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구국운동의 전개(P.76)

 

40. 아관파천(俄館播遷)(P.84)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건양 1)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으로 노관(露館)파천이 라고도 한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세력의 배경으로 조직된 제3차 김홍집(金弘集)내각은 일세일원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군제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살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 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 세력은 친위대(親衛隊)가 의병을 진압하 기 위해 지방으로 분산될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만회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희망에 따 라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협의, 파천계획을 진행하였다. 이들은 미리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50 명과 포(砲) 1문을 서울로 이동하고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밀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관 으로 옮겼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김홍집˙유길준(兪吉濬)˙정병하(鄭秉夏)˙조희연(趙羲淵) ˙ 장박(張博) 등의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포살(捕殺) 명령을 내려 김홍집˙정병하˙어윤중(魚允中)은 군중에 게 타살되고 유길준˙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친일내각은 몰락하고 박정양(朴定陽:首相˙內相)˙이완용(外相˙學相˙農相)˙이윤용(李允用:軍相)˙ 윤용선(尹容善:度支相)˙이범진(法相˙警務使) 등의 친러파 정부 가 구성되었는데, 중심인물은 이범진이었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수습에 힘쓰고, 일본세력으로 개혁하였던 제도를 구제(舊制)로 환원하였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 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공포의 궁전보다는 노국 공관의 일실(一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왕조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종 성(鐘城)의 채광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炭所) 설치 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 (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관파천 1년간은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士官)이 초빙되고, 러시아 무기가 구입되어 중앙 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으며 재정도 러시아인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었다. 1897년 2 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운궁(慶運宮:덕수궁) 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중외에 독립제국임을 선포하였다.


【참고사이트】

1. 아관파천의 진행과정

2. 아관파천 동영상

3.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군인들


 

 

41. 대한제국(大韓帝國)(P.86)

대한제국은 1897년 8월 12일부터 1910년 10월 22일까지의 [조선]왕조 국가의 새로운 명칭이다. 대한제국 성립의 추진은 1884년의 갑신정변 때까지 소급된다. 이 때 개화당의 신정부는 조선국왕과 중국황제를 동등한 의례적 지위에 놓으려고 하여, 종래 국왕을 공식적으로 ‘군주’로부터 ‘대군주’로 호칭하도록 하고, 국왕을 ‘전하’라고 부르던 것을 황제와 마찬가지로 ‘폐하’라고 부르도록 했으며, 왕의 명령을 황제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칙(勅)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국왕도 황제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짐(朕)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개화당의 신정부가 ‘3일천하’로 몰락하여 왕국을 제국으로 높이려던 개화당의 시도는 좌절되고 그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10년 후 온건개화파가 집권하여 갑오경장을 단행하게 되자, 갑오경장 정부는 1894년 7월 29일부터 우선 첫단계로 국왕을 공식적으로 ‘군주’로부터 다시 ‘대군주’로 높여 호칭하도록 하고, 연호는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조선왕조의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갑오경장 정부는 1896년 1월부터 건양(建陽)을 연호로 하여 공식적으로 음력 대신 양력을 사용하도록 하면서 국왕을 ‘대군주’로부터 ‘황제’로 격상시키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본을 비롯한 열강이 이에 반대하여 이 계획은 집행되지 못했으며, 뒤이어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갑오경장 정부가 붕괴됨으로써 개화파의 국왕을 ‘황제’로 격상시키려는 운동은 다시 중단되었다.


조선국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열강들은 다투어 이권을 빼앗아가고 정권은 친로수구파가 농단하게 되었다. 1896년 7월 2일 창립된 개화파의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와 자주적 수구파들은 연합하여 고종의 환궁에 총력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파천한지 약1년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정상을 찾게 되었다. 국왕의 환궁 뒤에 개화파와 자주적 수구파들은 힘을 모아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강화하는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국왕과 정부는 우선 ‘칭제’는 뒤로 미루고 ‘건원’을 하기로 하여, 1897년 8월 16일 ‘건양’을 ‘광무’로 고쳤다. 이어 개화파와 자주적 수구파는 연합하여 ‘칭제’운동을 벌였다. 국왕과 정부는 1897년 9월 27일부터 ‘칭제’를 위한 본격적 준비작업을 시작하여 그 의식장소인 원구단(환丘壇)을 만들고,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황제와 정부는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정하여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대한이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거듭 재천명한 것이며, 자주독립의 강화를 국내와 세계에 알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편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던 국왕을 환궁시켜서 칭제건원하여 대한제국을 성립하는 데까지는 개혁파인 독립협회와 집권한 수구파 사이에 연합과 협조가 비교적 잘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성립 후에는 그 정체 제를 놓고 개혁파인 독립협회파와 친로수구파 사이에 정치적 견해가 크게 대립되어 갈등이 격화되었다. 독립협회는 열강이 이권을 많이 침탈해 가고 이미 침략을 시작한 조건 속에서 대한제국을 전제군주제로 그냥 두는 것은 나라를 취약한 상태로 두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입헌대의군주제(立憲代議君主制)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이권을 빼앗길 때처럼 열강이 황제를 위협하여 황제의 동의만 얻으면 나라의 귀중한 권리가 박탈되고 국권까지 쉽게 빼앗길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독립협회는 전제군주제를 폐지하는 대신, 안으로 모든 국민에게 참정권을 주고 의회(議會)를 설립하여 국정의 중요한 사항과 외국과의 모든 조약은 반드시 의회의 동의와 비준을 얻어야 효력을 발생하는 ‘입헌대의군주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집권한 수구파는 친로정책을 채택하여 러시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독립협회의 입헌대의군주제로의 개혁안을 반대하고 전제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의회를 개설하여 입헌대의군주제를 만드는 것은 불가피하게 민권(民權)을 신장시키고 군권(君權)을 감소하여 황제의 지위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황제는 수구파의 주장에 설득당하여 친로수구파의 전제군주제 주장을 지지하고, 독립협회의 입헌대의군주제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이 성립한 이듬해인 1898년에는 연초부터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둘러싸고 개혁파인 독립협회와 집권한 친로수구파 사이에 첨예한 정치적 논쟁과 대립이 전개되었다.


대한제국의 친로수구파 정부는 1898년 제정러시아가 얼지 않는 해군 기지를 구하는 작업의 하나로 절영도(絶影島:지금의 부산 영도)의 석탄고기지 조차(租借)를 요구하며 압력을 가하자 이에 동의하여 승인 절차를 시작하였다. 독립협회는 이를 알고 격렬히 반대운동을 시작했으며, 1898년 3월 10일과 3월 12일에는 서울에서 대규모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격렬히 규탄하고,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기지 철수, 노한은행 철수,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강화를 결의하였다. 이에 놀란 정부와 열강 사이에 복잡한 외교교섭과 각축 끝에 마침내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노한은행과 군사교관 · 재정고문도 철수하였다.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기지를 돌려보내 왔다. 러시아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저항에 부닥치자, 부산 · 마산 일대에 얼지 않는 해군기지를 설치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요동(遼東)반도를 조차해서 여기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기로 정책을 바꾸었다.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에서 그들의 세력이 후퇴하자, 1898년 4월 25일 니시-로젠협정(Nish-Rosen Agreement)을 체결하여 두 나라가 함께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고문들까지도 대한제국으로부터 요청 받는 경우일 때에도 한국에 파견하지 않기로 협약하였다. 그 결과 1898년 4월부터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국제세력균형이 형성되어 한국의 자주근대화의 실현에 다시 한번 좋은 시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독립협회는 국제세력균형이 이루어진 이 절호의 기회에 자주독립을 지킬 수 있는 근대적 실력을 양성하고, 의회를 설립하여 대한제국을 전제군주국가로부터 입헌대의군주국가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독립협회는 1898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의회설립의 필요성에 대한 계몽운동을 전개하다가, 7월 3일과 7월 12일 두번이나 의회설립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황제와 친로수구파 정부는 두 번 다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는 먼저 친로수구파 정부를 퇴진시키고 개혁파 정부를 수립하여 개혁정부와 의회설립을 협의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1898년 10월 1일부터 12일까지 궁궐을 에워싸고 철야상소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황제는 이 압력에 밀려서 마침내 10월 12일 친로수구파 정부를 해임시키고 박정양(朴定陽), 민영환(閔泳煥)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미국공사는 이러한 정권교체와 개혁파정부의 수립을 대한제국에 ‘하나의 평화적 혁명’이 실현되었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독립협회는 개혁파 신정부와 즉각 의회설립에 합의하고 10월 24일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안을 정부에 제출하였다. 그 골자는 정부 자문기관으로 이름만 있는 중추원을 개편하여 상원(上院)을 설립하는 안이었다. 신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약간의 수정을 가한 다음 1898년 11월 2일 한국역사상 최초의 의회설립법인 ‘중추원신관제’를 공포하였다. 전문 17조로 된 ‘중추원신관제’는 상원설치를 내용으로 하여 의원 50명 중 절반인 25명은 황제와 정부가 임명하고, 나머지 25명은 인민협회에서 투표로 선거하되 당분간 독립협회가 인민협회를 대행하기로 했으며, 중추원의 권한은 입법권 · 조약비준권 · 행정부 정책에 대한 동의권, 동의권을 통한 사실상의 감사권 · 자문권 · 건의권 등을 갖게 하여 근대 의회의 권한을 모두 갖춘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신정부는 1898년 11월 5일을 의회(상원)로 개편된 신중추원 개원일로 정하여 이날 민선의원을 독립협회에서 선거하기로 하였다. 대한제국은 이날을 전환점으로 하여 전제군주제로부터 입헌대의군주제로의 대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친로수구파들은 의회가 설립되고 개혁파정부가 입헌대의군주제를 수립하여 개혁정책에 성공하면 그들은 정권에서 영원히 배제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모략전술을 써서 독립협회는 11월 5일간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尹致昊)를 부통령, 이상재(李商在)를 내무장관으로 한 공화체제를 수립할 예정이라는 전단을 만들어 독립협회의 이름으로 시내 요소에 붙였다. 자기가 폐위된다는 거짓보고에 놀란 황제는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11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킨 다음 다시 친로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수구파정부는 의회설립법을 폐기했으며, 독립협회에도 해산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로부터 입헌대의군주제로 개혁하려던 독립협회 등 개혁파의 운동은 성공 일보 직전에서 좌절당하였다. 이에 항의하여 서울시민들이 봉기해서 11월 5일부터 만 42일간 철야시위로 만민공동회를 전개하면서 보부상단체인 수구파행동대 황국협회(皇國協會)의 공격을 물리치고, 독립협회를 복설하는데 성공했으며, 다시 의회설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세력을 이 기회에 꺽어 버리는 것이 일본의 한국침략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주한 일본공사가 황제에게 친위대의 무력을 사용하여 독립협회의 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할 것을 건의하자 황제 고종이 이를 채용함으로써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대한제국 정치체제 개혁운동은 1898년 12월 25일 완전히 친위대 무력으로 탄압 당하고, 독립협회 지도자 430명이 일시에 체포되었으며,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도 완전히 강제 해산 당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와 친로수구파 정부에 의하여 독립협회와 민민공동회가 해산당한 후, 황제와 정부는 관인(官人)만이 정치를 논할 수 있는 것이며 인민이 정치를 논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므로 백성들의 정치적 집회와 언론과 결사를 엄금한다고 포고하고, 대한제국은 전제군주국이므로 이를 고치려고 하는 모든 종류의 시도는 반역행위로 처벌할 것임을 공포하였다. 이에 대한제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논쟁과 대립은 결국 수구파의 승리와 개혁파의 패배로 귀결되어, 대한제국은 전제군주국가로의 길을 가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정부인 수구파 내각은 1898년의 독립협회 등 개혁파의 체제개혁운동 같은 것이 재대두 되지 않도록 하고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로 굳히기 위하여 1899년 8월 17일 교정소(校正所)로 하여금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하게 하여 황제의 재가를 얻어서 공포하였다. 전문 9조로 된 ‘대한국국제’의 특징은 대한 자주독립한 제국(帝國), 즉 ‘대한제국’이며, 그 정치는 황제가 무한한 군권을 가지는 ‘전제군주제’이고, 이 전제군권을 침해하거나 감손하는 행위는 반역행위임을 선언하면서 전제군주권의 기본내용을 규정한 것이었다. 이 ‘대한국국제’에서 규정된 군권의 기본내용은 육해군 통수권, 입법권 · 사면권 · 행정권, 관리임면권과 포상권, 조약체결권과 사신임면권 등이었다. 즉 이 ‘대한국국제’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는 황제가 입법권 · 행정권 · 사법권 등 3권은 물론 군통수권과 조약체결권 기타 모든 절대권을 장악하도록 규정한 것이었다. ‘대한국국제’의 반포에 의하여 대한제국은 전제조주국가의 체제임을 거듭 확고하게 법제화한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1899년부터의 정책은 ‘대한국국제’의 기본이념과 직결된 방향으로 수립되어 집행되었다. ‘대한국국제’가 제정된 전후부터 러일전쟁에 의하여 대한제국이 일본군의 직접적 간섭 하에 들어간 1904년 2월까지의 대한제국의 주요정책의 기본내용을 간추려 보면, 황제가 육해군을 직접 통수하는 체제에 의거하여 1899년 7월에 군부(軍部) 외에 별도로 원수부(元帥府)를 신설하여 이 부서를 통해서 황제가 직접 서울과 지방의 모든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1900년 6월에는 원수부 내에 육군헌병대를 설치하고 병력은 약간 증가하였으나, 국방보다는 황실 호위병력의 증가에 군사정책이 주로 집중되었다.


둘째, 대한제국 국가와 황제의 위엄과 권위를 높이는 상징의 제작에 많은 정책적 노력이 투입되었다. 대한제국의 국가(國歌)를 제정(에케르트 작곡)하고, 황제의 어기(御旗) · 친왕기(親王旗) 및 군기(軍旗)를 제정하였다. 또한 황제를 대원수로 한 프러시아식 복장과 관복을 제정하여 착용하게 하였다.


셋째, 종래 탁지부 또는 농상공부에서 관할하던 전국의 광산 · 철도 · 홍삼제조 · 수리관개사업은 궁내부 내장원에서 관할하도록 이관시키고, 그 수입은 정부의 예산과 관계없이 황제가 내탕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이 부분의 조세수입과 기타수입은 정부에서 분리되어 황제의 직접적 수입으로 되었으며, 때로는 황실의 직접 광산 등을 관리하고 직영하기도 하였다.


넷째, 상업은 자유상업을 허락하지 않고 정부의 승인을 얻도록 하였으며, 종래의 보부상을 상무사(商務社)로 개편하여 상업특권을 부여하고, 때로는 영업세의 징수권도 상무사에게 허여하였다.


다섯째, 공업은 황실이 직영하는 방직공장 · 유리공장 · 제지공장의 설립을 시도하고, 일반 민간인의 공장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황실이 직영하려는 업종이외의 부문에 대해서는 이를 민간에서도 제한하지 않고 허가해 주려고 했으나 민간공업은 발흥하지 못하였다.


여섯째, 농업부문에서 양전(量田)사업과 지계(地契)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1898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미국인 측량기사까지 초빙 해다가 1899년부터 양전사업을 실시했는데, 원래는 전국에 실시할 계획이었으나 함경북도 · 함경남도 · 평안북도 · 평안남도 · 강원도 등에는 전혀 시행하지 못하고, 그 밖의 도에서는 궁방전과 역둔토가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양전사업이 시행되었다.


대한제국은 1901년에 양지아문을 혁파하고 지계아문(地契衙門)을 설치하여 토지측량조사와 함께 토지소유권 증명을 발급하였다. 대한제국의 지계사업은 토지소유권 증명의 근대적 제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영전사업과 지계사업을 모두 실시한 지방은 그리 많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양전 · 지계사업은 대한제국 성립 후 정부가 가장 많은 자금과 인력을 투입하여 근대적 토지소유권 증명 제도를 수립한 대사업이었으며, 대한제국의 정책 중에서 가장 큰 업적이었다. 양전 · 지계사업의 문제점은 이 사업의 목적이 처음부터 황실의 궁방전과 정부의 역둔토를 중심으로 실시되면서 조세와 지대 징수의 증가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자주의 지배권이 강화되고 농민의 토지가 다수 궁방전 등에 혼입 · 탈입되어 황실 · 정부와 농민 사이에 끊임없이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났으며, 토지개혁의 성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한제국의 정책 중에서 큰 문제점을 가졌던 것이 대외정책이었다. 대한제국의 외교정책은 강대한 러시아에 의뢰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다분히 친로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러시아에게 여러 가지 이권을 빼앗겼으며, 여기에 반발하는 일본을 무마하기 위하여 일본에게도 여러 가지 이권을 빼앗겼다. 대한제국은 1899년 3월 동해안의 포경권을 러시아에 빼앗겼고, 1900년에는 마산항의 일부 토지를 러시아에 조차하였다. 1902년에는 러시아 · 독일 · 프랑스 3국의 한국에서의 이권탈취모의가 있었고, 1903년에는 러시아가 용암포(龍巖浦)를 점령하고 그 조차(租借)를 요구해 왔다. 또한 대한제국은 1900년 일본에게 경상도 · 함경도 · 경기도의 어업권을 빼앗기고, 같은 해에 인삼위탁판매권을 허여했으며, 1901년에 직산금광채굴권을 빼앗겼고, 1902년에는 일본의 제일은행권을 법화로서 한국에서 통용하도록 허용하였다. 또한 대한제국은 1901년에 프랑스에게 평안북도 창성광산채굴권을 허여하였다. 대한제국은 국제세력균형이 이루어진 시기에 자주독립 강화를 위하여 성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한 친로수구파 정부는 국제세력균형이 깨어질 때 독립을 지킬 실력과 대책을 제대로 수립하여 실시하지 못한 것이었다.


한편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으로서 획득한 요동반도를 러시아 · 프랑스 · 독일의 ‘3국간섭’으로 청국에 부득이 반환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에서 일본세력이 러시아세력에 밀리게 되자, 대한제국을 침략하여 지배하에 두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전쟁준비에 국력을 총동원하였다. 일본은 1902년 7월 영일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하자, 전쟁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전쟁을 일으킬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1903년 4월 러시아의 용암포점령사건 이후에는 러시아와 일본의 긴장은 급속히 격화되어 누구의 눈에도 러일전쟁이 급박하게 다가왔음이 보이게 되었다. 대한제국정부는 러일전쟁 발발이 급박해 오자, 1904년 1월 22일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였다. 일본은 1904년 2월 8일 인천항에 정박하고 있는 러시아군함 2척을 선제공격하여 격침시킨 다음, 일본군을 대대적으로 대한제국에 불법 상륙시키고, 2월10일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2월23일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일본군이 한국내의 군략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하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1904년 4월 3일에는 대한제국에 일본군의 2개사단 병력으로 된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을 편성하여 상주시켰다. 일본은 이 군사력으로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고 대한제국의 권리들을 조직적으로 침탈하였다.


일본은 이어 1904년 7월 ‘군사경찰훈령’을 만들어 한국의 치안을 일본군이 담당한다고 대한제국에 통고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치안권을 빼앗았다. 또한 일본은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를 대한제국정부에게 강제체결시켜서 재정 · 외교 · 군사 · 경무 · 학부 · 궁내부 등에 일본인(외교만 친일 미국인 Stevens, D. W.)고문들을 임명하여 대한제국의 국내행정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게 하였다. 일본은 1905년 7월 일본 제일은행으로 하여금 대한제국의 국고를 관장케 했으며, 4월에는 통신권을 빼앗아 갔고, 10월에는 관세사무를 빼앗아 갔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1905년 9월 5일 포츠마츠 강화조약을 체결한 후, 특명전권대신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11월 9일 한국에 파견하여 ‘을사5조약’의 체결을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게 강요하였다.


그 내용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일본통감이 한국내정을 감독한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포위와 무력 위협하에서 내각회의에서는 5대신은 이에 굴복했으나, 황제는 끝까지 이를 승인도 비준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조약은 국제법상 성립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을사5조약’이 체결되었다고 공포한 후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6년 2월1일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한국인들은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일으켜 일본의 이러한 침략에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특히 의병운동은 격렬한 항일무장항전을 전개하여 일본의 병탄계획을 지연시키기까지 하였다. 일제는 일본군을 한반도에 증파시키기까지 하면서 무력으로 이를 탄압하고, 1910년 8월 22일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이라는 것을 강제체결하여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함으로써 대한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참고사이트】

1. 대한제국 출범의 과정

2. 대한제국 동영상

3. 대한제국 군인사진


 

 

42. 최제우(P.78)

 

본관 경주(慶州). 호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초명 복술(福述)·제선(濟宣).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1844년(헌종 10) 구도행각에 나선 지 10년 만에 울산(蔚山) 유곡(裕谷)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 1856년(철종 7)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기도하고, 18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했으며, 1859년 다시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한 끝에,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천(天)·인(人)을 대도(大道)의 근원으로, 성(誠)·경(敬)·신(信)을 도행(道行)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농민·천민·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전파했다. 1862년 도수사(道修詞)·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4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최시형(崔時亨)을 북접(北接) 대도주로 앉히고 8월에 도통(道統)을 계승하여 교주로 삼았다. 1864년(고종 1)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3월에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순도하였다. 1907년(융희 1) 신원되었다. 저서에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등이 있다.


【참고사이트】

1) 문화관광부 선정인물

2) 동학가사 소개


 

 

43. 보은집회(報恩集會)(P.78)

 

1893년(고종 30) 3월 11일부터 4월 2일까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기치로 보은 장내리(帳內里)에서 열린 동학집회로, 이 집회를 전기로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은 사회개혁과 반외세투쟁으로 전개된다. 1892년 11월 삼례집회와 1893년 2월의 복합상소(伏閤上疏)가 성과없이 끝나고 동학에 대한 지방 관아의 탄압이 계속되자, 3월 10일 교주 최제우의 제례를 위해 간부들이 모인 청산군 포전리 김연국의 집에서 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해 동학교도들을 보은 장내리에 집결시키는 통유문을 보냈다. 이때 통문을 발함과 동시에 각 접주(接主) 중에서 유력한 자를 골라 각 포(包)의 대접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포명을 주어 교구의 구분과 연락을 원활히 하도록 했다. 장내리는 이해초부터 교주가 대도소를 두고 주재함에 따라 각 처의 교도들이 찾아오게 되어 잘 알려진 장소였고, 관헌의 지목과 추적에 쫓긴 교도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일단 집결 지시가 떨어지자, 동학교도들은 매일 각처에서 각각 수백 명 단위로 몰려와서 며칠 만에 수만 명에 달했다. 각처에서 온 핵심 간부들은 교주와 함께 주요방침을 의논하여 결정했다. 당시 동학교도들은 장내리 뿐 아니라 전라도의 금구(金溝)·원평(院坪)에도 집결했다. 원평집회는 교단의 지도가 있던 장내리의 세력보다 더 급진적인 세력으로서 전봉준 등이 주도했는데, 이들은 보은취회에 참여한 남접과 연합하여 보은취회를 종교적인 성격에서 정치적인 성격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3월 11일 보은 관아에 붙인 격문은 종교문제를 떠나 왜양(倭洋)과 맞서려는 자세가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보은군수는 우선 조정에 그 실상을 알린 뒤 향리를 시켜 동학 지도자들을 만나게 하고 자신도 직접 가서 자세한 사정을 조사했다. 장내리는 집들이 옥녀봉 기슭을 둘러싸듯 들어차 있었는데, 그중 큰 기와집에 동학 도소가 설치되었다. 동학교도들은 각기 긴 장대에 깃발을 만들어 걸고, 자갈을 모아서 성을 만들었으며, 낮에는 천변에 모였다가 밤이 되면 부근 마을에서 흩어져 잤다. 돌성 안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쳤는데, 이러한 종교의식은 각지에서 모인 교도들을 단결시켰다. 또 관군이 와서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각 조직은 군사편제처럼 움직였으며, 북산과 남산에 깃발을 꽂고 40~50명이 지켰다. 집결한 교도의 수는 기록마다 다른데, 1명당 돈 1푼씩 걷어서 모두 230냥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2만 3,000명 이상이 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양식은 각기 직접 며칠분씩 가지고 와서 해결하기도 했고 또 교단에서 식량조달을 책임진 사람들이 준비하기도 했다.

보은 관아와 감영 그리고 정부에서는 동학교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으로 하여금 보은에 관군을 주둔시키게 하는 한편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와 선무사로 임명하여 수습하게 했다. 어윤중은 동학교도들의 대표와 만나 척양왜척 항목을 중심으로 집회의 의도에 대해서 자세히 들었다. 그리고 외세배척의 주장을 고종에게 상달하겠다고 약속하고 해산을 종용했다. 고종도 윤음을 거듭 내려 해산을 명했다. 이와 함께 장위영 군대 600명이 동학교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3월 30일 청주에 도착했다. 동학교단의 지도부가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해산을 결정하자, 동학교도들은 4월 2일 장내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20일간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지쳐 있던 동학교도들은 각기 고향을 향해 출발했고, 교주 최시형도 상주 방면을 향해 떠났다.→ 교조신원운동


【참고사이트】

1) 보은문화원

2) Tv 특강자료


44.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P.81)

1894년(고종 31) 갑오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이 제시한 개혁안으로 갑오농민전쟁은 1894년 1월 고부지방의 농민들이 수탈에 대항하여 봉기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농민군은 1894년 3월 20일 무장으로 가서 봉기한 이후 4월 23일 장성에서 중앙군의 선발부대를 물리치고, 북상하여 4월 27일 전주성에 입성했다. 전주성에 입성한 후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조선에 파견되고 이에 대응하여 일본군도 들어오자, 농민군은 5월 8일 정부군과 전주에서 화약을 맺으면서 폐정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때 전봉준이 27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제시했는데, 현재 14개 조항이 전봉준판결선고서에 전해지고 있으며, 내용은 ① 전운소를 혁파할 것, ② 국결(國結)을 가하지 말 것, ③ 보부상의 작폐를 금지시킬 것, ④ 도(道) 안의 환전은 옛 감사가 이미 거두었으므로 민간에게 다시 징수하지 말 것, ⑤ 대동미를 바치기 전에는 각 포구에서 잠상(潛商)들의 쌀 매매를 금지시킬 것, ⑥ 동포전(洞布錢)은 매 호마다 봄·가을 2냥씩으로 정할 것, ⑦ 탐관오리를 파면시킬 것, ⑧ 위로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국권을 농락하는 자들은 모두 쫓아낼 것, ⑨ 관장(官長)이 된 자는 그 관할지역에 묘지를 쓸 수 없게 하며 또한 논도 사지 못하게 할 것, ⑩ 전세(田稅)는 전례에 따를 것, ⑪ 집집에 부과하는 잡역을 줄일 것, ⑫ 포구의 어염세를 혁파할 것, ⑬ 보세(洑稅) 및 궁방전을 폐지할 것, ⑭ 각 고을의 수령들이 민간 소유의 산지에 와서 늑표(勒標)하고 투장(偸葬)하지 못하게 할 것 등이다.


또한 이 당시 농민군이 양호순변사 이원회에게 원정(原情:폐정개혁안) 14개조도 요구했는데. 이는 국내 폐정개혁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① 삼정(三政)을 통편례에 의해 준행(遵行)할 것, ② 진고(賑庫)는 곧 한 도(道) 안의 백성의 피와 땀이니 혁파할 것, ③ 전보(電報)는 민간에게 폐가 많으니 혁파할 것, ④ 연육(沿陸)의 각각 신설 세전은 모두 혁파할 것, ⑤ 환미(還米) 중에 옛 감사가 거두어들인 것은 다시 거두지 못하게 할 것, ⑥ 각 읍의 탐관오리는 모두 파면시킬 것, ⑦ 각 읍에서 관용으로 필요한 물자 밖의 가마련(加磨鍊)은 모두 혁파할 것, ⑧ 각 읍의 각종 창고에 필요한 물품은 시가에 따라 사들이게 할 것, ⑨ 각 읍의 아전임채(衙典任債)는 모두 시행하지 못하게 할 것, ⑩ 각 포구의 미곡무역상은 모두 금지시킬 것, ⑪ 윤선(輪船) 상납 이후에 매 결 당 가마련 쌀이 3~4말에 이르니 곧바로 혁파할 것, ⑫ 각 읍의 진부결(陳浮結)은 영원히 장부에서 뺄 것, ⑬ 각 처의 임방명색(任房名色)은 모두 혁파할 것, ⑭ 궁방의 윤회결(輪回結)은 모두 혁파할 것 등이다.


전주화약으로 많은 농민군이 해산했으나,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농민군 지도부는 전라도 53개군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직접개혁에 착수했다. 그후 전라도 감사 김학진이 집강소를 공식적으로 인정함에 따라, 그와 농민군 사이에 폐정개혁 12조항이 합의되었다. 당시 민간서정(民間庶政)을 주도할 때 실시했다는 폐정개혁안 12개 조항은 ① 각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묵은 감정을 씻어버리고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의 그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 ③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벌할 것, ⑤ 노비문서는 태워버릴 것, ⑥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씌우는 평양립(平壤笠)을 벗게 할 것, ⑦ 청춘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 ⑧ 무명잡세는 모두 폐지할 것, ⑨ 관리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위주로 할 것, ⑩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⑪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난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⑫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등이다. 이 내용은 사회적 측면에서 신분제의 전면적 폐기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혁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봉건체제의 기초인 지주전호제의 전면적 폐기까지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토지의 평균분작을 주장하여 궁극적으로는 농민적 토지소유를 지향하고 있었다. 또한 여기에는 소생산자인 농민이 외국상인의 상권 침해를 저지시키려는 점으로 보아 반침략의 방향도 보인다. 집강소 활동시기에 농민군의 개혁사업이 봉건적 사회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그 밑바탕에는 봉건체제 전반에 걸쳐 변혁의지와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이 있었다.


 

 

45. 집강소(執綱所)(P.80)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이 호남지방 의 각 군현에 설치하였던 농민 자치기구로 농민군의 집강소는 1894년 2월 무장봉기 이래 점령지 군현에 대 한 계속적인 장악과 그곳의 여러 가지 민정(民政)을 처리하려고 접주(接主)나 접사(接司)를 둔 데서 비롯되었 다. 이러한 집강소 체제는 농민군이 전주성을 물러난 뒤인 7월 초 전봉준(全琫準)과 전라도관찰사 김학진(金鶴鎭)이 농민군측과 정부측이 협력하여 도내의 안정과 치안질서를 바로잡고 그 구체적인 실행방법으로서 군현 단 위로 집강소를 두기로 하는 관민상화책(官民相和策)에 합의함으로써 전면화되었다. 그리하여 전봉준은 전주성 안에 농민군의 총본부인 전라좌우도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한 뒤 군현단위로 집강을 두도록 하여 집강소 체제 를 갖추었다. 그 결과 나주, 남원, 운봉 등 몇 곳은 양반 지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설치되지 못한 곳도 있지 만, 호남 대부분의 고을에 집강소가 농민군에 의해 설치되었다. 원래 집강소는 지방행정을 원활히 수행하려고 수령의 보조기구로서 면리 단위에 근원을 두었던 집강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후의 집강소는 농민군의 지방 통치 조직이었다. 각 고을의 관아안에 설치된 집강소에는 1인의 집강 아래 서기, 성찰(省察), 집사, 동몽(童蒙) 등의 임 원을 두어 각 지방의 대민 행정업무를 처리하였다. 각 군현에는 비록 군수나 현령, 현감 등의 지방관이 있었지만 농민군이 호남 일대를 장악한 상태에서 그들의 지위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집강소가 사실상 지방행정을 좌 우하였다. 집강소는 주로 관민상화책에 따라 무기관리와 치안유지 그리고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의 폐정개혁활동 을 벌이였지만, 곳에 따라서는 독자적으로 부정한 지방관과 아전들에 대한 반관투쟁(反官鬪爭), 지주들에 대한 반부민투쟁(反富民鬪爭) 그리고 양반을 대상으로 하는 신분해방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지방행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집강소는 그해 10월 농민군이 2차 봉기를 하였을 때 농민군을 조직, 동원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고, 이후 농민군이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집강소 체제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집강소는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당시 농민의 계급적 입장을 대표하면서 폐정개혁의 실시를 지향한 농민군의 지 방 자치기구였다.


【참고사이트】

1) 집강소 운영형태

2) 집강소 정강


 

 

46. 의병전쟁(義兵戰爭)(P.82)

 

Ⅰ.의병전쟁이란

한말의병전쟁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일제의 침략에 무력으로 항쟁한 민족운동을 말한다. 1894년 이후 조선인들은 반침략을 시대적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의병을 조직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항쟁한 것이다. 1894년 갑오변란과 청일전쟁으로 시작된 의병전쟁은 국망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국망 이후에 살아남은 의병이 일제하 만주일대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됨으로서 국권침탈 이후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정신적인 연원이 되었다. 따라서 의병전쟁은 한국민족운동의 主潮로서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Ⅱ. 의병의 개념

한말의 의병은 민군으로 충의정신 입각하여 자발적으로 외적의 침입에 무장항쟁한 군사집단을 말한다. 즉 의병을 규정하는 첫번째 요인은 의병의 주요 이념이 주자학 정신에 기반하고 있어야 하며, 둘째로 그 투쟁의 대상이 외세에 있는 것이다. 즉 동학농ㅁ니군이 충의군적 성격을 갖기는 하지만 이들은 주자학 질서의 침해를 막고자 하는 척사논리가 없으며 투쟁대상이 관군이었으므로 의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한 의병은 군주의 원한을 풀고자 분기한 자들이기 때문에 국망 이후 일부지역에서 활동한 잔존의병세력들은 이미 충의 정신을 발현할 대상인 임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면 이들은 의병이라기보다는 독립군으로 보아야 한다.


Ⅲ. 의병전쟁의 시기구분

의병전쟁의 시기구분은 주로 시간의 원근과 주도세력의 성격의 차이로 갑오․을미의병을 전기의병, 을사․정미의병을 후기의병으로 구분하는 2시기 구분법과 간지를 사용한 을미․을사․정미의병으로 분류하여 3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한 1909년 일제의 소위 ‘남한대토벌 작전’ 이후 의병의 퇴조와 독립군으로 전환과정에 주목하여 전기(1894-1895)․중기(1904-1905)․후기(1907-1909)․전환기(1909-1914) 의병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4시기 구분법은 의병의 하한을 1914년으로 하고 있어 1910년 국망 이후 의병활동은 끝난 것으로 보아 크게 전기(1894-1895)․ 중기(1904-1905)․ 후기(1907-1910) 의병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사이트】

1. 항일의병 소개

2. 근대의병운동 계보

3. 의병전쟁 지도


 

 

 

47. 독립협회(獨立協會)(P.84)

 

갑신정변의 망명자로서 11년 동안 미국에서 근대사회를 체험한 徐載弼(서재필)은 조국에 「자유와 독립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포부를 가지고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1896년 4월에 순 한글로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7월에는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그 목적은 「자유주의·민주주의적 개혁사상」을 민중에 보급하고, 민중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徐載弼·尹致昊(윤치호)·李商在(이상재)·南宮檍(남궁억) 등 근대적 개혁사상을 가진 新지식층을 지도부로 하고, 서울의 시전상인 등 시민층을 주요 구성원으로 했으며, 학생층·노동자층·부녀층 등 광범한 사회계층을 포괄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국민의 모금으로 건립하는 창립사업을 통하여 국민대중에게 독립의지와 애국정신을 고취했으며, 강연회·토론회와 신문·잡지를 통하여, 국민대중을 근대지식과 국권·민권사상으로 계몽하여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의 에너지를 사회변혁에」동원코자 하였다.


1898년에 들어 러시아에 내정간섭 문제로 정치·사회활동을 본격화했다. 3월10일에 독립협회는 1만여 명의 군중을 종로광장에 동원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집회인 萬民共同會(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이때 李承晩(이승만)은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즉시 철수시키고, 한국의 자주권리를 지키자』는 결의안을 채택하여, 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해고케 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러시아는 당시 한국의 자주를 가장 위협하는 존재였으므로, 독립협회의 자주국권운동의 제1의 표적은 러시아였다. 독립협회는 민중집회에 힘입어,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요구와 목포·진남포 일대의 매도요구를 저지했고, 러시아의 재정진출을 위한 한러 은행도 폐쇄케 했으며, 일본의 석탄고 기지도 환수케 했다.  

 

한편 독립협회의 거대해 가는 영향력에 위협을 느낀 정부와 이권침탈에 방해받은 외세의 결탁에 의하여, 5월14일 徐載弼은 미국으로 사실상 추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尹致昊·李商在를 중심으로 독립협회는 강력하게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의 기본방향은 개혁내각을 성립시키고 민선의회를 만들어, 민권을 보장하고 국권을 수호할 수 있는 근대적 자강개혁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1898년 9월 이후로 독립협회는 참정·개혁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 시기에 독립협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여, 자타가 인정하는 민중대표기관으로 성장했다.  


지도력과 성숙한 시민세력 없는 근대화는 불가능

9월11일 金鴻陸(김홍륙)의 고종독살미수사건을 계기로,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의 위력으로 10월12일에는 수구내각을 퇴진시키고,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수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시 미국공사는 「민중의 힘에 의한 내각의 교체」를 「평화적 혁명」이라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10월29일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에 정부대신을 합석케 하여 官民共同會(관민공동회)를 개최했다. 관민공동회의 핵심 과제는 의회제도를 마련하는 것으로서, 중추원을 의회식으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결국 11월2일에는 민선의회의 성격이 가미된 중추원 官制가 반포되었다. 이 의회식 중추원 관제의 반포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회설립법의 제정을 의미하며, 제한된 의미에서나마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 참정권의 공인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민권의 개념조차 모르던 민중을 계몽하여 자주적 근대화운동과 근대적 정치운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자유민권의 민주주의 사상을 어느 정도 민중 저변에까지 파급시켜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주주의가 기능화하게 했다. 또한 종래의 배외적 자주운동과 다른 차원에서 자유민권운동과 결합된 자주국권운동 곧 민주주의를 내포한 근대적 민족주의운동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독립협회의 민주주의적 민족주의운동은 한말의 애국계몽운동으로계승되어 일제시대의 민족운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3·1 운동 직후 나타난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모두 공화제를 표방하게 된 것도 그 인맥과 사상면에서 독립협회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은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유민권의 확립과 자주국권의 수호 및 근대개혁의 달성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보면 실패한 운동이었다. 고종과 수구세력, 일본 등 외세의 야합에 의한 무력탄압, 급진 소장파의 과격한 극한투쟁, 그리고 나아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지도자들의 지도력의 부족과 시민세력의 미성숙 등이 실패의 요인이었다.  

  이러한 독립협회 개혁운동의 실패는, 집권 수구세력이 정권유지를 위해 외세와 결탁하여 역사발전에 부합되는 재야 개혁운동을 말살했을 때, 그 국가와 함께 그 정권 자체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혁명운동이 아닌 개혁운동인 경우에, 과격한 극한 투쟁은 정부의 탄압과 동시에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나아가 독립협회 개혁운동의 실패는, 통일적이고 효율적인 지도력 없는 민중운동의 성공은 기대할 수 없으며, 성숙한 시민세력이 없는 근대 개혁운동의 성공도 기대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참고사이트】

1. 독립협회에 대하여

2. 독립신문 사료

3. 독립문영상

4. 서재필 사진


 

 

48.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P.84)

 

조선말기 정치․사회단체인 독립협회가 1898년 10월 28일 종로 네거리에서 정부 대신들의 참여하에 가졌던 옥외 정치집회. 독립협회는 1896년 7월에 창립되어 정부의 외국 의존 정책에 반대하고, 자주 독립과 내정 개혁을 표방하여 활동하였는데, 신문 간행과 토론회 개최와 같은 국민 계몽 활동, 이권 침탈에 반대하는 반외세 운동, 부패 무능한 특정한 정부 대신들의 사임을 요구하며 악법의 폐지 및 의회 설립 등을 주장한 정치 운동으로 그 활동을 크게 말할 수 있다. 협회의 의회 설립 청원으로 중추원 관제를 개편하여 처리하려는 논의가 진행되던 중 1898년 10월 28일 종로에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독립협회는 정부 대신들에게 옥외 정치 집회 참석을 요구하였다.

정부 측은 처음에 집회 장소가 조칙과 어긋나니 독립관으로 옮기자고 하면서 참석을 회피하였으나 독립협회가 철야 농성을 전개하자 다음날에는 결국 참석하여 본격적인 관민공동회는 원래 예정일이었던 28일을 하루 넘겨 10월 29일 열리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것이 바로 다음의 헌의 6조였다. 즉 ① 외국인에 의존하지 않고 관민이 동심 합력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 것, ② 광산․철도․석탄․삼림 및 차관․차병과 모든 정부와 외국사이의 조약에는 각 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으로 서명 날인하여 시행할 것, ③ 어떤 세금을 막론하고 전국 재정은 모두 탁지부에서 관장하여 다른 부서나 사회에서는 간섭할 수 없으며, 예산 결산을 인민에게 공표할 것, ④ 어떤 중죄인이라도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주고 난 다음 재판을 통해 판결할 것, ⑤ 황제는 칙임관을 임명할 때 의정부에 자문하여 거기서 과반수를 얻은 자를 임명할 것, ⑥ 장정(章程)을 반드시 지킬 것 등이다. 당시 관민공동회에 참석한 대신들도 이 문서에 서명하였고 이를 고종에게 상주하였다. 고종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5개조의 조칙을 추가하여 발표하였다. 독립협회는 헌의 6조와 조칙 5조의 실시를 볼 때까지 해산하지 않기로 하여 사흘을 더 철야하다가 11월2일에 가서야 해산하였다.


【참고사이트】

1. 관민공동회에 대하여


 

 

49. 광무개혁(P.86)

 

광무 연간에 실시된 개혁으로 1897년 성립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완전한 자주적 독립권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 러, 일 전쟁이 일어난 1904년까지 열강의 세력 균형 기에 자주적으로 단행한 내정개혁이다.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지향하여 외세 의존적이고, 외국제도의 모방에서 비롯되었던 갑오개혁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집중하는 데 목적을 두어 군제(軍制)에 대 한 전면적이고 근대적인 개편을 하였는데, 서울의 방비와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親衛隊), 시위대(侍衛隊),호위대(扈衛隊)의 개편과 창설은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각국의 대원수례(大元帥例)에 의하여 황제 가 육,해군을 친히 통솔하고, 국방, 용병(用兵),군사에 관한 각종 명령권과 군부 및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대한 지 휘 감독권을 가진 원수부(元帥府)가 창설되었다. 또한 헌병대,포병, 공병, 치중병(輜重兵:군대의 화물을 담당하는 병사),군악대에 대한 새로운 관제가 마련되었으며, 육군법률(陸軍法律),육군법원(陸軍法院),육군감옥(陸軍監獄) 등이 창설되었다. 지방군제 역시 전국의 지방군을 진위대(鎭衛隊)로 통합 개편하는 한편, 무관학교 관제(武官學校官制)를 새로이 반포하여 1898년 무관학교가 개교되었다.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제(大韓國制)가 반포되었고, 훈장제도(勳章制度)가 창설되었으며, 국가(國歌) 및 각종 기(旗) 등이 제정, 발표되었다. 청국을 비롯한 각국과의 통상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었으며, 북간도관리(北間島管理)를 설치하여 북간도의 이 주민을 보호하고, 도문강(圖們江:두만강) 이남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킬 것을 꾀하기도 하였다. 사회 경제적인 개 혁으로서 농상공부에서 주관하던 홍삼(紅蔘)의 제조 및 광산사업과 탁지부 주관의 둔토(屯土)가 궁내부(宮內府) 로 이관되었고, 내장사(內藏司)는 내장원(內藏院)으로 개편되어 왕실 재정수입이 증가하게 되었다. 재정상의 적자를 보완하기 위하여 시작된 백동화(白銅貨)의 주조는 화폐제도가 문란하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전 결(田結)의 정확한 파악을 위하여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여 양전사업(量田事業)을 실시하였으며, 지계제도(地契制度)를 채택하여 지계아문(地契衙門)에서 토지문권(土地文券)을 발급하였다. 한편 개항 후 20년간 외 국 자본주의 상품의 생활필수품 화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근대적 상공업을 진흥, 육성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 직접 공장을 설치하기도 하였고, 주요 회사에 투자를 하거나 보조금을 지급하여 상공업 진흥에 힘썼다. 또한, 민간 제조장의 근대기술수용을 장려하고 기술자 장려책을 강구하는 등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기술교육 정책으로서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산업기술을 습득시켰다. 그 결과 인공양잠전습소 (人工養蠶傳習所) 직조권업장(織造勸業場) 한성제직회사(漢城製織會社) 등 많은 근대적 회사들이 설립되었고, 철도,운수 부문에서도 근대적인 기술과 기계가 도입되었다. 상업의 진흥책으로는 한성은행(漢城銀行),대한천일 은행(大韓天一銀行),대한은행(大韓銀行) 등의 금융기관이 설립되었다. 교육면 역시 실업교육을 위주로 하여 체신사무요원의 양성을 위한 우편학당(郵便學堂),전무학당(電務學堂)이 설립되었고, 상공인 양성을 위한 상공업 학교와 의사양성을 위해서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가 설립되었다. 한편으로 재판소의 위치와 관할구역이 재조정되었으며, 재판소 구성법(裁判所構成法)을 개정하여 고등재판소를 평리원(平理院)으로 고치고, 황족의 범죄를 다스리기 위한 특별법원(特別法院)과 순회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의료사업으로는 광제원(廣濟院)이 설립되고 전염병 예방규칙이 반포되었으며, 진휼기관(賑恤機關)으로 혜민원(惠民院)과 총혜민사(總惠民社)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추진되던 광무개혁도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재진출함에 따라 중단되었다. 보수파에 의해 추진된 갑오, 을미개혁을 답습한 것이었으나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하여, 비교적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참고사이트】

1. 광무개혁의 성격

2. 광무개혁 사진


 

 

50.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P.85)

 

1898년에 열강의 이권침탈(利權侵奪)에 대항하여 자주독립의 수호와 자유민권의 신장을 위하여 조직·개최되었던 민중대회로 1896년 2월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에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정권을 장악한 친러파들은 의정부제도를 복구 시켜 전제 군주제를 부활시켰으며, 러시아를 비롯한 구미열강에게 광산·철도·삼림·어장 등의 각종 이권을 양여하였다. 1897년 2월 개혁파와 자주적 수구파의 노력으로 국왕을 환궁시키고, 이어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하여 대외적으로 완전한 자주독립을 재선언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러시아는 부산 절영도(絶影島;지금의 영도)의 석탄고기지 조차(租借) 요구, 황실 호위를 위한 시위대(侍衛隊) 장악, 러시아인을 한국 재정고문으로 임명하는 등 식민지화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에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구국정치운동을 선언하는 강경한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렸는데, 외국의 군사권·재정권 간섭을 규탄하고, 대외적으로 완전한 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며, 대내적으로 입헌정치를 주장하면서 탐관오리의 제거와 내정개혁을 요구하고, 이를 위해서 적극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하였다.


초기 만민공동회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힘으로 제정러시아의 침략정책을 배제하고 자주독립을 공고히 하기로 하였다. 이에 1만여 명의 민중들이 참가하여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환을 결의하였다. 3월 11일 정부는 이 만민공동회의 결의에 따르기로 결정하고 러시아공사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하였다. 3월 12일에는 독립협회와 직접 관계없는 서울 남촌(南村)에 거주하는 평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러시아와 모든 외국의 간섭을 배제, 자주독립의 기초를 견고히 할 것을 주장하였다. 러시아측은 두 차례의 만민공동회의 결의와 각국의 반응을 고려,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와 절영도 석탄고기지 조차 요구의 철회를 한국정부에 통고하여 왔다. 이로써 러시아정부는 그들의 군사기지를 랴오둥반도[遼東半島(요동반도)]에 설치하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일본도 그들의 월미도(月尾島) 석탄고기지를 한국정부에 돌려보내 왔다. 이로부터 재정권·군사권이 복귀되고, 대한제국으로서는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 독립을 강화하게 되었다.


만민공동회의 형태

대한제국의 개혁파들은 제정러시아세력 철수운동에 성공한 뒤 친러수구파 정부를 규탄하면서 자주민권 자강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1898년 10월 박정양(朴定陽)·민영환(閔泳煥)의 개혁파 정부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시기의 만민공동회에는 독립협회가 주최·조직하는 만민공동회와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만민공동회의 2가지가 있었는데, 민중의 독자적 만민공동회는 상설기구가 아니었고 임시위원들이 수시로 민중의 결의사항을 집행하였다.


후기 만민공동회

1898년 10월 개혁파 정부가 수립된 뒤 개혁파들은 신정부와의 협의로 중추원(中樞院)을 개편하여 의회를 설립하기로 하였으나 친러수구파들은 독립협회 등이 의회를 설립하여 황제를 폐위하려 한다고 고종에게 모략적인 보고를 함으로써 고종은 11월 4∼5일에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림과 동시에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키고 다시 친러수구파 정부를 조직하였다. 1898년 11월 5일 이상재(李商在) 등 17명의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6일간 철야시위를 하였다. 10일에 17명이 석방되었으나 만민공동회는 해산하지 않고 ① 독립협회 복설(復設) ② 모략배의 재판 ③ 헌의 6조 실시를 요구하였다. 고종과 수구파들은 21일 황국협회(皇國協會) 아래에 조직되어 있는 보부상들로 하여금 만민공동회를 기습하게 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보부상들을 공격한 뒤 만민공동회의 해산 조건으로 ① 황국협회계 인물 8명의 처벌 ② 보부상의 혁파 ③ 시민이 원하는 인재의 등용 등 3개 요구조건을 제시하였으나, 고종과 수구파가 실천 약속을 지키지 않자 26일 다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에 고종과 수구파는 독립협회의 복설을 허락하고 50명의 중추원의관을 임명하였는데, 그 중 17명이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회원이었다. 중추원이 개관하는 날, 만민공동회계 의관들이 국정을 담당할 인물 11명을 선출, 황제에게 천거하기로 결의하였다.


해산

고종이 만민공동회의 운동과 중추원의 대신급 인물 11명의 천거에 의한 새 개혁정부수립요구에 직면하고 있던 중에 민영기(閔泳綺) 등 수구파들은 군대로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주장하였다.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공사의 반응을 타진한 뒤 12월 23일 시위대에 의한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명하였고, 25일 11가지 죄목을 들어서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불법화시키고 해체령을 포고하였으며 430여 명의 지도자들을 체포·구금함으로써 42일간 철야시위로 전개된 만민공동회는 외세를 업은 친러수구파의 탄압으로 해산 당하였다.


【참고사이트】

1. 만민공동회에 대하여

2. 만민공동회사진


 

 

51. 원구단(圓丘壇)(P.86)

 

원구단은 제왕이 하늘에 제사 드리는 단으로서 이름 그대로 단을 둥근 언덕 모양으로 쌓은 것이다. 이렇게 원단(遝壇)을 쌓고, 그 위에 신위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 고종이 황제위에 나아간 것은 건양 2년 10월의 일인데, 이에 앞서 황제 즉위의 의식 절차 등을 마련하면서 정부에서는 이 원구단(**丘壇) 축조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즉 그 해 9월 21일에 장례원경(掌禮院卿) 김규홍(金圭弘)이,


「천지(天地)를 합제(合祭)하는 일은 사전(祀典)에 있어서 제일 큰 것인데 원구(**丘)의 의제(儀制)를 아직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증전(曾前) 남교(南郊)에서는 다만 풍운(風雲) 뇌우(雷雨)(신)만을 향사하였는데 단유(壇**) 폐급(陛級)이 척도에 맞지 않으니, 제사 의식에 있어서 실지 미안한 일입니다. 동지절(冬至節) 향사에 있어서 그대로 일을 볼 수 없는 일이니 개축하는 등의 절차를 위의 재가(裁可)를 바라옵니다.

호천상제(昊天上帝) · 황지기(皇地祇) 신위판(神位版) 및 종향(從享)하는 일월(日月) 성신(星辰) 풍우 뇌우 악진(嶽鎭) 해독(海瀆)의 신패(神牌) 조성과 생뢰(牲牢) 변두(**豆)의 제반 의문(儀文)을 널리 역대의 예(禮)를 상고하여 일정한 제도가 있어야 하겠는데, 신원(臣院)으로부터 감히 편리할 대로 할 수 없아오니 시(時) · 원임(原任) 의정(議定)과 밖에 있는 유현(儒賢)들에게 하순(下詢)하여 처리하심이 어떨가 하옵니다.」

고 아뢰니 왕이, 천지를 합제하는 일이 막중하다. 경(卿)은 영선사장(營繕司長)으로 더불어 상지(相地) 택정(擇定)하여 복일(卜日) 축단(築壇)하며, 제반의문(諸諸般儀文)은 서울에 있는 시, 원임 의정에게 수의(收議)하여 들이라 하였다.

따라서 원구단 축조의 준비는 진행되었으며, 왕명에 의하여 장례원경 김규홍(金圭弘)은 영선사장 이근명(李根命)과 함께 상지관(相地官) 오성근(吳聖根)을 데리고 원구단 설치할 곳을 성심(省審)하여 남별궁(南別宮) 옛 터인 남서(南署) 회현방(會賢坊) 소공동의 해좌사향(亥坐巳向)의 곳을 길지(吉地)로 정하고 경계를 정하였으며, 10월 1일에는 단을 쌓는 여러 가지 일을 영선사로 즉시 거행하게 하였다. 또 시역(始役)하는 날을 음력 9월 7일로 정하며 경복궁 근정전에서 정위(正位) 및 종향(從享)의 위판(位版)을 조성하게 하니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달 7일에는, 다른 종묘 · 사직의 경우와 같이, 원구단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으로 사제서(祠祭署)를 설치하기로 하고 제조(提調) 1인, 영(令) 1인, 참봉(參奉) 1인의 직제를 반포하기도 하였다.


한편 10월 11일까지는 정위(正位) 서사관(書寫官) 민병석(閔丙奭), 종향위(從享位) 서사관(書寫官) 이범찬(李範贊) 및 영선사장(營繕司長) 이근명(李根命), 기사(技師) 김완식(金完植) 등에 의하여 위판(位版)과 단의 조성이 끝났으며, 12일(음 9월 17일)에는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위의(威儀)를 갖추어 새로 조성된 원구단에 나아가 친히 천지에 고제(告祭)한 다음 황제위에 나아가니 이로부터 원구단은 국가에서 높여 받드는 중요 시설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 해인 광무 2년에는 다시 이 원구단 경내 북쪽에 천 · 지 신위를 모시는 황궁우(皇穹宇)를 짓기로 하였다. 따라서 8월에는 상량문(上樑文)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윤용선(尹容善)[의정부 참정(參政)]이, 서사관으로 서정순(徐正淳)(법부대신)이 임명되고, 음력 7월 18일(양 9월 2일)을 정초(定礎) 길일로 택정하여 공사를 시작하게 하였으며 9월에는 공역비 32,875원을 예비비 중에서 지출하여 공사가 진행되었다. 화강암으로 기단(基壇)과 난간을 축조하고 8각 3층의 정교한 구조로 이루어진 이 황궁우의 건축은 이듬해까지 완공되었으며 그 해 즉 광무 3년 12월 22일에는 동지일 예제(例祭)를 겸하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신위를 하늘의 배위로 모시는 배천대제(配天大祭)를 거행하고 대사(大赦)를 반포하니 최근에 있었던 한 성사(盛事)였다. 그리고 광무 6년(1902)에 고종황제의 망육(望六) 및 즉위 40년을 경축하는 양대 행사가 진행됨과 함께 다시 황궁우 동쪽에 고종황제의 성덕(聖德)을 북 모양으로 된 돌에 새겨 송축(頌祝)하는 석고단(石鼓壇)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양위, 순종의 즉위와 함께 일제의 세력이 만연됨에 따라서 황제국(皇帝國)으로서 하늘에 제사드리는 원구단의 의례도 크게 간소화하였다. 융희 2년(1908) 1월에는 종묘 · 사직 대제(大祭)와 함께 원구단 대제시에도 3헌관(獻官)을 1인으로 겸행(兼行)하게 하고 그 아래의 제집사(諸執事)도 혹 겸행, 혹 감수(減數)하였으며 그 해 7월에는 다시 제사를 연 2차로 제한하였다.


【참고사이트】

1. 원구단 동영상

2. 원구단 사진및 설명


 

 

52. 양지아문(量地衙門)(P.87)

 

1898년(광무 2) 전국의 양전(量田) 사업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1898년 7월 6일 칙령 제25호로서 전24조의 '양지아문직원급처무규정'(量地衙門職員及處務規定)을 반포하여 직제를 마련했다. 양지아문은 양전을 지휘·감독하는 총본부로서 총재관(摠裁官) 3명, 부총재관 2명, 기사원 3명, 서기 6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총재관은 경무사(警務使)·한성판윤(漢城判尹)·도관찰사를 지휘할 수 있었다. 총재관에는 박정양(朴定陽)·심상훈(沈相薰)·이도재(李道宰) 등이 임명되었다. 1899년 4월 양전에 종사할 실무진으로 각 도에 양무감리(量務監理)를 두고 현직군수나 양전에 밝은 사람을 선임하여 측량·양안작성을 책임지게 했다. 각 군에는 양무위원을 두어 감리의 감독을 받게 하는 한편, 양무위원과 학원(學員)들이 작성한 양안초안을 재검토하기 위해 아문령으로서 조사위원을 두었다. 기술진으로는 수기사(首技師)·기수보·견습생을 두었는데, 초대수기사에는 미국인 크럼이 초빙되었다. 2년 6개월 동안 전국 124군에 양전을 시행했지만, 1901년 심한 흉년으로 계획의 1/3만 시행한 채 중단되었다. 1902년 지계아문(地契衙門)에 흡수·통합되었고, 다시 1903년 탁지부 양지국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양전·지계사업도 실질적으로 중단되었다.


1. 양지아문에 대한 독립신문기사


 

 

53. 지계아문(地契衙門)(P.87)

 

조선 말기 관청. 대한제국 시기에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면서 양지아문(量地衙門)을 두었는데, 이를 1901년(고종 38) 지계아문으로 바꾸었다. 이듬해 양지아문으로 사무를 이양했다가 1903년(고종 40) 탁지부로 합쳐졌다. 관원은 총재 1명, 부총재 3명, 감리 13명, 위원 4명, 주사 6명 등을 두었고 지방 13도에도 감독관이 있었다. 분과로는 기밀사항, 관리신분에 대한 사항, 공문서 작성 등을 맡은 문서과, 공문의 접수와 발송, 공문서의 편찬과 보존, 지권도서의 간행과 관리 등을 맡은 서무과, 아문의 경비와 제수입의 예산·결산회계, 재산과 물품관리 등을 맡은 회계과가 있었다. 탁지부로 합쳐지기까지 전국 94개 군의 양전사업을 실시하였다.


【참고사이트】

1. 지계문서 사진


 

 

54. 간도(P.88)

 

청나라는 19세기 말기부터 간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여 군대까지 투입하고 지방관까지 두었으나, 한국도 그에 강력히 맞서 영토권을 주장하였으므로 간도영유권 문제는 한·청 간의 오랜 계쟁문제(係爭問題)였다. 일제는 1905년(광무 9)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청나라와 간도문제에 관한 교섭을 벌여 오다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撫順]탄광 개발 등 4대 이권을 얻는 대가로 한국 영토인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① 한·청 양국의 국경은 도문강(圖們江:두만강)으로써 경계를 이루되, 일본정부는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동시에 청나라는 도문강 이북의 간지(墾地)를 한국민의 잡거(雜居)구역으로 인정하며, ② 잡거구역 내에 거주하는 한국민은 청나라의 법률에 복종하고, 생명·재산의 보호와 납세, 기타 일체의 행정상의 처우는 청 국민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③ 청국정부는 간도 내에 외국인의 거주 또는 무역지 4개처를 개방하며, ④ 장래 지린[吉林]·창춘[長春] 철도를 옌지[延吉] 남쪽까지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會寧) 철도와 연결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것으로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한 기지를 마련하는 동시에, 남만주에서의 이권을 장악하고, 조선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폐쇄하는 대신 일본총영사관을 두어 한국인의 민족적 항쟁운동을 방해하는 공작을 하게 되었다.


【참고사이트】

1. 간도의 역사

2. 간도 동영상

3. 간도영유의 정당성

4. 간도 시가지사진

5. 간도 이주민 사진


 

 

 

55. 백두산 정계비(P.88)

 

1712년(숙종 38) 백두산에 세운 조선과 청(淸)나라 사이의 경계비를 말한다. 정계비라고도 한다. 원래 백두산은 고구려나 발해의 시기에는 우리나라 땅이었으나, 그후 우리나라의 판도가 반도로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1437년(세종 19)에 설치했던 6진(六鎭)으로 백두산과 그 동서의 두만강·압록강이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되었다. 그때 두만강 상류의 무산지방(茂山地方)은 미개척지역으로 남아 있었는데, 1674년(현종 15)에 이곳에 무산진을 설치하여 두만강 내 지역 전부를 조선의 영역으로 확정했다.


이리하여 조선과 청과의 국경은 압록·두만의 두 강으로써 이루어졌으나, 그 원류인 백두산 근처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고 두 강 상류의 북안은 일종의 공백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만주에서도 특히 동부의 장백산(長白山:백두산) 일대 삼림지대는 인삼·모피·진주 등 특산의 보고(寶庫)였으며 지린[吉林]의 영고탑(寧古塔)은 이러한 특산물 집산지의 하나였다. 이에 날로 융성해지는 청나라는 이 지역을 한인(漢人)·몽골인 등 주변 민족의 침범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제방을 만들고 그위에 양유를 심어놓았으며 요소마다 변문(邊門)을 만들어 출입자를 감시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조선과의 접경에도 해당되었다. 그러는 사이 조선인은 국경을 넘어 산삼을 채취하거나 토지를 개간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월경사건(越境事件)은 자주 발생하여 문제시되었고, 청이 칙사(勅使)를 보내어 국왕과 동석하여 죄인을 심리한 일도 3번이나 있었다. 한편 청나라도 우리나라의 국경을 넘는 월경침입이 자주 있었으며, 때로는 수십 명이 작당하여 우리 측의 관원과 군병을 납치한 일도 있었다.


1677년(숙종 3)에는 청 강희제(康熙帝)가 장백산, 즉 백두산을 그 조상의 발상지로서 관심을 갖고, 내대신(內大臣) 무묵납(武默納)에게 명하여 장백산 지방을 답사시키고 다음해에 신하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6년 후에 다시 치제했다. 1691년 조선의 조정은 청대신 5명이 영고탑을 경유하여 장백산에 가서 그곳을 관찰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크게 놀랐다. 그뒤 1710년에는 위원(渭原)의 이만기(李萬技)가 국경을 넘어 삼을 캐며 그 도중에 만주인 5명을 타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백두산을 귀속하려는 청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다.


따라서 청은 2년 뒤에 1712년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내어 국경문제를 해결하자는 연락을 해왔다. 조선에서는 참판(參判) 권상유(權尙游;1656~1724)를 접반사(接伴使;조선시대 중국 사신(使臣)을 영접하기 위하여 둔 임시 관직)로 보내었으나, 청의 사절이 함경도로 입국함에 따라 다시 한성부우윤으로 있었던 참판 박권(朴權;1658~1715)을 접반사로 출영(出迎)하게 하였다. 이때 조선측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 자신이 조선측의 접반사 군관(軍官) 이의복(李義復), 감사군관(監司軍官) 조태상(趙台相), 통관(通官) 김응헌(金應縉) 등만을 거느리고 산정에 올라가 거의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즉, 모극등은 압록강에 이르러 10일간 강을 따라 올라가 후주(厚州)에서 조선의 사신과 만났고, 다시 4일 후 혜산진에 이르러 여기서부터 육로를 택했다. 이때 목극등은 조선의 접반사인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傅)는 늙고 허약해 험한 길을 갈 수 없다며 무산에 가 있게 했다. 그리고 조선접반사군관·차사관(差使官)·통관(通官) 등과 더불어 백두산의 꼭대기에 이르러 그해 5월 15일에 정계비를 세운 후에 무산으로 갔다.


  그 지점은 백두산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 km, 해발 2,200 m 지점이었으며, 비면(碑面)에는 위에 대청(大淸)이라 횡서하고 그 밑에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라 각서(刻書)하고 양쪽의 수행원 명단을 열기하였다. 그 뒤 조선인은 계속 봉금(封禁)을 무시하고 간도에 이주하여 개척하였으며, 한인(漢人)도 이 지방에 이주하여 서로 섞여 살게 되었다. 1881년(고종 18) 청나라에서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징(吳大砒)  을 보내어 간도 개척에 착수하고 1882년(고종 19), 토문강 이북 ·이서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청국인으로 간주하겠다고 통고하고, 그 이듬해 간도를 개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부분의 조선인을 철수하도록 요구하였다.

1883년 조선 측은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1848~1896) ·김우식(金禹軾)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고, 그 뒤 9월에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李重夏), 종사관 조창식(趙昌植)을 보내어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으나, 청은 토문(土門)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여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 뒤  조선 정부에서는 1902년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에 파견하여 주민을 위무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그를 북간도관리사로 임명하며 이를 주한청국공사에 통고하는 한편, 포병을 양성하고 조세를 올려받아 계속해서 간도영유권을 관철하여 나갔다. 그러나 일본이 1905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에 따라 간도문제는 청 ·일 간의 현안문제로 넘어가고, 일본은 1907년(융희 1) 간도에 통감부(統監府) 출장소를 설치하여 군대 ·헌병 ·경찰관을 파견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으나 그 근본목적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어떻든 일본은 처음에 ① 간도는 한국의 영토이며, ② 한국인을 중국의 재판에 굴복시키지 말 것, ③ 중국관헌의 대(對)한국인 세금징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④ 중국관헌이 발하는 대(對)간도의 모든 법령은 통감부 파출소가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결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 개축 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하여, 남만주에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지방을 넘겨주고 말았다. 이 비는 만주사변(滿洲事變) 때 일제가 철거하였다.


【참고사이트】

1. 백두산 정계비에 대해서

2. 백두산 정계비 사진


 

 

56. 을사조약(乙巳條約)(P.91)

 

1905년(광무 9)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 탈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으로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 제3차 러˙일협약(露日協約) 체결 을 계기로 러시아와 일본이 타협하여 일제의 한국 진출은 경제적인 면에 주력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 본이 청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한국 전체의 철도부설권 을 점차 획득하고 광산˙삼림˙어업˙항시(港市)˙온천 등 에서 얻은 갖가지 이권과 함께 한국의 금수출˙상무역(商貿易)까지 장악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무렵 만주를 점령하던 러시아에 대해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한 영국 과 일본이 철수요구를 하는 등 만주를 둘러싼 국제적인 관계는 더욱 미묘하게 진행되었다. 1903년 4월 러시아군 이 만주의 마적과 함께 한만국경(韓滿國境)을 넘어서 용암포(龍岩浦)를 강제 점령하자 일본은 즉각 러시아의 철수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러시아는 오히려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점령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일본 측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 아래서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 중립국임 을 해외에 선포하였다. 2월 6일 39도 선 문제와 만주문제로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여 8일 뤼순 [旅順]에서 첫 포성이 울렸고 이튿 날 새벽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 서울로 입성하고 10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함 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상태 에 들어갔다. 러˙일전쟁의 개시와 함께 23일 일본의 강요로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가 체결되었다.

의정서는 6개조로서 제2,3조에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영토보전을 보증한다고 되어 있으나 기타 조항은 모 두가 주권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다. 러˙일전쟁 이 일본 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한국정부는 5월 18일자의 조칙(詔勅)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는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할애하였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심화시켜 8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 사이에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일제의 한국재정에 대한 직 접적인 간섭이었다. 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려 전 문 15조, 추가 약관(約款)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포츠머스회담). 한국에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 조약은 제국주의 열강 의 이권에 따라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고 열강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 되었다. 포츠머스회담의 내용상 전승(戰勝)의 대가로 부족한 것을 한국에서 보충하자는 일본 자 체 내의 여론은 곧 1905 년 11월 9일 일본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하야시공사와 주한 일본군사령관 하세가 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보호’를 강행하려 하였다.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은 이토와 하야시를 거쳐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로 전달 되었다. 이토는 하세가와 와 함께 전후 3차례에 걸쳐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11월 16일 정동(貞洞)의 손탁호텔에 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이어서 그들의 강요 아래 5시 간이나 계속된 17일의 어 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일본 헌병 수십 명의 옹위 아래 회의장에 들어 가 대신 각각에게 가부의 결정을 강요하였다. 이때 고종은 다만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 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했 을 뿐이며 한규설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대신 (度支部大臣) 민영기(閑泳綺)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었고,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농 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모두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는데, 이들을 을사오적 (乙巳五賦)이라 한다.


이토는 강제 통과된 협약안을 궁내대신 이재극(李載克)을 통해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한 뒤 동일자로 한국 외 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등을 중요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인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신문사 사장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약 체결에 대한 거 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李相卨)의 상소를 비롯하여 종 1품 이유승(李裕承), 법부주사(法部主事) 안병찬(安秉瓚), 원임의정대신(原任議政大臣) 조병세(趙秉世), 시종 무 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閉泳煥), 전참찬(參贊) 최익현(崔益鉉), 특진관(特進官) 이근명(李根命), 종묘제조 (宗廟提調) 윤태흥(尹泰興), 승지(承旨) 이석종(李奭鍾), 유림(儒林) 이건석(李建奭) 등이 강경하게 상소하였다. 한편 민영환은 상소로도 조약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국민에게 경고하면서 자결 순국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一等兵) 김봉학(金奉學), 주영공사(駐英公使) 이한응(李漢應) 등도 죽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어 전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주(洪州)에서 거병한 것을 비롯하여 전라도에서 최익현이, 충청도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이, 경상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그 외 이근택˙ 이완용˙이지 용 등을 암살하기 위해 개별적인 거사를 하기도 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주한일본공사 관을 철폐하여 신설한 통감부로 이양하고 각지에 있던 영사관은 이사청(理事廳)으로 개편하는 <통감부 및 이 사청관제> 를 1905년 12월 20일에 공포함으로써 서울에는 통감부가 개설되고 개항장과 주요 도시 13개소에 는 이사청이, 기타 도시 11개소에는 지청이 설치되었다. 통감부는 종래 공사관에서 맡았던 정무(政務) 이 외에도 조선보호의 대권, 관헌의 감독권, 그리고 병력동원권도 보유하였다. 또한 조선의 시정을 감독하거나, 어떠한 정책의 시행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됨으로써 통감부는 명실공이 조선보호의 최고 감독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1906년 프랑스 파리법과대학의 교수인 F.레이는 을사조약이 협상대표에 대한 고종의 위임장과 조약체결에 대한 비준서 등의 국제조약에 필요한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데다가 한 글과 일본글로 된 조약문의 첫 머리에도 조약의 명칭조차 없이 그대로 비어 있어 국제조약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일본은 그 법적 유효성을 주장하고 있어 그 후에도 계속 논란의 여지가 되고 있다.


【참고사이트】

1. 을사조약문

2. 을사조약에 대해서

3. 을사조약의 성격과 의의

4. 을사조약 체결장소

5. 을사조약 무효선언서

5. 을사오적 사진

6. 친일파의 친일행위 뉴스동영상

7. 친일파 후손의 땅찾기

8. 과거청산운동 뉴스영상


 

 

57. 단발령(斷髮令)(P.90)

 

을미사변 이후 새로이 조직된 김홍집 내각은 양력을 사용하고 소학교를 설치하며 군제를 변경하고 단발령을 내려 이를 강행하는 등 급진적인 내정개혁을 추진했다. 그중 단발령에 관해서는 고종이 먼저 서양식으로 이발을 했으며 내부대신 유길준은 백성에게 강제적으로 상투를 자르게 했다. 그러나 을미사변 이후 극도의 배일적인 국민감정을 무시하고 행해진 이 개혁은 일반 백성들로부터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서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함부로 하면 불효가 된다는 유교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겨오던 선비들이 크게 반발했다. 더구나 김홍집 내각은 친일내각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단발령이 일본의 배후조종으로 나온 것으로 판단한 이들은 더욱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유인석(柳麟錫)·이소응(李昭應)·이춘영(李春永)·김복한(金福漢) 등이었다. 그결과 정부는 이들 의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친위대를 파견해야만 했다. 이 와중에서 이루어진 고종의 아관파천을 계기로 김홍집 친일 내각이 붕괴되고 김홍집은 단발령과 민비의 죽음으로 흥분해 있던 백성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참고사이트】

1. 단발령에 대해서

2. 단발령과 을미의병

3. 단발령 사진


58. 신돌석(P.91)

 

신돌석은 1878년 11월 3일 경북 영해군 남면 복평리(현재 영덕군 축산면 부곡리)에서 신석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돌석이 태어난 영해는 이필제 난의 중심지였다. 1870년부터 약 1년 동안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이 난은 삼남민란 이후 최대의 반(反)봉건 농민운동이었다. 따라서 이곳은 농민들의 반봉건 의식이 유독히 드높은 고장이었기 때문에 신돌석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신돌석의 가문은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인 신숭겸의 후예로서 입신출세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중인신분으로 하락하여 대대로 영해부의 아전 노릇을 하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신돌석 대에 와서는 평민신분으로까지 전락하였다고 하니, 반봉건 의식이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여기에 더하여 신돌석이 태어난 시기는 개항 직후 외세의 침탈이 고조되던 시기였고, 또 성장하던 시기는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일제가 혈안이 되어 가던 시기였으므로 반봉건 의식과 함께 반일 민족의식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일제는 이즈음 세력 만회를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일본공사관과 일본인 거류민의 보호를 명목으로 이 해 5월 7일 한국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민씨정권의 원병 요청으로 5월 5일 이미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던 청나라와 일제의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이후 일제는 성환전투와 평양전투 등에서 청군을 연파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국에서 몰아내고, 이듬해 3월 23일 청나라와의 강화조약으로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끝냈다. 이 조약에서 일제는 청나라에게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시킴으로써 한국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주장을 일축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일제는 개항 이후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청나라와 벌여오던 각축전에서 일단 승리할 수 있었다.


국제정세가 이렇게 전개되어 가자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실각한 민씨정권의 핵심인 명성황후(明成皇后)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제를 견제함으로써 재집권의 기회를 노렸다. 즉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상한 것이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매개로 진행된 이 계획에 크게 당황하게 된 것은 일본 정부였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요동반도의 할양권 포기로 인해 정부에 대한 불만과 성토가 비등하였는데, 한국에서조차 러시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날이면 정부의 붕괴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계획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었다. 근대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이 만행은 우리 민족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럼에도 일제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8도를 23부로 바꾼 뒤 친일파들을 지방장관으로 임명하고, 양력 사용과 단발령을 강요하면서 우리나라를 반(半)식민지 국가로 만들어 갔다.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신돌석은 1896년 19세의 나이로 그동안 사귀어온 동지들을 규합하여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신돌석은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그에 따라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되었다. 그리고 남한산성에서 용맹을 떨친 김하락 의진이 경주을 거쳐 이 해 7월 초 영덕방면으로 이동해오자 이들과 연합작전을 벌였다. 즉 7월 5일 신돌석의 영해의진은 김하락, 의진과 연합하고, 7월 9일 유시연의 안동의진과도 합세하여 대규모의 연합의진을 형성한 것이다. 이들 연합의진은 김하락 의병장의 주도 아래 영덕관아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고, 7월 14일 영덕에 도착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적군 수백 명이 일시에 기습하였으므로, 신돌석과 김하락의병장 등은 연합의진을 이끌고 이들에 대항하여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김하락의병장은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면서 강물에 투신, 순국하고 말았다. 이에 신돌석을 비롯한 의병들은 훗날을 기약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역량을 키워갔다. 이후 신돌석은 10여 년 동안 전국 각지로 지사·의사 등을 찾아다니면서 구국 방안을 논의하고, 재기 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이 가운데는 허위의 제자로 훗날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박상진, 유인석의진의 유격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강년, 군대해산 직후 원주진위대 장병들을 이끌고 의병항쟁을 수행하였던 민긍호 등이 있었다. 아울러 이 시기 신돌석은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활빈당과 함께 항일 투쟁을 전개하여 많은 일화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는 경북 청도지방을 지나면서 일본군들이 전선 가설 작업을 하는 광경을 보고는 적개심을 억누르지 못해 그들이 세워 놓은 전신주를 뽑아 버리고 단숨에 일본군 공병 4∼5명을 처치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부산항에 정박 중인 일본 상선을 습격하여 파손시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조국의 운명은 점점 더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청일전쟁을 통해 청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일제는 이제 러시아와 세력을 다투어 갔다. 그러더니 결국 일제는 1904년 2월 8일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또한 러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일제는 1905년 7월 29일 미국과의 카스라·태프트 밀약, 같은 해 8월 12일 영국과의 제2차 영일동맹, 그리고 같은 해 9월 5일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인 포츠머tm조약 등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일련의 거래를 통해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공인받았다. 그 뒤 곧 바로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각료들을 총칼로 협박하여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을 준(準)식민지 상태로 만들어 갔다. 즉 일제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하고, 이듬해 2월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까지 간섭하면서 우리나라의 완전 식민지화를 위해 박차를 가해 갔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신돌석은 애국충정을 감추지 못해 평해 월송정에 올라 시를 지어 조국의 운명을 한탄하며 의병 재기의 속내를 내비치기도 하였다. 그러더니 1906년 3월 13일 신돌석은 향리인 영해 복평리에서 아우인 신우경과 함께 활빈당으로 활동하던 3백여 명의 농민들을 모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신돌석은 이 때 영릉의병장이라 쓴 기치를 앞세우고 의병항전을 시작하였고, 신돌석의 부친은 전답 등 가산을 처분하여 무기와 군량을 구입하는 등 의병활동을 열성적으로 지원하였다. 신돌석은 거병 직후 영해 군대동에 주둔하면서 우선 의병들을 모집하기 위해 부근의 여러 지방에 격문을 띄웠다. 이에 신돌석은의 명성을 듣고 많은 청장년들이 몰려와 의병에 투신하였으므로 의병부대의 규모는 3,000여 명으로 커졌고 사기는 충천하였다. 이 같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신돌석은은 먼저 영해부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격파한 뒤, 그 해 4월에는 울진 장흥관으로 이동하여 정박중이던 일본 선박 9척을 격침시켰다. 또한 6월에는 1,000여 명의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평해부근에서 대구 진위대 및 원주 진위대 관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신돌석은의 의병부대는 삼척·강릉·양양·간성 등 동해안 일대, 영양·청송·의성·봉화 등 경북 내륙지방, 정선·원주 등 강원도 내륙지방에서 일본군수비대와 여러 차례 격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신돌석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신돌석의 의병부대는 11월에는 경북 일월산·백암산·대돈산·동대산 등지로 남하하여 활동하였고, 또 문경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강년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1월 11일 신돌석은의 의병부대와 이강년 의병부대는 연합하여 순흥을 공략한 뒤, 그 소식을 듣고 대구로부터 일본군 지원부대가 진격해 오자 즉시 울진방면으로 후퇴하는 등 신출귀몰한 무력 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이듬해인 1907년 봄에는 중군장 백남수와 김치헌 등 용맹한 휘하 장병들과 함께 영덕 일대의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일진회 등 친일 세력들을 대거 처단하여 그 기세를 더욱 높였다. 그리고 8월 20일 신돌석은 300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경북 영양읍을 공격하여 일본군 헌병분파소와 관아를 소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에도 신돌석은은 경북 영양과 문경, 그리고 영해와 평해 등지에서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후치다(藤田)·기쿠치(菊池) 대위 등이 인솔하는 일본군토벌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평민의병장으로서 신돌석은의 이러한 신출귀몰한 명성과 전과는 일반 농민들의 항일 민족의식과 민중의식을 한층 고양시켜 갔고, 또한 이후 평민의병장들이 대거 출현하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 따라서 신돌석은의 활약은 이 해 8월 대한제국의 중앙 시위대와 지방 진위대의 강제 해산에 따른 해산 군인의 의병 대열 합류와 서로 상승 작용하면서 유림 중심의 의병운동을 국민전쟁으로 확대 발전시켜 간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신돌석의 명성은 영남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평민의 처지였지만 신돌석은 이 해 11월 이인영·허위·이강년 등 양반 유림이 중심이 되어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 의병의 연합부대로 13도창의군을 결성할 때,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교남창의대장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신돌석은의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저지와 방해로 이에 합류하지는 못하고 영남일대에서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말 경북 일월산 등지에서 휴식하며 전력을 보충한 신돌석은의 의병부대는 1908년 초부터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리하여 신돌석은의 의병부대는 안동의 유시연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영남지역의 의병항전을 주도하여 갔다. 이 시기 신돌석은 의병부대를 몇 개의 소부대 단위로 편성하여 산간벽지를 근거지로 하는 유격전을 본격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는 강화된 일본군의 추격작전을 피하고, 수시로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전술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이같은 전술 변화가 효과를 발휘하여 일본군은 신돌석은의 의병부대가 활동하는 지역에서는 군경 분파소를 설치하지 못하였고, 정찰활동도 낮에만 하는 형편이었다. 그 뒤 겨울이 다가오자 신돌석은 그동안의 전력 손실을 보충하여 다음해 봄에 재기할 것을 기약하고 잠시 의진을 해산하였다. 이후 신돌석은 가족들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명년의 재기를 위해 여러 곳의 동지들을 찾아다니던 중, 11월 중순 영덕 눌곡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신돌석은 우연히 옛 부하였던 김상렬을 만나 그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김상렬은 동생 김상근과 함께 신돌석에게 술과 고기를 권해 만취하게 한 뒤, 깊은 잠에 빠진 신돌석을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그들은 신돌석은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신돌석은 자신보다도 굳게 믿었던 부하의 손에 살해되어, 1908년 11월 18일 31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이후 정부에서는 신돌석은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사이트】

1. 신돌석 논평

2. 신돌석장군 기념관


 

 

59. 헤이그 특사(P.92)

 

1907년(광무 11) 고종이 이준(李儁) 등에게 친서 와 신임장을 휴대시켜서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하게 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 체 결이 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하려 꾀한 일로 1905년 일제가 한국의 황제를 비롯해서 각료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외교권을 박탈하여 외국에 나가 있는 사신(使臣)을 소환하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실권을 하나하나 박탈하여, 대한제국의 국체는 형해화 (形骸化)하기에 이르러 국가는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이럴 즈음인 1907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 가 26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는 정보가 들어와, 4월 고종은 전 의정부 참찬(參贊) 이상설(李相卨)과 전 평리원 검사(平理院檢事)이준에게 회의에 참석할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폐하는 한국이 무고하게 화를 당하고 있는 정상을 생각하여 짐(朕)의 사절로 하여금 한국의 형세를 만국회의에 설명할 수 있게 한다면 만국의 여론에 한국의 원권(原權)이 회복될 수 있을까 기대하며…”라는 회의참석의 주선을 부탁하는 내용의 친서를 휴대하게 하여, 이들 대표에게 만국회의에 나가 당시 한국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도록 하였다. 이들 대표는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도착하여 러시아황제에게 친서를 전하고 이곳에서 전 러시아공사관 서기 이위종(李瑋鍾)과 동반하고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만나, 고종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의 전권위원으로 회 의에 참석할 것과 일본의 협박 때문에 강제 체결된 한일보호조약은 마땅히 무효화되어야한다고 역설, 이 조약의 파기를 회의 의제에 상정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제는 고종을 감금하다시피하고 그들의 현지 공관과 회의 대표를 통해 한국대표의 회의참석 방해공작을 폈다. 이 때문에 의장 넬리도프는 책임을 형식상의 초청국인 네덜란드에 미루고, 네덜란드는 을사조약은 각국 정부도 이미 승인하였으니 한국 정부에는 자주적인 외교권을 승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 대표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하였다. 이 당시 서울에서 《코리아 리뷰》를 발행하며 배일(排日)운동을 하던 미국인 B.허버트[轄甫]가 헤이그로 와서 한국 대표를 후원하며 회의 참석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신문인 W.스테드의 주선으로 한국대표는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젊은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한 연설의 전문(全文)은 ‘한국을 위하여 호소한다’  라는 제목으로 세계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이에 밀사 중 이준은 울분한 나머지 그곳에서 분사(憤死)하였다. 이 사건의 배후에서 고종의 근신(近臣)으로서 러시아에 망명 한 전 러시아공사 이범진과 허버트 등 외국인이 관계하였으며, 고종 자신도 러시아 황제에게 회의참가 주선을 요청하고 밀사의 활동비를 지출하기까지 하였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며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토는 7월 18일 그들의 외무대신 하야시[林董]를 서울로 불러 함께 고종을 협박하였고 밤을 새워가면서 항거하던 고종은 결국 ‘대사를 황태자에게 대리시킨다’는 황태자 섭정의 조칙(詔勅)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일제와 친일각료들은 이 조칙을 ‘양위’로 왜곡 발표하고, 20일에 양위식을 강행하였다. 흥분한 군중은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문사 및 경찰관서 등을 습격 파괴하고 친일괴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서울 장안은 유혈과 통곡소리로 수라장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7월 24일 일제의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위한 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이, 29일에는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이 공포되고, 31일에는 군대해산명령이 내려졌다. 이와 같이 나라의 운명이 망국으로 기우는 상황 속에 순종 은 새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도 광무(光武)를 융희(隆熙:8월 2일자)로 바꾸고 일제는 마지막 병탄 작업을 서두르게 되었다.


【참고사이트】

1. 헤이그 특사 사진자료

2. 헤이그 특사 논평

3. 헤이그 특사 사진2

4. 제2차 만국평화회의 사진


 

 

60. 정미의병(丁未義兵)(P.92)

 

1905년(광무 10) 통감부 설치 이후 조선병합을 서두르던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력인 군대를 해산시켰다. 해산군인들은 해산당일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을 계기로 서울 ·원주 ·강화 진위대 등지에서 무장봉기를 하는 한편, 무기를 가지고 각지의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해산군인의 의병참여는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침체상태에 있던 후기 의병활동을 그 규모와 성격 면에서 전환기를 맞게 하였다. 우선 후기의병은 해산군인의 참여로 무기와 병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또 전술의 발전도 가져왔다. 특히 일본군이 조선의 지형에 어두운 점을 이용하여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벌인 게릴라전술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무력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해산군인의 의병참여로 크게 고양된 후기 의병은 일제가 1910년 10월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이기까지 전민족의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후 의병구성에서도 종래의 유생 중심에서 벗어나 농민 ·하급 해산군인 ·천민 ·노동자 등도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참고사이트】

1. 의병장 사진

2. 근대 의병활동 연구


 

 

61. 남한 대토벌 작전(南韓大討伐作戰)(P.94)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달에 걸쳐 진행된 전라남도와 그 외곽지대의 반일의병전쟁에 대한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1907년 군대해산으로 거세게 타오른 제3단계 의병전쟁이 가장 격렬한 곳은 전라남도였다. 이에 일제는 2,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3단계에 걸친 작전으로 이 지역 의병을 진압했다. 제1단계 작전은 남원을 기점으로 고흥·광주·영광으로 이어지는 지대, 제2단계는 고흥·광주·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남서해안에 이르는 지대, 제3단계는 도서지방으로 탈출한 의병을 섬멸하기 위해 무인도 지역까지를 대상으로 한 초토화 작전이었다. 양민과 민가까지 살육·방화·약탈함으로써 수많은 양민이 학살당했다. 의병장만도 103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전해산 등 23명은 체포되어 형장에서 순국했다. 이때 일본군에 잡힌 의병들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보성·낙안·순천을 경유하는 광양·하동까지의 도로작업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라고 했다. 이후 의병들은 만주로 옮겨가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참고사이트】

1. 남한 대토벌작전의 사진자료

2. 호남의병 활동에 대해서


 

 

62. 의열투쟁(義烈鬪爭)(P.95)

 

'의'사와 '열'사의 투쟁이라 해서 의열투쟁이라 불리며, 대부분 한명에서 몇 명까지, 권총이나 폭탄으로 일제의 주요기관(총독부나 친일기관)의 파괴공작이나 주요인물(총독, 장군, 천황 등)을 암살하는 임무를 주로 맡은 사람들의 투쟁을 의열투쟁이라함.


【참고사이트】

1. 의열투쟁의 정의

2. 안중근의사 연구소

3. 영화 안중근 동영상

4. 윤봉길의사 의거현장


 

 

63. 을사조약(乙巳條約)(P.97)

 

1905년(광무 9)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승인한 5명의 대한제국 대신들로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가리킨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의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郞], 주한공사 하야시[林權助], 외무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는 을사조약 체결을 모의하고, 11월 9일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한국에 파견하여 고종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출하게 했다. 또 하야시는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협력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고종을 감시하는 한편, 11월초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로 하여금 보호국화 찬성의 선언을 발표하게 했다. 11월 14일 이토는 고종을 다시 알현하고 조약원문을 제시, 체결을 강요했고 다음날에는 대한제국의 각 대신들과 원로대신들을 숙소에 납치하여 조약체결을 강권했다.


11월 17일 이토와 하세가와는 일본군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군신회의를 개최하게 하여, 회의는 오후 3~8시까지 열렸으나 조약거부로 결정이 났다. 이에 이토는 귀가하는 대신들을 위협하여 다시 강제로 회의를 열게 하여 대신 한 사람마다 조약체결 찬성 여부를 물었다. 주무대신으로 처음 지명된 박제순이 "만약 명령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하자, 이토는 "당신은 절대적으로 이 협약에 반대한다고는 볼 수 없다. 폐하의 명령만 내린다면 조인할 것으로 본다고 믿는다"고 못 박았다. 이후 회의는 이완용과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 대세를 장악하여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면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을 침략할 것이므로 차라리 체면을 살리면서 들어주자"는 명분과 왕실의 안녕과 존엄은 유지할 수 있다는 조건을 들면서 조약 체결을 주장했다. 대신들 중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만이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나머지는 체결이 불가피함을 시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박제순과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을사조약 반대의 함성이 전국적으로 드높은 가운데, 이들 오적에 대한 응징 기도도 빈번했다. 기산도(奇山度)·구완희(具完喜) 등이 이근택을 암살하려 했고, 1907년 3월 오기호(吳基鎬)·나인영(羅寅永) 등 '을사오적 암살단'이 이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삼엄한 경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 1909년 서울 종현성당에서 이재명(李在明)이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으나, 부상만 입히고 말았다. 이들은 한일합병 후에 모두 친일의 대가로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참고사이트】

1. 을사오적 소개

2. 친일자명단

3. 친일자 후손들의 현실

4. 친일 청산의 노력

5. 항일운동 시청자료


 

 

64. 애국계몽운동(P.96)

 

애국 계몽 운동은 갑신정변과 독립 협회 활동 등의 개화 자강 계열 운동을 계승한 구국 민족 운동이었다. 의병 전쟁이 무장 투쟁을 통한 주권 회복 운동이라면, 애국 계몽 운동은 실력 양성을 통한 주권 회복 운동으로 지식인, 관료, 개명 유학자 등이 주도해 나갔다.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학교 설립과 신문 잡지의 발간, 산업 진흥 등을 통해 경제적 문화적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점진적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황무지 개척을 핑계로 한 일본의 토지 약탈 계획을 저지하였으나 일본측의 압력으로 해산당한 1904년 보안회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에는 헌정 연구회가 조직되어 대중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등 점차 반일 적 성격을 띠자 일본은 자신들의 침략 정책에 맞서지 않는 문화 운동만을 허용하고 일체의 정치 활동은 금지하여 탄압하였다. 1906년에는 헌정 연구회를 계승하여 교육 개발과 식산흥업을 표방한 대한 자강회가 설립되어 전국에 25개의 지회를 두고 연설회를 열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으나 일본인 고문 오가키의 파괴 책동으로 강 제 해산되었다.


이와 같이 정치 운동이 금지되자 이후로는 학교 설립을 통한 신교육 운동, 실력 양성을 위한 식산흥업 운동이 중심이 되었다. 계몽 운동가들은 서북 학회, 한북 흥학회, 호서 학회, 호남 학회, 관동 학회, 기호 흥학회 등을 조직하여 기관지를 발행하고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운동을 폈다. 1908년 사립 학교 령에 의해 공인을 받은 것만도 2,000여 개에 달했던 이때의 학교들은 서양의 근대 문물 학습과 애국정신 함양을 통해 많은 민족 운동가들을 길러 냈다. 언론을 통한 계몽 운동도 대한 매일 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의 신문과 소년을 비롯한 각종 잡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신문과 잡지도 국민 계몽과 애국심 고취에 큰 몫을 하고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에 대항하였다. 또한 조선의 국어·역사·지리에 관한 책, 역대 명장들의 전기 등이 출판되었고, 역사학· 국어· 국문학 등을 근대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식산흥업 운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서북 학회는 농림 강습소를 설치하여 농업 기술 교육을 실시하고 산업의 개량 발달을 위해 실업 부를 조직하여 기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조선의 산업을 개량하고 발달시키기 위한 경제 연구회, 친일적인 일진회의 외곽 단체인 상무 조합에 반대하는 제국 실업회, 해산 군인들이 기술 보급·제조품 발명을 통해 국내 산업 발달에 기여하고 무역을 성장시키기 위해 창립한 대한 공업회 등이 조직되었다.


1907년에는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 보상 운동이 대한 매일 신보 등 언론 기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전국을 휩쓸었다. 조선 정부가 일본의 강요로 받아들인 1,300만 원 가량의 차관이 국권 회복에 장애가 되므로 온 국민이 성금을 모아 갚자는 것으로서, 전국에 무수한 국채 보상 기성회, 단연회 등이 조직되어 담배를 끊거나 생활비를 절약하여 성금이 쌓여갔다. 그러나 이 운동은 통감부가 대한 매일 신보사의 국채 보상 기성회 간부인 양기탁에게 횡령 혐의를 씌워 구속한 것을 계기로 퇴조하였다. 신문지법, 보안법 등을 통한 일본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정치 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합법 운동에 한계를 느낀 일부 계몽 운동가들은 1907년에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도 처음에는 실력 양성을 목표로 하였으나 점차 그 안에서 운동 노선의 분화가 나타나 안창호 중심의 실력 양성론과 양기탁, 이동휘 중심의 독립 전쟁론이 대립하였다. 1910년, 일제의 완전한 조선 병탄이 닥쳐 오고 국내에서의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더욱 확실해짐에 따라 국외에서의 무장 투쟁 노선을 채택하여 러시아나 중국 영토에서의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미국으로 가서 흥사단을 조직한 안창호 등의 운동 노선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애국 계몽 운동, 자강 운동은 반제 반봉건에 충실했던 애국적이고 진보적인 운동으로서 대중을 계몽하고 민족적 자각을 높였으며 부르주아 민족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반면에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한 비판도 불철저하고 보수적인 성향도 강하며 무력 항쟁을 포기하고 문화 운동만으로 활동 영역을 축소하였다는 비판과 심지어는 제국주의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여 이를 정당화해 준 운동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애국계몽운동 발언)


* 우리 대한이 종전에 자강의 방도를 강구치 아니하여 인민이 스스로 우매함에 굳어지고 국력이 쇠퇴하게 되어 드디어 오늘의 험난한 지경에 이르러 다른 나라의 보호를 받기까지 되었다. 이것은 모두 자강의 방도에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강의 방도를 강구하려 할 것 같으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교육을 진작하고 산업을 일으키는 데 있으니 무릇 교육이 일어나지 않으면 인민의 지식이 열리지 않고, 산업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라의 부가 강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즉 인민의 지식을 열고 국력을 기르는 길은 교육과 산업의 발달에 달려 있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대한자강회 취지문)


* 무릇 우리 대한인은 내외를 막론하고 통일 연합으로써 그 진로를 정하고, 독립 자유로써 그 목적을 세움이니, 이것이 신민회의 원하는 바이며, 신민회의 품어 생각하는 소이이니, 간단히 말하면 오직 신정신을 불러 깨우쳐서 신단체를 조직한 후에 신국을 건설할 뿐이다. (신민회 취지문)


*  오호라! 금일 우리 대한에 무엇이 있는가? 국가가 있건마는 국권이 없는 나라이며, 인민이 있건마는 자유가 없는 백성이며, …… 오호라! 지구상의 강국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나라도 한차례의 고통도 없이 능히 흥한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 크도다! 우리 한국의 오늘의 희망이요, 아름답도다! 우리 한국의 희망이오. (신채호 대한 협회 월보)


【참고사이트】

1. 애국계몽운동 계보

2. 참고자료

3. 애국계몽단체 도표



 

 

65.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P.96)

 

한말의 민중계몽단체로서 국민교육을 강화하고 국력을 배양함으로써 독립의 기초를 다진다는 취지 아래 1906년 윤효정(尹孝定)·장지연(張志淵)·나수연(羅壽淵)·김상범(金相範)·임병항(林炳恒) 등이 1905년 5월 이준(李儁)이 조직한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확대 개편하여 발족하였다. 회장 1명, 부회장 1명, 평의원 20명, 간사원 20명, 일본인 고문 1명의 임원을 규정하고, 1906년 4월 회장 윤치호(尹致昊), 고문 오가키 다이부[大垣大夫], 평의원 10명, 간사원 10명을 추대하였으며, 9월 나머지 임원을  보선하였다. 회원은 임원 2명 이상의 보증과 추천을 받아 입회하였다. 지회는 동지 30명 이상을 확보하고 그 지역에 대한 보증을 서야 활동할 수 있었으며 1907년 5월 전국 25개소에 이르렀다. 활동은 서울의 본회가 중심이 되었으며,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연설회를 개최하고 정부에 건의안을 제출하였다. 건의안의 내용은 학부교과서 편집문제, 의무교육실시, 사범학교 설립, 사립학교 연락건, 조혼금지, 부동산 매매시 증명서 첨부, 교육기관증설 및 시설확대, 악질적인 봉건주의 폐습 일소, 색의(色衣)를 입고 단발(斷髮)을 실천할 것 등이었다. 또한 《대한자강회월보》를 발행하여 식산흥업(殖産興業)의 필요성, 국가재원 증진책, 황무지개척, 일제 황무지개척의 의도, 임업의 필요성, 토지개량의 필요성, 종자개량 등에 대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회비는 가입 시 입회금 1원을 내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의 운영은 주로 기부금과찬조금에 의존하고 있어 재정 상태는 궁핍한 실정이었다. 이 회는 출발 당시부터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활동범위를 설정하고 소극적이며 온건한 계몽운동으로 일관하고 있었으며 대정부건의운동도 통감부의 영향 아래 있던 정부로부터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특히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일본인고문 오가키를 두었으나 그가 한국인을 위하여 활동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이것은 그의 회고담에서 일제침략의 수족으로 활약하였음을 밝히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처럼 대한자강회의 계몽운동과 건의안은 일본이 고문의 참여로 배일성이 약하고, 활동범위가 법의 허용 한도 내에 있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이후 적극적인 현실참여운동을 전개하면서, 1907년 고종 황제의 퇴위와 순종 황제의 즉위를 반대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하고 친일매국단체 인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였다. 그러자 통감부(統監府)는 8월 27일부로 공포된 보안법 제2조의 규정을 적용하여 8월 21일 강제 해산시켰다. 1907년 11월 10일 조직된 대한협회의 전신이 되었다.


【참고사이트】

1. 대한자강회 취지서

2. 대한자강회 월보표지

3. 대한애국운동 사진자료


 

 

66. 장지연(P.97)

 

장지연 선생은 1864년 경북 상주에서 부친 장상용과 모친 유씨 사이의 독자로 출생하였다. 조선시대 예학의 대가 가운데 한 분인 장현광의 12대 후손인 선생은 어려서 장석봉에게 유학을 공부하였고, 이후에는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허위의 형인 허훈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허훈은 기호남인으로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허전의 제자였으므로, 선생은 심성·예학을 중시하는 영남유학과 현실 개혁을 중시하는 기호남인의 실학을 겸비하였던 것이다. 1894년 초시에 합격한 뒤 1896년 상경한 선생은 새로운 인물들과 만남을 통해 사상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서구열강을 금수로 보았던 종래의 화이론적 척사관에서 서구열강도 의리를 아는 국가이므로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대외관으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특히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경험하면서 국가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해결방안을 찾았고, 결국 성호학파계열의 실학과 자신의 사상을 접목시켜 진보적인 개화사상가이자 개신유학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98년 황성신문의 창간에 참여하고, 1899년 시사총보의 주필로 계몽적 언론인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선생의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활동은 1902년 황성신문 주필 겸 사장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1905년 11월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 체결을 통렬하게 비판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촉발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표출되었다. 이 논설로 인하여 선생은 일제 헌병대에 피체되어 4개월간의 고초를 겪었지만, 선생의 독립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그것은 일제의 압력으로 황성신문 사장을 사임한 뒤에도 1906년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의 창립과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을 주도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아가 우리의 강역과 역사를 다룬 고전들을 발간하고, 몸소 역사 연구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정신을 배양하며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갔다. 이 같이 일제로부터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선생의 노력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대적 격변과 망국의 비운을 체험하면서 울분에 쌓여 병을 얻었던 선생은 1920년 11월 1일(음력 10월 2일), 마산 자택에서 5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사이트】

1. 장지연 선생에 대하여

2. 시일야방성대곡

3. 장지연에 대한 친일논란

4. 친일논란 신문자료

5. 장지연 친일논란 동영상


 

 

67. 신민회(新民會)(P.98)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표면적인 애국계몽운동이 어렵게 되자 사회지도자들은 비밀단체를 조직하였다. 약 5년간 미국에 건너가 있던 도산 안창호가 귀국하여 양기탁, 신채호, 이동녕,이승훈, 이갑 등과 함께 1906년에 조직한 신민회가 그것이다. 신민회는 평양에서 조직되었는데, 회원의 대부분은 평안도,황해도의 기독교 신자 중 유력자인 학교교사, 그리고 학생들이었다. 비밀조직이어서 정확한 것을 알리기 어려우나, 활동목표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킬 것


2. 동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국민운동의 역량을 축적할 것


3. 교육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 교육을 진흥할 것


4. 각종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을 증진할 것


신민회는 조직은 비밀이었으나, 활동은 공개적이었다. 곧 신민회는 교육을 위해서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인격수양을 위해서 청년학우회를 만들었다. 또 출판활동을 위해서 태극서관을 세웠으며, 산업진흥을 위해서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신민회의 활동은 1910년 우리의 국권이 침탈당하게 되자,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펼쳐졌다. 미국으로 다시 건너간 안창호 등은 홍사단을 조직하여 새로운 도덕운동을 펴 나갔고, 이동휘 등은 간도, 시베리아 등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국내에 남아 있던 신민회 간부들은 일제가 날조한,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민회 활동은 중지될 수 밖에 없었다. 105인 사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5인 사건은 1911년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사건을 확대 조직하여 105명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한 시건이다. 1910년을 전후하여 평안도, 황해도 등 북서지역에서는 신민회와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신문화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이 전파되고 있었다. 이에 조선총독부가 이 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다 잡힌 안명근 사건을 확대 날조하여 북서지방의 배일기독교인과 신민회원을 체포한 것이 안악사건과 105인 사건 즉 신민회 사건이다. 안명근은 신민회원이 아니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 사건을 신민회 황해도지회 간부들의 지시에 따라 일으킨 것으로 날조하여 안악군을 중심으로 유동열,윤치호,양기탁,이승훈,이동휘 등 600여 명을 검거하였다.

검거된 사람들은 주로 양산학교와 면학회를 중심으로 교육과 신앙을 통한 애국계몽과 구국운동에 헌신한 독립지사들이었다. 총감부는 신민회의 간부와 회원들도 구속하였는데, 그 이유는 신민회 간부들이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 국권회복을 도모하였다는 것이었다.


안악사건 관련자에게는 안명근의 무기징역형을 비롯하여 7~15년형이 선고되었고, 신민회 간부들은 징역2년에서 원도안치처분까지 선고 받았다. 일제는 안악사건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애국지사들을 모두 체포하기 위하여 105인 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105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으나 105명이 모두 항소하자 99명을 무죄로 석방하고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옥관빈 등에게 징역 5~6년형을 선고하였다.


【참고사이트】

1. 안창호 선생 소개

2. 신민회의 활동

3. 105人 사건 설명

4. 105인 사건 사진


 

 

68.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건설(P.99)

 

신민회는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군 기지건설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 봄에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의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여 독립군기지를 만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사관을 양성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1910년 3월에는 긴급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을 국권회복의 최고전략으로 채택하고, 국외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같은 해 4월에는 중국으로 망명한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 등 신민회 간부들이 '청도회의'(靑島會議)를 열고 독립군 기지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책을 협의했으나. 급진론과 점진론으로 나누어져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후 12월에는 국내에 잔류한 양기탁·주진수·이승훈·김구·이동녕 등이 전국간부회의를 열어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서간도에 한인 집단 이주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 신민회원을 대량 체포하여 신민회의 국내조직이 사실상 와해되었으나, 신민회 간부 이동녕·이회영 등은 그해 봄에 만주 펑톈 성[奉天省] 류허 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하고, 사관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그밖에 신민회 간부들에 의해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등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건설에 의한 독립전쟁 전략은 1910년 이후 여러 민족운동세력의 기본적인 독립운동 전략이 되었으며,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 대규모의 독립군부대에 의한 항일 무장투쟁의 기초가 되었다.


【참고사이트】

1. 독립군 기지 현재사진

2. 독립군 기지 사진

3. 무관학교에 대하여

4. 독립군의 현실

5. 광복군이 된 학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