 民亂이 폭발하게 되었다. 즉 金沙彌는 雲門(慶北 淸道)에, 그리고 孝心은 草田(慶北 蔚山)에33) 근거지를 두고 유민을 모아 주현을 누비며 극렬한 항거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金沙彌·孝心이 이끄는 雲門·草田民의 봉기는 사원이나 토호의 가렴주구를 이기지 못하여 일어난 민란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하여 고려정부의 전복을 도모함으로써, 중앙정부와는 전쟁의 형태로서 대결하게 되었다. 흉년으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이 농민들의 재봉기를 야기 시켰다고 파악한 정부는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양광도에까지 사자를 보내어서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굶주림에 못 이겨 도적질을 하거나 국가에 세금을 제 때 바치지 못해 감옥에 갇힌 백성들을 풀어주어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였다.34) 그러나 일시적이고 미봉적인 정부의 몇 가지 조처로서 농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매우 미흡하였다. 특히 탐학한 지방관이나 토호에 대한 제재 조치가 전혀 시행되지 않음으로써 농민들은 봉기를 그만두고 귀향했을 경우에 그들에게 돌아올 보복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부의 시책은 전혀 효과를 거둘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반란은 점차 확산되어 급기야는 雲門·草田民의 봉기로 대표되는 경상도 전역의 소요로 확대되었다. 이에 조정은 대장군 全存傑을 주장으로 삼아 將軍 李至純과 李公靖 등을 거느리고 나아가 저들을 토평토록 하였다. 그러나 관군은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여 주장이 자결하는 등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관군이 이처럼 난관에 부딪치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자로서 慶州 출신인 李義旼이 新羅復興의 뜻을 가지고 있어 적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토벌군 대장의 한 사람이면서 그의 아들인 李至純이 적과 몰래 통하여 도리어 저들에게 물자를 제공하는 한편, 자기네의 동정을 알렸으므로 관군은 번번이 패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35)  

이것은 당시의 농민봉기가 雲門·草田 두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즉 남쪽지방 여러 곳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는데, 그 중에서 영역이 넓고 농민군의 수도 많아 세력이 강했던 인물이 雲門에 웅거한 金沙彌와 草田을 거점으로 봉기했던 孝心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제 농민봉기는 경주에서 벗어나 그 외곽 지대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이 점은 李義旼 측근이 지방관에 의한 농민수탈이 경주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경상도 전역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는 각 지방에서 대토지를 소유하고 농민들을 억압하던 사원세력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명종 23년경에 경상도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는데, 이들은 점차 강대한 두 세력권에 합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12세기 이후 부곡민들은 그들이 군현에 예속되어 수탈을 당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잇었는데, 초전에서 농민들이 봉기했을 때 이같은 부곡민이 합세하였으므로 더욱 광범위하게 세력이 확장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慶大升이 죽은 후 명종은 李義旼을 중앙으로 불러들여 정치적인 실권을 맡겼다. 명종은 李義旼이 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중앙으로 불렀다고 한다. 李義旼은 명종 14년부터 26년까지 13년 동안이나 최고 집정자의 위치에 있었는데 이는 崔忠獻 이전의 무신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한 셈이다. 그런데 명종 23년(1193) 7월에 金沙彌·孝心등이 봉기하니, 李義旼이 이들과 내통하여 신라를 부흥시키려 하였다고 한다. 그 내막을 살펴보자.

      李義旼은 일찍이 붉은 무지개가 두 겨드랑이 사이에서 생기는 꿈을 꾸고는

      자못 이를 자부하였고, 또 옛도참에 〈龍孫十二〉 즉 王氏가 다하고 다시

      十八子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十八子는 곧 李字이다. 이로써 마음 속에

      이룰 수 없는 생각을 품고, 탐욕을 줄이고 名士를 거두어서 헛된 명예를

      낚았다. 자신이 경주출신이므로 비밀리에 신라를 부흥시킬 뜻을 가지고,

      賊 沙彌·孝心등과 연결하니 적도 역시 鉅萬을 보내었다.36)

 

李義旼이 반민과 내통했는지에 대해서는 두 설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李義旼이 과연 기록대로 金沙彌·孝心 등과 내통하여 신라의 부흥을 획책했을 것이나에 대해서는 그대로 긍정하는 논자가 있는 가 하면,37) 그것은 李義旼 정권의 부당성을 지적해 보려는 反李義旼勢力의 모략이었다고 하여 그같은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으며,38) 또 반란군을 지원한 사실은 인정하되 그것은 신라의 부흥을 목적하여서가 아니라 다만 李義旼이 자신의 권력을 확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39)

金沙彌·孝心등이 이끄는 雲門·草田민은 관군에 대처하기 위하여 연합세력을 형성하였다. 이 때 李至純은 농민군의 지도자인 金沙彌를 만나 李義旼의 제휴 의사를 전달하고 신라부흥을 획책하였다. 이에 金沙彌는 李義旼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李至純이 가져온 의복·양식 등에 대한 답례로서 사원과 토호에게서 탈취한 금·은·보화를 선물로 보내었다. 앞선 형태의 農民·賤民의 봉기가 결국은 중앙정부를 이기지 못한 선례에 비추어 볼 때, 金沙彌로서는 李義旼을 이용함으로써 농민봉기를 보다 유리하게 이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金沙彌·孝心이 이끄는 雲門·草田민의 봉기는 사원이나 토호의 가렴주구를 이기지 못하여 일어난 민란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하여 고려정부의 전복을 도모함으로써, 중앙정부와는 전쟁의 형태로서 대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떠하든 金沙彌·孝心 등의 항거세력은 크게 기세를 떨쳤던 것이며,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조정은 그해 11월에 다시 上將軍 崔仁을 南路捉賊兵馬使, 大將軍 高湧之를 都知兵馬使로 삼아 將軍 金存仁·史良柱 등을 거느리고 가서 대적케 하였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 듯, 12월에는 賊魁의 한사람인 得甫가 항복해 오고, 이어서 이듬해 2월에 金沙彌마저도 항복하여 목을 벨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孝心 등은 계속 대항하여 한때는 관군의 장군 史良柱를 敗死케 하는 등 다시 세력을 펴는 듯 하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도 곧 대규모의 토벌군에게 밀려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南路兵馬使가 거느린 관군과의 密城(密陽) 싸움에서 한꺼번에 7,000여 명이 죽음을 당하는 참패를 당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데, 그후 12월에는 孝心도 사로잡힘으로써 항쟁은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40) 이로써 1년 반이나 계속되었던 金沙彌·孝心으로 대표되는 雲門·草田민의 봉기는 일단락 짓게 되었다.

즉, 이번의 金沙彌와 孝心 등의 봉기는 각기 다른 지역에서 일어났으나 뒤에는 합류하여 싸웠고, 또 한번의 전투에서 7,000여 명이나 전사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바가 많다. 그러나 이들의 항거도 叛民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장기화하면서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봉기가 진압된 후 명종은 경주지방 농민들에 대한 회유책과 한편으로는 다른 지방의 소요를 사전에 방지한다는 의미에서 여러 시책을 강구하였다. 즉 여러 도에 안찰사를 보내어서 吏屬의 가렴주구를 살피게 하였고,41) 미납된 조세를 면제시켜 부채를 탕감해 주었다.42) 그러나 이같은 조처들은 미봉책에 불과할 뿐 농민봉기를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雲門·草田민의 봉기가 진압된 지 5년도 못되어 경주를 중심으로 다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한편, 약해져 가는 자신의 세력을 만회시키기 위해 농민봉기를 이용하려 했던 李義旼은, 이들이 실패하자 점차 중앙 권력층에서 배척당하기 시작했다. 그의 양면적인 태도는 反李義旼세력의 대두를 가속화시켜 그로부터 채 2년이 되지 못하여 최충헌에게 정치권력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농민봉기가 지배층의 교체까지도 초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金沙彌·孝心의 亂은 비록 실패했지만 초기 단계의 단순한 지엽적인 봉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계획적이고 주변 농민들과 연합투쟁을 벌이는 단계로 승격되어, 이제는 정부와 맞설 수 있는 저력까지 지니게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 농민봉기의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Ⅳ. 나오는 말-社會變動의 意義와 結果

明宗·神宗 때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民亂은 모두 진압되고, 그 후 崔忠獻의 강력한 독재정치로 武臣政權이 안정되면서 그 기세가 꺽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신정권의 민란은 그 역사적 意義가 결코 적지 않았다.

지방분권적 사회인 서구 중세사회의 경우 농민항쟁은 봉건영주와 농민과의 계급적 대립구조를 기본축으로 하고 있다. 이에 반해 고려 사회의 경우는 중앙집권적 사회구조의 틀 속에서 군현제를 통한 국가-재지세력(향리층)을 축으로 하는 대농민 지배방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항쟁은 국가 對 민의 모순관계가 기본적인 틀이었다. 고려시대의 군현제는 국가-재지세력(향리층)을 축으로 하는 대농민 지배방식을 채택하였기 때문에 국가 및 재지세력의 민에 대한 불법적 수탈이 용이한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그 결과 농민항쟁의 타도대상은 일차적으로 지방관과 그에 기생하는 향리층을 위시한 재재토호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중앙정부에 대한 반체제활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시기의 농민항쟁은 삼국부흥운동과 같이 왕조질서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변혁적인 성격을 지닌 항쟁에서부터 지방관과 향리 및 재지토호들의 과도한 수탈의 완화를 도리어 국가에 호소하는 타협적인 성격의 것에 이르기까지 항쟁의 지향성에 있어서 질적인 편차가 심했다. 또한 재지세력간의 갈등, 재경세력과 재지세력의 갈등 및 鄕·所·部曲 등의 부곡제 지역과 노비층의 저항, 호족인과 잡족인과의 대립을 비롯한 영역내 제 계층간의 갈등, 그리고 영역간의 갈등과 같은 것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대체로 국가적인 수취의 실현을 위한 제도장치였던 군현제도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43)

무력항쟁의 농민봉기는 지향성과 지취부가 비록 다양하다 할지라도 주로 부세수취와 力役동원의 모순 및 지주와 전호관계의 모순이 첨예해지는 수확기를 전후한 시기에서부터 이듬해의 춘궁기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 폭발하였기 때문에 자연 국가의 수취질서, 나아가 왕조질서를 부정하는 변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대읍 중심의 郡縣制하에서의 영역동원은 一邑을 단위로 한 것은 물론 주읍단위, 혹은 대읍을 단위로 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이 力役의 장을 통해 광범위한 민의 불만이 결집되어 표출됨으로써 일읍을 뛰어넘어 여러 郡·縣을 포괄하는 농민항쟁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무신정권은 이들 민란의 평정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농민을 위한 시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난민을 위무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권농을 하고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며 조부를 감면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농민과 천민의 반란이 신분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즉, 무신집권기의 민란은 귀족중심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사회체제로 넘어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으므로 고려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자연발생적이고 一回的·分散的으로 일어난 民亂이 지속되면서 지휘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민중이 독자적으로 항쟁을 전개하고, 또 자연경제에 의한 조건과 군현제에 규정된 지역권을 극복하여 지역이 다르고 투쟁목적이 다른 세력끼리도 힘을 합쳐 활동하게 된 것은 주요한 발전이었다. 이에 더해 이후 발생하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민족적 모순에 직면하여 외세에 편승한 왜곡된 항쟁의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이 대내적 모순의 누중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모순의 제거를 위한 抗蒙대열에 나섬으로써 고려가 制限的이나마 주권을 지킬 수 있게 한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民亂은 이후 사회발전의 방향을 제시하고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영역간의 階序的 지배질서로 이루어진 大邑 중심의 군현제가 해체되어가고, 본관제적 질서에 기반한 屬人主義의 수취방식에서 貢戶制의 실시 등을 통한 屬地主義의 수취방식으로의 전환 등은 민의 저항에 따른 중앙정부의 대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광범한 아래로부터의 민의 저항이 있음으로써 武臣政變과 같은 정치체제의 변동도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李義旼·崔忠獻과 같은 武臣政權의 일각이 허위적 이나마 大民改革安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들의 투쟁의 결과에서 나온 지배층의 양보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전근대 고려사회에서 이들 민들이 지배체제 속에 매몰되어 독자적 계급의식을 지니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저항의 성과물은 항상 국가 및 지배층에 귀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은 국가나 지배층에 의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만 왜곡, 변형되어 인식되었었기 때문이다.

일반 백성들의 항거운동인 民亂은 崔氏 武斷政權의 확립과 더불어 그의 강력한 탄압을 받고 熙宗年間에 들어서 면서는 거의 가라앉게 된다. 아직 農民과 賤民들은 그들의 항거운동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 만큼 성장되어 있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봉기가 지니는 의미를 그렇게 낮추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貪官汚吏의 제거나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부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그것이 이후의 사회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民亂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도 바로 이런 점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參  考  文  獻-

※사료

1.《高麗史》

2.《高麗史節要》

33※※

※단행본

3.韓國史編纂委員會《韓國史》20-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1994

4.《韓國史》6-중세사회의 성립, 한길사, 1994

5.《韓國史》7-무신정권과 대몽항쟁, 한길사, 1994

6.朴龍雲《高麗時代史》下, 일지사, 1985

 

※논문

7.이정신《高麗 武臣政權期 農民, 賤民抗爭의 硏究》고려대 민족문화 연구소, 1991

8.유정아〈高麗 高宗·元宗 時代의 民亂의 性格〉《이대사원》22, 23, 1988

9.朴宗基〈12·13世紀 農民抗爭의 原因에 대한 考察〉《동방학지》69, 1990

10.김주일〈高麗 武臣執權期 金沙彌·孝心亂의 性格〉, 홍익대 교육대학원, 1999

11.김용춘〈高麗 武臣執權期 農民抗爭에 대한 일고찰〉, 원광대 교육대학원, 2000

12.차영란〈武臣執權期의 奴婢지위의 變化〉, 인하대학교, 1989

13.김철수〈高麗 明宗祖의 民亂 硏究〉, 계명대학교, 1983

14.윤정원〈高麗 明宗·神宗代의 民亂〉,  고려대학교, 1988

1)무신정권기 농민항쟁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로는 다음이 참고된다.

  南都泳,〈農民·賤民의 亂〉《韓國史論》2, 國史編纂委員會, 1981.

  朴宗基, 〈武人執權期 農民抗爭 硏究論〉《韓國學論叢》12, 1990

  韓國歷史硏究會, 〈武人執權期 硏究動向과 課題〉《歷史와 現實》11, 1994

2) 의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설도 있으나(河炫綱, 〈高麗 毅宗代의 性格〉, 《東方學志》26, 1981) 그것은 지배층 내부에서 귀족과의 대립관계를 유리하게 이끌려고 했을 뿐 농민의 입장에서는 의종의 방탕과 이로 인한 수탈이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고 생각된다.

3) 〈李文著墓誌〉(《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4) 〈林景軾墓誌〉(《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5) 《高麗史節要》 卷11, 毅宗 16年 5月.

6) 〈醴泉龍門寺重修碑〉(《朝鮮金石總覽》上)

7) 《高麗史》 卷101, 列傳 14, 宋訂

8) 《高麗史》 卷15, 仁宗世家 5年 10月

9) 姜普哲, 1975, 〈私田의 改革과 勢力交贊〉, 《韓國史의 再照明》,讀書新聞社

10) 《高麗史》 卷128, 列傳41, 鄭仲夫傳

11) 《高麗史節要》 卷13, 明宗26年 5月

12) 《高麗史》 권 128, 李義旼傳

13) 《高麗史》 卷20 明宗世家 20年

14) 《高麗史》卷7, 文宗元年 7月

15) 《新增東國輿地勝覽》卷7, 京畿道 驪州牧 登神莊

16) 《高麗史》 卷 78, 志 32, 食貸 1, 經理 문종 8年 3月.

17) 金容燮, 〈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 pp.80

18) 후대의 사료지만 《高麗史》卷78, 志32, 食貨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조 조준의 1차 상소문에 의하면 '兼倂之家'가 수조하면서 1결을 3-4결로 늘려 잡았다고 한다. 이는 조준이 당시의 부패한 사회상을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一易田·再易田 따위가 常耕田으로 변천함에 따라 일어날 수 있었던 사실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동의한다.-《韓國史硏究》35.

19) 《高麗史節要》 卷12, 明宗 6年 正月

20) 《世宗實錄地理志》 姓氏條에 亡氏가 보이지 않으므로 亡伊를 이름으로 본다면 추측컨대 천민, 즉 所民이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鳴鶴所는 어떤 소였는지 확실하지가 않고, 현재 대전지역인 이곳은 토지가 척박하고 지하자원이 전혀 생산되지 않으며 바다도 없는 것으로 보아 수공업집단이었을 것으로 짐작됨

21) 《高麗史節要》 卷12  明宗  6年8月

22) 《高麗史》 卷 19 世家 明宗 7年3月

23) 당시 南賊處置兵馬使로서 청주에 주둔했던 정부군의 지휘자는 鄭世猷이고, 南路捉賊左道兵馬使로서 驪州지역에 머무르면서 李光을 사로잡은 사람이 梁翼京이다. 그리고 南賊制置左道兵馬使로서 예산방면으로 가서 孫淸을 죽인 사람은 李夫였으리라 보여진다. 반란민이 3파로 나누어 북쪽으로 진격하자, 정부군도 청주를 거점으로 3파로 나누어서 그들을 방어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24) 《高麗史》 卷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25)만적의 난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참조된다.

  邊太燮, 〈萬積亂 發生의 社會的 素地〉(《史學硏究》4, 1959 ;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洪承基, 〈武人執權時代의 奴婢叛亂〉(《高麗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26) 거의 같은 내용이 《高麗史節要》 卷14 神宗 元年 5月에도 실려 있음

27) 洪承基, 〈高麗 武人執權時代의 奴婢叛亂〉《全海宗華甲記念 史學論叢》, 1979 ; 《高麗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pp.320-321

28) 《高麗史》卷20 明宗 18年 5月

29) 洪承基,〈高麗 武人執權時代의 奴婢叛亂〉《全海宗華甲記念, 私學論叢》,1979 : 《高麗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pp.317

30) 洪承基, 〈高麗 武人執權時代의 奴婢叛亂〉《全海宗華甲記念 私學論叢》, 1979 pp.318-324

31) 《高麗史節要》卷14 神宗 6年 夏4月

32) 《高麗史節要》卷13, 明宗20年 正月

33) 草田의 현재 위치는 대부분의 논자들이 蔚山으로 보고 있으나, 이와는 약간 다른 견해도 있다.

34) 《高麗史節要》卷13, 明宗 23年 3月·4月.

35) 《高麗史節要》 卷 12 明宗 23年 秋7月

36) 《高麗史》卷128, 列傳 41, 叛逆 2, 李義旼.

37) 河炫綱, 〈高麗時代의 歷史繼承意識〉《梨花史學硏究》8, 1976 ; 《韓國의 歷史認識》(上), 創作과 批評社, 1976, p.202.

38) 金塘澤, 〈李義旼 政權의 性格〉《歷史學報》83, 1979, pp.37-39

39) 旗田위, 〈高麗の武人と地方勢力-李義旼と慶州〉(《朝鮮歷史論集》上), 李義旼이 金沙彌·孝心과 내통했다고 하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孝心은 밀접한 관련이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淸道와 慶州의 土姓에 金氏가 나오는데, 이것으로 보아 확인할 수는 없지만 金沙彌는 무신정권을 계기로 중앙권력에서 소외된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야욕을 지니고 있었으리라 보여지는데, 이같은 점이 李義旼과 내통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했을 것 같다. 반면 孝心은 姓이 없는 인물로 추측하건대 農民이나 賤民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연합했다고는 하나 사실은 金沙彌가 주도권을 장악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주도권 쟁탈이라는 내분과 더불어, 金沙彌의 李義旼과의 제휴라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연합이 깨어지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한편 金光植은 〈雲門寺와 金沙彌亂〉(《韓國學報》54, 1989)에서 金沙彌의 이름으로 추론하여, 그를 雲門寺의 在家僧이며 淸道지방의 재지세력으로 보았다.

40) 邊太燮, 〈農民·賤民의 亂〉《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3 pp.251-254

41) 《高麗史節要》卷13, 明宗 25년 3월.

42) 《高麗史節要》卷13, 明宗 25년 9월.

43) 이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할수 있다.

    채웅석, 〈12·13세기 향촌사회의 변동과 '民'의 대응〉,《역사와 현실》3, 한국역사연구회, 1990

    朴宗基, 〈무인집권기 농민항쟁 연구론〉,《韓國學論叢》12,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