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사 찰 의 유 래 와 구 조

                          

03학번 신선주


-목 차-


Ⅰ. 머릿말


Ⅱ. 본 론

   1.사찰의 유래

   

   2.사찰의 구조

   

   3.대표적인 사찰

     1)송광사의 유래 및 구조

     2)화엄사의 유래 및 구조


Ⅲ. 맺음말





Ⅰ. 머리말

 사찰은 위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도(佛道)를 닦고 깨달음을 구하는〔상구보리(上求菩提)〕수행 도량이자, 아래로는 불법을 널리 펴서 중생을 제도하는〔하화중생(下化衆生)〕전법(傳法)의 장이다. 스님들은 사찰에서 수행 정진하며 부처님을 대신해 중생을 교화·제도하고, 불자들은 보시(布施)로 삼보(三寶)를 외호(外護)함과 아울러 속진(俗塵)을 씻고 올바른 진리의 생활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기에 사찰의 모든 조형물에는 해탈과 교화의 의미가 담겨 있으며, 사찰의 입구에서 법당 한가운데의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수행자의 신심을 북돋우고 그 정신을 되살리게 하는 깊은 의미가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사찰 속의 모든 것은 부처님의 자비·공덕과 불교의 정신이 깊이 녹아 있는 생명체인 것이다.



Ⅱ. 본론

1.사찰의 유래

 불교가 처음 일어났던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초기 수행자들은 무소유(無所有)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정한 거처 없이 출가와 유행의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인도의 기후적인 특성에 의해, 부처님께서는 우기 3개월 동안 탁발과 유행을 중단할 것을 계율로 정하고, 한 곳에 머물며 수행하는 안거의 제도를 택하였다. 물론 이 때까지도 사찰은 건립되지 않았으며, 승려들은 우기 동안의 음식을 확보한 다음 숲속 등에 거주하면서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안거제도가 차츰 정립되면서 승려들은 부처님을 모시고 한 곳에 모여 정진하기를 열망하였고, 왕족이나 부유층 같은 유력한 신도들이 불교 교단에 원림을 기증하여 승려들을 머무르게 하였다.

불교 최초의 원림은 마가다(Magadha)국의 빔비사라(Bimbisara) 왕이 기증한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처음에 오두막 형태이던 정사는 차츰 주거용 건축물로 바뀌어갔고 규모도 커져갔다. 부처님 당시 최대 사찰로 전해지는 기원정사가 건립된 것도 죽림정사 얼마 뒤의 일이었다. 기원정사는 사위성의 수닷타(Sudatta) 장자 [죽림정사에서 부처님을 뵙고 크게 깨달아 불제자가 된 부호]가 기타(祗陀, Jeta) 태자의 동산을 기증 받아서 지은 사찰인데 기원정사 또는 '기수급고독원(祗樹給孤獨園)'이라 불리었다. 이 외에도 동원록자모강당(東園鹿子母講堂)과 대림정사(大林精舍), 왕원정사, 온천정사 등이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건립된 사찰들이다. 이처럼 '정사(사찰)'는 안거수행을 위한 실제적인 목적에 따라 생겨났으며, 불교 교단의 공동 재산이었다. 이렇게 사찰은 정진을 위한 수행처이자 승려들의 공동 주거지로 정착되어갔지만, 다른 한편으로 초기 교단의 생활지침이었던 '사의지'〔四依止 : ①음식은 걸식(乞食)으로만 구한다 ②남이 버린 베 조각을 모아 만든 분소의를 입는다 ③지붕 있는 곳에 자지 않으며, 나무 아래에서 좌선명상하는 수하좌를 원칙으로 삼는다 ④소의 오줌을 발효시켜 만든 부란약을 사용한다.〕는 차츰 사라져 갔다. 또한 비구들의 생활 형태도 유행 편력의 생활에서 정사 거주의 생활로 변모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승려들의 사찰 거주 생활은 불교 교단을 후세에까지 존속시킬 수 있었던 최대의 요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즉, 사찰의 건립은 그 나름대로 불교의 교단과 교법을 유지하고 존속시키기 위한 하나의 견고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도의 사찰은 단순한 수행처에서 종교 의례를 집행하는 성소로, 중생이 고통을 극복하고 삶의 행복을 찾는 기도처로 그 성격이 승화되어 갔다. 그리고 교세의 확장과 함께 사찰은 그 규모나 숫자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조형 예술품 등과 함께 불교 건축의 찬란한 전통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불교가 정식으로 공인된 것은 후한 명제(明帝) 10년(67)이었다. 중인도 승려인 가섭마와 축법란 등이 불상과 불경을 흰 말에 싣고 낙양으로 들어오자 명제는 크게 환영하며 낙양성의 서옹문 밖에 '백마사(白馬寺)'를 지어 그들을 머무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중국 최초의 사찰이다. 그 뒤 중국에서는 사찰을 지칭할 때 '사원(寺園 또는 寺院)'이라고 많이 부르게 되었는데, 당나라 이후에는 '사(寺)'를 '원(院)'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즉, '사'는 사찰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원'은 사찰 속에 있는 특정한 기능의 별사(別舍)를 지칭할 때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산 속의 작은 사찰이나 토굴을 '암(庵)'이라고 불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 소수림왕 5년(375)에 세운 이불란사 [伊弗蘭寺→아도(阿道)가 머문 절]와 초문사 [肖門寺→순도(順道)가 머문 절]이다. 신라의 경우는 묵호자(墨胡子)와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일선군(一善郡, 경북 선산)에서 포교활동을 숨어서 했던 모례의 초가집을 들 수 있으나, 공식적인 최초의 절은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던 천경림(天鏡林)에 세워진 흥륜사(興輪寺)를 들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사찰을 '절'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지만 몇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아도화상이 숨어 지낸 '모례(毛禮)의 집'에서 '모례'가 우리말로는 '털례'인데, '털'이 '덜'로 바뀌었다가 다시 '절'이 되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사찰은 절을 많이 하는 곳이기 때문에 '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인데, 이는 승려들이 불자들의 종교적인 심성을 일깨우기 위해 의미를 붙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사찰을 '데라'라고 한다. 이는 파리어(巴梨語) '테라(There)'에서 왔다는 설과 아도가 머문 "털례(毛禮)의 집"에서 연유되었다는 설이 있다.


2.사찰의 구조

▶법당

 절은 삼보를 모시고 불자들이 모여서 정진하는 도량이다. 도량(道場)은 불법의 도를 선양하는 곳을 의미한다. 실질적인 절의 개념에 따르면 절의 건축물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 라 할 수 있으나, 전통 사찰은 만다라 형상을 나타내며, 극락세계를 표현한 장소로서 독특한 건물구조로 되어 있다.

'만다라(曼茶羅)’는 어느 것도 부족한 것이 없이 모두 다 갖추어졌다는 뜻이며, 법당에 모신 탱화는 만다라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절의 주요 건축물로는 법당, 불탑, 요사를 들 수 있고, 이에 따르는 부속 구축물 등이 있다. 우 리가 절에 갈 때에는 본사의 경우 대개 일주문과 천왕문을 통하여 들어가며, 가는 도중에 부도 전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법당 앞에 탑과 석등을 보게 되고, 법당의 좌, 우에 선방, 승방이 있고 누각이 있음을 흔히 접하게 된다. 이러한 절의 건축물을 하나하나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법당(法堂)

 불보살(佛菩薩)님을 모신 가장 중심부가 되는 건물로서 당호는 전(殿)자를 쓴다. 예컨대 대웅 전, 관음전, 비로전과 같은 건물이 법당이며, 어느 부처님, 혹은 어느 보살님을 모셨느냐에 따 라 법당의 명칭이 다음과 같이 달라진다.

① 대웅전(大雄殿) : 석가모니를 모신 법당을 대웅전, 또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하는데, 대웅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다른 호칭이며, 큰 장부(大丈夫) 라는 뜻과 같다.

② 비로전(毘盧殿) :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이며, 대광명전(大光明殿) 또 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고도 한다.

③ 극락전(極樂殿) : 서방 정토의 주불이신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며, 극락보전(極樂寶殿), 미타전(彌陀殿), 또는 무량수전(無量水殿)이라고도 한다.

④ 미륵전(彌勒殿) :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신 미륵불을 봉안한 법당인데, 미륵불이 계시는 세 계를 용화 세계라 하기 때문에 미륵전을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한다.

⑤ 약사전(藥師殿) : 중생의 재난과 질병을 없애고 고난에서 중생을 구해 주시는 약사여래 (藥師如來)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며, 만월전(滿月殿)이라고도 한다.

⑥ 관음전(觀音殿) :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으로서 원통전(圓通殿), 원통보전(圓通寶殿) 또 는 자비전(慈悲殿)이라고도 한다.

⑦ 지장전(地藏殿) : 지장보살을 모신 법당으로 명부전(冥府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을 중앙에 모시고 좌측에는 도명존자, 우측에는 무독귀왕을 보처로 모시기도 한다. 그리고 시 왕(十王)을 좌, 우에 모시기도 하여 시왕전(十王殿) 또는 대원전(大願殿) 이라고도 한다.

시왕은 도교에서 나온 말 같은데,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10위의 왕으로서 ⑴ 진 관왕, ⑵ 초강왕, ⑶ 송제왕, ⑷ 오관왕, ⑸ 염라대왕 ⑹ 변성왕, ⑺태산왕, ⑻ 평등왕, ⑼ 도시왕, ⑽ 오도전륜왕을 말한다.

⑧ 팔상전(捌相殿) :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부분(八相)으로 나누어, 여덟 폭의 그림으로 모시 고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이다.

이 외에 비로자나불과 화엄경을 여러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모신 화엄전, 부처님과 제자 들을 모신 응진전 (또는 나한전), 문수보살을 모신 문수전, 역대 조사들의 초상화를 모신 조사당, 민간 신앙을 불교에 흡수한 산신이나 칠성을 모신 산신각, 칠성각이 있고, 또 산 신, 칠성, 독성을 함께 모신 삼성각(三聖閣)을 큰 법당의 뒷편에 건립하기도 한다.

⑨ 나한전(羅漢殿) : 나한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나한을 모신 건물.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그 뜻은 성자를 의미한다.

▶탑

 우리는 법당 앞에 석탑을 볼 수 있는 데, 탑은 단순히 돌을 쌓은 구축물이 아니고 부처님의 사 리를 모신 곳이다. 사리 대신 불상 또는 불경을 모시기도 하나 어쨌든 불자의 귀의처이기 때문 에 불자는 탑에 예경을 하여야 한다.

법당 앞에 탑을 하나 모셨을 때 일탑식(一塔式), 둘 모셨을 때 쌍탑식(雙塔式)이라 하는데, 지형에 따라 선택하여 모신다.

적멸보궁은 그 자체가 법당이고 또 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탑은 석탑 이외에 나무와 흙, 벽돌로 조성된다.

▶요사

 스님들이 생활하는 건물을 통틀어서 요사라고 한다. 스님들이 수도하는 곳, 일하는 곳, 공부하 며 기거하는 곳을 모두 요사라 하므로 사무실, 후원(後院), 객실, 창고 등이 모두 요사에 해당 한다.

스님들이 수도하는 요사의 명칭은 여러 가지를 사용하여 현판을 붙이는데, 올바른 행과 참선 하는 장소라는 의미로 해행당(解行堂), 수선당(修禪堂)이라는 현판을 붙이기도 하고, 지혜의 칼을 찾는 공부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심검당(尋劍堂), 부처님을 선출하는 장소라는 뜻으로 선 불장(選佛場)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문루의 부속 건축물

 절의 건물 배치를 보면 모두 일정하지는 아니하나 본사의 경우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을 지나 서 일직선으로 보이는 법당을 만나게 된다. 또는 법당에 도달하기 전에 강당이나 종무소를 지나기도 하며, 좌우에 종각을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찰간(刹竿) 또는 당간(幢竿)이라고 하는, 절 입구에 돌이나 쇠로 만들어 세운 기둥이 있으며, 그 위에 긴 쇠로 만든 깃대를 세워서 그 절의 종지와 사격(寺格)을 표시하였는데 지금 은 이 찰간의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절에 들어서기 위하여 통과하는 문은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 불이문 등이 있으며, 절마다 조 금씩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⑴ 일주문(一柱門) : 절 입구에 있는 첫 번째 정문이며, 경내(境內)와 경외(境外)를 구분하는 문이기도 하다.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만 세워서 만든 문이기 때문에 일주문이라 한다고 하지 만 절에 따라서는 양쪽에 기둥을 하나 이상씩 세운 것도 있으므로 기둥을 일렬로 세워서 만든 건축물이기 때문에 일주문이라 한다는 말이 더 합당할 것 같다. 어쨌든 이 일(一)이라는 것은 불교의 진리를 나타낸 일승법(一乘法)이라고 이해하면 될 줄 안다.

일주문에는 '00山 00寺' 라고 산의 이름과 절의 명칭을 표기하고 있다.

⑵ 천왕문(天王門) : 양쪽에 네 분의 천왕을 모신 문이다.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마(邪 魔)를 방어하며, 착한 사람들을 돕는 임무를 지닌 호법천왕으로서, 동방의 지국(持國)천왕, 남방의 증장(增長)천왕, 서방의 광목(廣目)천왕, 북방의 다문(多聞)천왕, 이 네 분의 천왕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예경을 표하지만 신앙의 표상이 될 수는 없다. 천왕문에 다음과 같은 찬탄의 말이 붙여 있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옹호성중 혜감명 (擁護聖衆 慧鑑明)

사주인사 일념지 (四洲人事 一念知)

애민중생 여적자 (哀愍衆生 如赤子)

시고아금 공경례 (是故我今 恭敬禮)

옹호성중 크신지혜 밝고도 밝아

온세상일 일념중에 모두 아시고

모든중생 자식처럼 아끼시나니

저희들이 정성다해 예경합니다.


⑶ 해탈문(解脫門)과 불이문(不二門) :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고 이 문 을 통하여 법당에 이르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부처님의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러 불법의 깊은 진리를 깨닫는다는 의미를 가진 문이다.

그리고 천왕문 이외에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금강문을 설치한 절도 있다.

▶부도

 고승의 사리를 모신 조형물로 하며 '붓다(Buddha)'가 어원 이다. 가람 배치 구조와는 별도로 건립되었으며, 조상 숭배를 중시하는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하였다. 탑이 사찰 의 중심위치인 법당 앞에 세워지는 반면에 부도는 사찰 경내의 변두리나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지며, 이를 부도 전이라 한다.


3. 대표적인 사찰

 1)송광사의 유래 및 구조

 경문왕 칠년에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창건하였고 그 뒤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 후 1622년(광해군(光海君) 14년)에 덕림선사(德林禪師)가 중창했고, 조선 인조(仁祖)때에 벽암대사(碧岩大師)에 의해 절의 확장공사가 이루어졌고, 조정에서는 송광사(松廣寺)라는 사호를 내려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이 절의 이름을 종남산(終南山) 송광사(松廣寺)라 하는데 종남산(終南山)이란,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절터를 구하러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땅속에서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는 영천수를 발견하고 여기가 큰 절을 세울 곳이라고 생각하여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데에서 유래(由來)되었다 한다. 현재 이곳에 보존(保存)되어 있는 전주부송광사개창지비(全州府松廣寺開創之碑)의 내용을 보면, 송광사(松廣寺)는 1622년(광해군(光海君) 14년)에 승려(僧侶) 응호(應浩), 승명(勝明), 운정(雲淨), 덕림(德林), 득순(得淳), 홍신(弘信) 등이 보조국사(普照國師)의 뜻을 따라 처음 세운 것이라 한다고 한다. 보조국사(普照國師)는 고려시대 도승으로 조계종(曹溪宗)의 창시자이며 호를 목우자(牧牛者)라 하는데, 그가 전주(全州)의 종남산(終南山)을 지나다가 영천(靈泉)이라 부른 우물을 발견하고 물을 마셔보니 그 맛이 특이하여 그는 이 물로 인해 이곳이 앞으로 큰 절터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샘 주위의 네귀퉁이를 돌로 쌓아둔 뒤 순천(順天)으로가 송광사(松廣寺)를 지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제자들에게 전주(全州) 종남산(終南山)을 지날 때 그곳에 절터를 마련해 두었다는 것과 거기에 반드시 절을 지으면 크게 번창할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뜻을 옮기지 못하다가 1622년에 이르러서 전술(前述)한 응호(應浩) 등의 승려들에 의하여 14년의 공사(工事) 끝에 1636년(인조 14년(仁祖 14年))에 완성(完成)을 보게 되었으며, 당시 무주 적상산(赤裳山) 안국사 주지(安國寺 住持)로 있던 벽암대사(碧岩大師)를 개창조로 삼았다고 한다. 이때 절터의 땅은 전술한 승명의 증조부인 이극룡이 희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건물이 모두 완성된 뒤 벽암대사(碧岩大師)를 모시고 50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수천명으로부터 시주를 받았다고 한다. 절의 이름을 보조국사(普照國師)의 뜻을 받들었다는 의미에서 종남산 송광사(松廣寺)라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송광사(松廣寺)에는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冥府殿),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종루(범종각), 관음전 등의 건축물 및 개창비, 사적비 등의 비(碑)가 남아있다.

대웅전은 송광사(松廣寺)의 본전으로서, 석가여래(釋迦如來)를 본존불(本尊佛)로, 좌우에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와 약사여래(藥師如來)가 안치되어 있다. 전면5간, 측면3간의 팔작지붕 다포계건물로서,「대웅전, 의창군서」, 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의창군(義昌君)은 선조(宣祖)의 8남이며, 광해군(光海君)의 아우로서, 인조(仁祖) 15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비문을 썼다. 아마도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며, 이는 대웅전(大雄殿) 건립년대에도 참고가 된다. 그러나, 「성상즉위구년정사육월초이일기(聖上卽位九年丁巳六月初二日記)」라는 상량문이 있는바, 이는 철종(哲宗) 8년 정사인 것 같다. 건물내 서벽에는 불탱화가 있는데,「함풍칠년정사십일월초육일(咸豊七年丁巳十一月初六日)」이라 적혀있다. 이는 건물중수년대인 철종(哲宗) 8년이다. 불탱화(佛幀畵)는 가로 258㎝, 세로 385㎝이다. 평면규모는, 앞면의 중앙어간폭은 375㎝, 좌우매간폭은 345㎝, 총길이 17.55m, 옆면은 중앙간폭이 315㎝, 앞뒤간폭 345㎝, 총너비 10.05m, 주심에서 댓돌끝까지는 290㎝이다. 건평47.3평, 내부는 고주를 세우고, 간벽을 가르고 그 앞에 불단을 짜서 삼존불좌상을 안치하였는데, 천정에 닫집은 짜지 않았다. 좌우형량머리에는 용을 조각하고, 천정중앙의 우물반자에는 오엽의 보상화문을 그리고, 남면과 양측면의 빗반자에는 무악상을 그렸다. 남면중앙에 3면, 그 좌우에 각 2면, 동서측면에 각 2면씩이다. 남면서측에는, 무용도(舞踊圖)와 횡적도, 중앙은 좌로부터 비파, 나팔의 취주도와 무용도, 남면동측에는 천도진상도와 장고도, 동면에는 무용도와 용고, 서면에는 무용도와 쟁등 취타도를 그렸다.

송광사는 일반사항산지 사찰이면서도 평면가람배치의 양식을 볼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세 개의 단으로 나뉘어 하단은 진입부, 중단은 절의 중심영역으로써 상단은 수도 생활의 영역으로써 구분된다. 특이한 지형에 의해 종축선상보다 횡단면이 더 길고 중심영역으로 건물이 모여있는 특이한 형태이며 잦은 전화와 화재에 의한 소실로 8번의 큰 중창을 하였다.

현재에도 한국조계종의 본산으로 많은 건물들이 증축되고 있으며 선도수련의 장으로써 큰 역할을 한다. 송광사의 외부사항은  산지 가람 형식에 평지 가람 형식이 조화된 형태이다.

풍수학상 좋은 입지를 얻기 위해 남북이 아닌 동서 방향으로 종축방향을 지니며 부지의 형태에 의해 횡축선의 너비가 더 길어 전체적인 배치가 앞으로 부풀어 있다. 이 절의 중심영역은 중단의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이며 많은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그 배치가 벽계도에 기초한다는 주장이 있다. 전체적으로 건물들이 이 중심영역을 기준으로 직교축을 형성하며 둘러싸는 형식이며 창건 초기에는 행랑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평지 가람적인 배치계획을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통해 절의 최상부까지 가는 진입로는 전통적인 산지 사찰의 종축개념을 가지지만 각 건물이 약간씩 틀어져 있어 선종 사찰다운 자유로움을 볼 수 있다. 

공간 구성의 특징으로는 8차에 걸친 중창으로 현재의 모습은 초기의 모습과 달라진 곳이 많다. 원래 계획 단계에서부터 탑이 없었고 후에 탑이 있을 곳에 법왕문을 세워 그 역할을 대신했는데 이는 탑의 상징적 의미가 퇴색하면서 금당 중심의 선종사찰로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절의 상단에는 수선사와 국사전, 하사당 등 승보 사찰임을 상징하는 건물들을 배치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2)화엄사의 유래 및 구조

 창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544년(신라 진흥왕 5)에 승려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치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전하고 있다.

신라 경덕왕 14년(755)에 완성된 우리 나라 최고의 화엄경 사경(寫經)을 주도한 이가 황룡사에 승적을 둔 연기법사인데, 그가 전라도 지방에서 사경을 주도한 곳이 화엄사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8C 후반 연기조사가 화엄사에서 활동하면서부터 절이 대규모로 확장되기 시작했으며, 처음 창건은 훨씬 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견해일 듯 하다. 670년(신라 문무왕 10)에는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화엄10찰(華嚴十刹)을 불법 전파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이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그리고 장육전(丈六殿, 지금의 각황전)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때 비로소 화엄경 전래의 모태를 이루었다.

사지(寺誌)에서는 당시의 화엄사는 가람 8원(院) 81암(庵) 규모의 대사찰로 이른바 화엄 불국세계(佛國世界)를 이루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하였고 고려시대에 네 차례의 중수를 거쳐 보존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승려들 또한 학살당하였다. 범종은 왜군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섬진강을 건너다가 배가 전복되어 강에 빠졌다고 전한다. 장육전을 두르고 있던 석경은 파편이 되어 돌무더기로 쌓여져오다가 현재는 각황전(覺皇殿) 안에 일부가 보관되고 있다. 예전에 장육전이 유명했던 것은 화엄석경 때문이었는데, 현재 163개 상자에 1만 4천여개의 석경 조각이 있다고 한다.

1630년(인조 8)에 8도도총섭인 벽암대사(碧巖大師)가 크게 중수를 시작하여 1636년(인조 14)에 대웅전을 완공하는 등 몇몇 건물을 건립, 폐허된 화엄사를 다시 일으켰고, 그 뜻을 이어받아 계파(桂坡)대사가 1703년(숙종 29)에 각황전을 중창하였다.

각황전 중창과 관련한 재미 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스승의 위촉을 받은 계파대사가 장육전 중창 불사를 시작했지만 재원이 부족하여 대웅전의 부처님께 기도 드리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걱정 말고 내일 아침 화주(化主)를 떠나 맨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고 했다. 다음날 절을 나선 대사가 처음 만난 사람은 거지 노파였다. 종일 시주를 간청받은 노파가 감동하여 "내 죽어 왕궁에 태어나 불사를 성취하리니 문수대성은 가피를 내리소서" 하고는 늪에 몸을 던졌다. 몇 년 후 걸식을 하며 서울에 나타난 대사가 궁궐 앞에서 어린 공주를 만났는데 공주가 우리 스님이라며 반가워 매달렸다.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손을 펴지 못했는데 스님이 어루만지자 손이 펴졌으며, 손바닥에는 '장육전'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소식을 들은 숙종임금이 계파를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감격하여 대시주를 내렸으며 각황전이라 사액(賜額)하였다고 한다. 이는 바로 계파의 청정한 원력에 의해 공주로 환생한 노파의 공덕이 장육전 중창의 원동력으로 꾸며진 이야기인 것이다. 실제로는, 장육전 상량문을 보면 왕자 연잉군(뒤에 영조)과 모친인 숙빈 최씨(무수리 출신)가 대시주로 적혀 있다.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에는 화엄종 주존인 법신(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보신(報身) 노사나불과 화신(化身) 석가모니불을 좌우로 하여 법.보.화 삼신불을 모시고 공양한다.


Ⅲ. 맺음말

 사찰은 그 위치에 따라 크게 평지가람형(平地伽藍型), 산지가람형(山地伽藍型), 석굴가람형(石窟伽藍型)의 세 유형으로 분류되고 발전되었다.

평지가람형은 나라의 서울을 중심으로 넓은 사역(寺域)에 장엄한 건축물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왕실의 원당(願堂)이나 국찰(國刹) 등으로 많이 건립되었고, 동시에 사찰의 위치의 특징 상 대중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산지가람은 깊은 산속에 자리잡는데, 신라 말기에 도입된 선종(禪宗)의 영향과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수도생활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특징을 지닌다. 석굴가람은 천연 또는 인공의 석굴에 건립하는 사찰로서, 주로 기도를 위한 도량으로 이용되었다. 이 석굴가람은 우리 나라보다는 인도나 중국에 많았던 유형이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삼국 및 통일신라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평지가람도 산지기람만큼이나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나라의 대찰(大刹)은 거의 산 속에 있고, 사찰이라고 하면 산 속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이렇게 우리 나라에 산지가람이 많은 이유는 크개 다섯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산악신앙 때문이다. 고유의 산악신앙을 기초로 하여, 성스러운 산들을 불보살이 머물러 있는 불교의 성지로 수용하고 변화 발전시킴에 따라 자연스럽게 산지가람이 많이 창건되었던 것이다.

둘째, 호국호법(護國護法)의 의지에서 산지가람이 많이 창건되었다. 각 왕조나 시대에 걸쳐서,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경 근처의 산지에 사찰을 건립한 것은 국토 수호의 강인한 의지가 불력(佛力)으로 승화된 사상성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불교의 초세속주의(超世俗主義) 경향 때문이었다. 탈속적인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따르는 수행인의 수도처로는 산중이 적합한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넷째, 신라말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풍수지리학에 입각하여 제창하였다는 산천비보설 [山川裨補說-나라 안에 있는 산천의 쇠한 기운을 보익(補益)하여 국가의 기업(基業)을 튼튼하게 하는 것]의 영향 때문이었다. 특히 이 산천비보설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깊이 신봉되었으며, 고려 500년 동안 도선이 지정한 산에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조선시대의 배불(排佛)정책 때문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왕릉을 돌보거나 왕족의 원찰(願刹)이 되었던 소수의 사찰을 제외하고는 모두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 승려들은 국가적인 억압과 탄압을 피해 깊은 산속에서 용맹 정진을 통하여 불도의 명맥을 이어갔으며, 그것이 오랜 세월 계속되었기에 오늘날 사찰은 으례 산속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