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개화운동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P.56)

 

 

 

14. 개화운동(P.56)

 

조선에서 개화라는 말이 쓰인 것은 대략 1880년대부터라 하는데, 이는 187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문명개화’라는 말이 1876년 개항 후 조선에 들어온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개화사상이 정확히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알기 어렵지만, 일찍이 문호개방을 주장한 박규수(朴珪壽)․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등이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북학파(北學派)의 거두였던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는 두 차례 청에 가서 서양문물의 우월성과 개항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오경석은 실학자 김정희(金正喜)의 제자로서 수차례 청을 다녀온 역관이었고, 유홍기는 의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밖에 정약용(丁若鏞)과 김정희에게 수학하였으며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보고 신무기를 만든 신헌(申櫶), 역시 김정희의 문하로 두 차례 청을 다녀온 바 있던 강위(姜瑋)등도 초기 개화사상가에 넣을 수 있다. 이들이 개화사상을 갖게 된 데는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있다. 먼저 내적 요인이라 함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이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들은 대개 박지원․정약용․김정희 등 실학자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을 극복하고 청의 문물이라도 ‘이용후생(利用厚生)’ 차원에서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박지원의 사상이 그 손자인 박규수의 개국통상론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오경석․유홍기를 비롯한 다른 개화사상가들에게도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인적 연계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외적 요인은 청을 통하여 접한 새로운 지식이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들은 직접 청을 다녀온 경험이 있거나 『해국도지』․『영환지략(瀛環志略)』등 청의 개화관련 서적을 읽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편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은 몇몇 양반자제들을 모아 그들에게 개화사상을 불어넣었다. 그 결과 1870년을 전후하여 박규수의 집에는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하여, 박영교(朴泳敎)․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유길준․홍영식(洪英植)등이 함께 모여 각종 서적을 읽으면서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급진개화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당시 20대에 청년들이었다. 이밖에 승려 이동인(李東仁)․탁정식(卓挺植), 중인 변수(邊隧), 판관 이인종(李寅鐘), 군인 유혁로(柳赫魯)․이희정(李喜貞), 상인 이창규(李昌奎)등도 있었다. 그리하여 1870년대 말에는 ‘개화당’이라 일컬어지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출신에서 알 수 있듯이 신분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으며,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며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한 변법론적․급진적 개혁을 꾀하였다. 반면 온건개화파라 불리는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김홍집(金弘集)․민영익(閔泳翊)등이 있었다. 이들은 정부요직에 있으면서 청에 대한 종속을 인정하고 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한 양무론적․점진적 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급진개화파에 차이가 난다 . 이들은 서양의 기술과 문물은 받아들이되 그 종교와 사상은 전통의 것을 지킨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는 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볼 때 일찍이 개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수용을 주장한 사람들은 급진개화파 계열이었으나, 정부요직에 있으면서 실제로 개화정책을 추진한 사람들은 온건개화파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급진개화파가 일시 정권을 잡기도 하지만 곧바로 무너지고, 온건개화파의 입지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참고사이트】

1. 개화운동 계보

2. 개화당시의 사진들


 

 

15. 위정척사사상(P.62)

 

조선 후기 유교적인 질서를 보존하고 외국세력 및 문물의 침투를 배척한 논리 및 운동. 문호개방 이후 개화사상이 고조되고 정부의 개화정책이 외세의 침투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어 주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생들이 주도해 나갔는데, 그 논리 및 운동은 외세의 침투상황에 따라 단계적으로 전개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는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 등이 서양세력의 침범은 국가 존망의 위기를 조성한다고 주장하면서 서양문물을 배척하고 통상에 반대하였다. 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뒤에는 최익현(崔益鉉)이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내세워 개항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고, 척사의 대상이 일본으로 확대되었다. 81년(고종 18) 김굉집(金宏集)이 일본에서 들여온《조선책략(朝鮮策略)》을 보급시키면서 각 지방의 유생들이 격렬히 비판하는 상소를 하였고, 정부의 개화정책을 반대하는 정치적 움직임으로 확대되어 개화와 보수 두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빚어졌다. 그 뒤 통상무역이 전개되고 미곡수출이 진전되면서 농민층의 몰락이 가속화되자, 농민몰락과 관련된 여러 원인들을 제시하고 그 안정책을 건의하였다. 1894~95년 갑오·을미 개혁을 계기로 개화파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개화망국론(開化亡國論)을 펴고, 개화파 정부와 일본세력에 대하여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군주의 결단에 호소하고 정부에 건의하는 상소운동의 한계를 깨달으면서 일부는 항일의병전쟁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주체적인 근대화를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정치체제와 사회·경제 질서를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는 점에서 전근대적인 성격이 강하였으나, 국내의 현실적인 정치·사회 문제의 개선 및 개혁을 포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사이트】

1. 위정척사사상에 대하여

2. 최익현 선생사진


 

 

 

16. 임오군란(壬午軍亂)(P.64)

 

1882년(고종 19) 6월 일본식 군제(軍制) 도입 과 민씨 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군변(軍變).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의 정세는 개국(開國)˙개화(開化)로 향하게 되었다.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와 국왕과 명성황후 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開化派)로 양분, 대립하게 되었으며 외교노선은 민씨 정권이 추진한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제국(歐美諸國)과의 통상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은 더욱 심해졌으며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백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었다. 한편 개화정책에 따른 제도의 개혁으로 정부기구에는 개화파 관 료가 대거 기용되었으며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이듬해에는 종래의 훈련 도감˙용호(龍虎)˙금위(禁衛)˙어영(御營)˙총융(摠戎)의 5영(營)을 무위영(武衛營)˙ 장어영(壯禦營)의 2영으로 개편 하자 여기에 소속하게 된 구영문의 군병들은 자기들보다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는 신설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 하여 증오하게 되었다. 구군영소속 군인들에게는 군량이 풍부하였던 대원군집정 시대와는 달리 13개 월 동안 군료(軍料)가 밀려 불만은 고조되었고 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군병은 민씨정권 이후 빈번하게 일어나는 군료미불 사태의 원인이 궁중비용의 남용과 척신들의 탐오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군료관리의 책임자인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 병조판서 민겸호(閔謙鎬)와 경기도관찰사 김보현(金輔鉉)에 대해서는 깊은 원 한을 가지고 있었다.

82년 6월 초 전라도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되자 6월 5일 선혜청 도봉소(都捧所)에서 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구(舊)훈련도감 군병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혜청 고직(庫直)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 아니라 두량(斗量)도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아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시비를 따지게 되었다. 군료의 지급 담당자가 민겸호의 하인이며 그의 언동이 불손하여 군병들의 격노를 유 발시킴으로써 군료의 수령을 거부한 구훈련도감 포수(砲手) 김춘영(金春永)˙ 유복만(柳卜萬)˙정의길(鄭義吉)˙강 명준(姜命俊) 등을 선두로 하여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營官)을 구타하고 투석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수라 장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민겸호는 주동자의 체포령을 내려 김춘영˙유복만 등 4, 5명의 군인이 포도청 에 잡혀갔다. 이어서 그들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 중 2명이 곧 사형되리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어 군병들은 더욱 격분하였다(도봉소사건). 이에 김장손(金長孫)˙ 유춘만(柳春萬:유복만의 동생)이 주동이 되 어 투옥된 군병의 구명운동을 전개시키기 위해 통문을 작성하였다. 6월 8일에는 이최응(李最應)이 별파진 (別破陣)을 동원하여 군변을 진압할 것을 국왕에게 건의했다는 소문이 퍼져 군병들은 더욱 흥분되어 도봉소의 군료시비사건은 정변으로 확산되었다. 6월 9일 김장손과 유춘만을 선두로 한 무위영 군병들은 무위대장 이 경하(李景夏)의 집에 가서 민겸호의 불법과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으나 이경하는 군료관할의 권리가 없다는 것 을 내세워 변백구해(辨白求解)하는 글을 써주고 민겸호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하였다. 민겸호의 집 앞에 이르른 군민들은 도봉소 고직을 발견하여 민겸호의 집안으로 난입하게 되었으나 민겸호와 고직은 찾지 못한 채 가 재도구와 가옥을 모두 파괴시키고 폭동을 일으켰다. 사태의 중요성을 생각하여 민씨 정권의 보복이 있을 것 이라 예상한 김장손과 유춘만 등은 운현궁(雲峴宮)으로 올라가 대원군에게 진정한 후 진퇴를 결정해주기를 요청 하였다. 대원군은 이러한 군민의 소요사태에 대해 무위영 군졸 장순길(張順吉) 등에게 명하여 표면상으로 는 효유 선무하는 태도를 취하여 밀린 군료의 지급을 약속하며 해산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김장손과 유춘만 등 을 불러 밀계(密啓)를 지령하고 심복인 허욱(許煜)을 군복으로 변장시켜 군민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대원군과 연결된 군민들은 좀더 대담하고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하여 일대(一隊)는 동별영(東別營)의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약탈하여 포도청에 난입한 후 김춘영˙유복만 등을 구출하고 이어서 의금부(義禁府)를 습격하여 척사론자 (斥邪論者)인 백낙관(白樂寬) 등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다른 일대는 경기감영을 습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나머지 일대는 강화유수(江華留守) 민태호(閔台鎬)를 비롯한 척신과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 파괴하였다. 군민들은 이날 저녁에 일본공사관을 포위 습격하자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 등 공관원 전원이 인천으로 도피하였다. 또 한편의 군민들은 별기군병영 하도감(下都監)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 모토 레이조[堀本禮造] 공병소위를 살해하고 일본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하는 등 일본 공사관 습격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날의 폭동은 끝났다.


이튿날은 전날보다 더 강력해진 폭동군민들이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돈 령부영사(敦寧府領事) 흥인군(興寅君) 이최응과 호군(護軍) 민창식(閔昌植)을 살해하고,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에 육박한 후 곧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궐내로 난입하였다. 난군들은 궐내 도처에 흩어져 명성황후와 척신들을 수색하던 중 선혜청당상 민겸호와 경기도관찰사 김보현을 발견하여 살해하고 계속 명성황후의 행방을 찾았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의 도움으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군민들의 난동을 조 정에서는 민겸호의 보고에 의해 단순한 도봉소의 군료분쟁으로 생각했으나 척신들의 집들이 습격˙파괴되고 군민 이 대거 폭동에 참가하게 되자 무위대장 이경하를 동별영에 보내어 진무시켰으나 실패하였다. 점점 사태가 위급하게 번지자 당면의 책임자를 문책한다는 뜻에서 선혜청당상 민겸호, 도봉소당상 심순택(沈舜澤), 무위대 장 이경하, 장어대장(壯禦大將) 신정희(申正熙) 등을 파직시키고 무위대장 후임으로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李載冕)을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상호군(上護軍) 조영하(趙寧夏)의 제안에 따라 별기군 영병관(領兵官) 윤 웅렬(尹雄烈)을 통해 일본공사 앞으로 서한을 보내어 군변사실을 통고하고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였으나 군민들의 공격으로 공관원 전원이 인천으로 탈주한 뒤였다.


난민들이 궐내로 진입을 하게 되자 국왕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대원군의 입시를 명하였고 이에 따라 대원군은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와 장자 이 재면을 대동하고 입궐하였는데 이 때 허욱의 지휘하에 구훈국병(舊訓局兵) 200명이 대원군을 호위하였다. 대원군은 사태수습의 책임을 맡고, 왕명으로 ‘자금(自今) 이후 대소 공무(公務)는 대원군 전에 품결(稟決)하라’ 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사실상의 정권을 장악했다. 곧이어 국왕의 자책교지(自責敎旨)가 반포되어 군변의 정당성이 합리화되었고,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군민을 무마하여 사태수습에 나서 우선 군병의 요청에 따라 무위 영˙장어영과 별기군을 혁파하고 5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으며,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혁파하고 3군부 (三軍府)를 설치하였다. 또한 군병들에 대해 군료의 지급을 공약하고 척족의 제거를 위한 인사조치를 단행 하여 이재면으로 하여금 훈련대장˙호조판서˙선혜청당상을 겸임하게 하여 병(兵)˙재(財) 양권을 장악하게 하고 중앙의 각 부서와 지방의 관찰사 등 수령들에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였다. 대원군이 기용한 인물은 대개 남인 계열의 노정치가들이며 인재의 보충을 위해 투옥되었거나 정배당한 죄수들을 석방시키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또한 서정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민심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는데 6월 15일에는 각 지방의 미납세미(未納稅米)를 급히 서울로 보낼 것을 지방관에 명하여 군병들의 군료와 도민(都民)의 식량에 충당했으며 20일은 각공 원가(各貢援價)에 감합(勘合) 등의 절차는 갑자년(甲子年:1864) 이후의 신정정식(新定定式)에 의하도록 하고, 21 일에는 민폐의 근원이 되는 신감채(辛甘菜)˙해홍채(海紅菜)의 징수를 금지하도록 했다.


이어서 22일에는 주 전(鑄錢)을 금지시키고 동시에 각종 도고(都賈)의 민폐에 관한 것도 혁파시켰으며 26일에는 수세(收稅)에 원래 정한 액수 이외의 부과는 일체 금지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부 난병들은 명성황후의 처단을 주장하고 해산 을 거부했으므로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실종을 홍거(薨去)로 단정하고 명성황후상(喪)을 공포하였다. 이에 민씨 일파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곧 청(淸)나라 톈진[天津]에 주재하고 있던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 등 에게 통지하여 청나라의 원조를 청하였다. 통지를 받은 김윤식 등은 대원군의 존재 위험성과 함께 난당(亂黨)의 소탕,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에 청국이 조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청국정부는 김윤식의 의견에 따라 일본 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고 오장경(吳長慶) 등으로 하여금 4,5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곧 출동하게 하였다.

한편 명성황후의 국상을 강제 진행함에 따라 대원군의 정치적 실권은 단축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청국은 종주국(宗主國)으로서 속방(屬邦)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갖고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에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한 오장경은 서울 요소에 군사를 배치한 후 조선의 내정에 직접˙간섭을 하며 군령(軍令)을 찾아온 대원군을 납치하여 톈진[天津]으로 호송함으로써 대원군은 정권에서 다시 축출되었다.


한편 일본에 도착한 하나부사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 에 대항하지 못했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조선 측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일본정부는 조선에 대해 군란의 수모자(首謀者)를 처단 하고, 일본인 조해자(遭害者) 유족에게는 위문금을 지불할 것이며,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금 50만 원을 지불할 것 과 일본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키는 것 등이다.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 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참고사이트】

1. 임오군란 드라마영상(명성왕후中)

2. 일본인의 눈으로 본 임오군란 그림자료

3. 임오군란 그림자료

4. 임오군란 당시의 일본공사의 사진


 

 

 

17. 갑신정변(甲申政變)(P.66)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국이 조선 내정에 깊이 개입하면서 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각각 본보기로 하여 개혁을 추진했던 동도서기파와 급진개화파 사이에서 갈등이 증폭되었다. 특히 국가 재정의 위기를 둘러싸고 전개된 민씨정권과 급진개화파의 대립은 극에 이르렀다. 민씨정권을 대변하는 재정고문 뮐렌도르프가 악화(惡貨)를 주조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옥균의 차관 교섭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급진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급진개화파는 정국의 이러한 난관을 무력으로써 일거에 돌파하려 하였다. 더욱이 1884년 베트남을 두고 청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었고 급기야는 8월에 청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자국군대 3,000명에서 절반을 철수하기에 이르자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지원을 입고 민씨정권을 무너뜨리려 하였다. 또한 일본도 급진개화파를 도와 조선 침략의 걸림돌이었던 청국과 민씨정권을 내몰고 조선에서 우위를 차지할 속셈으로 일본군대의 동원과 차관을 약속하였다.


1884년 10월 17일 급진개화파는 우정국 개설 피로연을 이용하여 민씨세력을 제거하는 일대 정변을 일으켰다. 그것은 행동대가 이웃집의 방화를 신호로 민영익이 자객을 맞고 쓰러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어 이들 주모자는 민씨정권의 대표적인 거두라 할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 6명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재빨리 대회장을 빠져 나와 고종에게 청병이 서울을 습격했다 속이고 일본군의 동원을 요구하였다. 고종은 전후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채 김옥균의 강권에 따라 일본공사관에 병력을 요청하는 동시에 조선군 일부와 일본군의 호위 속에서 경우궁으로 옮겼다. 급진개화파는 이처럼 정권을 장악하자 19일 개혁 내용을 담은 80여 개조의 정령을 발표하였다. 새 정부는 정치적으로 청에 대한 사대 외교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적 정치 구조를 세우려고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지조법(地租法)을 제정하고, 재정기관을 일원화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려고 하였으며, 혜상공국(惠商公局)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인민평등권과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으로 정치참여의 기회를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옥균 등의 개혁구상은 3일만에 끝나고 말았다. 19일 오후 청국 군이 공격해 오자 지원을 약속한 일본군이 철수해 버렸다. 일본으로서는 청국과 충돌하는 것이 시기 상조라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화정책에 피해를 본 서울의 상인과 빈민들도 급진개화파를 친일파로 보고 급진개화파를 공격하였다. 결국 홍영식과 박영교 등은 청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9명이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3일만에 종말을 고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무엇보다도 이를 지지할 만한 사회계층을 적극 끌어들이지 못한 가운데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던 사실에서 그 원인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고 근대사회를 여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개혁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참고문헌】

1. 갑신정변에 대하여

2. 갑신정변 분석자료

3. 갑신정변 드라마 영상(명성왕후中)

4. 개화당 인사들 사진

5. 갑신정변 상황도

6. 갑신정변의 장소 우정국사진

7. 갑신정변 동영상

8. 갑신정변 14개조 전문


 

 

 

18. 청일전쟁(淸日戰爭)(P.71)

 

1894∼1895년 사이에 청(淸)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전쟁으로 이로 인하여 일본의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분할이 시작되었으며, 동아시아에 제국주의 시대의 막이 열렸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하고 다음해 부산에 거류지(居留地)를 설정, 곡물의 매점과 무관세(無關稅) 특권으로 공산품을 수출하며 조선에 진출하였다. 82년 최초의 반일운동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공사관 주둔병의 허용을 내용으로 하는 주병권(駐兵權)을 장악하고, 84년에는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를 후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청의 종주권이 강화되었다.

  당시 일본은 1880년대 후반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급속히 발전한 일본자본주의는 1890년에 시작된 경제공황을 통해 그 모순을 드러냈다. 즉 값싼 노동력의 국내시장 발전제약과 섬유공업·군수공업 등에 대한 수년 간의 투자확장이 공황의 원인이었다. 1889년의 흉작으로 인한 쌀 생산의 감소도 공황을 더욱 촉진시켰다. 결국 1890년도의 일본경제는 심한 수입초과를 나타냈으며 일본은 무역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해 해외시장 침략을 꾀하게 되었다. 1890~94년 일본 의회에서 나타난 일본지배층 내부의 대립 격화와 농민·노동자들의 경제상태 악화 및 불만의 증대는 지배층의 침략기도를 부추겼다.

  한편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영토분할을 주도하고 있던 영국은 당시 제정 러시아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로 보고,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반대하는 동맹세력을 찾고 있었다. 영국은 일본을 장래의 동맹국으로 보고 청일전쟁 개시 2주일 전인 1894년 7월 16일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에 동의했는데, 이는 일본의 침략전쟁 개시를 승인한 것을 의미했다. 미국도 러시아를 위험시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게 했다. 반면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침략 기도에 대해서는 경계하면서도, 일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려는 정책은 취하지 않고 장차의 침략기회만 노리고 있는 단계였다.


그리하여 청의 식민지적 지배와 일본 상업자본의 진출, 조선왕조의 압제 등에 시달려온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이 봉기(蜂起)하여, 1894년 5월에 전주(全州)를 점령하자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6월 8~9일 청군 2,400여 명이 아산만(牙山灣)에 상륙하여 12일부터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텐진조약의하여 조선에서 청ㆍ일 양국의 세력균형을 요구하던 일본 정부는 6월 초에 출병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일본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아래 해군과 육군의 대부대를 파병했고, 이어 인천-서울 간의 정치적·군사적 요충을 장악했다. 그 들은 일본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아래 해군과 육군의 대부대를 파병했고, 이어 인천-서울 간의 정치적·군사적 요충을 장악했다.


일본군의 침입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갑오농민전쟁이 이미 진정되었음을 이유로 청·일 양군의 동시철병을 요구했다. 일본의 오오토리[大鳥] 공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갑오농민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의 내정개혁(內政改革)을 구실로 철수를 거부했다.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는 겉으로는 '일본의 자위(自衛)를 위해 조선내정의 개혁을 촉구하여 변란의 근원을 단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러시아에 대처할 전략적 시설을 한반도 안에서 확보하고 불평등조약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본원적 축적을 강행하려는 것이었고, 나아가 조선을 보호국화(保護國化)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이 철수한 후 비로소 내정개혁을 실시할 수 있다고 하여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은 7월 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했고, 7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이 당시 일본은 청국이 북양함대의 군사력이 증강이 미진한 사이, 자력으로 건조한 순양함, 철 갑함 다수를 포함하여 1894년 당시까지에 55척, 6만톤의 대해군을 건설하였다. 특히 북양 함대에는 1문도 없었던 최신의 속사포 155문을 갖추었다. 그 결과 1884년의 시점에 일본해 군은 북양함대에 비해 주력함의 평균시속이 1해리 빠르고 평균선령도 2년이 적었으며, 포 의 발사속도도 4-6배 우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7월 25일 풍도(豊島) 앞바다의 해전과 29일 성환(成歡) 육전에서 청국군을 격파하였고 7월 30일 아산을 점령하였다. 8월 1일의 개전 후 9월 15일에는 평양을 지키고 있던 청군 1만명을 패퇴시켰으며, 육전과 황해 해전에서 우세를 확보한 일본은 랴오둥[遼東]반도의 탈취 계략을 세우고, 10월에 청국 영토에 진격하여 뤼순[旅順]학살사건을 일으킨 후 봉천(奉天) 남부를 제압, 이어서 웨이하이웨이[威海衛] 군항에서 북양(北洋)함대를 격멸함과 동시에 타이완[臺灣] 점령을 위하여 펑후섬[澎湖島] 작전을 벌였다. 즉, 8월초에 일본군은 아산·공주(公州)·성환(成歡)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에 공격을 가하여 승리하고, 계속 북상하여 9월에는 평양에서 청군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청군은 9월 16일 밤 평양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평양전투의 승리를 전기로 하여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고, 갑오정권(甲午政權)의 개혁적 성격도 희석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군수물자만 자국에서 가지고 왔을 뿐, 8월 27일 체결된 '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對朝鮮對日本兩國盟約 朝日盟約)에 의해 식량·부식물·군수물자 수송의 노동력을 대부분 현지에서 조달했으므로 전쟁터가 된 조선의 민중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의 자주권은 유린되었다. 이에 농민군은 그해 10월 다시 전면적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공주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급히 남하하여 조선정부군과 함께 농민군토벌에 나섰다. 결국 농민군은 12월 우금치 전투에서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한편 9월 17일 황해해전(黃海海戰)에서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주력을 격파한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하고 11월 6일 진저우 성[錦州城]을 점령했다. 부패한 청군 지도부의 무책임한 대처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11월 22일 뤄순[旅順]이 점령되었다. 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한 청국은 95년 3월 강화 전권대사 이홍장(李鴻章)을 파견하여 30일에 휴전, 4월 17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하지만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도 일본의 야욕은 드러났다. 즉, 전쟁에 참패한 청나라정부는 강화를 시도하고 대표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청나라 대표단이 파견되기 직전, 일본에서는 조선의 독립승인(청의 종주권 파기), 랴오둥[遼東]·타이완[臺灣]·펑후[澎湖]의 할양, 배상금지불, 서구열강과 맺은 것과 같은 통상조약(불평등조약)을 일본과 체결할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강화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1895년 1월 30일 청나라 대표단이 도착하자, 일본은 시간을 지연시켜 점령지를 확대함으로써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하려는 속셈에서, 대표단의 권한부족을 트집잡아 귀국시켰다. 그동안 일본 해군은 1월 20~23일 위해위(威海衛)를 봉쇄한 다음, 2월 12일 육군의 상륙작전으로 이를 함락시켰다. 사태의 급진전에 놀란 청나라 정부는 이홍장(李鴻章)을 강화전권대사로 하는 새로운 대표단을 시모노세키[下關]파견하고, 일본측이 제시하는 강화초안을 수용하여 4월 17일 조약에 조인했다. 일본은 ①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파기, ②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펑후섬의 할양,쑤저우[蘇州] 등 4개 도시의 개항③ 배상금 2억 냥(3억 엔) 지불, ④ 열국과 동일 특권을 인정하는 통상조약의 체결 등을 얻었으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3국 간섭 앞에 무릎을 꿇고 랴오둥반도는 반환되었다. 타이완 민중은 일본에의 할양을 거부하며 저항하였는데, 일본은 고전 끝에 11월에 이를 진압하였다.

청일전쟁은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얻은 막대한 배상금, 과중한 세금수탈로 만들어진 군사비, 식민지 타이완으로부터 얻은 이윤, 전쟁으로 축재한 자본가의 이윤 등을 바탕으로 전쟁 후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반면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었던 변혁의지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으로 압살 당함으로써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었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되어갔다. 또한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렸다.


【참고사이트】

1. 청일전쟁 이전의 조선정세

2. 청일전쟁 시의 일본의 입장

3. 청일전쟁에 대한 비평만화

4.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사진

5. 청일전쟁에 대한 동영상


 

 

19. 양무운동(P.59)

 

19세기 후반 군사 중심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청나라 관료군(官僚群)의 운동이다. 봉건체제의 유지 보강을 서유럽으로부터의 근대기술 도입에서 이루려 한 청국 정부의 자강(自强)운동을 말한다. 당시 밖으로는 아편전쟁 ·애로전쟁 등으로 해서 배외(排外) ·쇄국(鎖國)주의가 굴복되고, 안으로는 태평천국운동으로 해서 봉건적 지배체제가 위기에 빠졌다. 이러한 사태 아래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 한인(漢人) 관료와 공친왕(恭親王) 등 궁정대관료(宮廷大官僚)는 근대무기의 수입 ·제조를 개시하고 군사공업을 일으켰다. 즉, 청나라 정부가 1861년 베이징[北京]에 총리아문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1865년 상하이[上海]에 강남기기총국(江南機器總局)이, 난징[南京]에 금릉기기국(金陵機器局)이 설립되어 총탄·화약·총포 등이 제조되었고, 1868년 강남기기제조총국에 번역관을 설치, 〈기기발궤 汽機發軌〉·〈태서채매도설 泰西採煤圖說〉 등 자연과학·기술·역사·국제법에 관한 외국서적이 번역되었다.

  그리고 1882년에는 상하이 기기직포국[上海機器織布局]이 설치되고, 1894년 상하이 화성기기방적창, 후베이 방적국[湖北紡績局] 등이 설립되어 방적부문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교통·운송 부문에서는 1873년 수선초상국(輸船招商局)을 만들어 연해(沿海)·내해(內海)에서 영국·미국의 기선들과 대항했으며, 1880년 탕산[唐山]-쉬거좡[胥各莊] 사이에 석탄수송을 위한 철도가 부설되었다. 이들 실업의 촉진사업에는 자금조달 및 경영에 있어 상인들의 참가가 요구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한편 양무운동의 교육분야는 인재양성을 위한 학교설립으로 두드러진 성과를 나타냈다. 1862년 베이징 총리아문에 외국어학교인 동문관(同文館)이 부설되고 미국인 선교사 마틴이 교장으로 초빙된 데 이어, 1866년 푸젠[福建]에 상정학당(商政學堂), 1867년 상하이에 기기학당(機器學堂), 1880년 북양수사학당(北洋水師學堂), 톈진 무비학당[天津武備學堂] 등의 기계기술학교 및 군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들 관립학교 외에 상하이 격치서원(格致書院)·정몽서원(正蒙書院) 등 양무운동에 호응하는 사립학교도 등장했다. 또한 1872~84년에 120여 명이 외국에 유학했다. 한편, 장즈둥[張之洞] ·성쉬안화이[盛宣懷] ·장젠[張룝] 등도 관상합판사업(官商合辦事業)을 크게 일으켜, 한때 청나라의 지배체제는 안정되었다. 그러나 이 자강운동은 군사중심의 근대화에만 치중하였기 때문에 사회 ·정치체제의 근대화는 등한시되었고, 때마침 프랑스와의 전쟁, 일본과의 전쟁에서 뼈아픈 타격을 받아 그 약체성이 노정(露呈)되었다. 이리하여 구체체(舊體制)의 지배자는 그 자리를 무술변법(戊戌變法)운동의 지도자에 물려주었다. 그러나 이 양무운동이 중국 자본주의 발달의 싹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참고사이트】

1. 양무운동에 대하여


 

 

 

20. 메이지유신(明治維新)(P.59)

 

이는 선진자본주의 열강이 제국주의로 이행하기 전야인 19세기 후반의 시점에서 일본 자본주의 형성의 기점이 된 과정으로 그 시기는 대체로 1853년에서 1877년 전후로 잡고 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페리 제독이 미국 대통령의 개국(開國) 요구 국서(國書)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즉 1853년 7월 프리깃함(艦)인 미시시피호(號)에 승선,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일본의 우라가[浦賀]에 입항, 필모어 대통령의 국서(國書)를 우라가 부교[奉行:막부시대에 행정사무를 담당한 무사의 직함]에게 수교(手交)하며 개항을 요구하였으며, 1854년까지의 유예기간을 두고 일단 물러갔다. 이때 유신의 싹이 텄고, 1854년 미 ·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칙허 없이 처리한 막부(幕府)의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반막부세력(反幕府勢力)이 일어나 막부와 대립하는 격동을 겪었다. 그러다가 300여 년 내려오던 막부가 1866년 패배하였고, 1867년 10월 14일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루어졌으며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또한 천황은 <5개조 서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1868년 4월 6일(음력3월14일) 군신에게 조서를 내린다.

  1. 널리 회의를 일으키고, 만사를 공론에 의해 결정한다.

  2. 상하 마음을 하나로 하여 활발하게 경륜을 행한다.

  3. 문무백관이 하나가 되어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 뜻을 세워 민심을 흔들리지 않기를 요한다.

  4. 구례의 누습을 타파하고 천지의 공도에 기초한다.

  5. 지식을 세계에 구해 크게 황기를 떨친다.

 

 *우리나라 미증유의 변혁을 이루고자하니 짐이 스스로 모두 앞장서서 천지신명에게 맹서하여 크게     국시를 정하고 만민보전의 길을 세우고자 한다. 모두도 또한 이 취지에 따라 협심, 노력할 지어다.

 *케이오4년, 무진3월14일 어위

  이와 함께 메이지 정부는 학제 ·징병령 ·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국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는 관주도(官主導)의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여 새 시대를 열었다. 즉 그 내용은 1869년에 다이묘들의 영지와 영민들을 천황에게 반납하게 하고(版籍奉還), 1871년에는 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하였으며, 사민평등이 이루어져 평미들도 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1872년, 학제를 제정하고 신분이나 직업에 관계없이 국민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1873년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개혁정치를 해나가는 데는, 무엇보다도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따라서 1873년 정부는 세수입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방법을 바꿨다(地租改正). 그것은 우선 지주나 자작농에게 지권을 나누어 주고, 에도시대에 애매했던 토지의 소유권을 확실히 만든 다음, 그 지권을 갖고 있는 자에게 그 토지에 상당하는 만큼의 세금을 현금으로 납입하게 했다. 그러나 이 개정은, 납입하는 세금이 에도시대와 같은 정도의 중과세였기 때문에, 농민들 중에는 세금을 낼 수 없어서 토지를 파는 사람도 생겨났고, 또 토지를 갖지 못하는 일반 소작인은 수확한 쌀의 50%를 소작료로서 지주에게 내어야만 했다. 게다가 에도시대에는 부락에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신정부가 모두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농민이 이용할 수 있는 토지는 전시대보다 더 적어져, 대다수 농민의 생활은 에도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새로운 시대가 되면 생활이 좀 더 나아지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농민은, 이와 같은 제도에 큰 불만을 가졌다. 다른 한편, 소작료를 쌀로 받는 지주들은 쌀값이 오를 때 내다 팔아 큰 이익을 얻어 광대한 토지를 가진 기생지주화했다. 이 지조개정 후, 농촌의 가난한 소작인이나 자작농의 2,3남은 농촌을 떠나 도회지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들은 일본의 근대산업 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이 되고, 또한 징병제도를 지탱하는 중요한 병력이 되었다. 국민들의 생활면에서도, 태양력의 사용, 1일을 24시간, 1주일을 7일로 정하고 일요일을 휴일로 하는 서양의 7요제도를 도입했다. 또 외국 정부의 압력으로 기독교 신앙도 인정하게끔 되고 신문도 속속 간행되었다. 토쿄의 긴자거리에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들이 늘어서고, 도로에는 가스등이 설치되었으며, 상투머리를 자르고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는 것이 새로운 풍속이었다. 또 그 때까지 먹지 않았던 소고기를 먹게 되어, 도처에 소고기전골집이 생겨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 무렵, 정부 내에는 사쯔마번과 쵸오슈우번 출신자가 각각 파벌을 조성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진 자가 적지 않았다. 특히, 사족계급은 메이지유신 때문에 실직한 뒤, 장사들을 했지만, 장사 경험이 없는 관계로 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사족의 반란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사이고오 타까모리는 신정부에 대한 사족의 불만을 외부로 배출시키기 위해서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지만, 구미 선진국의 발전상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온 온건파 오오꾸보 등은 국내정치를 충실하게 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 이에 반대했다. 1877년 불만 사족세력이 사이고오를 부추겨서 가고시마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西南戰爭). 그러나 징병제에 의해 잘 훈련된 신식군대는 이 반란을 반년만에 진압해 버렸다. 1881년에 일본에서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을 만들었다. 또 다음해 오오꾸마 시게노부가 영국식 의회주의를 주장하며 입헌 개진당을 만들었다. 1889년, 메이지천황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독일 헌법을 모델로 하여 만든 헌법 초안을, 대일본제국헌법으로 공포하고, 다음해인 1890년 제국의회를 개설했다. 이 헌법은 천황밑에 내각。재판소。의회를 두고, 행정。사법。입법의 3권분립의 형태는 취하고 있지만, 천황 주권인 헌법이기 때문에, 내각은 천황에 대해서만 정치적 책임을 지고, 의회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 육해군은 천황 직속이기 때문에, 내각이나 의회도 이를 견제할 수 없다. 국민의 권리는 일단은 인정되어져 있으나, 그것을 제한하는 법률이 있어서 자유는 엄격하게 통제되어져 있었다. 제국의회는 귀족원과 중의원을 제한하는 시스템이었다.

1890년 7월, 최초의 중의원 선거가 행해지고, 11월에 의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는 일정한

세금을 내는 25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선거권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1%만이 투표할 수 이었다. 이 유신으로 일본의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 ·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또,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천황제적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분야에 실현시키게 되었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구미에 대한 굴종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강압적 ·침략적 태도로 나왔다. 1894년의 청일전쟁 도발, 1904년의 노일전쟁의 도발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그 다음 단계가 무력으로 한국을 병합한 것이다. 이러한 군국주의의 종말은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유발하였고, 1941년에는 미국의 진주만(眞珠灣)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45년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사상(史上) 최초의 원자폭탄(原子爆彈)이 투하되는 비극을 자초하였다.


【참고사이트】

1. 메이지유신에 대하여

2. 메이지신궁 사진


 

 

 

21.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P.59)

 

우리의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 즉 동도(東道)는 지키면서 근대 서양의 과학기술, 즉 서기(西器)는 받아들이자는 이론으로, 1880년 초 정치가이며 학자인 김윤식(金允植)이 주창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동양에서는 서양 사람을 야만족으로 여겼으며 이들을 부를 때도 서양 오랑캐라는 뜻인 양이(洋夷)라는 말을 썼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 동양보다 훨씬 발달된 물질 문명을 갖춘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자, 이들과 맞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동양보다 앞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을 비롯한 일본과 조선 등 동양 3국에서는, 서양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던 도덕과 사상 등 자신의 전통문화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양보다 높은 수준에 있는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수용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 때 우리나라에서 제기된 것이 동도서기론이다.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 중국에서 양무운동(洋務運動)의 기치로 내세운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일본의 개화론자들이 내세운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이다. 동도서기론은 서양문물 중에서도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갈라졌다. 새로운 무기만을 도입해서 서양의 침략을 물리치면 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서양의 발달된 제도와 문화까지 배워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전통문화도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모두 우리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또 동도서기론은 개화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는데, 두 사상은 노선과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었으나, 모두 부국강병근대화를 통하여 국가독립을 확보함으로써 국내외의 위기를 타개하여 보려는 목표를 추구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는 격변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역사적 추세와 사회개혁이라는 내치적 상황을 서로 조화시키려고 했다는 면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사이트】

1. 동도서기론이란


 

 

 

22.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P.60)

 

조선 후기인 1880년 군국기밀(軍國機密)과 일반 정치를 총관하던 관청을 말한다. (淸)나라제도를 모방하여 1880년(고종 17) 설치한 기관으로 그 밑에 12사(司)를 두어 사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즉, 설치 목적은 개항 후 새로운 성격의 사무와 정세변화에 대처하려는 것으로, 삼군부(三軍府)를 계승한 위에 외교·군사 관계 전권을 부여했다. 통리기무아문의 시초는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이 청(淸)의 이홍장(李鴻章)과 무비자강책을 논의한 후 1879년 변원규(卞元圭)를 청에 파견하여 신무기제조법의 학습, 즉 군계학조사(軍械學造事)를 요청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결과 청의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참조하고 군국기무까지 통괄할 정1품아문을 설치하여 개혁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880년 12월 21일 〈신설아문절목〉에 근거하여 신설되었다. 그 장관을 총리대신이라 하고 각 사에는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2사는 사대사(事大司)·교린(交隣)·군무사(軍務司)·변정사(邊政司)·통상사(通商司)·기계사(機械司)·선함사(船艦司)·군물사(軍物司)·기연사(譏沿司)·어학사(語學司)·전선사(典選司)·이용(理用)의 각 사이다. 1


*12사의 업무는 아래와 같다.

① 사대사(事大司)는 사대문서(事大文書)와 중국사신의 차송(差送) 등을 관장한다.

② 교린사(交隣司)는 교린문서(交隣文書)와 내왕사신(來往使臣)의 일을 관장한다.

③ 군무사(軍務司)는 중외(中外)의 군여(軍旅) 통솔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④ 변정사(邊政司)는 변무(邊務) 및 인국(隣國) 동정의 정탐 등사(等事)를 관장한다.

⑤ 통상사(通商司)는 중국 및 인국과의 통상에 대한 일을 관장한다.

⑥ 군물사(軍物司)는 병기 제조(兵器製造)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⑦ 기계사(機械司)는 각양(各樣) 기계의 제조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⑧ 선함사(船艦司)는 경외(京外) 각양 전함의 제조에 관한 일을 관장한다.

⑨ 기연사(譏沿司)는 연안 포소(浦所)에 내왕하는 선척(船隻)의 조검(照檢) 등의 일을 관장한다.

⑩ 어학사(語學司)는 각국의 언어 · 문자의 번역 등사(等事)를 관장한다.

⑪ 전선사(典選司)는 재예(才藝)의 선취(選取)와 각사(各司)의 수용(需用) 등사를 관장한다.

⑫ 이용사(理用司)는 경리 재용(財用) 등사를 관장한다.


당상관의 정원은 10명, 낭청은 18명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이듬해 1월 낭청을 주사(主事)·부주사(副主事)로 나누었다.  초대 총리대신은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이었고, 김보현(金輔鉉)·민겸호(閔謙鎬)·김병덕(金炳德)·김홍집(金弘集) 등 10명이 당상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12사(司)마다 당상과 낭청을 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2개사 또는 3개사를 합하여 각기 2명의 당상과 3명의 낭청을 두었다. 우선 사대교린당상(事大交隣堂上) 조영하(趙寧夏) 정범조(鄭範朝). 군무변정의연당상(軍務邊政議沿堂上) 민겸호(閔謙鎬) 윤자덕(尹滋悳). 통상당상(당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880년 12월 21일 〈신설아문절목〉에 근거하여 신설되었다.

 그 장관을 총리대신이라 하고 각 사에는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2사는 사대사(事大司)·교린(交隣)·군무사(軍務司)·변정사(邊政司)·통상사(通商司)·기계사(機械司)·선함사(船艦司)·군물사(軍物司)·기연사(譏沿司)·어학사(語學司)·전선사(典選司)·이용(理用)의 각 사이다. 12사의 업무는 아래와 같다.

당상관의 정원은 10명, 낭청은 18명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이듬해 1월 낭청을 주사(主事)·부주사(副主事)로 나누었다.  초대 총리대신은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이었고, 김보현(金輔鉉)·민겸호(閔謙鎬)·김병덕(金炳德)·김홍집(金弘集) 등 10명이 당상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12사(司)마다 당상과 낭청을 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2개사 또는 3개사를 합하여 각기 2명의 당상과 3명의 낭청을 두었다. 우선 사대교린당상(事大交隣堂上) 조영하(趙寧夏) 정범조(鄭範朝). 군무변정의연당상(軍務邊政議沿堂上) 민겸호(閔謙鎬) 윤자덕(尹滋悳). 통상당상(通商堂上) 김보현(金輔鉉) 김홍집(金弘集). 이용당상(理用堂上) 김병덕(金炳德) 민영익(閔泳翊). 기계군물선함당상(機械軍物船艦堂上) 심순항(沈舜降) 신정희(申正熙). 전선어학당상(典選語學堂上) 민치상(閔致庠) 이재긍(李載兢) 등이 그것이다.

   통리기무아문의 청사는 삼군부자리였던 지금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으나, 시급(時急)을 요하는 기밀(機密)을 다루는 기관이기 때문에 궐내에도 설치하여 당상과 낭청으로 하여금 입직(入直)하게 하고 이를 내아문(內衙門)이라 하였다. 1881년 우선 영선사(領選使)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각각 청과 일본에 파견했고,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여 신식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다음해에는 미국과의 통상수호조약 체결을 담당하고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의 신설 등 군제를 개편했다. 이것은 고종 18년(1881) 12월 25일에 무위소를 무위영(武衛營)으로 고치고, 훈련도감 · 용호영 · 호위청의 군인은 모두 무위영에 합하여 궁성을 호위하게 하고,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을 합하여 장어영(壯御營)이라 하여 수도방위를 담당하게 한 것이다. 1881년 11월 9일 신사유람단 위원들을 중심으로 기구 개편에 착수하여 12사를 동문사(同文司)ㆍ군무사(軍務司) ㆍ통상사(通商司)ㆍ 이용사(利用司) · 전선사(典選司) · 율예사(律例司) · 감공사(監工司)의 7사로 축소했다.

즉, 그 관원을 보면

동문사당상(同文司堂上): 경리사(經理事) 이재면(李載冕) 조영하(趙寧夏),

                                            부경리사(副經理事) 심상학(沈相學)

 

군무사당상(軍務司堂上): 경리사(經理事) 이재원(李載元) 신정희(申正熙) 민영익(閔泳翊) 조희순(趙羲純) 이원회(李

                         元會),

                         부경리사(副經理事) 홍영식(洪英植)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 경리사(經理事) 김보현(金輔鉉) 김홍집(金弘集),

                        부경리사(副經理事) 조병직(趙秉稷) 박헌영(朴**永) 민종묵(閔種默)

이용사당상(利用司堂上): 경리사(經理事) 민겸호(閔謙鎬) 이근필(李根弼) 박정양(朴定陽)

전선사당상(典選司堂上): 경리사(經理事) 김병덕(金炳德) 윤자덕(尹滋悳) 조준영(趙準永)

율례사당상(律例司堂上): 경리사(經理事) 심순택(沈舜澤) 엄세영(嚴世永)

감사사당상(監司司堂上): 경리사(經理事) 민태호(閔台鎬) 정범조(鄭範朝),

                        부경리사(副經理事) 강문형(姜文馨) 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882년 6월 임오군란의 결과 대원군이 재집권하면서 폐지하고 그 기능을 삼군부(三軍府)에 이관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대원군이 실각하자 기무처(機務處)로 된 데 이어 11월 기무처는 외교사무를 담당하는 통리아문과 내정을 담당하는 통리내무아문으로 분리되었다. 그해 12월에는 다시 통리아문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통리내무아문은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개칭되었고 이러한 개칭이 있기 직전 독일인 고문인 묄렌도르프가 초빙되었다. 이러한 개편을 통해 비로소 근대적인 대외·통상 관계를 전담하는 기구로 발전했으나 1884년 10월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통리군국사무아문은 의정부에 통합되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은 기능이 외교·통상만으로 축소되고 전문기술적 부서들은 분설되었다. 분설된 기구는 1887년 4월 총무사(總務司)·통상사·교섭사·번역사·기록사·회계사 등 6사로 개편되었고, 갑오개혁 때 외무아문으로 바뀌었다.


 

 

 

23. 별기군(別技軍)(P.60)

 

1881년(고종 18)에 설치된 신식 군대의 일종.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래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가 더욱 심하여졌다. 조선정부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모색하였고, 이러한 일환으로 군사기예에 대한 문제는 교사를 초빙하여 신식 군사연습을 실시하도록 계획하였다. 일본은 조선정부의 이와 같은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고 1881년 4월 군사훈련을 위한 교사문제를 돕겠다고 나섰으며, 고종은 이에 따른 일본측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병사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이에 군무사에서는 오군문(五軍門)으로부터 지원자 80여 명을 선발하여 무위영(武衛營)에 소속시키고 이를 별기대 또는 별기군이라 하였으며, 일본인 교관에 의하여 훈련된다고 하여 왜별기라고도 하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대이다. 지휘부는 민영익(閔泳翊) 등이 중심이 되었다. 별기군의 훈련은 그해 5월부터 시작되어 하도감(下都監) 자리에서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별기군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하도감의 교련장에서 구식 군대의 습격을 받아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掘本禮造(굴본례조)] 등이 살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군사제도가 다시 옛 군영체제로 바뀌면서 별기군은 모두 오군문의 본대로 복귀하였다.


【참고사이트】

1. 별기군의 복장

2) 별기군의 훈련모습

3) 별기군 사진


 

 

 

24.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P.60)

 

정부는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통리기무아문의 운영과 개화 정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조사 시찰단을 파견하였다(1881).박정양 등 12명의 조사를 비롯하여 모두 62명으로 구성된 조사시찰단은, 일본의 각 정부 기관에서 맡고 있는 사무 조사, 산업 시설과 군사 시설을 두루 살펴보았다. 또, 미국과의 수교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며, 인천 개항에 대비해, 세관 사무를 조사하였다. 조사 시찰단이 근대화된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한 보고서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뒷받침이 되고, 정치가들이 국제 정세를 파악, 개화의 필요성을 자각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일행 가운데 대부분은 귀국 후 통리기무아문에서 중용한 직책을 맡고, 일부는 최초의 일본유학생이 되어 근대적 학문과 기술을 익힘으로써 개화 정책을 펼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참고사이트】

1. 조사시찰단의 연구자료

2. 조사시찰단에 대한 신문자료


 

 

 

25. 영선사(營繕司)(P.60)

 

조선 후기에 유학생 일행을 인솔, 청(淸)나라에 파송된 사신을 말한다. 1881년(고종 18) 신식 무기의 제조 및 사용법을 배우기 위한 유학생 69명을 선발하여, 김윤식(金允植)이 영선사가 되어 그들을 인솔하고 청나라에 가서 톈진 기기창[天津機器廠]에서 무기제조 기술을 습득케 하였다. 즉, 1876년 개항 이후 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의 온건개화파들이 중심이 되어 무비자강(武備自强)의 일환으로 중국에 도입되어 있는 서구과학기술 및 병기의 도입과 학습을 위한 유학생 파견을 시도했다. 1879년 8월 헌서뇌자관(憲書賚咨官) 이용숙(李容肅)은 영중추부사 이유원(李裕元)의 밀지를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전달하면서 병기제조와 군사훈련 등에 대한 자문과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이홍장이 긍정적 반응을 보이면서 1880년 4월 정부에서 구체적 논의를 했는데, 많은 대신들은 인선·재정 문제를 들어 신중론을 폈다. 그러나 고종이 큰 관심을 보여, 변원규(卞元圭)를 청에 파견해 '조선국원변래학제조조련장정'(朝鮮國員弁來學製造操練章程)을 체결했다. 변원규가 귀국하여 유학생 파견을 서두르자, 이준선(李駿善)·허원식(許元) 등은 "도리어 오랑캐를 불러들이는 매개가 된다"는 반대상소를 올렸고, 일본 측도 신군제와 연병은 자신들의 것을 참고하기를 권했다. 이에 정부는 청·일 사이에 중립형평안을 써서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중국에 영선사를 파견하여 근대문물을 고루 섭취하기로 했다.

  그러나 청으로의 유학생 파견은 영선사로 임명된 조용호(趙龍鎬)의 병사(病死) 등으로 5차례나 일자를 변경한 끝에 1881년 9월 26일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영선사단은 영선사 김윤식, 종사관 윤태준(尹泰駿), 별유당상 변원규·이근배 등이었다. 유학생은 고영철·이필선 등 학도 20명과 김원영 등 공장 18명으로 총 38명이었다. 결국 관원·수종·사적 수행인을 합쳐 모두 83명의 대규모 사절단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재정문제와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의 항의로 병술훈련을 위한 변병(弁兵) 파견은 미루어졌다. 영선사 일행은 9월 26일 서울을 출발하여 육로로 11월 17일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김윤식은 도착 직후 3차례 이홍장과 회담했는데, 이홍장은 일본 견제를 위해 조선의 연미론(聯美論)을 권유하고, 전권대표 파견과 수호조약초안 검토, 미국사신의 내조문제 등을 협의했다. 한편 유학생들은 1882년 1월 8일부터 톈진기기국[天津機器局] 동국·남국에 배속되어, 화약·탄약 제조법, 기계조작법 등 근대적 군사지식뿐 아니라 자연과학·외국어 등도 학습했다. 그러나 5월초까지 19명의 유학생이 신병 등으로 중도에 귀국했고 정부에서 재정지원을 충분히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학습이 심도있게 진행되기는 어려웠다. 또한 조선의 기기창(機器廠) 설립 계획이 수립된 데다 6월 9일에는 임오군란이 발발하여 유학생 파견 당시의 민씨정권이 무너지자, 유학생들의 장래 전망도 불투명해졌다. 이에 김윤식 등은  충주로 피신 한 민비의 요청에 따라 청에 군병을 요청하여 같이 귀국했다가 9월 29일 잔류 유학생 귀환과 기기구입을 위해 톈진으로 갔다. 잔류 유학생들은 11월 1일 인천으로 귀국했는데, 실제 학생들의 학습기간은 6개월 정도였으며, 무비자강의 목표도 완수하지 못했다. 이들은 서울 삼청동에 종사관(從事官) 김명균(金明均)이 데리고 온 톈진 공장(工匠) 4명과 함께  한국 최초의 신식 무기제조창인 기기창을 설립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26. 조선책략(P.62)

 

주일청국참사관(駐日淸國參事官)으로 있던 청국인 황준헌(黃遵憲)이 1880년경에 저술한 외교문제를 다룬 책이다. 원명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다.  러시아의 남하정책(南下政策)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선 ·일본 ·청국이 장차 펼쳐야 할 외교정책을 논술하였다. 조 ·일 ·청 3국은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배워야 한다는 것, 러시아의 남진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동양 3국이 수호(修好)하여야 하며, 미국과 연합하는 것(親中國 結日本 聯美邦)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우선 친중국의 이유는 중국이 물질이나 형세에서 러시아를 능가하고, 조선은 중국의 번속국(藩屬國)으로 1,000년이라는 세월을 지내왔기 때문에 금일에도 더욱 우호를 증대하여 러시아를 공동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이 중국 이외에 수호한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에 서로 결합해야 하며, 미국은 독립정신이 남아 있는 민주국가로서 약소국을 돕고 서양의 침략적인 악행을 막아주고 있으니 비록 조선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연합하면 화를 면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이나 일본도 선진국 세력에 적대하고서는 국가의 안위가 위태롭기 때문에 개국한 것이므로, 조선의 쇄국정책도 끝까지 고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대외세력의 방어에 자신이 없으면 개국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일본·미국과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곧바로 중국과 일본에 학생을 파견하여 병기제조·군대편성·외국어교육과 천문·화학 등 서구의 여러 학문을 습득하게 하는 한편, 부산 등지에 학교를 세워 서구의 기술을 교육하고 무기를 구입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친중국·결일본·연미국의 외교정책은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무사할 때에 공평한 조약을 맺게 해주며, 통상에도 이익을 가져다주고, 국가 부의 축적 및 군비강화에도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므로, 결국 조선이 자강하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했다.

  1880년(고종 17)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金弘集)이 저자로부터 직접 받아 가지고 와서 고종에게 바쳤던 바, 고종은 이 책의 내용을 대신들로 하여금 검토함과 동시에 이를 복사(複寫)하여 전국의 유생(儒生)들에게 배포하여 그들의 식견을 넓히려 하였으나, 오히려 유생들의 반대를 받게 되었다. 유생들은, 일본은 양이(洋夷)와 같으며, 서양과 수교한다든가 연합한다는 것은 가톨릭교를 퍼뜨리는 결과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연명(連名)으로 상소까지 하였다. 즉,

이듬해 영남유생 이만손(李晩孫) 등이 주동이 되어 〈영남만인소 嶺南萬人疏〉를 올려 김홍집 일파를 탄핵했다. 여기에서 이만손 등은 〈조선책략〉이 패륜망덕한 불온문서라고 단정하고 그 8대불가론(八大不可論)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 뒤에 중국·일본·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막는다는 주장의 불합리함을 지적했다.  또한 서학(西學)에 종사하여 치재(致財)·권농(勸農)·통공(通功)에 진력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에게는 고래로 양법(良法) 선규(善規)가 있으므로 서학에 종사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황준헌이란 자는 중국인이라 하지만 일본의 설객(說客)이며 야소(耶蘇)의 선신(善神)이며, 그와 같은 사서(邪書)를 가져온 김홍집을 처벌하고 그 책자를 불 속에 던져 위정척사의 대도(大道)를 명시하라"고 주장했다.


【참고사이트】

1. 조선책략 사진


 

 

 

27. 만인소(萬人疏)(P.62)

 

조선시대 1만 여 유생이 잘못된 정부 시책에 대해 집단적으로 연명하여 올린소  유생의 집단적인 상소는 16세기까지는 성균관과 4학유생이, 16세기 중엽부터는 지 방 사족인 사림이 주도하였다. 그 규모도 처음에는 수백에서 약 1,000명이 연명 하여 상소하던 것이, 18세기 말 이후에는 1만 안팎이 집단적으로 연명한 상소가 나오기 시 작하였다. 최초의 만인소는 1792년(정조 16) 유학 이우를 소두로 한 영남유생 1 만 57명이 사도세자의 신원을 위한 상소였다. 1823년(순조 23) 경기·호서·호남·영 남·해서·관동의 유생 9,996명이 서얼도 차별없이 임용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 고, 55년(철종 6)에는 경상도 유생 1만이 장헌세자의 추존을 요청하는 소를 올렸다. 가장 알려진 것은 개항 뒤 정부의 개화정책을 반대한 봉건유생이 81년(고종 18)에 올린 것이다. 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주일청국공사관 참찬관 황준헌 이 지은 조선책략을 왕에게 올렸는데, 그 내용은 러시아의 남하정책 을 막으려면 친청국·결일본·연미국 해야 한다는 조선의 외교정책 의 방향을 담은 것이었다. 정부는 조정회의를 거쳐 《조선책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 정하고, 청에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와 수교할 뜻이 있음을 표명하였다. 이에 81년 2월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이 소두가 되어 안동·상주 등의 영남 유생이 만인 소를 올려 조정의 개화정책을 반대하고 개화파를 비난하였다. 이들은 척사론의 입장에서 “러시아·미국·일본 등은 모두 오랑캐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차이가 없고, 현실적으로 그들이 조선에 들어와 통상과 토지를 요구하면 조선은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고 하면서, 간교한 일본과의 결탁이 초래할 위험성, 미지의 미국을 끌어들여 처하게 될 어려운 국면, 그 리고 쓸데없이 러시아를 자극하여 오히려 침략을 자초할 결과 등을 지적하였다. 영남만인소 는 각지 봉건유생의 호응을 받아 그해 5월에 경기·충청 유생이, 윤7월에는 강원도 유생이 《조선책략》을 반대하는 척사상소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정부는 처음에는 유생이 가진 정 치·사상적 기반과 영향력을 고려하여 봉건적 배외주의의 입장에서 연명하여 올린 만인소를 받아들여, 일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근거로 한 외교정책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고종의 척사윤음 발표는 봉건유생을 회유하고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잠정적인 조처였다.


* 상소내용 *


고종 18년 신사(1881, 광서 7) 2월에 조정에 올라온..

유생 이만손 등의 올린 영남만인소의 상소 내용입니다.


- 2월 26일(무오) 음력 맑음 -


주제 : 황준헌의 "사의조선책략"을 태워 사교를 물리치고..

정도를 지킬 것을 주청하는 경상도 유생 이만손 등의 상소.


경상도 유생 이만손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은 모두 영남의 소원한 종적으로 유신(새로운)의 정치를 도운 적이 없습니다.

곧 삼가 수신사 김홍집이 받아 가지고 온..

황준헌의 "사의조선책략" 한 책이 유전(퍼트린)한 것을 보니..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머리털이 쭈뼛해지고..

담이 떨리며 이어서 통곡하여 눈물이 흐릅니다.

부정한 도(道)로 뭇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은 형벌이 국법에 드러나 있고..

한통속이 된 자들을 먼저 다스린다는 가르침이 "춘추"에 실려 있으니..

이를 따르면 다스려지고 이와 반대로 하면 어지러워지는 것은..

백대의 뒤에서 백대의 왕을 차등해 보건대 똑같아 혹시라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널리 생각해 보건대, 우리 국조는 열성이 서로 계승하여..

유학을 높이고 도를 중시하여 이에 지금에 이르러 아름다우니..

삼대 이후로 이와 같이 성대함에 이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예수의 사교(간사한 종교)를 행하는 자들이..

바다 밖의 오랑캐 종족에서 나와 예의 염치는 말할 것도 없고..

윤강과 이칙마저 일체 다 쓸어 없애 버리니..

다만 일개 금수일 뿐이고 개와 양일 뿐입니다. ..(중략)..


..일찍이 10년이 못 되어 요사한 양인들과 추악한 왜인들이..

어지럽게 왕래하여 전에 몰래 서로 속이어 꾀려고 하던 말을..

지금 이에 버젓이 책에 쓰고, 전에 사사로이 서로 전습하던 것을..

지금 이에 드러내 놓고 우리에게 전파하니..

주공과 공자를 능간할 수 있다는 말과..

우리 정자와 주자를 업신여기는 구절은..

어쩌면 그리도 성인을 무함하며 어쩌면 그리도 나라를 욕되게 한단 말입니까.

아, 자고 이래로 임금에게서 옷을 얻어 입고 임금에게서 얻어 먹으며..

유자의 관을 쓰고 유자의 옷을 입고서..

사신의 임무를 맡아 오랑캐 지역을 빙문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는 글을 받들어 가지고 와서 조정에 전파하고..

성인을 속이는 말을 간직하여 가지고 와서 중외에 퍼뜨리는 자는..

과연 어떠한 죄에 해당되며 다스림에 마땅히 얼마나 엄하게 해야 하겠습니까.


청컨대, 다시 이른바 "사의책략"이란 것을 가지고 조목에 따라 분별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르기를..

"조선의 오늘날의 급선무는 러시아를 막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고..

러시아를 막는 계책은 중국과 화친하고 일본과 결탁하고 미국과 연합하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은 우리가 번국(제후의 나라)이라 칭하며 섬겨 온 나라이니..

신의가 서로 두터운 지가 거의 2백 년이나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황제라 하고 짐이라 하여..

거만하게 두 존귀함을 칭하고 사양하고 받음이 없으며..

그 사람을 용납해 주고 그 글을 남겨두니..

만에 하나 이것을 잡고 힐문하여 꾸짖고 책한다면 어떻게 해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본은 우리의 기미국(속국, 여기서는 속국이라는 개념보다는..

오랑캐국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입니다.

관문과 요새의 험하고 평탄함을 저들이 이미 익숙히 알고 있으며..

수륙의 요충지를 저들이 이미 점거하고 있으니..

만에 하나라도 우리나라가 대비가 없음을 엿보고 제멋대로 쳐들어온다면..

장차 어떻게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은 우리가 평소 잘 모르는 바입니다. 저들에게 사주를 받아..

공연히 우리나라를 끌어대어 풍랑을 헤치고 온갖 험난함을 무릅쓰고 와서..

우리 신료들을 피폐하게 하고 우리 재물을 자꾸 없애니..

만에 하나 우리나라가 비었음을 엿보고 우리의 약함을 업신여겨..

따르기 어려운 청을 강요하고 계속 대기 어려운 비용을 떠맡긴다면..

장차 어떻게 응할 수 있겠습니까.


러시아는 우리가 본래 혐의하지 않던 바입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질하는 말을 믿고서 우리의 체면에 손상을 주면서..

먼 나라는 치고 가까운 나라와는 친교를 맺어 조처가 전도되었으니..

헛소문이 먼저 퍼져서 이것을 구실삼아 틈을 만들어 전쟁의 단서가 이어진다면..

장차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물며 러시아와 미국과 일본은 똑같은 한 오랑캐이니..

그 사이에 후박(차이가 없다는 뜻일 겁니다)을 두기가 어렵습니다.

두만강 일대는 국경이 서로 연접하였으니..

만에 하나 일본이 이미 행했던 전례를 따르고..

미국이 신설한 조약을 끌어다 대어 땅을 청하여 와서 살고..

재화를 교역하기를 청한다면 장차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물며 넓은 바다 안팎에..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니..

만에 하나라도 제각각 흉내내어 땅을 청하고 화친을 청하기를..

일본이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장차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허락하지 않는다면 전공(전에 일궈놓은 노력들을 일컷는 것 같습니다)이..

다 쓸모 없게 되어 원수가 되고 온갖 원한이 모여서 적이 될 것은..

다만 러시아 한 나라일 뿐만이 아닐 것이요..

만일 허락한다면 한 모퉁이의 우리나라는 장차 용납될 곳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러시아가 황준헌의 말처럼..

힘이 능히 병탄할 수 있고 뜻이 침략하는 데에 있다면..

장차 만리의 구원을 앉아서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홀로 도성의 군대를 일으켜 대적하여야 하겠습니까.


이는 그 이해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조정에서는 어찌 괴롭게 이런 백해무익한 일을 하여..

러시아의 무심한 마음을 계도하고 미국의 일없는 일을 생겨나게 하여..

도적들을 초치하고 오랑캐를 부른단 말입니까. ..(중략)..


..저 황준헌이라는 자는 자칭 중국 태생이라고 하면서..

일본의 유세객이 되어 예수를 선한 신이라 하여 난적의 효시가 되니..

아마도 지난번 사당과 비류가 심도의 패배를 분개하여..

병력으로써 승리를 취할 수 없음을 알고서..

요행히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려는 욕심을 부려..

전전하여 물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말이 감언 이설로 달래어 꾀는 것이..

너무 지극하고 위협하는 말로 두렵게 함이 너무 지극합니다.

또 교의(종교의 가르침)를 전파하는 것이 무해하다는 말을 글 뒤에 붙인 것은..

그 의도가 사교를 우리나라에 퍼뜨리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시고 과단성 있는 정사를 행하시어..

그 사람은 모두 쫓아 버리고 그 글은 물과 불 속에 던져 넣어..

좋아하고 싫어함을 분명히 보이고, 중외에 포고하시어..

온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게 하고..

주공과 공자, 정자와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게 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윗사람을 가까이하고..

어른을 위해 죽어 백성들이 성을 이루어..

비류와 사당이 간악한 짓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우리나라의 옛 풍속이 장차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사교를 물리치고 정도를 지키는 것(벽사위정, 闢邪衛正)은..

어찌 그대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다른 나라 사람이 사사로이 모의한 글에 이르러서는..

애당초 족히 깊이 연구할 것도 못 되거늘..

그대들이 또 잘못 보고서 들추어 낸 것이다.

이것을 구실삼아 또 번거롭게 상소를 올린다면 이는 조정을 비방하는 것이니..

어찌 선비로 대우하여 엄중히 처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그리 알고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참고사이트】

1. 만인소에 대한 연구자료

2. 만인소 사진자료

3. 상소하는 유생사진


 

 

 

28. 조ㆍ청 상민수륙무역장정(P.64)

 

1882년(고종 19) 8월 23일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두 나라 상인의 수륙 양면에 걸친 통상에 관한 규정으로 전문 8조이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민씨(閔氏)정권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한 청나라는, 그 해 8월 23일 ‘조중상민무역장정’을 맺고 조선에 대한 경제침투를 강화하였다. 즉, 1882년 2월 17일 연미사(聯美事)와 통상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이조연(李祖淵;1843~1884)을 문의관(問議官)으로 청에 파견했다. 2월 29일 이들과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1835~1922)은 이홍장에게 자문을 초록하여 전했는데, 그 내용은 통상문제로 사절단이 상주한다면 미리 통상장정을 체결함이 좋고, 개시를 폐지하여 러시아의 육로통상 요구를 막으며, 연공(年貢)·하사(賀謝)·진주(陳奏) 등의 사대사행은 폐지하되, 통상사절은 여비와 양식을 자비 부담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런데 그해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청은 군대를 파견하여 대원군정권을 전복하고, 민씨정권을 다시 세워 절대적 우위를 점했다. 8월 12일 조선정부는 진주사 조영하(趙寧夏;1845~1884)를 전권대신에 임명하고 김홍집(金弘集)·어윤중과 함께 청에 보내 주복·마젠충[馬建忠] 등과 통상문제를 마무리짓게 했다. 그리하여 8월 23일 전문 8조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

  

무역장정의 전문에서 "이번에 정약하는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을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각국은 일체 균점할 수 없다"라고 하여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명시하려 했다. 제1·2조에서는 조선측 사절의 베이징[北京] 상주 요청을 거부하는 대신, 조선의 왕과 북양대신은 동등한 지위이며, 양자는 개항장에 상무위원을 파견하되 청측은 영사재판권을 행사하는 치외법권 규정을 두었다. 3조에서는 황해도 연안 및 산둥[山東] 반도의 등주(登州) 연안에서의 어채(漁採)를 허용했다. 4조에서는 베이징과 양화진(楊花津)의 개잔무역(開棧貿易)을 허용하되 양국의 내지채판(內地采辦)은 금했다. 제5·6조에서는 책문(柵門)·의주·훈춘·회령의 개시와 홍삼세칙(紅蔘稅則)을 15/100로 규정했다. 제7·8조에서는 초상국윤선(招商局輪船)의 운항 및 병선의 조선 연해 내왕·정박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회(咨會)로 결정한다는 것 등을 규정했다. 이같은 장정 내용은 9월 12일 광시제의 재가를 받아 실효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육로통상에 관한 세부적 규정이 처리되지 않아 부속 장정의 체결을 위해 1883년 3월 14일 어윤중과 청의 장석란(張錫A) 간에 중강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육로교역은 조·청의 상인에만 한정되며, 중강 외에서는 교역을 금하고, 압록강 이내 평안도 근처의 하구로서 제품관어(祭品官漁)를 잡는 곳에서는 어선왕래와 어채를 금하며, 중강·책문 이외의 공도(貢道)에서 상품판매를 금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어 6월 6일 어윤중과 팽광예(彭光譽) 간에 회령통상장정이 체결되었다. 내용은 펑톈[奉天]의 청 조종능침지(祖宗陵寢地)와 러시아 국경 근처의 여행 금지, 구르카[庫甫喀]·경원의 호시(互市) 폐지 외에는 중강무역장정과 같았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성립 이후 조선 내정에 대한 청의 간섭이 본격화되어 이홍장의 추천으로 정치·외교 고문으로 마건상(馬建常)과 묄렌도르프를 초빙하고, 외교·통상 사무를 관장하는 통리아문을 설치했다. 군제도 청의 군제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지휘에 따라 친군 4영제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1883년 10월 청의 총판조선상무(總辦朝鮮常務) 진수당(陣樹棠)이 부임하여 각 개항장에 공서(公署)와 분서(分署)를 설치하고 상권의 확대를 도모했다. 그러나 서구 열강 및 일본 등은 청의 대조선 종주권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본은 1883년 6월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하여 최혜국 대우를 규정했고, 영국과 독일도 통상장정의 체결에서 자국상인들의 조선에서의 상행위를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다음해 2월 청도 무역장정의 4조를 개정하여 내치채판이 허용되었다. 청상인들은 영국제 면제품을 들여와 비싸게 팔고 조선의 곡물과 금은 헐값에 수출됨으로써 조선의 무역수지 적자가 늘어났고, 개항장과 서울을 거점으로 한 청상인들의 내지시장 침투는 시전상인·개항장객주 들의 상권을 침탈했다.


* 조약전문 *


이건 조약이 아니라 장정입니다. 밑에 나오듯이 장정은 대등한 양국의 협정문이 아니라 중국이 속방과 맺는 협정문입니다.


전문(前文) 조선이 속방임과 청상의 특혜규정

 “오직 이번에 체결하는 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후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다른 각국과 일체 균점하는 예와 다르다”

 

 제 1조 청국 상무(商務)위원의 파견 및 이들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이 대등한 위치임을 규정.

 제 2조 조선 내에서의 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을 인정

 제 3조 조난구호 및 평안. 황해도와 산동. 봉천 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청국인의 조선연안 어업권          을 인정). 관세규정

 제 4조 북경과 한성. 양화진에서의 개잔(開棧)무역을 허용하되 양국상민의 내지채판(內地采辦) 금지.          단, 내지채판 및 유력(遊歷)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집조(執照)를 받을 것.(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도성에서의 상행위 허용. 호          조(護照:일종의 여행증명)를 가진 자에게는 개항장 밖의 내륙통상권과 연안무역권까지 인정)


 관세규정.

 제 5조 세칙규정. 책문. 의주, 훈춘. 회령에서의 개시

 제 6조 홍삼무역과 세칙규정(국경무역에서 홍삼을 제외한 5 % 관세)

 제 7조 초상국윤선(招商局輪船) 운항 및 청 병선의 조선연해 왕래. 정박

 제 8조 장정의 수정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문으로 결정.


 

 

 

29. 제물포조약(P.64)

 

1882년(고종 19) 8월 30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임오군란으로 빚어진 양국간의 문제를 뒤처리하기 위해 맺어진 조약. 6개조의 본조약과 2개조의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으로 되어 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일 양군의 한성 진주와 흥선대원군의 청국 납치 문제 등이 민씨정권의 재집권에 따라 일단락 지어졌다. 이후 군란 뒤처리를 위한 조·청·일 3국의 절충 협의가 다각도로 벌어지게 되었다. 일본은 군란 때 일본세력의 조선 침투에 민족적 의분을 품고 있던 병사들과 시민들에 의해 공사관이 습격당했고, 별기군(別技軍) 교관 호리모토(堀本禮造)등 수 명이 살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군 3,000명이 한성에 진주하면서 청국의 정치적 영향은 커졌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의 일본세력은 일시에 후퇴를 강요당하게 되는 지경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피해 보상과 거류민 보호를 내세우면서 무력을 배경으로 교섭을 추진하였다. 일본의 정치력을 조선에 재 침투시키기 위한 교섭의 담당자로 전권위원(全權委員)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를 다시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이노우에(井上馨)를 조선에서 가까운 시모노세키(下關)에 출장하게 하여 하나부사의 교섭을 지휘하게 하였다. 하나부사는 ‘조선정부와의 담판에 관한 훈령’과 ‘조선정부와의 담판에 관한 내훈’의 받아 다수의 군사력을 대동, 제물포를 거쳐 한성에 들어와서 7개 조항의 요구를 제시하였다.


조선 정부는 봉조하(奉朝賀) 이유원(李裕元)을 전권대신으로, 공조참판 김홍집(金弘集)을 부관으로 임명해 제물포에서 일본과 회담하도록 하였다. 회담은 일본 군함 히에이(比叡) 함상에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교섭 3일만에 조선측 요구에 의해 대구·함흥 개시(開市)를 삭제하고 공사관 호위병수를 일부 수정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본측 요구대로 6개 조항의 제물포조약을 조인하였다. 이 조약은 임오군란의 뒤처리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 때 조선에서의 상권을 보다 확고히 다져두고자 하는 일본의 요구가 관철되어 제물포조약과 따로 수호조규속약이 체결되었다. 제물포조약은 일본의 야심을 그대로 조문화한 불평등조약이다. 또한 과거 그들이 메이지(明治) 초기에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게 당했던 쓰라림을 그대로 이웃나라에 굴레로 씌우는 조약이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자주국가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개화의 근대화 운동으로도 그 탐욕과 침략을 극복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제물포조약 제1조에서 흉도의 체포를 20일로 기한을 정하고, 만약 그 기일 내에 체포하지 못할 때에는 일본측이 마음대로 처리하겠다고 한 것은 처음부터 조선의 치안주권을 무시하는 규정이다. 제3조에서 그들의 군사비까지 배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적 탐욕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5조에서 공사관 경비를 위해 약간의 병력을 한성에 주둔시킨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1개 대대의 대병력을 진주시켰으며, 병력 주둔에 필요한 병영의 기본 시설과 수선비·유지비까지도 우리에게 부담시켰다.


조약의 내용은 ① 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해 조선국은 흉도를 포획하고 수괴를 가려내 중벌로 다스릴 것, ② 일본국 관리로 피해를 입은 자는 조선국이 융숭한 예로 장사지낼 것, ③ 조선국은 5만원을 지불해 일본국 관리 피해자의 유족 및 부상자에 지급할 것, ④ 흉도의 폭거로 인해 일본국이 받은 손해 및 공사를 호위한 육·해 군비 중에서 50만원을 조선이 부담하며, 매년 10만원씩 지불해 5년에 완납 청산할 것, ⑤ 일본공사관에 병사 약간 명을 두어 경비하게 하며, 병영의 설치·수선은 조선국이 책임을 지고, 만약 조선국의 병·민이 법률을 지킨 지 1년 후에 일본공사가 경비를 필요하지 않다고 인정할 때에는 철병을 해도 무방함, ⑥ 조선국은 대관을 특파하고 국서를 보내어 일본국에 사죄할 것 등이다.


수호조규속약은, 첫째 부산·원산·인천 각 항의 간행이정(間行里程)을 금후 확장해 사방 각 50리(조선리법에 따름.)로 하고, 2년 후를 기해 다시 각 100리로 할 것, 둘째 일본국 공사·영사 및 그 수행원·가족의 조선 내지 여행을 허용하며, 예조에서 여행 지방을 지정하고 증서를 급여하되 지방관은 그것을 대조하고 호송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은 군란 주모자들을 처벌하고, 배상금 55만원 중 우선 15만원을 지불하는 동시에 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김만식(金晩植) 등을 일본에 특파하였다. 일본이 공사관 수비를 구실로 1개 대대의 병력을 한성에 주둔시킨 것은, 조선 문제를 두고 청국·일본의 무력 충돌의 위험을 키워 큰 불안을 자아내게 되었다.


【참고사이트】

1. 제물포조약 당시의 일본군 사진

2. 제물포 조약문 사진


 

 

 

30. 텐진조약(P.69)

 

갑신정변을 계기로 서울에서 개화당 정부를 지원한 일본 공사관의 일본군과 조선 정부를 지원한 청국군의 교전이 일어난 사건은 정변 이후 두 나라 사이에 문제를 야기 시켰으며, 정변이 끝난 후 한성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 공사가 거느리고 온 일본군이 다시 서울에 주둔하게 됨으로써 청·일 양국의 군대가 제3국에서 대치하게 된 상황이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약화된 그들의 세력을 회복하여 청과 균형된 상황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청국과의 외교적 담판이 필요하였다. 당시 청국은 프랑스와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 중이어서 조선 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한 상황임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1885년 2월 18일부터 3월 4일 사이에 6차에 걸친 회담을 거쳐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 사이에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과 청국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실제는 조선과 관련된 문제였으나, 조선의 의사는 일체 고려됨이 없이 두 나라 사이에 일방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 조약의 내용은, 첫째, 두 나라의 군대가 조선에서 동시에 철병하는 것이고, 둘째, 앞으로 조선에 군대를 출동할 필요가 있을 때는 서로 사전에 통보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의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동시에 조선에 출병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일본의 외교적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톈진 조약 이후 청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은 더욱 심해졌으며,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면서 앞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을 위해서 청국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은 청·일 양국의 경쟁적인 경제 침투로 인하여 농촌 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되고 농촌 사회에 현실 문제를 극복하려는 농민들의 의식이 고조되면서 동학 사상이 파급되며, 현실을 적절하게 이끌어 가지 못하는 정부와 양반 계층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갔다. 이에 따라 일본을 위시한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면서 전통 체제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고조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톈진 조약전문>

① 청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하고 일본국은 공사관을 호위하기 위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를 철수한다. 서명 날인한 날로부터 기산하여 4개월을 기한으로 하여 그 이내에 각기 전체를 철수함으로써 양국 간에 분쟁 야기에 대한 우려를 제거한다. 중국군은 마산포로부터, 일본군은 인천항으로부터 철수한다.

② 양국이 함께 승낙한 것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치안을 스스로 지키도록 조선 국왕에게 권하며, 또 조선 국왕에 의하여 다른 외국의 무관 1인이나 혹은 수 인을 선발하여 교련의 일을 위임케 하되 이후 청·일 양국은 무관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교련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③ 장래 조선국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 청·일 양국 혹은 1국이 파병을 요할 때에는 마땅히 우선 상대방 국가에게 문서로 알릴 것이며, 그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철회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31. 거문도사건(P.69)

 

1885년(고종 22)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 거문도는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 한·일간의 해상통로였으며 러시아 동양함대의 길목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청나라와 일본, 구미열강은 동북아시아의 요충지인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러시아는 1884년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대한 진출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아프가니스탄문제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긴장관계에 있던 영국은 1885년 4월 러시아의 점령에 대한 예방조처라는 이유를 내세워 동양함대를 파견,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다. 그 뒤 영국은 거문도에 영국기를 게양하고 요새화 작업에 들어가는 한편 거문도주둔군의 수를 증가하고 3월 3일 청나라와 일본에 거문도점령 사실을 통고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는 4월 6일에야 영국 측의 공식통고를 받았으며, 이에 강력한 항의를 전달하였으나, 사전 해결에 주체적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고 비공식적으로 각국 공사관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점령초 청나라·일본·미국 등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영국의 행위에 동조 또는 방관하는 입장이었으나 그 뒤 사건이 국제문제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은 조선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겸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 또한 8월 2일 영국과 러시아간에 아프가니스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영국은 거문도점령의 명분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이홍장은 주청러시아공사 라디젠스키와 회담하여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한다면 러시아는 조선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영국 측에 전달함으로써 1887년 2월 5일 영국 군대는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는 조선 침투에 제동이 걸린 반면 중개역할을 맡았던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거문도사건은 영국과 러시아 상호간의 정치적 야욕에서 발단된 사건으로 그 시작이나 처리과정이 주권국인 조선 정부를 배제하고 열강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참고사이트】

1. 거문도 조약에 대하여

2. 거문도 조약에 대한 상세자료

3. 거문도 사건 지도


 

 

 

32. 동학농민운동(P.70)

 

1894년(고종 31)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 이 해가 갑오년(甲午年)이라 하여 갑오농민운동 혹은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이 당시 조선은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국제적 질서를 떠받쳐 주는 것으로 알았던 청(淸)나라도 아편전쟁과 난징조약[南京條約(남경조약)]·베이징조약[北京條約(북경조약)] 등 일련의 사태를 거치며 열강의 힘 앞에 무력화되어 갔고 일본 역시 1854년에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한 뒤로는 구체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곧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섰다. 이러한 외세의 강압은 조선의 주변에 더욱 거세게 밀어닥쳐 왔고, 내부적으로도 각종 민란(民亂)이 발생하여 조선 중앙정부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농민운동은 국가의 보위와 농민구제의 성격을 지니면서 폭넓게 전개되었는데, 애초에는 동학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통해 정치운동화 하였다가, 점차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민란과 결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배경]


조선왕조는 후기에 이르러 정치적 부패, 탐관오리의 행패, 세금의 과다한 부과 등으로 농민들은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또한 외국세력의 침투에 따라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게 되었고, 안으로 농촌의 인적(人的) 계층변동에 따라 농민의 사회의식이 급속도로 발전되면서 각종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미 16∼17세기에 임술(壬戌) 임꺽정사(林巨正事;1562년), 정축(丁丑) 장길산사(張吉山事) 등의 민중해방운동(民衆解放運動)이 농민계층의 각성을 촉구한 바 있었고, 고종 대에 와서는 26회에 달하는 민란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농민들은 막연하게나마 외국의 침략행위를 물리치고,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풍조가 싹트게 되었다. 신흥종교인 동학은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급속도로 발전, 단순한 종교적 신앙의 영역을 넘어 농민들의 사상을 뒷받침하고 사회개혁과 외국세력의 배척을 포함한 정치적 세력으로 삼남지방에 급격히 전파되었다. 광범한 계층의 민중을 결집하는 데 성공한 동학은 때마침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전개, 1892년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통문(通文)에 의하여 전라도 삼례도회소(參禮都會所)에 모인 수천 명의 교인들은 동학에 대한 탄압을 반박하였다. 이에 당시 감사가 폭동을 두려워하여 동학교도의 탄압을 금하는 관문(關文)을 발표하자 이에 기세를 올린 교도들은 다시 전국에 통문을 발송하여 중앙정부에 교조신원을 진정할 것을 결의하였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호조참판(戶曹參判) 어윤중(魚允中)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보내 무마하게 하는 동시에 장위영영병관(將衛營領兵官) 홍계훈(洪啓薰)에게 군대를 주어 청주에 진주케 하고 비밀리에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후원을 청하였다. 한편 전라도는 원래 곡창지대로 관리의 토색질이 가장 심했던 곳인데, 당시 고부(古阜) 군수 조병갑(趙秉甲)은 부임하자 만석보(萬石洑)의 수세(水稅)를 비롯하여 황지과세(荒地課稅)·불효(不孝)·불목죄명(不睦罪名)·대동미(大同米)·건비(建碑) 등 부당한 세금을 거둬들여 착복을 일삼았다. 이에 분격한 농민들은 고부군의 동학접주(東學接主) 전봉준(全琫準)을 내세워 1893년 12월과 1894년 1월 등 2차례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농민군의 봉기

동학교도들은 <교조신원운동>의 실패에 불만을 품고 1892년 4월 26일 전국의 교도를 충청도 보은(報恩)에 소집하여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5자를 새긴 깃발을 앞세우고 2만여 명의 군중이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어윤중의 무마로 사태는 수습된 듯하였으나 오히려 이는 정부의 무능을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와 본격적인 봉기로 확대될 소지를 안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따라 1894년 2월 15일 1천여 명의 농민들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삼아 관아를 습격, 세미(稅米)를 민간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의 저수지를 파괴하였다. 안핵사 이용태(李容泰)가 이때 봉기한 농민들을 동학도로 취급하여 탄압하자 다시 분격한 농민들은 4월 하순 <보국민안(輔國民安)>을 부르짖으며 백산(白山)에 진격, 인근의 농민 수천 명을 합세시켰다. 이에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을 장령(將領)으로 삼고 농민군의 규율과 체제를 엄격히 하는 동시에 <불살생(不殺生)> <충효총전(忠孝叢全)·제세안민(濟世安民)> <축멸양왜(逐滅洋倭)·징청성도(澄淸聖道)> <구병입경(驅兵入京)·멸진권탐(滅盡權貪)>의 4대강령을 발표하였다. 이때의 봉기는 동학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농민의 조직은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였고, 그 지도층에는 동학의 교도가 많았다. 농민군은 5월 11일 전주(全州)에서 온 1천여 명의 관군과 보부상군(褓負商軍)을 황토현(黃土峴)에서 격파하고 무장(戊長)·영광(靈光)으로 진격, 군기를 빼앗고 죄인을 석방하는 한편 탐관오리를 추방하였다. 앞서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접한 정부는 5월 6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여 장위영병 약 800명을 해로와 육로를 통해 투입하였다. 그러나 도망자가 속출하여 병력이 반감되자 정부에 증원군의 파견과 함께 청군차용(淸軍借用)도 주청하였다. 고종은 5월 23일 직접 전라도민에게 윤음(綸音)을 내려 불법 지방관의 징계를 약속하고 실제로 민폐가 되는 것은 여론에 따라 시정할 것을 선포하였지만, 동학농민군은 5월 28일 장성(長城)을 떠나 북상하여 31일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런 상황하에서 6월 8일 청의 원군(援軍)이 아산만(牙山灣)에 도착하였고, 뒤이어 일본정부도 톈진조약[天津條約(천진조약)]에 의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내세워 출병을 결정하였다. 한편 6월 4일과 6일의 2차례에 걸친 관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 농민군은 정부측과 강화를 맺고 자진 해산하였는데, 강화 내용은 ①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의 숙청 ③ 횡포한 부호의 처벌 ④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의 처벌 ⑤ 노비문서 소각 ⑥ 천인(賤人)에 대한 대우개선 ⑦ 과부 재가 허락 ⑧ 무명잡세(無名雜稅) 폐지 ⑨ 인재등용과 문벌타파 ⑩ 일본과 밀통하는 자의 엄벌 ⑪ 공사채(公私債)의 면제 ⑫ 토지의 평균 분작(分作) 등이었다. 6월 11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고, 동학농민군은 해산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라도 53군에는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일종의 민정기관이었으며, 동학교도가 각 읍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였고, 폐정개혁(弊政改革)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7월 26일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험악한 정세가 조성되었고, 급기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이 신정권을 세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전봉준은 전주, 손화중은 광주(光州)에서 각각 척왜(斥倭)를 내세워 봉기함으로써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재차 궐기하였다. 10월 말을 전후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11만에 가까웠으나, 정작 공주(公州)로까지 진격한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처음으로 접전을 벌이게 된 것은 11월 27일 목천(木川) 세성산(細城山)의 전투였는데, 여기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사상자 수백 명을 내고 패배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은 공주로 진격하여 우금치(牛金峙)와 이인(利仁)·효포(孝浦)에 진을 쳤다. 전봉준은 공주성 공격을 결행하기 위하여 전주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과 광주지방의 손화중에게 통문을 보내 북상, 내원하도록 요청하였다. 관군은 공주의 공주본영과 계룡산 뒤편인 판치(板峙)와 이천역 등으로 병력을 3진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있었는데, 우선 동학농민군이 판치 방면을 공격하자 관군은 우금치에 있는 일본군 진영으로 후퇴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다시 우금치로 육박하자 이곳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우금치의 공방전은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운명을 건 일대 혈전이었으나, 6∼7일에 걸친 40∼50회의 격전 끝에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에 참패하여 논산(論山)·금구(金溝)·태인(泰仁) 등지로 후퇴하였다. 그 후 순창(淳昌)에서 다시 전력을 정비하던 전봉준은 1894년 12월 30일 관군에게 체포되어,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됨으로써 1년 여에 걸친 동학농민운동은 30∼40만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끝나게 되었다.


의의

동학농민운동의 전개는 당시 지배층의 자력(自力)만에 의한 체제유지가 전혀 불가능하였다는 것을 실증하였는데, 이는 붕괴과정의 봉건체제가 동학농민운동에 의하여 결정적 붕괴의 국면에 마주쳤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아울러 이 동학농민운동은 소농민을 주력으로 하여 상공인·중농·부농이 참여하고 농촌 지식인이 주도한 운동으로서, 폐정개혁안에는 상공업자의 반도매지향(反都買志向), 개항장 상인의 매매세[手越稅(수월세)]·통과세[卜稅(복세)] 반대운동 및 내륙지방 상인의 외국상인 침투 배격 등이 반영되어 있었고, 그들의 이익을 신장·고수·방어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소농민의 경우에는 그들의 영세소농 경제의 파멸 위협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봉건사회 해체의 결정적 계기를 이루는 한편 일본 자본주의에 의한 한국 식민지화(植民地化)의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민족해방의 주체세력으로서의 민중의 민족적 결집의 효시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나아가 동학은 직접적으로든 혹은 일정한 변용(變容)을 거쳐서든간에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바탕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참고사이트】

1. 동학지도자 전봉준의 사진

2.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설명

3. 동학운동 전개 지도

4. 전봉준과 동학운동 영상

5. 농민전쟁 전개지도

6. 백산봉기 기록화

7. 전봉준의 절명시

8. 청군의 진군 그림

9. 동학운동 평론

10. 동학운동 전개과정

11. 동학운동발생 원인에 대한 동영상


 

 

 

32. 전주화약(全州和約)(P.70)

 

1894년(고종 31) 갑오 농민전쟁중 농민군과 정부가 맺은 휴전화약으로 1894년 4월 무장(茂長)의 봉기로부터 시작된 갑오농민전쟁은 이후 전라도 전역과 충청도로 확대되었고, 5월 31일 농민군은 전주를 점령했다.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 지휘하의 정부군은 6월 1일 전주교외에 도착하여 수차례에 걸쳐 전주성을 공격했고, 수일간의 공방전 끝에 쌍방은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에 정부는 청에 원병을 부탁했고, 청나라의 군사파견은 일본군 개입의 구실로 이용되어 6월 9일에는 일본군이 상륙했다. 조선을 무대로 한 국제분쟁의 국면에 처하자 당황한 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에 철병을 요구하는 한편, 농민군을 회유하여 해산을 종용했다. 한편 농민군 내부에서도 전주성 싸움에서의 피해와 청군상륙의 소식으로 두려움이 커졌고, 당시가 보리수확과 모내기 준비에 바쁜 농번기였기 때문에 귀향심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에 전봉준(全琫準)은 6월 7일 홍계훈에게 각종 폐정의 개혁과 탐관오리의 제거를 주장하는 27개조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고 이를 상주(上奏)하여 실시한다면 해산하겠다는 소지(訴志)를 제출했다. 이러한 농민군의 제의는 6월 8일 이후 조정의 논의를 거쳐 받아들여졌고, 6월 11일 휴전화약이 성립됨으로써 제1차 농민전쟁은 종결되었다. 정부를 상대로 개혁의 요구를 관철해낸 전주화약은 농민군의 승리였으며, 이후 농민군은 11월 하순 제2차 농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사실상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각지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을 스스로의 힘으로 시행했다.


【참고사이트】

1. 전주화약의 과정과 의의


 

 

 

33. 교정청(校正廳)(P.70)

 

갑오농민전쟁에서 제기된 농민들의 개혁 요구와 일제의 내정개혁 강요에 의해 1894년(고종 31) 6월 11일 개혁실행을 담당하기 위해 창설된 관청이다. 1894년(고종 31) 6월 6일 내정개혁에 관한 정책입안을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영의정 심순택(沈舜澤) ·중추부영사 신응조(申應朝) ·중추부판사 김홍집(金弘集) 등이 총재관(摠裁官)으로 임명되어 개혁정책을 협의하고 임금에게 품신(稟申)하였다.   교정청을 두게 된 것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요구한 5개조의 내정개혁안을 물리치고 자주적인 내정개혁을 시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개 농민군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는 테두리 내에서 결정된 개혁방안은 다음과 같다. ① 부정부패 관리 처벌, ② 공사채무의 가족 친지에 대한 징수 금지, ③ 지방관의 자기 관할구역 내에서의 토지 매매 및 소유금지, ④ 30년이 지난 채무소송 무효·금지, ⑤ 각 고을 아전들의 철저한 선발과 뇌물수수 금지, ⑥ 권력에 의한 타인의 선산(先山) 탈취 금지, ⑦ 관용 물자의 시가 환산, ⑧ 보부상 이외의 도당(徒黨) 금지, ⑨ 경중 관아의 각종 잡세 신설시 반드시 의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사사로운 세금징수 금지, ⑩ 토지원결 이외의 부가세 및 호세의 부가세 징수 금지, ⑪ 20년 전 이래의 경저리역가미에 대한 부가징수 금지, ⑫ 민고 폐지 등이다.

  그러나, 6월 21일 일본은 왕궁을 포위 ·점령하여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섭정에 앉혀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정부를 수립, 새 정부로 하여금 일본과 내정개혁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6월 25일 내정개혁을 담당하고 추진할 기구로서 교정청 대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고, 오토리[大鳥] 일본공사가 고문이 되어 간섭하였다.


 

 

 

34. 갑오개혁(甲午改革)(P.71)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의 세력을 잃은 일본은 그들의 떨어진 힘과 지위를 만회하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때에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여 그 기세가 험악하게 되자 정부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게 되었으며, 이에 천진조약(=텐진조약)에 의하여 일본도 조선에 파병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에 파병한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강력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청나라의 공동철병 요구를 무시해 버리고 청ㆍ일 공동간섭 하에 조선의 내정개혁을 주장하고, 청나라가 이를 협력하지 않으면 일본 단독으로 진행하겠다고 고집하였다. 그리고 오오토리 게이스케 일본공사는 본국 훈령에 따라서 1894년(고종 31)7월 3일 고종에게 내정개혁방안요령 5개조를 제출하는 한편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물리칠 것을 강요하였다. 청의 위안스카이는 대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본국으로 돌아갔고, 조선조정에는 친일개화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의 정통적인 봉건체제의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양반제도와 청국세력을 축출 및 새로운 개혁추진 기구가 필요하다고 단정하였다.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한 개혁중추기관인 군국기무처를 개설한 것이고, 오오토리 공사가 그 고문이 되었다. 그들의 전쟁 구실이 내정개혁에 있었던 만큼, 개혁사무는 개전과 동시에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군국기무처가 가장 먼저 의결하고 실시한 것은 관제의 개혁으로, 궁중과 부중을 분리시켜 의정부와 궁내부의 2부를 두고, 의정부 밑에 내무ㆍ외무ㆍ탁지ㆍ군무ㆍ법무ㆍ학문ㆍ공무ㆍ농상무의 8아문과 부속기관인 군국기무처ㆍ도찰원ㆍ중추원ㆍ의금사ㆍ회계심사원ㆍ경무청을 두고 궁내부 밑에는 왕실의 사무를 분담하는 여러 기관을 두었으며, 의정부 장관을 총리대신, 궁내부와 8아문의 장관을 대신이라 불렀다. 이러한 개혁은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으나, 전 국민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는 두려움과 불신이 앞섰기 때문에 실행은 곤란하였다. 그러므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안건은 한번도 실행해보지 못한 채로 완전히 없어진 것도 많았다. 그러면서 청ㆍ일 전쟁이 차차 일본측에 유리해지고 조선 문제가 중요성을 띠게 되자. 일본은 내정고문을 오오토리 대신 이노우에 가오루로 교체하였다. 이노우에는 같은 해 10월에 동학당을 선동하며 청나라와 기맥을 통한다는 구실로 대원군을 몰아내고, 12월에는 갑신정변 이래 일본에 망명하였던 박영효ㆍ서광법을 귀국하게 하여 이들을 입각시켜 정부의 친일적 성격을 더 강화하는 한편,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홍범14조를 만들어 내정개혁을 꾀하였다.


갑오개혁은 조선의 제도ㆍ경제ㆍ사회면에 걸친 대개혁으로 조선의 궁실이나 사회제도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일본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일본의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가 보다 적극성을 띠고 침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사이트】

1. 갑오개혁에 대하여

2. 갑오개혁 이후 경찰복 비교사진


 

 

 

35.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P.70)

 

청 ·일전쟁 때 관제를 개혁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했던 관청으로서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중추적 역할을 한 기관으로, 정치 ·군사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난 후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은 1894년(고종 31) 6월 1일 주한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를 통하여 내정개혁안 5개조를 제시하고 이를 시한부로 시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고종은 이를 거부하고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여 자주적인 내정개혁을 시도하였다. 이에 일본공사는 6월 21일 1개 연대 이상의 일본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포위하고 고종을 협박하였으므로, 마침내 내정개혁을 의결하는 기관으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다.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이 총재관(摠裁官)을 겸하고, 의원에는 박정양(朴定陽)·민영달(閔泳達)·김종한(金宗漢)·김윤식(金允植)·조희연(趙羲淵)·이윤용(李允用) ·김가진(金嘉鎭)·정경원(鄭敬源)·유길준(兪吉濬)·김하영(金夏英) 등 17명을 임명하였으며, 그 밑에 서기 2명을 두었다. 이 기구는 먼저 중앙관제를 개혁하여 크게 궁내부(宮內府)와 의정부로 나누고, 의정부 밑에 내무 ·외무 ·탁지 ·법무 ·학무 ·공무 ·농상의 8아문을 설치하고, 의정부에는 총리대신을 두어 행정수반으로 삼았으며, 궁내부와 각 아문의 장관을 대신, 차관을 협판(協辨)이라 하였다. 모든 관제와 지방행정을 비롯한 행정 ·사법에 관한 모든 규칙 ·교육 ·군정(軍政) ·재정 ·식산흥업 및 상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무를 심의하였으며, 모든 정무는 그 심의를 거쳐야 하였기 때문에 왕권이나 정부의 권력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밖에 청과의 조약은 일체 폐기하고, 종래의 중국기년(中國紀年)을 바꾸어 개국기년을 사용하였다. 또한 문벌 ·반상(班常) ·노비를 없애고, 조혼을 금하며, 여권의 신장, 과거제와 연좌제(連坐制) 폐지 등, 6월 26일부터 시작하여 12월에 폐지될 때까지 많은 부문의 개혁을 심의하였으며, 발족 초기 3개월 간 의결된 법안만 하여도 208건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때 개혁한 중앙관제는 1895년과 1896년에 거듭 변경하였다.


【참고사이트】

1. 군국기무처 그림


 

 

 

36. 홍범 14조 [洪範十四條](P.71)

 

1895년(고종 32) 1월 제정·발표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헌법 성격의 문서로 공식적으로 한국에 대한 청(淸)의 종주권을 부인하며 자주독립국임을 내외에 공포하고 근대적 개혁을 총괄하여 성문화한 의미가 있으나, 일본의 간섭과 의도하에 작성되어 완전한 자주적 개혁으로 볼 수는 없다.


1894년 제1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 의한 갑오개혁은 흥선대원군과 민비척족 간의 대립,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 등으로 정체되어 있었고, 정국은 위기상태였다. 이때 일본은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주한 일본공사로 파견하여 그들이 원하는 내정개혁을 강하게 추진하고자 했다. 그해 11월 이노우에는 '내정개혁강령 20조'를 고종에게 제시하고 실시를 요구했고 12월 17일 성립된 김홍집·박영효(朴泳孝)의 친일연립내각은 이노우에 개혁안을 일본인 고문관들의 간섭 하에 손질하여 홍범14조를 제정했다. 그후 1895년 1월 7일 고종이 왕족 및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아가 독립서고문(獨立誓告文)과 홍범14조를 선포했다. 홍범14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청에 의존하는 관념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확실히 건립한다. ② 왕실전범을 제정함으로써 대위(大位) 계승과 종친·척족의 명분과 의리를 명백히 한다. ③ 대군주는 정전(正殿)에 나와 정사를 보고, 국정은 각 대신과 친히 논의하여 재결하며, 후빈종척(后嬪宗戚)의 간여를 금한다. ④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는 분리하여 혼합됨을 금한다. ⑤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권한을 명백히 한다. ⑥ 민의 조세는 모두 법령이 정한 바에 따르며, 명목을 더해 함부로 징수하는 것을 금한다. ⑦ 조세의 부과 징수와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에서 관할한다. ⑧ 왕실비용을 솔선 절감하고 각 아문·지방관의 모범이 된다. ⑨ 왕실비·관부비용은 연간예산을 작성하고 재정적 기초를 확립한다. ⑩ 지방관제를 개정하고 지방관리의 직권을 한정한다. ⑪ 나라 내의 총명한 자제들을 널리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기예를 견습한다. ⑫ 장관(將官)을 교육하고 징병법을 실시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립한다. ⑬ 민법·형법을 엄히 제정하여 함부로 감금·징벌을 금지하며 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 ⑭ 인재를 구함에 문벌·지벌에 구애받지 않고, 널리 골고루 등용한다.


이어 1월 14일 고종은 사직단에 나아가 이를 봉고(奉告)하고 순한문·순국문·국한문혼용의 3가지 문체로 작성하여 전국에 선포했다. 이후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칭하고 제도개혁을 추진했으나, 정부 내의 재정궁핍, 내각 내 온건·급진 개화파 간의 갈등으로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 1895년 3월 일본 정부와 제일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어 다시 개혁안을 4월 1일부터 시행하여 5월 26일 지방제도 개정까지 끝마침으로써 제2차 갑오개혁이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참고사이트】

1. 홍범14조에 대한 신문자료

2. 김홍집에 대하여


 

 

 

37. 시모노세키 조약(P.71)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하관)]에서 청(淸)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강화조약. 청일전쟁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일본에 대해 청나라는 구미열강의 알선에 의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일본이 거부하자,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을 강화사절 전권위원으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일본측 전권위원은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 외무장관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육오종광)]였다. 청나라측은 휴전조약을 우선 체결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일본 측이 응하지 않고 강화조건을 제시하자 이홍장은 난색을 표했다. 숙소 근처에서 이홍장이 저격되어 부상당한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측은 구미열강의 비난이 두려워 이홍장의 요구대로 휴전조약을 먼저 체결하였고, 잇따라 11개조로 된 청일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청나라는 ① 조선이 독립국임을 승인하고 ② 랴오둥반도[遼東半島(요동반도)]·펑후도[澎湖島(팽호도)]·타이완을 할양하며 ③ 2억냥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④ 청나라 내의 쑤저우[蘇州(소주)]·항저우[杭州(항주)]·충칭[重慶(중경)]·사스[沙市(사시)]를 개시(開市)하며, 개시·개항지에서 일본인의 상공업활동을 승인하고 ⑤ 청·일 통상항해조약을 새로이 구미열강과 같은 조건으로 맺고, 일본의 치외법권, 편무적 협정관세율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조인 직후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이른바 3국간섭이 시작되자,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였다. 강화조약의 비준서교환은 청나라 측의 연기 요청을 거부하고 5월 8일 즈푸에서 이루어졌다.


【참고사이트】

1.  시모노세키 조약사진


 

 

38. 을미사변(乙未事變)(P.72)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갑오개혁을 통하여 깊숙이 조선 내정에 간여하게 된 일본은 청, 일 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 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 확장에 제 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 력의 완전 제거를 위하여, 1895년 9월 6일 왕비시해 음모혐의로 전 내무대신 박영효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 정계 에서 축출하였다. 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 (魚允中)˙ 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 집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 를 구제도로 복구하려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 는 명성황후시해계획을 세우고, 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 하고자 사장 아다치[安達]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 (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 (安?壽)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 무장해제,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 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 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 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 어났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곧 새로 유길준(兪吉濬)˙서광 범(徐光範)˙정병하(鄭秉夏)˙김종한˙권형진(權瀅鎭)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다. 명성 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 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 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 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어,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에 차 질을 가져왔다.


【참고사이트】

1. 을미사변에 대하여

2. 을미사변의 진행과정

3. 을미사변 주모자 후손의 사죄기사

4. 을미사변에 대하여

5. 을미사변 드라마 동영상(명성왕후中)

6. 을미사변 뉴스보도

7. 명성황후의 사진논란


 

 

39. 을미개혁(P.72)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직후 성립한 김홍집(金弘集)내각이 실시한 일련의 개혁운동으로, 청일전쟁 후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이 러시아 중심의 삼국간섭으로 일시 후퇴하자, 고종은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에 접근,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정부가 러시아와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 뒤, 친일개화파로 새로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키고 을미사변으로 일시 중단된 갑오개혁을 다시 추진하였다. 즉, 을미개혁은 1894년 7월에서 1896년 2월 초까지 약 19개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실시된 갑오개혁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태양력의 사용, 군제·교육제도 등의 개혁과 함께 단발령을 실시하였다. 특히 1896년 1월 공포, 강제 실시한 단발령은 을미사변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일어난 유생들의 반일·반근대 의병의 원인이 되었다. 을미개혁은 일본에 의존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반일분위기가 만연하였으므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참고사이트】

1. 을미개혁에 대하여

2. 을미개혁과 의병 동영상