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근대문물의 수용과 근대문화의 형성(P.120)


80. 근대문물의 수용(P.121)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여 일본을 비롯 선진열강제국과 수교통상조약을 맺자 국내에는 외국의 새 문화를 수입하기에 착안하였는데 특히 이러한 운동은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 일행이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김기수 일행은 고종 13년(1876) 5월 22일에 부산을 출범하여 동 29일에 동경에 도착한후, 일본정부의 주선에 의하여 근대화된 일본의 군대 및 각지의 산업과 교육시설 등을 시찰하고 일본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어짐에 따라 개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7월 31일 서울에 귀환하여 국왕에게 복명보고(復命報告)하기를 "일본 측의 성대한 접대를 비롯하여 천황의 인격, 일본인의 풍속 · 인품, 또한 그 군대 · 병기 · 교육 등에 관하여 호감을 갖고 복명하였다"[註12] 특히 그 중에서도 "일본은 이미 17개국과 통상무역을 하고 있으며, 일본의 부강책은 모두 통상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보고에 놀란 국왕은 고종 18년(1881) 8월에 근대적 국가로 발전하는 일본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하여 김홍집을 단장으로 하는 제2차 수신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40여일 간에 걸쳐 일본의 국가시설 및 군사, 교육, 공장 등을 시찰하고 귀국하여 유신일본의 발전상을 크게 칭찬하였던 것이다.

또한 고종 18년(1881) 9월에 우리 정부는 김윤식(金允植)을 영선사(領選使)로 삼아 69명의 청년학도를 이끌고 청국 천진(天津)에 가서 청나라의 모든 신식기계에 대한 지식과 문물을 배워오게 하였다. 즉 그들은 천진기기제조국(天津機器製造局)에서 근대적인 기술교육을 습득한 후 귀국 시에는 김윤식과 함께 청국정부에서 기증한 막대한 과학기술서적과 그 밖에 따로 구입한 기계를 반입하여 문명개화의식 전파에 기여 하였다. 김윤식은 그당시 청국에서 국왕에게 상소하여 문명개화를 위한 새로운 지식의 섭취와 자주외교를 강조한 바 있었는데 귀국후에도 그러한 식견을 살려 국가 정책에 때때로 반영케 하였다.

이밖에도 고종 18년(1881) 4월에 어윤중 등 12명의 신사유람단이 일본을 순유한 후 귀국하여 신흥일본의 변모상태에 관한 견문기를 서술하여 국내의 개화풍조를 일으키는데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시찰단에 함께 수행했던 송헌빈(宋憲斌)의 『동경일기(東京日記)』와 강진형(姜晋馨)의 『일본록(日本錄)』등의 일본견문록(日本見聞錄) 및 안종수(安宗洙)의 『농정신편(農政新編)』도 문명개화를 선양하는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김옥균 ·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당파 수뇌들이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모방하고자 했던 개화운동도 신문화를 섭취하려던 동경에 의한 것이었다.


【참고사이트】

1. 구한말의 영상

2. 서양인이 본 100년전 픙경

3. 개항이후 전차사진


 

 

81. 광혜원(廣惠院)(P.124)

 

1885년(고종 22)에 고종의 허락과 미국인 선교사 H.G.앨런의 주관 아래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활인원(活人院)과 혜민원(惠民院)을 개편하고 세운 병원이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의료기관으로 1885년(고종 22년) 2월 29일 미국 선교의사인 H.N.앨런(한국명:安蓮)이 서울 재동(齋洞)에 왕립 광혜원(王立廣惠院)을 설립했다. 앨런은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던 중, 갑신정변 때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해 생명을 구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고종의 총애를 받아 왕실부(王室附) 시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병원 설립을 건의하여 고종의 허락을 받았다.


정부는 광혜원 규칙을 제정해 국립병원으로서 원장 격인 광혜원당랑(廣惠院堂郞)을 두었으며, 의료진으로는 미국인 의사인 알렌을 초빙해 환자 진료를 실시했다. 이외에 병원 운영을 맡은 관리와 사무를 맡아보는 직원을 두는 등 의사 앨런을 제외하고 모두 한국 관리로 조직을 구성하였다. 광혜원은 개원 12일만인 3월 12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계(啓)에 따라 제중원(濟衆院)으로 바꿨다.


제중원을 찾는 환자수와 업무량이 많아지자, 선교사 J.H.헤론이 가세하여 의료 활동에 종사하였다. 1886년 여의사 A.J.앨러스가 오면서 부인부(婦人部)가 설치되고, 이듬해 정부의 후원으로 홍영식(洪英植)의 집이 있는 한성 남부 동현(銅峴;지금의 을지로 입구 한국외환은행 본점)으로 옮겼다. 고종은 제중원의 의료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앨런과 엘러스에게 당상관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 1899년(광무 3)에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뽑아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10년이 지난 1908년(융희 2) 6월에 처음으로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이것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 의학교의 시초였다. 에이비슨이 본국에서 구한 기금으로 1904년 9월 4일 세브란스 병원을 신축하고 진료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제중원의 명칭은 실질적으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의 서양의학은 왕립병원인 광혜원·제중원 시대를 거쳐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참고사이트】

1. 광혜원 사진자료

2. 광혜원에 대해서

3. 광혜원 당시 사진

4. 세브란스 병원사진

5. 설립자 알렌의 사진


 

 

82. 지석영(P.124)

 

자는 공윤(公胤). 호 송촌(松村). 본관 충주(忠州). 서울 출생으로, 1876년(고종13)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갔던 스승 박영선(朴永善)으로부터 구가 가쓰아키[久我克明]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전해 받고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879년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병원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그해 겨울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德山面)에서 한국 최초로 종두를 실시, 이듬해 서울에서도 부산제생의원에서 보내온 두묘(痘苗)로 종두를 실시하였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위생국에서 두묘의 제조법과 독우(犢牛)의 채장법(採漿法) 등을 배우고 귀국, 서울에서 적극적으로 우두를 실시하는 한편, 일본 공사관 의관(醫官) 마에다 기요노리[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우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체포령이 내려 일시 피해 있다가 정국이 수습된 후 불타버린 종두장(種痘場)을 다시 열어 종두를 보급, 그해 9월 전라도 어사(御使) 박영교(朴泳敎)의 요청에 따라 전주(全州)에서, 이듬해에는 공주(公州)에서 각각 우두국(牛痘局)을 설치, 종두를 실시하고 그 방법을 각 군에서 뽑혀 올라온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 1887년 장령(掌令)으로 시폐(時弊)를 논하다가 우두의 기술을 미끼로 일본과 결탁한 개화당과 도당을 이룬다는 이유로 전라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 승지(承旨)를 거쳐 1896년(고종33) 동래부사를 지냈고 1899년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 교장에 취임, 그 후 10년간 의학교육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한글 보급에 힘써 <신정국문(新訂國文)>(1905) 6개조를 상소,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1909년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적을 남겼다.


【참고사이트】

1. 지석영의 업적과 사료


 

 

83. 언론기관의 발달(P.125)

 

근대 신문이 발행되기 전부터 ‘조보(朝報)’또는 ‘기별[奇別]’이라 불리는 관보성격의 필사신문이 있었다. 이 전근대적 신문 형태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 또는 15세기 무렵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보는 승정원에서 발표하는 자료들을 각 관청의 기별서리(寄別書吏)들이 손으로 베껴서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과 양반층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조보의 내용은 관보적인 성격으로 국왕의 동정과 관리의 임면 등이 대부분이었으나 일반 사회기사의 성격을 띤 것도 함께 실었다. 조보는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와 《한성주보(漢城周報)》가 발행되기 전까지 존재하다가 1894년 정부가 정식으로 인쇄된 《관보(官報)》를 창간하고, 이듬해에 승정원의 공사청(公事廳)을 폐지하면서 없어졌다.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은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된 《한성순보》이다. 이 신문은 정부기구인 박문국(博文局)에서 발간했으나, 당시의 개화파들이 국민에게 외국의 사정을 널리 알려 개화사상을 고취시키려는 데 큰 목적을 두었다. 《한성순보》는 창간 이듬해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폐간되었으나, 1886년 1월 25일에 다시 《한성주보》를 창간하여 88년까지 발행하였다. 한편,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서재필(徐載弼)이 창간한 《독립신문》이다. 이 신문은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단행하여 그 후의 민간신문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고, 민중계몽과 자주독립사상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독립신문에 자극을 받아 1898년에는 《일신문》 《뎨국신문》 《황성신문(皇城新聞)》 등의 일간지들이 뒤를 이어 창간되었다.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인(日人) 경영의 한국어 또는 일어신문이 늘어났고, 한국인 발행의 친일신문도 생겨났다. 일인(日人)의 신문발행은 1881년 부산에서 창간된 《조선신보(朝鮮新報)》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1895년에 창간된 《한성신보(漢城新報)》와 러 ·일전쟁 후의 《대한일보(大韓日報)》(1904.3.10. 발행) 《대동신보(大東新報)》(1904.4.18. 발행)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한국인 발행의 친일지로는 《국민신보(國民新報)》(1906.1.6. 발행) 《대한신문(大韓新聞)》(1907.7.18. 발행)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 영국인 E.T.베셀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항일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진영을 대변하는 논조를 폈다. 이 신문은 국한문판 ·한글판 및 영문판인 《The Korea Daily News》 등을 동시에 발간하여 한말의 최대의 민족지였으나, 1910년 국권피탈 후에는 《매일신보(每日申報)》로 개제하여 총독부의 일개 기관지로 변신하고 말았다. 국권피탈 후 일제는 한국인에게는 단 한 건의 신문발행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한국어로 발행되는 신문은 매일신보가 유일한 것이었다. 3 ·1운동 후 1920년부터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일보(朝鮮日報)》 《동아일보(東亞日報)》《시사신문(時事新聞)》의 3개 민간지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들 민간지들은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수많은 압수와 정간처분을 당했음은 물론, 필화로 많은 언론인들이 고통을 겪었다.


1920년에 창간된 3대민간지 가운데《시사신문》은 이듬해에 폐간되었고, 1924년 3월에는 《시대일보(時代日報)》가 창간되었으며, 후에 《중외일보(中外日報)》(1926.11.15) 《중앙일보(中央日報)》(1933.11.27)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33.3.7)로 몇 차례 제호를 바꾸면서 발행되다가, 1936년 9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정간당한 끝에 복간되지 못했다. 후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1940년 8월 일제의 강제폐간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그 후부터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만이 일제의 전통치기간 동안 중단되지 않고 발간되었다. 36년 동안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신문발행의 허가를 극도로 억제했을 뿐만 아니라, 허가해 준 신문에 대해서도 행정처분에 있어서 사전 ·사후 탄압을 자행하였고, 동시에 사법처분(司法處分)으로 언론인의 구속 등이 빈번하였다. 행정처분에 의한 사전탄압은 ① 간담(懇談), ② 주의(注意), ③ 경고(警告), ④ 금지(禁止)의 순으로 제도화되어 있었고, 제작된 신문에 대한 사후탄압으로는 ① 삭제(削除), ② 발매금지 및 압수, ③ 발행정지(정간), ④ 발행금지(폐간)의 4단계가 있었다. 삭제처분은 문제된 기사를 삭제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가장 빈번하게 자행된 탄압 방법이었다. 발매금지 및 압수는 인쇄가 끝난 신문을 발매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서 심한 때에는 1년 평균 매주 한 번씩 인쇄된 신문이 압수되어 민족지는 경영상으로도 많은 타격을 입었다.


【참고사이트】

1. 외국 언론인 베델

2. 친일언론에 대해서

3. 친일언론 동영상

4. 대한매일신보 영문판

5. 대한매일신보 한글판


 

 

84. 원산학사(P.128)

 

1883년 민간에 의해서 함남 원산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를 말한다. 1880년 4월 원산이 개항하여 일본인 거류지가 만들어지고, 일본 상인들이 상업활동을 시작하자, 덕원·원산의 지방민들은 새로운 세대에게 신지식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외국의 도전에 대응하기로 하고, 나름대로 서당을 개량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1883년 1월에 새로 부임해온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정현석(鄭顯奭)에게 설립기금을 모집할 뜻을 밝히고 근대 학교를 설립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정현석은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과 원산항 통상 담당의 통리기무아문 주사인 승지 정헌시(鄭憲時)의 지원을 받으면서 관민이 합심하여 1883년에 원산학사를 설립하였다. 설립기금은 덕원·원산의 주민들, 원산상회소(元山商會所), 정헌석·어윤중·정헌시·외국인 등이 참여해서 모았으며, 1883년 8월에 학교 설립을 정부에 보고하여 정식 승인도 받기에 이르렀다. 즉, 학교설립을 위한 기금은 계모임을 조직하여 조달했는데, 정현석·어윤중·정헌시 등 관리가 각각 100냥, 향촌의 유지 118명이 합계 5,215냥, 덕원주민이 120냥을 냈다. 이외에도 한국 최초의 상업회의소인 원산상회소가 50냥을 기부했고, 심지어 중국·영국·미국 등에서 온 상인들이 700냥을 냈다. 설립 초기에는 학교를 문예반과 무예반(武藝班)으로 편성하였는데, 문예반 정원은 없었으나 약 50명의 학생을 뽑았고, 무예반은 정원 200명을 뽑아서 교육·훈련하여 별군관(別軍官)을 양성하도록 하였다.


입학 자격은 (1)덕원·원산 지방의 연소하고 재주있는 자제로 하고, (2)학교설립에 기금은 내지 않는 지방민의 자제도 차별없이 입학시키도록 하였으며, (3)다른 읍민이라도 입학금을 가져오면 거절하지 않으며, (4)무사로서 무예반에 들어와 배우고자 하는 자는 입학금 없이 입학을 허락하였다.


당시의 교과과정은 문무반 공통으로 산수·물리(격치)·기기·농업·양잠·광채 등 실용적인 과목이 있었고, 특수과목으로 문예반은 경의를, 무예반은 병서를 가르쳤다. 이외에도 일본어 등 외국어와 법률·국제법(만국공법)·지리 등 근대 학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당시에 사용했던 교과서를 보면, 〈영지 瀛志〉(6권)·〈연방지 聯邦志〉(2권)·〈기기도설 奇器圖說〉(2권)·〈일본외국어학 日本外國語學〉(1권)·〈법리문 法理文〉(1권)·〈대학예비문 大學豫備門〉(1권)·〈영환지략 瀛環志略〉(10권)·〈만국공법 萬國公法〉(6권)·〈심사 心史〉(1권)·〈농정신편 農政新編〉(2권) 등이 있다.


시험방법은 문예반의 경우 매월 시험을 실시하여 최우수자 1명을 뽑아 매년 가을에 도감영에 보고했고, 소과초시인 공도회에 응시하게 했다. 무예반은 병서와 사격을 익힌 후 매월 시험을 보아 연말에 2명을 선발했고, 이들은 병조에 보고하여 출신은 품계를 올려주고, 한량은 전시에 바로 응시하는 혜택을 주었다. 또한 학생들의 훈육을 위해서 태만한 학생, 술집에 출입하는 학생, 교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학생의 경우는 벌을 가했고, 혹은 제적을 시키기도 했다. 교수진으로는 교수 1명, 조교에 해당하는 장의(掌議) 2명, 사무직원인 장재유사(掌財有司) 2명이 있었다. 학교경비 즉 도서비용 등 학교의 공용비용은 모두 계원들의 모임에서 조달했고, 사무관리는 이사회와 같은 조직을 마련하여 실시했다.


  원산학사는 종래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로 알려졌던 배재학당보다 실제로 2년 앞서 설립되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이자 근대 최초의 민립학교인 원산학사의 설립은 한국 근대사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것은 외국인 손에 의하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손으로 설립되었다는 것, 정부의 개화정책에 앞서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자금을 모아 근대학교를 설립하였다는 것, 지방의 개항장에서 시무에 대처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는 점 등이 특히 주목된다. 1894년 갑오개혁 무렵에 원산학사는 본디 지니고 있던 소학교와 중학교의 기능이 나뉘어 원산학사는 문예반만 갖춘 원산소학교가 되고, 원산 감리서에서 역학당(譯學堂)을 세워 중학교의 기능을 하면서 소학교 졸업생들에게 외국어와 고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원산소학교는 남산동의 같은 자리에 교사를 증축하고 크게 발전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처음에 원산보통학교로, 나중에는 원산제일국민학교가 되어 1945년까지 존속하였다.


【참고사이트】

1. 근대교육의 태동

2. 근대교육의 동영상

3. 대성학원 사진

4. 숙명여학교 사진

5. 신식학교의 교육모습


 

 

85. 국학(國學)은동(P.130)

 

일제식민통치하에서의 국학연구와 국학진흥운동은 대한제국시대의 국학 연구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비록 그 양상은 다르나 대한제국시대 보다는 그 연구방법이나 업적에 있어서도 다양하였다. 대한제국시대에는 우리의 정부에서도 국문연구소 등도 설치하여 국어의 연구에 적극성을 띠었으나 1910년 우리의 주권을 상실한 후에는 일제식민통치의 한국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하여 방해를 받았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국학연구는 크게 진행되었다. 국사의 경우에도 대한제국시대에는 교훈적인 것이 많이 연구되었고 특히 외국의 건국사와 망국사도 교훈적인 입장에서 소개되었다. 이는 일제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식민통치 하에서는 그런 것은 힘들었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의 것을 연구 증진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일제침략 하에서 국학운동의 기본 성격은 학문적으로 민족문화 수호 투쟁과 전통문화의 발전을 위한 바탕 위에서 폭넓게 전개되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주권회복운동이요, 경제적으로 민족경제의 육성이다. 이는 민족자본이나 기업체에서 생산한 한국인이 만든 생산품을 사용하는 것이며 사상적으로는 민족주의의 바탕 위에서 모두가 상호보완되는 입장에서 추진되었다. 이같은 학문연구와 문화투쟁은 일제 식민통치로 인해서 파괴되어가고 있는 우리 말, 우리 역사, 우리의 민속 등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우리 민족사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면서 우리 민족의 사회운동으로 이루어졌다. 즉, 청년운동, 여성운동, 종교운동, 형평운동(衡平運動) 기타 각종 운동경기 등과 아울러 언론투쟁, 잡지와 문학 예술 등 어느 분야에서나 조금이라도 더 많이 우리의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가 국학연구와 아울러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의 것을 지키는 방법의 하나로 일제의 것이라면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반되는 의식 속에서 우리의 것은 대소를 막론하고 연구하고 보급시키며 다시 일깨워주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한국인의 혼(魂)을 지키고 문화를 보존하는 뜻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국학운동은 민족문화의 창조 발전적인 면도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일제가 파괴하려는 우리 것을 지키고 민족갱생(民族更生)을 위한 일환으로서 전개되었다. 일제의 식민정책변화에 의한 1910년대의 무단통치(武斷統治), 1920년대의 소위 문화통치(文化統治), 대륙 침략으로 이어지는 1930년대 이후의 세 단계에 따라 국학운동의 성격도 달라지고 있다. 1920년대의 문화관계의 영향을 받아 우리의 국어연구가 매우 활발하였으나 1930년대의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이 1931년의 만주사변, 1937년의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의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우리의 국학연구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한걸음 나아가 민족말살정책과 아울러 크게 탄압을 받았다.


이와 같은 사정 하에서 진행된 우리의 국학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1930년대의 국학운동이라 할 것이다. 이 시기는 일제가 식량약탈을 위한 산미증식운동(産米增殖運動)을 일으키던 때인 만큼 한국인의 마음을 표면상으로나마 누그러지게 할 회유정책의 필요성 때문에 국내의 민족운동은 다소 완화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정이 합쳐져서 우리의 국학연구가 193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한 데서 우리의 국학연구가 시작되었다. 1930년대의 전반기에는 소위 문화정치라는 표방 하에 탄압을 약간 풀어 놓은데서 우리의 국어학도 진흥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어 어느 정도 결실되는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의 후반기는 일제의 군국주의가 대륙의 침략정책상 강력한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취하면서 한국의 민족문화를 말살시키고자 날뛰던 시기였으며 일제의 만주 침략이 1937년의 중일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우리 민족의 활동은 물론 식민지 교육정책이 그대로 반영되어 우리 것이 연구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연구의 발전적인 면보다는 민족문화가 말살위기에서 수호적인 방향으로 돌려졌다.


대외적으로는 일제의 군국주의가 중국본토를 침략하여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만주에서의 우리의 독립운동도 크게 위축되었으며 국제사회에서 일제가 규탄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식민통치하에서의 우리의 국학연구는 전체적으로는 큰 고통을 받는 것이었지만 일시적이나마 연구의욕을 가질 수 있었던 시기가 바로 1930년 전후 수년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국학운동은 우리의 학문 특히 국학연구로서 식민통치하에서의 민족의식의 맥락을 위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써 항일운동과 표리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국학운동은 우리의 역사와 국어를 지키려는 민족문화수호운동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시대 이후 일제침략과 더불어 국수적인 경향도 때로는 나타났는데 이는 항일투쟁정신을 고취시키려는 데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이제 국학운동이 지니는 성격을 1942년 10월 1일에 일어났던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의 예심종결결정문(豫審終結決定文)을 통해서 일제가 우리 국학 즉 국어운동자를 사건화한 이유를 본다면 다음과 같다.


「민족운동의 일형태로서의 소위 어문운동(語文運動)은 민족고유의 어문의 정리 · 통일 · 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문화적 민족운동임과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를 포함하는 민족독립운동의 점진형태이다. 사유(思惟)컨대 언어는 사람의 지적 정신적인 것의 원천임과 동시에 사람의 의사 감정을 표현하는 외에 그의 특성도 표현하는 것이므로서 민족고유의 언어는 민족내의 의사의 소통은 근본적으로 민족감정 및 민족의식을 양성하여 이에 굳은 민족의 결합을 생기게 하며……

(중략)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는 1919년 만세소요사건(萬歲騷擾事件)의 실패에 감(鑑)하여 조선의 독립을 장래에 기함에는 문화운동에 의하여 민족정신의 환양급(喚養及) 실력의 양성을 급무로 하고 대두한 소위 실력양성운동(實力養成運動)이 그 출발의 화(華)였는데……(중략)1931년 이래 피고인 의본극로(義本克魯, 李克魯 창씨)를 중심으로 문화운동중 그의 기초적 운동인 위의 어문운동을 촉진시켜 오면서 그 이념을 가지고서 지도이념으로 삼아 표면상 문화운동의 가면하에 조선독립을 위한 실력양성단체로서……(중략)조선어학회는 이같이 민족진영에 단연 불발(不拔)의 지위를 점(占)하고…(중략)…취중(就中)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편찬사업과 같은 것은 광고(曠古)의 민족적 대사업으로 촉망되어 있는 것으로서……(하략)


이처럼 우리의 국어연구 운동이 바로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하여 활동하면서 확고한 뿌리를 한국민족 위에 내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특히 조선어사전의 편찬사업은 두드러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국사연구의 취지와 태도를 보아도 그같은 역사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 취지문을 보면


「근래 조선(문화)을 연구하는 경향과 성열(盛熱)이 날로 높아가는 상태에 있는 것은 참으로 경하(慶賀)에 견디지 못하는 바이다…(중략)…비록 우리의 힘이 빈약하고 연구가 졸렬할지라도 자분자진(自奮自進)하야 또 서로 협력하야 조선문화를 개척 발전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될 의무와 사명을 가진 것이다……(하략) [註4]」


라 하여 스스로 분발하고 서로 협력하며 우리 문화를 개척하고 발전시키겠다는 사명감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고 진단학회 회칙 제2조에서도「본회는 조선 급(及) 인근문화의 연구를 목적으로 함 [註5]」이라 하여 우리 문화와 우리의 주변문화에 대해서도 동시에 연구할 것을 밝혀 문물교류의 상황과 동시에 객관성을 지니는 학문연구에 근본적인 뜻이 있음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국학연구는 우리 민족의 생활상을 깊이 연구하고자 출발했음을 밝혀서 목적과 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일제가 우리 어문을 조선어라 하여 형식적인 과목으로 전락시키고 우리 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할 때 우리 학자들은 일제에 대항하여 국학의 민족사적 맥락을 이어주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며 그같은 민족독립운동의 정신이 우리 국어 · 국사 · 민속학을 발전시켜 준 것이다.


【참고사이트】

1. 국학의 전개방향

2. 국학운동 지도

3. 신채호에 대하여

4. 주시경에 대해서

5. 독사신론 사진

6. 교과서에서의 신채호

7. 조선어학회 임원들


 

 

86. 신소설(新小說)(P.132)

 

고대소설과 다르고 '새로운 소설'이라는 뜻에서 신소설이라 불렀으며,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여 '개화기소설'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 신소설이란 용어가 언제 처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여러 설이 있으나 1907년 출간된 〈혈의 누〉 초간본 표지에 '신소설'이라 씌어진 것을 시초로 본다. 문학사적으로는 이인직의 〈혈의 누〉(1906)를 시작으로 이광수의 〈무정〉이 나온 1917년 이전까지의 작품을 가리킨다.


신소설이 발생한 요인은 개항에 의한 서구의 근대문명 수용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변화에 있다.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① 국한문혼용과 한글 전용을 내세운 국어운동 전개와 독서 인구의 확대, ② 상업적 성격을 지닌 출판사의 출현, ③ 민간신문과 직업작가의 등장, ④ 근대문명의 수용, ⑤ 고대소설의 사실주의 요소의 영향, ⑥ 일본·중국 소설의 영향이다. 신소설은 10여 년에 걸쳐 씌어졌으나 중요한 작품은 대부분 1905~10년에 나왔다. 이 시기에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여러 정책을 시도했고, 이에 조선인 사이에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의지가 드높아 의병운동을 일으키거나 신문화·신교육을 받아들여 근대적 자각을 고취시키는 계몽운동을 벌였다. 신소설은 이러한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아 씌어졌다.


1)특징

신소설은 고대소설과 달리 작품의 첫머리가 매우 자유롭다. 고대소설의 대부분은 "대명년간에"나 "화설 중고적에" 등으로 시작되는 데 반해 신소설은 정해진 규칙이 없다. 예를 들면 〈혈의 누〉는 "일청전쟁의 총소리는", 〈은세계〉는 "겨울 치워 저녁 기운에"로 시작된다. 이처럼 신소설의 첫머리가 구어체 문장으로 씌어진 것은 한문에 토를 단 듯한 이전의 문장과 확연히 구분되는 파격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신소설에 나오는 문장은 개화기의 새로운 감각이 담겨 있고 사건이나 장면 묘사가 과장되지 않고 사실적이다. 인물도 선악의 대립이 아니라 개성 위주로 설정되고, 이야기가 고대소설은 시간순으로 진행되는 데 반해 신소설은 현실감을 나타내려고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거나 전후 사건 및 장면이 뒤바뀐다. 말하자면 인물의 행동을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이 아니라 신념이나 특성에 비중을 두고 시간의 순서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외에도 〈금수회의록〉(1908)·〈자유종〉(1910)과 같은 토론소설, 토막 이야기마다 흥미로운 사건을 제시한 연재소설 형태도 등장했다.


 

2) 주요작품들

개화기에 발생한 신소설의 내용은 봉건제도의 비판, 신문화·신교육 사상, 자유연애 등의 계몽의식을 드러낸 것이 대부분이다. 이를 중요한 작가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인직은 신소설 대표작가로 1906년 〈혈의 누〉를 발표해 신소설 장르를 개척했다. 〈혈의 누〉는 청일전쟁중 부모를 잃은 옥련이 일본인 군의관의 도움으로 유학가는 이야기이며, 봉건제도를 비판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문명개화라고 주장한다. 처첩간의 갈등을 다룬 〈귀의 성〉은 고대 가정소설 유형을 답습하고 있으나 양반계층의 횡포를 잘 드러냈고, 〈은세계〉는 반봉건적인 측면에서 이인직 소설의 정점에 놓인다. 평민층 최병도가 봉건지배층의 수탈에 항거하여 끝내 희생당하지만, 이를 통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봉건제도의 모순을 드러냈다. 이해조는 이인직과 함께 신소설 2대 작가로 〈빈상설〉(1907)·〈구마검〉(1908)·〈홍도화〉(1908)·〈자유종〉(1910) 등을 발표했다. 〈빈상설〉은 〈귀의 성〉과 마찬가지로 처첩간의 갈등을 다루었고, 〈구마검〉과 〈홍도화〉는 혼인제도 개혁, 미신타파 등의 계몽사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어느 부인의 생일 잔치에 모인 부인들이 여권신장과 풍속개량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의 〈자유종〉은 신소설 중 '토론소설'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외에 번안이기는 하지만 구연학의 〈설중매〉(1908)는 독립협회를 근거지로 한 개화파의 활동을 그려냈고, 안국선의 〈금수회의록〉(1908)은 우화형식의 토론소설로 봉건관료의 부패와 제국주의의 만행을 폭로했다. 한일합병 이후에 나온 최찬식의 〈추월색〉(1912)·〈안의 성〉(1914), 김교제의 〈현미경〉(1912) 등은 통속적이고 친일적 성격을 보여주어 이전의 신소설이 지닌 이념적 성격은 탈색된다.


3) 신소설 등장의 의의

신소설은 고대소설에서 근대소설로의 제일보를 내디딘 과도기소설이다. 언문일치의 구어체를 시도하고 소설의 허구성에 관심을 기울인 점, 오락성 이외에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창작된 점,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평등 사상을 내세운 점, 소설의 독자를 규방 아녀자에서 신학문을 배운 지식층으로 끌어올린 점 등은 한국소설사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이다.


【참고사이트】

1. 신소설에 대해서

2. 신소설 사진모음

3. 근대문학 사진


 

 

87. 신체시(新體詩)(P.132)

 

한국의 신문학 초창기에 쓰여진 새로운 형태의 시가(詩歌)로, ‘신시’라고도 한다. 그 전의 창가(唱歌)와 이후의 자유시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종래의 고가(古歌)인 시조나 가사와는 달리 당대의 속어(俗語)를 사용하고, 서유럽의 근대시나 일본의 신체시의 영향을 받은 한국 근대시의 초기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신체시의 효시는 1908년 11월 《소년(少年)》 창간호에 실린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의《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를 꼽으나, 이에 앞서 1905년 무렵 작자 미상의 신체시 《아양구첩(峨洋九疊)》《원백설(怨白雪)》 《충혼소한(忠魂訴恨)》이 발표되었고, 1896년 이승만(李承晩)이 《협성회보(協成會報)》에 《고목가(枯木歌)》라는 신체시를 발표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육당의 일련의 신체시를 그 형태상으로 보면 대개 7 ·5조의 자수율(字數律)로서 이루어 놓은 정형시이다. 즉, 신체시는 창가 적 정형성과 후렴이 있으나, 고전시가의 율문적(律文的) 표현을 지닌 준정형시(準定型詩)라고 볼 수 있다

【참고사이트】

1. 신체시 소개

2. 최초의 신체시

3. 최남선 사진


 

 

88. 근대예술의 변화(P.133)

 

서양의 근대 문화가 도입되면서 특히 예술계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먼저, 음악 부문에서는 크리스트교가 수용되어 찬송가가 불려지면서 서양의 근대 음악이 소개되었다. 또,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부르는 신식 노래인 창가가 유행하였는데, 독립가, 권학가, 애국가 등이 유명하였다. 그 중에서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되는 애국가는 국민 사이에 널리 애창되어 민족의식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고, 연극 부문에서는, 양반 사회에서 천시되었던 민속 가면극이 민중들 사이에 성행하였다. 그리고 신극 운동도 일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고, 은세계, 치악산 등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한편, 미술 부문에서는 미술가들이 직업인으로서의 위치를 굳혀 갔으며, 서양의 화풍이 소개되어 서양식 유화도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예술은 각 분야에 걸쳐 근대적 양상을 띠고 발달하여 갔다.


【참고사이트】

1. 음악계의 변화

2. 에술계 용어모음

3. 나운규의 아리랑

4. 신파극단 사진

5. 안익태 선생사진

6. 이중섭의 "소"

7. 홍난파 사진

8. 친일 예술인 영상

9. 최초의 극장 원각사


 

 

89. 민족종교의 활동(P.134)

 

민족종교는 구한말에서 일제시대 사이의 사회 변혁기에 대두된 새로운 종교운동을 가리키는데 보통 1860년 최수운이 제창한 동학을 그 효시로 간주한다. 민족종교에는 최수운의 동학(東學) 및 천도교계(天道敎系)외에도 김일부의 정역계(正易系), 나철의 대종교(大宗敎系), 강증산의 증산교계(甑山敎系), 그리고 단군계(檀君系), 원불교(圓佛敎) 등이 포함된다. 민족종교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이 밖에 신흥종교, 신종교, 민중종교 등 다양한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으나 여기서는 민족종교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시기 민족종교 운동은 대한제국의 종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일제 통감부의 공작에 대한 저항과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났다. 손병희 등은 1905년 12월 천도교를 창건하여 동학계의 일진회에 대결하면서 동학교도들을 다시 애국운동 쪽으로 끌어왔으며, 윤치호·이상재 등은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등을 비롯하여 각종의 기독교 조직을 통해서 기독교도들을 국권회복운동 편에 서게 하였다.

유교 계에서는 박은식·장지연 등이 대동사상(大同思想)을 주장, 1909년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여 친일적인 대동학회(大東學會)와 공자교(孔子敎)에 대결하면서 유림 계를 국권회복운동 편에 서게 하였다.나철(羅喆)·오혁(吳赫) 등은 1909년 단군을 국조로 신봉하는 단군교(檀君敎 : 뒤에 大倧敎로 개칭)를 창건하여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교도들을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에 동원하였다. 이러한 민족종교운동은 당시 종교가 일반 민중의 생활 속에서 중요한 측면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의의가 있었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참고사이트】

1. 근대 종교운동자료 모음

2. 구한말 민족주의자들의 종교이해

3. 박은식 선생 사진

4. 박중빈 선생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