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조 선 시 대 의   정 원


03학번 윤소영


- 목 차 -


 Ⅰ. 머리말


 Ⅱ . 본론

 

    ■ 조선시대의 정원

       ⑴ 정원의 성립 배경

       ⑵ 대표적 정원

          ① 부용동 정원

          ② 양산보의 소쇄원

 

  Ⅲ. 맺음말



 


Ⅰ. 머리말

 

 전통적인 개념으로 볼 때 정원이란 자연을 소재로 하여 인간이 만든 하나의 작품으로서 주로 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는 외부공간이다. 만든 사람의 취향이나 거기 거주하고 있는 사람의 성격에 따라 그것은 심미적인 장소일 수도 있고 꽃이 만발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그 건물의 용도와 관련되어 어떤 기능을 담는 외부생활공간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원의 목적은 긴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변천되어 왔다. 그것은 바로 한 문화, 한 시대의 산물이자 바로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부공간에서의 생활을 즐겼고 또 전통적인 “마당”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마당은 그 놓여지는 위치 또는 그와 관련된 건물의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특징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Ⅱ. 조선시대의 정원


 1. 정원의 성립배경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체계나 정치적 주인공들이 있기 마련이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적 주체가 불교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호족세력이었다면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내세운 사대부 계층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가 불교사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조선시대의 문화는 사대부들의 정신세계와 행동양식을 표출한 서원이나 정자, 정원, 원림에서 꽃피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 선비들은 그들이 추앙하였던 주자가 무이구곡에서 은둔했던 것을 지고의 가치로 여겨 세상을 등지고 자연으로 돌아가 은일자적하는 삶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러한 유학자들의 삶의 태도와 민족 고유의 자연관이 어우러져 조선시대 문화의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원림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원림은 거주환경 속에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이상세계를 현실화하여 그 곳을 인격도야의 수련장으로 삼으려는 기능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부터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한 정원이나 원림문화가 등장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국적인 양식으로 정착하였는데 그 절정기가 16세기이다.


2. 대표적 정원


  1) 부용동(浮蓉洞) 정원


 해남 땅끝에서 배를 타고 곧장 남쪽으로 한 시간 가량 가면 노화도를 거쳐 보길도에 닿는다. 그 뱃길의 끝 보길도는 상록수가 우거지고 물이 맑아 자연 경관만으로도 아름다운 고이지만, 부용동 정원이라 불리는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유적이 있어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온 것은 그의 나이 51세 되던 인조 15년(1637)인데, 그가 이 섬을 찾아온 내력은 이렇다.

 조선 인조 14년(1636)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나라 태종이 직접 전쟁에 나섰고, 청의 군사는 급속히 서울로 진격해 왔다. 사태가 급해 지자 왕은 세자빈과 원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피했으나 결국 이듬해 1월 30일 한강 동쪽의 삼전도(三田度)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해남집에 있던 윤선도는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왕을 돕기 위해 집안 사람들과 노복 수백 명을 배에 태우고 강화도로 향했는데, 도중에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뒤이어 왕이 청나라에 항복의 예를 바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서인이 권세를 잡고 있던 시절에 남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미 유배와 좌천, 파직을 당하는 등 사람들 속에서 피로했던 윤선도는 이 치욕적인 소식을 듣자 다시는 세상 꼴을 보지 않으리라 하고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윤선도 일행은 상록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섬 하나를 보았고, 섬에 올라 산수를 둘러보고 반한 윤선도는 제주도까지 갈 것 없이 그 섬에 터를 잡아 버렸다.

 그 섬이 바로 보길도이다. 윤선도는 섬의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지었고 섬의 주봉인 격자봉(425m)밑에 낙서재를 지어 거처를 마련했다.

 그 후 윤선도는 두 차례 더 귀양을 가고 벼슬살이를 하러 서울로 가거나 해남의 금쇄동 등 다른 은거지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 85세로 낙서재에서 삶을 마치기까지 보길도를 드나들며 섬 이곳저곳에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 정성암 등 모두 25채의 건물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고하여 자신의 낙원, 부용동 정원을 가꾸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부용동 정원은 크세 세 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거처하는 살림집인 낙서재 주변과 그 맞은편 산 중턱의 휴식공간인 동천석실 주변 그리고 부용동 입구에 있는 놀이의 공간이라 할 세연정 주변이다. 윤선도는 섬 전체를 구석구석 살펴서 가장 알맞은 곳을 골라 살림집과 정자를 놓고 연못을 파고 정원수를 심는 등 섬 전체를 조경의 범위로 삼았다. 그 스케일과 상상력의 크기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지만, 이 정원을 조성하기 위해 동원되었을 노동력이나 당시 섬 주민들에게 그가 어떤 존재였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윤선도의 고조부이며 해남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 이래 축적되어 온 해남윤씨 집안의 재력이 이 정원을 꾸미는데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윤선도의 후손 가운데 누군가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가장유사(家藏遺事)』에는 고산의 보길도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고산은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울음 소리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후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악공들을 거느리고 석실이나 세연정에 나가 자연과 벗하며 놀았다. 술과 안주를 충분히 싣고 고산은 그 뒤를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세연정에 이르면 연못에 조그만 배를 띄워 아름다운 미희들을 줄지어 앉혀 놓고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비치는 것을 감상했다. 때로는 정자 위로 악공들을 불러 올려 풍악을 울리게 했다."

 

 이처럼 윤선도는 당쟁으로 시끄러운 세상과 멀리 떨어진 자신의 낙원에서 안빈낙도라는 유교적 규범에서도 벗어나 마음껏 풍류를 누리는 가운데 『어부사시사』등 국문학사상 빛나는 작품들을 남겼다. 『어부사시사』는 출범에서 귀선까지 어부의 생활을 춘하추동 사계절마다 10수씩, 모두 40수로 노래한 작품이다. 당시의 시가라면 한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여 창의성이  적고 내용도도덕성을 강조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윤선도는 여기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의 소박한 생활을 우리말로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

 부용동 정원은 윤선도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서자와 그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었으나 점차 퇴락 했다. 3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군데군데 건물자리였음을 알리는 주춧돌과 연못들 정원의 자취가 흩어져 있을 뿐 당시의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에 세연정과 동천석실이 복원되었고 곧 낙서재도 복원될 것이라 한다.

 윤선도가 조영한 부용동은 스케일과 규모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다. 자연을 개조하여 꾸몄지만 전혀 인공의 티를 드러내지 않고 자연 속에 하나가 된 조선 정원의 백미로 꼽힌다. 부용동 정원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 37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양산보의 소쇄원


 소쇄원은 조선 중종 때의 풍운아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게 되자 그의 제자 양산보(1503~1557)가 세상에 뜻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이다 소쇄원은 1527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3대 약 70년간에 걸쳐 조성한 대원림이다. 소쇄원을 흔히 한국 최고의 별서정원 혹은 원림 이라 부르는데 원림이란 교외에서 동산과 숲의 자연 상태 그대로 종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의치에 집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이 정원은 경사면의 적절한 노단식 처리하든가 기능적인 공간구획, 대숲속의 오솔길, 지형에 따라 변화있는 지붕담장의 선, 담 밑에 뚫린 수문 등의 낭만적이고 장식적인 조경으로 원림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며, 보길도의 부용동림과 더불어 조선시대 별서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쇄원의 소쇄란 뜻은  공덕장의 북산이문에 나오는 말로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말이다.

 - “瀟” 빗소리 소, 혹은 물 맑고 깊을 소

 - “灑” 쇄,새,혹은 사라 읽으며 물뿌릴쇄나 깨끗할 쇄

소쇄원은 무이구곡의 개념이 적용되는데 무이구곡은 중국 복건성 숭안현 남쪽에 있는 무이산의 구곡계를 의미한 것으로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의 경지, 무릉도원에의 염원을 상징한다.

 -무이도가해석과 결부시킨 유추해석

  1~3곡 : 다리터, 유정,문방(제월당)-입도

  4~6곡 : 대봉대, 오곡투류의 담장부분, 소쇄원내원밖집터-안화지위

  7~9곡 : 오동나무숲, 복숭아밭, 숯가마터에서 고암동굴아래까지-극치


 ①애양단구역

 애양단구역은 이 원림의 입구임과 동시에 계류쪽의 자연과 첨경시설을 감상하면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애양단이란 김인후(金鱗厚)가 지은 소설<소쇄원사팔영>가운데 있는 양단동오라는 시제를 따서 송시열이 붙인 이름 이름이다. 왕대나무숲속에 뚫린 오솔길을 따라서 올라오면, 입구 왼편 계류쪽에 약 8미터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방지가 만들어져 있고, 과거에는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이것은 장식용으로 오곡문 옆 계곡물이 도량을 타고 내려와 위쪽 못을 채우고, 그 넘친 물이 도랑은 타고 내려와 물레방아를 돌리게 되어 있어, 이것이 돌 때 물방울을 튀기며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물으 약동을 건너편 ‘광풍각’에서 감상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위쪽 옆에서는 계류쪽으로 튀어나온 ‘대봉대“라는 조그마한 축대 위에 삿갓지부의 작은 모정이 서 있는데. 이것은 근래에 와서 다시 복구 된 것이다.


 ②오곡문 구역

 오곡문 옆의 담밑 구멍으로 흘러 들어오는 계류와 그 주변의 넓은 암반이 있는 공간을 말한다. 계류의 물이 들어오는 수문 구실을 하는 담 아래의 구멍은 돌을 괴어 만든 높이 1.5미터, 너비 1.8미터외 1.5미터의 크기를갖는 두 개의 구멍으로 되어있는데, 그 낭만적인 멋은 계류공간의 생김새와 잘 어울린다. 이와 비슷한 기법은 1100년대(숙종연간)의 이실충이 만든 경기도 부천의 滌署亭에서 볼 수 있다. 오곡문의 '오곡'이란 주변의 암반 위의 계류와 갈지자형 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이 부근의 암반은 반반하고 넓어서 여러 많은 사람들이 물가에 앉아서 즐기기에 넉넉한데, 1775년(영조 31)에서는 가야금을 타는 모습이 묘사되어있다.


 ③제월당구역

 오곡문에서 남서방향으로 놓여있는 직선 방향의 위부분을 말하는데, 주인을 위한 사적 공간이다. 제월당 앞의 마당은 보통 농가처럼 비워져 있으며, 오곡문과의 사이에 만들어진 매대에는 여러 가지 꽃과 나무들이 심어져있었다. 광풍각구역은 제월당구역의 아래쪽에 있는 광풍각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방 기능의 공간이다. 광풍각 옆의 암반에는 석가산이 있는데 이러한 조경 방법은 고려시대의 정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광풍각의 뒷 쪽에 있는 동산을 복사동산이라 하여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재연하려 하였다. 제월당의 '제월'과 광풍각의 '광풍'은 송나라 황정견이 유학자 주돈이의 사람됨을 평하여 '胸懷灑落如光風霽月'이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④광풍각구역

 제월당구역의 아래쪽에 있는 광풍각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방 기능의 공간이다. 광풍각 옆의 암반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는데 이러한 조경방법은 고려시대의 정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광풍각의 뒤쪽에 있는 동산을 복사동산이라 하여 도연명(陶淵明)의 무릉도원을 재현하려고 하였다. 제월당의 ‘제월’과 광풍각의 ‘광풍’은 송나라의 황정견(黃庭堅)이 유학자 주돈이의 사람됨을 평하여 “흉회쇄락여광풍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양산보에 대해서

양산보의 자는 언진, 호는 소쇄공

연산군 9년(1503) 광주서창에서 양사원의 세아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산보는 어려서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당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신진사류들과 함게 정치개혁을 시도하던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남곤등 훈구파 대신들에게 몰려 화순능주로 유배되었다. 이때 양산보는 귀양가는 스승을 모시고 낙향했으나 스승인 조광조가 같은해 겨울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아 세상을 뜨게 되자 큰충격을 받고 세속의 듯을 버린체 산수경치가 뛰어난 고향에 은둔하게 되었다. 그후 양산보는 나이 55세인 1557년에 돌아 갔다.

 양산보의 자연관은 평천장 고사(:소쇄원을 팔거나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 주지 말라고 적힌 유언)에서 알수 있듯이 정원을 다시 자연속으로 돌려 보내려기 보단 후손이 계속가꾸고 소유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현세적이고 어떻게 보면 서구적인 자연관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Ⅲ.맺음말

 

 정원 우리는 흔희 집안의 뜰. 미관이나 위락 또는 실용을 목적으로 주거 주위에 수목을 심거나 또는 이 밖에 특별히 조경시설을 갖춘 토지를 말하기도 한다. 정원이란 용어는 영어의 garden, 프랑스어의 jardin, 에스파냐어의 jardn, 이탈리아어의 giardino, 독일어의 Garten

등 이라고 불리 우며 오히려 우리나라 정원보다 ‘정원’ 이라 말하면 외국의 정원을 떠오르기일쑤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서울에있는 비원이나 창경궁 같은 고궁을 위주로만 생각이 떠오른다 위의 본문의 글처럼 정원이라는 것은 옛 우리 선조들께서 항상 자연과 함께 있으려 하고 집안에서도 자연을 느끼려는 소중한 깨달음을 알수있다. 특히 비원이나 창경궁같은 경우 조선시대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정원은 서울에 있고 우리나라 수도에 있어서 누구나 찾기 쉬운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