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도자기에 대한 고찰

 

Ⅰ. 머리말

 

Ⅱ. 1. 고려 청자의 시대적 변천

      1) 초기 청자

      2) 청자의 발견

      3) 고려청자의 결정기

      4) 청자상감의 전성기

      5) 청자의 쇠퇴

      6) 상감청자기

 

    2. 고려 청자의 종류와 문양

      1) 순청자

      2) 상감(象嵌)청자

      3) 화청자(畵靑磁)

      4) 퇴화(堆花)무늬 청자

      5) 진사(辰砂)청자

      6) 화금(畵金)청자

      7) 철채(鐵彩)청자

      8) 명문(銘文)이 있는 청자

   

 3. 고려 청자의 제작과정

 

Ⅲ. 맺음말

 

 

 

 

 

 

 

Ⅰ. 머리말

  

  고려는 통일신라에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여진 자기의 제작기술과, 청자를 중심으로 계속되는 자기유입(완제품)을 그대로 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 시대 청자 가마터로는 전남 당진과 전북 진안, 부안, 고창, 그리고 경기도 고양 등을 들 수 있으며 모두 서해안에 분포되어 있거나 가깝다. 9세기경(통일신라)에 서해와 일부 남해를 통하여 청자와 그 기술이 중국에서 대량 유입, 초기청자가 제작되어 9세기 후반에 번창했을 것이라는 의견들이 있다. 청자의 원류는 중국에 있으나, 국내(통일신라·고려)에서 발전한 청자의 제작기술과 더불어서 시대적으로 계속 중국으로부터 수입되고 전수된 청자와 그 축적된 기술이 고려청자 제작기술의 절정기(12세기)에 와서는 오히려 중국의 청자를 비색이나 기법에 있어서 앞질러 버렸다는 견해가 크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서기 372년 고구려를 통한 것이 기록상 최초라 할 수 있다. 이후 한반도 주변국에도 불교가 파생되었고 고구려를 포함한 백제, 신라에 많은 수의 절이 세워지면서 그 종교적 뿌리를 확고하게 심게 된다. 불교의 포교로 인한 사람들의 불교사상이 깊어질수록 자연스러운 형태로 그 문화 또한 생활 속에 깊게 파고들게 되고, 이러한 과정 속에 중국 불교의 형태를 벗어나서 한국적인 불교문화의 특징이 생기기 시작한다.

  2500여년 중에 정반대왕의 태자로 태어났다는 샤가무니(Shakamuni)는 29세 이후 인간사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이것에 대해 해탈하고자 태자의 생활을 버리고 출가를 결심한다. 6년 동안의 철학적 사색에 의해 해탈에 이르게된 샤가무니의 깨우침을 이후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그의 추종자들은 열심히 노력하였다. 샤가무니의 모습과 철학을 이전의 기록을 중심으로 표현하고 퍼뜨리기 위해서 적절한 방법 등을 꾸준히 연구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불교의 독특한 문화가, 흐르는 국가와 시대에 맞게 변화하며 크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통일신라(기록상)에 중국에서 받아들여진 자기의 유입과 제작기술은 이전에 함께 우리나라에 전파된 불교와도 그 맥락을 함께 했다. 그것은 불교문화 속에 도자문화가 포함되어 음을 말하는 것인데, 원형이 송나라에 있는 고려시대(12세기)에 제작된 매병(도판1-靑磁象嵌雲鶴紋매병·서울 전성우씨 소장)의 경우, 상단과 하단에 연꽃의 변형된 잎이 상감기법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고 이것은 청자에 한정된 인용이 아닌 불상의 앙련좌와 복련좌, 사찰의 단청 및 조각, 가구, 복식 등 다양한 곳에 미적, 종교적 성향을 가지고 들어가 있다. 12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청자 주전자(도판2)의 경우도 앞에서 언급한 매병과 같은 균형적 위치에 연꽃잎이 상감 되어 있고 앞에서 언급한 매병과는 다른 포도문과 童子가 그려져 있는데, 그려져 있는 동자의 경우 童子僧과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바, 앞으로 그 연관성을 심도 있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 외에 또 다른 청자에서 불교와 관련이 있는 추상성을 띄고 조형적 요소를 지닌 문양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청자대접에 많이 나타나는 이러한 종류의 문양들은 사찰의 건물에 그려지는 단청에서만이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에 이도 불교문화 속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선 불교만의 조형적인 요소가 청자에 移入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상감청자는 그 사용처가 그 시대(고려)의 절보다도 귀족들의 생활 속에 더 많이 있던 것이기에 사찰이라는 한정된 장소를 벗어나서 일반적인 회화적 문화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꽃은 오수에 더렵혀지지 않는 청정함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연잎의 의미와 형태를 인용한 불구의 제작은 그 종교적 상징성과 부합해서 적용 용도가 커졌을 것이다. 그와 함께 대중에 확대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청자의 다양한 문양은 거의 대부분이 불교의식 속에서 美化되어 가치성을 가지고 발전한 미술적인 결과물이 그 母胎였을 거라는 추측을 다소의 시대적 차이는 있지만 비교를 통해서 해볼 수 있다.

  고려시대 佛敎用具중 원패에 표현된 조각들은 청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며, 시련의식에 쓰이는 가마에 표현된 것에서도 문양의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불교와 불교의식의 전래가 시기적으로 청자의 국내 유입보다 앞서기 때문에 서로(불교미술과 청자)의 연관성은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다.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청자의 문양들이 9세기 중반 이전의 陶器(土器-國內)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급작스럽게 고려에 들어와서야 문양의 발전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은 불교의 번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청자의 발전은 그 시대 도공들에 대한 귀족들의 요구에 의한 결과였고, 불교의 발전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말기에 이르면서 청자는 정치상황과 맞물려서 국가와 그 운명을 함께 한다. 오랜 門閥政治와 외국의 잦은 침입으로 고려왕조는 무너지고 시기를 같이해서 청자의 맥도 끊기게 된다. 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제작되던 당시의 환경이 국가의 몰락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예술적 품격을 지닌 고려청자를 굽던 도공들은 작업을 중단하거나 다른 먹고 살 궁리를 찾기 위해 전국의 각지로 흩어지게 되고 이후 분청사기1)라는 도자 문화가 백자문화와 때를 같이하여 새롭게 생겨나는데, 분청사기 제작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청자의 맥을 이으려는 하나의 노력 중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었다.

  중국의 영향 없이 새롭게 생겨난 도자 문화였으나 청자를 그 모태로 가지고 있었기에 모양뿐만이 아니라 문양에 있어서도 청자를 닮은 점이 많았다. 이것은 분청사기에 있어서도 불교와의 연관성이 지속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분청사기와 그 시기적인 환경을 같이한 백자의 경우에는 도자기의 표면에서 문양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당시에 중국에서 꾸준하게 수입된 중국 백자에 뿌리를 둔 제작이 이루어 졌고, 고려청자와 조선 분청사기의 특징적인 상감기법이 쓰이지 않았다. 불교문화와 관련해서 백자만의 독립적 특징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시에는 청화 안료가 국내에서는 생산이 안되었기 때문에 백자 표면의 회화적 표현이 쉽지 않았던 면도 있었으나, 정치인들 사이에서 불교의 폐해를 강하게 인지했던 시대적 상황이었기에 불교적 색채가 강한 청자나 분청과의 연관을 의도적으로 피했음에서 조선 초기백자의 제작이 보수적인 성격으로 이루어졌음을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기록상 서기 372년 고구려를 통하여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된 이후로 현재까지 불교는 종교 그 자체를 떠나 우리사회에 하나의 커다란 문화적 존재로 깊이 자리잡고 있다. 청자 또한 삼국시대 이후 중국에 의해 우리에게 전수되었고 고려에 이르러 고려문화를 대표하는 국가적 문화 브랜드(Brand)로서 '고려청자'는 우리에게 조상이 남긴 커다란 자랑으로 남아있다. 고려청자는 불교의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은 문화양식이고 불교는 실질적으로 한국문화의 주를 이루는 종교적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불교와 고려청자를 연구함에 있어서 둘의 상관은 필연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직까지 불교가 한국 문화에 남긴 커다란 업적들은 한국역사 전반의 종교적 영향이라는 커다란 명제에 가려져서 문화적 영향의 세분화된 연구가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본고는 불교가 그 시대에 영향을 미친 문화적 관계사 연구정립의 작은 하나의 보탬이고 고려청자가 독립적인 하나의 문화양식으로서 그 문화적 비중만큼 다양한 시각의 학문적 연구도 뒷받침 돼야한다는 사견에 의한 행동인 것이다.

 

 

Ⅱ. 고려 청자에 표현된 불교의 흔적

 

1. 고려 청자의 시대적 변천

 

 1)초기 청자

  도자기발전사적견지에서 보면 10세기는 선행한 삼국과 발해와 후기신라 때에 발전되어 온 록유나 황갈유 등 연유계통의 도기들과 회유를 이용한 도기나 자기를 더욱 발전시켜 고려의 특유한 자기를 만들어 낸 시기였다. 고려초에는 이미 많은 지역에서 청자기를 만들어내게 되었으며,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질도 비교적 높은 수준에 오르고 청자가 사용하는 범위도 보다 넓어졌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청자로서 햇무리굽계 청자와, 녹청자가 있다.

  ①햇무리굽계 청자

  중국의 영향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이 햇무리굽계 청자는 9세기 후반경부터 비롯되어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되며 햇무리굽계 청자가마터는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었다. 이 초기 청자를 대표하는 소위 햇무리굽 대접이 있다. 이 대접은 굽 모양이 햇무리굽이고 耐火土빚음눈에  側斜面이 직선인 점 등 공통적인 특색이 있고, 그외에 內底에 圓刻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며, 굽 밑면의 넓이가 아주 넓은 것과 약간 넓은 것 등이 있다. 대체로 굽 밑면의 넓이가 약간 좁은 것은 내저에 원각이 없으며 유약이 얇고 갈색을 머금었으며 태토의 입자가 매우 곱다.(초기청자Ⅰ형식) 굽 밑면의 넓이가 넓은 것은 內底圓刻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며 유약이 약간 두터운 편이며,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비색이 진하나 그 발색이 아름다운 것이 있다.(초기청자Ⅱ형식) 이 두형식의 청자는 선후관계가 큰 차이 없이 Ⅰ형식 후기와 Ⅱ형식 초기가 병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②綠靑磁

  이러한 햇무리굽 청자 이외에 녹청자라고 명명한 일군의 조질청자가 있다. 녹청자는 胎土가 거칠며 유약표면이 안정되지 못하여 우툴두툴하며, 표면색은 구운 청자색이 아니라 녹갈색 계통이다. 녹청자는 햇무리굽 청자가 만들어진 연후에 지방의 수요에 대한 공급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초기청자Ⅱ형식의 중·후반경에 민간 수요용으로 발생·발전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양질이고 磁化된 햇무리굽 청자는 비싼 것이어서 상류계층과 지방호족들이 쓸 수 있는 것이었으며, 녹청자는 일반 서민과 지방민이 사용한 것을 것이다. 녹청자는 器形도 다양하지 않으며 대접·접시류가 대부분이고 방구리·이형매병·치마병·항구리 등이 약간 있을 뿐이다. 녹청자는 10세기 후반경부터 시작하여 11세기 전반경까지 많이 제작되었으나 점차 양질청자에 흡수되었다.

 

 2)청자의 발견

  ①11세기 전반

  10세기 말-11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의 도자기술은 바야흐로 숙련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기형이 다양해지고 종전의 기형에 변화가 있었으며, 문양의 표현기법과 문양의 내용이 다양해진다. 초기청자 시대의 병·주전자 등 금속기의 영향을 받아 각 부위의 연결이 예리하게 꺽이는 강인한 형태에서 점차 모든 부위가 유연한 곡면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음각문양이 가늘고 부드럽게 세련되고 국당초문·파도어문·앵무문 등 그 종류가 다양해지며, 耀州窯式 陽印刻文이 많이 등장한다. 초보적 양각과 철화문·퇴화문이 나타나며, 상감2)문양도 계속 시도된다. 초기청자 시기에는 특수화형이며 매우 드물던 花形 대접, 접시 등이 나타나며 瓜形 등 象形 器皿도 등장한다. 유약은 점차 밝아져서 12세기 전반기의 翡色釉로 접근한다.

  ②11세기 후반-12세기 초

  이상과 같이 긴 숙련기를 고려의 도자기는 11세기 중엽부터는 세련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청자·백자의 기형과 의장에 유연한 곡선주조의 고려적인 풍모가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그 釉·胎의 질과 번조기술, 문양의 표현기법과 문양 자체가 또한 진일보했던 것이다. 청자의 기형에서 일부 금속기를 모방한 주전자 등에는 중국의 영향이 남아 있으나, 대접·접시 등 일반 기명들은 구연이 유연하게 외반되면서도 날렵하며 단정한 가운데 예리한 맛이 깃들여 있다. 문양에는 상감기법의 시도가 조금씩 늘어나며, 음각·양각이 예리하나 늘어나고, 특히 양인각이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특히 11세기 말경에 이르면 요주요식의 각개 문양의 周綠을 날카롭게 부각시키는 방법은 점차 사라지고, 문양의 浮彫가 아주 낮아지면서 매우 부드러운 모양이 된다. 또한 각개 문양의 중심부위가 더 두드러지면서 그 주위를 음각으로 마무리짓는 새로운 방법이 시도되었다. 또한 이 세련기에 눈에 띄는 고려청자의 특색은 釉·胎 등질이 일정하고, 유약은 기포가 많으며 반투명성인데 전반기보다 녹색이 좀더 줄었으며, 胎土도 철분이 줄어 밝은 灰色이며, 번조시 환원이 잘 보장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는 바야흐로 다가오는 12세기 전반기의 고려청자 절정기를 앞에 두고 북송 자예기술의 차원에 발돋움하면서 독창적인 고려 도자예술 창조의 기틀을 착실하게 다져 나간 시대였다.

 

 3)고려순청자의 절정기

  순청자의 절정기인 12세기 전반기 50년 동안은 고려도자로서뿐만 아니라 한국도자사 가운데 하나의 절정기였다. 순청자 절정기의 비색은 시유된 유약의 두께가 얇으나 비취옥과 같이 녹색이 비쳤으며 유약내에 미세한 기포가 많아 胎土가 은은히 비쳐 보인다. 그러므로 섬세한 음각이나 세밀한 양각 등이 은은하게 나타날 수 있어 한층 기품이 있다. 이때는 유약과 함께 器面의 정리도 매끄럽고 전체적인 균형이 준수하고 경쾌하다. 병·주잔자 등 큰 그릇이 굽을 깎는 방법과 번조시 굽 밑 유약을 훓어 내리고 눈을 받치는 방법도 가능한 단아하고 깨끗하게 하였다.

 

 4)청자상감의 전성기(12세기 중엽-13세기 전반)

  고려청자는 다른 도자와는 달리 두 번의 절정기를 맡게 된다. 그 두 번째 절정기가 고려 18대 毅宗 연간이며, 그 절정기가 조금씩 수그러들지만 대체로 몽고가 침입하여 커다란 국난을 당하는 1220년대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의종 연간에는 상감기법과 상감시문이 본격화되면서 청자의 유약이 더 맑아 투명하여지고, 기형의 예리함은 내재적인 정신으로 숨겨지고 표면은 은근한 양감이 있는 부드럽고 유려한 형태로 변모한다. 이때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청자상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고, 청자유약이 한층 맑고 밝아진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청자상감 전성시대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고려의 국토가 그들에게 짓밟히고 고려정부가 강화도로 들어가서 40년간에 걸치는 저항을 시작하는 1220년대 무렵까지 약 80년간에 걸쳤던 것이다.

 청자상감법은 이 기간 중에 다양화되고 청자 전체가 양산되었다. 특히 象嵌意匠 무늬는 12세기 전반기에 양인각문양 등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운학문 등 단독문양과, 모란·국롸절지 등 折枝문양과, 사실적이면서 회화적인 牡丹唐草文 등이 상감으로 시문되어 문양으로 세련되는 등 독자적인 주제와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의 문양구성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주문양과 종속문이 함께 등장하여 적재적소에 따로 시문되면서 서로 보완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이로써 고려청자 문양은 공예의장으로서 하나의 완성을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뿐만 아니라 상감무늬가 세련될수록 그 투시효과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이러한 투명도의 추구 때문에 오는 부작용 또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이 곧 빙렬이라고 일컫는 식은테의 일반화였다. 즉, 이 청자상감 전성시대의 釉調는 釉質의 硬度가 높아짐에 따라서 빙렬이 유면 전체에 분포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이것은 12세기 전반기 순청자 전성시대의 빙렬이 없는 유조와는 대조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청자 질감과는 점점 거리가 더 생기게 되었으며 釉의 질감뿐만 아니라 색감과 문양에서도 또다른 고려청자 특유의 품격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5)청자의 쇠퇴

  몽고군의 침입으로 수십 년간에 걸친 사회 불안과 경제의 혼란으로 그처럼 정기어렸던 고려청자의 기품이 흐트러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양상은 元宗代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쇠퇴의 그림자는 청자의 기형, 태도와 유약, 번조수법 그리고 장식의장에 이르기까지 고루 미치게 되었다. 이것은 지나간 영광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었다. 忠烈王3) 시대에 일시적으로 元 세력의 지배체제가 안정되면서 사회는 다시 평정을 되찾고 고려의 磁藝도 활기를 되찾는 듯했었지만 그 이후 얼마 안되어 다시 쇠퇴일로를 걷게 되고, 결국은 과거의 軌範에서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청자상감의장은 과거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조잡하고 거칠었으며 그 표현에는 밀도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象嵌意匠의 일부를 일정한 印形으로 押捺해서 손쉽게 처리하는 등 매우 절제 없는 풍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 다음 시대에 등장하는 조선시대의 인화문기법의 시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자기의 특징은 첫째로 그릇의 종류와 수량이 대폭 늘어나고 그릇형태가 대범해지고 살이 두터워지는 등 둔중한 감이 도는 것이며, 둘째로 색깔이 암회청색, 암갈황색으로 된 것이고, 셋째로 무늬가 복잡하게 장식되는 한편 많이 생략되고 간략화된 것과 새로운 무늬류가 등장한 것이다. 넷째로 자기에 간지명이나 소속기관명, 무덤명 등 제작 시기와 소속명을 명백히 밝힌 것 들이다.

 살펴보면 1230년대부터 고려조가 쇠망해 버리는 1392년 무렵까지 고려의 磁藝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리고 간단없이 그 하한선을 더듬었다. 고려청자의 두드러진 곡선의 아름다움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흐트러져서 우아 단정하기보다는 혼란한 사회에 알맞는 무겁고 둔한, 즉 실용성과 가능만을 생각하는 안이한 便化의 造形으로 바뀌어 가는 경향이 짙어만 갔다. 160면 동안에 걸친 긴 경로를 하나로 묶어서 쇠퇴기라고 본 것은, 고려의 국정이 그러했듯이 고려의 磁藝 또한 고려의 국운과 너무나 닮은 경로를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6)상감청자기

  상감청자기4)는 비색청자기와 함께 고려자기를 대표하는 독특한 자기이다. 상감자기는 소지의 겉면에 무늬홈을 파고 거기에 바탕흙과는 다른 색흙을 밀어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청자기 외에 백자기, 검은자기 등에 다 적용되었는데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청자기였다. 청자기에 상감을 하는 경우에는 바탕흙보다 철분이 훨씬 많이 섞인 색흙이나 백토를 상감재료로 썼다. 이 경우에 철분이 많은 색흙은 환원소성하여 흑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나타나고 백토는 흰색으로 나타난다. 상감청자기의 일반적 특징은 선명하고 뚜렷한 무늬와 시원한 회청색 계통의 맑은색, 아름다운 형태가 유기적으로 잘 결합되어 진귀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상감기법으로 장식된 무늬들은 어느것이나 다 음각5)이나 양각 등 조작적 기법으로 처리된 무늬들에 비하여 더 선명하고 뚜렷하며 바탕색깔과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은근하게 안겨온다. 음각이나 양각법으로 처리된 무늬들은 바탕을 파거나 돋구어주는 방법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파진부위에 유약이 더 깊이 차면서 무늬를 나타낸다. 그러나 상감한 것은 바탕색깔과 다른 색흙을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대조되면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한편 같은 색깔의 유약이기 때문에 무늬와 바탕이 자극적으로 대조됨이 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하게 살아난다. 이것은 상감기법이 조작적 기법과 회화적 기법이 배합되어 있는 특성과도 관련되어있다.

 상감청자는 물병, 기름병, 꽃병, 화분류, 화장함, 자기베게 등 크기와 형태가 각이하다. 무늬는 동물무늬, 식물무늬, 환상무늬, 기하무늬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대체로 서로 배합되어 자연풍경을 재현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2. 고려 청자의 종류와 문양

  청자는 그 발달 과정에 따라, 또는 기법(技法)상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만들어졌다. 먼저 특징을 따라 분류해 보면, 순(純)청자, 상감(象嵌)청자, 화(畵)청자, 퇴화(堆花)무늬청자, 진사(辰砂)청자, 화금(畵金)청자, 철채(鐵彩)청자, 명문(銘文)청자 등의 여덟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앞으로 좀더 구체적인 관찰을 하기로 한다.

 

 1)순청자

  순청자6)는 상감이나 또는 다른 물질에 의한 장식이 가미되지 아니한 것을 말한다. 순청자를 표면의 장식 무늬, 또는 그릇의 형태를 따라 다시, 소문청자(素文靑磁)·양각(陽刻)청자·음각(陰刻)청자·투각(透刻)청자·상형(象形)청자 등으로 잘게 나눌 수 있다.

  ①소문청자

  소문청자는 그야말로 어떠한 장식도 가미되지 않은 청자를 말한다. 상감은 물론 양각·음각 등의 장식도 가미되지 않은 것으로, 이러한 청자일수록 정선된 흙으로 얇게 구워내고 그릇의 모양, 유약의 색조가 특히 뛰어남을 오직 생명으로 삼은 것이다.

  청자로서는 가장 초기의 작품으로 생각되며, 그 중에는 아직 비색이 되지 않은 것도 있어 초기 청자의 발달 과정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소문청자의 연대를 고증할 수 있는 자료로서는 1916년 경기도 개풍군 영북면 월고리 궁녀동의 한 고분에서 청자 소문잔·백자 소문 병·청동 숟가락·옛돈 등이 발견되었다. 이고분에서는 승안(承安) 3년 명(銘)의 송자청(宋子淸) 묘지(墓誌)가 딸린 석관(石棺)이 발견되었고, 유물은 그 석관 속에 있어다.

  승안이라 함은 금(金)나라 장종(章宗)의 연호(年號)로, 그 3년은 1198년 고려 신종(神宗) 1년에 해당한다. 또, 1933년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매월리(楊平郡 楊東面 梅月里)의 한 고분에서 청자 소문사발·청자 소문병·백퇴 선무늬 베게, 청동 병·숫가락 등과 함께 옛돈 5매가 발견된 일이 있다. 옛돈들은 모두 송나라 것으로 그 중 가장 뒤의 것이 '원풍통보(元豊通寶)'이다.

  이러한 자료를 통하여 볼 대 소문청자는 11세기 후반에는 이미 생산되고 있었고, 12세기 말까지도 계속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②양각청자

  양각청자는 나타내고자 하는 무늬를 그릇 표면에 도드라지게 하는 수법이다. 양각청자는 기법상으로 보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뒤에 말하려는 상형청자에 있어 나타내고자 하는 물상(物象)에 따라 필연적으로 양각 수법을 이용하게 되는 경우이다.

  가령 동물을 모방하였을 경우, 짐승의 머리와 식물을 모방하였을 경우, 꽃잎 등을 양각 수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비로소 효과를 낼 수 있게 된다.

  다른 하나는 단순한 장식을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나 다른 물질이 첨가되지 않고 양각으로 무늬만을 표현하여 청자 유약을 입혀서 구워 낸 것이다. 역시 초기 청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양각청자에 이용되는 무늬로는 보상화(寶相花)·연화(蓮花)·부용(芙蓉)·모란(牡丹)·연화당초(蓮花唐草)·반룡(蟠龍)·운학(雲鶴)·파도(波濤)·버들과 갈대·원앙(鴛鴦)·도철(도철)·서금(瑞禽)·봉(鳳) 등을 들 수 있다.

  양각청자는 지금까지 상당수가 발견괴고 있으나 명종 지릉에서 발견된 청자양각 운학무늬 사발·청자양각 육화형 모란무늬 접시 등은 연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참고가 되는 것이다.

  또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에서 발견된 모란무늬 수막새와 당초무늬 암막새는 의종7) 때 지은 양이정을 청자 기와로 덮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양각정자의 연대를 고증하는데 참고가 될 만한 자료가 경기도 화성군에서 발견되었다.

  ③음각청자

  음각청자는 그릇 표면에 음각으로 무늬를 새긴 것을 말한다. 순청자에 새기는 음각 무늬는 극히 가는 선으로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그 위에 유약을 입혀서 구어 내기 때문에 음각선도 분명하나, 유약이 투명하게 완전히 녹지 않으면 선이 나타나지 않는 수가 많다.

  따라서 매우 숙련된 기술이 아니면 효과를 내기 어려워, 초기 청자의 우수한 작품 가운데서나 볼 수 있다. 굵은 선으로 음각하는 수도 있으나, 때로는 음각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음각이 주인지 그로 인해서 도드라지는 부분, 즉 양가인지를 구별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음가되는 무늬로는 연화(蓮花)·모란(牡丹)·연화당초(蓮花唐草)·반룡(蟠龍)·쌍앵무(雙鸚鵡) ·국화·국화 당초봉 등이 있다. 지릉에서는 청자음각 연화무늬사발·청자음각 모란무늬 타구 등이 발견되어, 연대 고증에 참고가 되고 있다.

  또, 1939년 3월 경기도화성군 장안면 석포리의 한 고분에서 청자음각 봉무늬 사발·처자양각 초화(草花)무늬 사발·숫가락·젖가락·은제 뒤꼬지·청동 쌍룡(雙龍)무늬 거울 등, 각 한 개와 옛돈 37매가 발견된 일이 있다. 이들 유물 중의 옛돈의 연대를 살펴보면 다른 유물, 그 중에서도 음각이나 양각청자의 연대를 고증하는데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이 옛돈에는 당대(唐代)의 '개원통보'8)와 '건원중보'9) 그리고 고려 숙종 2년(1097년)에 만든 '삼한통보'각 1매 외에, 북송(北宋) 새대의 것 34매가 포함되어 있다. 북송 시대 옛돈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은 '지도원보'이고 가장 새것이 '정화통보'이다.

  따라서 이 고분이 만들어진 것은 정화의 연호(年號)를 사용하던 1111년부터 1117년 이후의 일이고, 여기서 발견된 청자는 그보다 앞서서 만들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④투각청자

  그릇의 표면을 투각해서 무늬를 표현하는 수법을 말한다.  투각에는 두 가지 방법을 쓰는데, 하나는 나타내고자 하는 무늬 자체를 투각하여 파내는 방법이다.

  청자상감 투각 귀갑무늬 갑·청자투각 당초무늬합·청자 칠보(七寶) 투각 향로·청자 투각 돈(墩) 등은 특히 우수한 작품이다. 어느 것이나 숙련이 필요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이상의 양각·음각·투각의 장식 수법은 어느 한 가지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적당히 혼용하면서 효과를 내고 있고, 때로는 상감수법을 같이 쓰는 수도 있다.

  ⑤상형청자

  상형청자는 이미 「고려도경」10)에서 지적되고 있다. 당시 서긍의 눈에 띄었던 상형청자, 즉 위에는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으며 밑에서는 연꽃이 받치고 있다고 한 향로가 어떠한 모양이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 그와 비슷한 향로를 지금도 볼 수 있어 대체로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서긍이 이러한 상형 청자를 가리켜 "가장 정교하고 절묘하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눈에는 매우 놀랍게 보였을 것이고 솜씨가 뛰어나 감탄하였던 모양이다.

  상형청자는 모두가 우수한 작품이어서 고도로 발달된 심미안(審美眼)과 숙련된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때로는 대담하게, 때로는 세심하게 만들되 어색함이 없는 아름다운 조화와 높은 격조를 보여 주고 있다.

  혹은 환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이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이것이 바로 고려 청자의 하나의 특색이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형의 그릇은 물론 고려 이전의 신라에도 있었다. 어떤 것은 전체를, 또 다른 것은 한 부분의 동물 모습을, 또는 식물을 형태를 본삼아 만들었다.

  그러나 이에 비하면, 고려의 청자는 제작 과정도 까다로웠을 것이지만 본이 된 대상이 가지는 특징을 십분 발휘한 점을 볼 때, 수법의 진보가 있음이 역력하다.

  고려의 상형청자는 기술면으로 보았을 때 어떠한 형태를 그릇 전체에 나타내는 수도 있고, 때로는 어느 한 부분만을 나타내는 수도 있다. 또, 상형청자를 만들 때는 형태 구성에 있어 양가 수법이 주로 많이 쓰이지만 음각·상감·백색 퇴화·진사·철채·투각 등의 각종 수법을 겸하여 쓰고 있다.

  상형청자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는데, 중국 고동기(古銅器)의 모양을 본뜬 것, 동물의 모양을 본뜬 것, 식물의 모양을 본뜬 것 등이다. 고동기는 중국의 은(殷)과 주(周)나라에서 시작하여 진(秦)·한(漢)나라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지던 동제(銅製)의 제기(祭器)이다. 이제기의 모양을 본뜬 이유는 자세하지 않으나, 아마도 그가 지니는 중후(重厚)하고 위엄 있는 형태를 사랑하고 숭상하였던 까닭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종류는 술단지·솥·화로(爐)·소반(盤)·세수그릇·바리·접시·병·주전자·술잔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어느 것이나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서, 대개 초기에 많이 만든 듯하다.

  동물의 형태를 본뜬 것은 종류도 많고, 표현 형식도 가지가지이다. 한 가지 형태만을 본뜬 것이 많지만, 그 중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섞여 있는 것도 있다. 예컨대, 사람과 오리, 동물과 식물 등을 겸해서 표현하는 수가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종류와 작품을 들고,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2)상감(象嵌)청자

  상감청자의 발생에 관하여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상감청자는 발생 이후 여러 가지 흑백의 무늬를 수 놓으면서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만들어졌다. 물론 무늬의 주제(主題)나 솜씨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즉, 상감되는 무늬는 상당히 다양하지만 그 중에는 고려 사람들이 즐겨 쓰던 무늬가 있고, 솜씨도 처음에는 상당히 정교하지만, 말기에 가까워질수록 간편한 방법을 쓴 것이 눈에 뛴다. 먼저 무늬의 주제를 보기로 한다.

  고려 사람들이 가장 즐겨 쓴 무늬로는 포류(蒲柳) 수금(水禽)무늬, 운학(雲鶴)무늬, 야국(野菊)무늬 등이다.

  ①포류 수금무늬

  포류 수금무늬는 비단 청자에만 쓴 무늬가 아니라 유명한 청동제 정병에서도 이용되고 있음을 보면, 고려 사람들의 심정을 잘 반영한 무늬라고 하겠다. 갈대가 우거진 높고 얕은 언덕에 몇 그루 버드나무가 그 옆에 서 있고, 나무 아래에 있는 잔잔한 물위에 몇 마리의 오리와 때로는 낚싯배가 떠 있고, 하늘에는 기러기와 오리떼가 날고 그름이 한가로이 떠 있다.

  이러한 무늬는 흑색과 백색을 적당히 안배하면서 효과를 내고 있다. 이 무늬 역시 하나의 장식 무늬이나, 단순한 장식에 그치지 않고, 한 폭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것도 소란스러운 풍경이 아니라 조용하고 한적한 풍경이다. 고려 사람들은 많은 전원 풍경 가운데에서도 어찌하여 이러한 장면을 즐겨 표현하였는지는 당시의 사회상을 생각하면 수긍이 가는 점이 있다.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청자상감 유로(柳蘆) 수금무늬 바리(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는 바리 안쪽에 흑색의 수양버들과 갈대를 새기고 있으며, 그 밑에 부리 눈 다리는 흑색이고, 몸은 백색인 오리가 있는 무늬를 세 곳에 상감하였다. 다분히 도안화되기는 하였으나 정서가 남아 있다. 청자상감 유로 수금무늬 정병11)은 물가에 버드나무가 서 있고, 앞에는 연꽃이 피어 있는 사이로 머릴 오리 한 쌍이 놀고 있는데, 앞선 오리가 뒤를 돌아다보고 있다. 모두 백 상감이고 오리의 눈에만 흑점을 찍었다. 정서가 넘치는 자연의 풍경을 능숙한 솜씨로 표현하였다. 청자상감 양류(楊柳) 수금무늬 표형 주전자(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는 한 그루 수양버들이 서 있고, 그 밑에는 오리 두 마리가 마주 보면서 물위에 떠 있으며, 하늘에는 학이 날고 있다. 흑백으로 대조된 빛깔을 적당히 안배하여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고요한 자연 정경을 보여 준다.

  ②운학무늬

  운학무늬는 구름과 학으로 구성한 것으로서, 그 표현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주로 매병에 이용되는데, 학과 구름을 드문드문 배치한 것도 있고, 천학 매병 같은 것은 그릇 표면에 구름과 학을 상감하되 흑색과 백색으로 된 이중의 선으로 원을 그리고, 그 안에도 구름과 학을 새기고 빈자리에도 구름과 학을 새겨 호사로운 표현을 하였다.

  대개 구름은 흰색으로 하고, 학도 흰색으로 하였으나, 부리·눈·다리·날개의 뒤쪽만은 흑색으로 하였다. 구름은 꼬리가 길어서 바람에 날리는 형상의 솜 같은 송이송이의 구름이며, 학은 날개를 활짝 펴고 두 다리를 뒤로 뻗으며 날고 있는 형상이다. 어떤 매병에서는 구름이나 학을 큼직큼직하게 표현하고 공간을 많이 남긴 점, 또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운치가 있다. 이러한 장면은 지상의 장면이 아니고 신선한 하늘의 장면이다. 구름이나 학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며, 인간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날아가는 그름이다. 고려 사람들이 왜 이렇게 공중에 떠 있는 장면을 즐겨 무늬로 이용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포류 수금무의를 새기되 하늘에 또는 같은 그릇의 다른 부분에 구름을 곁들이는 것을 보면, 포류 수금무늬나 운학무늬를 같은 심정에서 즐겨 이용하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운학무늬 청자의 예로는, 천학 매병을 비롯하여 몇 가지가 현존하고 있다.

  청자상감 운학무늬 대접(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은 대접 안쪽에 두 마리의 학과 두 송이의 구름이 상대하되, 학은 날개를 펴서 날고 있으며 부리로는 구름의 꼬리를 물고 있는 듯하다. 그릇 안쪽 전체가 하늘이 되어 그릇 자체의 푸른 빛깔과 아울러 무한한 공간을 나타내고 있다. 청자상감 운학무늬 매병(간송 콜렉션 소장)은 뚜껑이 달린 매병으로 몸과 뚜껑에 고리가 긴 구름을 드문드문 배치하고, 그 사이로 공중을 나는 학이 있다. 이것도 그릇 전체가 푸른 하늘로 표현되어 있어 공간을 구름과 학이 유연히 날고 있는 모습이 매우 한가로워 보인다. 이밖에도 국화나 모란무늬에 곁들여서 운학을 함께 상감하는 수도 있으나, 어느 것이나 다 하늘을 나타낸 공간이 청자빛깔과 잘 조화되어, 일종의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③야국무늬

  야국무늬는 들국화무늬이다. 무늬를 놓아야 할 공간을 따라 국화송이만으로 또는 줄기에 한두 송이를 곁들여 표현하였다. 꽃송이는 희색으로, 줄기는 흑색으로 나타내었는데, 그 모양이 매우 청초(淸楚)하고도 가련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국화무늬는 그 자체가 쉽게 도안화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다른 뜻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청자상감 연당초무늬 합12)·청자상감진사 채국(彩菊) 무늬기름병13)·청자상감 국화무늬 기름병14) 등은 모두 도안화된 국화무늬이고, 청자 상감 국화무늬 표형 주전자는 완전히 도안화된 예이다.

  이상 세 가지 무늬는 어느 하나를 단독으로 표현하는 수도 있지만, 두 가지 무늬를 함께 표현한 것도 있다. 포류 수금무늬나 운학무늬, 또는 야국무늬는 모두 일맥 상통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3)화청자(畵靑磁)

  화청자는 그릇 표면에 백색 또는 흑색 도료(塗料)를 풀어 붓으로 그린 다음, 청자 유약을 입혀서 구워 낸 것이다. 백색과 흑색을 상감에서와 같이 적당히 배합하여 그리기도 하나, 흑색 단일색으로그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상감청자는 그릇 표면을 상감으로 무늬를 음각하고 그 속을 백토(白土)나 흑토(黑土)로 메우는 것엘 반해, 화청자는 그릇 표면에 무늬나 어떤 형상을 직접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청자 유약은 다른 청자에서와 같이 푸른색이 잘 나나내는 예는 매우 드물고, 대개 산화되어 황갈색이 나거나 퇴색된 푸른색이 나는 것이 많다.

  그림의 종류는 상감청자에서와 같이 그다지 다양하지는 않으나 여러 가지무늬가 있고, 어느 것이나 선(線)보다도 면(面)을 조로 하였기 때문에 상감청자에 비하여 무거운 느낌을 준다. 무늬는 운학·새·나비·낙지 등의 동물무늬와 모란·보상화·연화·버드나무·국화·매화·당초 등의 식물무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화처자의 수법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화청자의 그릇이 모두 산화되어 있는 사실과 무늬의 수법도 상감무늬에 비해 매우 둔해진 점 등을 아울러 생각할 때 아마도 그 발생은 소위 비색 청자의 시대를 넘어서 원(元)나라의 산화염 소성법이 들어온 이후인 13세기 후반기부터의 일이 아닐까 추측된다.

  

 4)퇴화(堆花)무늬 청자

  퇴화무늬라 함은 백토 또는 흑토로 그릇 표면에 점 또는 그림으로 무늬를 두드러지게 그려 놓은 다음, 청자 유약을 입혀서 구운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초기 청자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여러 종류의 청자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때로는 백토로 화청자와 같이 그림을 그리기도 하나, 퇴문의 효과는 필요한 위치에 작은 점을 연속하여 찍음으로써 나타난다.

  앞에 든 거북 모양 주전자 손잡이에는 드문드문 측점을 찍었고, 사람 모양의 주전자와 나한상에는 백점을 찍었다. 화청자의 장고에는 여러 줄의 작은 백점들을 연속적으로 찍어 긴장된 느낌을 주고 있다.

  점 아니니 그림을 그린 예로는, 청자 퇴화 연 당초무늬 주전자(동원미술관 소장)가 있는데, 이 주전자는 두 겹으로 된 큰 뚜껑 위에 사자가 앉아 있는 특이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몸에는 막 피기 시작하는 연꽃이 달린 당초무늬로, 밑에는 연꽃 잎을 흑색과 백색으로 그렸다. 그릇 자체도 호화롭지만, 표면의 그림도 그릇의 형태와 잘 조화되어 있다.

  청자 퇴화 초화(草花)무늬 표현 주전자 및 받침(국립 중앙 박물과 소장)은 몸 좌우에 당초무늬의 큰 원을 돌리고 그 안을 백색으로 메운 원이 또 하나 있고 원 속에 흑색으로 꽃을 그렸다. 이러한 무늬는 받침에도 있으며 윗 부분에도 고사리 같은 무늬가 백색과 흑색으로 그려져 있다. 상감청자와 같이 짜임새는 적지만 시원스러운 도안에 의한 성공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청자 퇴선무늬 탁잔의 형태는 고려 시대 탁잔의 형태를 따르고 있는데, 표면에 그려 놓은 퇴선무늬는 받침의 잔이 놓일 자리 위에 둥글게 그려져 있다. 또 받침에서부터 원을 향해 여섯 줄의 가는 퇴문식의 줄에 쳐져 있는데, 퇴무늬의 참 모습을 보여 주는 그릇이라 하겠다. 또 퇴무늬 청자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는 에로서, 앞에 든 경기도 양평군에서 '원풍톤보'의 옛돈과 함께 발견된 청자 가운데 백퇴무늬 베개가 잇다. 베개의 형태는 두 마구리가 넓고 가운데가 우묵해진 일반 형태로, 4면의 네 귀에 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마구리 쪽 가장자리에는 점을 찍었다.

  원풍은 1078년부터 1085년까지 사용한 북송의 연호이므로, 이 베개는 그 이전에 만들었거나 그 당시에 만든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 시기는 고려 문종15) 32년부터 선종 2년 사이에 해당한다.

 

 5)진사(辰砂)청자

  진사란 동염(銅鹽)이 산화되어 붉은색을 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릇 표면에 무늬를 그리거나 또는 다른 무늬의 일부에 점을 찍은 다음 청자 유약을 입혀서 구워 낸 것을 진사청자라 한다. 어느 것이나 매우 귀하므로 수가 그다지 많지 않다.

  진사채 꽃모양 합(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진사채 탁잔(托盞)(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등은 그룻 표면 전체에 진사유를 발라서 그릇 전체가 붉은 색이 난다. 또 청자 상감 무란무늬 지사채 매병(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청자 상감 포도동자무늬 진사채 주전자 및 받침(이왕가 콜렉션 소장)·청자 연판(蓮瓣)무늬 진사채 표형 주전자(호암 콜렉션 소장)·청자상감 운학무늬 진사채 합(호암 콜렉션 소장)·청자 상감 용무늬 진사채 병(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등은 다른 무늬의 일부분을 진사로 장식한 예이다.

  청자 퇴화 국화무늬 진사채 합(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처자상감 연판무늬 진사채 기름병(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청자 상감 영락(瓔珞)무늬 진사채 사리(舍利) 합(동원 미술관 소장)·청자 상감 국화무늬 진사채 합(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등은 다른 문양에 특별한 의미가 없는 점을 연속적으로 찍은 것이다.

 

 6)화금(畵金)청자

  화금청자는 상감 된 무늬의 일부에 금을 칠한 것을 말한다. 옛부터 금을 귀하게 여겨 왔으므로 금으로 장식된 자기는 역시 매우 값진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일반 상감 청자에 비해 그 예가 매우 귀하다.

화금청자가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고려사」에서 기록을 볼 수 있다.

희귀한 화금 청자로서 현존하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청자 상감 모란 당초무늬 화금 대접(이왕가 콜렉션 소장)·청자 상감 국화무늬 화금 합(이왕가 콜렉션 소장)·청자 상감 국화무늬 화금 합(이왕가 콜렉션 소장)·청자 상감 화금 바리(일본 소장)·청자 상감 원토(猿兎)당초무늬 화금 병(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구 개성 박물관 소장)

  이밖에도 몇 점 더 있었으나, 현재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청자 상감 모란 당초무늬 화금 대접은 그릇 안쪽 구연에 당초무늬를 새겼고, 원과 원 사이는 당초무늬로 메웠다. 그릇 밖에도 같은 종류의 무늬를 상감 하였으며, 그 위에는 금을 칠했으나 대부분 떨어져 없어 졌다. 금이 남아 있는 부분에는 아직도 금색이 빛나고 있다. 청자 상감 국화무늬 화금 합은 윗부분이 깨진 병으로 1933년에 개성 만원대 동쪽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릇 양 측면에는 꽃 모양의 이중 윤곽선이 그려져 있고, 그 안의 한쪽에는 나무, 또 그 아래에는 복숭아를 든 원숭이를 새기고 다른 한쪽에는 나무 밑에 토끼를 새겼다, 양쪽의 꽃모양 밖에는 보상 당초무늬를 어깨에는 연꽃과 구름을 바닥에도 연꽃이 각각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상감된 선의 나무 밑에는 바위를 원숭이 앞에는 풀잎을 각각 금으로 그렸다. 금이 많이 떨어졌으나 아직도 상당한 부분에 금이 있어서 금빛이 빛나고 있다.

 

 7)철채(鐵彩)청자

  철채청자라 함은 표면전체에 철사(鐵砂) 물감을 바르고 그위에 청자 유약을 발라서 구워 낸 것이다. 완성된 빛깔은 흑색 또는 초록색을 띤 흑색으로 광택이 난다. 화 청자는 장식무늬를 그렸을 뿐인데 비해 철채청자는 그릇 표면 전체를 칠한 점이 다르다.

  철채 청자는 수법으로 보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무무늬 철채청자

  문자 그대로 표면에장식 무늬가 없고 철사만을 칠한 것이다. 그 중에는 그릇 겉에만 철채를 칠한 다음 청자 유약을 발라서 밖은 흑색, 속은 청자 빛깔이고, 버들과 동자 또는 버들과오리를 양각 혹은 음각한 파편이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가마자리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왕가 콜렉션에 소장되어 있는 사발에는 안쪽 밑바닥만 철채를 칠하고, 그 윗부분과 겉은 청자 빛깔이 나는 것이 있다.

  ②음각 철채 청자

  이것은 장식무늬를 음각한 것이다. 여기에는 뒤 가지 수법이 이용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태토(胎土) 위에 먼저 무늬를 음각하고 철채와 청자 유약을 차례로 칠하여 구운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철사를 칠한 다음 음각하고, 다시 청자 유약을 칠하여 구운 것이다. 따라서 뒤의 것은 음각한 무늬만이 청자 빛깔이 나게 된다. 무늬는 당초무늬·모란무늬·풀무늬 등 간단한 장식무늬들이다. 이왕가 콜렉션의 철채 음각 모란 당초무늬 기름병은 매우 희귀한 가운데서도 대표적 작품이다.

  ③퇴무늬 철채 청자

  이것은 철채를 칠한 위에 백토로 무늬를 그리고 청자 유약을 입혀서 구운 것이다. 따라서 무늬의 부분만이 도드라지게 된다. 무늬는 풀무늬이고 시를 쓴 것도 있는데, 몇 가지 중요한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철채 백퇴화 삼엽무늬 매병(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은 표면 전체에 철채를 칠하고 백토로 칠하고 백토로 인삼 잎을 그린 석이다. 흑색과 백색의 대조와 시원스러운 잎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철채 백퇴화 초화무늬 매병(일본 소장)은 그릇 전면에 철채를 칠한 다음, 백토로 여러 줄기의 꽃을 그린 것이다. 무늬의 구성도 아름답고 그릇 모양과의 조화도 잘 어울린다.

  철채 백퇴화 꽃무늬 기름병(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은 전형적인 고려 시대의 기름병인데, 세 줄의 동심원(同心圓) 형식으로 점을 찍었다. 매우 간결한 무늬이면서도 세련된 수법을 보여 주고 있다.

  하여튼 철재유는 전통적인 청자는 아니며, 그 성기(盛期)를 넘어선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8)명문(銘文)이 있는 청자

  이것은 명문이 있다고 해서, 그릇 자체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겠으나 , 그 중에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는 수가 있으므로 한테 묶어서 설명하기로 한다. 명문이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청자 순화 4년 명항아리이다.

  명문은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시명(詩銘)이 있는 것

  여러 가지 청자기에는 대체로 상감 수법으로 시를 새기고 잇다. 내용은 보통 술에 관한 것으로,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청자양각 당초무늬 표형 병(이왕가 콜렉션 소장)·청자상감 운학무늬 표형 주전자(이왕가 콜렉션 소장)·청자상감 당초무늬 표형 주전자(이왕가 콜렉션 소장)·청자 음각 꽃무늬 표형 주전자(이왕가 콜렉션 소장)·청자상감 당초무늬 잔(이왕가 콜렉션 소장)·청자상감 국화 무늬 병(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청자상감 국화무늬 병(일본인 소장)·화청자 포류무늬 통형 병(일본일 소장)·철채 병(이론인 소장)등이다.

  ②납입소(納入所) 명이 있는 것

  명문이 있는 그릇을 만들어 어디서 썼는지를 밝힌 그릇이다. 즉, 그릇을 사용하던 곳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청자 순화 4년 명 항아리에 있는 '태묘 제일실(太廟第一室)'은 그러한 것의 하나이다.

  ③연호(年號) 간지(干支) 명이 있는 것

  그릇을 제작한 연대(年代)를 표시하기 위하여 새긴 것이지만, 간지의 경우는 같은 간지가 60년에 한 번씩 다시 돌아오므로 정확한 연대를 찾기는 힘들다. 연호를 표시한 것에는 순화(淳化) 4년이 있어 993년의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간지는 갑술·을유·을미·정해·기사·경오·경인·신유·임신·임오·계유 등이 있다. 간지 명이 있는 그릇은 대개 후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④기타의 명이 있는 것

  이 외에도 조청조(照淸造)·효각구·효문(孝文) 등 도공(陶工)의 표시인 듯한 음각 명이 있는가 하면, 만년 황제 같은 축원문이 있기도 하고 또는 번(番)·성(成)·대(大)·내(內)·보(寶)·존(存)·최(崔)·하(下)·천(天)·귀(鬼)·교(交)·시(市)·응지(應志)·어건(御件) 등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가 있는 것도 있다.

 

 

3. 고려청자 제작 과정

  청자를 만드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정성과 정밀을 요하는 작업이다. 흙을 수비(水飛)하여 성형, 정형, 조각, 장식, 시유, 소성 등을 거쳐 완성품이 되기까지는 무려 60∼70일 정도가 소요되며, 소성과정에서는 초벌은 800℃, 본벌은 1,300℃의 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야간 이틀 이상을 연속 불을 지펴야 한다. 또 신비스러운 비색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불과 태토(胎土)와 유약의 3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되고, 가마 내에서 불의 작용과 기상 조건에 따라 변화무쌍한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청자를 제작하는 어려움은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어느 한 부분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전체적인 균형미를 잃게 되는 것이 청자이다. 그래서 청자 제작이 어렵다고 한다.

 

 

 

 

 

1.수 비

  청자를 만들기 위한 점토는 점력이 풍부하고 내화도가 높으며 입도가 균일하고 철분 함량이 과다하지 않으며 수축율이 크지 않고 재벌구이 후의 태토색이 회청색을 띠는 흙을 찾아 사용한다. 여기에 내화도가 다소 부족하거나 철분 함량이 기준치 보다 초과되면 백토를 첨가하여 사용한다. 이러한 흙들은 채토하여 바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수비를 하게 되는데 흙을 물에다 풀어 120목의 채로 걸러서 철분을 제거한 다음 건조실에서 수십일 간을 말려서 사용한다.

 

2.성 형

  흙이다 마르면 거두어 토련 실로 옮겨 알맞게 물을 뿌리고 흙이 찰기가 있도록 짓이기게 된다.  잘 이겨진 흙은 필요한 만큼 한 덩어리씩 떼어 내어 또 다시 흙 속에 들어 있는 공기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이겨서 비로소 형태를 만드는 성형을 한다. 흙을 잘못 이겨 성형을 하게 되면 소성시에 흙 속에 들어 있던 공기가 팽창하여 혹처럼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흙을 잘 이겨 사용해야 한다.  성형이 끝난 것들은 적당히 건조시켜서 다시 물레 위에 올려놓고 정형을 하게 되는데 이때 굽을 깎고 두께도 조정하여 맵시 있게 형태를 다듬는다.

  이때 가장 중요한 점은 기물의 두께를 조정하는 것이다.  두께를 알아보는 방법은 두드려 보는 법, 눌러보는 법, 양손으로 안팎을 만져보는 법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숙달된 사람은 두드리는 방법을 많이 사용한다.

  조형이 끝난 것은 조각실로 옮겨져 형태에 어울리도록 여러가지 기법을 응용하여 문양을 새겨 넣게 된다. 성형은 물레성형 외에도 상서로운 특정한 물형을 본따서 형상화하는 이 방법은 주전자, 베개 등 물레성형을 할 수 없는 기물을 만들 때 하는 방법이며, 짧은 시간내에 똑 같은 형태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석고성형 방법이 있다.

물론 여기에도 문양이 가미되어 진다.

 

 3.조 각

  성형을 한 후에 기물의 표현을 장식하는 것으로 주로 조각도에 의한 조각 기법이다.

이러한 조각기법에는 상감, 투각, 음각, 양각, 인화 기법이 있는데 주로 꽃이나 나무, 새, 짐승, 구름 등의 문양을 새겨 넣는다.  

 

 ①상 감

  기물의 성형 이후 습기가 제거되고 약간 굳어지기 시작할 정도로 건조한 상태에서 기물의 표면을 날카로운 조각도로 얇게 파낸다. 이때에 파낸 부분이 날렵하게 파내져야 상감을 한 후 문양이 선명하게 나타나므로 많은 숙련이 필요하다.  그 파낸 틈에 적토나 백색의 이장토를 붓으로 메워 넣은 후 조금 건조되기를 기다렸다가 표면을 조각도로 말끔하게 긁어내면 기물의 바탕과 이장토의 색상이 다르게 나타나면서 시도하고자 하는 문양이 나타난다. 그 이후 투명유약을 시유하여 소성하는 방법이다.  고려시대의 상감청자가 바로 이 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② 투 각

  투각은 성형한 기물이 약간 굳어진 후 예리한 조각도를 이용하여 완전히 구멍을 뚫어 조각하는 것이다. 이중으로 기물을 성형한 후 겉 부분의 기물을 투각하여 장식한 고려시대의 이중투각호는 유명한 작품이며 또 삼국시대 토기 중에 굽을 높이 성형한 후 투각하여 기물의 균형과 그 멋을 살려준 기법도 있다.  

 ③음 각

  음각은 성형 이후 기물 표면의 물기가 건조되어 약간 단단해지면 날카로운 조각도나 대나무칼 등으로 기물의 표면을 약간 파이게 조각하는 방법이다. 기물에 투명유를 시유하면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의 조각상태가 은은하게 나타난다. 고려청자는 음각 기법이 훌륭하게 사용된 작품이 많다.  또는 기물 표면에 분장토를 바른 후 조각도로 긁어 내듯이 음각을 하면 분장토의 음각 시문된 문양이 독특한 효과를 내주며, 대나무칼이나 나무칼 또는 날카로운 금속성 조각도 등 여러가지를 이용하여 각기 특색있는 효과를 낼 수 있다.  

④양 각

  양각은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이 도드라지게 하는 기법으로 문양 부분은 남겨 놓고 주변을 깎아내는 방법이다. 음각 기법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또는 표면에 점토를 부착하여 양각보다도 두드러지게 형태를 나타낼 수도 있는데 이 방법을 부조라고 한다. 부조는 양각보다도 입체적으로 두드러지며, 대개는 점토를 부착한 후 깎아 내어 입체적인 형태를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한다. 양각을 시문할 경우 기물의 두께를 약간 두껍게 하여 부분적으로 깎아내어야 한다. 너무 얇게 성형하면 양각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

  양각은 문양이 두드러져 올라오기 때문에 생활용기 보다는 대개 장식용 작품에 사용된다.  

⑤인 문 화

  나무나 점토 등으로 문양을 새겨 넣어 만든 도장으로 기물의표면에 찍어서 장식하는 기법이다. 같은 문양을 여러 번 반복해서 나타낼 수 있으며 인화문으로 처리된 부분에 이장토를 메워 넣은 후 표면을 정리하여 주면 인화문상감청자가 된다.

 

4.건 조

  성형과 장식이 끝나면 성형시 기물 내에 함유하고 있는 수분을 완전히 제거시켜 기물의 강도를 높여 줌으로써 소성시에 파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건조를 시킨다. 수분이 남아 있는 아직 덜 건조된 상태에서 소성을 하게 되면 소성시 기물의 팽창과 기물 내에 있는 수분의 급속한 증발로 인하여 기물에 균열이 간다. 너무 급속히 건조를 시키면 기물 내부와 외부의 건조 상태가 달라서 외부가 먼저 건조되면서 기공이 닫히기 때문에 내부의 수분이 증발할 수 없게 되어 건조되는 시간이 오래 걸리며 파손율도 높아진다. 그리고 수분이 완전히 제거된 기물은 강도가 높아져 가마재임이 용이하지만 수분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기물의 재임시 하중을 견디지 못하여 파손되기도 한다.

  좋은 건조 방법은 그늘진 실내 공간에서 통풍을 약간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기물의 내 · 외부 및 상하가 같은 속도로 건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형 작업일수록 작품의 밑 부분이 통풍이 되도록 하거나 뒤집어 주어야 하며, 판상일 경우는 자주 뒤집어 주고, 손잡이와 같은 접착부분이 많은 경우에는 기물을 종이(신문지를 많이 사용한다)와 비닐 등으로 씌워 주고, 뚜껑이 있는 기물은 뚜껑을 씌워서 몸체와 동일하게 건조되도록 해야 한다.

  실내 온도가 너무 높거나 바람이 많이 불 경우에는 필히 종이로 먼저 기물을 씌워 주고 다시 비닐로 씌워서 건조속도를 조절하여야 하며, 실내가 너무 건조하면 실내에 물을 뿌리거나 기물의 표면에 물기를 뿌려 주어야 한다.

  특히 겨울철에는 실내의 온도 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성형 이후 종이로 기물을 감싸주고 비닐로 살짝 씌워 주어 외부온도의 변화에 적응되지 않도록 하면서 서서히 건조되도록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여름철에 햇볕을 직접 조이면 바로 갈라져 버리기 때문에 절대로 햇볕에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온도가 높기 때문에 오히려 종이 등으로 가려 놓아야 서서히 건조된다.  장마철에는 반대로 너무 습기가 많아 건조가 늦거나 형태가 무너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실내에 불을 피워서 습도를 조절해 주어야 한다.

 

5. 초벌구이

  조각이 끝나면 잘 말려서 가마에 넣고 초벌구이를 하게 된다.  초벌구이는 유약을 시유하기 위하여 적당한 강도로 만들고 흡수율을 줄일 목적으로 750 ~ 800oC 정도로 아주 서서히 구워 내는 과정을 말한다.

  초벌구이에서도 열 조절이 잘못 되면 파손율이 많으므로 열 조절을 잘해야 한다. 본벌구이 보다 초벌구이가 가마재임도 어렵고 불때기도 어렵다.  초벌구이 때는 조금만 서두르거나 연료의 투입량이 조금만 많아져도 일순간에 기물이 파손된다.  초벌구가 끝나면 4 ~ 5일간 가마에 그대로 두고 천천히 식힌 다음 꺼내어 선별을 한다.

 

6.시 유

 초벌구이 후 기물 표면에 유약을 발라 재벌구이를 하게 되는데 기물에 유약을 바르는 것을 시유라 한다.  초벌구이는 시유를 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시유를 하는 방법은 담금법, 붓으로 칠하는 법, 분무기로 뿌리는 방법 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담금법이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기물의 표면 처리가 일률 적어서 가장 많이 쓰인다.  단지 대형작품일 경우에 시유에 어려움이 있는데 이때는 기물에 유약을 퍼부어 바르면 된다.

  시유하기 직전 물에 살짝 담근 후 시유를 하는데 물에 담그는 이유는 기물에 수분을 주어  유약이 너무 두껍게 시유됨을 방지하고 너무 급하게 빨아 들여서 기포가 생기거나 유약이 벗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유약의 사용은 실용적인 목적과 함께 아름다움을 주는 미적 목적도 겸하게 되며, 특히 도예가에게는 유약의 선택과 사용법에 따라서 작품의 개연성이 달라진다.  따라서 평범하게 생긴 도자기도 유약의 처리 여하에 따라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7.본벌구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작업은 유약손질 후에 낱낱이 가마에 넣어 가마 재임을 하게 된다.이 작업이 끝나면 출입구를 밀봉하고 점화를 한다. 본벌구이는 주야 연속으로 이틀간 불을 지펴야 되고 최고 온도는 1,300oC를 기준으로 한다.  불은 다섯 단계로 나누어 지피게 되는데 처음 불을 피움불 이라 하고, 다음을 벗김불 이라고 하며, 세 번째를 돋굼불, 네 번째를 녹힘불, 마지막 단계를 마감불로 구분한다.

  온도 측정은 몇 가지 관찰 기준이 있으나 거의 육감으로 한다. 온도 측정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불의 색깔이며 여기에 직접적인 연관 요인이 되는 굴뚝의 연기 색깔과 불의 소리, 나무의 질량과 시간들을 함께 관찰하면서 온도를 조절한다.

  첫번째 피움불은 작품 속에 들어 있는 수분과 가마 내부의 습기를 천천히 증발시키기 위해 시름 불을 때게 되며 가마안에 습기가 모두 빠져 나가면 다음 단계에서는 그을음을 벗겨내야 한다.  첫 단계에서 천천히 불을 때다 보면 가마안이 그을음으로 가득차 있어 한 단계 불을 높여 땜으로써 모두 벗겨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불때가 모두 벗겨지게 되면 다시 한 단계를 높여 유약이 녹기 직전까지 열을 가하여 작품을 달구게 되는데 이것을 돋굼불 이라고 한다. 돋굼불 후반기에는 환원조정을 하면서 불을 때게 되며 가마 내부에 있는 갑발이 불색과 같이 달구어지는 것을 보아 지금까지는 봉통에서 장작을 넣어 열을 올리던 것을 이제부터는 옆창 구멍을 통해 가는 장작개비를 넣어 매단에 쌓아 놓은 갑발 속의 작품을 차례대로 녹여 올라간다.

  마감불은 봉통의 열이 갑자기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환원시에 꺼내 놓은 숯을 다시 퍼 넣어 더운 공기를 계속 채워 주게 된다.  마지막으로 끝 구멍 까지 불이 끝나게 되면 봉통 입구를 밀봉하고 열이 떨어질 때까지 5 ~ 6일간 기다렸다가 가마안의 온도가 30。C 이하가 되면 요출을 하게 된다.

 

8.상회구이

  재벌구이 이후 유약의 표면에 저온의 안료와 유약을 입혀서 다시 한번 녹여 주어 장식하는 상회구이 기법이 있다. 그러나 이 상회부분의 장식은 오래 사용하면 벗겨져서 보기에 좋지 못하다.

 

  실질적으로 한 작품이 나오기 까지는 적어도 24단계 이상의 공정을 거쳐야 하고 일상으로는 70여일이 소요되는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청자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만들어진 모든 작품들이 실패없이 완전하게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청자도 매회마다 100% 성공하여 요출된 것이 아니며, 현존하고 있는 명품이라면 국보나 보물급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도 거의 완성 당시부터 흠집이 있었다.그만큼 청자란 모든 도자기 중에서 가장 만들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인류문화에 불후의 명기를 제작해 내었던 고려도공들도 수 백년 동안 전통을 이어 오면서 기량을 갈고 닦아 왔기 때문에 명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Ⅲ. 맺음말

 

 중국에서 옥(玉)은 군자(君子)를 상징하며, 부귀(富貴)와 사후내세를 보장해 주는 신앙적인 의미를 지녀 영생을 의미하며 악귀를 쫓는다고 믿어 부장품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당시 지배계급의 옥에 대한 소유 욕구와 부모의 묘에 옥을 부장하려는 사람은 많았으나, 옥은 생산이 적어 매우 비싸 귀한 옥을 흙으로 만들어 보려는 노력중 전국시대를 걸쳐 삼국시대에 청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4C에서 6C경의 고분에서 중국의 청자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당시 중국의 청자를 왕실의 옥기(玉器)로써 수입하여 사용한 것으로 알 수 있다. 9C경 중국의 호족(濠族)들에게 널리퍼진 불교의 선종(禪宗)이, 좌선(坐禪)을 하는데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하여 차를 마시는 습관이 확산되면서, 청자를 찻잔으로 사용하며 실용화 되기 시작하였다.  차는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길로써 마셨다. 따라서 차를 마시는 찻잔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고, 그 찻잔은 금값보다 비싼 귀중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9C 통일신라 말기 선종이 유입되면서 중국을 다녀온 선승(禪僧)들을 통하여 중국의 찻잔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초 청자를 국산화하려는 노력중 10C 후반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질이 좋은 흙을 찾아 전라도 강진, 고창에서 우수한 고려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고려인들의 세계가 불교적인 세계이었으므로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고려청자에 담아 영원한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구름과 학, 불교적 선의 세계인 연못, 버드나무, 물살을 따라 노니는 오리, 고요함과 적막함을 나타낸 들국화. 그와같은 문화로 수백년을 이어온 삶의 염원을 담아낸 청자가 은은하면서 맑은 그 신비한 비색과 어울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도자기는 앞서 본론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고려 건국 초인 10세기에 비로소 자리가 잡혔다. 토기가 주류를 이루던 삼국시대나 통일신라로 이어져오는 가운데서도 7세기경부터 연유계 시유도기(鉛釉系施釉陶器), 회유계 경질시유도기(灰釉系硬質施釉陶器)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 이러한 바탕이 고려자기가 발달하는 터전이 되었다. 국내의 자체적인 노력과 발전도 있었지만, 중국 도자기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4세기경의 청자의 조형(祖形)이라고 일컬어지는 고월자(古越瓷), 당나라 말기의 정요(定窯)에서 제작된 백자, 저장성[浙江省] 북쪽에 있는 웨저우요[越州窯]에서 만든 오대(五代) 때의 세련된 청자, 베이징 부근의 정요백자(定窯白瓷)와 양쯔강[揚子江] 하구 남쪽의 웨저우요 청자들이 한국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다. 고려자기라면 흔히 청자를 연상하게 된다. 그것이 고려시대 귀족들의 기호에 맞아,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백자는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그 수효가 적어서 현존하는 것은 많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檀君崇拜의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불교·노장·풍수도참사상 등을 배경으로 청자를 주로 생산하고 세련시켰다. 12세기 전반에 비색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특색을 나타냈으며, 12세기 중엽에는 유약을 맑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고 명랑한 비색, 조각도의 힘찬 선을 지니고 기물과 일체가 된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유연하고 유려한 선 등 우리나라의 도자기 중 가장 아름답다.

  박물관에 가서 보면 우리나라 도자기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고려청자이다. 위에서 얘기한 아름다움 역시 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음이지만 역시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푸르른 그 빛깔이다. 고려청자의 翡色이라고 불리는 그 색은 마치 비취옥과 같은 빛깔로 완전히 푸르지도 않고 풀색도 아닌 청록색 계통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중국의 두껍고 짙푸른 색의 청자와는 달리 맑고 명쾌한 색이 사람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 색에는 마치 도공의 영혼이 담겨 있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청명한 색깔을 지켜주는 것 같다.

  우리는 여지껏 이런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 무관심했었다. 박물관에 가서 고려청자를 보고도 그 색이 어떠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나 역시 고려청자에 관해 흥미가 있어서 이 주제를 택해서 쓰면서도 자세히 기억나는 청자는 몇 개 안되었다. 색감에 대해서는 관심있게 보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억이 나지만 고려청자의 모양이나 문양에 관해선 사진을 보며 흐릿해진 기억을 되살린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의 얼이 담긴 고려청자 뿐 아니라 모든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한다.

 

참고문헌

 

진홍섭, <청자와 백자>, 청목, 1999

안휘준, <국보-회화 편>, 예경, 1984

임영주, <한국문양사>, 미진사, 1983

한국고미술협회, <한국 고미술 사료전>, 삼성출판사, 1996

정양모, <고려청자>, 대원사, 1998

장경희 외 4명, <한국미술문화의 이해>, 예경, 1994

한림과학원, <한국미술사의 현황>, 예경, 1992

 

 

 

 

 

 

 

 

 

 

 

 

 

 

 

1) 회색 또는 회흑색 태토(胎土) 위에 백토니(白土泥)를 분장한 다음 유약을 입혀서 구워낸 자기.

 

2) 금속 ·도토(陶土) ·목재 등의 소지(素地) 표면에 여러 무늬를 새겨서 그 속에 같은 모양의 금 ·은 ·보석 ·뼈 ·자개 등 다른 재료를 박아넣는 공예기법.

 

3) 초명 심(諶) ·춘(). 휘(諱) 거(). 원종(元宗)의 맏아들. 어머니는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金氏). 비(妃)는 원나라 세조의 딸 장목왕후(莊穆王后). 구비(舊妃)는 시안공(始安公) 인(絪)의 딸 정화궁주(貞和宮主) 및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金氏)이다. 1260년(원종 1)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1271년(원종 12) 6월 원나라에 가서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 1274년 원종이 죽은 뒤 고려에 돌아와 그 해 8월 왕위에 올랐다.

4) 자기가 마르지 않았을 때 문양을 음각(陰刻)하고, 그 부분에 백토니(白土泥), 또는 자토니(裏土泥:붉은 흙)를 메꾸고 예번(豫燔)한 다음 다시 청자유(靑瓷釉)를 바르고 본번(本燔)하는 자기(瓷器) 장식기법이다. 고려청자의 진가를 세계에 알린, 다른 나라의 도자기제품에는 유례가 없는 기법으로, 의종대(毅宗代:1147∼1170)에 창안되어 고려청자에 응용되었다.

 

 

5) 판화기법의 한 가지로, 재료의 면에 글자나 그림을 오목하게 파서 나타내는 기법이다. 주로 단색판화에서 쓰이는 방법으로 양각(陽刻)에 상대되는 말이다. 즉, 밝은 바탕에 암색(검은색)으로 그림을 나타내는 것이 양각이라 하고, 이와 반대로 암색 바탕에 밝은색(흰색) 화선으로 그림을 표현하는 것을 음각이라 한다.

 

 

 

 

6) 진홍섭, <청자와 백자>, 청목, 1999 66page

7) 휘 현(晛). 자 일승(日升). 시호 장효(莊孝). 초명 철(徹). 인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 비는 강릉공(江陵公) 온(溫)의 딸 장경왕후(莊敬王后). 계비는 참정(參政) 최단(崔端)의 딸 장선왕후(莊宣王后).

8) 개원(開元)은 연호가 아니고 개국건원(開國建元)의 준말로 당나라의 창업을 기념한 것이다. 당나라 초기인 621년(武德 4) 처음으로 주조 발행되었으며, 지름 2.4 cm, 무게 3.7 g이었다. 이 동전은 그 후 역대 왕조의 표준형이 되었다. 그 후에는 845년(武宗 5) 회창(會昌)에서 주조한 예가 있으며, 오대삼국시대의 남당(南唐:937~975)에서도 발행하였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목종 때(998~1009) 같은 이름의 주화를 발행하였는데, 전문(錢文)을 예서와 전서로 주조한 두 종류가 있었다.

 

9) 철전(鐵錢)과 동전의 두 종류가 있으며, 외형은 둥글고 가운데에는 네모의 구멍이 있다. 건원중보라는 이름의 화폐는 이미 중국 당(唐)나라 숙종의 건원 연간(756~762)에 발행되었으며, 고려는 이를 모방하여 앞면에는 ‘건원중보’라는 화폐이름을 새기고, 뒷면에는 위아래로 ‘동국(東國)’이라 표기하여 996년(성종 15) 철전을 처음으로 주조하였다가 이듬해 유통시켰다. 액면가 표시가 없는 이 화폐는 종전까지 화폐대용으로 사용되어온 포(布) ·토산물과 함께 사용되었으나, 다주점(茶酒店) ·식미점(食味店) 등에서만 사용되는 등 유통의 제한을 받았다. 건원중보의 동전은 1910년대 초 개성 부근의 고려고분에서 출토되어 처음으로 그 발행사실이 밝혀졌다. 수집품으로서의 건원중보는 희귀통화에 속하여 1973년 철전 하나가 35만 원에 거래된 바 있다.

 

 

 

 

10) 전 40권. 원명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300여 항목을 28개 문(門)으로 분류하고, 문장으로 설명하고 형상을 그릴 수 있는 것은 그림을 덧붙였다. 이 책이 알려지게 된 것은 청나라의 포정박(鮑廷博)이 편찬한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에 수록되면서부터이다.1910년대에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이를 대본으로 활자화하였고, 1970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인하였다.

 

 

11) 간송 콜렉션 소장

12) 국립중앙 박물관 소장

13) 동원 미술관 소장

14)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

15) 자 촉유(燭幽). 시호 인효(仁孝). 이름 휘(徽). 초명 서(緖). 현종(顯宗)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의 셋째 아들. 1022년(현종 13)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었으며, 1037년(정종 3)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형제상속으로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법률개정에 착수하여, 최충(崔)으로 하여금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 ·연재면역법(捐災免役法) ·3원신수법(三員訊囚法) ·국자제생(國子諸生)의 효교법(孝校法) 등을 제정하였다. 1069년(문종 23)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하여 전답의 세율을 정하였으며, 이어 녹봉제(祿俸制)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 등을 제정하여 내치(內治)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불교를 신봉하여, 1067년 흥왕사(興王寺)를 준공하였다. 왕자 후(煦)를 출가(出家)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는데, 그가 곧 대각국사 의천(義天)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도 장려하여 최충의 9재(九齋)를 비롯한 12도(徒)의 사학(私學)을 진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