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일제 식민 통치와 민족의 수난 p142

 

제1차 세계대전       <참고>

 

제1차세계대전<First World War ; 第一次世界大戰>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대전쟁.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배경과 원인】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분할〉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엽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세계전쟁이었는데, 그 발발의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세계 제국주의의 성립이 있었다. 이 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합중국, 약간 뒤늦게 일본 등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독점단계로 들어가, 각국은 대형화한 경제력의 배출구(판로)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 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었으며, 이제는 그 재분할이 열강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과 투르크(터키)였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미국과 프랑스·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다.

〈삼국협상과 삼국동맹〉 러·일전쟁 후의 세계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프랑스협상 성립에 의하여 시작되고 있었다. 이 2대 식민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여 협정을 맺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됨으로써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근동진출과 이란에서의 입헌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협상을 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체제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3국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관계였다. 한편, 3국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에서 프랑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독일은 점차 국제적 고립을 더하여 갔다. 3국협상과 3국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국간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Cairo·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 3B정책(Berlin·Byzantium·Baghdad를 잇는 지배권) 간의 암투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양국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建艦)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사건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하였고, 영·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11년 7월의 제2차 모로코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다. 한편 1903년 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의 중점은 근동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구인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 3C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면서도, 그 행동은 신중하였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불성립), 또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에 도달하였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협상 대(對)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다.

〈발칸 문제〉 발칸은 일찍이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고 ‘유럽의 화약고’였다. 이 곳에 열강,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진출하고 있어서,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걸고 슬라브계 제민족의 결집을 꾀하였으며, 한편 오스트리아는 이 영향을 겁내어, 독일의 지지하에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일어나고 불가리아가 독립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지원을 바랐으나 러·일전쟁과 제1혁명(1905)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배후의 독일과의 충돌이 두려워 1909년 독일의 오스트리아의 병합정책 지지성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후 러시아는 12년, 세르비아·불가리아 등에게 발칸동맹을 결성케 하였고 같은 해, 동맹은 투르크와 싸워(제1차 발칸전쟁) 승리하였으나 투르크로부터 얻은 영토의 분배를 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타 제국 사이에 13년 재차 전쟁(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패한 불가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세르비아의 승리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승리를 뜻하여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일각 발칸에서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세력 확장 때문에 소국(小國)의 운명을 조종하여 대립을 격화시키고 이 곳에서의 전쟁의 불꽃이 전유럽을 휩쓰는 위험한 정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대전의 발발】 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는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대연습의 통감(統監)으로 이 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 G.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자 하였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이것이 일부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28일에는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 동안, 오스트리아는 7월 5일에 황제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對)세르비아 강경방침에 대한 독일측의 양해를 얻었다. 종래의 정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끌려서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보았으나 근년의 연구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방침을 내세우면서도 주저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를 격려하고, 오히려 빨리 전쟁을 개시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독일측이었음이 밝혀졌다. 독일의 정부·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끌어들이는 유럽전쟁으로 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와 같은 강경방침을 선택한 것은 깊어져 가는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에서의 벽에 부닥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결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측의 군비강화가 14년 여름에 그 절정에 달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나 러시아의 그 시기는 15년 또는 16년이었음으로, 따라서 지금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대(對)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하여 즉각 대(對)오스트리아 동원을 하고 30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 이 또한 전쟁의 국지화(局地化)를 불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23~27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조정해 달라는 영국의 여러 차례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였다. 그러나 29일 심야, 영국의 중립 예상이 무너지고 전쟁개입이 확실해지자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그 때까지의 강경한 태도를 약간 바꾸어,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응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7월 위기’는 위기로 그치지 않고 마침내 대전으로 급선회하고 만다. 31일 독일은 러시아에 대하여 총동원령 철회를 12시간의 기한부로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러시아로부터 아직 회답이 없는 상태에서, 8월 1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였다. 더욱이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의 벨기에 중립 침범을 비난하여 선전포고를 해놓고서도 스스로, 북서 프랑스 진공(進攻)을 위하여 벨기에에 침입하였고 영국은 이것을 이유로 하여 다음날(4일) 대독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유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전쟁의 경과】 독일의 작전은 서쪽에서 프랑스를 먼저 굴복시키고, 이어 동쪽으로 옮겨서 러시아를 칠 계획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은 개전 후 가장 먼저 북서 프랑스로 침입, 파리로 육박하였으나 9월 초순 마른(Marne)의 싸움에서 진격이 저지되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의외로 빨리 프로이센으로 침입하였으나,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원수의 지휘하에 8월말 타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대패시켰다(타넨베르크전투). 그러나 동서 공히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곧이어 참호전(塹壕戰)으로 바뀌어, 전선은 교착(膠着)되었다. 이 사이에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연합국측으로 참전(8.23)하여, 이 기회에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서의 독일의 권익을 빼앗고, 특히 중국에서의 발판을 굳히려고 하였다. 한편 전전(戰前) 독일과의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는 11월 2일 동맹국측으로 참전하였다. 그 때문에 유럽의 전선은 카프카스, 메소포타미아로 넓혀졌으며, 15년 2월에서 4월에 걸쳐 영·프 연합함대는 다르다넬스해협에서 격렬한 공격을 가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15년 4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최초로 독가스를 영국군을 상대로 사용하였다. 동년 연합국과 동맹국 쌍방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3국동맹에 속해 있으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의 동향이었다. 참전의 조건에 대하여 양진영과 거래하였던 이탈리아는 결국 동년 4월 ‘런던 밀약’에 의해 ‘미수복지’와 달마티아 등의 영토 획득을 약속받고 5월 23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하고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다. 이탈리아는 군사적으로는 약체이었기 때문에 그 참전이 전국(戰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불가리아가 동맹국측으로 참전하여 독일·오스트리아군은 그 협력을 얻어 세르비아를 점령하였다. 한편 16년 8월에는 루마니아가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으나, 곧 동맹군에 의하여 제압되었다. 이와 같이 1915∼16년 동맹국은 동유럽·발칸에서 적극적 공세로 나와 전국이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서부전선에서의 교착상태는 의연 타결되지 않았다. 즉, 16년 2월에서 6월에 걸쳐, 독일군은 베르요새에 4회에 걸치는 대공격을 가하여 50만 명의 병사를 희생하며 막대한 탄약을 소모하여 사투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페탱 장군의 지휘하에 요새를 굳게 지켰으며, 6월 말부터 영·프 연합군은 서쪽의 솜(Somme)에서 총반격으로 나왔고, 9월 15일 영국은 최초로 18대의 전차를 병기로서 전장에 투입하였다(솜의 싸움). 약 5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서 영·프군은 90만 명, 독일군도 60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육상에서와는 달리, 해상에서는 영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독일 해군은 대폭적 증강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비하여 수적으로도 열세이어서 개전 이래 북해에 갇히고 말았다. 중요한 해전으로는 15년 12월 도거뱅크의 해전과 16년 5월 유틀란트 해전이 있었을 뿐인데, 모두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고, 영국의 해상 지배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신병기로 등장한 전차는 영국에 이어 17년 프랑스, 18년 독일이 각각 그 뒤를 이었으며, 주로 정찰용으로 쓰인 비행선은 독일이 처음 사용하였다.

【교전국의 국내정세】 대전 발발에 즈음하여, 각국 정부는 전쟁이 각각 상대방측의 공격에 의하여 야기된 정당방위의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국민에게 그것을 믿게끔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드높은 애국심의 고양(高揚)이 엿보였다. 각국의 지도자가 가장 근심한 것은 국내의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동향이었다. 왜냐하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은 그 대회 때마다 전쟁 반대결의를 하였는데, 특히 1912년의 바젤 대회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는 혁명이라는 수단으로써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각국 특히, 서유럽 대국의 사회주의 정당 내부에는 기회주의나 내셔널리즘의 경향이 강하여서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는 자세는 어느 정도 약화되어 있었다.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일부를 제외하고 종래의 슬로건에서 180도 전환하여 전쟁협력으로 내달았다. 특히,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사회주의 정당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부의 군사예산에 찬성하고, 정부와 ‘성내평화(城內平和:Burgfriede)’를 맺어(1914.8.4) 전쟁협력을 약속하였으며,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그 뒤를 따름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장기화함으로써 국민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 전쟁 중에 예를 든다면 독일에서는 인구 6,000만 명 가운데 1,100만 명이 동원되었고, 그 중 전사자 177만 명, 부상자 422만 명을 내었으니, 국민 가운데 5명에 1명이 동원되어 그 반수 이상이 사상(死傷)한 것이 되는데, 이 비율은 프랑스에서 거의 같고 영국에서는 약간 떨어진다. 또한 이 전쟁은 공전의 물량(物量) 전쟁으로 이미 개전 당초, 불과 1주일간의 마른의 싸움에서 탄약 100만 발, 솜의 싸움에서는 그 20배인 2,000만 발이 소모되었다. 이와 같은 전쟁 수행을 위하여 각국은 자국의 경제력을 동원하고 경제 전체를 전쟁을 위한 것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여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지자, 각국 정부에게는 국민의 불만을 누르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만드는 일이 사활문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는 16년 12월에, 로이드 조지 거국일치내각이 만들어졌고, 프랑스에서도 17년 11월에 클레망소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들 내각은 경제통제를 강화하고, 군수생산을 높이는 한편, 국내외 반전 평화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영·프 양국은 식민지에게 식량과 원료의 공급을 강제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150만 명, 아프리카에서 100만 명이나 되는 원주민을 병사 혹은 노동자로서 유럽의 전선과 공장에 투입하여, 식민지인의 희생으로써 본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킬 수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식민지나 해외시장을 모두 빼앗긴 동맹국측에서는 물자의 부족, 국민생활의 궁핍은 그야말로 심각하였다. 독일에서는 이미 1915년부터 빵의 배급제를 도입하였고, 곧이어 고기·우유·버터 등도 배급제가 되었다. 16년 겨울을 예로 들면, 어른 한 사람의 1주일분 배급량은 빵 1,900 g, 감자 2,500 g, 버터 80 g, 고기 250 g, 설탕 180 g으로서 평상시의 3분의 1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16년 말에는 노동력 부족을 보충키 위하여, 국내에 있는 16∼60세의 남자를 탄광이나 공장에 동원하는 힌덴부르크 계획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불만이 높아짐에 따라 17년 7월 의회 다수파가 ‘화평결의’를 행한 뒤, 재상 베트만 호르웨크는 강경노선의 군부와 의회 사이에 끼어 맥없이 사임하고, 이후 군부에 의한 사실상의 군사독재체제가 성립되었다. 한편 같은 해 4월 사회민주당에서 ‘성내 평화’에 협력하지 않는 좌파가 따로 분열하여 독립 사회민주당을 결성함으로써 노동자의 반전(反戰) 운동과 스트라이크가 번져갔다.

【대전 중의 비밀외교】 전쟁 중에 교전국은 결속을 다지고 또한 중립국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전후의 영토나 세력권의 재분배를 약속하였다. 1915년 협상국측은 이탈리아에게 ‘미수복지’를 비롯하여 터키령과 아프리카의 독일령 식민지 등의 분할을 약속하였다. 또,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령 마케도니아를 약속받고 동맹국측으로, 루마니아는 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의 영유를 미끼로 연합국측에 끌려들었다. 또, 빈사의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를 에워싸고 영·프는 러시아에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양 해협의 영유를 약속하였으며, 다시 영국·프랑스·러시아 3국은 16년 5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러시아에 흑해 동남 연안을, 프랑스에게 시리아를, 영국에는 남메소포타미아의 영유를 각각 약속하였다. 또한 투르크령 서아시아에서는 아랍인의 독립운동이 고조되었는데, 영국은 16년 초에 아랍인에게 전후 이 지방에 아랍국가 건설을 약속(마크마옹 선언)하는 한편, 17년 11월 연합국에 사는 유대인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같은 지역의 팔레스티나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확약하였다(밸푸어선언). 또 인도에 대하여서도 전쟁협력의 대상(代償)으로서 전후의 자치(自治)가 약속되었으나,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끝났다. 똑같이 동맹국측에서도 독일은 대전 중 러시아령의 핀(Finn)사람, 발트 3국의 제민족,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에게 독립을 약속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러시아 제국의 해체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한편, 일본은 15년 1월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에게 산둥성이나 만주, 몽골을 위시한 중국 전토에서의 일본의 권익 획득에 대한 ‘21개조 요구’를 강요하고, 최후 통첩에 의하여 그 대부분을 승인케 하였다.

【전쟁의 종결】 1917년에 전쟁은 최종 단계로 접어들었다. 독일은 같은 해 1월, 무제한 잠수함전의 개시를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영국 주변의 해역에서 중립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상선을 무경고로 격침하여 식량이나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영국을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영국과 경제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는 미국의 참전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미국 참전의 효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즉 6~8개월 이내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독일 자신의 패배가 결정적이 되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독일의 잠수함은 이 싸움에서 예정을 상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영국도 중립국의 상선까지 동원하여 곤경을 타개하였기 때문에 결국 무제한 잠수함전은 17년 4월 미국의 참전을 야기시켰을 뿐, 실패로 끝났다. 이리하여 패배가 결정적으로 된 독일에게 있어, 나머지 승리의 최후의 기회라고 할 러시아혁명이 같은 해 3월(러시아曆 2월)에 일어났다. 러시아는 정치·경제 체제의 후진성 때문에 장기에 걸치는 총력전에는 견디지 못하여, 군수품·식량의 부족, 정정(政情)불안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3월혁명이 일어나 차르 정부가 쓰러졌고, 이어 11월(러시아曆 10월) 혁명으로 소련 정권이 성립하여, 즉각 정전을 전(全) 교전국에게 제안하였다. 소련정부의 평화 호소와 비밀외교의 폭로는 세계에 충격을 주었는데, 미국 대통령 윌슨은 18년 1월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여 연합국측의 동요를 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으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선의 일각이 무너졌으며, 독일과 러시아는 같은 해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조약을 맺었다. 동부전선의 부담에서 해방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를 폈으나 3~7월의 반복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나자, 독일은 이 공격에서 힘이 소진되었고, 7월 18일에는 미군의 증원을 얻은 연합군이 반격으로 나왔다. 이제까지 ‘승리의 평화’를 주장하여 모든 타협을 거부해 오던 군부도 이에 패배를 자인하고, 9월 말에는 연합국에게 휴전 제의를 하도록 정부에 제안하였다. 이와 동시에 군부의 괴뢰내각은 쓰러지고, 의회 다수파로 이루어진 막스 폰 바덴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신내각은 즉시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한편,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14개조’에 의거하는 화평개입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이에 동맹측은 총 붕괴되어, 9월 30일 불가리아, 10월 27일 오스트리아, 30일에는 오스만투르크로 항복이 잇따랐다. 독일에서도 11월 3일 킬 군항(軍港)에서 수병(水兵)폭동이 일어나 독일혁명이 일어나자, 곧이어 제정(帝政)이 붕괴되고, 임시정부는 11월 11일 연합국과의 휴전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리하여 5년에 걸쳐 세계의 민중에게 커다란 희생을 입히고 싸웠던 제국주의 전쟁은 2개의 혁명을 유발시키고, 연합국측의 승리로서 종결되었다.

【베르사유조약】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심의하는 이 회의를 주도한 이념은 미국 대통령 T.W.윌슨의 ‘14개조’의 원칙이었으나, 이것은 세계 민중의 평화에의 원망(願望)을 대표함과 동시에 세계정치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미국의 제국주의 요구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영국·프랑스·미국의 3대국이 주도한 이 강화회의는 열강의 거래의 무대가 되었으며, 그러나 윌슨의 이념은, 독일에 복수하여 그 힘을 될 수 있는 한 약화시키고 그 대신 스스로 패권(覇權)을 확립하려 한 영·프 양 제국주의국의 현실적 이해(利害) 앞에 패하여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 결과, 6월 28일 베르사유에서 조인된 강화조약의 내용은 독일 국민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 되었다. 즉, 이에 따라 독일은 해외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벨기에·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에게 각각 약간의 영토를 할양함으로써, 인구의 15 %와 유럽에서의 영토의 10 %를 잃었다. 또 엄격한 군비제한이 부과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인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금하여졌다. 특히, 무거운 짐이 된 것은 배상으로서, 21년에 1,320억 마르크가 결정되었다. 한편, 다른 동맹제국과의 강화조약은 생제르맹조약(9.10:對오스트리아), 뇌이조약(11.27:對불가리아), 세브르조약(20.8.10:對터키), 트리아농조약(對헝가리) 등 각각 별개로 체결되었다. 베르사유조약을 중심으로 이들 조약이 형성한 전후의 국제질서를 베르사유체제라고 부른다. 이 체제는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투르크 등 동맹국측의 구제국(舊帝國)을 해체하여 단일 소국가로 하였을뿐 아니라,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서 발칸과 동유럽에는 다수의 소국가(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핀란드·발트 3국)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민족자결’의 원칙도 패전국이나 비유럽 세계의 식민지·종속국(從屬國)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동유럽에서의 신국가 건설도 동맹 제국을 약화하고, 나아가서는 소련을 묶어 두려는 의도하에서 행하여진 것이었다. 또한, 베르사유조약은 세계전쟁의 비참한 경험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평화유지 기구로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정하였다. 그러나 제안국인 미국이 가맹하지 않았으며, 독일이나 소련도 당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맹은 평화유지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없었다. 결국 베르사유체제 그 자체가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세계 체제의 재편성에 불과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로서는 지극히 불충분하여 새로운 국제 대립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베르사유 체제

 

제1 차세계대전의 결과 베르사유조약을 기초로 유럽에 성립한 국제질서. 1919년 6월 28일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서 베르사유조약이 조인되고 그해 9월 10일 오스트리아에 대한 생제르맹조약, 그해 11월 27일 불가리아에 대한 뇌이조약, 20년 6월 4일 헝가리에 대한 트리아농조약, 그해 8월 10일 투르크에 대한 세브르조약이 조인되었다. 이들 여러 강화조약은 내용에서 베르사유조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하나의 종합을 이루어 전쟁 뒤의 국제관계를 규정했으므로, 대표적인 베르사유조약이란 이름을 빌려 전체로서 베르사유체제라 불린다. 이 체제에서 독일은 해외식민지를 잃고 유럽에서의 영토 삭감과 동시에 군비제한·배상지불 등의 엄한 의무가 지워졌다. 특히 배상지불의 전제로 제 1 차세계대전의 책임을 독일에게 전가한 점은 독일국민의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동유럽에 관해서 미국 대통령 T.W.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새 국가의 창설과 국경의 획정(劃定)이 선행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했다. 폴란드도 독립하고 세르비아는 유고슬라비아로 재편성되었으며, 동유럽·발칸의 국경에 커다란 개정이 실시되었으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방은 금지되었다. 대전중 독일편에 섰던 나라들에 대한 군비제한과 배상 지불도 규정되었다. 베르사유체제는 국제연맹과 일체적인 연관에서 출발되었고, 원래 보편적인 국제기관이어야 했던 국제연맹이 전승국, 특히 영국·프랑스의 이익 옹호자의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사유체제는 그 방침으로 했던 독일군국주의의 제거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독일국민에 대한 억압적 성격이 강하여, 독일국민에게 복수주의적 내셔널리즘을 배양했고, 독일과 전승국간의 대립을 도리어 격화시켰다. 동유럽에서 작은 나라들의 성립은 독일에 대한 포위망으로뿐 아니라, 혁명에 의해 성립된 소련에 대항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국제연맹규약이 구(舊)독일령과 투르크령 식민지를 위임통치의 형식으로 전승국에게 분할한 것은 베르사유체제의 식민지주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었다. 세브르조약에 대해 투르크에서는 민족운동이 일어났고 이 조약이 비준도 되지 않아, 1923년에 로잔조약이 맺어졌다. 베르사유체제는 소련을 제외하고서 출발했고, 미국은 베르사유조약 비준을 거부했으므로 영국·프랑스의 현상유지를 위한 테두리로서 기능했다. 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두까지 사이에 베르사유조약 가운데의 몇 개 부분은 영국·프랑스 양국에 의해 수정이 시도되었으나, 독일 나치스정권 등장으로 인해 베르사유체제는 붕괴과정으로 접어들었다. 35년 3월 나치스정권이 베르사유조약의 군비제한조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36년 3월 독일군이 라인란트비무장지대를 점령했을 때에 베르사유체제는 사실상 사라졌다.

 

 

 

3.1운동 

비밀 결사의 조직과 활동   우리 민족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오랜 민족 문화와 전통에 바탕을 둔 자주 독립 정신으로 독립 국가 건설을 기약할 수 있었다.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은 국권을 강탈당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본군의 탄압이 가열되자, 의병들은 국내에서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그 일부는 국외로 이동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면서 무장 투쟁의 전통을 이어 갔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독립 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비밀 결사 운동으로 변모되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 의군부, 대한 광복회, 조선 국권 회복단, 자립단, 선명단 등 수많은 항일 결사를 조직하고, 각종 선언문, 격문 등을 통하여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힘썼다. 그리고 민족 문화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광복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 이러한 항일 결사는 각지의 교육 기관 및 종교 단체 조직을 통하여 교사와 학생, 그리고 뜻있는 종교인들을 규합하면서, 조국의 공복을 휘한 독립 운동을 폭넓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경제 정책으로 착취당하던 농민, 노동자들과도 연결하면서 민족 운동을 널리 확산시켰다.

  1910년대 항일 결사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단체는 대한 광복회였다. 이 단체는 군대식 조직으로 박상진이 총사령, 김좌진이 부사령이었으며, 각 도를 비롯하여 만주에도 지부를 설치하였다.

  이 단체의 활동 목표는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만들고, 그 곳에 사관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각지의 부호에게 의연금을 납부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지의 친일파를 색출하여 처단하기도 하였으나, 밀고자에 의하여 조직이 일제에 발각되고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한 많은 단원이 체포당함으로써 활동이 중단되었다

 

3.1 운동의 태동    국내외에서 독립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을 무렵, 제 1 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종전 후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개최되어, 미국 대통령 윌슨의 세계 평화안 등이 논의되었다. 이에 힘입어, 민족 지도자들은 파리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 열의를 전달하고, 국제적인 협조를 얻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상하이에서 조직된 독립 투사들의 모임인 신한 청년당은 김규식을 민족 대표로 파리에 파견하였다.

  한편, 국내의 애국 지사들은 종교계를 중심으로, 국권 피탈 이래 세계 정세의 변화를 깊이 주목하면서 거족적인 독립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일본에 유학하고 잇던 우리 유학생들은 도쿄에 모여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고, 이를 일본 정부에 통고한 뒤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2 8독립 선언이다(1919).

  이와 같은 학생들의 독립 시위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외에서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 시위 항쟁을 구체화하였다.

 

3.1 독립 선언   거족적인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면서,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종교계의 대표들이 앞장 서서 마침내 1919년 3 1 운동을 일으켰다.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서울에서는 탑골(파고다) 공원에 모였던 각급 학교 학생과 시민들이 시가지로 나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지방에서도 만세 시위가 잇따라 일어났다. 온 민족이 이에 가담하였으며, 태극기의 물결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 파급되어 갔다.

3.1 운동의 확산   서울에서 시작되 3 1 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급속하게 확산, 파급되었다. 그런데 3 1 운동은 확산되는 과정에서 대체로 3 단계의 양상을 띠었다.

  첫 번째는 민족 대표들이 독립 선언서를 제작, 배포함으로써 만세 시위 운동을 점화한 단계로, 이 때의 독립 운동의 방향은 비폭력주의였다.

  두 번째는 학생, 상인, 노동자층이 참가함으로써 시위 운동이 도시로 확산된 단계이다.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상인, 노동자들이 만세 시위, 파업, 운동 자금 제공 등의 방법으로 적극 호응한 시기였다.

  세 번째는 만세 시위 운동이 주요 도시로부터 전국의 농촌 각지로 확산된 단계이다. 농민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시위 규모가 크게 확대되어 가는 한편, 시위 군중들은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토지 회사,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였다. 이렇듯 비폭력주의가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변모하여 간 시기였다.

  국내 각 지방으로 파급되던 3 1 운동은 즉시 국외로 확산되었다. 먼저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만주에서는 용정을 비롯하여 간도 지방 곳곳에서 시위가 전개되었고, 연해주 지방에서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민들이 시위를 전개한 이래 각지로 파급되었다. 한편, 하와이, 미국, 멕시코 등지의 교민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 행진을 전개하였다.

  국외의 3 1운동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일본에서도 시위가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2 8 독립 선언을 하여 3 1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던 도쿄 유학생들은, 국내의 3 1 운동 봉기 소식을 듣자 곧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오사카의 동포들도 뒤이어 시위를 벌였다.

 

3.1 운동의 의의   3 1 운동은 독립 운동의 분수령으로서, 우리 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3 1 운동을 통하여 주체성을 확인하였고, 민족의 슬기와 독립의 의지를 전세계에 천명하였다.

  3 1 운동은 민족의 저력을 국내외에 과시한 쾌거였으며, 일제에 동조하던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 민족의 독립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 3 1 운동은 중구, 인도, 동남 아시아 및 중동 지역에서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을 일으키게 한 선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3 1 운동은 국내외의 민족 독립 운동을 거족적인 항쟁으로 유도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한편, 3 1 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 정통 정부인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는 우리 민족 스스로 민주 공화제의 정부를 세웟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3.1운동 신문기사 수행평가

 

나치즘       <참고>

히틀러를 당수로 하는 독일의 파시스트 당 '나치스'의 정치 사상 및 체제

 

파시즘

정치적으로는 독재주의, 경제적으로는 노사 협조주의, 대외적으로는 민족주의,조국 지상주의를 고집함

 

 

제국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출현

1. 제국주의
(1) 제국주의의 성립 배경
    ① 자본주의의 발달 : 19세기 말, 과학 기술이 진보하고 제2차 산업 혁명이 진전되면서 자
        본주의가 크게 발달하였다.
    ② 해외 시장 확보의 필요성 :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상품의
        원료를 얻고, 상품을 팔거나 자본을 투자할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였다.
(2) 제국주의
    ① 의미 :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들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무력으로 침략
        하여 이를 식민지로 지배하려는 경향을 제국주의라 한다.
    ② 제국주의의 성격 : 제국주의는 자국의 세력을 팽창시키려는 잘못된 민족주의와 정치,
        사회적 불안을 대외 팽창으로 덮어보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2. 제국주의 국가들의 팽창 정책
(1) 제국주의 국가들의 군비 경쟁
    ① 군비 경쟁 : 제국주의 국가들 간에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군비 경쟁이 치열하
        게 전개되었다.
    ② 영국과 독일의 경쟁 : 특히, 해군력의 증강을 두고 영국과 독일 사이에 경쟁이 치열하
        였다.
(2)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① 식민지 쟁탈전의 전개 :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약소
        국들은 거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전 지구 육지의 1/5과 전 인류의 1/10이 제국주의 열강
        들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② 제국주의 국가들의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 결과, 국제 관계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분할



1.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1)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
    ①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으로 아프리카가 소개되자, 유럽 열강이 앞을 다투어 아프리
        카로 진출하였다.
    ② 제국주의 열강의 분할로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전 지역이 유럽 열강의 식
        민지로 전락하였다.

2)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① 영국의 종단 정책 : 수에즈 운하를 매수하고, 남쪽의 케이프타운에서 북쪽의 카이로를
        연결하는 종단 정책을 추진하였다.
    ② 프랑스의 횡단 정책 : 알제리를 거점으로 삼고, 동쪽의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진출하여,
        아프리카를 동서로 연결하는 횡단 정책을 추진하였다.
    ③ 파쇼다 사건(1898) : 영국의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은 수단의 파쇼다에서 충
        돌하였다.

2. 유럽 열강의 아시아·태평양 분할
(1) 유럽 열강의 아시아 분할
    ① 영국 : 인도와 동남 아시아의 미얀마, 말레이 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② 프랑스 : 인도에서 밀려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③ 네덜란드 :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고 향료 무역을 독점하였다.
(2) 유럽 열강의 태평양 분할
    ① 태평양의 여러 섬들도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② 미국의 태평양 분할 : 미국은 에스파냐와 싸워 필리핀을 얻었고, 1898년에는 하와이 제
        도를 병합하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

1. 유럽 열강의 대립
(1) 삼국 동맹
    ① 배경 : 통일 후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들어선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삼국
        동맹을 맺었다.
    ② 동맹국 :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가담하였다.
(2) 삼국 협상
    ① 배경 : 독일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와 영국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삼국 협상을 맺
        었다.
    ② 협상국 : 프랑스는 러시아, 영국과 함께 삼국 협상을 맺음으로써 독일의 팽창 정책에 대
        응하였다.
(3) 유럽 열강의 대립 : 유럽 열강은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이라는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 팽
     팽히 맞서게 되었다.

2.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1) 발칸 반도
    ① 발칸 반도 : 독일의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
        었다.
    ②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합병 : 슬라브 족이 많이 거주하던 이 지역을
        오스트리아가 합병하자, 오래 전부터 이 곳을 탐내던 세르비아가 분개하였다.
(2)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합병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대립이
     더욱 심해졌다.



 

만주사변

1931년 용산역전에 집결한 일본군을 찍은 사진이다. 만주사변 조선군 출동기념 사진첩에 있는 것이다. 만주사변(滿洲事變)은 1931년 9월 18일 심양(瀋陽) 북방의 유조구(柳條溝)에서 일본군 만철선로(滿鐵線路)를 폭파하고 그것을 중국군의 소위라고 날조하여 유발시킨 중일(中日)간의 전쟁이다. 일본이 중국대륙을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최초의 계기로 삼은 전쟁으로 일본군이 전 만주를 수개월 내에 점령하였다.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건국을 선언하게 되었다.

 

 

중일 전쟁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은 만주 석권에 그치지 않고 다시 화북으로 향하였다. 1933년 熱河를 토벌한 일본은 이를 만주국에 편입시키고 그 해 5월에는 장성을 넘어 화북에 침입하였다. 이 결과 塘沽停戰協定이 맺어져 중국군의 만주국에 대한 무력항쟁이 저지되고 화북에 있어서의 일본의 특수적 입장이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방직업을 비롯한 일본 자본이 적극적인 화북 진출을 시작하여 중국의 민족자본에 심각한 타격을 주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국제연맹은 일본이 만주에서 저지른 행동은 국제 의무의 기본원칙에 벗어난다는 Lytton조사단의 보고서를 채택하였으나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함으로써 이에 대응하였다. 그 뒤 화북에서는 중·일간의 분쟁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일본은 冀東防共自治委員會와 '기찰 정무 위원회'와 같은 괴뢰정권을 세워 화북 진출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에 중국 각지에는 이와 같은 일본의 화북 분리정책에 대한 배일, 항일운동이 퍼지기 시작하여 중·일 양국 관계는 차차 험악해졌다.
한편 이 무렵 국민정부는 국공분리 이래 농촌 공작에 중점을 두어 각지에 소비에트 지구를 설치하고 있던 공산당을 토벌하고 있었는데, 당시 공산당은 일본의 화북 침략 격화와 몇차례에 걸친 국민당의 토벌로 큰타격을 받고 있었다. 이에 공산당은 국민당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거국일치의 항일전을 일으킬 것을 거듭 요구하였다. 그러나 쟝졔스는 토벌을 중지하기는 커녕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장샤오량으로 하여금 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1936년 시안에 온 쟝졔스는 장샤오량에게 구금당하고 내전 중지와 항일전 강행을 강요당하게 되었다(西安事件).
그리하여 국공내전은 정지되고 제 2차 국공합작에 의한 거국적 항일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1937년 루꾸우차오에서 일어난 군사적 충돌을 신호로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은 일본에 의해 난징을 비롯하여 뻬이징, 상하이, 武昌, 한코우, 꽝뚱 등의 중요 도시를 차례로 점령당하자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항전을 계속했다. 중·일전쟁은 계속 확대되어 일본은 몽고, 신쟝, 화중, 화남을 유린하고 그곳에 몽고 연합 자치 정부, 중화민국 임시정부, 중화민국 유신정부 등의 괴뢰정권을 세웠다. 이와 같이 중국이 곤경에 빠져 있을 무렵 열강은 유럽의 급박한 사정으로 이에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이탈리아가 독일, 일본의 반공협정에 참가한 뒤로는 미, 영, 소, 프 등의 일본 침략 저치책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반공협정은 독일, 이탈리아에 이어 일본의 全體化를 뜻하는 것이며 코민테른에 대한 공동 방위의 이름아래 미, 영을 견제하려는 것으로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全體主義의 노골적인 도전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중국 침략도 武漢 점령을 계기로 입은 큰 피해와 중국인의 항전으로 점차 공격이 무디어졌다. 이와 동시에 중국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정치문제가 일어나고 항전의 신념에 동요가 생겨 일본에 항복하는 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제 2차 국공합작으로 충칭의 국민정부의 군사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던 八路軍이 유격전으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고 있었는데, 일본에 의해 난징에 수립된 왕자오밍의 난징정부와 더불어 八路軍의 세력 발전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충칭정부가 '중국 공산당 견제책'을 썼기 때문에 국민군과 공산군이 충돌하게 되었다. 특히 1941년에는 화중에서 편성된 新四軍에 대한 국민군의 대규모적인 공격이 행해졌다. 이와 같이 중국이 대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 국토를 상실하고, 대내적으로 내전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

太平洋戰爭

太平洋戰爭은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1945년 8월까지 약 3년 9개월 동안 일본과 연합국『중국 미국 영국 네덜란드. 말기에 소련이 참전』 사이에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태평양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로서, 주된 전장이 태평양 지역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전승국인 미국 측의 주장에 의해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의 성격은 다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일본 독일 이탈리아 삼국이 최초에는 각각 개별적으로, 후에는 상호 지지하면서 각각의 隣近
약소국과 민족에 대해 일으킨 제국주의 침략전쟁이고, 침략 당한 측으로부터 말하면 민족 방위 또는 해방의 전쟁이었다.『'大東亞戰爭'으로 확대된 이후의 동남아시아 와 大洋州에서의 전쟁에도 그 민족에대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포함』
둘째, 일본 독일 이탈리아에 대한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상호전쟁이다. 이것은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공격에 대한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방위로 시작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쌍방 모두에게 있어 식민지 세력 범위의 재분할을 둘러싼 전쟁으로 어느 한편이 正義이고 다른 한편이 不正義라고 할 수는 없다. 미국(영국) 일본 전쟁에 대해서 말하면, 露 日전쟁의 직후부터 일본과 미국(영국)은 중국과 태평양에서 제국주의적 세력을 다투어 해마다 대립이 격화되어 갈 데까지 간 것이었다.
셋째, 사회주의 소련에 대한 독일 이탈리아의 침략전쟁, 소련의 방위전쟁이다.
넷째, 독일 소련 전이 시작되자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제국주의 블록도 소련과 동맹하고, 또 중국 및 그 외의 피침략민족과 동맹하였다. 여기에 일본 .독일 이탈리아 파쇼3국에 대한 전세계적인 반파시즘 전쟁이다. 따라서, 독일 소련전과 미국 일본전의 개시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은 이 성격이 지배적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인 일본과 미국 영국 등과의 태평양전쟁도 이상의 네 가지 전쟁의 복합이었지만, 일본 소련 전쟁은 네 번째의 범주에 속한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의 중국 및 동남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이 기본적인 것으로, 이 전쟁으로부터 둘째 넷째의 전쟁이 일어났다.
태평양전쟁이라는 명칭과 거기에 내포된 관점, 즉 이른바 '太平洋戰爭史觀'은 그 전쟁의 역사적 평가 문제가 재론되면서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하나는, 이긴 자에 의해 강요된 승자의 논리로서, 일본을 악역으로 만들어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와 민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했다는 비판이다. 또 하나는, 그 전쟁에는 아시아 대륙에서의 전쟁도 포함되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이라는 명칭은 우선 부정확하고, 동시에 이 명칭은 일본과 미국의 전쟁만을 부각시킴으로써 아시아와 일본의 관계에 대한 시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다.


 

한일 병합

 

황국 신민 서사

 

국민 징용령

 



주제1 20세기 전반의 세계 p143

 

5.4운동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원문)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해석본)

배반당한 민족자결주의

민족자결주의와 고종의 붕어

국제연맹과 국제연합

김규식의 독립운동(논문)

파리장서사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독립청원서(사진)

민족주의(발전사)

러시아혁명(보고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사

쑨원

쑨원

신해혁명

신해혁명(논문)

신해혁명 당시 변발제거(사진)

신해혁명에서 과장된 손문의 역할

21개조 요구

현대중국의 흐름

중국국민당

제1차국공합작, 제2차국공합작

중국공산당과 1차국공합작(논문)

장제스





주제2 일제의 침략과 국권의 피탈 146p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러.일전쟁

러.일전쟁 (풍자화)

러.일 전쟁 (풍자화)

러.일전쟁사

국외중립선언

고종의 중립화 노력

한일 의정서

제1차 한일 협약

고문정치와 을사조약 체결

스티븐스과 그를 저격한 장인환. 전명운

러.일전쟁(kbs일요스페셜-을사늑약 100년 그때 일본이 탄생했다. 제1편 러.일 전쟁)---역사TV146번----

포츠머스 조약

을사조약

고종의 을사조약 무효선언

통감부

헤이그특사

헤이그 특사, 그리고 헐버트에 관한 이야기

가쓰라.테프트 밀약

한일신협약

한일신협약(원본사진)

일진회가 총리 이완용에게 올리는 합방 청원서

송병준

이용구

한일병합조약





주제3 식민 통치체제의 구축과 전개 150p

 

 

조선총독부(폭파사진)

역대 조선 총독사진

헌병결창제도의 성립과 배경

3·1운동 이전의 헌병경찰제도

헌병경찰의 한국민 탄압 및 만행

보통경찰제도

일제의 식민지교육정책

사회주의 사상의 도입과 조선 공산당창건

식민지 시대 사회주의 운동

황국 신민화 정책

일제시대 제복입은 교사에 의한 '황국신민교육'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는 학생들

조선-동아의 친일행각

친일역사를 감추기 위한 조선일보의 함정

다시보는 조선일보... 친일 행적에 대한 항변..

조선일보의 친일만행을 한눈에

일본 새교과서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희망"

日帝末期 綠旗聯盟의 內鮮一體論

내선일체비(사진)

남산신궁

전국에 세운신궁(부여신궁)





주제4 경제 수탈과 민중의 생활 156p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토지측량 모습(사진)

토지조사사업 당시 모습(사진)

산미증식계획

동양척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사진)

동양척주식회사의 공출미 정일광경

군산항 식량수탈

일제시대 납세가

경성방직주식회사 -김성수의 친일행각-

경성 방직 주식회사 '태극성'표 광목의 상표

전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화신 백화점(사진)

놋그릇 공출

“中日전쟁 결과가 親日지식인 양산”

진주만 기습공격

진주만 기습장면(영화)

비행기 헌납

장로교가 일제에 전투기를 헌납한 기사를 실은 기독교 신문.

국방헌금·황군 위문에 성의를 다하라

남면북양정책(홍보엽서)

농촌진흥운동의 전개와 내용





주제5 전쟁 동원과 군 위안부 징용


친일시인 서정주 (학도병 격려시)

강제로 군대에 편입된 소년들(사진)

日당국 징용희생자명부 보관 입증자료 발굴

강제동원 아들 죽은지 모르고 엽서띄워

일제하 태국포로수용소 근무 한국인 군속 기행문

위안부

위안부여성(사진)


<역사 찾기>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최남선의 자열서

이광수의 친일행각

노천명 일제찬양시

친일작가와 작품모음

친일경찰 노덕술

MBC-TV [이제는 말할 수 있다]"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미군정․이승만 정권하의 친일파 집단과 반민특위

친일 음악가 홍난파

가요 `희망의 나라로` 알고보니 일본찬양?

친일 총장 김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