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개항이후의 경제와 사회(P.102)


69. 방곡령(防穀令)(P.103)

 

조선 고종 때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곡물의 수출을 금지한 명령으로 1876년 강화도(江華島)조약으로 일본에 개국한 이래 일본상인들은 우리 농촌에 침투하여 갖은 방법으로 쌀, 콩 등을 매점해서 이 를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통제를 받지 않고 곡물이 계속 반출되자 곡물의 절대비축량이 부족하여 식량난을 가중시켰고, 1888년(고종 25)에는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할 방도가 없게 되자 전국 여러 곳에서 연 달아 폭동이 일어났다. 이에 곡물수출항인 원산(元山)을 관장하던 함경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은 1889년 9월 한일통상장정(韓日通商章程) 제37관(款)을 근거로 원산항을 통하여 해외로 반출되는 콩의 유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발포하였다. 그러나 담당관원의 실수로 예고기간이 부족하여 일본 무역상들이 타격을 입게 되자 한일 간에 분규가 일어나게 되었다.


정부는 일본의 항의로 조병식에게 방곡령 해제를 명하였으나, 조병식은 오히려 일본상인들로부터 곡물을 압수하는 등 방곡령을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다시 일본이 조병식의 처벌 과 손해배상을 요구하자 조병식을 강원도관찰사로 전출시켜 방곡령을 해제하였다. 그러나 새로 함경도관 찰사로 부임한 한장석(韓章錫)도, 1890년 곡물수출의 폐해를 들어 이를 금지하도록 건의하자 원산항의 방곡령 을 다시 시행하였고, 이어서 황해도에도 방곡령을 내렸다. 이에 일본은 1891년 11월 방곡령으로 일본상인 이 입은 손해배상이라 해서 14만 7168환을 요구하며 양국간에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해결되지 못하였다.

그 후 일본이 1893년 다시 배상금에 이자를 합산해 17만 5000환의 지불을 강요하자 정부는 청나라의 권고에 따 라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배상금 11만 환을 지불하기로 하고, 1893년 4월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방곡령은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시행되다가 1894년 1월에 전면 해제되었다.


【참고사이트】

1. 방곡령의 의의

2. 방곡령 시행 지도

3. 쌀수탈 사진


 

 

70. 경제구국운동(P.108)

 

개항이후 외세의 경제적 침탈에 대응하여 여러 측면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방곡령의 시행, 서울 상인들의 상권 수호 운동, 독립 협회의 이권 수호 운동, 보안회 등의 황무지 개간 권 반대 운동, 국채 보상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첫째로, 방곡령의 시행은 일본 상인들의 농촌 시장 침투와 지나친 곡물 반출을 막기 위하여 내린 조치였다. 조선에서 방곡령은 흉년이 들면 지방관의 직권으로 실시할 수 있었다. 개항 이후, 곡물의 일본 유출이 늘어나면서 곡물 가격의 폭등 현상이 나타났고, 여기에 흉년이 겹쳐 함경도, 황해도 등지의 지방관들은 방곡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일본 측이 트짐을 잡음으로써 방곡령은 외교 문제로 번졌다. 일본 측은, 방곡령을 실시하기 1개월 전에 조선 측이 일본 측에 통고해야 한다는 조·일 통상 장정의 규정을 구실로 조선 측을 강압하여 결국 방곡령을 철회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일본 상인들은 방곡령으로 인하여 손해를 입었다고 하여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하였고, 결국 조선 정부는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둘째로, 서울 상인들은 청국과 일본 상인들의 상권 침탈에 반대하여 상권 수호 운동을 벌였다. 개항 초기에는 외국 상인의 활동 범위가 개항장 10리 내로 제한되었으나, 1880년대에는 개항장 100리 까지 확대되어, 서울을 비롯한 조선 각지에서 청국 상인과 일본 상인의 상권 침탈 경쟁이 치열해졌다. 서울의 경우, 청국 상인들의 남대문로와 수표교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 상인들은 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도심을 향하여 조선의 상권을 잠식해 갔다. 이에 반발하여 수천 명의 서울 상인들은 철시하고 외국 상점들의 서울 퇴거를 요구하였으며, 그 뒤에도 철시한 서울 상인들과 시민 수천 명이 1주일 동안 격력하게 상권 수호 시위를 벌였다. 그 후 서울 상인들은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하여, 외국의 불법적인 내륙 상업 활동을 엄단할 것을 요구하며 상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셋째로, 독립 협회는 열강의 이권 탈취에 저항하여 이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러시아가 일본의 선례에 따라 저탄소 설치를 위해 절영도의 조차를 요구하자,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저탄소 철거까지 주장하여 마침내 러시아의 요구를 좌절시켰다. 또, 한국의 화폐 발행권과 국고 출납권 등 각종의 이권 획득을 목적으로 서울에 설치된 러시아의 한러은행도 폐쇄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 기지 설치를 위한 러시아의 목포, 증남포(진남포) 부근의 도서에 대한 매도 요구를 강력히 저지시키고, 프랑스, 독일 등의 이권 요구도 좌절시켰다.

넷째로, 보안회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벌여 일제의 토지 약탈 음모를 분쇄하였다. 즉, 일제가 경제적 침탈을 강화하면서 일본인에게 막대한 황무지의 개간 권을 주도록 요구하자, 국민들은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부 민간 실업인과 관리들은 농광 회사를 설립하여 황무지를 우리 손으로 개간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보안회는 매일 가두집회를 열고 일제의 침략적 요구를 규탄하면서 거족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보안회는 국민적 호응에 힘입어 마침내 일제로 하여금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하게 하였다.


다섯째로, 일제의 차관 제공에 의한 경제적 예속화 정책에 저항하여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그들의 식민지 시설을 갖추기 위하여 시설 개선 등의 명목을 내세워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오게 하였는데, 1907년까지 들여 온 차관 총액은 대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에 달하였다. 이에,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고 국권을 지키려는 국채 보상 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국채 보상 기성회를 중심으로 각종 애국 계몽 단체와 언론 기관이 모금 운동에 참여하였다. 모금을 위해 금연 운동이 전개되었고, 부녀자들은 비녀와 가락지까지 내어 호응하였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간교한 탄압으로 이 거족적인 경제적 구국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참고사이트】

1. 경제구국운동 도표

2. 경제적 구국운동 계보

3. 국채보상운동 사진

4. 경제적 자주운동 지도

5. 열강의 경제침탈


 

 

71. 일본의 경제침탈(P.106)

 

일본의 영사 재판권, 일본 화폐의 사용권, 일본의 수출입 상품의 무관세 등을 인정한 불평등 조약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약탈적 무역 활동을 하면서 상권을 침탈하였고, 일본 은행을 진출시켜 경제적 침략의 첨병 노릇을 하면서 금융권을 침탈하였고, 차관 제공을 통해 재정적으로 일본에 완전히 예속시키려고 하였다. 러·일 전쟁을 계기로 철도 부지와 군용지 확보를 구실로 대규모 토지 약탈을 자행하면서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참고사이트】

1. 경제침탈의 유형

2. 일본 경제침탈의 일화

3. 일본의 경제침탈 지도

4. 일본 식민지지배 옹호에 대한 뉴스영상

5. 충무로의 일본상가들


 

 

72. 러일 전쟁(P.107)

 

1904∼05년에 만주, 한국, 동해에서 싸운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으로, 1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뤼순군항[旅順軍港]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905년 9월 5 일에 강화를 하게 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다. 한국과 만주(중국 동북지방)의 분할을 둘러싸고 싸운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동맹(英日同盟)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러시아 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일본은 전승으로 한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 진출이 확정 되었으 나 미국과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배경]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세계적인 규모의 제국주의 단계로 들어섰으나, 그 당시 극동의 국제적 대립관계는 중국 분할경쟁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간섭(三國干涉)’에 의하여 일본의 만주 진출을 저지한 러시아는, 1895년 프랑스와 공동으로 4억 프랑에 달하는 대청차관(對淸借款)을 강요하고, 96년에는 러․ 청 밀약을 맺고 일본이 중국, 한국, 극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 원조할 것을 약속, 만주 북부를 관통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동청철도 (東淸鐵道)부설권을 획득하였다. 98년 다시 러시아는 관둥저우[關東州]의 조차권(租借權)을 획득, 같은 해 독일이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영국이 주룽반도[九龍半島]와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다음해 프랑스가 광저우만[廣州灣]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뒤늦게 미국도 99년에 문호개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극동에서는 영국 미국 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라는 열강의 대항관계가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3국 간섭 이래 국제적 고립에 고심하고 있던 일본은 1900년 청나라의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 진압에 참가하게 되면서 드디어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아모이[厦門] 출병에 실패하고, 중국 본토에 대한 이권 획득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일본의 외교책으로서 러시아와의 타 협을 모색하려는 러일 협상론과 영국과 제휴하여 러시아 견제를 노리는 영일동맹론이 대립되었으나, 결국 1902 년 1월 영˙일동맹이 성립되어 러시아와의 대립이 명확해졌다. 이 때문에 그해 10월 러시아는 의화단사건 이후의 만주 주둔군의 제1기 철병(撤兵)을 수행하였으나, 이듬해 4월의 제2기 철병은 보류한 채 만주의 독점적 지배 는 물론, 압록강 연안에 진출하여 남하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원인]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위협을 느낀 일본 국내에서는 주전론과 반전론으로 국내 여론이 양분되는 듯하였으나, 세론의 대세 는 차차 주전론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1903년 6월 23일 정부의 주요 각료 원로들의 어전회의(御前會議)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과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우선권을 각각 인정하는 만, 한교환론(滿韓交換論:사실은 한국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고, 만주에서는 러시아의 지배력 약화를 노렸음)에 의한 대(對)러시아 교섭을 결정하였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 8월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일본에 대응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양국의 교섭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해를 넘겼다. 그 동안 일본에서는 육군을 중심으로 전쟁준비가 진척되었으나, 그것은 일본의 경제력에 비추어 군사행동을 남만주에 한정한다는 전제에 입각한 계획이었다.


[경과]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대(對)러시아 개전(開戰), 국교단절을 결정하고, 8일에는 육군 선발대가 한국 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고,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어 10일 러일 양국으로부터 선전 포고되었다. 서전에서 일본군은 한국을 제압하고, 한국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해 유리 한 전략체제를 확립하였다.

4월 하순 한국에 상륙, 북상한 일본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 과 충돌하여 격파했고, 같은 달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한 제2군은 난산[南山],다롄[大連]을 점령하고 뤼순을 고립시켰다. 다시 6월에는 만주군 일본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8월 랴오양[遼陽] 부 근에서 양국군이 첫 번째 대규모적인 접전을 벌였고, 10월의 사허후이전투[沙河會戰鬪], 1905년 1월의 헤이거우 타이전[黑溝臺戰] 등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전 끝에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8월 황해에서 일본 해군의 총공격을 받고 항구 안에 봉쇄당하였다. 뤼순 공략을 맡 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의 제3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203고지 공격으로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1905년 1월 드디어 공략에 성공하였다. 유럽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은 크로파트킹 지휘하의 러시아군 32만과 오야마 이와오[大山嚴]가 이끄는 일본군 25만은 3월에 펑톈[奉天:현 瀋陽]에서 회전(會戰), 러시아군이 패퇴하였으나 일본군 도 사상자가 7만에 이르는 큰 손실을 보았다. 한편 러시아는 육전(陸戰)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 스트벤스키 지휘하의 발트함대를 회항시켜 5월 27,28일 대한해협에서 대 해전을 전개하였으나, 도고 헤이하치로 [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결과]

펑톈회전 전후부터 러일 양국의 전쟁 수행능력은 한계에 이르렀다. 특히 러시아는 계속되는 패전으로 사기가 침체되고 그 해 1월 ‘피의 일요일’로 비롯된 군대의 반란과 농민폭동(제1차 혁명)이 일어나 혁명 진압이 급선무였다. 약 20억 엔[円] 의 전비(戰費) 가운데 12억 엔의 공채 모집에 응함으로써 일본을 지원하였던 영국 미국도 일본의 승리가 만주의 단독 점령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프랑스는 3,4월경 러일 양국에 강화할 것을 종용하였 고, 동해해전(東海海戰) 후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인 미국 대통령 T.루스벨트의 알선으로 8월 포츠머스 강화회의 가 열렸다. 일본의 전권(全權)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 러시아의 전권 비테 전 재무장관이 참가하여, 남 사할린 섬의 할양(割讓)을 내용으로 한 조약이 9월 5일 조인되고, 16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한 국 지배권의 확립과 남만주 진출이 결정되고, 이것이 동시에 대륙의 권익을 꾀하는 미국과의 대립을 가져왔다.


[한국에 미친 영향]

러일전쟁의 결과는 포츠머스 강화회담과 을사조약으로 이어져 한국은 주권을 일본에 거의 빼앗기고 망국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러일 간의 급박한 사태를 감안, 1904년 1 월 23일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한 채 군대를 서울에 투입하고 2월 9일에는 인 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정 2척을 격파하였다. 또한, 2월 23일에는 한국정부를 강압하여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일본은 이 의정서에 따라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하고 통신망을 접수하였으며, 경부, 경의선의 부설권, 연해의 어업권, 전국의 개간권까지 획득하였다. 한국정부는 전쟁이 일본의 승세로 기울자 같은 해 5월 18일자로 러시아와 체결하였던 일체의 조약 협정의 폐기를 선언하였다. 이에 일본은 8월 22일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을 한국과 체결, 한국의 외교권을 거의 박탈하는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성립시켰다. 전승국이 된 일본은 1905년 7월과 8월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각각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 을 확인받았다. 이어 9월의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한국의 독점적 지배를 확인받음으로써 한국의 일 본 식민지화는 사실로 굳어졌다.


【참고사이트】

1. 러일전쟁에 대해서


 

 

73. 동양척식주식회사(P.106)

 

1908년에 일본이 한국경제를 수탈하려고 세운 국책회사. 한일 합작으로 설립했는데, 일본이 우리나라의 토지를 약탈하고 일본 농민을 이주시킬 목적으로 설립했다. 처음에는 본점을 서울에 두었다. 자본금 1천만원(20만주) 가운데 대한제국 정부가 국유지 1만 7714정보를 출자하고, 나머지는 일본과 우리 나라에서 주식을 공모했다. 이 회사는 토지 매수에 힘을 써, 토지 조사 사업이 완료된 뒤 국유지 불하 혜택을 받아 1920년 말에는 10만 정보에 이르는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획득한 토지를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고율의 소작료를 수탈했다. 그리고 1910년부터 1926년까지 17회에 걸쳐 약 1만 호의 일본 농민을 우리 나라로 이주시켜 주요 도시와 농촌에 일본인 촌락을 건설함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거점을 만들었다. 만주와 중국 진출을 위해 1917년에는 회사법을 고쳐 지역 제한을 철폐하였다. 그리하여 본점을 도쿄로 옮기고 봉천, 대련, 하얼빈, 간도, 신경 등에 지점을 개설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토지 경영보다는 금융 업무에 주력했고, 1930년대에 들어서 일본 자본의 한국진출이 늘어나자 공업 부문의 투자에 주력했다. 광복 직후 미군정이 신한공사로 바꾸었다가 1948년에 해체했다.


【참고사이트】

1. 동양척식주식회사 사진

2. 나석주 의사의 의거사건


 

 

74. 철도 부설(P.106)

 

① 한말의 철도 부설 과정

1876년(고종13)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국왕을 비롯한 조정의 고관들에게 철도에 관한 지식이 전달되었다. 그 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군사행동상의 이유로 서울∼부산간, 서울∼인천간의 군사 철도 부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일본은 그해 8월 20일 이른바 한일잠정합동 조관을 강요할 때, "경부선·경인선 간의 철도수축공사는 한국 정부가 재정이 아직 충분하지 못함을 고려하여 일본 정부 또는 일본의 한 회사와 체결하고, 시기를 보아서 이를 기공시킴을 희망한다."는 조항을 규정함으로써 철도부설권을 확보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내정간섭을 자행하였으며, 1896년 우리나라 정부는 국내철도규칙을 새로 제정 공포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부설 경영하는 일반철도에 관하여 의거하여야 할 바를 규정한 것이다. 그 뒤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과 이에 따른 친러내각이 수립됨으로써 러시아의 국방책에 따른 국내철도규칙을 개정하였으나 1898년 다시 구제도로 후퇴하였다. 한편 1895년의 청국의 패전과 민비시해사건, 친러파·친일파의 각축 등 국내정세나 국제정세가 복잡 미묘하여지자 러시아·미국·프랑스·독일·일본 등 각국은 광산채굴권·철도부설권 등 주요 이권을 우리나라 조정으로부터 획득하였다. 1896년 미국인 모스는 서울∼인천간의 철도 부설 특허를 얻었으며, 프랑스인 그릴은 서울∼신의주간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특허 받았다. 그러나 대륙 침략의 야욕을 가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러시아 세력까지도 거세함에 따라 미국인과 프랑스인에게 특허한 철도부설권도 집요한 배후공작으로 인수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1899년 처음으로 인천∼노량진간의 경인선 철도를 개통시켰다. 철도에 관한 지식이 우리 나라에 소개된 것은 1876년 개항 이후 김기수가 기록한《일동기유》에 의해서였다. 그 뒤 1880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문제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도 그의 복명서(復命書)에서 국가 운영상 철도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주미 조선공사 박정양의《미속습유(美俗拾遺)》에도 철도에 관하여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복명서나 기록을 통하여 막연하면서도 관념적으로 철도에 대하여 이해가 되어 있었으나, 1889년 미국에서 귀국한 주미 대리공사 이하영이 가지고 온 철도 모형을 봄으로써 철도의 편리성과 효용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높아져 철도 부설 문제가 정식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철도 부설의 교섭을 현실적으로 시작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때였다. 그 뒤 경인선·경부선·경의선·마산포선 등이 복잡한 이면사를 간직한 채 일본에 의하여 차례로 개통되었으며, 우리 나라의 민족자본에 의한 자발적인 철도 사업은 억압, 저지되었다. 이처럼 철도부설권을 일본이 독점하였으나 당시 정부에서도 철도의 이권문제가 외교상의 복잡한 문제로 되기 쉽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일부 선각자들도 자력 건설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소유권은 가급적 외국인에게 특허하지 않을 방침으로 농상공부의 요청에 따라 의정부회의에서 서울∼목포간의 철도를 관영(官營)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영국·프랑스 등의 이권획득운동을 막았으며, 총세무사 브라운으로 하여금 건설자금을 주선하게 하였다. 그러나 국내 자금은 결핍되고, 외자 융통은 차관조건이 가혹하여 결국 자력경영 방침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이권회 수론이 성행하자 철도건설을 계획하고 있던 박기종 등이 대한철도회사를 발기하여 1899년 서울∼의주간의 철도부설 인허를 출원하자 정부는 즉시 이를 인가하였다. 또한 외부대신 백제순은 우리나라는 장차 필요한 철도를 자력으로 경영함으로써 외국인에 대한 철도부설 특허를 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공문으로 발표하여, 당시 서울∼원산간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갖은 권모술수를 다하던 미국·일본·러시아·독일 등의 요구를 일축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철도 경영 준비를 위하여 1900년 궁내부에 철도원을 설치하고, 농상공부의 소관에 속하였던 정부·경인 양 철도의 감독사무를 이관하였다. 그 뒤 이용익 등이 계획한 경의·경원 철도의 궁내부 직영안에 대하여 고종의 재가를 얻어 서북철도국을 설치하였다. 서북철도국이 건설에 착수하려 하자 프랑스에서 해관세를 담보로 건설자금공급을 신청하여왔으나, 정부에서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리하여 서북철도국이 서울∼개성간의 실측에 착수하였으나 정부의 재정으로는 급속한 공사 착수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고, 외국의 차관은 그 조건이 가혹하였으므로 사업은 중대한 위기에 빠졌다. 한편 1898년 외부 참사관이던 박기종이 발기한 부하철도회사는 부산에서 낙동강 안 하단까지 약 9㎞의 특허를 얻어 영남지선철도회사를 조직하였고, 1902년 마산∼삼랑진간의 철도부설 허가를 얻어 부설에 노력하였으나 자본부족으로 중지 상태에 놓이게 되어 결국 일본의 출자를 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은 1894년에 체결한 한일 잠정합동조관을 근거로 경부·경인철도의 부설권을 차지하였다.


 ② 일제강점기의 철도 발달

1899년 9월 18일 제물포∼노량진간 32㎞의 경인철도가 처음으로 개통된 당시의 철도장비 보유현황은 증기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28량이었다. 그 뒤 1905년에는 서울∼부산간의 경부선이 개통되었으며, 1906년 용산∼신의주간의 경의선이, 1910년 평남선이 1914년대전 목포간의 호남선과 서울∼원산간의 경원선이, 1928년 원산성삼봉간의 함경선이, 1936년 이리∼여수간의 전라선이, 1942년 청량리∼경주간의 중앙선이 각각 개통되었다. 그간에도 여러 지선이 계속 부설되었는데, 일본은 식민지의 억압·착취 및 대륙침략의 수단으로 우리 나라의 철도를 확장시켰다. 경영주체면에서 볼 때 경인선 개통 당시는 경인철도합자회사가 운영하였고, 1901년 겅부철도주식회사가, 1902년 영남지선철도회사가, 1903년 대한철도회사가 각각 설립되었다. 1904년 경의선 부설을 위한 임시군용철도감부가 설치되었으며, 1905년 호남철도회사가 설립되었으나 1906년 통감부 철도관리국이 설치되면서 운영이 통일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1917년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에 우리 나라 철도의 경영을 위임하였으나 1925년 위탁경영을 해제하고 조선총독부가 직영하여 광복을 맞았다. 한편 1927년 이후 철도 12개년 계획에 따라 종전의 함경·평원의 2선에 더하여 도문·혜선·만포·동해·경전 등 5개선과 백무선을 건설하였으며, 건설계획이 진전됨에 따라 국유선간에 개재하는 사설철도 지선의 매수 및 매수선 중의 협궤선을 광궤로 개축하는 등 대규모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5년 광복 당시 남북한 철도의 총영업 길이는 6,326㎞, 기관차 1,166대, 객차 2,027량, 화차 1만 5352량, 역(驛) 762개소였다.


【참고사이트】

1. 고종의 철도칙령

2. 경인선 부설시 사진

3. 경부선 부설사진

4. 경인선 사진


 

 

75. 일제의 금융정책(P.107)

 

조선은행의 설립과 일본의 금융자본침투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금융제도는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발맞추어 일련의 정비 확장과정을 겪게 되었다. 먼저 1911년에는 한일 간의 금리 차에 따른 일본자금의 과도한 한국유입을 막기 위하여 '조선리식제한령'을 제정하였다. 1912년에는 1906년에 공포된 '은행조례'를 폐지하고, 그 대신 '은행령'을 공포하여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동경영에 의한 일반은행설립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새로운 '은행령'에 의해 일반은행의 설립이 본격화되었는데 특히 191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제1차 세계대전중의 경제호황을 배경으로 은행신설이 가속되었다. 당시 신설된 일반은행을 살펴보면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동출자로 1912년에 대구의 선남상업은행(후에 선남은행으로 개칭), 구포의구포은행(후에 경남은행으로 개칭), 1913년에 부산 상업은행과 대구은행이 각각 설립되었다. 한국인의 독자경영은행으로는 충남의 호서은행(1913년), 동내은행(1918년), 대구의 경일은행(1920년), 고성의 해동은행(1920년), 광주의 호남은행(1920년)이 그리고 일본인의 독자경영은행으로는 원산의 칠성은행(1912년), 경성은행(1913년), 진남포의 삼화은행(1916년), 원산상업은행(1919년), 대구의 경상공립은행(1920년) 등이 잇달아 설립되었다. 1918년 6월에 '조선식산은행령'이 공포되고, 동년 10월 산업자금을 효율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특수정책금융기관인 조선식산은행이 발족을 보게 되었다. 1922년에는 '무진업령'에 의하여 특수금융기관으로서 6개의 무진회사가 설립되었다. 일본의 구한국병합 이후 10여 년간 우리나라의 금융기관은 일반은행과 특수금융기관의 이원적 조직을 형성하면서 급속히 성장하였으나, 일반은행은 아직도 그 규모가 작은 편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 불황은 그 경영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에 총독부는 1927년에 있었던 일본의 금융공황을 계기로「금융제도조사회」를 조직하고, 우리나라의 금융제도의 재정비방안으로 '금융조합령'(1928년)과 '은행령'(1929년) 및 '저축은행령'(1928년)을 제정하였다. '은행령'의 제정으로 은행은 자본금 200만원 이상의 주식회사로 규정되었다. 이와 함께 편. 독부는 기존의 군소금융기관에 대하여 합병을 강력히 종용하였다. 그 결과 은행합병이 급속도로 이루어져 1920년 말에 23개에 달하던 금융기관 본점이 1937년 말에는 10개소로 줄어들게 되었다.

8·15해방 이전의 우리 나라 금융제도도 일본의 식민지정책 또는 태평양전쟁중의 전시동원체제에 맞추어 변천하여 왔으나, 외관상으로는 근대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해방직전 우리나라의 금융기구를 살펴보면 조선은행은 비록 일반은행 업무를 겸영하는 한편 식민지 중앙은행으로서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권의 발행, 지불준비금의 보유, 재할인, 국고업무의 취급 등 전통적인 중앙은행의 고유기능을 수행했다. 조선식산 은행은 일반은행업무 외에 채권을 발행하여 획득한 자금으로 농공업과 군수공업에 대한 장기자금을 공급하는 이른바 장기개발금융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선저축은행은 일반의 저축자금을 흡수하여 일본 국채의 매입과 식산은행의 장기대출자금으로 공급하였으며, 비은행금융기구로서 조선신탁주식회사와 조선무진주식회사가 각각 신탁업과 무진업의 전담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일반은행으로서는 한국계은행인 조흥은행, 조선상업은행의 두 은행과 일본계은행인 제일은행, 안전은행, 삼화은행의 6개 지점이 순수한 상업금융업무를 취급하였다. 금융조합은 금융조합연합회와 더불어 주로 농민과 중소상공업자에 대한 단기대출과 조합원을 위한 소규모의 구판사업에 종사하였다. 이밖에도 한국계 또는 일본계의 보험회사·증권회사 등이 독자적인 금융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으나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제하의 우리나라 은행이 외형상으로는 비록 근대적인 금융기구였으나,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일본의 식민지금융제도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쳤다.


【참고사이트】

1. 일제금융 정책에 대하여

2. 일제시대 금융제도

3. 천일은행 사진


 

 

76. 황국 중앙 총상회(P.108)

1898년 서울에서 창립된 시전상인(市廛商人)의 단체로, 전 군수 구완희(具完喜)가 경성의 각 시전상인을 회원으로 하고 전참정 조병식(趙秉式)을 회장, 전참봉 이종래(李種來)를 부회장으로 추대하여 만들었다. 설립 목적은 외국상인의 침투에 대항하여 민족적 권익을 수호하면서 그 속에서 시전상인의 독점적 이익을 수호,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외국상인의 상행위를 일정지역 내에 제한하고 일본상인·청상인(淸商人) 등 외국상인들로부터 보호되는 한국 시전상인들의 국내 시장영역을 설정하는 것. 둘째 농상공부의 허가인지(許可印紙)를 중앙총상회에서 위탁 관리하여 무명잡세를 일체 혁파하는 것. 셋째 각 항구의 물가의 고저(高低)를 관찰해 조절하는 것. 넷째는 대소 상인을 자본금에 따라 모두 의무적으로 입회하게 해 전국 상업을 통괄하는 일종의 상인협회(商人協會) 또는 상인조합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 상회의 조직체계는 회장 1인, 부회장 1인, 주무(主務) 2인, 서기 4인, 회계 4인, 사무(事務) 30인, 사법(司法) 5인, 경찰(警察) 25인, 검찰(檢察) 5인 등으로 방대하였다. 활동은 위와 같은 상업활동에 그치지 않고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더불어 자유·민권 신장을 위한 운동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의 노륙법(謳戮法 : 처자까지 연좌하여 죽이는 법) 및 연좌법 부활저지, 자강개혁내각 수립요구(自强改革內閣樹立要求), 독립협회지도자 17인 석방운동, 독립협회 복설운동(復設運動), 황국협회(皇國協會)와의 투쟁 등 모든 자주민권자강운동(自主民權自强運動)에 적극 참여하고 지원하였다. 이러한 운동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자 1898년 10월에 독립협회와 함께 외국상인의 침투를 저지하는 상권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2월에 독립협회와 함께 수구파 정부에 의해 탄압, 해산당하여 상권수호운동은 중도에서 좌절하게 되었다.

【참고사이트】

1. 경제적 자주운동

2. 경제적 자주운동과 사료

3. 구한말 보부상 그림


 

 

77. 통감부(統監府)(P.111)

1906년(광무 10) 2월부터 10년(융희 4) 8월까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할 예비공작을 위해 서울에 설치한 기관이다. 1905년 11월 체결한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규정에 따라 1906년 1월 31일자로 일제의 공사관이 폐쇄되고 2월 1일 임시통감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취임함으로써 통감부의 업무가 개시되었다.

즉,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1905년 11월 9일 당시 추밀원 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왕의 특사로 파견하여 동양의 평화와 조선의 안전을 구실삼아 보호조약의 체결을 대한제국 정부에 강요했다. 결국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형식상으로는 대한제국의 내각회의를 거쳐 11월 17일 제2차 한일협약이 통과되었으며, 제3조에 통감정치가 규정되었다. 그 내용은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의 아래에 1명의 통감을 두며,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주재하면서 직접 한국 황제를 만나볼 권리를 가진다. 또한 각 개항장과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방에 이사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 밑에 종래의 일본 영사에게 속하던 일체 직권을 집행하며 동시에 본 협약의 조항을 실행하는 데 일체 사무를 처리한다"는 것으로,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행사의 주체가 통감이라고 규정했다.


  1905년 11월 22일 일본국 칙령 제240호 통감부 및 이사청을 설치하는 건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통감부를 서울에, 이사청을 서울·인천·부산·원산·진남포·목포·마산, 기타 필요한 곳에 두어 을사조약에 의한 여러 사무를 관장하게 할 것이 규정되었다. 부칙에는 당분간 통감부와 이사청의 업무를 일본 대사관과 영사관에서 집행할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같은 해 12월 20일 일본국 칙령 제267호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가 전33조로서 반포되었다. 이에 의하면 한국 경성에 통감부를 두고(제1조), 통감부에는 친임관(親任官)인 통감을 두는데, 그는 일본왕에 직속하고 외교에 관해서는 일본 외무대신을 거쳐 내각 총리대신을, 기타 사무에 관해서는 내각 총리대신을 거쳐 상주하고 재가를 받게 되어 있었다(제2조). 또한 통감은 한국에 대해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일본주차 외국 대표자를 제외한 한국에서의 외국 영사관 및 외국인에 관한 사무를 통할하고, 한국에서의 일본관리 및 관청이 시행하는 여러 업무를 감독하는 지위였다(제3조). 아울러 통감은 한국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한국 수비군 사령관에 대하여 병력 사용을 명령할 수 있으며(제4조), 통감부령을 발하고 금고 1년 이하 또는 벌금 200원 이내의 벌칙을 부과할 수 있는 권리가 규정되었다(제7조). 그리고 이사청의 위치 및 관할구역을 정하는 것도 통감의 직무였다(제22조). 통감부에 소속되는 직원은 칙임관(勅任官)인 총무장관 1명, 칙임 또는 주임관(奏任官)인 농상공부 총장과 경무총장 각 1명, 주임관인 비서관 1명, 서기관 7명, 경시 2명, 기사 5명, 통역관 10명, 판임관(判任官)인 속(屬)·경부·기수·통역생을 합쳐 45명을 두게 되어 있으며(제11조), 통감 유고시에는 한국 수비군 사령관 또는 총무장관이 임시통감의 직무를 대행하게 했다(제13조).


이와 함께 전국 12개 지방에는 한국의 지방관청을 감독하는 그들의 이사청(理事廳)이, 11개 지방에는 그 지청이 설치되고 일제의 경찰도 전국적으로 배치되었으며, 3월 2일에는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정식으로 착임하여 한국 경략을 위한 통감부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한국 수비군을 통수하는 원수의 자격을 겸임했다. 이로부터 소네 아라스케[曾荒助],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세 통감이 거치는 동안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대행함은 물론, 이른바 ‘고문정치(顧問政治)’를 행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그리고 3대 통감을 지낸 육군대장 데라우치는 국권피탈 이후 초대 총독부 총독이 되었다. 1907년 6월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킨 다음 이완용(李完用)의 친일내각을 위협하여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을 체결하고 일본인 차관을 각부에 앉혀 외교와 내정을 통감의 지휘에 따라 집행케 하는 ‘차관정치’를 시행하였다. 이어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고 1909년에는 사법권 및 감옥사무를 빼앗고 이어 경찰권을 위임받는 등 통감부정치 5년 동안 교지(狡智)를 다하여 대한제국을 형해화(形骸化)하였다. 이러한 통감부 체제의 실시로 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명목상 보호국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통감부 설치 이후에도 대한제국 정부를 그대로 두었는데, 이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위장하고 조선민의 반일 기세를 무마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는 통감부를 조선의 국가유신 실현을 위한 기관으로 묘사했으나, 이또한 악독한 식민지배를 감추기 위한 기만술책이었다.

【참고사이트】

1. 통감부에 대해서

2. 통감부사진

3. 통감부 사진모음


 

 

78.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P.111)

 

1907년(융희 1) 2월 대구에서 발단 된 주권수호운동(主權守護運動)으로, 1904년의 고문정치(顧問政治)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借款)을 도입하게 하였고, 통감부는 이 차관을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 등 일제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 설에 충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1905년 6월에 구채상환(舊債償還) 및 세계보충비(歲計捕充費)로 도쿄[東京]에 서 200만 원의 공채(公債)를 모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907년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는 총 1300만 원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액에 비해 세출 부족액은 77만여 원이나 되는 적자예산으로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였다. 이에 전 국민이 주권 수호운동으로 전개한 것이 국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취지로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명칭을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라 개칭하는 특별회에서 회원인 서상돈(徐相敦)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면서부터이다. 발기인은 서상돈을 비롯하여 김광제(金光濟)˙박해령(朴海齡) 등 16명으로, 이들은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를 설치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전 국민의 호응으로 서울에서는 김성희(金成喜)˙유문상(劉文相) 등이 국채보상기 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치하여 운동을 본격화했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帝國新聞)》 《만세보》 등 각종 신문이 후원하여 신문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적극 지원하였다. 이에 기탁되는 의연금 을 보관하고 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통합기관의 필요성에 따라 동년 4월 8일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 금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를 설치, 한규설(韓圭卨)˙양기탁(梁起鐸) 등 임원을 선출하였다. 이 운동이 실 시된 이후 4월 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이고 5월까지의 보상금액은 230만 원 이상이었다. 이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대구에서는 남일패물폐지부인회(南一佩物廢止婦人會)˙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奪還會)가 결성되어 패물을 보상운동에 의연하였으며, 서울에서는 부인감찬회(婦人減餐會)˙ 대안동국채 보상부인회(大安洞國債報償婦人會)가 결성되어 《대한매일신보》에 자발적으로 의연할 것을 게재하는 등 적극 적으로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이외에도 서울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진명부인회(進明婦人會)˙대한부인회˙원일 부인회 등에서 보상금모집소(報償金募集所)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부산에서는 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회(佐川里婦人會減膳義損會)를 조직하고, 진남포에서는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三和港佩物廢止婦人會)를 결성하여 패물을 모아 보상금으로 내놓았다. 당시 사회계층 가운데 최하류층에 속했던 기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진주애국부인회(晋州愛國婦人會)를 결성하는 등, 서울˙평양˙진주 등지에서도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여성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었으며 운동의 영향이 일본에까지 파급되어 유학중인 800여명의 유학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였다. 이와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이 운 동을 극력 탄압 금지하였으며, 송병준(宋秉畯) 등이 지휘하던 매국단체인 일진회의 공격과 통감부에서 국채보상 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방해로 인해 더 이상 진전없이 좌절되었다.


【참고사이트】

1. 국채보상운동에 대하여

2. 국채보상운동의 논문

3. 국채보상운동 취지서

4. 국채보상운동 신문사료


 

 

79. 韓민족의 해외이주(P.116)

 

조선시대 한민족은 한반도라는 생활무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국가에서 해외와의 활발한 교류를 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 생활규범이 해외 교역이나 해외와의 접촉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그러한 사회였고 필요에 의하여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범위는 국가 간의 외교관계 및 그에 따른 소규모의 무역 정도가 고작이었다. 한마디로 하여 자족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와서 이같이 자족적인 조선사회에 인구이동을 포함한 사회적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해외로의 한국 유이민이 시작되는 것은 대개 1850년대 말 혹은 1860년대 초라고 간주된다. 이 시기는 아직 한국이 개항하기 이전의 시기이며 따라서 한국으로부터 유이민이 시작된 것은 반드시 외적 충격으로 인한 영향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보다는 내부적인 문제 때문에 한국인의 해외 유이민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한국에서의 해외 유이민이 시작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이다. 이 경제적이라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갈 수가 있으나 무엇보다도 농업을 위주로 하여 살아가는 조선사회에서 토지가 부족하고 농업의 생산성이 인구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그러한 한계상황에서 유이민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1860년대 초기의 이민이 농업을 위주로 하는 농민들이었고 이들이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여 자기가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찾아서 연해주 혹은 만주 등지로 이주하였던 역사적 사실로부터 확인될 수 있다.


【참고사이트】

1. 해외이주 자료

2. 해외이주 논문

3. 해외이주 지도

4. 해외이주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